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16가지 구속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1987. 10. 9. 새벽 (금)

 

본문:요한계시록 2장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하나님의 이 도리는 우리에게 있는 악령의 역사와 악성의 역사와 악습의 역사와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다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 도리를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옛사람의 요소를 가지고 이해하고 또 자기가 받아들이고 행하지는 않습니다. 이놈은 하나님의 이 도리와 정반대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이 악령을 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악성인 원죄를 멸하기 위해서, 또 악습인 모든 죄악의 습성들을 다 멸하기 위해서 그래 오셨습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운동과 역사는 다 이 옛사람을 죽이는 역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사람 그 요소와 본질과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를 들어서 알려고, 또 이 도를 받아들이려고, 이 도를 자기가 행하려고, 이 도가 주는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는 이것은 아주 천부당 만부당한 방법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런 것 가지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이것은 전적 하나님의 이 도리와 이 구속의 은혜는 반대하는 자입니다. 왜? 이 도와 서로 상극이기 때문에 이 도는 이것들을 죽여서 멸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저를 죽이고 멸하는 자이기 때문에 정반대자인데 그것이 이해되고 납득되고 또 바라보고 그렇게 복종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타락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순전히 당신의 능력으로 죽은 영은 살렸고, 주격이 없으면 뭣이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주격은 전적 은혜로 살려서 그 주격인 영은 살렸고, 이제 주격을 살렸기 때문에 이 주격을 살린 능력과 우리 사람들의 주격인 중생된 영과 합작돼 가지고서 우리의 심신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땅위에 있는 우리의 신앙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있는 요소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어떤 요소가 받아들이느냐? 영이 받아들여서 영은 지금 이 도리와 성령과, 근본은 다르지만 한 역사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신 성령과 진리와 우리의 이 영은 하나가 돼 가지고 이렇게 역사합니다.

이래서 우리 영이, 중생된 영이 제일 앞서고, 그 다음에 진리가 따라 서고, 그 다음에 성령이 그 배후에 서서 거게서 온갖 은혜의 역사를 베푸셔 가지고서 생명인 은혜 역사가 성령으로부터 진리에게 오고 진리가 이제 우리 중생된 영에게 이 역사를 발휘해서 역사해 주고, 그러면 이 중생된 영이 우리 심신에게 지금 도를 전하는데 우리 심신으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제일 이 중생된 영과 하나님의 도리와 가까와서 이 하나님의 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 요소는 우리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양심이 제일 가깝고 이 도를 가장 접선하기 쉬운 요소가 양심입니다.

양심은 이건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수많은 종교 단체들의 그 양심은 그 종교의 사상 그대로의 활동하는 양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은 타락한 사람들에게 있는 양심도 그 양심은 어데 매이지 안하고 가장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자기에게 접해지는 그 지식을 통해서 그 지식을 따라서 그 지식대로 바로 해 보겠다,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화인 맞았다 하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양심이 어데 속하게 됐다 하는 그 말입니다. 양심이 하나님에게 속하지 안하고 하나님 외에 딴 어떤 피조물에게 속한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이 화인 맞았다, 양심이 그것의 것이 됐다 그 말이오. 화인 맞았다 말은 주인 만났다 그 말입니다. 양심이 그것의 것이 됐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양심이 벌써 자기를 더 위한다고, 다른 사람이나 자기나 꼭 같이 상관없이 냉정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나 자기에 대해서나 꼭 같은 성질과 욕망을 가지고 행하지 안하고 자기라고 사를 붙여서 자기라고 조금 동정한다면 그 사람은 벌써 그 양심이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자기라는 그 화인에 맞아서 자기 양심이 됐습니다. 양심은 실은 주인공이 없는 것입니다.

양심은 주인공이 없고 양심은, 자기 물론 자기에게, 사람들이 각각 양심이 있지만 양심은 자기에게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원수에게 대해서나 멀고 가까운 것이 없이 꼭 그저 제삼자 아주, 제삼자 관계 없는 딴 남이 그걸 보고서 정평 정가하는 것처럼 그렇게 정평 정가를 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자유하는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이 말씀은 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들으라 그 말입니다. 이것 어데든지 속하지 안하고, 과거에도 속하지 안하고, 현재에도 속하지 안하고, 미래에도 속하지 안하고 어짜든지 당면된 그 자기가 접하는 말이든지, 행동이든지, 또 어떤 물건이든지, 사람이든지 거게 대해서 아무 하후하박이 없이 공평되게 거게 대해서 평가하고 비판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도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에 이 양심이라야 우리가 이 도리를 가장 접해서 받아들이기가 쉽고 이해하기가 쉽지 양심이 아닌, 우리 속에는 물욕심도 있고, 정욕심도 있고, 뭐 공명욕도 있고, 생의 애착욕도 있고, 뭐 욕심, 또 감정, 또 여러가지 분노, 또 무슨 시기, 이런 별별 요소들이 가득 찼는데 그놈은 이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일 수가 전연히 없습니다.

