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방이 말하는 영접은 무엇인가?

 

                                                                                                                                                              이인규

  선지자선교회

다락방 류광수목사는 유독 영접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전에는 기존교인들도 예수를 재영접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그것이 이단발표가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영접에 대해서 자주 말하며, 영접기도라는 것을 지금도 합니다. 그 영접이라는 용어가 일반교회의 영접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락방에서 말하는 영접이라는 용어의 개념이 도대체 무엇인가? 류광수목사는 양태론적인 주장과 이단적인 기독론을 이해하여야만 그것이 곧 영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말하는 영접이라는 의미는 2000년 동안 기독교가 전하던 삼위일체가 아니라, 양태론이라고 하는 이단적인 주장이 내포되어 있으며, 정통기독론이 아닌 이단적인 기독론이 곧 영접이라는 것입니다.

 

혹간 다락방에서 그렇게 배우지 않는다고 변명하는데, 그렇다면 다락방은 류광수목사를 이단으로 발표하셔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다락방에서 가르치는 류광수목사의 양육교재에는 분명히 양태론과 이단적 기독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영접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정통삼위일체는 본질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모두 하나님이지만, 인격적으로는 서로 교류가 가능하며, 상호구별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락방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이 구별되지 않고 동일합니다. 이러한 양태론은 지방교회, 베뢰아와 같습니다. 또한 아폴로내리우스의 주장과 같이, 예수님의 영만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성도들에게 내주하는 성령과 예수의 성육신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락방에서는 "영접"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성부하나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단적인 양태론을 인정하는 것이 그들의 영접이 됩니다, 아래는 다락방에서 가르치는 그들의 교재입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본멧세지- 영접의 열두가지 의미)

 

영접-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한다. 그러니까 이 말을 이해해야만 영접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영접시킨다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지요. 신약에서는 영접이라는 말을 요한복음 1장에서 썼는데 구약에서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구약에서는 전부 예언이고, 그림자인데 신약에 와서 썼습니다. 구약에는 성령이 임했다. 동행했다. 이 말은 썼지만 성령의 내주란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난 뒤에 쓴 단어가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렇지요? 이 말을 이해해야만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셨다는 이 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오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뭐라고 말하느냐? 성령의 내주! 이것을 이해해야 이해되는 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 오셨다는 그 말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뭘 주셨으니?-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 성령의 내주입니까?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사건은 "성육신"이며, 성령의 내주는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오신 사건입니다,

 

성육신과 성령의 내주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즉 다락방은 성령과 성자의 인격을 구별하지 않으며, 그것을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양태론자들, 특히 지방교회는 인간이 성육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방교회는 성육신과 성령의 내주를 동일한 것으로 보아서 우리도 예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류광수목사가 말하는 영접은 양태론적인 내주, 즉 성부하나님 자신이 육신으로 온 사건과 성령이 우리에게 온 사건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류광수목사는 산해원에서 베뢰아 사상을 배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산해원의 이태화(이갈렙)목사는 베뢰아계열로 소속교단에서 제명되었고, 공개사과를 하여 잠시 풀렸지만, 기독교방송에서 요한복음을 가르치다가 양태론이 문제되어 도중 하차한 적이 있습니다. 베뢰아는 양태론을 가르치며, 베뢰아출신들은 하나같이 양태론을 주장합니다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자란 그 이름을 믿는 자입니다. 류광수목사는 영접과 믿음을 다른 것으로 구별하는데, 1:12은 영접과 믿음을 같은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것을 문제삼자 류광수목사는 영접이 믿음이라고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류광수목사가 말하는 영접은 일반교회가 말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류광수목사는 "예수가 육신을 입어 오셨다"는 것과 "성령의 내주"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셨다"고 표현합니다.

 

더욱이 성령의 내주를 주님이 여러분 속에 오셨다고 설명하며, 그것을 영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육신으로 오신 성육신 사건은 2000년 전의 초림입니다. 성령의 내주는 거듭난 자에게 임하는 성령이며, 오순절 이후입니다. 류광수목사는 이것을 같은 것으로 봅니다. 명백한 양태론입니다.

 

양태론을 인정하게 되면, 불사의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됩니다, 또 예수의 재림이 성령이 오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또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한 것이 오류가 되며, 성자가 성부께 기도하는 것이 오류가 됩니다,

 

그런데 양태론자인 지방교회는 예수와 성도를 같은 개념으로 봅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 것(하나님+ 인간)이고, 성도는 인간의 육신에 하나님이 들어온 것(인간 + 하나님)으로서, 예수와 인간이 동일한 개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지방교회는 예수를 God-man이라고 부르며 성도들의 첫샘플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지방교회의 구원관은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을 가르킵니다. (즉 지방교회의 양태론과 기독론은 모두 이단적인 주장에서 비롯됩니다)

 

