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신학

2007.05.3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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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반석     번호 : 27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6/02/05 (일) PM 04:05:26     조회 : 124  

■ 자유주의 신학 - 김효성 목사님


<제목차례>

자유주의 신학자들

칼 바르트(Karl Barth)의 이단 사상 2
씨 에취 다드(C. H. Dodd)의 이단 사상 5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이단 사상 7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이단 사상 8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이단 사상 11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의 이단 사상 16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이단 사상 19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이단 사상 21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이단 사상 24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이단 사상 26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이단 사상 28
머서(Mercer) 대학교수 폴 듀크(Paul Duke)의 불신앙 44
머서(Mercer) 대학교 총장의 불신앙 49
시실 셔만(Cecil Sherman)의 자유주의 사상 55

해든(Jeffrey Hadden)의 설문 조사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의 설문 조사에 나타난 배교적 증거 30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결론들 30
로버트 펑크(Robert Funk)와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결론들 45

미국연합감리교회(UMC)

240명의 감리교 목사들의 서명 39
감리교회 자유주의자인 레슬리 웨더헤드(Leslie Weatherhead) 55
감리교회의 멜빈 탤버트(Melvin Talbert) 감독이 회개를 무시함 56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CC)
자유주의적 미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41
교회들이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단(UCC)을 떠남 55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루터파 자유주의 신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 44
자유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 47
루터파 교수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의 불신앙 51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에 대한 한 비판 54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도로시 죌러(Dorothee Soelle)의 책을 출판함 57

미국남침례교회(SBC)

노엘 홀리필드(Noel W. Hollyfield)의 신학석사 논문 32
미국 남침례교단과 침례교 세계 연맹(BWA) 37
남 침례교단과 협력 침례교 협회(Cooperative Baptist Fellowship) 43
협동 침례교 협의회(CBF) 40
미국 남침례교회의 변질의 예 48
클라크 피나크(Clark Pinnock)는 배교자 49
침례교회 세계연맹과 카스트로 51
미국 남침례교단의 자유주의자들 52
21세기에 성경을 위한 싸움(Battle for the Bible in the 21th Century) 56

캐나다연합교회(UCC)

캐나다 연합 교회의 자유주의 목사들 38
캐나다 연합 교회의 자유주의 목사들(계속) 38

성공회(영국교회)

지옥에 대한 영국교회(성공회)의 견해 37
지옥은 장소가 아닌가? 49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죠지 캐리(George Carey)의 불신앙 50
감독교회의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감독의 무신론 39
스퐁 주교는 신성모독적 불신앙자 43
은퇴하는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주교 48
죤 스퐁(John Spong)은 '무신론자' 50

로버트 슐러

로버트 슐러, 통일교와 몰몬교와 연관 42
로버트 슐러를 조심하라 42
로버트 슐러의 문제 45

기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40
자유주의적 '전도' 41
'중성'(中性) 성경 번역에 대해 44
미국 하버드(Harvard) 대학교의 잘못된 정신 45
'위대한' 설교자들 목록 47
마틴 루터 킹은 참된 신앙인이었는가? 47
미국 장로교인들은 계속 미국 교회협의회(NCC)를 지원함 51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 32
박대선 감독의 불신앙적 신앙 사상 34
김경수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 34
예장 통합측 교단은 건전한가? 35
안병무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예수교인? 52
이종성 박사의 불신앙적 성경관 54


■ 자유주의 신학자들

칼 바르트(Karl Barth)의 이단 사상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고 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직관적,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신화 혹은 전설과 비슷한 개념이다.]

아담의 타락을 사가(saga)라고 한다.

"그 첫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을 신화라고 한다.

(로마서 1:3, 4의 해설) "우리의 세계가 예수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은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그는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은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 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

"하나님의 '예'(용납하심)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말하였다.

성경이 윤리의 객관적 규범임을 부정한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內在)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

씨 에취 다드(C. H. Dodd)의 이단 사상

성경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바울이 했다는 설교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나 다른 이들이 했다는 설교들은 사도행전 저자의 자유로운 작품일지 모른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이다".

"비록 우리는 아마 디모데전서를 진짜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지만. . . .".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 기록보다 하나의 해석, 즉 새로운 대중을 위한 하나의 해석을 의도했다".

"그렇다면 그[가나의 기적] 이야기는 액면 그대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의 참된 의미는 더 깊은 데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더 깊은 의미에 대한 아무런 직접적 단서를 갖고 있지 못하다".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의] 외적 권위는 엄밀한 의미에서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문자적 의미에서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다. . . . 그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로마서의 저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바울이다. . . .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가 아니고, 성경의 저자들이 나누어 가진 그 생명의 조성자이시다".
"우리가 계시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어느 것도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상대적이다. 아무 곳에서도 진리는 우리가 자존적(self-subsistent) 외적 권위를 찾을 수 있는 순수하게 '객관적인'(objective) 형태로 주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한다.

"성경 무오(無誤)에 대한 옛날 견해가 과학적 발견과 역사 비평학의 연속적 공격으로 파괴되었던 과정에 대해 상술할 필요는 없다. 과학과 역사의 문제에서 성경의 정확성을 주장함에 있어서 성경 무오의 변호자들이 희망 없는 입장을 택했었다는 것은 오래 전에 벌써 분명했다. . . . 성경의 그 옛 교리적 견해는 과학과 역사 비평학의 입장에서 공격을 받을 뿐만 아니라, 신중히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와 공중 도덕에 위험물이 된다".

"바울이 잘못이라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고, 과감히 그렇게 말해 왔다, 비록 전체적으론 그가 말하는 바가 내가 보기에 충분히 참된 것 같지만".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을 인격의 가장 높은 이상(理想)으로 생각하면서 비(非)이성적인 진노의 격정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전혀 논리일관하지 않다".

아담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한다.

"비록 바울에겐 그가 실제적 인물로 생각되었을지 모르지만, 아담은 하나의 신화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적 대속(代贖)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유화(宥和, propitiation)라는 번역은, 진노하신 하나님을 누그러뜨림을 암시하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으며, 비록 이것이 이교적(異敎的) 용법에는 맞을지라도, 성경적 용법에는 생소하다".

보편 구원론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격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태도가 무엇과 같음을 참으로 우리에게 보인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든 그의 사랑이 모든 사람들을 그와의 연합으로 이끄는 길을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떠나서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Ibid., p. 186).

"후기 서신들에서 교회는 참으로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내면적 필요성에 의해 그것은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포함해야 하며, 화목된 우주의 중심을 형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의 이단 사상

교의(敎義)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교의(敎義, dogma)는 기껏해야 언약 공동체의 공동 견해를 나타낸다".

기독교 진리 일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기독교 종교에서 참된 것은 어느 정도 임시적이고 표면적인 거짓을 포함하는 상징들로서만 표현될 수 있다. . . . 우리는 거짓에 의해 진리를 가르친다".
"기독교는 원시종교적, 예술적 신화들과 상징들을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전달한 종교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성경의 상징들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한한 지성들이, 역사를 초월하고 성취하는 것[신]을 파악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를 신화적 개념이라고 한다.

"창조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화적 개념이다".

아담의 타락을 신화라고 한다.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타락의 이야기는 원시적 신화이다. 현대 신학은 현대 문화가 그런 신앙을 종교의 개화 반대론(obscurantism)의 증거로 간주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즐거이 타락 이야기를 부정했다".
"타락의 개념은 동산, 과일, 그리고 뱀이라는 원시적 신화를 역사적으로 참된 사실로 간주하는 오류에 굴복한다. . . . 타락은 역사적이지 않다. 그것은 그 어떤 구체적 인간의 행위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러한 행위들의 전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불합리하다고 한다.

"영원이라는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온다는 개념은 지적으로 불합리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진리는 진리가 보통 판단되는 모든 규범들을 어긴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 진리를 신화라고 본다.

"사람들은 처녀 탄생의 원시적 신화에 의해 속임을 당하고, 바로 역사 너머를 가리키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그것을 하나의 순수한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처녀 탄생'과 같은 기적들은 후대에 삽입된 생각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는 신학적 오류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교리는 많은 신학적 오류들로 인도하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도덕 의식을 모욕하는 대리적 속죄의 이론들이 포함된다".

영혼 불멸에 대해 회의적이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이 몸의 부활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선입견은 단지 교회 안에 있는 헬라사상으로부터 온 유산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크게 속인 교리라고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으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이단 사상

성경은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책이라고 한다.

"비록 그것이 요한의 예수 세례라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출발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예수님의 세례 이야기(막 1:9-11)는 하나의 전설이다".

"예수께서 어떤 종류의 메시아인지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종류의 메시아를 믿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타내는 시험받으신 이야기(막 1:12 이하 혹은 마 4:1-11)는 전설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는 전설로 채색되었고, 수난 이야기도 상당히 전설로 덮여 있다".

"첫눈에 우리는 [요한복음의] 서두를, 그 주제로 판단하여, 신화라고 부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신적 존재, 그의 생애,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서두는, 혹은 그것의 자료는, 그노시스 신화의 언어로 말한다. . . . 그 복음서 저자는 기독교 전파와 신학을 위하여 이 신화를 사용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바울은, 비록 그 자신이 로고스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을지라도 안트로포스(사람) 신화의 용어로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이고 구원론적인 의미를 빈번히 해석함으로써, 요한보다 앞섰었다".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을 그노시스 신화로 보려고 한다.

"[요한복음 17:1-5의] 언어는 신화적이다. 아들의 소원은, 그의 지상의 존재로부터 한때 그의 선재 상태에서 가졌던 하늘의 영광 안으로 다시 올리움을 받는 것이다. 그것은 그노시스 신화의 사상 형식과 완전히 일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로 본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그들은[아주 초기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처녀 탄생의 전설은, 바울에게 그러했듯이, 그들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신화로 본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그러한 개념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신화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고, 그 후 역사적 인물 예수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신화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전설로 간주한다.

"[예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다는] 그 이야기가 이방의 전설에서 취해져 예수께 돌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사실, 그 이야기의 주제, 즉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것은 디오니서스 전설의 전형적 주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적 증거들을 부정한다.

"그러나, 후대의 헬라주의적 교회와는 달리, [아주 초대 교회는] 지상의 예수님을 (신화적)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여하튼, 아주 초대 교회는, 비록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다 하더라도, 그를 예배하지는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신화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고 말할 때 그의 인격은 신화의 빛으로 관찰되며,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해 사람이 되셨고 스스로 고난을, 그것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한 위대한, 선재(先在)하신 천적(天的) 존재로 이해되는 헬라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서는 한층 더 분명하게 된다. . . .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신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개념은 그노시스적(Gnostic) 구속 교리의 일부분이며, 아무도 이 교리를 신화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전설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전히 그것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한 바 그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전설들이다".
"만일 부활절 사건이 어떤 의미로든지 십자가 사건에 첨가된 역사적인 사건이라면,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의 발생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설교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이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부활 자체는 지나간 역사의 사건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한다.

"여하튼,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이와 같이 그를[예수님을] 신화적 인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서 구원과 저주를 내리시려고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인자(人子)로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했다. . . . 요한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오순절,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파루시아)은 한 동일한 사건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영생을 얻었다".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신화적이라고 한다.

"종말론적 드라마의 개념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신화적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이단 사상

근본주의를 마귀적이라고 한다.

"그들은 영원한 진리와 이 진리의 시간적(temporal) 표현을 혼동한다. 이것은, 미국에서는 근본주의로 알려져 있는 유럽의 신학적 정통주의에서 명백하다. . . . 근본주의는 현재의 상황과 접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상황을 초월한 곳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 아니고, 과거의 상황으로부터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어떤 것을 무한하고 영원한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높인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는 마귀적 특성을 가진다".

기독교는 최종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다고 한다.

"기독교 자체는 최종적이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단지 그것이 증거하는 바가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이다. 기독교의 이 심오한 변증법을 잊어 버리고 교회적인 혹은 정통적인 자기 주장들로 기울어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기 주장들에 대항하여, 소위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의 종교가 최종성이나 심지어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옳다".

특별 계시의 종결성을 부정한다.

