박윤선 목사의 생애

2021.07.18 22:13

김반석 조회 수:

선지자선교회

박윤선 목사의 생애

 

정암 박윤선 목사 자서전(1905-1988)

성경과 나의 생애

199210111, 동년 1152

영음사, 260페이지

 

박윤선 목사님의 자서전은 안 나옵니까?” “자서전은 안쓰세요?” 어느날, “어디 좀 정리해 볼 수 있겠나.” 하시면서 얄팍한 원고 뭉치를 넘겨 주셨읍니다. “성경과 나의 생애.” 드디어 쓰셨구나 생각하면서 받아보았더니, 그것은 1979(75)까지의 생애를 아주 간략하게 담은 글이었읍니다.

 

1987427, 박목사님의 성역 50 을 기념하여 남서울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후에 기념 논총(경건과 학문)을 받으신 박 목사님은 진솔한 두어 마디로 답사를 대신하셨읍니다.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지 며칠 후 박 목사님의 말씀이, “이제는 천국에 갈 일만 남았구나...” 하셨는데, 이듬해 6월에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는 평북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부터 시작하여 사서 오경을 다 마쳤고 논어와 맹자는 그 주해까지 다 외웠다. 대동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에서 한학기를 편입하여 지낸 후 교장배척 데모로 인한 휴교로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독교학교 선천 신성중학을 졸업하였다.

 

이무렵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신앙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나는 학교 가까이 수청고개 밑에 있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나의 심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자문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즉시로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같이 솟아오른 것은,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니라하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 때에 놀랄 정도로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때에는 성경 주석도 별로 없었고, 신학 서적들도 우리말로 발행된 것이 아직 없었다. 나는 기도와 전도의 은혜를 받아 열심히 나가는 가운데 4학년 때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내 일생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때도 나는 자유주의를 배척하는 성경관을 가졌던 것이 기억난다. 어느 주일에 숭전 선배가 가현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였는데, 그가 성령의 불을 해석하면서 그것은 신자의 열심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한번은 어떤 설교자가 영생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자손손 계대(繼代)해 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이런 해석도 배척하였다.

 

위의 두 가지 잘못된 말을 보더라도 이미 그 시대에 한국 교계 설교자들 가운데 자유주의 또는 인본주의 사상이 침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길선주 목사는 사경회 인도자라기보다는 부흥가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말하는 스타일로 보아서 그렇다. 어느 날 그가 숭전 경건회 시간에 오셔서 설교하셨는데, 그의 말한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 그가 어떤 교회에서 설교하면서 회중을 향하여 이 망할 놈들아!” 하고 꾸짖었다는 것이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부흥가가 이런 식으로 회중을 깨우쳤으니, 성경을 성경신학적으로 풀이한 설교를 들어보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 시대를 계몽시대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314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신학을 배우는 3년 동안 숭실중학교 사감으로 일하였다.

 

1학년 재학중에 나의 부친께서 별세하셨다. 형님과 내가 부친 제사를 반대했으므로 어머니는 몹시 원통한 마음으로 땅을 치며 아들들을 헛키웠다고 통곡하셨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한국 초대의 중진 선교사였다. 내가 입학한 그 해에는 그가 소요리문답을 가르치셨다.

 

교장 라부열 박사는 그의 저서 사복음 대조 기술을 교재로 사용하여 1학년 학생들을 가르치셨다. 그가 명확한 한국말로 강의할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종종 신학생들에게 말하기를, “교역자는 재지(才智)가 부족해도 진실하면 되지요라고 하였다. 그가 서재에 많은 책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의 서책 중에서 뉴월(Newell)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빌려간 적도 있었다.

 

조직신학 교수 이율서 박사는 고아하고 성스러운 인격자였다. 그는 미국 선교사이면서도 능숙한 한국말로 강의하였는데, 그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때로는 어떤 수도사 앞에서 설교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조직신학 교재는 중국어로 번역된 챨스 핫지(Charles Hodge)의 조직신학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한 단편적인 것이었다. 그의 교수 방법은 비판에 의해 진리를 확신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통 교리를 보수하며 전달하려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어도만 박사는 주로 주경신학을 맡아 구약을 가르치셨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그에게서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숭전재학시 초청강의시 그가 강의하는 도중에 한 학생이 조금 불손한 태도로 그의 잘못을 지적하니, 그는 즉시 부드러운 어조로, “잘못했습니다. 사과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에 그가 변명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거두 절미하고 사과한 것이다. 후일에 내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재학 중에 어도만 박사의 댁을 방문한 일이 두어차례 있었다.

 

업아력 교수는 카나다 선교사로 교회사를 가르치셨다. 한번은 내가 불건전한 신비주의운동에 대하여 그의 의견을 물었더니, 그는 그런 일이 사단의 운동(광명의 천사로 가장)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고린도후서 1113-15절의 말씀을 읽으라고 대답해 주셨다.

 

곽안련 교수는 실천신학을 담당하시고, 설교학, 목회학, 종교교육 등 여러 과목을 가르치셨다.