만약 표현적인 실수니 착각으로 이런 주장을 하였다고 생각이 될 수도 있으므로, 다른 주장의 내용도 더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표현은 반복적으로 나타남으로서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인 의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기본멧세지 -영접의 열두가지 의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그 말씀을 다 성취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이 뭐라고요? 성령 하나님. 맞지요? 너무 너무 놀라운 구원의 비밀입니다. 당장 여러분이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하나님의 비밀. 성삼위 하나님이 내 속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 때문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이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떻게?- 성령 하나님으로, 이것을 보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비밀이 아닙니다. 그러나 류광수목사는 삼위일체를 비밀이라고 계속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비밀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류광수목사는 다락방이 2000년 교회사를 통하여 유일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신 것이 성자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 것이 성령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명백한 양태론입니다. 그러므로 삼위를 구별하지 않는 이러한 양태론이 류광수목사에게 비밀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물론 성령도 하나님이고, 성자예수도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구별함이 없이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양태론적 표현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온 것이 예수가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신 것이 성령이 아닙니다. 류광수목사는 이러한 이단적인 양태론을 "영접"이라고 말합니다.

 

계속 살펴 보겠습니다. 과연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 혹은 류광수목사의 신학적 무지인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교리에 반복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편지 제6: 구원받은 나는 어떻게 변했는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계획을 총동원하셨다. 그가 성육신하시고(1:14), 피 흘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성령으로 간섭하고 계신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을 잘못 알고 있다.

 

(현장복음 01과 구원의 확신)

 

복음을 알려면 다음 3가지를 알아야 한다.

 

(1)복음이란?

 

성경에는 두 가지로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다. 이 말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이것을 강조하였다. 초대교회서 사람을 살린 확실한 메세지가 이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보혜사 성령으로 여러분을 세밀하게 인도하고 계신다. 부활의 주님이 늘 강조되어야 한다.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핵심 및 특강자료, 하나님의 언약 1. 성경의 증거를 붙잡으라)

 

(3) 부활

 

- 언약을 붙잡은 사람은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

 

- 고전15:3-5 성경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로 죽으시고, 그리스도라는 증거로 부활하심.

 

- 이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심 예수 이름을 불러보라

 

(4) 성령

 

-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 1:4-8, 2:1-47(응답), 고전2:10-12, 요일2:20-23

 

이제는 의심할 바 없는 양태론적인 표현이 나타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예수라고 하는 아주 구체적인 양태론적 주장도 나타납니다.

 

정통삼위일체로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왜 류광수목사는 이러한 영접의 의미를 비밀이라고 주장하였을까요?

 

(복음편지 -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1)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1:14)

 

우리가 만날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2)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15:45)

 

고전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3)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16:16-19) -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

 

(현장복음 19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3)고전4:45-50 하나님- 예수님은 그 영이 하나님이시다.

 

(4)1:14 사람- 예수님의 그 육이 사람이시다.

 

(류광수, 현장복음 18- 예수께서는 왜 죽어야 하는가)

 

5. 신약의 성취적 의미:

 

(4)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

 

그 영은 하나님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다. 신약에 참으로 중대한 말이다. 여러분 중심에 정말 주님이 역사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참으로 중요하다.

 

여기에서는 양태론뿐 아니라, 기독론에도 심각한 이단성이 등장합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기독론이 과연 "예수의 영은 하나님이고 몸만 사람인 것"을 뜻할까요? 이것은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양태론과 지방교회의 기독론과 동일한 주장이며, 영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예수를 하나님이 된 첫 샘플(God-man)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영만 하나님이시고, 몸은 사람일까요?

 

4세기 경 라오디게아 교회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는 예수가 인간의 몸을 갖었지만, 인간의 정신이나 영은 갖지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정신과 마음은 하나님의 신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였기에 인성의 축소를 주장하게 되었고 이를 아폴로나리아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한편 인간을 육, , 영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육체와 혼의 두 부분으로만 구성되었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신적 로고스는 영의 자리를 취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날 지방교회가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며, 위트니스 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습니다.

 

- 비록 그분의 "인간의 부분"이 죽었지만, 죽지 않는 "그분의 신성한 부분"은 영원히 산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자신 안에 신성한 요소 곧 거룩의 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위트니스 리, 새예루살렘, 44-45)

 

- 그 분(하나님)이 육체 안에 사셨을 때에 "그분의 한 부분"은 다만 사람, 곧 다윗의 씨였다. 그 부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 부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인정됨을 통해서이다(같은 책 45)

 

즉 사람을 (+ )으로 보고, 하나님은 ()으로 보아, 예수를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의 육체가 인성의 부분이었을까요? 성경은 예수의 육체에 신성이 충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9)

 

류광수목사의 삼위일체는 본질에서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양태론입니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의 인격적인 구별이 전혀 없습니다.

