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가나안 여자의 믿음

 

1981. 1. 17. 새벽 (토)

 

본문: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기도> ....을 알며 모든 거짓된 것이 참을 알겠습니까? 어두움은 빛을 모릅니다. 다만  주께서 없는 가운데 지으심같이 주께서 죽은 것을 살리셔야 되고, 모르는 것을  알리셔야 되고, 없는 것을 심고 기르고 키워야 되는 이것을 압니다. 순전히  주께서 베푸시는 은혜로 오는 것으로만 이루지는 것을 저들이 또 믿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망이나 어두움이나 죄나 악령이나 이런 것들이 가까이 오지를  못하는, 또 그 속에 아무리 파묻어 놓는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해할 수 없는  침노할 수 없는 은혜인 줄을 압니다.

이 시간도 우리에게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먼저 깨닫게 하시고, 또 굳센 욕망을  산 소원을 가지게 하시고, 실행으로 주의 모든 이 은혜를 받아 누리는 자 되도록  순전히 주님의 공로를 인한 은혜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요것이 한 토막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요것이 둘째 토막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요것이 셋째 토막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요것이 넷째로서 결과가 맺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 기록된 모든 형식들은 구원의 이치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한 계시 기관, 가르쳐 주는 한 기계, 가르쳐 주는 한 기관인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 한 가나안 여인의 사실이 우연으로서나  돌발적으로나 또 그런 형편에 오다가다 보니까 만나진 일은 아닌 것이고  하나님께서 영원 자존하신 분이 당신의 그 사랑의 발동으로,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당신 혼자만 계십니다. 당신의 사랑의 발동으로, 사랑이 움직여 가지고,  당신의 그 기뻐하시는 기쁨이 또 발동해 가지고, 당신의 그 온전하신 뜻, 뜻이  목적을 정했습니다. 그러면 이 뿌리가 이렇게 깊습니다.

자존하신 당신이 당신의 사랑의 발작으로, 당신의 기쁨의 발작으로, 당신의  온전하신 그 뜻의 발작으로, 발동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발작으로 당신이 목적을  정했습니다.

당신과, 피조물인데도 당신과 꼭 같은 온전한 자, 거룩한 자, 깨끗한 자, 참  당신은 머리요 이 목적으로 되어진 이것은 당신의 몸일 수 있을 만치, 머리와  몸이 하나 아닙니까? 당신의 지체, 당신은 아니자만, 자존자도 아니요, 창조주도  아니요, 피조물이지마는 당신과 꼭 같은 형상, 당신과 꼭 같은 자,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보지 못한 하나님을 그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잘 보이셨느니라.

그러면 볼 수 없는 자존하신 하나님을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의  속성이나, 그의 지능이나, 그의 또 생애나, 하시는 일이나 그런 걸 잘 우리가 볼  수 있다 말이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요만큼 담대히 말씀했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 봤다.

내가 아버지와 꼭 같다.’그러기에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런데 우리는 뭣 때문에 예수 믿게 만들었느냐? 예수님의 형상과 꼭 같은  예수님의 형상을 입어서 아무가 봐도 무엇이 봐도 예수님과 꼭 같은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존하신 분이 당신의 사랑으로, 뭐 누구 뭣 때문에가 아니고  당신의 사랑이 발동해서, 당신의 기쁨이 발동해서, 당신의 온전성인 완전성인  완전의 당신 혼자의 뜻이 발동해서 목적을 정하시고, 이제 말한 대로 이런 참  형언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온전한 목적, 하나님 당신 같은 자 만들려는 이것을  목적으로 정하시고,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혼자 예정하시고, 그때 누가 뭐 누구  간섭을 받아서 뭣 때문에가 아니고 이건 당신 혼자 지금 하시는 일이요, 당신  혼자. 아무도 아무것도 가감할 것도 없고, 가담할 것도 없고, 뭐 충격 받을 것도  없고 무엇이 있는 것 아무것도 아니오. 당신 혼자 역사요.

혼자 당신의 영영한 지혜로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그러면 예정이라는 하나님의  예정은 자존자의 예정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예정한 것이요, 하나님의 기쁨이  예정한 것이요, 하나님의 완전의 뜻이 예정한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이 예정한  것이라.