"예언 활동을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 . . 예언자적 비평과 약속은 교회의 전 역사에서, 특히 수도원 운동과 종교 개혁과 복음주의적 급진주의에서 활동적이다. 그것은, 조로아스터교와 어떤 헬라 신비종교와 이슬람교와 많은 작은 개혁 운동들에서와 같이, 기독교 밖의 종교적 혁명들과 협회들에서 활동적이다".

성경의 영감을 부정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기계적, 혹은 기타 모든 형태의 비무아경적(非無我境的) 영감 교리는 마귀적이다. . . . 영감이란 이성의 주체-객체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지식의 복합체에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않는다".

"성경 저자들의 영감이란 가능적으로 계시적인 사실들에 대한 그들의 수용적이며 창조적인 반응이다".

성경의 객관적, 신적 권위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율법적으로 생각되고 작성되고 인봉된 기록, 그래서 그것에 근거해 우리가 어떤 주장들을 결정할 수 있는 그런 기록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면, 신학적 혼동이 거의 불가피하다. 그러한 동일시로부터, 구수적(口受的) 영감 교리, 성경 본문을 취급함에 있어서의 부(不)정직, 한 책의 무오성(無誤性)이라는 '일성론적'(一性論的, mo- nophysitic) 교의 등과 같은 결과들이 나온다".

정경의 개방을 주장한다.

"정경(正經, canon)을 창조한 자는 바로 성령이시며, 영적인 모든 것들과 같이, 정경은 율법적으로 확정적 방식으로 고정될 수 없다. 정경의 부분적 개방은 기독교회의 영성(靈性)의 안전 장치이다".

하나님은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은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는 본질과 존재를 초월한 존재 자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문제는 질문될 수도, 대답될 수도 없다. . . .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신론적이듯이 그것을 긍정하는 것도 그러하다".

인격적 하나님을 부정한다.

"그러한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한 무신론의 반항은 정당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아무 증거도 없고, 그는 궁극적 관심의 주체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적 참여가 없이는 하나님이 아니다. '인격적 하나님'은 하나의 혼동을 주는 상징이다".

진노의 하나님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과 병행하는 하나님의 어떤 감정이나, 섭리와 병행하는 어떤 행동 동기가 아니다. 그것은, 그것을 저항하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랑의 활동의 정서적 상징이다".

"정죄란 피조물이 자기가 택한 비존재(非存在)에로 내버려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신성과 그 무조건적 성격과 명백히 모순된다. 그러므로 그 개념은 재해석되든지 아니면 기독교 사상에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의 죄책에 따라 계산된 특별한 형벌 행위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공의는 그가 실존적 소외의 자멸적(自滅的) 결과들을 그대로 허용하는 행위일 뿐이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부정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상징들은 변증법적이다. 그것들은 삶의 변증법 즉 분리와 재결합의 운동을 반영한다.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진술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가장 나쁜 왜곡이었다".

창조를 부정한다.

"창조의 교리는 '옛날에' 일어난 사건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세상 간의 관계의 기본적 묘사이다".

"'창조의 목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피해야 할 애매 모호한 개념이다. 창조는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목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천사와 귀신을 신화라고 한다.

"천사와 귀신의 세력들에 대한 교리의 진리는 선(善)의 초(超)개인적 구조들과 악(惡)의 초개인적 구조들이 있다는 것이다. 천사들과 귀신들은 존재의 건설적인 그리고 파괴적인 세력들을 위한 신화적 명칭들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섭리 혹은 기적을 부정한다.

"기적들은 자연 과정에 대한 초자연적 간섭으로 해석될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해석이 참되다면, 존재의 근거의 나타남은 존재의 구조를 파괴할 것이다. 종교적 이원론이 주장했듯이,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분열될 것이다".

"섭리는 간섭이 아니다. . . . 그것은 한 추가적 요인, 즉 초자연주의에 의한 어떤 기적적인 물질적 혹은 정신적 간섭이 아니다".

인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신학은 분명하게 그리고 애매 모호하지 않게, '타락'을 옛날에 일어난 한 사건 이야기로가 아니고 보편적으로 인간의 상황을 위한 한 상징으로 표현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조리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주장은 역설적(逆說的, paradoxical)인 말이 아니라, 부조리한(nonsensical) 말이다". ('역설적'이라는 말은 '일견 모순된 것 같으나 바른'이라는 뜻임.)

"문자적 해석은 옛날에 그의 하늘 처소로부터 내려보내져 사람으로 변형된 한 초월적 존재를 상상함으로써 네번째 단계를 취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참되고 힘있는 상징이 한 불합리한 이야기가 되며, 그리스도는 하나의 반신(半神, a half-god),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한 독특한 존재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증거들의 신빙성을 부정한다.

"모든 역사적 지식과 같이, 이 사람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가설적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 지식을 방법론적 회의주의에 복종시키고 또 본질적인 부분들 뿐만 아니라 각개의 부분들에서도 계속적인 변화에 복종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유한성은 오류로의 개방을 뜻하며,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참여하심에 속한다. 오류는, 우주에 대한 그의 고대적 개념, 사람들에 관한 그의 판단들, 역사적 순간에 대한 그의 해석, 그리고 그의 종말론적 상상에서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속죄를 부정한다.

"['대리적 고난'이라는 용어]는 불행스런 용어이며 신학에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실존적 소외의 고난에 참여하지만, 그의 고난은 피조물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도 사람의 고난을 위한 대체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여와 변형에 의해 피조물의 자멸을 극복하는 능력이다. 대리가 아니고 자유로운 참여가 신적 고난의 성격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불명료한 신화적 사건이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한 자의 십자가이다. . . .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 자신을 실존적 소외의 죽음에 복종시켰던 자의 부활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하나의 추가적인, 의문의 기적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 . . 십자가의 이야기들은 아마 역사적 관찰의 충분한 빛 안에서 발생했던 한 사건을 가리킬 것이지만, 부활의 이야기들은 그 사건 위에 깊은 신비의 베일을 덮는다".

"역사적 연구는, [부활의 상징에서] 그 주위에 있는 전설적이며 신화적인 자료에 근거하여 이러한 사실적 요소를 찾아내려고 함에 있어서 정당하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는 결코 개연적(蓋然的) 대답 이상의 것을 줄 수 없다".

"사건과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실존적 소외의 죽음을 극복하는 자신의 승리의 확실성이다. 역사적 확신이나 성경 권위의 수납이 이 확실성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을 넘어서는, 어떤 확실성도 없고, 단지 개연성(probability)--흔히 매우 낮고 때로는 높은 개연성--만이 있을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정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승천은] 부활이 표현하는 동일한 사건의 다른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공간적 상징 표현은 우스꽝스러운(absurd) 것이 될 것이다".

영혼의 불멸을 부정한다.

"인간의 자연적 특질로서의 불멸성은, 비록 그것이 플라톤의 교리일 가능성은 있을지라도, 기독교적 교리는 아니다".

"불멸성의 상징이 이 유행하는 미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기독교에 의해 근본적으로 거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영원에의 참여는 '죽음너머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의 자연적 특질도 아니다".

영원한 심판을 부정한다.

"보통 사람들은 '영원한 정죄'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유지될 수 없는 단어들의 결합이다. . . . 그러므로 '영원한 정죄'라는 용어는 신학 용어들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 . . 사람은 존재의 기반[하나님]으로부터 결코 잘리워버리지 않으며, 심지어 정죄의 상태에서도 그러하다".

천국과 지옥의 장소성을 부정한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들이지 장소들의 묘사가 아니다".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oeffer)의 이단 사상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나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것은, 오늘 우리를 위해, 기독교가 참으로 무엇인가, 혹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누구이신가 하는 문제이다. 신학적인 말이든지 경건한 말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말로 들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종교 일반의 시대를 의미하는 내면성(內面性)과 양심의 시대도 그러하다. 우리는 전적으로 비종교적 시대를 향하여 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단순히 더 이상 종교적일 수 없다".

종교의 개념 자체를 반대한다.

"여기에 기독교와 모든 종교들 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사람의 종교성은 그를 세상의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은 데오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절박한 상황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력(無力)하심과 고난을 향하게 눈을 돌리게 한다. 오직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만 도우실 수 있다. . . . 이것이 아마 우리의 '세속적 해석'을 위한 출발점일 것이다".
"'종교적 행위'는 항상 부분적인 것이지만, '신앙'은 사람의 삶 전체에 관계하는, 전체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지 않고 삶으로 부르신다".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비종교적(religionless) 해석을 옹호한다.

"만일 종교가 오직 기독교의 옷이라면 . . . 비종교적 기독교란 무엇인가? 이런 식의 생각을 시작한 유일한 사람인 바르트는 그것을 완성하지 못했으나, 하나의 계시의 실증론에 도달했는데, 그것은 결국 근본적으로 하나의 회복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종교 없이, 즉 시간적으로 제한되는 형이상학과 내면성 등의 전제들 없이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세속적' 방식으로 말하는가?".
"나는 네가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에 관한 불트만의 논문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대한 오늘날의 나의 견해는 대분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가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충분히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기적, 승천 등과 같은, 윈리상 하나님, 신앙 등의 개념들과 분리될 수 없는 '신화적' 개념들만이 아니고, '종교적' 개념들 전반이다. 너는 불트만이 상상하듯이 하나님과 기적을 분리시킬 수 없고, 그 둘을 다 '비종교적' 의미로 해석하고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견해는, 신약성경이 보편적 진리의 신화적 옷이 아니고 이 신화들(부활 등)이 본질(the thing itself)이므로 '신화적' 개념들을 포함하여 그 모든 내용이 보존되어야 하지만, 그 개념들이 종교를 신앙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속죄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다른 동양 종교들과 달리, 구약의 신앙은 구속(救贖)의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가 항상 구속의 종교로 간주되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과 분리시키고 구속에 관한 신화들에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오류가 아닌가?".

"오늘날 구속은 무덤 너머의 더 좋은 세계에서 근심과 고통과 공포로부터의 구속,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속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으로 복음서들에서 그리스도의 선포하신 내용과 바울이 선포한 내용의 본질적 성격인가? 그렇지 않다고 나는 말해야 하겠다".

성경 전반의 확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는 잘못된 질문이다. . . . 이것에 대한 증거는 아무 것도 없고, 우리는 단순히 그것이 그러하다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성경과 기독교의 신앙은 이러한 문제들에 의해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조 사건을 부정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앞에 과학적으로 매우 천진 난만하게 표현된 고대의 세계 묘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식이 급속히 변화되는 것을 볼 때, 너무 조소하거나 자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지만, 의심할 것 없이 이 구절에서 성경 저자는 그가 살았던 시대에 기인하는 모든 제한성들을 노출하고 있다. 하늘과 바다는 그가 말하는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진술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매우 나쁜 양심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자 영감(逐字靈感)의 관념이 그것을 피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세기 1장의 저자는 매우 인간적인 방식으로 처신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흙과 진흙으로 그의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 신인 동형적(神人同形的) 표현들은 더욱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즉 하나님이 진흙으로 모양을 만드시고, 사람은 흙 한 줌으로 빚어지는 그릇같이 빚어진다는 표현들 말이다. 이것은 확실히 사람의 기원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줄 수 없다. 확실히, 하나의 이야기로서 이것은 다른 어떤 창조 신화처럼 부적절하거나 혹은 의미 있을 뿐이다".

사람의 타락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피조물들로서 그리고 악의 목소리의 장소로서의 뱀, 하와, 지식의 나무의 애매함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고 명확한 해석으로 미숙하게 부숴지게 해서는 안된다. . . . 성경의 목적은 악의 기원에 관한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죄책으로서의 그리고 인간의 무한한 짐으로서의 그것의 성격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악의 기원에 관해 질문하는 것은 성경 저자의 마음과 거리가 멀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대답은 명백하거나 직접적일 수 없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른 사람을 위한 삶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존재에의 참여이다. . . .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가장 높으신 분,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으신 분--그것은 진정한 초월성이 아니다--께 대한 '종교적'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는 예수님의 존재에의 참여를 통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새로운 삶이다".

교회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한다.

