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가지로 구별 할 것

 

1987. 11. 14. 새벽 (토)

 

본문:고린도전서 9장 24절∼27절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우리는 온 세계는 다 싸움 싸우는 세계라, 다 경쟁하는 세계라, 그러기 때문에 여기 가 보면 이 투쟁이 필요하고 저게 가 보면 저 투쟁이 필요해서 사람들이 접촉해서 깨달은 대로 자기의 전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큰 것을 모릅니다. 크게 나누어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이 두 종류가 있는데 이것부터 선택해서 어떤 전투에 평안하고 수월하고 또 사람 보기에 큰 승리 작은 승리 온갖 종류가 있다 할지라도 이게 썩는 것을 지금 욕망하고 하는 것이냐 썩지 아니할 것을 욕망하고 하는 것이냐 해서 우리가 썩을 것만 다 추려서 ‘썩을 것은 내가 할 것이 아니라’ 단정을 짓고, 썩지 아니할 것만 나 할 일이라 이렇게 생각하면 그 수많은 참, 뭐 하늘에 별이라 할 만치 그렇게 수많은 모든 것들 다 요 한 깨달음에서 전부 제거해 버려 버립니다.

다 제거해 버리고 썩지 아니할 것만 자기기 택할라고 하면은 간단하고 얼마 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분쟁나는 것도, 번민 고민되는 것도, 모두 시작도 고민, 중간도 고민, 결말도 고민 영원 고민되는 그런 것들은 대개가 다 썩을 것들입니다.

썩지 아니할 것들은 옛사람 이놈의 작용으로서 시작할 때는 고민되는 것도 있고 또 그것을 생각할 때도 고민되어서 피해지는 것이 있지마는 막상 썩지 아니할 것을 소망하여 시작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그 일을 진행하는 것이나, 또 결과를 맺을 때에나 전부 평안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걷는 걸음은 십자가의 걸음이요 이 십자가의 걸음은 껍데기는 제 삼자들이 볼 때에 고통스러운 것 같지마는 본인은 한없는 기쁨이요 다 위로와 평강입니다. 그래서, 내게 여러가지 애로가 있는 그것보다 주님이 내게 위로해 주시는 것이 더 넘치기 때문에 그 모든 고난을 다 잊어버리고 마지막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기독자의 걸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걸음은 제일 일차로 중요한 것이 뭐인고 하니 바로 알고 깨닫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성경을 아는 것이고 거게서 자기가 아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암만 성경 읽어서 다 외운다 할지라도 자기가 ‘이것이 나 할 일이라’ 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그 사람은 깨달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해야 될 것을 발견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으면 사람들은 기어코라도 그 일은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단번에 안 이루어지면 여러번 계속해서라도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은 바른 실행을 기어코라도 만들어 내고, 또 바른 실행은 실상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게 저게 듣고 배워 가지고 그런 가운데서 자기의 깨달음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날마다 자기 깨달음이 자꾸 새로워지고 깨달음이 자라가고 새로운 깨달음이 자꾸 생겨져서 자라가면 그 사람은 구원이 자라간다는 증거요 믿음이 자라간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깨달음을 버리고 자꾸 묵은 둥치 옛날 것만 자꾸 들어서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자랑하고 그것만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 마치 삭개오가 주님 만날라고 암만 가 봐도 사람 뒷꼭지만 보이지 주님 만나지지 안하니까 달음질 쳐서 앞에 가서 주님 가시는 방향으로 앞서 질러 가 가지고 뽕나무에 올라가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기다리고 있다가 만났어. 주님이 그 삭개오를 내려오라고 말하고 오늘밤에 내가 너거집에 유하겠다, 너희들에게 구원이 이르렀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거는 뭘 가리키는 건고 하니 그저 유전 신앙으로 먼저 선배들이 신앙 생활 하는 그것만 가지고, 그 사람들이 신앙 생활 해서, 증거할 때는, 사람이 자기 깨달은 것을 다 증거 못 합니다. 또 붓으로 기록할라 하면 더 힘듭니다. 이런데 그 사람들이 깨달음은 열쯤 됐으면 기록한 것은 하나쯤 됐는데 문서로 기록한 그것만 거머쥐고, 그것만 외우고, 그것만 우상삼고, 그것만 팔아먹는 이 일만 자꾸 하고 새로운 깨달음은 묵살을 시킵니다. 그럴 때에는 그 시대에 구원은 전진하지 못하고 그대로 침체돼 있거나 그리 아니면 후퇴해서 돌아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 둥치에서 산 새움이 나야 됩니다. 올바른 교리라 신조라 말하는 것은 사회성과 역사성과 성경성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대로라야 되고, 또 그것을 일시 한 사람이 깨달은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다 공통된 깨달음을 가졌고, 또 역사성이라 말은 이 시간에도 그렇고 백 년 전에도 그렇고 십 년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후에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도 다 그대로 될, 공통성 역사성 성경대로의 권위성이 있어야 교리로 모두 다 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교리로 되어 있는 그 교리를 기억하고 그 교리에서 탈선되지 안하고 그 교리에서 나온 새로운 깨달음, 다시 말하면 신구약 성경에서 나온 새로운 깨달음을 자꾸 이것을 숭상하고 북돋우고 자기가 가질라고 애를 쓰는 이게 아니면 신앙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학자는 목회를 잘 못 합니다. 왜? 신학자는 새움이 없습니다.