 

왕길지 선교사는 호주에서 오신분인데, 성경원어교수였다. 솔직하기로는 거의 수학적이었고 책임감이 강하신 인격자였다. 그의 교수 방법은 매우 엄격하였다.

 

남궁혁 박사(1882-1950, 서울)는 신약교수였다. 6.25 때 인민군에 납치되어 가셨는데 그는 본국인 교수로는 제일 먼저 부임하신 분이다.

 

이성휘 박사(1889-1950, 평북 철산)는 구약교수였다. 평양 서문밖교회의 동사목사(협동목사)로도 봉사하였다. 공산당의 박해로 순교하였다.

 

박형룡 박사(1897-1978, 평북 벽동)는 나의 1학년 시절부터 교수하기 시작하셨다. 변증학 방면의 여러 과목들을 담당하셨다. 박 박사께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나를 소개해 주셨다.

 

당시 농촌 교회의 실정은 교역자 한 분이 너더댓 교회를 맡아 사역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재학중에 어학(영어, 독일어) 공부도 힘썼는데, 언제나 독일어 문법책을 손에 들고 다녔던 것이 생각난다. 이처럼 어학에 치중했던 것이 후일 성경 주석 저술에 유익한 결과가 되었다. 이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생각하여 감사하는 바이다.

 

나의 재학 당시 학생들의 숫자는 일백 명 내외로 생각되며, 거의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누구든지 한두 교시라도 결석할 경우에는 교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보통으로는 신학을 공부하다가 한 학기 정도는 쉬면서 교회로 돌아가 목회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학생들은 졸업하기까지 5 년 혹은 6,7년 걸리기도 했는데, 이 같은 신학 교육 방법이 유익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목회하면서 신학 훈련을 받고 목사가 된 그들은 유력한 일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는 사명감 없는 사람은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일 사명감 없는 사람들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주님의 교회를 맡게 되는 떼에, 직업목사들(종교업자들)이 많아지는 동시에 교계는 갈수록 혼란스러워지고 부패질 수밖에 없다.

 

그 당시 재학생 몇 명(김진홍, 방지일, 필자)이 힘을 합하여 겨자씨라는 신앙지를 출판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잊을 수 없는 한 분이 있으니, 김린서(金麟瑞)장로(후에 목사, 1894-1964, 함남)이다. 부흥가이기도 한 그는 단독으로 신앙생활이란 신앙지를 출판하면서 진리를 파수하며, 교회의 세속화(世俗化)를 방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던 특수한 지도자였다.

 

구세군영 예배실에 들어가 철야 기도를 하고, 이튼날 미 대사관 영사과로 찾아가 비자 신청을 하였다. 인터뷰 시간에 영사가 나에게 묻기를, “이 재정 보증인이 약속대로 실행할까요?”하며 나를 보았다. 이 때 나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대답하기를, “선생님이 더 잘 아십니다.” 하였더니 영사는 씽긋 웃으며 나의 여권에 사증(visa)을 꽉 찍어 주었다.

 

태평양을 건너는데 17일이 소요된다고 하므로 나는 그 기간을 유익하게 사용하고자 요한계시록을 암송하기로 작정하였다. 쌘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에는 18장까지 암송한 것으로 기억된다. 거기서 다시 그레이하운드 버스로 동쪽에 있는 필라델피아까지 한 주간을 달렸는데, 이 때에도 이미 암송한 부분을 계속 외우면서 갔다. 계시록의 나머지 부분(19-22)은 학교에 다닐 때 아침마다 외워서 다 마쳤다.

 

필라델피아 한가운데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현재는 교외에 있음)에 도착하니 한국인은 한 사람도 없었고, 그 학교를 졸업한 김치선 박사(1899-1968, 함남 흥남, 일본 여러 곳과 서울 목회, 1960년대 초 합동서 나온 현 예장(대신)인 성경장로회 총회장)는 텍삭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로 떠나간 후였다.

 

여름 방학 약 3개월 동안 학생들의 대부분이 학비를 벌기 위해 성경책 판매원이 되어 미국 각처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탄복하였다. 고향의 가족 소식을 받아 보면 봉투에 찍힌 소인이 약 두 달 전의 날짜였다. 개학해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주말에 교회의 초청을 받아 나가서 설교도 하였다.

 

어느 날 나의 실수로 미화 10불을 분실하고 그것 때문에 몇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바로 깨달은 것은, 내가 돈을 잃고는 괴로워하면서도 영적 손해(믿음이 약해지거나 사랑을 못가진 경우)에 대하여는 괴로워할 줄 몰랐던 나 자신의 우매함이었다. 그 후 나는 그 돈에 대한 생각을 다시는 하지 않았다.

 

나느 유학중에도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모친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시게 되기를 위해 계속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기도는 응답되어서 모친은 에수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성경을 사모하여 그 때부터 한글을 배워서 신구약을 일독하셨다고 한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어머니는 붓글씨로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을 써서(책에 수록) 미국에 있는 나에게 보내주셨다. 나는 그 글을 받고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그 때의 감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있는 동안 틈틈히 화란어를 자습하였다.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두 사람이(카이퍼, 바빙크) 화란 사람이니, 열심히 노력한 결과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약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368월에 귀국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성경 원어 강사로 약 2년간 일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평양의 유일한 여자 성경학교였던 고등성경학교에 시간강사로 나가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후에 나는 원어학과 변증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19388월에 웨스트민스터로 다시 갔다. 그 곳에 1년여 머물면서 뱀틸(C. Van Til)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변증학을 연구하였다. 193910월에 동경에 가서 머물다 다음해 3월에 귀국하였다.