"교회는 오직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존재할 때만 교회이다. 우선 그것은 그것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보해야 한다. 목사들은 오로지 그들의 회중들의 자원하는 헌금에 의하여 살거나, 가능하면 어떤 세속적 직업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지배함으로써가 아니고 돕고 섬김으로써 인간의 일상 생활의 세속적 문제들에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의 절대 표준임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립된 규범들의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각기 다른 상황마다 새롭고 다른 어떤 것이며, 이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를 늘 새롭게 검토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역사적이며 시간적인 것과 대조되는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영원한 것이 아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의 이단 사상

성경은 사가(Saga)들과 신화들을 포함한다고 한다.

"그 동일한 구속적(救贖的) 선(line)은 역사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건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적 시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들, 예를 들면 역사적 구조 안에 있는 사가들(sagas)이나 창조와 자연의 과정들을 취급하는 신화들도 포함한다. 우선, 원시적 기독교는 이러한 다양한 내용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 . . 원시적 기독교 글들의 저자들에게서는 역사 의식이 완전히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역사와 신화 간의 구별은 선천적으로 멀다. 이 사실은 성경에서 오늘날 낡은 세계관이 사용된 것과 같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역사, 사가, 그리고 신화가 동일한 수준에 놓여지는 것이 원시적 기독교에서 어떻게 쉽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줄 뿐이다".

"만일 원시적 기독교가 소위 원시적 역사나 종말론적 역사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시키는 것은 오직 그 둘을 분리시킬 능력이 정식으로 없었던 결과라면,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통해 그 선의 역사적 요소들과 비역사적 요소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 때에 곧, 그 연결은 없어도 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불트만이 논리 일관하게 구속의 과정을 하나의 전체로서 취급하고 '신화를 벗기는' 그 동일한 방법을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그 선의 부분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적어도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식하는 것은, 원시적 기독교에서 그 선은 실제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형성한다는 것과, 오직 처음과 마지막으로부터만 시간 구조를 벗기고 그 역사적 중간 부분을 이 시간의 옷이 입혀진 채로 내버려둠으로써 그것을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가진다.

"신약성경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은, 그러므로, '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해야 한다--우리가 그 개념을 본체(substance)와 성질들(natures)에 관한 후대의 헬라적 사색들과 연결시키지 않고, 그것을 엄격하게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후대에 혼란한 여러 가지 이단적 위장들에 대해 교회는 정당히 정죄했는데, 그러한 혼란이 초대 기독교에게 낯설었던 것은 정확히 말해 초대 기독교의 사고가 '구속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혼란의 위험은 오직 사람이 기독론의 문제를 본체와 성질들에 관한 사색들로써 풀어보려 할 때에만 일어난다".

보편 구원론적인 경향을 가진다.

"신약에 의하면 기독교적 보편주의가 있다. . . . 그것은 창조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화목된다. 그것은 종말론적 완성에서 그러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에서의 모든 것이신 하나님께 복종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모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향한다".

"하나님의 계획에서 선택에 주어진 구원역사의 집중이 어떻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universalism)를 그 목표로 가지는가 하는 것은 특히 바울의 구원 역사관(롬 9-11장)에서 분명하게 된다".
"우리는 모든 구원 역사가 처음부터 보편주의적 방향을 띤다는 것을 보았다. '돌아가는 노선'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에 이르며, 그 다음엔 전세계에 이른다. 비록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도, 구원 역사는 여전히 선택의 원리에 의존하지만, 이제 선택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히 구원을 선택된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구원을 세계에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을 위한 선택을 의미한다. 그것이 모든 구원 역사의 길이다. 즉 보편주의는 그것의 목표요, 집중(선택을 의미함)은 그것의 실현의 수단이다. 여기에서 그 길은 심지어 비기독교 종교들, 혹은 더 잘 표현하면, 성경 밖의 종교들에게도 열려 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물론, 좁은 의미에서 구원 역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영혼 불멸을 헬라 철학 사상이라고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죽음과 영생이 항상 그리스도 사건과 묶여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적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서만 그러하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게 될 것이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개념[영혼의 불멸]은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들 중의 하나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의 이단 사상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부정한다.

". . . 우리는 그의 이름, 그의 말씀을 통한, 혹은 율법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직접적 자기 계시의 개념을 거절한다. 그와 대조하여 최종적으로 나타난 바는, 역사 속에서의 그의 행위의 반사(reflex)로서의 하나님의 간접적 자기 계시의 생각이다".

사람이 성경을 판단하기에 자유롭다고 한다.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는 사람을 모든 다른 궁극적 권위로부터 자유케 한다.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도록 자유롭다. 이것은 단지 정치적 생활 형태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교회적 조직들과 형식들에도 적용된다. 자유의 선물과 특권은 교회들에 의해 제출된 선언들, 교회들의 교리적 결정들, 성경의 책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전한 내용에 관련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사도신경의 진리성을 부정한다.

"사도신경의 진술들이 부분적으로 현대인의 마음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 진술들 중의 많은 부분은, 이런 혹은 저런 방식으로, 상당히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도신경의 표현 형식들은 믿음의 기초적 사실들의 요약이며 또한 그것의 중심적 내용이 된다. 그것들은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더 이상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의 언어일 수 없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우리는 질문하면서, 숙고하면서, 비평하면서 그 진술들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이런 방식은 초대 교회의 방식과 다를 것이다. 또한 현대 그리스도인은 항상 동일한 결론들에 도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초대 교회의 그 신조을 자기 것으로 삼으면서 아직도 그것을 반복할 수 있는가? 책임 있게 이렇게 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우리가 그 근본적 의도들에 동의할 때 뿐인데, 이 근본적 의도들은 그 신조의 진술들에서 시대적으로 제한된 그 표현 형식을 찾았다. 이 의도들의 언어적 심지어 지적 표현은 더 이상 항상 우리 자신의 현대적 사물 인식을 표현할 수 없다".

창조 대신 진화론을 받아들인다.

"만일 모든 피조물들의 미래가 보편적인 것이라면,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같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면, 내가 오늘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의 각각의 현재(現在)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미래일 것이다. 지금의 나의 미래는 또한 쥴리어스 시이저의 미래이었고, 역사 이전 시대의 도마뱀들의 미래이었고, 약 10조(兆)년 전의 최초의 물질 과정들의 미래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전설이라고 한다.

"기독론적으로, 처녀 탄생의 전설(legend)은 그 계시적 사건의 한 근본적인 요소, 즉 예수님이 최초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에 대한 한 예비적 표현이라는 의의를 가질 뿐이다".
"신학은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그의 지상 생애의 기원에 요구되는 한 기적적 사실로서 주장할 수 없다. 그러한 만큼, 처녀 탄생이 사도신경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진술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는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신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그러므로 본래는 육신적 아들의 신분을 의미하지 않았고, 예수님을 신적, 초자연적 존재로 표시한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진 유다의 왕은 확실히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유대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단지 예수님의 역할, 즉 그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시행하도록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본성(nature)을 묘사한 것이 아니었다".

보편 구원론적 경향을 가진다.

"그의 죽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의 결과, 즉 죄에 대한 형벌을  단지 그의 백성을 대신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짊어지셨다. 그를 통하여, 그러나, 하나님이 버리신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극복되었다. 더 이상 아무도 홀로 그리고 소망 없이 죽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그 내용인 새 새명은 이미 예수님 안에서 나타났고, 그 자신이 그 새 생명에 장차 참여하리라는 소망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효과는 이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므로 아무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이제부터는 아무도 더 이상 홀로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왜냐하면 특별히 죽음에서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교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간의 이 교통은 예수님의 죽음의 대리적 의미의 본질적 내용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을 비유로 본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죽은 자들의 부활 개념의 긍정적 타당성을 인식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또한 그것의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성격에 관해 분명히 이해한다는 조건에서, 가능할 뿐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의 개념을, 사람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감추어진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일종의 초자연적 지식으로 보는 자에게, 그것은 사람의 경험에서 낯설은 요소로 계속 남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의 그의 상황의 표현으로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유로서의 그것의 독특한 성격에서일 뿐이다".

지옥의 개념을 부정한다.

"지옥의 개념은, 수많은 심판의 그림들에서 묘사된 대로의 그 독특한 특징들에 있어서, 확실히 공상적이다. 이러한 그림들이 지옥의 고통들에 관해 말하는 바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결정적인 특징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으로부터 제외됨은 끝없는 구덩이의 전통적인 묘사들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 .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에 대한 분명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제외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지옥일 것이다. 지옥이 어디냐 하는 '장소'의 문제는, 그러므로, 부적당한 그리고 우리에게 폐지된 사고 방식에서 나온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의 이단 사상

성경의 기적 사건들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비평적인 문학적, 언어적 분석에 복종될 때, 기적 이야기들의 내용은 매우 상당히 감소된다".
"기적 이야기들의 문학적 비평적 조사는 기적 요소를 높이는 경향을 나타낸다. 수가 증가한다. 기적들은 정교해진다. 이중적 보도들이 전달되어 내려온다. 요약들은 예수님의 기적 행하는 행위를 일반화한다. 몇 가지 경우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적 이야기가 언어적 오해에서 자라나왔는지 볼 수 있거나 혹은 적어도 상상할 수 있다".

"심지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 이야기(막 6:45-52; 요 6:16-21)도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막 4:35-41 참조)로부터 언어적 오해의 결과로 자라나왔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랍비주의적 그리고 헬라주의적 기적 이야기들과 비교한다면 그 내용은 더욱 감소된다".
"우리는 또한 특히 헬라주의적 환경으로부터의 당시 유행하는 작품에서, 귀신의 추방, 병고침, 죽은 자들을 일으킴, 풍랑을 잔잔케 함, 포도주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이 기적 이야기들의 어떤 것들은 복음서들의 그것들과 매우 밀접한 접촉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그것의 주위 환경으로부터 빌려왔으며 적어도 그것으로부터 어떤 개별적 주제들을 이어받았다는 결론을 거의 피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 보도의 확실성을 부정한다.

"수난은 며칠의 과정을 거쳐서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하나의 관찰할 수 있는 사건이었던 반면에,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顯現)들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아마 여러 해들에 걸쳐서 계속된 다른 종류의 다양한 사건들이었다. 전통은 오직 비교적 후대에만 그리스도의 현현들의 기간을 40일에 한정했다(행 1:3)".
"처음에 보기엔, 부활의 주님의 나타나심들이 그 처음 증인들에게 직접적 경험이라는 점에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우리의 자료들이 그 사건들로부터 수십년 동안 떨어져 있고 부활적 기사들이 그 동안 정교화되고 여러 점들에서 재구성되었기 때문에, 아주 절망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시대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면, 하나의 가설이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부활절 사건들이 주는 직접적 인상의 추가적 반향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의 보좌에 앉으심이라는 생각에 보존되어 있을지 모른다. . . . 그렇다면 이것은, 그 종말을 향하여 재촉하는 역사의 과정에서의 하나님의 독특한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고(비록 이것은 그것이 짧은 기간의 간격 후에 그들에게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없는 것이지만), 종말 사건의 여명으로서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직접적 경험이었다. 그들은 비추는 빛 안에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영광 안으로의 들어감의 증인들이었다. 다른 말로 말해, 그들은 파루시아[재림]를 경험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법정적(法廷的, forensic) 성격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와 같이, 법정적(法廷的) 비교가 묽어졌거나 심지어 완전히 포기된 것처럼 보이는 디카이우스다이의 용법을 보았다. 나는 이 용법을 법정적 용법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원론적' 용법이라고 부르고 싶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의롭다고 하다'(혹은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용법이 법적 영역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록 법정적 측면이 완전히 없지는 않지만. . . 구원론적 의미가 그의 말을 지배한다. 바울에게서는, 능동태 디카이운은 '은혜나 기뻐하심을 베풀다'는 것을 의미하고, 수동태 디카이우스다이는 '은혜나 기뻐하심을 얻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례가 구원의 은혜를 전달한다고 본다.