신학자는 과거에 묵은 둥치 그것을, 책에 기록한 그것을 외워 가지고 그것을 하나의 교안으로 삼아서 항상 그것만 되풀이해서 가르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작년에 가르치던 거 금년에 가르치고, 십 년 전에 가르치던 거 오늘에 가르치고 자꾸 그것만 가르치고 하는 그 사람은 목회라 하는 것은 사람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에 작년에 가르친 데보다 금년 가르친 것이 좀 더 또 새롭고 또 더 정확하고 더 구비하고 또 금년에 가르친 것보다 다음에 가르치는 것은 더 그래야 됩니다.

그러면 같은 설교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설교가 먼저번에 들을 때의 그 설교와 오늘 할 설교가 영감도 더 달라야 달라야 되고, 깨달음도 달라야 되고, 또 얻어지는 힘도 달라야 되고, 소원도 달라지고 자꾸 그것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새움이 없으니까 자라가는 일을 하지 못하니 아무리 묵은 둥치 가르치는 그것 가지고는, 목회는 항상 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삼 년이고 사 년이고, 제가 여게서는 삼십육 년 제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십육 년 가르치는데 장 들은 그것만 배우면 사람들이 배워지지 안하고 아무 성장이 없게 됩니다.

만일 가르쳐도 또 새것, 배워도 또 모르고, 과거에 거는 아는데 또 모르고, 자꾸 새로운 배움,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지식, 새로운 소원, 새로운 출발, 생애가 이루어지지 안하면 안 되기 때문에 목회라 하는 것은 신학자로는 안 됩니다.

신학자는 그 자기 과정 그것만 가지고 모르는 그 일학년에 항상 고거 가르치고, 또 이학년이면 이학년, 사학년이면 사학년 고거 가르쳐서 또 새로 들어오는 일학년도 또, 십 년 후에 들어오는 일학년도 또 고거,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가 그 학생들은 새로 들어오는 학생이기 때문에 가르치니까 은혜가 되고 필요하지마는 그 학생을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가르친다면 같은 것을 누가 들을라 합니까? 이미 아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또 새것을 원하고 필요성으로 느끼는 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배우고 깨닫고 믿고 실행하는 이 일을 언제나 계속해서 힘써 나가지 안하면 우리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무슨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고 인격을 만들기 때문에 인격이라 하는 것은 지정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꾸 새로와지고 자라가야 되는 거라 말이오.

뜻이 있고 정서가 있고 또 자기의 욕망이 있고 하기 때문에 그런 게 자꾸 자라가야 됩니다.