 

이 해에 나는 봉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3년 나는 만주신학교를 사임하고 약 이백 리 거리인 안산으로 내려가 성경 주석 저술에 몰두하고 있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19466월 진해에서 60여의 수강생을 두고 신학 강좌 후 920일에 고려신학교란 명칭으로 부산에서 개교하였다. 설립자는 주남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인데, 이들은 출옥성도이다. 한상동 목사께서 목회학 교수로 수고하였고 한명동, 이상근, 박손혁 목사 세 분은 강사로 협력하였다.

 

어려운 이 시점에 미국 선교사 네분이 가담하여 신학교 강의를 시작한 일은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 한부선 선교사는 한국과 만주에서 선교활동 중 신사참배 문제로 투옥되었다가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마두원, 최의손, 함일돈 선교사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세분은 강사로 협력했고, 한부선 선교사는 교수로서 여러 방면으로 협력하였다.

 

개교 2년 후에 이상근 목사(대구의 신약주석을 쓴 이상근 목사와 동명이인)와 김진홍(요사이 유명한 김진홍 목사와 동명이인) 목사께서 교수로 취임하여 이 목사는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김목사는 구약학,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말씀운동을 힘쓰고 있었던 고려측에서는 박태선운동을 처음부터 외면하였다.

 

1950, 6.25동란이 발발하기 전에 고려신학교에는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학교측에서도 강의를 전폐하고 학생들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협력하였다. 이 기도운동이 고려고등성경학교(부산 부민동 소재)에서도 일어났고, 점점 퍼져 고려측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한국 땅에 환난이 이르기 전에 이처럼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대비하도록 하신 귀한 섭리였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 후 두어 달 지나서 6.25동란이 일어났고, 국군의 후퇴 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각지에서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광복동의 고신 교사도 한동안 피난교역자들의 수용소가 되었고, 초량교회당도 피난교역자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다. 특히 최의손 선교사와 함께 포로수용소를 찾아 다니며 설교를 많이 하였다.

 

특별히 그 해 9.28 수복이 있기 전에 초량교회당에서 열렸던 피난교역자 부흥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강사로는 박형룡 목사, 김치선 목사, 그리고 나도 함께 협력하도록 되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 기도회와 낮 성경공부, 그리고 저녘 집회를 인도하였다.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던 이들도 점차 가담하게 되었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으로 기억되는데, 그 시간에 참석한 교역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하였다. 그 뼈아픈 회개는, 각자가 과거 일제의 핍박시에 신사참배를 한 그 죄로 인한 것이었다.

 

한부선 선교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1939년 봉천노회가 나(한부선)에게서 당회장권을 회수하려는 이유가 비진리와 타협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다. 나는 더 이상 그런 노회와 함께 일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였으므로 노회 명부에서 나의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 봄노회 때 나의 이름이 삭제되었다.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기는 커녕 그 결의를 더욱 확고히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관계하던 하얼빈교회 앞에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종교법을 반대한 일로 인하여 노회와 갈라졌으며, 또 나는 신사참배를 반대하기 때문에 조선 예수교장로회와 갈라집니다.” 하여 나의 신앙 입장을 밝혔던 것이다.

 

나도 단 한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 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고백하였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울산, 온산에서 집회를 열게 되었다. 그 곳은 전선(戰線)이 가까운 지역이므로(당시 낙동강 북방에서 격전 중이었으므로) 인심은 더욱 긴장되어 있었다. 그 집회에서도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그 당시 제주도에도 무수한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다. 나는 한상동 이학인 두 목사와 함께 제주도로 내려가 서부교회당에서 피난민교역자들을 위한 집회를 한 주간 인도하였다. 이 집회에서도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UN)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은 삼팔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된 사실이다. 회개의 사건에 뒤이어서 승전한 것은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도와주신 결과이다.

 

나는 신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195310월에 화란 자유대학으로 갔다. 그 곳에서 유학하던 중 543월에 나는 뜻밖의 비보를 받고 즉시 귀국하였다. 내 나이 49세 때 미성년 5남매를 두고 아내(金英善)가 교통 사고로 별세한 것이다. 가정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해졌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근근이 6 개월을 지내고 가정을 다시 세워 나가기 위하여 그 해 10월에 현재 내조하고 있는 아내(李和主)와 재혼하였다. 때로는 펜을 들 수 없을 만큼 심적 고통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런 때에도 집필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게 되었던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생각한다.

 

1960. 성수주일(聖守主日)에 대한 의견 차이로 말미암아 나는 고신 그 당시 이사회의 요구에 응할 수 없었으므로 그 해 가을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고신에 몸담고 있었던 동안에 탈고한 성경주석은 25권이다.

 

[출처] 박윤선 목사의 생애 (인보라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