". . . 칭의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불경건한 자들을 용납하시는가? 이 문제에서 우리는, 이 주어짐이 발생하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지난 수십년 동안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 더 분명하게 사실들을 본다".
"칭의와 세례의 연관이 바울에게 매우 분명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세례에서라는 것을 그렇게 많은 말로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바울은 성찬이 세례와 동일한 은사, 즉 그리스도의 대리적 죽음에와 그의 몸의 친교에 참여함을 전달한다고 이해했다".

피에르 떼이아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이단 사상

범신론적이다.

"그렇다면, 성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혼합이나 멸절의 독이 조금도 없는 훌륭한 형태의 '범신론'이다. 즉 그것은 각 요소가 그것에 깊이 빠져 동시에 우주로서의 그것의 완성에 이를 완전한 일체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진화론자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존재들의 진화 즉 자연적 진화의 마지막 지점이고, 그러므로 진화는 거룩하다".
"모든 비교물을 초월하는 지구의 과제는 신실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고 그러므로 하나님 안으로 합병하는 물질적 합병이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일은 자연적 진화 과정의 정확성과 조화를 가지고 이루어진다" .

"무엇이든지 과거로 되돌리는 것은 그것을 그것의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키는 것과 동등하다. 그것들의 근원들의 방향으로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집합체의 마지막 섬유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눈에서 바로 우주라는 물건과 합쳐지는 것이다".

"원자가 단순한, 원소적 물질의 자연적 미립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포는 생명의 자연적 미립자이다. . . . 세포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진화론적 선상에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즉, 우주의 합리적 조직 속에 병합될 수 없을 것이다)".

"쥴리안 헉슬레이의 인상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진화가 자체를 의식하게 된 것 외의 다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의 현대적 지성들은 (그들이 현대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견해에 정착하기까지는 결코 안식을 발견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정상(頂上)에서 그리고 이 정상에서만 휴식과 빛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의식(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진화가 자체를 쳐다보고 자체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 척도에 의하면, 생명이란 3억년 이상의 거대한 시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그것은 수만개의 분리된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이 온 세계에 덮여 있다".

죽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죽음이란, 생물들의 경우와 같이, 한 개인이 종족의 혈통을 따라 다른 개인으로 대치되는 일정한, 불가피한 상태이므로, 그것[분해의 악]은 더 악화되고 이중적으로 운명적인 형태라고 덧붙여 말해야 하겠다. 죽음이란 기계에서의 레버요 생명의 증가인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을 옹호한다.

"내가 믿기는, 이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 의한 현대 진화론적 견해들의 병합과 동화는 수 세기 동안 계속 이성과 신앙 사이에 일어났던 장벽을 허물기에 충분하다. 그 부동(不動)의 장애물이 제거된 한, 미래에 카톨릭 교인들과 비카톨릭 교인들이 발견의 고속도로를 따라 손에 손 잡고 함께 전진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없다. 오늘날 양측의 협력은 가능하게 되었다".

"이 순간, 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형태가 스스로를 주장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지구의 정신적 성숙과 결합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확실히 올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에서, 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향한 유일한 두 가지의 효과적인 길들이 이런 것들이 아닌지 생각한다. 즉 (1) 참으로 '우주적' 척도에서 극단적 정통 기독교와 극단적 인본주의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관심을 가지는 기독교인들 간의 (정상 에큐메니즘). (2) 인류의 미래에 하나의 공통적인 인간의 '신앙'의 기초들을 정의하고 확장하려는 관심을 가진 일반 사람들 간의 (기초 에큐메니즘). 이 두 노력이 결합된다면, 그것들은 자동적으로 우리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에큐메니즘으로 인도할 것이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이단 사상

마태복음은 마태 학파에 의해 쓰여졌다고 본다.

"본 답슈는 [마태복음의 저자가] 개종한 랍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 . . 만일 우리가 그 복음서를 개종된 랍비에게 돌린다면, 우리는 그가 전적으로 혼자서 사역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가 살았고 봉사했던 교회의 생활 속에서 활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교회 안에 활동적이었던 한 학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마태 학파는 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한 학파로서 이해되어야 하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 학파의 저작품은 교회 내에서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안내서의 형태를 취한다".

바울은 교회의 전통에서 잘못 해석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바울과 루터 사이의 차이점들을 분별하는 것이 동등하게 중요한 점이 있다. 바울의 경험은 서방의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회심의 내면적 경험이 아니다. 이 차이점 배후에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그것은, 서방에 있는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바울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인물들의 경험을 통해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에 대한 우리의 대부분의 오해들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

". . .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의 교리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깊은 생각에서 그 신학적 맥락을 가지고 있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사람의 행위들이 어떻게 인정을 받을 것인가라는 문제에서가 아니다".

신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부정한다.

"현대 학자들은 신약성경의 본문이 액면 그대로 해석될 수 없고, 그것이 초대 교회의 신학적, 선교적, 그리고 교리 문답적 관심들의 표시들을 보인다는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또한, 신약성경이 초대 교회 내의 서로 다른 발전 단계들과 상호 충돌적 경향들과 행위들을 증거한다는 것도 명백하다".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교의와 신적 계시로서 선전되었다기보다] 단순히 인간 역사의 한 에피소드[혹은 삽화]라는' 기독교에 관한 윌슨의 진술이 심각하게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여기이다. '에피소드'와 '계시'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는 시초부터 기독교 신학의 기본적 신학적 문제이었다. 1세기에 기독교 사상의 주관심은 기독교를 영원한 진리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하여 그 에피소드의 면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절대적, 불변적 성격을 부정하고 혼합주의적 경향을 가진다.

"지구의 하나됨을 가정한다면, 우리의 다원주의는 부채가 아니고 자산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실지 모르나, 종교들은 여러 개이다. 그것들은 그 문화가 가장 특징적인 곳 즉 바나라스, 메카, 로마, 예루살렘 같은 곳들에서 그 세력의 중심을 가진다. . . . 내가 이 책을 넘겨볼 때, 나는 우리가 동등한 것을 동등한 것과 비교해야 한다는 모든 종교 연구의 기본 법칙을 기억한다. . . . 사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것의 본질과 구조는 문화에 따라 두드러지게 다르다".

"우리는 또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신앙과 고대의 종교적 행위들을 비교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종교들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족장 아브라함과 신학자 아브라함 헤쉘에 의해 표현된 종교적 견해들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들이 존재하지만, 그 둘은 다 정당하게 유대교적이라고 불리운다. 혹은 복음서 기자 요한과 교황 요한 23세 간이나, 마르틴 루터와 마르틴 루터 킹 간에도 그러하다. 우리는 오늘날의 것과 오늘날의 것을 비교해야 한다".

"그의 종교와 우리의 종교는 모든 경계선들을 넘는 능력을 가진 생명력 있는 종교들이다. 그리스도가 동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처럼 부처는 서양에서 자기 증인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머서(Mercer) 대학교수 폴 듀크(Paul Duke)의 불신앙

미국의 머서 대학교 신약과 설교 교수 폴 듀크는 "동성애와 교회"라는 제목의 1994년 협동 침례교 협의회(남침례교단의 자유파)의 총회전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우리의 최종적 권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을 것이다. . . . 동성애는 성경의 주된 관심이 아니다. . . . 나는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 듀크는 동성애적 짝들의 결합에 대한 자신의 '넓은 후원'을 긍정하였으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은 이성애적 짝들이라고 주를 붙였다. 머서 대학교는 미국의 보수침례교협의회(Conservative Baptist Fellowship)의 재정지원을 받는 학교이다. 오늘날 보수적이라는 명칭을 가진 교단들이 다 참된 보수적 교회가 아니다.

머서(Mercer) 대학교 총장의 불신앙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머서 대학교 총장 커비 갓세이(Kirby Godsey)는 한 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라고 주장하고, 동정녀 탄생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버리고, 회개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구원의 근거'임을 거부하고, "교리적 건전함이란 교만한 신학적 난센스[터무니 없는 생각, 허튼말]이다"고 주장한다.

시실 셔만(Cecil Sherman)의 자유주의 사상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 1983년 8월 5일자는 당시 미국의 남침례교단의 목사이었고 후에 온건-자유파 협동 침례교단의 초대 전국 의장이었고 현재 자유주의적인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침례교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시실 셔만박사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인용하였다: "성경에 의해서 또한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도록 인도함을 받을지도 모를 선생은 해고되어서는 안된다. . . . 그것[동정녀 탄생]은 두 복음서들에 있으나 다른 두 책들에는 있지 않다. . . . 마가와 요한은 그것을 나열하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실수를 범했는가? 만일 동정녀 탄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 [마가와 요한은] 잘못을 범한 것일 것이다."


■ 해든(Jeffrey Hadden)의 설문 조사

제프리 해든(Jeffrey Hadden)의 설문 조사에 나타난 배교적 증거

1967년, 미국의 사회학자 제프리 해든은 미국의 10000명의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였는데, 실제로 7441명이 대답해 왔다고 한다. 그 설문 조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당시의 미국 교회 목사들이 얼마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잘 증거한다:

1) '귀하는 성경이 신앙과 역사와 세속 문제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된 무오한 말씀임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87%, 감독교회 성직자들의 95%, 연합 장로교회 성직자들의 82%, 미국 침례교회 성직자들의 67%, 미국 루터교회 성직자들의 77%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2) '귀하는 오늘 세계에 악한 귀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 성직자들의 62%, 감독교회의 37%, 연합 장로교회의 47%, 미국 침례교회의 33%, 미국 루터교회의 14%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3) '귀하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60%, 감독교회의 44%, 연합 장로교회의 49%, 미국 침례교회의 34%, 미국 루터교회의 19%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4) '귀하는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사실로 받아들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감리교회의 51%, 감독교회의 30%, 연합 장로교회의 35%, 미국 침례교회의 33%, 미국 루터교회의 13%는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결론들

1985년에 약 125명의 개신교와 로마 천주교 신학자들이 '예수 세미나'를 시작했는데, 그 목적은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고 무엇을 말씀하시지 않았는지를 결정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그 중심 인물은 로버트 펑크인데, 그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신약학자이며, 에모리 대학교 캔들러 신학부 교수이었고, 그 후 캘리포니아에 웨스타 연구원을 설립하였다. 미국에서 가장 큰 성경학자 협회인 성경문헌협회의 증경회장이기도 하다. 이 세미나의 결과, 1988년에는 예수의 비유들이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거기에는 빨강색, 분홍색, 회색, 검정색으로 예수님의 비유들의 역사적 신빙성의 정도가 표시되었다. 또 1993년에는 다섯 복음서들: 예수가 참으로 말한 것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세미나의 대략적인 결론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성경 연구 혹은 신학이 얼마나 배교적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잘 보인다:

① 예수님의 말씀들의 오직 20%만이 실제로 그의 말씀으로 생각되며,
  요한복음에서는 오직 한 구절만 그에게 돌려진다.

② 주기도문도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다.

③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라고 공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④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과 매우 가깝다고 느꼈지만, 자신을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결코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

⑥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再臨)을 약속하지 않았다.

⑦ 성경에 묘사된 신화적 의미의 지옥은 없다.

⑧ 예수님은 독신이 아니셨고 독신을 옹호하지도 않으셨다.

로버트 펑크(Robert Funk)와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의 결론들

'예수 세미나'의 설립자인 로버트 펑크는 미국 워싱턴 D.C. 교외의 한 연합 그리스도 교회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성경에서 예수의] 말들 중에 확실한 것은 20퍼센트도 안된다," "우리는 천국이나 지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의 신성(神性)과 기적에 관한 이야기들은 믿을 만하지 못하고 비유들과 재치 있는 말들은 역사적이다," "니케야 신조는 넌센스이며 수정할 가치가 없다," "고대 교회의 신조들은 상상의 산물들이다."