우리에게 제일 접한 것은, 이것이 사형을 받기는 받은 것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제일 양심이라는 그것이 그중에 제일 옳고 참된 것을 받아들일려고 하는 것이 그 자체의 요소기 때문에, 본질 본성이기 때문에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이기가 쉽다 하는 것으로서 “귀 있는 자는” 여게 귀는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신앙 행위를 어떻게 하고, 어떤 공적이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이미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으니까 신앙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지식, 하나님의 말씀인 이 도리대로 자기가 해 보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해 보겠다, 하나님의 말씀대로ㅡ불교인이라면 불교인이 양심 쓰는 것은 불경대로 ‘어짜든지 내가 불경에 맞춰서 옳고 바르게, 틀리지 안하고 바르게 참되게 해 보겠다.’ 하는 그 마음이 불교인의 양심입니다.

기독자의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 계시되어 있는 육십육 권 도리에 이 말씀대로 내가 어짜든지 해 보겠다, 이 말씀대로 옳게 바로 해 보겠다.’ 요 역사가, 요 공작 요 작용 역사가 자기 속에 없으면 그거는 뭐 구원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마음이 정결한 사람이라 말은 그 양심을 말하는 것이고 양심은 양심을 쓰면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다. 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찾아간다. 그러면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고, 영접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도를 접할 수 있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내가 어짜든지 옳고 바르게 참되게 해 보겠다’ 하는 요 마음이 없으면 저는 뭐 어떤 개혁 사업을 하든지, 복음 사업을 하든지, 또 교회 무슨, 뭘 하든지 ‘내가 바르게 참되게 옳게 해 보겠다’ 하는 요것 없이, 사람들은 ‘이 일을 한번 달성해 보겠다. 내게 맡겨 준 이 일을 한번 달성해 보겠다.’ 목회하는 자는 ‘내가 목회를 맡았으니까 이 교회를 한번 성공해 보겠다. 이 교회를 어짜든지 일으켜서 부흥을 시켜 보겠다.’ 나도 거게서 죽었습니다. 내가 부산 와 가지고 제일 처음에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것은 거게서 ‘내가 이렇게 만났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것 교회를 이걸 그래도 좀 부흥을 시켜야 되지, 이 교회가 이 시골에 있는 깜깜한 무식한 것이 와 가지고서 교회가 자꾸 이렇게 쇠해지고 이래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여기 도시 사람들은 다 유력하고 유식하고 그런 사람들만 있는데 내가 이것 목회 와 가지고서 이 되겠느냐?’ 이래서 어짜든지 이 서부교회가 부흥되기만을 원하는 거기에 전심 전력 기울였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 기울이지를 안했습니다. 거게서 그만 탈선돼서, 그거 내가 그걸 전연히 몰랐기 때문에.

어쩐지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거게 피동돼 가지고서 사랑의 행동을 하고 시골에서는 지내니까 마음도 평안했고 그 이상한 참 세계를 자꾸 밟아 들어가게 되고서 또 좋은 것만 생각하고 그러니까 마음에 더러운 것이 없고 다 깨끗해지고 능력 있는 마음이 됐었는데, 여게 와 가지고서 그만 고거 하다가 그만 탈선돼서 차차 차차 탈선되고 나니까 뭐 이것 ‘내가 이것을 하려면 이 교리와 신조에 삐뚤어지지 안해야 될 터인데 이것 다른 사람이 교리를 어떻게 말하노, 신조를 어떻게 말하노? 또 이거 내가 이러면 누구 비위를 상울 터인데, 누가 지금 저것 이단이라고 또 정죄할 터인데,’ 내가 신학교 다니니까 이것 이렇지, 또 신학교 다닐라 하니까 내가 무식하니까 뭐 또 학과 공부해야 되는데 또 학과 공부할 시간이 또 없다 그 말이오.

찍해야 그만, 금요일날 마치니까 금요일날 마치고 금요일날 밤부터 다른 데 집회 시작하면 월요일날 새벽까지 계속하고 월요일날 오니까 뭐 언제 뭐 복습할 여가도 없지 이러니까 이것 공부 거석하지 이렇지,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때 어쩌든지 뭐 거의가 다 백점이요 구십 뭐 몇점이나 이래 됐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 나는 아무 공부도 못 했는데. 이래 놓으니까 그런 데 그만 이래 가지고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어.

