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2순종 5축복

 

1988. 5. 4. 수후집회

 

본문 : 창세기 13장 6절-18절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증거한 그 설교를 듣고 깨닫지마는 차차차차  설교는 뒤로 두고 설교의 본문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이 말씀 속에는 이  이치가 들어 있나 없나 하는 것을 살피고 이래서 믿을 때에는 ‘말씀이 틀림없이  정확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또 새김질하면서  ‘정확하나 보자’ 또 성경을 읽어 정확한 것을 또 자기가 느끼고 또 정확을  느끼고 또 정확을 느껴서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틀림없이 이와같이 약속을  선포하셨다 하는 것이 자꾸 자기에게 믿어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왜 설교를 필기한 노트를 보고 믿는 그 믿음을 장구히 가지지 안하는 것은  노트에 기록된 것은 성경 본문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사람들이 노트를 보고  믿습니다. 또 틀림없다고 안심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평범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장 어려운 밤중인 데에 있습니다.

 이래서, 요한계시 7장에도 보면 모든 승리는 하나님의 인을 그 이마에 인을  치인 것이 비로소 승리한 표인데 그 승리는 다 환난 중에 있었습니다.

 열 처녀 비유에도 신랑을 맞이하는 것은 그 준비로써 이제 완성 된것을  가리킵니다. 기다리는 것은 준비하는 그 기간의 순서를 가리키고 신랑을  맞이하게 된 것은 그 성공 완성된 것을 비유하신 것인데 거기에도 밤중에  왔습니다.

 처음에 초저녁에는 모두 다 등불을 켜 가지고서 열 처녀가 다 등불켜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라다가 신랑이 온다고 하니까 정말 신랑 맞이하는 데는 등불이  필요한데 등불을 다시 돋굴라고 하니까 등불이 있기는 있었지마는 꺼져간다  이랬습니다. 등불이 꺼져간다. 등불이 있었던 것은 그 사실로 증거를 했습니다.

 꺼져가니까 꺼져가는 것은 기름 없어 꺼져가니 갑자기 기름을 구할라고 애를  써도 안 되니까 파는 자에게 가서 사라 이라니 사러 가는 동안에 신랑은 왔고  신랑 영접은 하지 못했고 밖에 쫓겨났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은 신앙이 준비하는 기간도 있고 준비한 것이 마지막에 완전히  승리해서 결실을 맺는 그런 시기도 있습니다. 그 결실맺는 것은 대개는 보면  밤중으로도 표시를 해 놨고 또 모든 그 어려움의 역경의 때라 그렇게도 또  표현을 해 놨습니다.

 어쨌든지, 보면 계시록에는 모든 그 나무에나 바다에나 그런 데 바람을 불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맞는 것을 기다리라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 데 바람을 불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에게  어려움이 없고 그것들이 형통하고 세력이 강해짐으로써 믿는 신자들에게 집중  그 박해하는 그런 어려운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러기에 우리 신앙은 준비는 평소 고요한 때에 준비를 하고 준비한 그  효력은 마지막 절정인 그 가장 죄악의 세력이 강하고 신앙생활 하기에 어려운 때  그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뭐 시험하는 것이나 불로 연단한다는 것이나 그런  것도 다 그런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신앙 준비는 평소에 하고 그 신앙 준비한 여하에 결과의  실상은 환난 때에 나타난다.

 그러면, 왜정 말년에 조선 교회가 한 오십여 년 복음 운동을 한 결과에  신사참배로 그때 밤중이 돼서 다 처음에는 -모두 등불 들고서 주님의 이 진리를  증거해서 ‘신사참배는 그거 죄다. 안 된다.’ 다 그랬었습니다. 그것이 다  아입니다.

 이랬는데, 나중에 극심, 한 밤중이 되어지니까 뭐 그 신사참배를 안하는 사람은  다 생명 내놔야 되고 또 자기의 모든 것 다 내놔야 견뎠고 또 하나님을 참 믿는  자들이라야 견뎠었습니다.