펑크는 그 모임에서 '예수 세미나'의 결론들인 21개의 명제를 배부하였다:

(1) 물질 세계 바깥에는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
(2) 다윈의 사상은 창조의 교리를 영원히 말살시켰다.
(3) 창세기 이야기의 비(非)문자적 해석은 원죄의 교리를 종결지었다.  
(4) 신적인 기적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완전에 대한 모욕이다.
(5) 저 밖에 있는 신에게 말해지는 기도는 무의미하다. 기도는 명상이다.
(6) 예수는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7) 예수를 구속자(救贖者)라고 하는 것은 낡아빠진 생각이다.
(8) 예수의 처녀 탄생은 현대 지성에 대한 모독이며 여성을 모욕하는 것이다.
(9) 속죄의 교리는 반(半)이성적이고 반(半)윤리적이다.
(10)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11) 모든 계시적 요소들은 기독교 주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12) 예수 자신은 기독교 신앙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예수의 비젼이 그를 대치해야 한다.
(13) 예수는 인간의 선함을 믿었다.
(14) 예수는 축제를 믿었다.
(15) 예수는 성적인 방향에 근거한 경계선들을 포함한 사회적 경계선들을 거부하였다.
(16)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중보자들은 없다.
(17) 예수는 예배 의식들을 믿지 않았다.
(18) 하나님의 나라는 끝 없는, 영구적 방랑의 여행이다.
(19) 다른 신화들이 그러하듯이, 성경의 정경(正經)은 시대에 맞추어 축소되고 확장되어야 한다.
(20) 성경은 객관적 행동 기준을 담고 있지 않다.
(21) 예수의 비젼의 재구성은 항상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세미나 같은 활동들을 통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얼마나 이단적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분명히 보게 된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로버트 펑크의 발언들과 그가 배부했던 예수 세미나의 결론들을 읽어보라. 그리고 이런 불신앙적이고 이단적인 생각들을 단호히 버리고 옛 신앙을 굳게 붙들라. 디모데후서 1: 13, 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데살로니가후서 2: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히브리서 6:1, 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 미국연합감리교회(UMC)

240명의 감리교 목사들의 서명

미국 연합 감리교회의 최고 법정에 의한 최근의 한 구속력 있는 판결은 동성(同性)의 결합들이 연합 감리교회 목사들에 의해 연합 감리교회들 안에서 행해질 수 없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한 보수적인 연합 감리교회 지도자는 말하기를, 올해초 240명의 연합 감리교회 목사들이 그들이 요청을 받는다면 동성의 결합들을 집례하겠다고 말하는 성명서들에 서명하였다고 한다. 월드지 9월 19일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연합 감리교회 소속 글라이드 교회의 목사 시실 윌리암스와 기타 성직자들이 동성의 결합들을 즐거이 집례하겠다고 진술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고 말했다.

미국 연합 감리교회는 자체 내에 신학적, 윤리적 오류들을 고의적으로 포용하고 있는 자들을 권징하고 회개치 않는 자들을 내어 쫓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한국의 감리교회(기감)는 이런 배교적인 미국의 감리교회와의 교류를 즉시 끊어야 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5:6, 13,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 .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敎中)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감리교회 자유주의자인 레슬리 웨더헤드(Leslie Weatherhead)

영국의 감리교회의 저술가요 증경 총회장인 레슬리 웨더헤드는 그의 생의 마지막을 향하여 가면서, 예수가 아마도 여러 번 성육신(成肉身)한 한 영일 것이라는 견해를 표현하는 마지막 책을 썼다. 크리스챤 뉴스 2001년 3월 5일자의 한 글은 "이런 견해들은 그가 비참하게 신비주의(occult)에 떨어졌음을 반영했다. 에프워스(Epworth) 출판사는 그 책을 출판하기를 거절하였다"라고 썼다. 웨더헤드는 "기독교는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인가?"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내 생각에 기독교는 확실히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6과 충돌된다. 그는 다른 매우 중요한 교리들에 대해서도 "불가지론적"이었다. 하지만, 빌리 그레이엄은 이 배교자가 40여년전 그의 런던 전도대회에 참여하도록 허용하였다.

감리교회의 멜빈 탤버트(Melvin Talbert) 감독이 회개를 무시함

미 연합 감리교회의 에큐메니칼 수석 위원은 말하기를, 기독교 선교사들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회개시키는데 너무 강조하지 말아야 하며 그 대신 다른 이들과 평화로이 사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고 한다. 멜빈 탤버트 감독은 예수께서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을 때 거기에는 기독교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께서 지구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가 되라고 호소하고 계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한다.

■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CC)

자유주의적 미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크리스챤 뉴스 1996년 2월 12일자에 의하면, 듀부크 신학교의 신학교수 도날드 블뢰쉬 박사는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니테리안 교회가 된 카나다 연합교회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삼위일체의 삼위를 구별된 존재보다 비유로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블뢰쉬는 성경적 증거 협의회의 간행물인 위트니스 1996년 겨울호에 실린 한 대담에서 "유니테리안들은 이단종파가 되고 있다. 유니테리안들과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에는 많은 연관성이 있다. 유니테리안으로의 표류, 즉 하나님을 양성적(兩性的) 혹은 자웅 동체적(雌雄同體的)으로 보려는 강한 경향은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의 중심적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덧붙여 말했다.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아마 가장 널리 알려졌고 읽혀지는 자라고 위트니스가 말하는 블뢰쉬는 주장하기를,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유니테리안 사상으로 표류하고 있다. 이 교단은 이미 만인구원론적이다. 천국과 지옥, 구원과 멸망 같은 구별들은 이미 상실되었다. 유니테리안들과의 통합을 실제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한다(1, 14쪽).

월드 1998년 12월 5일자에 의하면,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총회장 폴 쉐리는 동성애의 용납을 지지하면서 쓴 목회 서신이 6천개의 모든 연합 그리스도 교회 강단들에서 읽혀지기를 원한다. 일찌기 1980년,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현행 남녀 동성연애자들이 목사로 봉직하도록 공식적으로 허용한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대교단이 되었다. 그 교단은 천주교 신부들이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로 봉직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 교단은 1991년 적극적 안락사를 지지하고 자살을 허용하는 최초의 대교단이 되게 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 교단의 공식적 진술들은 낙태를 지지했다.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교회의 목사들과 교수들이 기독교의 중심 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을 허용한다. 참 성도들은 현대 교회들의 배교적 상황을 깨닫고 분별력을 가지고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게 생활해야 한다.

교회들이 미국 연합 그리스도의 교단(UCC)을 떠남

미국의 많은 교회들이 연합 그리스도의 교단과 기타 자유주의 교단들을 떠나고 있다. 1996년부터 1999년까지, 131개 교회들이 연합 그리스도의 교단을 떠났고, 1960년대 이후 3분의 1이 떠났다고 한다. 그 이유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합 그리스도의 교단이 공식적으로 낙태를 지지하고 현재의 동성애자들이 목사로 봉사하는 것을 허용하고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을 공격하고 신학적 자유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
루터파 자유주의 신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
루터파 자유주의자 마틴 마티 박사는 그가 편집인으로 있는 크리스천 센추리지 1999년 4월 7일자에 "나는 성경을 포함한 아무 책도 무오하지 않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그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의 교리를 포함하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오래 전부터 부정해왔다. 그런데 그는 1992년 미국 복음주의 협회의 연사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 rgen Moltmann)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루이즈빌 장로교 신학교와 루이즈빌 대학교가 수여하는 2000년 루이즈빌 그로메이어 상과 상금 20만불을 받았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1993년 1월 11일자는 그를 "금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렀다. 그러나 크리스챤 뉴스 1993년 1월 23일자에는 몰트만이 삼위일체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절하고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의 신학을 위해 문을 연다고 말했다.

루터파 교수 필립 헤프너(Philip Hefner)의 불신앙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단(ELCA)의 교수인 필립 헤프너는 뉴스위크지 2000년 5월 1일자의 한 면 전체에서 "왜 나는 기적들을 믿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헤프너는, "나는 정말 어떤 관습적인 의미로도 기적들을 믿을 수 없고, 오직 복(福)들을 믿는다. 그것들은 매일 일어난다"고 글을 끝맺는다. 그는 시카고에 있는 루터파 신학교(Lutheran School of Theology)의 조직신학 교수이며 자이곤 종교-과학 연구소장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공격해왔다. "기적 이야기들--신앙에 대한 증언인가 신빙성의 세대 단절인가"라는 그의 글은 루터파 신학교의 컨텍스트지 1968년 봄-여름호에 실렸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단의 임원들은 인간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포함하여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교단의 교수들에 대해 어떤 권징적 조치를 취하기를 오래 전부터 거절해왔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에 대한 한 비판

미국의 루터교회 미주리 대회(LCMS)의 회장인 A. L. 배리 박사는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에 관하여 이렇게 글을 썼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가 오늘날 성찬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포기했고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고, 천명 이상의 여자 목사들을 가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과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 교회는 더 이상 진정한 의미에서 루터교회로 간주될 수 없다."

복음주의 루터교회(ELCA)는 도로시 죌러(Dorothee Soelle)의 책을 출판함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 포트리스(Fortress) 출판사는 최근에 도로시 죌러의 조용한 부르짖음--신비주의와 저항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크리스챤 뉴스 신문은 그 여자가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자요 신학적 무신론자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의 이전의 책에서 상당히 길게 인용하였다. 죌러는 또한 공산주의를 옹호한다.

■ 미국남침례교회(SBC)

노엘 홀리필드(Noel W. Hollyfield)의 신학석사 논문

미국 남침례교 신학교 학생 노엘 홀리필드는 1976년에 제출한 그의 신학석사(Th.M.) 논문에서 남침례교 신학교 학생들의 신앙적 상태를 알 수 있는 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의 논문 제목은 "남침례교 신학교의 선정된 학생들 가운데서의 '기독교 정통성'의 정도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었다.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는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의 신학교이다. 그 교단은 세계에서 제일 큰 교단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비교적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던 교단이다. 그러나 홀리필드의 설문 조사는 미국 교회들의 배교가 남침례교회에까지도 미쳤음을 보인다:
                                                          M.Div.  M.Div.   Th.M.
                                                          1학년    3학년    & Ph.D.
-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없이 믿는다.                          74%     65%     63%
- 마귀의 실제적 존재는 확실하다.                            66%     42%     37%
- 기적들이 성경의 증거대로 실제로 일어났음을 믿는다.        61%     40%     37%
-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은 확실하다.                     66%     33%     32%
-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셨음은 확실하다.                     59%     44%     22%
- 예수께서 신적인 하나님 아들임을 의심치 않는다.            87%     63%     63%
-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필수적이다.          85%     60%     59%
-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는 것은 구원에 절대 필수적이다.  42%     33%     21%
- 죽음 너머의 삶이 있음은 확실하다.                         89%     67%     53%
- 예수께서 어느날 실제로 땅에 돌아오실 것을 확신한다.       79%     56%     53%


미국 남침례교단과 침례교 세계 연맹(BWA)

뱁티스트 월드지 1997년 7-9월호에 따르면, 미국의 남침례교단은 침례교 세계 연맹에서 이제까지 가장 큰 회원 교회이다. BWA 회원 교회들의 다수가 세계 교회 협의회(WCC)와 관계가 있다. WCC에서 BWA 회원 교회들은 전체의 15퍼센트에 이를 것이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전도자요 침례교인인 빌리 그레이엄은 여섯 번의 BWA 대회에서 연설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그 단체를 후원하라고 격려하였다. 또 1995년 BWA는 그에게 특별 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BWA나 WCC는 현대 자유주의 이단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는 배교적 단체들이다. 남침례교단 같은 BWA 회원 교회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헬라] 정교회를 포함하여 완전히 다양한 다른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대화에 참여하여 왔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교회들 간의 기구적 연합을 향한 어떤 움직임을 수상하게 생각했던 침례교인들도 오늘날의 에큐메니칼 상황에서는 훨씬 더 편안하게 느끼기 쉬울 것이다. 남침례교단이 '보수적'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그 교단이 BWA와 WCC 등 배교적 에큐메니칼(하나의 세계 교회) 운동 단체들과 가지는 연관성을 기억해야 한다. 그 교단이 참으로 '보수적'이라면, 그 교단은 배교적 단체들과 연관을 가져서는 안된다. 참된 성도들과 교회들은 마땅히 배교적 단체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남 침례교단과 협력 침례교 협회(Cooperative Baptist Fellowship)

