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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6. 9. 수야

 

본문 : 학개 2장 20절~23절  그달 이십 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유다  총독 스룹바벨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것이요 열국의  보좌를 엎을 것이요 열방의 세력을 멸할 것이요 그 병거들과 그 탄 자를  엎드러뜨리리니 말과 그 탄자가 각각 그 동무의 칼에 엎드러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다음 주일 공과요 지난 주일 오전 예배 때 증거한 말씀입니다.

제목은 성전 건축.

일대지. 성전은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다. 보이는 성전은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생겨지고 또 보이는 성전은 보이지 않는 성전을 위하여  있다. 보이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성전이 건축되고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성전이 건축된다. 보이는 성전은 예배당과 보이는  사람들을 말하고, 보이지 않는 성전은 참 그리스도인과 하나님과 진리로 하나가  된 단체를 가리킨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 보이는 연보가 나와 보이는  성전의 일부분인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이대지. 학개서에 보면 성전 지을 때에, 성전 지을 때에 복받는 길도 있고  화받는 길도 있다. 우리 서부교회 유치반, 중간반, 장년반의 그 개인 한 사람 한  가정이 다 복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고 화를 면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화받는 길은 성전 건축은 무시해 버리고 사리 사욕만 생각하여 급급한 행위가  하나님을 노엽게 함이 되고, 또 자기의 성결을 더럽히는 것이 노엽게 함이 되어  많은 활동과 사업에 수입이 없게 하고, 또 많은 수입해 놓은 것도 하나님이  바람으로 불어 날려 보내고 전대 속에 단단히 간직해 놓은 것도 구멍을 뚫어지게  하고 모든 재앙을 내려 범사가 화로 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셨다.

복받는 길은 먼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에는 자기의 심신의 노력을 바치고,  소유를 바치고, 성결하게 회개를 하고, 열심을 품어 마음으로, 몸으로, 말로,  노력으로, 물질로 성의를 기울이는 자들 위에 모든 자연물과 전인류가 협동하고  원수는 강약을 막론하고 다 멸하여 주시며 각자의 사업도 그의 소득 전부도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삼가 조심하고 이 축복을  바라면서 성전 건축에 성심성의를 다 하여야 할 것이다.

광고합니다.

오늘 밤에도 예배 끝난 30분 기도 후 1층에서 종전같이 철야기도가 있고 또 이  말씀을 녹음으로 재독해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건축을 위해서 늘 계속해서 이 일곱 가지를 기억하면서 기도합시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 건축을 기뻐하셔야 하고, 둘째는 온 성도들의 성심성의가  단합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 셋째는 관민들이 다 이 일에 대해서 협조를 해  줘야 되겠고, 넷째로는 시공자에 대해서 지혜와 총명과 건강과 성의를, 충성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겠고, 또 이 건축에 사고 없이 하나님이 안보해 주시기를  기도해야겠고, 좋은 재료 구입해 주시기를 기도해야겠고, 좋은 일기도 주어서 잘  진행되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이 일곱 가지 종목으로 계속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김해 묘지에 고속도로가 나면서 그 편입 도로에 대해서 묘지 부장  ○○○집사님이 여러 수십 번 다녔습니다. 그래 가지고 묘지로 진입도로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이 도로에 대한 수축하는 것은 관리는 우리에게  맡으라고 말했습니다. 그 잘됐습니다. 우리가 맡지 않으면 손 대지 못하는데  우리가 맡기로 됐기 때문에 언제든지 우리가 수축할 수 있습니다. 이래서 여름  장마가 오기 전에 그 도로를 잘 수축해야 될 것이라서 오늘 밤에 위원들이  모입니다. 장로님들 참석하시면 좋겠고 또 ○○○집사님, 묘지부장  ○○○집사님은 의례히 주체가 되어 가지고 모이게 해 달라고 광고했습니다.