그런데 여게 지난밤에 여기 가르친 데에서 기억할 것에 첫째 기억할 것은 뭐이냐? 그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있다. 그러면 나는 사람들이 할 일이 서로 경쟁 생존 경쟁도 하고, 생활 경쟁도 하고, 물질 경쟁도 하고, 권세 경쟁도 하고, 서로 자꾸, 경쟁이라 하는 거는 서로 다투고 싸워 가지고 내가 앞서 갈라 하는 그것이라 말이오.

그런데 그 수많은 종류가 있으니까 사람들이 ‘아, 이것도 필요하다.’ 거게 가 가지고서 한 십 년쯤 하다 보니까 ‘이거는 덜 필요하고’ 또 딴거 가지고 `딴거 필요하다’ 이라다가 보니까 일생을 돌아다녀도 다 돌아다니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다 각각 자기 갈 길을 자기 전투를 선택하는데 어떤 걸 선택해야 될란지 그것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놈 선택해 가지고 좀 하다 보니까 ‘이것은 그 가치가 적다’ 이래서 선택으로 돌아다니면서 평생 죽을 때까지 선택해도 옳은 거 선택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 떠날 때에는 후회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썩을 거 썩지 않을 거 이 두 가지로만 딱 분별하고 나면 그 다음에 그만 척 보고 ‘이거 썩을 것이냐? 나 할 것 아니다.’ `이거 썩지 안할 것이냐? 나 할 것이다.’ 그러면 썩지 아니할 것은 그것은 여러분들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썩지 아니할 것은 그것들은 다 단일성의 존재입니다, 단일성. 천 가지 만 가지로 나타났다 할지라도 그거 속에 알맹이는 하나입니다. 기운도 하나요 욕망도 하나요 가치도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썩지 아니할 것은 어느 것을 붙들었든지 붙들어 가지고 그것을 하다 보면 썩지 아니할 것은 다 차지하게 되는 것이고 점차적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썩지 안할 것을 선택한 자는 그 선택에서 노력하다가 ‘이거는 가치가 적다. 딴거 해야 되겠다.’ 그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썩지 안할 걸 선택한 자는 그것을 십 년 전에 오십 년 전에 한 그것도 그것이 후회될 것이 아니고 내나 지금 하는 그거나 한 가지입니다. 겉어머리 외모만 다르지 속에 알맹이는 하나라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 이 두 가지로 모든 땅위에 있는 노력의 경쟁은 이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되겠다.’ 이번에도 세계에 그 노벨상 타는 합격된 사람을 세계에서 찬양하고 그들을 막 높이 들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나라도 지금 새로 눈뜬 것이 이제 ‘이 모든 면에 노력을 하되 노벨상에 도달되기까지 노력하자’ 하는 그것이 하나의 목표입니다. 노벨상에 도달할라 하면은 그것도 일생을 그저 게을 없이 전부를 기울여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딱 보고 ‘썩을 것이냐 썩지 않을 것이냐?’ 딱 요것으로 판정하면은 `이것은 암만 있어도 집어 던질 것, 필요가 없는 거.’ 이렇게 이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으로써 모든 것을 평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 일생을 간추리고 간추리고 정선하고 정선해서 후회 없는 그 생활에 정선돼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말씀은 자꾸 깨달으면 깨달을수록이 진주의 무한한 보배가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되겠고, 그 다음에 둘째로 기억할 것은 우리가 애를 쓰되 향방 없는 자와 같이 그렇게 달리면 안 된다. 우리는 달음질 신앙인데 달음질 신앙이라 하는 것은 그 달음질이 끝마칠 때까지 자기로 더불어 경쟁하는 그 경쟁하는 대상이 없는 시간이 있습니까? 없는 시간이 없어. 전쟁이 끝난 시간도 없고.

마지막 끝이 죽어야 끝난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은 피곤하다고 자고 쉬고 그런 게 아니라.