 해방 후가 어제 물으니까 사십 삼 년이라 했습니까? 사십 삼 년이면 그때와  같이 꼭 그런 거는 아니겠지마는 오십 년에 그때는 한 오십년 됐을 때에 큰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제 공부 가르쳐 놓고 이제는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느냐  이거 참 등용할 만하나 등용을 못 할 만하나 하는 것을 모든 각 존재의  기관들에게서 이 시험으로 실력을 다루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우리 이 남한 교회도 해방 후가 벌써 사십삼 년이니까  한 칠 년이 더 있으면 오십 년이 되는데 혹 오십 년 되는 때에 있을는지 사십 오  년 되는 때 있을는지 어쩌든지 그동안 해방후에는 우리 나라에 이 교회에  대해서는 박해가 없는 전성기라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치 신앙에 자유가 있었고  교회를 모두 사회에서 대우하는 그런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언제든지  이렇게 나갈 리는 없는 것이 모든 역사요 모든 과거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시험이 오든지 한국 교회를 반드시 저물질하고  키로 까불듯이 까부는 그 알곡 쭉덩이를 나누는 그런 시험이 오지 않느냐 하는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부교회는 벌써 앞으로 환난이 올 때에 우리 힘으로는 이길수  없으니까 주님에게 도와 달라는 것,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혹 고문을 당하고 고형을 당하고 또 독약을 마시고 독침을 찌르고 이렇게  할 때는 그때는 우리가 인간의 오득 그 심신의 육체적 요소는 변질됩니다.

변해집니다.

 독약을 먹으면 변해지고 독침을 맞으면 변해지고 또 고문과 고형을 당하면  변해지고 또 장기간 동안 그런 고문과 고형이 계속될 때에는 사람이 타 변질이  되어집니다. 그럴 때는 자기의 평소의 결심한 것이나 각오한 것이나 평가한 것이  마구 흔들려서 요동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는 노트에 기록한 것도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실때에 그때  내가 필기한 것 보니까 이렇고 이렇더라. 과연 옳다. 이대로 믿어야 되겠고’  그대로 믿습니다. 믿어도 아주 급박한 극단의 그 환난을 닥칠 때에는 마귀  시험이 들어오는 것이 ‘네가 그 성경이 말한 게 아니라 목사가 말한 것 아니냐?  목사의 말이 아니냐? 네가 성경에 명문되어 있느냐?’ 이랄 때에 성경에  명문되어 있다는 것을 자기가 확실히 보고‘성경에 이렇게 했다’ 할 때에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라는  데 대해서 확신이 생겨지지마는 그 설교하는 소리를 듣고서 노트 보고서 그렇게  작정한 것은 그때에 흔들려집니다.

 그런고로, 노트를 보고 믿지 말고 노트는 성경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에 그  해석을 보고 성경을 보고 이래 가지고서 ‘과연 이 성경 안에는 이런 뜻아 있다.

그러면 이 성구는 내가 이렇게 믿어야겠다.’ 이래서, 자기 신앙의 근거를  성경에다 두고서 이렇게 믿는 것은 아주 초비상적인 그런 어려운 때를 당할  때에는 크게 능력이 됩니다.

 만일 그 성경 보고서 그렇게 신앙의 근거를 삼지 안하고 유력한 분의 설교한 그  노트를 가지고 근거를 삼았을 때에는 달라집니다. 거기에서 많은 유혹이  들어오고 또 신앙이 흔들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하는 데에는 자꾸 그 한  군데를 보면 성경에 여러 군데 말씀을 해 놔도 꼭 같은 것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또 이 면으로 말해 놓고 저 면으로 말해놓고 그렇게 뭐 이중 삼중 중복  뭐 그 세 번 네 번 열 번 거듭거듭 성경에 말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종류대로 한 군데라도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단단히 믿으면 다른 데 여러 군데  안 믿어도 좋습니다.

 성경에는 한 번만 말한 것이나 백 번 말한 것이나 가치가 꼭 같습니다.

사람들은 한 번 말한 것은 한 번 말한 것이고 이제 다른 데는 열 번이나 뭐 몇십  번 말했기 때문에 이것은 더 굳세고 강하고 이게 다 권위가 있고 더 신실하다고  이렇게 사람들은 인정하고 한 번만 말한 것은 이거한 번만 말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견고치 않고 이렇게 확실치 않다 이렇게 사람들은 그 기록에 횟수를  가지고서 따집니다. 그것이 아주 잘못입니다.