뱁티스트 배너(Baptist Banner)(버지니아주 남침례교에서 발행됨) 1월호는 남침례교단과 협력 침례교 협회(교단 내의 자유주의/온건 이탈파) 간의 몇 가지 '대조되는 점들'을 열거하였다. 그것에 의하면, 협력 침례교 협회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이 소속되어 있다: (1)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그의 제사적 죽음의 필요성, 혹은 그의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지도자들, (2) '그리스도-소피아'(그리스도의 여성화를 주장)에 대한 예배를 요구하는 여권주의 신학 지도자들, (3) 남녀 동성애자, 양성애자(兩性愛者), 성(性)전환자들의 안수를 요구하는 지도자들, (4) 하나님께서 때때로 여자에게 인구 억제의 목적을 위해 아이를 낙태시키라고 명령하신다고 선언하는 지도자들, (5) 낙태를 위한 연방 정부의 기금이나, 부모의 승락과 동의가 필요하다는 법의 폐기를 옹호하는 지도자들, (6) 성경이 모든 형태의 동성애적 행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하는 지도자들, (7) 여성을 담임 목사로 안수하기를 요구하는 지도자들, (8) 펜트하우스(음란물 출판사), 전국 남녀 동성애자 전문위원회, 가족계획 협회와 연합하여 활동했던 지도자들, (9)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지도자들, (10) 성경적 학문이 침례교인들과 무신론적 '세속 인본주의자들' 간의 공통적 기반의 영역이라고 진술하는 선언서에 서명한 지도자들, (11) 동성애자들이나 양성애자들에게 특별한 일자리의 보호를 제공하는 고용-비차별 법령과 같은 입법활동을 위하여 일한 지도자들. . . . 그 글은 한걸음 더 나아가 말하기를 협력 침례교 협회는 현재 동성애 활동을 하는 자들을 안수하는 교회들을 포함하고, 지도자들이 상황적 낙태 지지를 공공연히 선언한 기관들과 협력하고, 동성애를 환영 혹은 주장하는 교회들에게 지난해 모든 '선교 지원금들'을 제공한 단체와 협력하고, 핵심 지도자가 어린이들을 사용한 음란물의 복제와 판매를 옹호한 단체와 협력한다고 했다.

협동 침례교 협의회(CBF)

앨러배머 뱁티스트지 1998년 11월 26일자에 의하면, 남침례교회 신학교 부학장인 대니얼 아킨은, 11월 앨러배머주 남침례교인들에게 한 연설에서, 미주리의 보수적 남침례교인들이 온건파/자유파 협동 침례교 협의회를 비판하며 준비한 비난 내용들의 목록으로부터 "그들은은 급진적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을 관용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장막을 너무 크게 만들고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 아킨은 협동 침례교 협의회에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그의 제사적 죽음의 필요성과 처녀 마리아를 통한 탄생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지도자들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말하기를, 어떤 협동 침례교 협의회 지도자들은 낙태와 동성애에 관한 자유주의적 견해들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버지니아와 텍사스주들에서의 남침례교인들 간의 갈등은 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대체할 새로운 주(州) 대회들을 설립하게 하였다. 그러나 앨러배머주 보수주의자들은 대회의 새 지명자들을 인준했고 협동 침례교 협의회의 위험을 경고했다.

미국 남침례교회의 변질의 예

미국의 앨러배머주의 헌츠빌 타임즈 2000년 1월 15일자의 한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천주교 신부가 [남] 침례교회에서 연설하고 안식교인들과 그리스도의 교회 교인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대 희년 예배를 위한 기독교 일치 축제'에서이다. . . . 기독교 공동체는 1월 23일 [헌츠빌] 제1침례교회에서 예배와 찬양의 시간으로 모일 것이다." 주최측은 이것이 이 곳에서의 새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 천주교 연사는 로마 천주교회와 헬라 정교회와 개신교와 복음주의자들/은사주의자들이 대화를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평화를 소유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 안식교 목사는 말하기를, "우리의 소망은 모든 분열의 장벽들이 제거되고 우리를 연합하고 함께 모으는 것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이단들과 거짓 복음을 추종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하라고 명한다. "오류 안에서 연합하는 것보다 진리에 의해 분리되는 것이 더 낫다."

클라크 피나크(Clark Pinnock)는 배교자

캐나다의 맥매스터 신학교(McMaster Divinity School)의 신학 교수 클라크 피나크는 배교자라고 불리웠고 아마 정당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에 그는 남침례교단 소속 뉴올리언즈 침례교 신학교의 보수적 교수이었으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성경 영감과 지옥의 본질 같은 교리들에 대해 매우 비(非)정통적인 이해에 도달한 변화를 겪었다. 그는 최근의 복음주의 신학회에서의 논문에서 종말 사건들에 대한 '더 포용적인' 복음주의 이해를 요청했는데, 거기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구원을 포함한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하나 이상의 언약과 하나 이상의 백성을 가지고 계신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다양한 길들'에 대해 말했고, 많은 이방인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고 말했다.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거절하면서,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심판의 표준은 개인이 "다른 이들의 봉사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활 방식에 참여함"이라고 했다.

침례교회 세계연맹과 카스트로

침례교회 세계연맹은 2000년 7월 2-8일의 총회에서 매우 특이한 초청 연사인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을 듣도록 예정되었다. 큐바의 공산주의 독재자인 카스트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최초로 열리는 침례교회 세계연맹 모임을 위해 하바나에서 그 모임에 참석한 지도자들에게 연설하게 된 것이다. 침례교회 세계연맹 회장인 빌리 김(김장환 목사)과 사무총장 덴톤 로츠는 빌리 그레이엄의 암스테르담 2000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침례교회 세계연맹은 유엔의 비정부조직이다. 급진적 사회주의자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는 1998년 침례교회 세계연맹의 연사이었다. 미국의 남침례교단은 이 배교적인 침례교회 세계연맹의 중심적인 후원교단이다.

미국 남침례교단의 자유주의자들
미국 남침례교단 내의 자유주의자들의 단체인 협동 침례교 협의회는 2000년 7월 1일 배교적인 침례교 세계 연맹에 회원 신청을 하기로 결의했다. 협동 침례교 협의회의 조정자인 댄 베스탈은 적어도 5000개의 남침례교회들이 최근의 '침례교회 신앙과 메시지'의 변경 때문에 교단을 떠나 협동 침례교 협의회에 가입할 것이라고 예측한다[*그 변경이란 목사직을 남성에게 제한하는 것 등의 내용임.] 보수적인 남침례교회의 주류적 지도자들은 그 수를 훨씬 적게 예상한다. 협동 침례교 협의회 회원이며 침례교 연맹의 회장인 스탠 해스티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들을 목회자로 부르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그리스도를 믿게 되지 않는 사람들이 지옥에 갈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미국의 남침례교단은 결코 건전한 보수교단이 아니다. 그 교단은 오래 전부터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포용되어 있었다.

21세기에 성경을 위한 싸움(Battle for the Bible in the 21th Century)

21세기에 성경을 위한 싸움은 미국의 R. L. 히머스 2세 박사가 쓴 최근의 책의 제목이다. 미국의 보수적 남침례교단의 지도자들은 남침례교단의 지배를 위한 싸움은 끝났고 그들이 이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가? 그들이 이겼는가? 히머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본서는 남침례교단을 구하기 위한 싸움이 아직 끝나기에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확실히, 교단의 지도층과 6개의 남침례교단 신학교들에서 성경에 관한 보수적 입장을 향해 급진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것은 그 조류가 남침례교단의 교회들과 교단적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교단 안에 54개의 자유주의적 학교들이 있고 단지 12,748명의 학생들을 가진 6개의 보수적 학교들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같은 시간에 113,581명의 학생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남침례교단의 학생들의 90퍼센트는 자유주의 학교 기관들에서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아마 숫자들의 정확한 해석에 대해 변론할지도 모르겠으나, 여러분은 지적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 책은 60개의 학교들의 이름과 학생수를 열거한다. 히머스는 머서 대학교 총장 R. 커비 갓세이 같은 어떤 남침례교단의 대학교의 총장들의 극단적 자유주의 사상들을 인용 열거한다. 그는 페이지 페터슨과 폴 프레슬러 판사가 성경 무오성을 위한 초기의 투쟁을 인도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프레슬러 판사가 최근의 책에서 성경 무오성의 싸움에서 해롤드 린젤이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는 언급을 생략하였고 또 빌 포웰의 주요 저작을 비평하였음을 꾸짖었다. . . . 데이빗 비일은 말하기를, "이 책은 구체적으로는 남침례교단 내의 그리고 전체적으로는 좀더 넓은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적 문제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진술이다"고 했다.


■ 캐나다연합교회(UCC)

캐나다 연합 교회의 자유주의 목사들

기독신문 1997년 12월 3일자(16쪽) 보도에 의하면, 교인 300만의 캐나다 최대의 개신교단인 캐나다 연합 교회(UCC)의 총회장 빌 핍스 목사는 10월 24일자 오타와 시티즌지와의 대담에서 "예수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발언하여 한 달이 넘도록 교단내 자유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보도에 의하면, 논쟁이 가열되자 85명의 교단 집행위원들이 대책 회의를 연 후, "캐나다 연합 교회는 개인의 신앙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총회장의 개인적 신앙고백을 존중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 캐나다 연합 교회의 신학 노선과 총회장 신임을 재확인했다.

캐나다 연합 교회가 매우 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은 벌써부터 들어왔지만, 우리는 그 구체적인 한 증거를 보면서 다시 한번 경악한다. 한 기독교회의 총회장이라는 이가 어떻게 이처럼 명백히 불신앙적 이단 사상을 가질 수 있는지 놀랍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교단 집행위원들이라는 소위 교단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이처럼 진리를 저버릴 수 있는가? 이처럼 교회가 포용적이게 되었다. 이처럼 교회가 진리를 지키려는 의지를 버렸고 무관심주의에 떨어졌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배교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 6). 베드로 사도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증거하였고(행 4:12), 바울 사도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다(딤전 2:5). 그러므로 세계에 흩어져 있는 진실한 성도들은 성경의 진리를 부정하는 오늘날 교회의 배교적 현실을 직시하며 세계적, 초교파적 교제에 있어서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또한 캐나다 연합 교회에 속한 진실한 목사들과 성도들은 단호히 자유주의 이단자들을 추방하든지 아니면, 그 교회로부터 나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단과 교제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 자유주의자들과의 교제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이다.

캐나다 연합 교회의 자유주의 목사들(계속)

크리스찬 뉴스 1997년 12월 8일자(1, 12쪽) 보도에 의하면, 캐나다 연합 교회 새 총회장 빌 필립 목사는 오타와 시티즌지와의 대담에서 "나는 예수가 하나님이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고, 천국과 지옥의 성격에 관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지옥이 있는지 어떤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예수께서 지옥에 대하여 그렇게 관심을 가지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기 땅 위의 삶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 . . 천국이 장소입니까? 나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나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믿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일들이 발생했는지 어떤 지 모릅니다. 그것은 부적절한 문제입니다"고 했다. 그는 후에 자신의 사상에 대하여 첨가하여 말하기를, "예수께서 신적이지 않다는 노골적인 진술은 잘못된 인상을 줍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우리가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본질의 전체적 개념은 예수에게서 표현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고 더 신비하고 더 거룩합니다"고 하였다.

앞의 글에서 우리가 언급한 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부패하였으면, 이런 류의 불신앙이 포용되며 그런 사상을 가진 자가 총회장이 되며 또 교단의 지도자들이 그런 자를 축출하기는 커녕 옹호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교회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으시며 징벌하지 않으시겠는가? 말세의 진실한 성도들은 이 시대가 배교의 시대인 것을 알고 더욱 성경 말씀 위에 굳게 서야 한다.

■ 성공회(영국교회)

지옥에 대한 영국교회(성공회)의 견해

크리스챤 뉴스 1996년 2월 12일자(15쪽)에 의하면, 영국교회의 교리 위원회가 준비한 "구원의 신비"라는 보고서는 많은 전통적 입장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의 교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지옥불과 영원한 고통과 형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가학적(加虐的) 괴물로 만든 두려운 신학들을 고백했다. . . .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해 아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의 최종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선택 . . . 즉 유일한 종말은 완전한 비(非)존재이다."

