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1. 아세아연합신학대학의 박응규 교수가 집필한 “한부선 평전”입니다.

2. 필독서로 강력히 추천합니다.


■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 「한부선 선교사 평전」
  
박응규 지음/그리심

이 책은 미국인이면서도 한국인의 심성을 소유했고, 미국 장로교 선교사면서도 한국인의 입장에서 삶을 지탱해 나갔던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의 평전이다. 480여쪽의 본서는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한부선의 성장배경, 제2부는 한부선의 해방 이전 선교사역, 그리고 제3부는 한부선의 해방 후 교회개혁운동이다.

저자 박응규 교수는 ‘여는 말’에서 “한부선이 이 땅에서의 삶의 여정을 마친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나갔다. 그가 한국의 역사적인 비극 가운데 이 땅에 태어난 지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우리는 한부선이라는 한 인간이 한국과 미국이라는 거리를 복음으로 뛰어넘어 가장 성경적인 신앙을 추구해 나갈 때, 한국 민족과 교회를 위한 가장 귀한 열매가 맺어지리라 확신했다. 그래서 한부선을 '가장 한국적인 미국 선교사'라고 지칭해도 무리가 없으리라 믿는다”라고 말하면서 본서 저술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필자는 본서가 일차적으로 한국교회에서의 개신교 선교사(宣敎史)와 복음 수용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며, 동시에 한부선 선교사의 헌신적 생애가 한국교회와 성도에게 주는 소중한 통찰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이 책은 원사료(原史料)에 충실한 저작이다. 저자는 프린스톤 신학교, 정통장로교회 선교부,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도서관의 ‘한부선 선교사’ 관련 1차 자료를 철저하게 조사했고, 휘튼대학교 빌리 그레이엄 센터 선교자료실에 소장되어 있는 한부선 선교사 인터뷰 테이프와 원고도 1차 자료로 사용하였다. 1차 자료를 통해 그의 사역과 활동 내용뿐만 아니라 선교관과 신학사상까지도 추적하고 있다.

한부선은 선교사로서 그리고 전도자로서 평생을 사역에 임한 인물이다. 특히 그는 네비우스 선교원리를 받아들였다. 한부선은 소년 시절부터 네비우스의 원리에 기초한 그의 아버지의 선교 사역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한국에 처음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지 17년 만에 한국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교회가 원기왕성하게 자치 자립 기관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했다.

한국교회는 초기에 효과적인 선교 정책을 조속히 개발하여 실시하기 위해 1890년 6월 중국 지푸에 있는 선교사 죤 네비우스 (John L. Nevius)부부를 초청하여 선교원칙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도한 사람을 책임지고 그가 전도자가 될 때까지 계속 양육해야 한다. 둘째, 교회운영과 기구조직은 자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조직한다. 셋째, 교회의 지도자가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하여 교회의 일꾼으로 세운다. 넷째, 예배당 건축은 자력으로 하게 하고 건물 구조나 양식도 선교지 고유의 양식으로 하게 한다.

이상의 선교정책을 클라크(Charles Allen Clark)는 자력전도, 자치제도, 자급운영 등으로 요약하였다. 이 정책의 중심 이념은 피선교지 교회가 외국인 선교사를 의지하여 허약하고 무능력한 교회로 키워지는 것을 방지하고, 자립적으로 발전해가는 능력 있는 교회, 어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강인한 체질의 교회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데 주목적을 두고 있었다.

한부선은 또한 사경회를 매우 중요시하였다(170쪽). 그는 모든 신자는 학습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교육자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성경중심적인 신앙을 토대로 한 전도활동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 저자에 따르면 한부선의 사역은 1932년 9월 27일 선교사 방위량(윌리암 불레어)의 딸인 한가태(캐더린 블레어 헌트)와 결혼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한부선은 한국인보다 한국말을 더 잘 하는 선교사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 어린이들과 놀면서 한국말을 배웠기 때문이다(64쪽). 그는 또한 그의 나이 열 여섯이던 1919년에,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역사적인 삼일 독립운동의 행진을 목격하였다.

그는 친구와 함께 나무에 올라 몰래 만든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을 목격하였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한부선의 십대 청소년기에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겼다.

둘째로, 저자는 한부선의 선교사역과 그 배경이 되는 신학적 입장을 소개하고 있다. 한부선의 첫 선교지는 청주였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청주는 유교의 영향이 대단히 강했으며 그 영향으로 기독교성장이 매우 느렸다.

그래서 청주가 다른 지역만큼 유명세가 있는 선교 지역은 아니었다. 청주에서 사역을 하면서 한부선은 한국인들의 가난에 대해 처절한 인상을 받았다. 한부선은 돼지와 토끼 그리고 닭을 사육하였고, 또한 농협을 조직하는 일도 도와주었다.

한편 한부선은 청주에서 “선교사역 초기에 전인적인 삶을 도와주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영적 생명이 없이 단지 물질적인 향상만을 도모하는 것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87쪽). 그는 한국 농촌운동의 현실적인 목적과 필요성에 공감하고 그 현실적인 실현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을 선행하는 선교사역의 가치를 절감했다.

한부선은 한국교회가 위기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과 신념에 일관성 있는 삶과 사역을 전개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에도 적극적으로 맞섰으며, 해방 이후의 교회재건에서도 장로교의 정체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앙고백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한국과 만주에서 사역하면서 그가 가장 철저하게 지켜나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전통, 즉 개혁신학(Reformed faith)을 파급해 나가고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믿기로는 이 신학전통이 가장 성경적인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서 매우 필요한 신학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었다(468쪽).

본서는 일제 치하의 숱한 고난 속에서도 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의연히 추구해나갔던 한부선 선교사의 의로운 투쟁의 모습들을 담았다. 한부선은 성경적 신앙에 도전하는 세력을 강하게 질책하였다. 혹자는 그가 한국교회에 분열을 도모한 선교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저자에 의하면, “한부선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한국교회가 반드시 재고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통해 울린 경종은 여전히 우리 귓가에 울려야 한다. 홍치모 교수는 “한부선 평전의 출판은 박 교수 자신의 쾌거요 영광일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아름답게 장식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고 했다.

저자 박응규 교수는 총신대학교 신학과(B.A.)를 졸업하였고, 도미하여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9년부터 현재까지 아세아 연합신학대학교에서 교회사와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송광택 교수 한국교회독서문화연구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