 한 번 성경에 말씀한 것이나 열 번 말씀한 것이나 권위성도 꼭 같고 또  진실성도 같고 하나님이 그대로 지켜서 이행하는 이행성도 꼭 같습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도 꼭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는 성경 같은 이치 같으면 그 같은 본문을  가지고 자꾸 가르칠라고 애를 씁니다. 왜? 이 본문 가르쳤다가서 본문 가르치면  그 사람이 좀 혼돈되기 때문에 어느 그 같은 뜻이면 될 수 있는 대로 세 군데 네  군데 여러 군데 보는 것보다도 한 군데를 보고서 그 사람에게 강하게 깊게  확실하게 똑똑하게 기억도 되고 인식도 되고 깨달음도 되고 확실히 믿기도 하고  이렇게 해 갈라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한 군데만 말해서 안 되니까 여러 군데를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에 거기에 해서 빠지기 쉽습니다.

 이래서 그것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봐라 성경 여기에도 이렇게 말했고  저게도 말했고 이렇게 많이 주대는 그런 것은 아직까지 그 어린 신앙, 성경  지식을 잘 알지 못한 사람에게 여러 군데 말해야, ‘여기에도 말하고 저게도  말했으니까 참 그런가보다 이렇게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자꾸 그렇게 여러  군데를 인용을 해서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 이 같은 사실이라면 한 번 기록한 것이나 수신번 기록한  것이나 수백 번 기록한 것이나 꼭 권위나 가치나 우리에게 효력을 주는 것이나  책임을 하나님이 지시는 것이나 역사하시는 것이 같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듣는 것은 이 설교로써 그 성경 본문에 이 내용이 있나  없나? 성경 본문에 이 내용이 정말로 있나 없나? 이 참 이 성경이 이렇게 말  하나 안 하나 그것을 해결짓는 것이 좋습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이 설교와  성경 본문과 이렇게 분리해 놓은 그것은 평소에는 괜찮지마는 나중에 아주  역경이나 그 어려운 절정기에 됐을 때에는 우리의 신앙이 요동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평소에,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를 들면은 성경주석을 보고  ‘아무 목사의, 아무 학자의 주석에 이렇더라.’ 주석 보고 자기가 이렇다고서  믿고 작정한 것과 성경 본문을 보고 믿고 작정한 것이 아주 생명과 사망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내나 설교 듣는 이게 내나 성경 주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듣는 가운데서 자꾸 성경 본문을 가지고‘이 성경  본문에 과연 그런 내용이 들어 있나 안 있나?’ 하는 것을 자기가 자꾸 연습하고  깨달아 가지고 그만 성경 본문만 말할 때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이  동시에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평소에 확신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것이 그렇게 성경을 좔좔좔좔 그렇게 그만  아주 그렇게 아주 속독을 그렇게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속독되도록  하는 것이 좋기는 좋지마는 속독을 해서 한 번 쭉 읽고 난 다음에 ‘그러면 이  본장에 무슨 권면이 있으며 무슨 약속이 있으며 우리가 주의할 것이 뭐  있느냐?’ 하면은 ‘모르겠는데’ 그러면 또 한 번 읽어 봐라. 한 번 쫙 읽고 난  다음에 또 물으면 또 모릅니다. 열 번 읽어도 ‘이제는’ 쫙 읽는데 또  모릅니다. 그게 병 중에는 제일 큰 병입니다.

 성경을 자기가 외우는 성경이나 보고 읽는 성경이나 같아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읽으면서 그 성경에 관련된 것을 그것을 그 범위 넓은 것을 다는 못 하지마는  거기에 관한 그 내용에 우리와의 관련된 것을 다 생각을 해 가면서 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읽으면서 그 내용을 모르는 것은 그것은 다시 찾아가지고 읽고  아는 것은 그만 읽으면 다 알도록 그렇게 숙달을 시킵니다.

 그래서, 제가 진주 성경학교에 다닐 때에 캉 선교사 중에 권이만 목사님이라고  있는 목사님이 호주에서 온 선교사인데 그분은 내가 처음에 가니까 성경을  읽는데 이분이 성경을 잘 못 읽고 아주 떠듬떠듬하면서 읽어서 나는 그 사람이  우리 나라의 말에 너무 아직까지 익숙지 안해서 그런가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분이 박사가, 논문 박사가 일곱이 될 건데 하나도 논문을 내지 안해서 박사를  받지 안한, 학위를 받지 않는 그 박사가 일곱을 가졌다고 그렇게, 뭐 아는  사람들이, 그같은 선교사들이 그렇게 증거하는 유명한 사람입디다.