이랬는데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어짜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바르고 옳게 참되게 하려고 이랬는데 이제는 무엇을 표준을 삼아 가지고서 그걸 표준을 삼아서 그걸 중심 삼아 가지고서 옳고 바르고 참되게 해야 되겠느냐? 그냥 외식하는 신자라도 ‘신구약 성경 말씀이 있으니까 이 말씀에 준해 가지고 내가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참되게 해야 되겠다’ 이게 없으면 신자 아니오. 이것 없으면 그것 흉측한 이리요 강도요 절도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이용해 먹고 속에는 자기라는 도둑놈이 들어 가지고서 그놈이 지금 하나님의 도를 이용해 먹고 있지 제가 하나님의 도에 이용당하고 복종당하고 쓰여지느냐 하면 아니라 그거요.

이런데 지금은, 요새는 지금 자꾸 증거하는 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그 사랑을 표준을 삼아 가지고서 하나님의 사랑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버리지 안할까?’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지 안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뭘로 왔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열여섯 가지 그 구속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왔느냐? 내게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오지 안했느냐? 어떻게 왔느냐? 하나님의 열여섯 가지 구속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배치되지 안하도록, 하나님의 사랑에 거슬리지 안하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잘 받아서 모시고 간직하도록,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잘 간직하고, 또 내가 하나님의 사랑대로 행하고, 이렇게 하는 이것을 중심해서 ‘어떻게 하든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지도 안하겠고, 잊어버리지도 안하겠고, 버리지도 안하겠고, 하나님의 사랑에 배치되는 일도 안 하겠고, 반대되는 일도 안 하겠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겠다.’ 요것을 자꾸 ‘요래 보겠다' 하는 그것이 요새 가르치는 신앙 양심입니다.

이래서 믿는 사람이 어짜든지 이것 하나님의 이 도리에 대해서, 도리의 중심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인데, 도리에 대해서 이 도리대로 나는 옳게 바르게 해 보겠다 이거 잊어버리면 그만 탈선돼 버리고 맙니다.

‘이 교회를 부흥시켜야 되겠다’ 또 `아무래도 이 교인들을 이걸 잘 붙들어야 되지 이러면 이 교인과 나와에 배치되겠다’ 이러니까 교인 비위 맞출라 하고, 교인 성미 맞출라 하고, 또 교회는 많은 사람이 와야 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오게 하는 여게 주력할라 하고 이러니까 그만 외나 중심은 뺏겨버리고 이탈돼 가지고서 그만 딴게 되고 말았다 그겁니다.

이래서 양심을 잠깐 말했는데,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또 해야 되겠다는 그 마음이 있어서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했는가?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사랑했느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은 나에게 당신이 영원 전 목적으로 정한 곧 목적이 곧 나를 그리스도 안에서 예택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 나타난 것이오. 이 예택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또 하나님의 예정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사랑했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를 사랑하셨는데 사랑한 그 사랑이 뭘로 나타났느냐? 사랑 그것이 창조로 나타났다.

그러면 하나님의 열여섯 가지 구속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하시는 바로 그 실상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역사의 실상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사랑함으로 역사하신 그 역사의 실상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생겼느냐? 네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나를 예택한 이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뭐이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건 예택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정.

이러기 때문에 이 열여섯 가지를 우리가 생각할 때에, 첫째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 구속을 하셨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 구속을 하셨다. 이 구속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행동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뭐 했느냐? 열여섯 가지 구속하셨다. 열여섯 가지 구속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바로 역사다. 하나님이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는 역사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역사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그 열여섯 가지 구속을 순서대로 해서, 하나님이 사람돼서, 하나님이 사람돼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사람 되셨다. 하나님이 사람되신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이게 바로 사랑이다.

이래서 하나님께서 목적을, 나를 사랑해서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의 예택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사랑하심으로써 모든 것을 예정하신 것이 나를 사랑함으로 예정했고 그게 나를 사랑하는 역사라 말이오. 그게 바로 나를 사랑이라. 그게 사랑이라. 그걸 받으면 사랑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이 사랑인 예정, 사랑인 모든 창조니까 무슨 풀 한포기를 보고도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라, 이것이 사랑의 역사라, 바로 풀 한포기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라.