장로님들은 할 수 있으면 다 참석해서 이 일에 좋은 안이 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밤 말씀은 지난 주일 말씀을 다음 주일날 주일학교와 중간반에게 가르칠  공과가 되어서 한번 더 증거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증축하게 됐습니다. 예배당 짓는 것을 성전 짓는다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학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 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우리 신약교회에 전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구약  성경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획 하나도 없앨 수 없고 가감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학개서에 기록한 이 성경 말씀도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이나 꼭 같은 율법이요 같은 예언이요 같은 복음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보이는 성전을 위주로 했고 보이지 않는 성전은 그 이면에  지어졌었습니다. 신약교회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위주로 하고, 또 보이는 성전도  성전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는 성전인데 신약 시대 와서는 교회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성전은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이렇게 분류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말이나 성전이라는 말이나 다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첫째 보이는 성전, 보이는 교회는 어떤 것을 가리킴인가 하는 데 대해서,  첫째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신구약 성경 이 문서 계시, 우리가 볼 수 있는  신구약 성경 이 도리와 또 보이는 예수 믿는 사람들과 또 보이는 예배당과  보이는 예배드리는 행사 의식 이것을 가리켜서 보이는 교회라 보이는 성전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또 보이지 않는 성전은 하나님이신 성령의 감화와, 성령의 감화와 중생된 자들의  영과 또 중생된 영혼들의 단체 이것을 가리켜서 보이지 않는 성전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감이면 곧 진리는 영감에서 나왔습니다. 영감과, 영감은 보이지  않습니다. 영감과 중생된 영과 또 영감대로의 영의 단체들의 행동하는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성전입니다. 이것은 다 보이는 예수님의 피공로를 입어  피공로 안에서, 또 신령한 성전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이 공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전이라는 말은 거룩한 집이라는 말인데, 거룩한 집이라 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집이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된 이 인간 단체와 예배당이 보이는 성전이요, 보이지 않는 성전은  하나님이신 성령의 감화 감동과 중생된 영들과 성령의 움직임으로 움직이는 믿음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성전입니다. 믿음은 행하는 것만 보여지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이루어질 때에 행하여진 그것이 보여집니다.

행하여진 것은 보이는 성전에 속했고 보이지 않는 그 행위 이면에 우리 마음,  뜻, 성품, 생명 바쳐서 사는 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보이는 성전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성전이 점점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또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성전이 지어져 갑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만 있어도 안됩니다. 또 보이는 성전만 있어도 안됩니다.

보이는 성전뿐이면 그거는 외식하는 교회요 또 보이지 않는 성전뿐이고 보이는  성전이 없으면 그것은 반드시 신령한 교회가 아니고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보이는 외부와 보이지 않는  그 이면 양면으로 되어 있는 것이 세상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이 학개서에서  말씀하신 말씀은 양면 교회에 대해서 다 말씀하신 말씀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이 구약 때에 육체의 성전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 말씀한 것인데 오늘  신령한 신약교회에 와서 상관없는 말씀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기 쉽겠습니다.

또 오늘 신약교회는 ‘너희들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말씀하셨다’ 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으니까 예배당 짓는 것은 그게 무슨 성전이 되겠느냐  그렇게들 또 생각하기 쉽겠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짓는 것은 보이는 성전의  일부분입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성전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 성전이 커 나가지를 못합니다. 믿는  사람의 몸도 없고 언행심사도 없고 중생된 영뿐이고 또 영감뿐이고 신구약 성경  말씀이 없고 또 예배당이 없고 하면 신령한 성전이 안 지어져 갑니다.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성전이 생겨지고 또 보이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성전이 더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 성전은 양면을 가지고 있는  성전이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보이는 성전은 끝납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이  끝나지 보이는 성전이 그때는 신령한 성전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신령한  성전으로 변화받아 가지고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양면 성전이 서로 없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보이는  성전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신령한 성전이 만들어져 갑니다. 전도하러 그  사람이 가 가지고 전도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가르치는 말씀도 보이는 성전에  속했소. 또 그 사람, 전도하는 사람도 보이는 성전에 속했소. 예배당을 지어  놓고 이래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는 것도 보이는 성전에 속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감화 감동, 또 보이지 않는 중생된 영들, 또  성령의 생각, 성령의 소욕,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데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신령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 순서로 보이는 성전이 먼저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먼저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먼저 있고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보이는 성전이  지어집니다. 순서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이 먼저입니다. 또 가치성은 보이지 않는  성전은 주격체요 보이는 성전은 보이지 않는 성전에게서 나왔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가치성도 보이지 않는 성전이 더 크고 존귀하고  보이는 성전이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이 이루어져 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보이는 성전이  생겨졌고, 또 보이는 성전이 점점 온전해져 가고 충만해져 갑니다. 또 보이지  않는 성전은 보이는 성전으로 말미암아 점점 온전해지고 충만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보이는 성전에 힘을 쓰는 것과 보이지 않는 성전에 힘쓰는 것을  같이 써야 합니다. 어디다가 더 많이 기울이고 덜 기울여야 하느냐 하는 것은,  그는 논리적으로, 순서적으로, 평가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성전면이 더 위에  있지마는 우리가 힘을 쓰는 것은 양면을 꼭 같이 힘쓰지 않으면 성전은 안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양면을 꼭 같이 힘을 써야 성전이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성전에만 힘을 쓰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위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또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 보이는 성전을 위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은 보이는 성전을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보이는 성전 노력은  보이지 않는 성전 위해서, 보이지 않는 성전에 소망을 두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성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고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는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고 이렇게 우리는 양면 성전을 이렇게 건축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을 자꾸 이렇게 많이 하느냐? 잘못하면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을 둘을 갈라 놔 가지고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치우치든지 보이는  성전으로 치우치든지 해서,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치우치는 사람은 보이는  성전을 무시하고, 보이는 성전으로 치우친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성전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모든 게 다 헛일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는 보이는 성전을 귀중히 여기는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는 보이는 성전을 위해서 전력을 기울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는  보이는 성전을 건축합니다. 또 보이는 성전에서는, 보이는 성전에서는 보이는  성전만 건축할려 하면 헛일입니다. 보이는 성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여기에만 주력을 합니다.