 또 한국 말도 그분이 우리 한국의 이 국어에 대해서도, 국어학에 대해서 박사  학위를 넉넉히 가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그렇게 읽습니다.

 읽으면 나는 그 사람이 성경 읽을 때에 자기도 모르게 벌벌 떨면서 성경 읽는  것을 봤습니다. OOO. 거기 앉아서 암만해야 안 돼. 좀 일어나든지 좀 해서  그래야지 모르면 죽는데 어짤 거라? 벌벌 떨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래 내가  그분을 직접 대화해서 말은 내가 물어보지는 안 하기는 안 했는데 내 속으로  느끼기를 그 사람이 읽을 때에 거기에 대한 관련된 모든 뜻을 다 연상해 가면서  그렇게 읽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분은 강의할 때에 그 학생들에게 대해서, 나는 요번에 존다고 야단을 쳤는데  그라는 일이 없습니다. 강의를 이래 하는데 어떻게 만일 조금 거기에다 딱 대고  있지 안하고 다른 걸 쳐다보든지 뭐, 조는 일은 안 하겠지마는 다른 거를  쳐다보든지 하면은 딴거 퍼뜩 먼눈 뜨다 보면 그분하고 나하고 눈이 마주쳐  있습니다. 딱 그렇다 말이오. 딱내가 그분의 눈을 보면 얼른 들려서 또  없어집니다. 모든 학생들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 수십 명 학생들이 자기가  딴것을 생각하든지 보든지 할 때에 그분의 눈과 시선이 마주치지 안한 때가  없다. 마주치면 벌써 내가 보면 벌써 그분은 그 시선을 옮긴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강의하는 데는 조는 사람이 없습니다. 얼마나 신중히 하는지 제가 거창읍에,  제가 그 시장에, 거기에는 어떻게 장날이면 사람이 가득 차여 있어서 잘 뚫고  나가지를 못합니다. 못하는데 퍼뜩 보니까 그 목사님이라서 하도 반가와서 내가  뒤에서 권 목사님이 이래 부르고 뭐 그래 속히 가지를 못하고 뭐 사람이 밟혀서  이래서 가는데 가니까 그분이 돌아보지 않습니다. 돌아보지 안하고 걸음을  멈추어 가지고서 아마 그만한 거리면은 요만치 걸어가면 얼마면 따라올 거다  하고서 걸음을 멈춰서 살살 걷고 있습니다. 제가 가 가지고서 앞에 가서 아이구  목사님하고서 인사를 하니까 그래 반갑게 인사하고, 그분은 언행 심사에 호리도  실수하는 것을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분은 그러니까, 성경을 읽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항상 그렇게 자기의  인격을 다 기울여 가지고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성경 읽으면 자연히 뭐 외식으로  하는 거 어데 그런 게 아니고 벌벌 떱니다. 떨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런데, 성경 가르칠 때에 제가 배웠는데 그분이 아주 성경을 깊이 깨닫고 참  널리 깨닫고 그렇게 성경 가르치는 것을 제가 잠깐 좀 배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래서, 이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 여기에서 또 이것을 아무래도 한 번 더  말하고 가야 되겠다 생각이 납니다.

 아브라함은 곧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 말은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라 그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성공한 그 성공 우리도 할 수 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한 것같이 우리들도 아무것이의하나님이라, 백영희의  하나님이라, OOO이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하나님이 좋아해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요, 또 아브라함이 온갖 축복받은 그런 축복을 우리도  꼭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축복받은 것이 이제 다른 데도 있기는 있지마는  12장 1절로부터 3절까지에 다 기록돼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본문을 여러분들이 자꾸 읽고 외워서 여기에다가 우리 믿음의  뿌리를 박아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 천지는 변해도 변치 않다,  이렇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변할 리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한 대로 이 순서를  밟지 않고는 안 된다, 또 이 순서를 밟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후하박으로  누구에게는 해 주고 누구에게는 안 해 주지 않는다.’  요것을 뽈끈 잡고 놓지 안할 만치 자꾸 읽고 읽어서 평소에 이게 우리 뼈골에  박혀서 나중에 환난 중에서 뭐 장기간의 고문과 고형 가운데서도 이 말씀이  변하지 안하고 또 독약을 우리에게 강제로? 마시울 때도 변하지 안하고 독침을  강제로 찔렀을 때에도 변하지 안할 만치 이 말씀을 우리가 확고히 가져서 확신을  가지는 이 일을 자꾸 평소에 만들어야 합니다.