그 예정하시고 예정한 그대로 또 창조했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창조하셨고,  또 창조하시고 난 다음에는 당신이 이를 위해서 섭리하시고, 이제는  도성인신하셨고, 사생활 공생활에서 십자가의 대속의 이 공로로 무한한, 무한한 사망과 타락 속에  있는 것을 무한한 댓가를 내 가지고 무한한 대속으로 우리를 구속했다 말이오.

왜?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한을 다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한한 타락을 주셨다  그거요. 무한한 타락을 주시고 무한한 희생으로, 이것이 당신의 사랑의 만족이기  때문에. 무한한 희생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무한한 희생으로, 이제 무한한  대속으로 무한한 구속을 우리에게 베푸시고, 이 일을 우리에게 법적으로만 주실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주어서 우리가 영만이  아니고 우리의 마음이나, 우리의 몸이나, 우리의 행위나 모든 것이 당신의  목적에 도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당신이 섭리하신다 말이오. 당신이 섭리하신  것은 벌써 예정하신 대로 섭리요. 또 당신이 창조하신 그런 것들을 다 이용해서  섭리요.

그러면 이 섭리는 이것이 무슨 섭리냐? 아무것도 가담하지 안했소. 자존 그분  자존하신 그분의 섭리요. 그분의 사랑의 섭리요, 그분의 기쁨의 섭리요, 그분의  온전하신 그분의 뜻의 섭리요, 그분의 목적대로의 섭리요, 그분의 예정대로의  섭리요, 창조의 것을 가지고 이용해서 섭리라. 이래 가지고 당신이  도성인신하셔서 이 무한하신 대속을 베푸셨습니다.

이러니까 무한한 대형이요, 무한한 대행이요, 무한한 대화목이요, 무한이라니?  그분이 무한한 지혜로 예정하신, 예정하시고 무한한 지혜로 섭리하신 그것으로  무한으로 절단난 것이 무한으로 구속됐기 때문에 이게 다 무한성이라 말이오.

우리의 구원은 다 무한성이요, 영원성이요, 완전성이요, 하나님의 속성의  사랑성이요, 하나님의 단독의 주권성이요, 주권성이요, 완전성이요, 자존성이오.

이렇게 뿌리깊은 이 구원이 우리에게 벌써 대속까지 왔습니다.

와서 우리의 영은 여기에 도달해서 영생이 됐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존에  결합이 돼 버렸어. 하나님의 사랑에 결합이 됐소, 하나님의 기쁨에 결합이 됐소,  하나님의 완전하신 그 뜻에 결합이 됐소. 목적에 결합이 됐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과 창조와 섭리를 다 완전히 받을 수 있는, 자기 것을 삼아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이자로 중생된 것이 우리의 영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영생을 가졌습니다.

이렇게 영은 됐지마는 우리의 아직까지 심신이 여기에 도달치 못했기 때문에  여기에 도달하도록 하려고 지금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이 지금 섭리인  것입니다.

우리 영은 단일체기 때문에, 단일체기 때문에 죽어도 단번 죽고 살아도 단번  살지마는 우리의 마음이나 몸이라는 이것은 종합체입니다. 마음도 수억억만  쪼가리도 더 되는 것이 합해 가지고 마음이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의 몸도  억억만 쪼가리도 더 되는 것이 합해 가지고서 한 몸이 되어 있는 종합체이기  때문에 이것을 살리는 데는 단번 살리는 것이 아니고 중복적으로 또 살리고,  살리고 살려서 이렇게 하는데 이 살리는 것을 누가 책임을 졌느냐? 살리는 데 이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한 그 모든 것이 이용되고 또 방편은  하나님의 예정이 이 구속의 방편이 되고, 이 구속의 방편은 하나님의 예정이  방편되고 구속의 이용물은 하나님의 창조가 이용되고 이 구속의 역사를 하는 이  사역자는 누구뇨? 사역자는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하나님인 성령님이 이 일을 보증하고 이 일을 착수하고, 또  진리, 하나님의 뜻 진리가 이 일을 책임지고, 또 피가 책임집니다. 피가  책임지는 것은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일은 오다 가다가 닥치는 일이 아니고 절대성이요 영원성이요  완전성인 모든 여기에 근거되어 있는 것이요, 이런 본질이요, 이런 본성이요,  이런 방편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여인에게 제자들이 볼 때에 암만 말해도 한  마디도 말하지 안하고 냉정스럽게 하는 그것이 우연한 일이며 그것이 임시  그렇게 냉정스럽게 하십니까? 그것이 영원 전 예정에 속한 것이오. 그것이  자존하신 거기에서부터 연결된 그 냉정입니다. 당신의 사랑의 냉정이요, 당신의  기쁨의 냉정이요, 당신의 완전의 뜻의 내정이라. 거기 연결된 그것이 지금  하나의 움터 나온 그것이 제자들 보기에 대답지 않는 그 냉정으로 보였습니다.