이 보고서는 지옥을 영원한 고통과 형벌의 장소로 보지 않고 악인의 최종적 멸절을 주장한다. 이것은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백히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 9:43).


지옥은 장소가 아닌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2000년 1월 31일자는 바티칸 교황청과 가까운 관계를 가진 한 예수회 잡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다: "지옥이란 '장소'가 아니고 '상태' 즉 사람이 하나님의 결핍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의 '존재의 상태'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의 청중에게 "지옥은 장소가 아니고 자신들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로이 그리고 명확히 분리시키는 자들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했다. 그는 지옥이 "하나님에 의해 외부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 아니고" 하나님을 떠나 살겠다는 회개치 않는 죄인의 선택의 자연적 결과라고 말했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의 그 글은 말하기를, "마틴 루터와 죤 칼빈은 지옥을 진짜 장소라고 간주했지만 그것의 불의 고통들은 비유적이라고 믿었다"고 했다. 빌리 그레이엄은 지옥의 불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클라크 피나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아무리 그의 피조물들이 죄악될지라도 그들에게 영원한 고통을 부과하는 그런 잔인하고 보복적인 신을 고안할 수 있을까?" 그는 말하기를 그런 일을 하는 하나님은 "하나님보다는 사탄에 더 가깝다"고 하였다. 죤 스토트는 성경적 비유로 불의 주된 기능은 멸망시키는 것이며, 지옥의 불이 영원하고 꺼지지 않을지라도 "만일 거기에 던져진 것이 멸망치 않는다고 판명된다면 매우 이상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의 지옥은 영원한 불의 고통의 실제적 장소이다.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죠지 캐리(George Carey)의 불신앙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수장(首長)인 캔터베리 대주교 죠지 캐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에 못박히심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동일한 확실성을 가지고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없다. . . . 우리는 그가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감독교회의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감독의 무신론

미국 감독교회의 유명한 자유주의자 죤 쉘비 스퐁 감독은 인격적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 사건들로서의 예수님의 기적들, 동정녀 탄생, 부활, 그리고 승천을 부정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의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신을 예배하는 것보다는 혐오하는 것을 택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동성연애자들을 안수하는 것을 찬성하고, 바울이 "심히 억제된, 자기 부정적 동성연애자"이었고, 동정녀 탄생이 예수가 사생아임을 은닉하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세상에 이런 불신앙적인 자가 교회의 감독(장로교회의 노회장에 해당함)이라니 심히 통탄스럽다. 또 이런 자를 교회의 감독으로 포용하는 미국 감독교회가 배교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배교이겠는가? 미국 감독교회는 1995년에 7,415교회, 세례교인 158만을 가진 대교단이다.

스퐁 주교는 신성모독적 불신앙자

미국의 감독교회 주교이며 친동성애적인 자유주의자인 죤 쉘비 스퐁은 "만일 모든 사람이 구속(救贖)함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도 완전히 구속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 보편구원론자이다. 1999년 4월 26일자 뉴 아메리칸지에 의하면, "스퐁의 판단에는, 기독교가 생존하려면 기독교는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성육신(成肉身),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그리고 기적들과 같은 교리들을 치워버려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인식을 포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퐁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러한 생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관 안에서 조성된 것이며' '지식의 팽창으로 낡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신을 숭배하기보다 증오하기를 택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바울 사도를 동성애자라고 불렀다.

은퇴하는 죤 쉘비 스퐁(John Shelby Spong) 주교

미국 감독교회의 죤 쉘비 스퐁 주교는 지난 달 은퇴하였으나 다음 몇 달 동안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할 것이다. 그는 천국과 지옥, 영원한 형벌과 보상에 대한 '옛 견해'를 버린다. 그는 마리아의 동정녀성과 예수님의 부활을 헐뜯었고, 모든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단언했고, 기도의 대상으로서의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했다. 스퐁은, 자기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요구한 신을 예배하는 것보다 증오하기를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서 최초로 공공연한 동성애 신부를 임직시켰다.
죤 스퐁(John Spong)은 '무신론자'
1월 29일에 은퇴한 미국 감독교회의 죤 스퐁 주교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간주한다고 말한다. 그는 거의 모든 기독교 교리를 거부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어린 소녀들을 죽이려 한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또한 그 자신의 아들을 죽이려 한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그는 '동성애자들'을 벽 속에 가두고 여자들을 신부직에서 제외하는 교회에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스퐁의 후임자인 북 뉴저지주의 주교는 죤 크로운버거이다. 그는 조용히 싸우지만, 스퐁과 같은 많은 싸움을 싸웠다. 그의 교회는 1990년 '남자 동성애자' 신부의 임직식을 거행했다.

■ 로버트 슐러

로버트 슐러, 통일교와 몰몬교와 연관

로버트 슐러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조롱하는 기독교 일치 학교의 (뉴 에이지) 연례 대회를 위해, 문선명과 함께 통일교회 행사에서, 그리고 몰몬교 성전에서의 종교인 조찬 기도회에서, 주강사로 나타났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 몰몬교인들, 그리고 천주교인들은 그의 수정 대성전 강단에서 연설했었다. 그의 가르침들과 행동들의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이단적이다.

로버트 슐러를 조심하라

로버트 슐러는 뉴에이지 사람들, 몰몬교인들, 및 천주교인들과 강단 교제를 나누었다. 그의 교훈들과 행위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이고 이단적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잃어버리고 죄악된 상태를 깨닫게 하려는 비기독교적이고 투박한 전략보다, 더 인간 개성에 대해 파괴적이고 따라서 전도 사업에 반생산적이라고 증명된 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기독교의 깃발 아래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로버트 슐러의 문제

미국의 크리스탈 교회 목사 로버트 슐러는 오래 전에 죄에 대한 바울의 교훈과 이별을 고했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자신을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인들과 단절시키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더 이상 불리우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 신앙이라고 설교하지 않는다.

■ 기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는, 진리가 단순히 문화나 개인의 '구성물'이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내게 참된 것이 너에게는 참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합리적 경험주의, 과학 및 기독교의 절대적 진리들이나 다른 모든 객관적 진리에 대한 점진적 거부를 대표한다. 상대주의와 개인의 경험이나 느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개인적 진리의 기초이다. 설문 조사 통계들에 의하면, 미국인들의 86퍼센트는 자신들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72퍼센트는 절대적 진리의 개념을 부정하고, 61퍼센트는 문자적 사탄이나 지옥을 부정하고 40퍼센트는 하나님에 대한 뉴 에이지 견해를 믿는다.

자유주의적 '전도'

미국 복음주의 협회(NAE)의 세계 구제기구(World Relief) 회장 클리브 캘버는 말하기를, "내가 나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린 것은 한 전도자가 설교한 메시지 때문이 아니고 그가 그의 삶을 산 방식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이스턴 신학교의) 란 사이더는 말하기를, 만일 우리가 배고픈 자들을 먹이지 않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미국 침례교회의 신문 크리스챤 시티즌(5쪽)에서 우리는 전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본다: "전도는 우리 마음에 생각되는 모든 것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변혁시키시고 해방시키시는 능력을 가지고 그 왕국의 임함을 알리는 것이다." 성경적 복음(고전 15:1-4; 롬 1:16)을 포함하지 않는 그 어떠한 전도도 성경적 전도가 아니고 무력(無力)한 '사회 복음'이다.

'중성'(中性) 성경 번역에 대해

1999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WCF)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1999년 세계 근본주의자 대회의 대의원들인 우리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지 않는 단성(單性) 언어 번역들 성경을 만들어 내려는 국제 성서 공회(IBS)와 새 국제역(NIV) 성경 번역 위원회와 및 존더반 출판사의 최근의 노력들을 반대하고 비평함에 있어서 연합한다. 우리는, 영감된 성경 본문에 있는 성이 구별된 명사들과 대명사들을 현대 번역들에서 중성 단어들로 고의적으로 대치하는 것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에 대한 성경 자체의 교훈에 모순되며 결국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의 거룩한 본문에 대한 더러운 위조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미국 하버드(Harvard) 대학교의 잘못된 정신

1636년 목사들을 위한 양성 학교로 설립된 미국 하버드 대학교는 130억달러의 기금과 16억달러의 연간 수입을 가진 미국 고등 교육의 우상이 되었다. 학교에 출석하는 18,000명의 학생들 가운데, 학부 학생들은 매년 수험료와 기타 경비로 무거운 32,000달러의 금액을 낸다. 낙태 찬성, 반(反)군국주의, 인종 편애, 과격한 남녀평등주의, 종교적 상대주의 등의 자유주의적 입장들은 캠퍼스에서 복음으로 간주된다. 천주교회 신부가 부장인 하버드 신학부는 자유주의와 개방적 마음가짐, 다양성(그러나 위의 문제들에 있어서는 다양성이 없다!), 및 정치적 정확성 등을 자랑한다.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하버드 대학교에 퍼져있다고 한다.

'위대한' 설교자들 목록

프리칭지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들을 열거하면서 빌리 그레이엄과 마틴 루터 킹을 처음 10명 중에 두었다. 그 목록은 또한 스코틀랜드 설교자 제임스 스튜어트, 죠지 버트릭, 해리 에머슨 포스딕, 지 캠벨 모건, 윌리엄 생스터, 죤 알 더블류 스토트, 마틴 로이드-죤즈, 및 클레어런스 매카트니를 포함한다. 두번째 10명은 레슬리 위더헤드, 죠지 트루에트, 알 쥐 리, 노만 빈센트 피일, 피터 마솰, 이 스탠리 죤스,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랠프 사크맨, 더블류 에이 크리스웰, 및 가드너 테일러이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해리 에머슨 포스딕, 노만 빈센트 피일 등은 정통 기독교와 거리가 먼 사상을 가진 자들이다.

마틴 루터 킹은 참된 신앙인이었는가?

전 미국연방수사국(FBI) 국장 제이 에드가 후버(J. Edgar Hoover)는 마틴 루터 킹을 "우리 나라에서 가장 악한 거짓말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킹은 공휴일로 지정될 정도로 영예를 얻었고 천주교회에서는 신앙을 위한 순교자로 선포될 후보자가 되었다. 투투 대주교는 지난 12월 세계교회협의회 모임에서 그에게 찬사를 돌렸다. 그러나 크리스챤 뉴스 1월 3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렸다: "수많은 사실들은 킹이 공산당과의 의식적 협력자이었고 표절에 의해 그의 철학박사 학위를 얻은 거짓말장이요 . . . 간음을 행하는 자이었고 . . . 미국의 적국에게 원조와 위안을 준 반역자라는 것을 의심 없이 확증한다. . . . 그는 예수님의 참된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신학교 출신이며 역사적 기독교를 믿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임을 말했다. 그의 새 책 나는 당신을 거기에서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의 참된 면모에서, 마이클 다이슨은 위의 사실들을 일부를 확증하고[표절자, 간음자 등] 킹이 죽을 무렵에는 미국의 불평등의 해답이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 장로교인들은 계속 미국 교회협의회(NCC)를 지원함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미국 교회협의회에 대한 그 교단의 270만불의 후원금과 세계 교회협의회에 대한 120만불의 후원금을 삭감하자는 두 개의 헌의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켰다. 그것은 그 교회가 교회협의회를 위해 충분히 재정 지원을 계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미국 장로교회는 미국 교회협의회의 두번째로, 즉 연합감리교회 다음으로 큰 후원교단이며, 그 돈의 대부분은 세계 봉사국이라는 그 협의회의 기관을 위해 사용된다. 그 교회는 또한 그 협의회의 부채를 위해 50만불을 지원했었다.


■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

칼 바르트는 몸의 부활을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라고 말하였다.
문익환 목사,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 실존적으로 동참함으로 주의 부활에도 동참한다고 믿었다. . . . 고린도전서 15장의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부활한 몸에 관한 호기심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겨둔다고 해서 손해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함으로 믿는 자가 전인적인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현재적 의미와 미래적 의미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재 구원받은 우리에게 새 새명을 주는 원동력이지만, 또한 그것은 미래의 우리의 부활의 첫열매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그러므로 문익환 목사의 이런 혼동스런 생각은 혼란만을 남긴다. 그는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 사실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했어야 했다.