이거 무슨 말인지 알쏭달쏭해서 좀 듣기가 안됐지만 그래밖에는 표시를  못합니다. 하나 예를 든다고 하면 우리는 지금 예배당 짓는 것이 보이는 성전의  일부분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당 짓는 데에는 우리가 예배당  지으면서 예배당 짓는 데만 전심 전력을 기울이면 헛일이라 그말입니다. 우리가  예배당 짓는 데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전 짓는 데에 전력을 기울여야 됩니다.

보이는 성전을 지으면서 보이지 않는 성전 짓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다니? 그러면  우리가 보이는 연보를 하면서 이 연보하는 것이 성신의 감화를 자기가 받는, 이  연보로서 성신의 감화의 충만을 자기가 받기를 원해야 되고, 이 연보 함으로  신령한 사람이 장성해지기를 원해야 되고, 이 예배당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이 장성하고 강건함을 얻는, 이 예배당 짓는  여기에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새사람이 장성해지고 새사람의 그 역사가  우리 서부교회에 충만해져야 우리가 이 성전 짓는 성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지금 퍼뜩 들으면 잘 모를 것이나 잘 집에 가서 양심을  생각하면 알게 됩니다.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다. 둘은  나누어질래야 나누어질 수 없는 인연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배당 이런  것은 다 끝장나지만 이 예배당에서 역사하던 그 역사는 신령한 역사로 변화되어  가지고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진리를 배우고 여기에서 기도를  하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섬겨서 신령한 성전이 여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러기에 우리의 이 육체가 죽지도 늙지도 쇠하지도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처럼 이 만물이 새롭게 될 때에 이 예배당도 어떻게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다는 것은 남겨 있지 않지만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이 모든 것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령한 성전 건축과 보이는 외부적 성전 건축은 하나이다 하는  그것을 지금 말하려고 이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은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하나이다.

그러기에 보이는 성전에서는 보이는 성전의 그것만 하면 안 된다. 보이는 성전  짓는 일을 하면서 그 전심 전력은 보이지 않는 성전이 이루어지는 데 거기다가  전심전력을 기울여라.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는 자기가 새사람 생활을 할 때에는,  새사람 생활 할 때에 새사람 생활만 하려고 애쓸 게 아니라 새사람 생활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환하게 보게 예수 믿는 생활을 나타내도록 하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 것 이것을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보이지 않는 성전과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 꼭 같은 부담되는  말씀, 꼭 같은 약속된 말씀을 하신 것을 증거하려고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자꾸 거듭하느냐? 사람들이 잘못하면 보이는 성전을 말하는 사람은  보이는 성전으로 그리 치우쳐 가지고 일방적이어서 헛일하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말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치우쳐서 그 양면이 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지고 다 곁길을 간다 한 말씀대로 헛일이 되기 쉽기 때문에 지금 자꾸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성전과 보이는 성전은 하나는 물질로 되어 있고 하나는  신령한 것으로 되어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지금은 물질과 신령의 것이지만  이것이 예수님 재림되면 신령한 것으로 변화된다. 만물이 영원히 멸망받지 않을  것으로 만물이 새로워진다 하는 그때에 이 모든 것이 신령한 것으로 변화되어  가지고 이 물질의 것이, 물질의 것이 영계에 마음대로 가서 옮겨져서 활동할 수  있는 것으로 이렇게 신령하게 변화되어집니다.