그게 과연 거기에서 주님이 아무 뜻이 없었을까? 대답지 않은 거기에 뜻이  없었을까? 대답지 않은 데에 자존자와의 연결, 자존과 연결이 된 그 뜻입니다.

냉정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된 뜻이오.

하나님의 예정에, 하나님의 창조에, 하나님의 섭리에 연결된 뜻인 것을 우리가  성경을 봐서 읽는데 그런데 제자들 보기에는 그렇게 냉정스레 보여지니까 ‘하,  암말도, 한 말 해서 보내든지 그리 안 하면, 저렇게 뒤에서 호소하고 저렇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데 못 들은 척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 해서  보내십시오. 안 되면 안 된다든지 된다면 된다든지 가부를 해 그래 보내지  저런데 그렇게 못 들은 척 저래 그런가?’제자들이 보기에, 선생님이라고 존경을  하고 말 한 마디 하기가 어려워했는데 너무 답답하니까 ‘이것이야 말 안 할 수  없다’ 해서 말했다 말이오. 그들에게 그렇게 보여졌어.

그렇게 보여진 대로 정말로 주님이 냉정했을까? 저희들은 껍데기 중에 껍데기로  알지마는 이 일은 영원 전 당신의 자존성 거기에서부터 다 발동돼 가지고 사랑이  발동돼서 하나님이 예정한 그대로의 것이라 그말이오. 예정한 그것이 요 순서가  이루어진 것이지 그렇게 껍데기 그것이 아니라 말이오.

이렇게 뿌리깊고 참 영원한 일이지마는 얼마나 따라다니는 제자들이 볼 때에는,  또 제자들만 볼 뿐이 아니라 그것은 아무야 아무 사람이 봐도 그것이야 냉대라고  보지 그것 누가 냉대로 안 보겠습니까? 그것이냐 그와 같이 하는 것은 뭐 백 년  전에나, 천 년 전에나, 몇백 년 전에나 아무라도 그런 지경이면 그건 다 냉대지  뭐 딴게 뭐입니까? 역사가 평할 때도 냉대요, 인간의 주관이 평할 때도 냉대요, 그들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평할 때도 냉대가 확실하고 이건 틀림없는 냉대라 그말이오. 틀림없는  냉대지만 실은 냉대가 아니라 그거요. 요걸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틀림없는 냉대지마는 냉대가 아니라 이 일을 하려고 영원 전부터 당신이 전지  전능으로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이렇게 해 가지고 된 이 뿌리깊은  이것을 인간들이 볼 때는 아무리 봐도 그것은 냉대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그거요.

그러면 냉대로 보여졌으면 과연 주님은 무슨 일을 했는데 그래 됐을까? 결과를  보니까, 결과를 보니까 주님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소원이 더 뜨겁게 했고  욕망이 더 뜨겁게 했습니다.

지금 예를 들면은, 그것 비유가 잘 될런지 모르지마는, 바다에 어떤 사람이  떨어져 가지고 있는데 저는 지금 곧 숨이 넘어가서 곧 죽습니다. 뭐 이제  층암절벽이라 그것은 살아날 일은 그뭐 천에도 만에도 희망이 없습니다. 한 줄이  내려왔습니다. 줄이 내려왔는데 줄을 거머쥐고 구원해 달라고 고함을 지르니까  위에서, (거부하는 표시) 구원해 달라 하니까 이랍니다. 구원해 달라 하니까 안  된다 안 한다 안 한다 이랍니다.

