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1987. 6. 12. 새벽 <금>

 

 본문: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성경이 우리 신앙 생활은 쪽발 생활이라야 한다 했습니다. 쪽발 생활이라야 한다.

그래서 구약 레위기에는 “쪽발이 아니면 생명이 먹지 않는다. 쪽발이라야 한다.” 에스겔서에도 “영의 생활, 생명 생활은 쪽발로 걸어간다.” 또 신약에도 “구별해라 구별해라” 거룩한 무리라, 성도라 말은 구별하는 무리라, 구별하되 둘로만 구별해라.

그러기에 온 전 성경은 하라 하지 마라 하는 둘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죽는다 산다 또 둘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이다 세상이다 둘로 돼 있습니다. 자기다 하나님이다 둘로 돼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로 산다 자기 심신의 인도로 산다 또 둘로 돼 가지고 있어 모든 것이 다 둘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둘로만 구별해 가지고 살아가야 되지 마귀란 놈은 우리에게 많으면 좋은 줄 알고 둘 이상 셋으로 ‘그렇지마는’ 하는 단서가 자꾸 넣도록 합니다. ‘그렇지마는 이럴 수도 있지 않느냐? 저럴 수도 있지 않느냐?’ 그 둘에서 벗어나면 속고 망하는 것입니다.

여게 그런 종류를 몇 가지를 들어서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둘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양면을 다 가지고 있다. 나는 가르침을 받는 자이면서 가르치고 있는 자이다. 나는 가르치기만 하는 자라 이렇게 생각되면 한쪽이 없다. 나는 가르침을 받는 자인 동시에 내가 가르치는 그 위치에 있다.

또,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데에서 가르치는 것과 행함이 같이 되어 있는 자가 있고 또 가르침과 행함이 같이 되어 있지 안하고 달리 되어 있는 자 있다.

어떻게? 가르치면서 행하고 행하면서 가르치고 행할라고 가르치고 가르침과 행함이 합해서 겸하여 있는 자, 가르치면서 행하지 못하면 가르쳐서 행하지 못하니 가르치면서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는 것으로 할 것으로 이렇게 하는 사람 있고 가르치면 가르침뿐이지 행함에는 관련을 두지 않는 것 있다.

가르침과 행함이 둘이 합해 있는 자 있고 가르침과 행함이 같이 있지 않는 자 있다. 나는 가르침과 행함이 같이 있는 자냐 가르침과 행함이 같이 있지 안하고 하나만 되어 있는 자냐? 또 나는 가르침을 받는 자인데 가르침을 받는 것과 행함이 같이 있는 자냐, 가르침을 받는 것과 행함이 같이 있지 않는 자냐? 이게 아니면 저것, 저것 아니면 이것 둘이지 그 둘 외에 딴것을 가지고 말하면 안 된다 말하는 것입니다.

또 “스스로 속이지 말라” 네가 네 자신이 네 자신을 속이는 자도 될 수 있고 네 자신이 네 자신을 속이지 안하고 바로 인도하는 자도 될 수 있다. 네 자신이 자신을 바로 인도하는 자 될 수도 있고 네 자신이 네 자신을 속이는 자도 될 수 있다.

세상에서 속임이 많은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는데 왜 속임 없는 세상에 살도록 하지 안하고 속임 있는 이 복잡한 세상을 만들어 놨는가? 속임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으신 것은 속임을 받지 않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속이는 세상을 만들어 놨으니 속임을 받지 않는 자는 어떤 자냐? 자기에게 속지 않는 자는 아무리 속임 속에 가득 싸여 있어도 상관이 없다. 또 속임이 없는 그런 곳에 산다 할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속이게 되면은 자신은 속임을 받는 자가 된다.

이러니까 내가 나를 속이느냐 내가 나를 바로 하느냐, 속이느냐 바로 가르치고 바로 지도하고 바로 하느냐? 자기를 자신이 속여서 망하게 하느냐 자신이 자신을 바로 해서 구원되게 하느냐 둘로 언제든지 구별하라.