고기덩어리는 잘지라도 신앙은 자지 안해야 됩니다. 언제든지 계속해야 됩니다.

우리를 넘어뜨릴라 하는 대적도 계속합니다. 없을 때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 진리를 바로 깨달은 자는 ‘이제 나는 이 일 해 놨기 때문에 됐다’ 아니라, 그 너머 대적이 지금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랬으니까 좀 쉬어야 되겠다’ 아니다. 달음질 생활은 아무리 앞섰다 할지라도 제가 앉았다 보면은 다 앞서 가 버리고 저는 떨어지고야, 진 사람이 된다. 우리의 신앙은 전투가 그 끊어질 시간이 없고 계속이다. 대적도 계속한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목표가 어데 있느냐? 우리의 목표가 어데 있느냐? 어제 요한복음 14장 20절을 제가 말을 했습니다. 거게 보면은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날에는” 그날에는 하는 것은 재림 날을 말합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를 말합니까? 부활하시고 난 뒤, 죽으시기도, 부활하시고 그 사활을 해야 우리 대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완전히 이루어진 날,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모든 무덤 속에 있는 성인들이 다 살아나왔었습니다. 같이 예루살렘 갔다가 또 무덤으로 들어갔어. 그게 무슨 증거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소망하는 구약 교회들이 다 구원이 완성됐다는 증거입니다.

“그날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부터 말이요, 그날부터. “내가 아버지 안에” 주님이 성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성도들이 주님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때는 확실히 알게 됩니다. 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중생시켜서, 우리를 중생시킨 것은 피와 성령과 진리가 중생시켰기 때문에 중생된 자는 너희 속에 기름 부음이, 너희 속에 이 중생케 한 영감이 그말입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목표하는 것이 뭐이냐 하면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는 이게 목표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내 안에 계셔서 나를 주장하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서 주님을 힘입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주님의 이 구속을 자기가 기억하고 생각하고 믿고 ‘나는 이 구속을 받은 자로 구속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믿는 그때가 뭐냐 하면은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잊어버린 때는 주님을 잊어버리니까 주님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은 뭐인가?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거는 현실 생활 할 때에 그 현실 환경에 피동되지 아니하고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이 진리와 영감과 피공로로써 내 안에서 계속해서 영감대로 진리대로 내가 행동하는 그것이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내 생명이 돼서 주장하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이것입니다.

또 우리가 싸울 때에 허공을 치는 거와 같이 아니하고 똑똑히 자기의 대적을 보고서 대적으로 더불어 싸운다. 그 대적으로 싸우는데 대적이 뭐인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 말은 내 심신을 내게 복종시킨다 말입니다.

심신을 내게 복종시킨다 말은 자기 마음에 복종시킨다 말이요 고기덩어리에 복종시킨다 말이요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새사람에게 복종시킨다 말이요? 새사람에게 복종시킨다는 말입니다.

새사람에게 복종시킨다는 말은 중생된 영에게 복종시킨다는 말입니다. 중생된 영에. 마음을 마음에 복종시키는 거 아니고 중생된 영에게 복종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에게 복종시키면 누구에게 복종하는 게 됩니까? 진리에게 복종하는 게 되고, 영감에 복종하는 게 되고, 주님의 대속의 공로에 복종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과 내 몸을 진리가 주장하고, 영감이 주장하고, 피공로가 주장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장하고 중생된 내가 주장할 때에 그 심신의 기능은 살았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잡고 내 주지 안할라고, 그놈이 예수님이 대속했기 때문에 내놔야 되는 것이 법인데 그놈이 내놓지 안할라고서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이 붙들고 그랍니다. 이러니까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을 쳐서 죽여버리고, 악령 악성 악습 이것은 옛사람인데 옛사람을 성경에 죽이라고 했습니까 살살 달래 내보내라 했습니까? 죽이라 했습니다.

악령은 자기 중심의 영이 악령이요 하나님 위하지 안하는 영은 전부 악령입니다.