안 한다 하면 그 사람이 ‘아이구, 안 된다 하니까 그만 안 되겠다, 그만. 손  흔드는 것 보니까 안 되겠다. 어라 죽자.’ 이리 되겠소? 마지막에 죽는 그 힘이  다 빠져서 죽는 그 시간까지 막 부르짖을 것이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때까지는 살려 달라고, 이분밖에는 살려 줄 이 없으니까 나를 살려 달라고  욕망도 소원도 강해질 것이오. 자기의 주관이나 모든 상대방에서 오는 상응이나  반응이나 그런 형편이나 조건이나 그런 게 보이지 안할 것이오.

 보이지 안하고 그걸 초월한 마구 간구와, 그럴수록이 간구하고 발동치고 있는  힘 다해서 할 것이오. 요것이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하셨습니다.

요것이 되어져야 주님에게 대해서 우리는 요 본질의 것, 요 본성의 것, 요렇게  되어지는 요 도수의 것, 요 도수가 요렇게 돼, 온도, 열도, 냉도, 요 도수, 요  도수가 요렇게 돼야, 요 본질과 본성이 요렇게 돼야 이 천한 것이 전능자 지극히  높은 자존자 이분에게 도달하고, 이분과 연결이 되어지고, 이분이 주는 것은  완전을 주는 것인데 이렇게 자기의 전인격과 모든 게 기울어져야 거기 완전을  담을 수가 완전을 줄 수가 있지 그리 안 하면 안 된다 그말이오.

이런데 그때에 여자는 그로 인해서 후퇴했습니까? 네 믿음이 크다고 할 만치 그  여인은 주님에게 대해서 참 흠없는 태도를 했습니다. 그 소원이 더  강해졌습니다. 욕망이 더 강해졌습니다. 심신도 주님에게, 설설 오던 것도 막  있는 힘을 내 가지고 이제는 죽을둥 살둥 모르게 지금 달음질을 쳐서 주님 앞에  달려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역사하시지 안했으면 이렇게 될 수가 있을 것인가? 주님이  이렇게 되게 역사하지 안했으면, 그 생명 역사인데,  그게 산 역사인데, 다 영감 역사인데, 진리에 맞은 역사인데 그것이 여인에게  있었을까 주님이 그 내적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그렇게 공작하셨기 때문에 그  일이 이루어졌지 그리 안 하면 그것이 되었을 것인가? 또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여인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서 마지막으로는 그  소원의 달성이 됐으니까 달성된 그것이 달성되도록 예정되지 안한 것이  있었을까? 예정이 안 됐었을까? 그게 하나님의 창조에 그게 들어가지 안했을까?  하나님의 기쁨의 사랑의 발동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뿌리깊은 큰 것을 인간들이 보기에는 이렇게 보여졌기 때문에 여기에서  무조건 어떤 형편이라도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에게 소망과 욕망과 간절 이것만  가질 것이지 그 외에는 가질 것이 없다 하는 요게 확정돼야 됩니다. 요것이  확정되지 안하면 그 신앙들이 껍데기 신앙이요, 다. 이게 확정될 때에 사람은  변화됩니다.

여인이 달려와 가지고서 이래 달려오는데 그 제자들이 ‘말해 보내십시오. 한  말도 안 합니까?’ 둘째로, 그 제자들이 그럴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서 구원하라고  나를 보냈다.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이러니까 이 제자들의 좁은 지식,  제자들의 역사의 지식,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만 이스라엘이요 이 가나안  여인은 이방 여인이요 요 역사를 저희들이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역사를 알고 있지마는, 역사를 알고 있고 저희들이 벌써 그렇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여인에게 좀 이렇게 좀 말해 보내십시오.’ 할 때에  ‘나를 다른 데 보낸 줄 아느냐? 이스라엘 잃어버린 자에게 보냈지.’ 이런 말로  할 때에 누가 그 말을 들을 때에 반대하는 말로 안 들을 건가 말이요? 누가  반대하는 말로 안 들을 건가? 아무라도 반대하는 말, 인간 주관이라는 건 다  반대하는 말로 들을 것이오.

반대하는 말로 듣고 인간들이 지식을 가지고 있고 인간들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마는 역사든지 인간들의 지식이든지 인간들의 주관이든지 이것이 과연  결과적으로 보니까 하나님의 예정에 맞았는가? 하나님 목적에 맞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의 법칙에 맞았는가? 그들이 거기에를, 위에 상고 때를 더듬어서  그것을 자기네들이 알아 가지고서 거기에 맞췄는가? 그와 정반대입니다.