지금 우리 몸둥이는 말이오. 우리 몸둥이는 문만 볼끈 닫아 놔도 못 들어갑니다.

문만 닫아도 못 들어가요. 그러나 신령한 몸으로 변화됐을 때에는 이만하게 집채  무더기만한 무쇠 덩어리가 있으면, 무쇠 덩어리가 있으면 무쇠 덩어리 안에 그저  1초 동안에 백 번이라도 들어갔다 나왔다, 백 번이라도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여기에 있으면 이 공중에 한 길 위에도 높아 놓으니까 못  뛰어 올라갑니다. 그때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됐을 때에는 이 우주를 1초 동안에  몇백 바퀴라도 돌 수 있습니다. 1초 동안에 몇백 바퀴라도 돌 수가 있고 또 이  물질계만 있는 게 아니라 영계도 마음대로 왔다 갔다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변화됩니다.

지금은 신령한 영과 육 이것이 나누어 있어서 영은 영계에서만 활동하고  물질계에서는 활동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물질계에서 이 물질이라는 몸하고  영하고 나뉘면 영은 얼른 영계로 날아가 버립니다. 영계로 날아가야 되지 이  물질계에는 못 있습니다. 여기 물질계에 있지를 못해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이게 뭐이냐? 영과 육이 나뉘는 것이라 이랬습니다.

죽음이 나뉘는 것인데, 영과 육이 나누어지면 영은 얼른 영계로 그만, 나뉘자  영계로 가 버리지 여기에서 활동을 못 합니다. 영이 물질계에서 활동할 때에는  물질을 집어 타고 물질 속에서, 물질을 통해서 말도 하고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모든 걸 하지 물질 속에서, 마치 우리가 바다 갈 때는 배 타고 가는 것처럼  이 물질을 타지 않으면 이 물질계는 활동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변화가 되고 난 다음에는 영도 이  물질계에 얼마든지 올 수 있고 또 물질도 영계에 얼마든지 갈 수 있어. 영도  물질계에 어디든지 자유로 다닐 수 있고 물질도 영계에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시간과 공간, 영계 물질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육이 똘똘 뭉쳐서 한 사람이  되어 가지고 사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와 마찬가지로 신령한 성전과 또 보이는 물질의 성전, 보이는 성전  보이지 않는 성전, 보이지 않는 성전은 신령한 성전인데,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보이지 않는 거는 신령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나뉠 수 없는 하나입니다. 이 둘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이나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는 이것이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변화를 입지를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영계의 것은 영의 것이요, 물질계의 것은 물질계의 것으로  이와같이 이색지게, 아주 이색지게 두 종류로 나누어 가지고 이렇게 있으나 실은  활동은 벌써 연결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연결이 되어서 신령한 교회는 보이는  물질 교회에 주력하고, 물질 교회서는 신령한 교회에 대해서 봉사하고 수종들고  이래 가지고 새로 성신의 감화가 우리 육을 통해서 나오고 우리 육이 영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접선을 하고 이렇게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령한 교회와 물질의 교회,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 이 둘은  하나이라. 그러기 때문에,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이는 성전에 대한 행동이  있고 보이지 않는 성전에 대한 행동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 보이지  않는 성전에서 생활할 때에는 서기는 보이지 않는 성전에 서 가지고 일은 보이는  성전을 위해서 일합니다. 또 보이는 성전에 서서 일을 할 때에는 보기에는  보이는 성전에 대해서 일하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성전에 대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아침마다 일곱시 오분 전에 간단하게 예배를 봅니다. 예배를,  기도하고 간단하게 말씀을 증거하는데 네 가지입니다. 네 가지 표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우리가 일하면서 첫째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해서,  하나님을 좀 가까이 해서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라 하는 그것을 첫째 부탁합니다.

일하라는 부탁 하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과 밀접해지는 이 일을 오늘 해라 그것 첫째 말합니다.

또 그 다음에 둘째로는 서로 각자들의 그 심령을 북돋워 줘서, 마음을 북돋워  가꾸어 주고, 마음을 북돋워 가꾸어 줘서 그 마음이 옳고 바르고 진실되고  거룩되고 착하고 의롭고 한 그 마음을 잘 가꾸어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죽이고 마음을 상우고, 마음을 상우지 말고 그 마음을 잘 가꾸어서 피차  보호해라 요걸 둘째로 말합니다.