악성이라 하는 거는 인간에게 자기 중심으로 살라고 하는 인간의 악성 죄악성 원죄성, 원죄성입니다. 또 악습이라 하는 것은 자기 중심의 영과 자기 중심의 자기에게 있는 본성과, 타락한 본성과 그대로 산 나쁜 버릇, 한 번 하고 두 번 해 봐 가지고서 이제 모아 놓은 게 버릇이라 말이오. 악습이라.

악령을 이기는 것보다 악성을 이기는 것보다 악습 이기는 것이 제일 힘듭니다.

악습 이놈이 내게 제일 가깝게 있습니다. 이놈을 이기고 나면은 그 다음에 악성을 이기게 됩니다.

이래서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뭐인가? 악령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요, 악성이 우리 싸움의 대상이요, 악습이 우리 싸움의 대상이라. 다른 말로 말하면 악령은 마귀요. 악성은 뭐인가? 원죄라. 악습은 뭐인가? 본죄라. 우리의 싸움은 마귀와 원죄와 본죄 이거하고 싸우는 게 우리 싸움이라. 이놈만 싸우면은 사망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우리 싸움의 대상을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면 이 두 가지, 경주로 말했고 싸움으로 말했는데 싸움에 승리든지 달음질에 승리든지 이 승리는 어데서 나온다고 배웠습니까? 어데서 나옵니까? 저 뒤에도 한번 말로 해 봐. 어데 나옵니까? 모든 절제에서 나와, 모든 절제에서. 절제 없으면 암만 시작해 봐야 지기만 하지 소용 없어. 백 번 시작하면 백 번 졌고, 천 번 시작하면 천 번 졌지 소용 없어. 이러니까 우리가 이기기가 목적이지 뭐 싸움 시작하는 게 목적입니까? 이기는 데에는 “모든 일이 절제하나니”  절제가 없으면 이기지 못해.

절제라 하는 것은 간단히 말하면은 내 경주하는 자에게 절제할 것은 경주하는 달음질에 방해되는 것은 다 어떤 것이든지 내놔야 되지. 경주하는 자가 ‘이거는 금덩이기 때문에 금덩이 내가 짊어지고 뛰어야 된다’ 짊어지고 뛰면은 금덩이는 보호할지라도 자기의 경주는 패전하지. 뭣이든지 경주에 방해되는 것은 다 버리고 경주에 필요한 것은 갖추어야지.

싸움에 절제하는 것은 싸움에 방해되는 거 손해갈 것은 버리고 싸움에 도움될 것은 다 갖추어 가져야지. 이것이 절제라 그말이오.

제까짓 게 아무리 구원을 얻을라고 이룰라고 이 쌓아도 내가 요 사람 접촉하면 요리 되고 조 사람 접촉하면 조리 되고, 악령의 재미가 있습니다. 범죄하는 재미가 있어. 만나 가지고 서로 죽이는 고게서 재미가 있어.

그 말 한 마디 해 가지고 그 사람 죽이고, 그 사람은 치켜 올려 가지고 죽이고, 그 사람을 끌어내 가지고서 죽이고, 그 사람을 꾀워 가지고 죽이고, 그 사람을 달래 가지고 죽이고, 거짓말 해 가지고 죽이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해로운 것을 이런 거 저런 거 줘 가지고 죽이고, 마귀란 놈을 줬다 뺏들었다가 밀고 당기고 이리 재끼고 저리 재끼고, 씨름 할 때 보면은 한 꾀 가지고 안 돼. 이 꾀로 하고 저 꾀 쓰다가 저 꾀 쓸라 하면 이 꾀 쓰다가 여러 꾀를 쓰는 사람은 씨름에 이겨. 그와 같이 마귀란 놈은 그 궤휼이라 하는 것이 굉장합니다.