이게 여러분들에게는 아주 가려 하면 감감합니다. 이 도를 듣는 사람이 내가  보기에 없습니다. 이것 모르면, 이것 모르면 제가 암만 예수 믿어도 어느 수평점  이하에 있지 그 이상을 뚫고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정반대로 보여졌지마는 우리는 벌써 성경을 보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뒤로 돌아보고 볼 때에 그 여인에게 이런 역사를 이루었으니 그 예정에  이렇게 ‘네 믿음이 크다’ 하는 이 믿음이 크다고 칭찬한 이 큰 믿음이 이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예정된 대로의 큰 믿음이 됐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창조의 것이 이 큰 믿음의 기관으로 도구로 이와같이 돼 가지고서  창조된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기쁨에 사랑에 그 사랑이 들어 이렇게  했겠습니까 사랑은 상관 없고, 그 기쁨은 상관 없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은  상관 없고, 목적은 상관 없이 됐겠습니까 그것이 이와 같이 나타났겠습니까?  뭣입니까? 그것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것 뭣이지요? 일시 그 여인과 예수님의 권능 있는 예수님과 만나니까 그런 결과가  이루어졌겠습니까 그것이 영원 전 예정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겠습니까? 뭣이요?  여러분들이 말로만 할 게 아니라 믿어야 됩니다. 예정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정된 대로 이루어졌으면,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을  받았다고 했으니까 그 여인에게 왔다 말이요 안 왔다 말이요? 왔다 말인 것이  알려집니까? 네, 왔다 말입니다. 이 여인에게 왔다 말입니다. 분명히 왔다  말입니다. ‘내가 다른 데 온 게 아니라 이 여인 찾아왔다’ 하는 말 아닙니까? 이런데 이것 인간들이 들을 때는 어떻게 들립니까? 인간들의 주관이 들을 때는  어떻게 들어집니까? 인간들의 그 모든 지식들이 평할 때는 어떻게 평합니까?  인간들이 알고 있는 통계의 이 역사, 쭉 내려오는 십 년, 이십 년, 천 년, 지금  이 지구는 육천 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노아 이후에는 사천 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소? 역사, 역사는 어떻게 평했습니까?‘이 여인에게는 상관이  없다. 여인은, 여인에 대해서는 정반대 일이구나.’ 여인에게 대해서는 반대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다 비판이 됐고, 평가가 됐고, 인정이 됐고, 확정이 됐습니다.

그러면 확정됐으면 그것이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대해서 하는 일과 인간들의  역사나 지식이나 주관이 보고서 평한 것과 같습니까 정반대입니까? 요걸 알아야  됩니다. 정반대입니다. 같지 안해. 정반대요. 정반대요.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 생활해 나갈 때에 내게 대해서, 하나님의 도와 내게  대해서, 하나님과 내게 대해서 이렇게 보여지는 정반대인, 아무리 놓고 떼고,  역사로 봐도, 지식으로 봐도, 전사회, 전인류가 다 평해도 다 이것은 하나님은  나를 버린 것으로 보여지는 그때에 버린 게 아니라 하나님은 내게 대해서 속에  역사하시는 당신의 역사와는 정반대입니다. 이것이 큰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하는 그 실상과 인간들이 보는 것은 전부 정반대라.