 서부교회서는 미래의 환난을 위해, 서 하루 삼십 분 특별히 미래를 위해서  기도하자는 기도를 약속하고서 처음에 시작했다가 또 얼마 동안하다가  물러졌다가 이래 가지고서 이번에는 시작해 가지고서 오 년째 계속해서 매일  기도하고 또 새벽마다 여기에 대해서 광고 하는 것은 벌써 그거 광고 하는 것이  한 이 년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삼십 분 기도를 계속하고 ‘삼십 분 기도를 잃지 말고 계속하라.

앞으로 이 환난은 우리 힘으로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것을 이기게  해 달라는 그런 간구의 기도의 그릇이 차야 될 터이니까 계속 쉬지 말고  기도하자.’ 하는 것을 벌써 계속 오 년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박아 가지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니라고 자기가 성구를 들어서 믿으면서 기도하는 것과 그냥  믿고 기도하는 거와 그거는 아주 천지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살았고 하나는  죽은 거같이, 죽은 거와 산 거와같이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꼭 계약을 선포해 놓고서 이 계약을 가지고서 따지는  것을 원합니다. 계약을 가지고 따지는 것을.

 그래서, 저도 기도할 때에, 나는 그 기도할 때마다 대개 하나님 앞에 따집니다.

‘주님이여,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시마고 약속하지  안했습니까? 나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 약속을 근거해 가지고, 또 약속을 하나님한테, 주님이 뭐  모르시겠읍니까마는 주님에게 ‘이렇게 약속하지 안했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그렇게 할 때에 내게도 강한 확신이 들어오고, 또 마음에 ‘하나님이 약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약속에 변치 않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이 약속을 이행하신다’  하는 것이 내게도 믿어지고 또 하나님도 그걸 원하십니다.

 이래서, 구약의 모든 기도의 사람들을 보면 기도하는 것이 다 그 성경을 근거해  가지고 ‘주님이여, 이렇고 이렇게 하지 안했습니까?’ 성경을 가지고서 따지는  것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 사람들은 따지면 싫어하지, 안해요? 싫어해요.

 저는 어릴 때에 젊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안하고 어릴 때에 언제든지 나이 많은  노인들하고 이렇게 옆에 가까이 하기를 좋아했는데 늘 노인들 말하는 것 보면  가만히 듣고 있으면은 꾸중을 들어 쌓아. 하, 요놈은 어른들이 이야기하면 그  못되게 눈을 빠꼼하게 이래 가지고 쳐다보고 있다고서 그렇게 야단을 많이  맞았어요. 또 뭐 듣고 난 다음에 이렇습니까? 저렇습니까? 물으면 ‘야, 요놈은  따지기를 좋아해서.’ 이라면서 꾸중을 했는데 그때부터 그 따지는 그런 성질이  좀 있기는 하나님이 주셨던 모양이오.

 이래사, 성경을 보면 성경을 가지고서 하나 둘을 성경대로 따지면서 논리적으로  이치에 딱 맞게 요렇게 해서 하나님이 꼼짝도 못 하구로 요래 성경 이치로  가지고 딱 엮어 대면서 요렇고 요렇고 요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뽈끈 하나님이  붙들려 매여서 꼼짝 못하게 이거는 안 들을래야 안 들을 수 없는 요런 기도를  하는 것이 당신이 원하시고 또 요렇게 범사에 행동하는 것을 당신이 원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창세기 12장에도 주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주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따라가면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할 것이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고 모든 만민에 다 복의 근원이 돼서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해 주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해주고 천하 만민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으리라  하는 요 말씀을 자꾸 새김질합니다.

 ‘주님이여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나는 믿습니다.’ 이럴 때에, 이럴 때에  하나님은 사람 같으면 가슴이 뜨끔뜨끔할 겁니다. 사람 같으면 가슴이  뜨끔뜨끔해요. 왜 그렇겠소? O 목사님, 왜 그렇겠소? 사람 같으면 왜 가슴이  뜨끔뜨끔 하겠어? 따져 대니까.

 말은 해 놨지, ‘이렇게 말해 놓지 안했습니까? 이렇게 말해 놨으니 이제  이렇게 해 주십시오.’ 따져 대니까 하나님이 참 사람 같으면 가슴이 뜨끔해.