이제 셋째로 말하는 것은 서로 몸을 아껴서 내가 저 사람 몸을 아끼고 저 사람  몸을 아껴 가지고 서로 몸을 상우지 않도록 이 일을 위해서 노력해라 하는 요 세  가지 말합니다.

하나 더 남았습니다. 하나는 같이 일할 때에 그 사람과 나와의 화친이 되어지고,  하루 일하고 나니까 그 사람과 나와 친밀해져서 그 인격과 내 인격이 서로  교류되어지고 이렇게 화친해져서 ‘참 어제 하루 그분과 일할 때에 그 감화받은  것은 잊어버릴 수가 없다’ 하도록 이렇게 피차 친밀해지는 이 일을 하도록  해라. 여기 네 가지 해라. 오늘 종일 이 네 가지 해라. 이 네 가지 하고 일은 이  네 가지 하는 가운데에서 저절로 되는 일을 해라. 일 많이 하라는 소리 한 번도  한 일이 없습니다. ‘요 네 가지 요것을 여러분들이 행하면서, 요 네 가지  행하는 그 사람으로서 그 남은 힘을 가지고 일을 하십시오.’ 그렇게 말합니다.

그 말하는 것은 우리가 보이는 성전을 짓는데 보이는 성전 짓는 데에서 보이지  않는 이 성전이 건축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보이는 성전에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지금 건축해야 돼. 여기에서 예배당 지으면서, 예배당 지으면서  이전보다 영감에 더 충만해져야 되고, 이전보다 예배당 지으면서 영감이 더  충만해져야 됩니다.

내가 처음에 여기 만나서 일하던 사람들 야단을 쳤습니다. 왜? ‘너거 이거  뭐이냐? 순 방종, 아무짝도 쓰지 못할 노름패꾼, 웃기는 뭐 때문에 웃으며  고함은 뭣 때문에 지르며 떠들기는 뭣 때문에 떠드노? 조용히 하라. 속에 바람을  잡아 넣어 가지고 하나님 생각지도 아니하고’ 이래 좀 야단을 쳤습니다.

야단을 치고, 어쩌든지 아침에 말한 대로 그렇게 마음을 가다듬어서 자기 마음을  자기가 잘 가꾸어 가지고, 이 예배당 지으면서, 여기 일하러 안 온 사람이 더  많아요. 자기가 연보한 사람도 연보하는 그 연보를, 연보를 하고 나서  생각함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져, 영감과 가까워지고, 연보 작정한 돈을  마련하면서 가까워지고, 연보 작정한 돈 하지 못해서 애타함으로 가까워지고,  성령님과 가까워지고, 중생된 영인 새사람 속사람이 점점 이로 인해서  새로워지고, 신령한 영감의 행동이 이루어지고, 이제 이 보이는 성전을 지으면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이 면에 주력을 하면 우리 하나님이 기뻐서 모든  일을 다 해 주십니다. 모든 일을 다 해 주셔.

이러니까, 그래서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는 말은 여러분들에게 이  말이오. 잘못하면 이 학개서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리 치우쳐 버리고 어떤  사람은 저리 치우쳐 버리고, 이 말씀이,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 이 두  성전이 하나는 말하자면 손등과 같고 하나는 손바닥과 같이, 겉은 손바닥이요  손등이지만 둘은 실은 한 손바닥이라 하나가 합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성전과  보이지 않는 성전은 이 둘은 나눌 수 없는 결합을 가지고 있는 하나라 하는  이것을 지금 이제까지 자꾸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굳게  잡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전에 대해서 약속한 것은 영면이나 육면이나 양면 약속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됩니다.

양면 약속이면 이 성전 짓는 데 대해서 어떤 것을 말씀했는가? 두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하나는 복받는 것, 하나는 화받는 것. 복받으면 영의 복 육의 복 양면 복이라  그말이오. 이 성전 지음으로 양면 복 받습니다. 이 성전, 우리가 예배당 되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도 크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성전 지어지는  것이 문제라 그말이오. 보이지 않는 이 성전이 지어지면 신령한 축복을 우리가  받습니다. 이 성전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이 지어지면 신령한 축복을 받습니다.

이 성전이 이루어질 때에 보이는 축복을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번 성전 건축으로 보이는 축복과 보이지 않는 축복 양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귀한 기회를 우리가 가졌습니다.