인간을 부인치 않고는, 자기를 부인치 않고는, 역사를 부인치 않고는, 인간의  모든 지식을 부인 않고는, 자기를 부인치 않고는, 세상과 자기를 부인치 않고는  당신을 향하여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인이 와 가지고서 ‘나를 도우시옵소서’ 하니까 예수님께서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역사에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가나안 여인은 이방 여인으로 내치 개로 취급했다 그말이오. 그래  구약에 짐승으로 이렇게 상징해 가지고 많이 말씀을 하셨다 말이오. 이방인은 다  짐승같이 취급당했습니다. 으례히 그런 줄 알고 다 유대인들은 그만치 자존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랬는데 예수님께서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게 마땅치 않다’ 하니까  이것은 유대인의 역사를 봐도, 가나인들의 역사로 봐도, 이제까지의 통계로  봐도, 종전을 봐도, 그들의 지식으로 봐도, 그들의 주관으로 봐도 여인에게  대해서는 반대하는 것으로, 여인 너에게는 줄 수 없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떡을’ 자녀는 이스라엘이 자녀요 개는 이방인이 개이기 때문에  이방인이 말하니까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 하니까  여인에게는 안 준다는 말이, 안 준다는 말이 분명하다 그말이오. 주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말이오. 이러니까 여인으로서는 예수님에게 반대를  당할 뿐 아니라 박대를 당했고 천대를 당했습니다. 천대만 아니라 모욕을  당했습니다. 아주 참 큰 박해를 당했습니다. 냉해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보여지지마는, 그러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었느냐? 예수님은 그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여인에게 안 준다는 말이요 여인에게 준다는  말입니까? 어떻습니까? 준다는 말로 들려집니까? 역사는 뭐라 합니까? 역사는  준다는 말로 들려집니까? 역사는 준다는 말 합니까? 모든 인간들의 지식은 준다  말이 됐습니까? 인간들의 주관에는 준다 말로 그 인정이 됩니까? 아니오.

아닙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은 ‘내가 너 주려고, 네게 은혜 베푸려고 내가 왔다. 네게  은혜 베풀지 안하면 안 된다. 네게 은혜를 베풀지 안하면 내가 죄를 짓는다.

네게 은혜 베풀지 안하면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는 거슬림이 된다. 네게 은혜를  베풀지 안하면 내가 예정대로, 예정을 거슬린다. 창조를 거슬린다. 목적을  거슬린다. 사랑을 거슬린다. 당신의 기쁨을 거슬린다. 그 자존성에 걸린다.’  이렇게 강한 말이지마는 인간이 들을 때는 이렇게 들려졌다 그말이오. 그러면  결과로 봐서 나오지 안했습니까? 결과로 나타나지 안했습니까? 요것으로 당신이  네 믿음이 크도다 만족하시고 그에게 네 마음대로 되리라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니까 즉시 나았다 그거요.

이러기에 여기에서 요 세 가지 단계로 요렇게 간단한 요 한 형식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역사를 부인케 하고, 인간의 지식을 부인케 하고, 자기의 주관을  부인케 하고,  그 모든 이루어지는 조건, 현실, 장면, 그 환경, 배경 이런 것이 어떻게 되든지  그런 것들을 무시하고, 그런 것들을 극복하고, 그런 것들을 능가한 그 소원, 그  욕망, 주께 대한 열정 요것이여야 성공을 한다. 요것을 주님이 ‘믿음이 크다’  말씀하시고 이루어졌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것이 쉽게 되는 것이 아니고 깊이 가서 새기십시오. 새겨서, 우리의 전생활은  요 세 토막에 다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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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721 가견적 교회 불가견적 교회/ 학개 2장 20절-23절/ 820609수야 선지자 2015.10.21
720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3절/ 810115목새 선지자 2015.10.21
719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 810104수야 선지자 2015.10.21
»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10117토새 선지자 2015.10.21
717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80110주전 선지자 2015.10.21
716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5절/ 810116금새 선지자 2015.10.21
715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10116금야 선지자 2015.10.21
714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80110주후 선지자 2015.10.21
713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장 38절-39절/ 800207목새 선지자 2015.10.21
712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것의 생명은/ 갈라디아서 6장 6절-8절/ 870617수새 선지자 2015.10.21
711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70611목새 선지자 2015.10.21
710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70612금새 선지자 2015.10.21
709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70613토새 선지자 2015.10.21
708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80920화새 선지자 2015.10.21
707 가르침의 중요성/ 요한계시록 2장 23절/ 890122주새 선지자 2015.10.21
706 가장 기쁘고 행복한 자는 38년된 병자/ 히브리서 5장 7절/ 85041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1
705 가정_부부제도의 비밀/ 에베소서 5장 22절-6장 4절/ 880605주전 선지자 2015.10.21
704 가정교회/ 에베소서 5장 22절-33절/ 800217주전 선지자 2015.10.21
703 가정교회/ 에베소서 5장 22절-27절/ 800218월새 선지자 2015.10.21
702 가정교회/ 에베소서 5장 27절/ 800220수새 선지자 201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