그러면 이것이 나를 당신처럼 온전한 자를 만들기 위해서 모든 존재를 창조했는데 내 지식이 아직까지 어리고 몰라서 모르고 있지만 이 풀 한포기 존재인 이 모든 존재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를 당신의 사랑의, 이 사랑을 다 줘 가지고서 사랑의 대상이 되도록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에게 만족할 수 있는, 당신이 ‘이는 참 완전하고 행복되고 모든 것이 구비하다.’ 부모가 나를 사랑했는데, ‘부모가 너를 어떻게 사랑하느냐?’ ‘나에게 지금 이것 학비 대 가지고 공부시키는 이것이 부모가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이 공부가 뭐 사랑이냐?' `이래 가지고서 나로 하여금 이 공부로 하여금 당신에게 만족되고 이 악한 세상에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그 실력을 만들기 위해서 당신이 하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실력이 이것은 나의 부모의 사랑이요 나를 사랑하셔서 역사하신 역사다’ 그러면 그게 부모의 사랑이라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모든 창조하신 존재를 우리가 볼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온 그 사랑인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와서 역사하는 그 실지의 역사인 사랑, 이 사랑인 것을 깨닫고 이것을 사랑으로 대하고, 이것을 사랑으로 대하고, 하나님이 존재 하나 이것도, 이게 뭐이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 선물로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것을 선물로 주셨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역사가 내게 와서 부딪쳤는데 그것이 모든 존재입니다.

왜? ‘그러면 그게 무슨 사랑이라 말이냐?’ 그것이, 그것이 모두가 다 전부 뚤뚤 뭉쳐 가지고서 합력해 가지고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당신의 사랑이 만족할 수 있는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하고 하나님처럼 온전해서 참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도록까지 나를 만들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사랑이 와서 내게 지금 역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은 사랑이니 이 사랑을 내가 받는 것은 어떻게 받는 것이냐? 이 사랑을 통해서 당신이 나를 온전하고 거룩해서 조금도 흠이 없는 영광의 찬미가 되기까지 만들려 하는 그것이 만들어지는, 만들어지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찬미하는 것이요, 그 은혜를 찬미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제가 증거하는 것은, 열여섯 가지 구속이라면 뭐 하나 또 예를 든다고 하면 만일, 대형해 가지고 죄에서 사죄 주지 안했습니까? 사죄 주셨으니까 이제 죄를 대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사죄, 대형해 주신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라.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사랑했느냐?’ ‘내 형벌을 대신 대형한 그게 사랑이라' 또 `대형해 가지고 뭐 했느냐?' ‘대형해 가지고 나에게 사죄를 주셨어’ 나에게 죄 없앤 이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죄를 없이 했고 죄를 없이 한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고,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게 뭐이냐? 죄를 거기서 사해 주셨기 때문에, 죄를 사해 줬기 때문에 사함 받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강직하는 것이 사죄를 강직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직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이 뭣이냐? 사죄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이라.

이래서, 열여섯 가지 구속이라면 우리가 죄 짓지 않는 것도, 대행하셔 가지고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우리를 다 완전히 의롭다 하는 의를 줬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공심판을 대행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대행했어.

이러기 때문에 내가 의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이 의를 내가 가진 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가진 것이라. 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이래서, 모든 열여섯 가지 구속을 이걸 뭐 생각하려면 시간도 한정 없고 이런데 이 모든 자꾸, 일을 하면서도 활동하면서도 어데 가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떼면 안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모든 걸 존재케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시발시켰고 거게서 다 동기가 돼 가기고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서 모든 걸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이 사랑이 내게 와서 뭐이 왔느냐? 열여섯 가지 구속으로 왔어. 열여섯 가지 구속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 내게 와 있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 구속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 내게 와 있는 것인데 이 구속을 내가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요, 이 구속의 가치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요, 이 구속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모든 동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생각할 것과 하나님의 사랑이 발동 작용한 그 모든 동기에 근본 그 발동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우리가 언제든지 믿고,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우리가 지식하고 믿고 그대로 행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발동해서 내게 뭘 왔느냐? 열여섯 가지 구속이 왔다.

열여섯 가지 구속 이것이 곧 뭣이냐?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그러면 열여섯 가지 구속 있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인 것을 내가 깨닫고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받아들여서 행동하는 것, 이것이 사랑을 믿는 것이라.

사랑을 알고 그 다음에 인정하고 그 다음에 행동하는 것.

그러면 열여섯 가지 구속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하셔서 역사한 것이, 역사가 이 열여섯 가지 구속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 사랑이 발동돼 가지고서 나를 사랑하셨는데 어떻게 사랑하셨느냐? 사랑하신 것이 열여섯 가지 이 구속으로 당신이 사랑하셨다. 그러면 열여섯 가지 구속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 구속은 당신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이것을 깨닫고, 사랑이니 내가 이 사랑을 받아서 이 사랑을 내가 받고, 이 사랑을 내가 보존하고, 이 사랑을, 사랑하셨으니 나도 이제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뭣이냐 하면 그 사랑을 받는 것이라. 그분은 무한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사랑할 수가 없어.