제가 흔적을 봅니다. 이렇게 슬슬 볼 때에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을 분명히  봅니다. 이제 이 성전을 짓고 나면 이 성전 짓는, 보이는 성전 짓는 이 사람들이  다 신령한 성전이 아름답게 지어질 것이오. 여기에 일하는 가운데에 사람들이  반드시 변화를 받겠다 하는 것을 제가 보고 있습니다. 일하는 사람도 연보하는  사람도 금번에 이로 인해서 영적 축복 육적 축복 양면 축복을 우리 서부교회가  반드시 받으리라 하는 것이 그 싹수가 보여집니다.

첫째 싹수가 보여지는 것은 연보하자 하는데 이구동성입니다. 권찰님들이나 모두  집사님들이나 만나는 사람마다 ‘이상합니다. 이번에 연보하는데 어쩐지  기쁩니다.’ ‘아 나도 기뻐요.’ ‘나도 기뻐요.’ 모두 기쁘답니다. 이번  연보에─양심을 속이지 말고─진정 요번 연보한다 하니까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속에서 기쁨이 솟아오르는, 속에서 기쁨이 솟아오르는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요번 연보하자 할 때에 자기 속에서 기쁨이  솟아오르는 것을 자기가 체험한 사람, ‘아 기쁘다.’ 봅시다. 네, 놓습니다.

얼추 들었는데 혹 안 들은 사람 더러 있고, 안 든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도 깊이  생각해서 기쁨이 솟아나야 할 것이오. 기쁨이 솟아나지 않으면 반드시 자기에게  무슨 양심에 가책이 있거나 그럴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번 이 보이는 성전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잘 지어지도록, 이래서  영과 육이 아울러 영육의 성전이 지어지고 영육의 축복을 받는 기회가  되어지도록,

또 하나는 화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라 했습니다. 보이는 화와 보이지 않는 화,  화받는 것. 영적도 화를 받고, 이로 인해서 이번에 영면이 푹 떨어지는 사람  있을 것입니다. 영감이 툭 떨어지고 믿음이 툭 떨어지고 하나님과 천리 만리  멀어지고, 신앙이 없어지고, 속에 하늘의 욕망이 없어지고, 세상 일도 용기  없어요. 세상 일도 ‘하나님이 나와 같이 하시지’ 하는 것이 믿어질 때는  확신이 있어 용기가 났는데, 마음에 믿어지지 않으니, 하나님은 그렇지 않는데  백지 자기 주관에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이 요번에 나와 같이 안할 것  같은데, 하나님이 섭섭해 하겠는데’ 이래 가지고 공연히 그만 하나님 앞에  기도할려 하니까 말이 안 나오고 눈이 감기고, 예배보니까 잠이나 오고 자꾸  이래 가지고 믿음에서 떨어지고 신령한 화를 받는 사람 되기 쉽습니다.

그것만 받으면 끝납니까? 따라서 육체의 화를 받아서 육체가 그만 이전보다 훨씬  못해집니다.

이번에 서부교회서 영육이 뛰어나게 나은 사람 있을 것이고, 또 영육이 혹 화를  받아서 절단나는 그런 사람도 있을런지 모릅니다. 이러니까 요것을 단단히  여러분들이 짐작하십시오.

그러면 영육이 복받는 길은 어떤 것이 복받는 길인가? 여기에 학개서 두  장뿐이니까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읽어 보면 알아요.

복받는 길은 자기네들의 사리 사욕하는 것을 버리고, 이 성전 짓는 데서 자기들  일을 생각하는 것, 자기 생각하고 자기 일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짓는  일을 더 생각하고 앞서 생각하는 요것이 복받는 일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 놨어.

그 다음에는 ‘네가 기쁨으로 물질을 갖다가 성전을 지어라’ 요렇게 말했어.

자기 정도 있는 대로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가 지어라’ 이런 것 저런 것 다  갖다가 지어라. 자기의 가진 소유를 바쳐서 성전을 지어라.

그러면서 마지막의 한 마디가 네가 마음과 힘을 네 사욕, 너를, 너를 위하는  거기에 수지를 쓰고 거기에 먼저 쓰지 말고 이제는 성전 짓기 시작했으니까 성전  짓는 데에 네 마음과 힘과 열심을, 수지를 성전 짓는 데 써라. 마음이 거기에  있고, 같이 직장에 다니며 일해도 ‘아, 일해서 이번에 간주 찾으면 이 연보  작정한 것 얼마 내야지. 아, 오늘 일하는 것 이거는 성전 짓는 데 이제 연보  작정한 연보 낼 돈이다.’ 이러니까 하루종일 일하면서 기쁘고 즐겁다 그말이오.