이러니까 절제 못 하면 헛일이오. ‘내가 이 구원 이루는 데는 요런 행동은 안 해야 되겠다. 요런 버릇은 안 해야 되겠다. 요런 말은 안 해야 되겠다. 내가 요 사람은 접촉 안 해야 되겠다. 조 사람은 접촉해야 되겠다. 내가 아예 이 사업은 버려야 되겠다. 내가 이 직장은 버려야 되겠다. 이 직장은 취해야 되겠다.’ 죄되지 안하는 직장은 다 가져야 되지마는서도 그 직장에서 자기가 연약함으로 그 직장을 신앙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거기서 피해서라도 살아 가지고 이제 힘을 얻어 가지고 그리 가든지 해야 되지 그 힘도 없는 게 거기 들어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다 죽고 만다 말이오.

그러니까 모든 직장이든지, 먹는 것이든지, 마시는 것이든지, 사람 접촉이든지 모든 전움직임을 절제해야 된다 말이오. 절제. 내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내가 갖추어 가지고 내 신앙에 해로운 거는 자꾸 피해야 된다 말이오.

피해 가지고서 자꾸 이래 가지고 신앙이 자라고 나니까 나중에 가서는 피할 것이 하나도 없어. 뭐이든지 닥치라. 다 이길 수 있어. 고문과 고형에서도 더 빛나는 신앙을 가질 수가 있고 독약을 먹이고 독침을 찌르는 데에는 더 빛나는 신앙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피할 것 없어. 처음에는 그런 것을 피해서 차차 작은 데서부터 이겨 가지고서 승리해서 마지막에 최후 최고의 승리까지를 가져야 할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절제하는 것이 중요해. 모든 승리는 어데서 나오는냐? 절제에서 나와.

그러면 절제는 어데서 필요하고 필요치 안한 것을 어데서 보고 선택할 수 있는가? 어째, 무슨 책을 읽어보고 선택할 수 있어? 누구에게 그것을 물어서 그거 선택을 할 수가 있어? 어데서 합니까? 필요한 것 방해되는 거, 방해되는 거와 필요한 것을 어데서 배우면 잘 가르쳐 줍니까? 실행에서, 맞았어. 저 뒤에 보니까 입을 딱 답 하는 게 그말 하는 거 같애. 실행에서. 자기 싸워봐야 알아. 싸워봐야 알고 달려봐야 알아요.

달려보면, ‘요번에 내가 달리는 데 뭐이 모자랐다. 이거 갖춰야 되겠다. 요번에 달리는 데는 보니 뭣이 방해 됐다.’ 이렇게, 뭣을?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이 계시는 이 생활을 할라고.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 사활의 열여섯 가지 구속을 안 잊어버릴라고 생각할라고 내가 계속 믿고 이 구속 안에 산다는 걸 자기가 믿고 구속 안에서 자기가 살라고 애를 쓰고 구속을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구속을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생각할라고 구속을 믿을라고 하니까, 하니까 요 사건이 쏙 들어와 가지고 그만 잊어버렸습니다. 반가운 저 사람이 와 가지고서 한 시간 잊어버려 버렸어. 저 사람이 무슨 사건 오고 사람 오니까 하루 종일 잊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날 밤에 계산할 때 ‘나는 오늘 종일 내가 여게서 손해봤나 저게서 손해봤나?’ 그 계산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 이튿날 안 할 것이고 계산 안 하는 사람은 그것을 ‘재미 있었다’ 옛사람은 재미 있다 합니다. 재미 있으니까 저녁 먹고 나면 한번 또 마슬을 척 가야 됩니다. 아침 먹고 나서도 가까운 데 마슬 한번 가야 됩니다. 또 누구하고 만나 가지고 다른 사람을 훼방하고 논인장단을 해야 됩니다. 또 마귀노릇을 좀 해야 됩니다. 죄를 지어야 이제 시원하고 잠이 옵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이 경주, 달음질과 전투 이것을 표준해 가지고 자꾸 이렇게 노력하지 안하는 사람은 그런 걸 몰라요. 재미 있다 하지. 일생 동안 아주 깨소금이 쏟는 재미 있게 살았는데 ‘나는 참 만족한 미남을 만났다. 만족한 미인을 만났다. 박력 있는 남자를 만났다. 아주 모든 면에 구비한 여인을 만났다.