“스스로 속이지 마라” 네가 너를 속이지 마라. 여게 둘은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느냐 내가 나를 속이지 않고 바로 참 살도록 이렇게 바로 인도하고 있느냐’ 구별하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을 네가 업신여기고 무시하느냐, 하나님은 절대자이신 주권자로 네가 모시고 있느냐? 네가 하나님을 업신여긴다 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되는 그 관계를 시시하게 여기고 무시하고 하나님 외에 딴것과의 관계되는 그걸 중하게 여기는 자는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나니” 네가 하나님을 무시하든지 하나님에 지음받은 모든 피조물들을 무시하든지 둘 중에 하나다.

왜? 둘 다 좋게 하면 좋지 않느냐? 그것이 그럴 때도 있지마는 대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게 권위를 두면은 이 피조물에게 권위 둘 수 없고 피조물에게 권위 두면 하나님께 권위 둘 수가 없다. 피조물에게 권위 두고 하나님께 권위 두고 둘에게 다 권위 둘 수는 없다. 어데든지 하나밖에는 둘 수 없다. ‘피조물에게도 권위 두고 하나님께도 권위 두고 둘 다 되면 좋지 않느냐?’ 그거는 네가 스스로 속는 것이다. 쪽발로 걸어가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네가 하나님을 무시해도 하나님은 무시받지 않는다. 무시하는 게 뭐이 무시하는 건가 그다음에 보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사람의 행동과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닥쳐오는 보응은 하나이다. 행함과 닥쳐오는 보응은 하나이다. 행함과 그 뒤에 결과인 자기에게 오는 것은 하나이다. 행함과 그 행함으로 인하여서 자기에게 오는 건 하나다.

콩을 심었는데 콩 오는 것이 필연적이요 팥을 심었으면 팥 오는 것이 필연적인데 네가 행함과 앞으로 너에게 그 행함을 인하여 오는 그 결과를 하나인 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걸로, 심기는 이거 심고 네가 소원은 저거 하니 그게 모순되다, 그게 안 된다.

그러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러면 사람이 심는 것이 무엇을 심는 것이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라 그말은 육체를 따라서 그말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육체를 따라서 심는 자, 육체를 지도자로 삼아서 심는 자, 육체에게 피동되어 사는 자, 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성령에게 피동되어 사는 자,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

네 인도자는 둘이다. 육체든지 성신이든지 둘이다. 이 육체를 부패성이라고 하는 여게서 사람을 막 죽여 놨습니다. 막 죽여 놨어. 내가 다른 데는 모르지만 한 군데 봐서 다 좀 짐작은 하는데 이 육체, 육체는 뭐 싹스도 있고 쏘마도 있는데 싹스는 보면 얼추 부패성에 다 말하기 때문에 부패성이라 못을 박았고 쏘마는 몸이라.

이래 놓으니까 한때는 제가있던 곳에서는 마구 이것이 꽉 찼었습니다. 꽉 찼지마는 그 깨달음이 아무래도 맞지 않기 때문에 이라다가 그것을 하나 바로 알아서 말하니까 그게 담박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모든 이거 어지럽고 어두운 것이 세력을 잡고 있는 것은 바로 아는 이것이 빈약하고 증거하는 것이 빈약하기 때문에 그런 거니까 언제든지 어두움은 빛에 대해서 책임이 있지 어두움 그것은 어두움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빛에 속한 자는 어두움을 전부 제가 책임지고서, 내 빛의 힘이 약해서 이 어두움이 힘쓰는 것이지 빛의 힘이 강하면 이것이 소멸되는 건 필연적이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하는 말은 그저 ‘육신 위주로’ 하는 말과도 같고, 또 ‘육신의 인도로’ 하는 말과도 같고, 또 `육신을 원동으로 삼아 가지고 육신에게 피동되어’라는 말과 같고, ‘육신의 소망으로 사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내나 그게 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심는다 말은 현재 행동하는 것을 가리켜 심는다 그랍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행동한 대로 반드시 그대로 결과가 온다, 보응이 온다 하는 말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그러면 육체에 피동되고, 육체에 인도받고, 육체 위주로 육체 소망으로 사는 자는 육체로 말미암아 결실하고 추수를 가져온다. 육체가 만들어 주는 것을 가져오게 된다.