이게 뭐이냐? 요 일은 안 해도 마음을 바친 거라.

어쨌든지 네 마음이나 힘이나 그런 것을, 네 마음이나 힘이나 그런 것을 네 일에  수지와 먼저 드리지 말고, 네 일에 수지와 먼저 드리지 말고 이 성전 짓는  데다가 먼저 드리고, 수지를 드리고 먼저 드리고 먼저 드리라. 여기에다가, 네  개인 네 가정 네 생활보다 성전 짓는 데에 주력하고 여기에 수지를 드리고  여기에 마음을 기울이라.

요 예배당 일하는 데, 짓는 데 오지 않아도 말이오. 오지 않아도, 연보는 같은  돈인데 보기는 같은 돈이지만 한 사람은 이 보이는 성전 짓는 이 껍데기 돈  여기에다가 그 심신을 하나님에게 바쳐서 신령한 성전 짓는 데에는 어떻게 많이  드렸는지 나중에 보니까 돈은 같은 돈인데 가치는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과부의  엽전 두 푼이 모든 부자들이 낸 돈보다 낫다는 것은 돈은 내나 그 돈이나 그  돈이나 뭐 떡 살려 하면 꼭 같이 사지지 별 돈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의사는 원하시는 그 마음을 바치고 뜻을 바치고 정성을 바치고 자기의  성의를 바친 게 있다 그거요.

이러니까 화받는 일은 뭐이냐? 화받는 일은 네가 성전 짓는 것은 돌보지  아니하고 네 집만 돌보고 네 일에만 급급하다. 네 일만 급하게 생각하고 네  일에만 급급하다. 이렇기 때문에 네가 많이 심어도 소용없고, 많이 거두어도  소용없고, 많이 먹고 입어도 소용이 없고, 품을 많이 받아도 소용없고, 많이  수입해 가지고 집에 갖다가 꽁꽁 재 놔도 소용없고 전대 속에 꽁꽁 재 놔도  소용없다. 전대 속에 넣는데 구멍을, 밑구멍을 뚫어 가지고 슬슬 다 흘러 버렸다  말이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그말이오.

네가 무슨 일 해도 소용없다. 이 성전 짓는 이 일에 네가 와서 일하지  못할지라도, 가서 일하면서도 ‘아 주여, 오늘 성전 짓는 데에, 성전 짓는데  그분들에게 피곤치 않도록 건강을 주옵소서. 지혜와 총명을 주옵소서. 잘못됨이  없도록 잘되게 해 주옵소서. 관서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협조하게 해 주옵소서.

이웃 마음들을 감동하여 협조하게 해 주옵소서. 모두 덕이 되고 서로 화평하고  하나가 되어 가지고 기쁘고 즐거움으로, 마치 잉어가 폭포수에 올라갔다가 뛰어  내려갔다가 하는 것이 될 줄 알아도 좋아서 못견뎌 뛰어 노는 것인 것처럼 오늘  하루종일 일하는 것이 기쁨에 즐거움에 참 재미있는 오늘 하루 잘 노는 일이  되어지도록 해 주옵소서.’ 이렇게 지금 기도한다 말이오. 이 기도하는 그  기도가 와 가지고 그 기도가 성전 짓습니다. 못 와도 말이오.

그러니까 손은 일을, 손은 일을 하지만 마음은 전부 성전에 가 있다 말이오.

알맹이는 거기 가 있어. 이러니까 네 일에만 급급해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제  집만 생각하고 성전이야 짓는가 마는가 요게만 급급한 이자야! 화받는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수입해 가지고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자기 집에  빨랐음이니라” 자기 집에 빨랐다, 제 일만 딱딱 하니까 ‘너 네 일만 볼세라 나  내 일만 볼세라 너하고 나하고 딱 갈라져서 너는 네 일만 보고 나는 내 일만  보고 해 보자!’ 그러면 제가 안 망하고 어쩔 것이오? 요것이 망하는 길이라  그말이오. 요게 망하는 길이라.