그분의 사랑을 받는 것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면 힘이 없는, 그뭐 비유가 안 되지마는 힘이 없는 어린 자녀가, 어린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면 제가 사랑할 아무 기능이 없어. 사랑할 기능이 없는데 부모의 사랑을, 기능이 없을 때는 그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자기에게, 사랑을 받아 가지고 기능이 조그매씩 자라서 기능이 조그매씩 자라가면 자라가는 그 자란 것만치, 기능이 생긴 것만치 이제 생긴 그 기능 가지고서 또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그게 부모를 사랑하는 거라.

기능이 없을 때에는, 없을 때에는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기능이 생긴다면 생긴 것만치 하나님을 그 기능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라.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 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능이 생기겠느냐? 우리는 영원히 해도 하나님을 사랑할 만한 기능은 생겨지지 못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자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뿐이라. 이러니까, 받는 것은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내가 알고 받아들이면 그게 사랑이라.

이러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하심으로 당신이 나를 구속했다. 그러면 당신이 나를 사랑한 게 어떻게 사랑했느냐? 사랑한 것은 열여섯 가지 구속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라.

나를 직접 사랑하신 그 역사요, 사랑하신 그 팔이요, 손이요, 입이요, 당신의 전부요, 사랑하신 그 사랑이 내게 와 가지고서 부딪쳐서 이루어진 게 뭣이냐 하면 열여섯 가지 구속이라.

열여섯 가지 구속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인 것을 깨닫고 이 사랑으로 영접하고, 사랑으로 영접하고 사랑으로 상대하고 이 사랑으로 보존하고, 이 사랑이니 내가 영접하고, 사랑인 것을 알고 영접하고 보존하고 또, 영접하고 보존하고 이러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

이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열여섯 가지 구속의 종류 종류를 생각할 때에 그 종류는 이 우주에 없는 데가 없습니다. 이 우주에 없는 데가 없어. 이 우주에 어데 이 사랑이 없이 빈 곳이 없어. 이 사랑이 없이 빈 곳이 없어. 가득 찼어.

이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이 사랑인 것을 깨닫고 이 사랑을 받아. 사랑으로 받아. 이 모든 내, 나에게 무슨 선물로 받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

이런 것은 다 비유가 안 되지만, 이 둔하고 탁한 것이지마는 예를 들어서 자기 남편이 자기에게 무엇을 참 큰 힘 들여 가지고서 무엇을 하나 선물을 줬습니다.

큰 힘 들여 가지고 무엇을 하나 선물을 줬으면 이 선물을 줄 때에 자기에게 무슨 예를 들어 좋아하는 선물을 뭐 반지를 하나 줬다 합시다.

반지를 줬는데 이 반지에 대해서 물론 생각할 것은 이 반지가, 또 가치적으로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가치가 이 반지가 가치가 얼마나 되나 그것도 따지고, 또 거게서, 그것도 하나 따지는 데 그것도 하나 그 속에 들어 가지고 있고, 이것은 남편이 나를 사랑함으로 나를 이것을 줬다, 남편이 나를 사랑함으로 기념으로 주셨다, 이것은 남편의 사랑이다. 또 그것을 사랑으로 또 그렇게 깨닫는 게 하나 있어야 되겠고, 또 하나는 ‘이것은 나를 사랑함으로 줬는데 나를 사랑한 이 사랑할 때 당신의 그 사랑의 역사의 마음이 어떻게 역사해 가지고서 나를 사랑했느냐?’ 그것을 또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몇 가지로 생각합니까? 몇 가지로 생각하요, 손가락으로? 세 가지로 생각하겠습니다.

세 가지로 생각해서 이러는데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뭣이냐? ‘이는 남편이 나를 사랑함으로 줬다’ 사랑함으로 줬다 하는 그것이 첫째 자기가 생각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이것은 어데 저 아무데나따나 돈 주고 사면 있는, 이것은 예를 들어서 만 원 가치가 있다면 이 만 원 가치 있으니까 저 상점에 있는 만 원짜리 반지나 또 백만 원짜리나 가는 반지나 그게 아니고 이것은 바로, 가치 만 원짜리 그것보다도 남편이 나를 사랑함으로 준 기념의 이 반지라. 그러면 그걸 남편의 사랑이라는, 사랑이 내게 왔는데 남편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느냐? 그 사랑이 와 가지고, 그 사랑이 반지가 돼 가지고, 그 사랑이 반지가 돼 가지고서 나를 사랑해서 반지 준 것입니다. 이것은 남편의 사랑이다.