조향록 목사,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그 사건 자체를 사건적으로 입증하든지 부정하든지 하는 논란은 큰 의미를 거두지 못한다. . . . 문제는 이 사건을 받아들이는 수용 자세에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 부활 사건은 신앙의 창문을 열고야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기는 하나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요 대상이 된다.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이 되는 문제나 사건이 신앙하는 자에게 의미적으로 받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입증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큰 문제가 아닌가? 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단순히 신앙의 문제로만 돌리고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며 인식의 대상인 동시에 우리의 신앙의 문제인 것이다.

허 혁 교수, "그러므로 저는 성서에 부활의 사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부활의 보도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 . . 이것을 학자들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 . . 그것은 신앙을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지요. . . . 저는 내가 믿는다는 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사실과 부활의 보도를 구별하는 배면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의심이 있어 보인다. 또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말하지 않고 그 대신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 사건을 말하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확실한 긍정을 보류하는 회의적 태도일 뿐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성을 명확히 인정하지 않고 애매하게 표현하며 단지 그 의미성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불신앙이다.

김동수 목사와 박봉랑 교수는 1973년 부활절 메시지에서 한국교회가 인간의 영혼불멸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부활은 2천년 전의 골고다의 예수의 부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늘 이곳 한국 땅에서 날마다 사는 부활의 승리에서 영광을 되찾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무시하고 현재적 부활의 의미만을 붙들려고 하는 태도는 불신앙과 회의주의적 맛을 남길 뿐이다.

박대선 감독의 불신앙적 신앙 사상

대한기독교감리회 소속 박대선 감독은 1974년 6월 14일 고(故) 홍종철 특별보좌관 장례식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죽지 않고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는 분이 두 분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은 에녹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이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에녹이나 엘리야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육신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을 생각해 볼 때 이 세상에서 불의를 모르고 가장 뛰어나게 의롭게 살다가 죽은 에녹과 엘리야의 사랑하던 제자들과 가족들과 친지들이 에녹과 엘리야의 죽음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하던 에녹과 엘리야의 이미지가 너무나 생생하게 그리고 강하게 그들에게 심어졌기에 도저히 죽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선생이 그들과 같이 앉아서 말씀을 하시는 것만 같고 길을 걸어갈 때도 같이 걸어가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죽지 않고 산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박하게 기록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경수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

제주 남부교회 김경수 목사는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3권)을 번역한 후 다음과 같이 썼다: "신학적으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신학자는 김재준, 칼 바르트, 폴 틸리히라고 할 수 있다. . . . 내가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의 조직신학 교수는 폴 틸리히의 신봉자였고, 그는 폴 틸리히를 빼 놓으면 신학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틸리히 신학에 빠져 있었다. 내가 폴 틸리히에게 몰두하게 된 것도 그의 덕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폴 틸리히는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마음을 빼앗곤 했고 공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폴 틸리히는 매우 과격한 자유주의 신학자이었다. 비록 그 수효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목사가 한국에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예장 통합측 교단은 건전한가?

기독신보 1995년 7월 29일자(1쪽)는 예장 합동측 총회임원회가 예장 통합측과 함께 8.15연합예배를 드리기로 했다고 보도하면서 ". . . 우선 양교단이 화합을 도모해 . . . 교단 교류와 관련해 총회정서를 고려 단회적 행사임을 분명히 밝히고"라고 부언하였다. 동(同)신문 1995년 8월 19일자(1쪽)는 두 교단이 37년만에 한국기독교 연합회관 대강당에서 함께 예배드렸음으로 보도하면서, "양교단의 우호증진은 물론 한국교회연합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하였다.

오늘날은 배교(背敎)와 혼동의 시대이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이 옛부터 전수된 성경적 신앙 그대로를 소유하고 있지 않고 사상적으로, 윤리적으로 매우 방황하고 있다. 오늘날 한 교단의 건전성 여부는 그 교단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의해 판명된다고 본다. '그 교단의 태도'라는 말은 그 교단의 목사양성원인 신학교의 주류적 입장이나 교단 지도자들의 대체적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면 서울 안에 영락교회,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등이 소속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은 과연 건전한 교단인가? 위에 인용한 합동측 총회임원회의 태도에 의하면 통합측 교단은 건전한 교단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예장 통합측 신학교는 어떠한가? 그 신학교가 과연 성경적 바른 신학을 보수, 전수하고 자유주의 이단신학을 배격, 비판하고 있는가?

예장 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몇 가지 상식적, 경험적, 자료적 증거들을 열거해보자. 첫째로, 예장 통합측 신학교인 장로회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오랫 동안 재직하였던 이종성 박사가 신정통주의자이었다는 것은 한국교계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신정통주의'란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의 증거를 부정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한 파로서 칼 바르트, C. H. 다드, 라인홀드 니이버 등의 신학사상을 가리킨다. 둘째로, 같은 교단에 속한 한철하 박사가 '장로회 신학대학이 신정통주의적이다'고 논평한 적이 있다는 것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셋째로, 장로회 신학대학이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에 대해 부정적으로 가르친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넷째로, 그 신학교가 성경의 처음 다섯 권[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성을 부정하고 자유주의적인 문서설을 용납하고 또 이사야 40장 이하를 이사야가 쓴 것이 아니고 후대의 어떤 익명의 저자가 썼다는 자유주의 학설을 용납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자, 우선 이상의 것들이 사실이 아닌가? 다섯째로, 예장 통합측 교단지도자들은, 비록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인물들까지도, 오늘날 심히 배교적인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교단 안에서는 세계교회협의회의 문제점들과 그 단체로부터 탈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여섯째로, 장로회 신학대학원의 한 석사논문은 그 결론 부분에서 솔직히 말하기를, "우리 입장은 신정통주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표류 중이다"고 하였다. 일곱째로, 예장 합동측 신학교에 3년간 재학하였다가 통합측으로 옮겨 수년간 공부했던 필자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은 "과연 예장 통합측 신학교의 분위기가 다르기는 다르더라. 그러나 구약교수 한 명은 보수적이며 문서설을 반대하고 있다. 나머지 교수들은 '고뇌하는 신학자들'이라고 보인다"고 증거하였다. 여덟째로, 1980년도에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 부근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예장 통합측의 한 목사는 학교에서 배운 자유주의 신학과 성경적 설교를 요구하는 현실적 교회의 목회 사이에서 자신이 '고민'하고 있음을 필자에게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아홉째로, 예장 합동측 기관지였던 기독신보의 주필로 오랫 동안 일했던 채기은 목사는 그의 책 한국교회사에서 말하기를, "필자가 진단하기에는 본교단(예장 합동측)을 비롯하여 고려측, 성경장로회측, 호헌파, 재건파, 복구파, 중립파는 전적으로 보수주의 신학편에 들 수 있으며, 통합측은 반반[半半]으로 나뉘어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기장측에는 절대다수가 자유주의 신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본다"고 하였다. 열째로, 1994년 예장 통합측 총회는 701대 612로 여성안수안을 통과시켰다. 다시 말해, 통합측 총회는 사도적 교훈의 신적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이 명백히 금하는 여자목사와 여자장로를 세우는 악을 허용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이 예장 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가? 물론, 통합측의 모든 목사들과 성도들이 자유주의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교단의 목사양성원인 장로회 신학대학원이 자유주의적이라면, 그리고 그 교단의 지도적 목사들의 다수가 자유주의적이라면, 그 교단은 자유주의적이라는 말이다. 누가 예장 통합측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교단이라고 반증하겠는가? 누가 장로회 신학대학원이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성경적 신학을 보수하고 전수하고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예장 합동측 같은 보수교단들은 예장 통합측과의 교류와 교제와 협력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라고 했고(고후 6:14-15), 또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무질서하게]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하였다(살후 3:6).

안병무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예수교인?

크리스챤 신문에 의하면, 목원대 은퇴교수인 송기득 교수(조직신학)는 기독교 사상 2001년 1월호에서 안병무(한신대 대학원장, 한국신학연구소 창설, 현존지 발행)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예수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삼위일체, 신인 양성(神人兩性), 성육신, 대속 등을 믿는 자이다. 그러나 안병무는 역사적 예수를 어떤 분으로 보았는가? 안병무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곧 민중이 해방되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정치범으로 붙잡혀 십자가 형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한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투쟁은 패배로 끝났다. 예수는 로마의 침략 세력을 쫓아내지도 못했고 헤롯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지도 못했고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전복시키지도 못했다. 이리하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다만 민중해방자로서 예수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면 그가 민중해방운동의 길을 열었고 한 역사적 전거(패라다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송기득 교수는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와 역사적 예수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삼위일체론, 양성론, 육화론[성육신론], 대속론 따위는 그리스도에 관한 중심 교리로서 그 나름의 진리성을 갖는다. 다만 학자들에 따라서 그 해석이 다르기도 하고 또 어떤 교리는 부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한 안병무의 역사적 예수는 삼위일체적 존재, 성육신(成肉身)한 존재, 신인 양성(神人兩性)을 가진 존재 등이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안병무가 '예수는 철저하게 "사람"이었다. 그것도 "보통사람"이었다'고 말한 데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 . . 사실 역사의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처형된 것이 아니라 민중해방운동을 벌이다 그 대가로 십자가 형틀에서 살해된 것이다. 만일 예수의 죽음을 굳이 '대속'이라는 말로 이해하려면 그것은 이스라엘 민중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지배 세력에 대한 민중의 항거를 대신한 대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속론을 펴려면 '민중의 대속론'을 내놓는 게 좋을 것이다. 그리고 대속론에서 대속을 받아야 할 진정한 죄는 구조악에 연원하고 있다. 예수는 죄의 대속자가 아니라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죄, 즉 구조악에 대한 항쟁자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로 보아 우리는 역사의 예수의 실상과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해석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송기득 교수는 안병무가 '그리스도교인'이 아니고 '예수교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교회의 자유주의 신학의 한 단면을 잘 보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장이었던 안병무, 그리고 그에 대해 해석하고 있는 대한기독교감리회의 목원대학 조직신학 은퇴교수 송기득, 이들의 사상이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단면을 잘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송기득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교리들, 즉 성육신과 신인 양성과 대속의 진리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고 심지어 부정할 수 있는 주제로 보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실질적인 내용으로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또 그에 의하면, 안병무는 이런 교리들을 명백히 부정했다. 안병무에 의하면, 예수는 민중해방운동을 펼치다가 실패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한다. 단지, 예수가 민중해방운동의 길을 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기독교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무서운 이단 사상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부정하고 성경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사상이다. 기장측, 기감측, 그리고 통합측 등에서 용납되고 있는 이런 자유주의 신학은 명백히 이단적이다. 그런데 보수교단들의 지도자들이 별 문제 의식 없이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부르짖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합과 일치를 주장하려면 먼저 자유주의 신학을 포용하는 교단들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이종성 박사의 불신앙적 성경관

예장 통합측 장로회신학대학 학장이었고 현재 기독교학술원장인 이종성 박사는 2001년 2월 15일 제22회 학술세미나에서 성경에 대한 그의 견해를 말했다. 거기에서 그는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글자의) 영감과 성경 내용에 오류가 없다는 견해를 근본주의자들의 견해라고 배격하고, 성경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켜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소위 신정통주의적(칼 바르트의) 견해를 '복음적 성서관'이라고 표현하며 받아들인다. 또한 그는 성경을 우주와 인류 역사에 관한 기록으로 이해하는 보수 신학자들의 견해를 정당하지 않다고 말하고 창세기는 우주 생성에 관한 과학적 기록서가 아니라고 했다.

그의 신정통주의적 성경관은 예장 통합측이 자유주의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확증하였다. 신정통주의는 옛날 자유주의 신학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파괴적 이단사상이다. '성령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실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주장은 순진한 성도들을 혼란시킬 만하다. 우리도 성령의 내면적 역사를 믿는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의 문제는 하나님의 진리가 객관적인 인간의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칸트 철학에 기초하여 결국 성경의 객관적 권위를 부정하고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을 부정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는 창조와 인류의 초기 역사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도 부정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불신앙을 분별하고 배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