복받는 길은 자기의 사리 사욕 버리고 이 성전 짓는 여기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기울여서, 여기 와 일하지 아니하고, 각각 일을 해야 연보 내지요. 안 해도  마음과 정성을 여기에다 기울여 가지고 이렇게 하는 그것이 복받는 길이라.

수지를 여기에다 바치고 마음을 여기에다 바치고 힘을 여기에다 바치고 또  자기의 물질을 갖다 바치고 또 하나 뭐입니까? 하나 뭐이지요? ○○○씨, 하나  뭐이냐? 하나 뭐 없으면 안된다 했지? 하나 뭐이요? 몸을 바쳐? 성결, 누가  ‘성결’ 했는데 성결 맞았어. 성결.

‘성전을 지으니까 깨끗이 해야 되겠다. 뭘 평소보다도 성전 지으니 내가 거짓말  한 마디 했다가 성전 짓는 데 하나님 노여워하실라. 내가 말 한 마디 벌로  했다가, 행동 벌로 했다가 주님 노해서 성전 짓는 데 기뻐하지 아니하고  협조하지 않아 주실라.’ 이래 가지고 성전 짓기 위해서 자기의 언행심사 자기  생활, ‘야, 우리 가정에 지금 싸울 일이 있지만 참자. 안된다. 지금 우리가  만일 성전 짓는데 이러다가는 하나님 진노해 가지고 성전 안 지어 주시면  어쩌겠느냐?’ 성전 짓기 위해서 성결을 가집니다. 성전 짓기 위해서 성결.

자기의 있는 수지를 성전 짓는 데 바쳐, 성전 짓는 이 성전 때문에 자기를  깨끗이 해.

이러고 난 다음에는 “스스로 굳셀지어다” 굳세게 할지어다. 부지런히  일할지어다 이랬으니까 요동치 않고 꾸준히 계속해서 일해 나가면 그것이 복받는  길입니다.

복을 받으면 어떻게 받습니까? 여기에 말하기를 ‘하늘을 너 위해서 움직일  것이고, 바다를 너 위해서 움직일 것이고, 땅을 너 위해 움직일 것이고, 육지를  너 위해서 움직일 것이고, 만국을 열방을 너 위해서 움직일 것이고, 천하에 있는  모든 보화를 다 움직여서 네게로 모여 들게 하겠다. 네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그 전에는 기한 전에 다 떨어져서 가을에 추수할 때는 열매가 없고 전부 다  선과실로 떨어져 버리는데 하나도 떨어지지 아니하고 전부 충실하게 되어질  것이다.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다 그럴 것이다.’  네가 성전 짓는 일은 등한히 하고 네 일에만 급급하니 네 하는 일에 산산히 곰팡  재앙, 또 한재, 곰팡재앙이라 했는데 곰팡이 재앙 그까짓 거야, 곰팡이 그까짓  거야 짜다라 곰팡이 피어도 말이지 곰팡이 핀 것 슬슬 닦아 버리고 먹어도 되고,  우리는 그전에 곰팡이 핀 것, 곰팡이 핀 것 그것쯤이야 먹는 것은 뭐 예사로  여겼고 뭐 별로로 여기기 때문에 곰팡이를 좋아하는데 요새 보니까 바이러스라  하는 그거 곰팡이라. 바이러스라는 그 곰팡이인데 제일 병 중에 무서운 것이  곰팡병이 제일 무서워요. 이 성경에 곰팡병이라 하기 때문에 이리 무서운  모양이라. 이래 가지고 한재, 지진, 풍재, 충재, 막 재를 들이 퍼 부으니까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이러니까 이번에 여러분들, 화받는 자 되지 말고 다 복받는 자 됩시다.

화받는 것을 신령한 화는 안 보이지만 육체의 화는 환하게 화받는 게 보일 거라  말이오. 신령한 복 받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육체의 복 받는 것은 환하게 보일  것이라 말이오.

이번에 우리 서부교회는 영적으로 육적으로 한번 쏵 올려 세우십시오. 푹 한번  올려 세워요. 복을 받아 푹 한번 올려 세워 봐요.

둘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화도 양면 화요 복도 양면 복이 되는 것인데, 복받는  길 이제 가르쳤고 화받는 길 가르쳤기 때문에, 화받는 길은 우리가 버려야  되겠고 복받는 길을 행하면 됩니다.

이 복은 당신이 하늘을, 땅을, 바다를, 육지를, 만국을, 열방을 전부 마구 너  위해서 이렇게 움직이겠다, 움직여 주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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