육체는 죽은 것입니다. 죽은 것은 산 것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는 만날 죽은 게 만들어 주는 거, 죽은 것이 주는 것 그것밖에는 가지지 못한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을 위한다는 요 말이 좀 그래도 맛은 있습니다.

성령을 위한다는 말은 성령을 주로 모신다는 말이요, 성령을 지도자로 모신다 말이요, 성령을 원동력으로 모신다는 말이요, 성령을 자기의 목적으로 소망으로 자기의 주로 삼는다는 그런 뜻을 여기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이 영생을 너에게 만들어 준다. 성령이 영생을 너에게 만들어 준다. 육체는 너에게 썩어진 것 만들어 주고 성령은 너에게 영생 만들어 준다. “영생을 거두리라” 그런데 “우리가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네가 이렇게 선을 행하되, 네가 선으로 살 수도 있고 악으로 살 수도 있는데 선으로 사는 것은 피곤하다. 선으로 사는 건 피곤하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은 네가 피곤하다.

이거는 향상하는 생활이요 타락하는 생활 아니기 때문에 피곤하다. 정반대로 육체로 사는 생활은 피곤치 않고 좋다. 위에서 내려오는 건 저절로 내려오기 때문에 쉽다.

육신의 소욕으로 살면 그것은 육신이 평안하고 좋아한다. 왜? 그것은 육신 제게 맞은 것 하니까 그런데 이 성령으로 사는 것은 성령을, 육체의 생활과 성령의 생활은 정반대인데 성령의 생활로 사는 것은 마구 육체를 죽이는 일이며 없애는 일입니다. 육체를 죽이며 없애는 일입니다.

‘죽여서 어짤라고? 그것도 있는 게 낫지.’ 육체를 죽여서 성령으로 바꾼다.

육체를 없애서 성령을 일으킨다. 네가 육체를 성령화시켜서 육체는 없어지고 성령화돼서 성령으로 커지고 자라가게 된다.

이러니까 육체 이놈이 좋아할 리가 없다. 좋아하지 안해도 달래라. 왜? ‘네가 이놈아 성령으로 살아 네가 성령화 오늘 돼야 영생하지 네가 성령화되지 안하면 너는 멸망이다. 네가 오늘 네대로 해서 멸망으로 그대로 있는 게 좋으냐? 그것이 영생화되는 게 좋으냐?’ 물벌레가 부화할 때에는 심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네가 부화해야, 물벌레가 부화해서 잠자리가 돼야 공중에 달아다닐 수 있지 네가 물벌레로 부화하는 그 어려움을 겪지 안하면 안 되는 것처럼 네가 이렇게 육체의 것이 신령화되어야 된다.

이 되어지는 데에는 육체는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육체가 좋아할 리가 없다.

성령은 좋아한다. 신령한 것은 자꾸 커지니까 좋아한다.

“선을 행하되” 우리가 자기 중심 피조물 중심 악으로 살 수도 있고 또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행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자야 낙심하지 말라. “피곤치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이 일은 피곤하다. 이 길은 피곤하기 때문에 피곤해서 다 사람들이 낙심한다. 피곤해서 낙심한다. 그러나 그는 소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육체에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체가 점점 죽어지고 시들어지고 죽어지기 때문에 그렇지 소망을 영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게 되면은 자꾸 영이 커지니까 자꾸 기뻐지고 즐거워지지마는 그거는 네 소망에 따라서 다르다 그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가르침 받고 가르치는 여게서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여게서부터 시발이 된다. 시발이 돼서 거게서 갈라지면 쪽 갈라져 버린다.

마치 사람들이 요리하는 그 주부들이 무슨 모구때나 어떤 무슨 줄기 그런 거 거머쥐고 요리 만들라고 커단한 걸 쪼갤라고 말이지, 쪼갤라고 딱 거머쥐고 요래 쪽 째면 쪽쪽 째집니다. 뭐이든지 큰 거 잡아 쪽쪽 째야 맛있지 안해요? 그래 가지고서 부드러워지지.