 

즉 그가 말하는 "영접"이란 양태론적인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예수를 영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류광수목사는 그것을 비밀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반 교회는 예수를 다시 재영접하여야 하고, 일반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였듯이 다락방이 2000년 만에 복음을 회복하였다는 것은, 2000년 만에 양태론을 다시 회복시켰다는 뜻입니다,

 

(현장복음멧세지 - 성령은 누구인가?)

 

신약 시대에 와서 성령은 내주하고 있다. 구약에 내주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신약에서는 성령이 내주하고 있다. “너희속에 계시겠음이라이것을 보고 무슨 말과 이해가 되는가 하면 영접이란 말과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다.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누가 오시는 것인가?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삼위일체!

 

류광수목사가 베뢰아와 위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는 양태론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김기동목사와 위트니스 리가 곧 양태론자이기 때문입니다.

 

정통교단의 이대위들은 "지방교회 - 베뢰아 - 산해원(이태화) - 류광수"의 라인을 언급합니다, 류광수목사는 마산 산해원에 버스를 대절하여 교인들과 수차례 방문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위트니스 리와 김기동목사는 구약에서는 성령이 내주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동일한 주장을 류광수목사가 하고 있습니다.

 

#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예수 안에 계신 성령은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과거 선지자들도 성령을 힘입었고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충만함을 입어'라고 했으나 그들은 성령의 권위로 외투를 입고 있듯 힘입었던 것이지 내주하여 임하신 것은 아닙니다. <김기동, 성령을 알자 책76페이지>

 

# , 구약의 두 기간동안의 사람에 대한 성령의 역사와 첫 번째 특징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이 외적으로 사람에게 임했으며, 신약에서는 성령이 사람 안에 거주한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 성령 580)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약에서도 성령이 임한 사건은 많습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성령의 내주가 서로 다른 것은, 구약은 하나님이 특별한 사역을 준 소수의 사람에게만 성령이 임하였는데 비하여, 신약에서는 모든 만인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양태론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 류광수목사는 오해이다, 전도를 강조하다가 잘못된 표현일 뿐이다. 용어를 수정하겠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그는 다락방을 비판하는 공청화에서, 모든 것을 "용어상 표현상 오해"라고 변명하며 수정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단시비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다락방교재는 동일한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음은 정통신학이 말하는 기독론입니다

 

- 2세기의 그노시스파는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을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순화한 육체, 혹은 천적인 육체로 보고, 또 어떤 사람은 "인간적인 예수와 신적인 그리스도를 구별"하여, "신적인 그리스도는 임시로 인간예수와 결합하였다"고 보았다. 4세기의 싸벨리우스파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루이스벌콥, 기독교신학개론 197-198)

 

- 성자의 신성이 공적으로 확립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가지 성질들이 서로에 대해서 갖는 관계에 대한 의문이 자연적으로 제기되었다. 아폴리나리스는 문제의 해결점을 제공하였다. 그는 사람이 신(), (), ()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헬라의 삼분적인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서 로고스가 사람 안에 있는 영을 대신하였다(그는 영을 죄의 좌소로 보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

 

- (아폴로내리우스)는 사람이 신, , 영의 3부로 구성되었다는 헬라철학의 3분설의 개념을 가지고 로고스가 죄의 좌소인 영의 자리를 취하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체와 혼만을 가지셨고 영의 자리는 로고스가 채웠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축소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영이 없는 인성을 입으신 것이다. (신복윤교수의 기독론)

 

- 성육신(incarnatio)이란 말씀이 육신이 되다이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인카르티오를 탁신(託身)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성육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도성인신(道成人身)의 본래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육신을 입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육체를 입으신 것이 아니라, ”육체를 취하시고“, 혹은 가지시고“(assume, take), 사람과 같이 되셔서(became) 세상에 나타나셨음을 의미한다.(조직신학 상, 조석만, 대한신대원 출판부, 439)

 

결론:

 

(1) 다락방은 처음에 일반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도 다락방에서 다시 예수를 영접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재영접"이라는 용어가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2) 다락방 교재를 보면 "믿는 단계""영접 단계"를 다른 단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류광수목사 설교 테잎에도 믿음과 영접을 구분하고 있는 내용이 분명히 있습니다, 더욱이 류광수목사는 이것을 수정하겠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다락방 교재에는 그대로 있습니다,

 

(3) 위 자료에서 보듯이 영접이라는 의미는 양태론적인 개념으로 예수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 자신을 뜻하며 성령을 말하며, 삼위일체의 인격적인 구별이 전혀 없는 것을 류광수목사는 영접의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에게 성령이 들어오는 것을 류광수목사는 하나님자신이 우리에게 온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것을 알아야만 영접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해서도 영이신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온 것이라고 양태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알아야만 영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4) 류광수목사는 2000년 동안에 다락방만이 복음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류광수목사의 영접의 뜻이 일반 기독교와 동일하다면 다락방만이 복음을 전한다는 그런 주장을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가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다락방이 기독교와 다른 가르침을 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자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