또 그 다음에는, ‘남편이 나를 사랑했을 때에 얼마나 마음으로 사랑해 가지고서 이것을 나한테 줬느냐?’ 그것을 느끼고 실감으로 기억하고 자기도 그걸 생각하는 그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라. 그리고 난 다음에는 이 가치가 얼마나 되는 것이냐 이것을 마지막으로 따질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 구속 주신 이 구속을 제일 중요한 것이 뭣이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써 이제 이 구속을 주셨다’ 이것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바로 이 구속은 가치도 크지마는 이 구속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셋째로는 ‘이 구속은 가치가 얼마나 크냐?' 첫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어떻게 했느냐? 그걸 가지고 암만 연구해도 연구하면 차차 차차 사람이 깨끗해짐을 따라서 느끼고 알지마는 영원히 영원히 가도 또 새로 연구하니까 또 새로 알아 깜짝 놀랠 게 있고 놀랠 게 있고 자꾸 그래서, 사도 요한이가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중에 제일 사랑하는 사도라고 유명한 사도지마는 밧모섬에 가 가지고 주님을 새로 주일날 발견하고 난 다음에 그만 너무 주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비췬다 말은 뭐 거게 상징으로 하기는 했지만, 눈이 부셔서, 마음에 부셔서, 주님에게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해.

주님이 자기에게 하신 그것을 생각하니까 부끄러워서, 자기가 너무 주님 앞에 뻔뻔스러운 그것이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마음에 기가 차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수 없이 했는데 자기는 이것 뭐 털끝만치 해 놓고 한 척했으니까 너무 철없었고, 너무 무지했고, 너무 뻔뻔스럽고, 너무 교만했고, 너무 망령이고, 너무 패역했는 이것을 자기가 깨달아 그만 죽은 자와 같이 기절했다 말이오.

그러니까 주님이 위로하시기를 “나는 처음이고 나중이다. 내가 너거 처음에 나한테 뭐 기대고 내 품 안에 안기고 이래 지내고 뭐 너거 동무들에게 하는 것같이 할 때 그때도 내나 네가 보는 이 하나님 내다. 그렇게 철없을 때도 내가 너를 사랑했는데 네가 지금은 그때 요량하면 많이 장성해서 어북 셈이 들었고 소견이 들었는데 내가 사랑하지 않겠느냐? 염려하지 말아라.” 이렇게 위로를 했다 말이오.

이래서, 이 자꾸 갈수록 끝이 없어.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어떻게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는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자꾸 연구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을 자꾸 연구하고 그 사랑을 자꾸 연구하고, 또 둘째는 이것이 바로 주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다. 주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인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대하고, 사랑으로 대하고.

셋째로는 뭐이요? 셋째로는? 주님이 나를 사랑한 그 사랑의 가치를 지금 이래 ‘주님이 나를 사랑한 이것이 큰 힘 들여서 사랑했다.’ 이 큰 힘 들여서 이 가치 있는 것을, 큰 힘 들였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 아닙니까? 돈을 많이 줬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 아니겠소? 이제, 큰 힘 들여서 나를 이와 같이 큰 구원을 주셨다. 이 구원의 가치, 큰 힘 들여서 이 구속을 주신 이 구속의 가치를 생각하는 것, 가치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뭘 생각해야 됩니까? 뭘 생각해야 돼요? 가치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뭘 생각해야 돼요? 뭘 생각해야 돼? 여기 ○조사? ○○○목사님? 고것 사랑 자체로 알아야 됩니다. 이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그러면 본체는 아니지마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 여기 와 가지고서 지금 이와같이 사랑이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라.

이제, 그래서 이런 피조물 보이는 것 대할 때도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렇게 이것을 조성하셨으니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사랑이라. 이것을 하나님의, 깨닫고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체는 아니지만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와 가지고 이것이 됐어. 하나님의 사랑이 와 가지고 이것이 됐어. 이러기 때문에 이것 인해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그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하심을 내가, 사랑으로 나를, 이러기 때문에 이제 맨 이제 끝에는 사랑의 가치를 우리가 생각해야 되고 그 안에는 바로 열여섯 가지 구속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라. 하나님의 본체는 아니지마는 사랑의 역사의 자체라. 하나님의 역사의 자체. 역사의 자체라. 그보다 생각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이 영원 전 홀로 자존하시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내게 있는 전부는’ 하나님 당신에 있는 전부는 다 이 전부를 기울여 가지고서 이제 ‘나의 사랑하는 자를 하나 만들어 보겠다’ 이것 당신의 전부를 다 기울여 가지고서 나를 만들기로 그렇게 작정한 것이 하나님 목적입니다. 이것도 새기고 새겨서, 이것도 끝이 없어.

이래서,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이제는 모든 열여섯 가지 구속이 이 면으로도 있고 저 면으로도 있고 하는데 이 화초에는 열여섯 가지 구속이 어떻게 들어 있습니까? 열여섯 가지 구속이 이 화초에는 어떻게 들어 있소? 창조면에 들어 있어. 창조 면에.