이것 모양으로 이제 시발에서 시발만 바로 하면 그대로 나가면 쪽 나간다. 네가 시발을 바로 해야 된다. 여게서 가르치고 배우는 이것을 바로 해야 된다.

행하면서 하고 행하지 안하면서 하는 이것을 해야 된다. 자기를 속이지 안하고 자기를 속이는 것 되고, 처음에 일호 잘되면 이호도 잘되고, 이호 잘되면 삼호도 잘되고 쭉 잘된다. 일호 잘못돼 놓으면 그다음에는 전체가 안 된다.

다만 그렇게 암만 쭉 하늘나라까지 가도 두 길뿐이다. 두 길뿐이기 때문에 이거냐 이거냐 둘뿐이니까 네가 둘로만 구별해서 가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요걸 가리켜 말씀했습니다.

요러면 고거 집에 가 가지고, 여게 그라면 종류가 몇이나 되는고 한번 가 세어 보십시오. 몇이나 되는가? 두 종류인데 몇이나 두 종류가 있는고?

그래서 우리의 생활은 육신이 주가 되느냐 영이 주가 되느냐 둘 중에 하나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는 없어. 그런데 마귀란 놈이 꼬와서 ‘영을 주로 하지마는 이것도 있지 않느냐?’ 거게 단서를 넣어 가지고 사람이 그만 갈래길을 넣어 가지고 그리 들어가 가지고 삐끌어져서 일생을 망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꼭 단일주의를 우리가 주장해야 됩니다, 단일. 하나. 요 하나지, 요 둘인데 요 중에 어느 것이든지 하나를 취해야 되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그렇게 얽매여 가지고 어떤 사람은 둘로, 어떤 사람은 셋으로, ‘그것보다 넷이 안 좋으냐?’ 넷으로, `그것보다 다섯이 안 좋으냐?' 이래 가지고서 요새는 말을 사이비하게 ‘입체주의라’ 입체주의를 그걸 똑똑히 해석을 하면은 입체주의에는 중심이 있어야 되지 중심 없는 입체주의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 마귀란 놈이 꼬우는 이 궤휼에 우리가 들지 안해야 되는데 그걸 잘 구별해서 살펴 갑시다.

광고합니다.

반사 선생님께서는 그 공과를 명상하십시오. 공과를 이제 본문대로 외우기는 다 외웠을 것이고 그걸 명상해요. 요 공과와 자기 소원과 대조해 보고, 요 공과와 자기 소원과 대조해 봐서 이 공과와 자기 소원이 일치되면 살고 이 공과와 자기 소원이 달라지면 죽습니다. 이 공과와 자기의 현재 행동하고 살고 있는 거와 대조해서 이 공과와 자기 생활이 다르면 생활 이놈을 자꾸 변화시켜 공과를 따라가야 되지 제게 안 맞다고 공과는 공과대로 저대로 두면 죽습니다. 또 이 공과대로의 자기의 이미 만들어 해 놓은 결실이 어떠냐 이렇게 해서 그러면 자기 속에서 힘을 얻을 것입니다.

꼭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과 행함이 병행해야 되지 병행 안 하면 자기 속입니다.

배우는 자도 배우는 것과 행함이 같이 병행해야 되지 병행하지 안하는 자는 자기도 모르게 육체로 돌아가고 맙니다. 가르침과 행함이 꼭 병행해야 육체로 안 돌아가고 성령으로 이와같이 천국으로 가고 영생을 하지 그거 아니면 안 됩니다.

거기서는, ‘이리 하지만 내가 운전대를 잘 잡아서 하면 되지 않느냐?’ 하나님이 안 된다 했기 때문에 그거는 안 되도록 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안 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거는 절대성을 가졌다 요렇게 생각을 하고서 우리가 걸어가야 됩니다.

삼십 분 기도 놓지 말고 계속합시다. 이것이 앞으로 큰 환난을 면하게 될 것이요 큰 어려움을 면하게 될 거고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어려움을 이 기도한 이 공력이 그때에 약속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게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선지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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