재미 있었다.’ 재미는 있지마는서도 그 재미에 이 경주하는 거, 달음질과 이 싸움을 잊어버렸으면 헛일이다. 그것이 너희에게 영원을 빼앗는 유일한 적이라는 것을 알고 거게 절제하지 않으면 너도 죽고 저도 죽고 다 죽는다. 알고 보면 그런 거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왜 안 부러워? ‘나도 약하니까 그리 됐으면 내가 일생 동안 하루밤 지내듯이 솔빡 지낼 터인데 그렇지 안했음으로써 내가 연약한 내가 그런 데 빠지지 안했다.’ 이것도 감사하고, 또 그런 사람은 ‘나는 누구보다 좋은 환경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기 때문에 좋은 세상 이거하고 이별하기 어렵고 좋은 세상을 절제해서 내가 세상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세상을 내가 이용하는 데는 다른 사람보다 내가 몇 배 힘을 써야 되겠다. 내가 좋은 남편을 만났기 때문에 이 남편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손해보는 일을 안 할라고 하면은 몇 배 애를 써야 되겠다.’ ‘나는 좋은 아내를 만났기 때문에, 좋은 환경을 만났기 때문에, 좋은 기술을 만났기 때문에, 좋은 모든 물질이나 지위를 만났기 때문에 이제 여기에서 내가 신앙에 손해 안 볼라 하면은 참 힘들겠다.’ ‘이러니까 나는 좋은 걸 만났으니 미혹받기 쉽고 거게 빠지기 쉬운 거 만났기 때문에 힘을 써서 요것을 이기면 내가 이긴 그 결과의 신앙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훨씬 좋겠다.’ 이래서 뭐이든지 깨달음을 가지면 자기 환경이라는 건 다 좋고 자기 형편이라는 건 다 자기 구원을 위해 있는 것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만 이 환경 세상에게 져서 일생 동안 산 게 세상노릇 환경노릇만 했기 때문에 환경에 종노릇, 환경에 순종하는 것만 해 가지고서 암만 재미 있으면 뭐 재미 됩니까? 마지막 죽을 때는 후회가 될 거라 그거요.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할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선생이 어짤 수 없어 교학실에 가 가지고서 수고하기로 이동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나머지기 일을 지금 내가 세 사람에게 맡겼는데 세 사람이 인계가 아직까지 잘 못 돼서 늘 광고하는 이 광고지가 여게 기록이 되어 올라오지를 안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잠깐 그 면에 행정은 마비가 되어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사님이 잘 조절해 가지고서 다시 회생을 시키도록 하십시오. ○○○조사님 어데 있노?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나만 더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이나 기쁨이나 용기나 모든 것이 약해지는 것은 몇 가지 때문에 약해져요, 손가락으로? 몇 가지 때문에 약해져요? 저 쪼그마이 꼬마 조거는 손가락을 다 드는데 교역자들은 못 드네. 자, 몇 가지로 약해져요, 몇 가지 때문에 약해져요? 손가락 한번 들어 봐요. 조 꼬마 조거는 드네, 쪼맨한 조거는 들었는데. 그전에 이래 물으면 ○○○목사님 아들이 제일 잘 대답했는데 어데 가서 지금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지 안 보여. 안 보이면 손해입니다, 돌아가서 무엇을 한다 할지라도. 나는 소망과 기대를 많이 가졌는데 지금은 내가 그 소망과 기대를 의심을 하고 있지 가지지 안해. 안 들으면 죽어.

별수가 없어.

두 가지라. 하나는 병이 들어 그래. 하나는 배가 고파 그래. 병 치료하고 배부르면 힘나지. 그렇지 안해요, 자라가고? 병 고치는 거는 회개하면 이게 병 고치는 거라.

밥 먹는 거는 뭐이냐 하면 내게 대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그것이 인격의 양식을 먹는 거라.

 


선지자선교회 선지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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