우리가 내게 닥쳐서 죄 이게 죄악이 내게 닥쳤을 때에는 예수님의 이 사랑이 어떻게 들어 있습니까? 어데 들어 있습니까? 대형 사죄에 들어 있어. 이러니까 주님이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이제 죄를 도말하고 죄에서 나를 자유의 해방을 주셨어. 이러니 하나님의 열여섯 가지 구속이 빠진 곳이 없어. 빈 곳이 없어. 가뜩 찼어. 전체가.

이랬는데 가뜩 찼으니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열여섯 가지 구속이 아닌 것이 없고 구속이 가뜩 찼는데, 구속이 찼는데 우리가 이것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하느냐? 이 구속의 가치가 얼마가 되느냐 이것 한번 따져보고, 따지는 것이 이 구속을 하시기 위해서 얼마나 큰 힘 들였는가, 힘이 많이 들었으면 가치 있는 것 아닙니까? 큰 힘 들여서 했기 때문에 이 가치를 따져.

큰 힘 들여서, 영생하는, 물론 큰 힘 들여 만든 그것이 만들어진 그것도 가치 있지만 만든 투자가 가치라. 투자는 당신이 모두 다 희생하신 것이오. 투자.

투자를 계산을 하고, 이 투자해 만드는데 이 받아 가지고 있는 열여섯 가지 구속이 이것 얼마나 가치 있는가? 이것 그 가치를 평가해 가지고 가치를 평가하고, 가치를 평가하고 난 다음에 그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입니까? 그보다 원하시는 거는 뭣이요? 그보다 더 원하시는 것은 뭣이요? ○○○?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사랑의 역사의 본체라. 하나님의 본체는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의 그 본체라. 실물이라. 요것을 깨닫고.

그보다 더 깨달을 것은? 하나 더 깨달을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발동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사랑이 발동돼서 사랑이 동기돼 가지고서 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이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그 사랑이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떻게 된 그 사랑이, 하나님이 뭐 자존자니까 그분이 엿새 동안 우주를 만들었으니까 어떤 분인데? 그분이 어떻게 전부를 나를 기울여 가지고, 하나님이 나를 목적으로 정하신 예택이라 하는 것은 뭐 생각할수록 이걸 생각하면 참 우리가 뭐 어떻게 해야 될 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 전부를 다 나를 사랑하심으로 솔빡 하나도 남김 없이 나에게 투자를 다 하시기로 작정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예택이라.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인 예택 이것 위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이것 외에 다른 것 당신이 역사한 게 있어요? 역사한 게 하나도 없어. 전부 이를 위해서 했어.

이래서 우리가 열여섯 가지 구속이 없는 곳이 없고 열여섯 가지 구속 아닌 것이 없으니 그것의 가치를 우리가 아는 것을 주님이 원하시요, 그것의 가치를. 그것이 어떤 사랑에 어떤 힘이 들어서 어떤 고난을 어떻게 해 가지고서 역사하셨으니 이게 어떤 가치가 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이 사랑에 어떤 가치가 있다.

거게 그 가치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했기 때문에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그것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또 그렇게, 이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바로 사랑 자체 역사의 자체라. 하나님의 사랑 바로, 하나님의 사랑 바로 역사의 자체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그게 돼 가지고 있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나를 사랑하신 사랑, 나를 사랑하신 사랑 그 자체라 그 말이오.

이렇게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근본의 사랑의 그 발동되고 시발되고 바로 시동이 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생각해서 우리의 전생활에 이 세 가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섭섭해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생각하지 안하는 건 전부 옛사람의 것입니다.

이 세 가지에게 발동돼서 이 세 가지가 발동될 때에 이 세 가지를 자기가 차차 가졌을 때에 하나님과 연결돼 있는고로 연결된 결과는 하나님과 연결됐으니까 하나님의 충만이 내것으로 나타나는 그것이 그 결과라. “이 결과를 네가 먹게 되겠다” 이랬는데 이것 하면은 세 가지를 차차 이래 살 때에 이렇게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되고 이것 안 하면 하나님에게서 끊어졌고 벌써, 조금 그것이 돌이킬 수 있는 그 기회에 돌이키지 안하면 완전히 교회는 없어지는 거라.

이 교회는 영이 구원 얻은 교회가 아니고 이미 믿는 자에게 대해서는 성화의 구원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영을 구원하는 교회도 되지만 “네 촛대를” “네 촛대를 옮긴다” 네 촛대 옮긴다는 것은 이것은 벌써 중생된 자의 촛대라 말이오. 중생된 자의 촛대 중생된 자의 교회는 성화구원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그래 너는 성화구원은 없다 그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참 에베소 교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주셨습니다. 지금 암만 지금 말해도 나는 지금 만족이 없고 여러분들도 얼떨떨한데 이것은 자기가, 자꾸 이와 같이 지금 명상하고 실지로 이 생활을 조금씩 해 보는 데에서 우리가 차츰차츰 밝아지고 이 어두움이 물러가고 이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러면, 죄를 이기는 것도 여게서 죄를 이길 수 있고, 깨끗해지는 것도 여게서 깨끗할 수 있고, 담력도 여게서 가질 수 있고, 모든 만물을 사랑하는 것도 여게서 사랑할 수 있고, 성결도 여게서 성결이 되고, 이것을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 끊어져 가지고서 뭘 한다 하는 걸, 여기서 끊어서 가지고서 끊어지니까 여게 원줄기에 끊어져 버리니까 이놈이 이리 탈선되고 저리 탈선되고, 사랑도 범죄되고, 미움도 범죄되고, 욕심도 범죄되고, 뭐 열심도 범죄되고, 담력도 범죄, 전체가 다 범죄, 마지막에 결과는 다 범죄를 일으키고 마는 것뿐이더라 그거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만 가지가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의 사랑이 없는 데가 없으니까 언제든지 이 세 가지를 생각해서, 이 세 가지로 우리가 동하고 정하는 그것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그러다가 뭐 밥빌어 먹을라고?’ 아니, 이게 능력이라. 이 능력이 연결되면 우주가 자기 것이라.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와요, 필요한 것은 얼마든지.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또 지하철에 저 기둥 뽑지 않도록, 하나님이 그걸 둬 두셔야 우리가 지금 아무래도 이 건물이 피해가 없겠으니까, 뭐 하나님이 하시려면 다 뽑아서 없애버려도 공중에라도 들어얹으면 하지마는 어짜든지 우리가 보기에 그러니까 그런 것도 해 달라는 그런 걸로써 우리가 기도를 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작정을 해 놓고 ‘요 꼭 안 뽑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섭섭해 그래. 우리가 뭐 알아야지? 이러니까 ‘그것 안 뽑히는 게 좋을 것 같으니까 그것 안 뽑히는 게 좋으면 안 뽑히도록 그래 해 주십시오.’ 이래 해야 되지 ‘요것은 꼭 안 뽑히도록 해 주십시오' 만일 이래 버리면 하나님이 삐꿔버리요.

‘그것은 꼭 안 뽑아야 좋은 줄 아는구나. 그것은 네 계획이네’ 그러면 우리 계획을 전혀 박살낼라 하는 게 하나님이라. 우리 계획을 박살낼려고, 우리 계획은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다 그 계획이거든. 이러기 때문에 이것 있으면 죽기 때문에 계획을 박살낼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꼭’ 하면 하나님께서, `꼭' 하면 당신이 ‘꼭’ 하고 반대로 빼버립니다. 그것 우리가 일생 동안 신앙 생활에서 항상 체험하는 것입니다. 요거 꼭 돼야 되겠다 하면 꼭 안 되게 합니다. 안 되게 하고 우리에게는 유익이 되도록 당신이 해 주십니다.

그러고 또 하나 광고합니다.

오늘 열시 이십분에 여게서 ○○○목사님과 ○○○그 사모님이 우리가, 아따 나는 장 들어도 몰라. 거게 어디지? 빌라델비아? 빌라델비아에 거게 지금 선교사로 지금 돈 없이 돈 안 들이고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우리는 뭐 하나 선교사 하나 파송할려 하면 돈 굉장히 많이 들어요. 이런데 돈 안 들이고 선교사 파송하고, 또 내가 그전에 봤는데 이 아주 환송식, 아주 우리가 기뻐하면서 이렇게 보내는 파송하는 환송 잔치를 하면 그뭐 상당히 많이 들겠어요. 그때 보니까 사람들이 뭐 수십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이 주 모아 가지고서 모두 다 음식차려 놓고 잔치하는데 그것도 한내끼도 없지 우리는 돈 없이 하는 거라.

이러니까 이십분에 출발하니까 그때 여게 오시면 이십분 전에 오시면, 이십분 전에면 여게서 잠깐 간단하게 예배보고 떠날 테니까 한 열시에 오시면 다 참여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교회 차로, 좋은 차 있지마는 교회 봉고차로 여럿이 갈 터이니까 봉고차로 모시고 또 봉고차가 적으면 봉고차 두 대 갈 것이고 또 두 대 가지고 모자라면 큰 버스가 갈 것이고 거게 김해 공항에 거게 가 가지고서 환송하고 싶은 사람은 가시고, 가시는 대로는 차는 교회서 내서 드릴 것입니다. 열시에 오시면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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