이렇게 말은 해 놨지 말해 놓은 걸 가지고 자꾸 따져 대니까 안 했다 소리도 못  하지 해 놓은 걸 해야 되겠지 이런데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이 계약을 가지고서, 이 계약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렇게 약속하지 안했습니까? 내가 이렇게 약속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셨는데 내가 이 면을 어겼으니까 이 약속을 안해서 내가 사과합니다.

주님이 용서해 주십시오.’ 해도 성경으로 따지는 그 용서는 안 해 줄래야  당신이 안 해 줄 수가 없다. 담대히 ‘용서해주십시오’ 그걸 당신이  원하십니다.

 ‘용서해 주겠나 안 해 주겠나? 내가 기도하면 들어 주시겠나 안  들어주시겠나?’ 그런 흐리멍덩한 자는 주님이 싫어하십니다.

 출애굽기 32장에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만들었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에게 모세가 기도하기를 따졌습니다. ‘하나님이여 들어  보십시오. 당신이 이렇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것은 복 준다고  인도하고 이래 선포를 해 놔서 천하 만민들이 모두 다 듣고 알고 있는데 와  가지고서 죄지었다고서 이 광야에서 전멸시켜 버리면 다른 사람이 있다가  광야에까지 꾀워서 데리고 와 가지고서 멸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걸 어떻게  이거 변호를 하면 어떻게 이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래 따지니까, 그거 나는 처음에도 그랬어요. 따져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만 입이 쑥 들어간 것 같애. 나는 처음에 그렇게 했어. 이거 따지니, 따지니  말은 그래 해 놨지 이거 참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글쌔? 그라면 내가 마음을  돌이키지.’ 이래 했다 말이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이걸 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논리 없는 행동을 원치  안하십니다. 꼭 기독교는 논리적인 종교입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서 논리해서  용서받는 것이나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는 것이나 우리 보호받는 것이나 우리가  뭐 기도하는 것이나 그런 것 다 성경을 근거해 가지고 딱딱 잡고 ‘요렇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요렇게 말씀하지 안했습니까? 들어 주십시오. 요거는 요렇게  선포했으니까 요렇지 않습니까?’ 자꾸 이렇게 하는 것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러면 이 두 가지 순종 아닙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지고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가라, 지도를  따라가라 그렇게 하지 안했습니까?   그러면, 여기에서 잘못 알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데 대해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오해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 밀에 해석이 데리고 간 사람은  데리고 가고 안 데리고 간 사람은 안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요 성구를 내가 믿었기 때문에 제가 거창 집회 다니면서 삼봉산 집회  다니기를 한 삼 년인가 사 년인가 다녔는데 그때에 저거 장형은 안 믿고 큰 집은  안 믿었습니다. 가서 몇 번 권면하고, ‘자네나 잘 믿게 나는 안 믿을라네’ 그  말을 딱 듣고 난 다음에는 다시는 큰집에 안 갔습니다. 안 갔습니다. ‘이거  내가 이거 떠나는 것이, 그들이 안 믿을라하니까 아브라함 같으면 벌써 떠났는데  나도 이거 떠나는 게 옳지 이 큰집에 가는 것은 유익이 아니다.’ 안 갔습니다.

 안 가니까 그 형님이 동생을 보고 싶고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서 우리가 버스로  가면은 그 길가에 나와 가지고서 섰습니다. 기다리고 섰다가 내가 오면서,  오면은 오느냐고 이렇게 인사를 하고 반갑게 해도 차 안에서 내려오지를  안했습니다. 꼭 앉아서 거기에서 ‘예, 안녕하십니까?’ 하고서 그렇게 해마다  지냈습니다. 지내면서, ‘집에 좀 다녀가지’해도 ‘저는 그만 바로  가겠습니다.’ 이랬습니다.

 이라다가 그래 제 장형이 그때에 그만 폐결핵에 걸려 가지고서 그때 급해  놓으니까 저거 집에 한 번 왔습디다. 와서 얼마동안 같이 있으면서 겸상을 하고  거기에서 같이 예수 믿기로 그래 작정을 하고 약속하고, 그때는 경제가 어려울  때라요. 그래 그 양을 한 마리 돈을 줘서 사서 보내면서 그 젖을, 짜서 그래  자시고 그래 좀 치료하고 그래서 잘 믿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인제 그 가족이  전부이 다 믿습니다.

 그분은 집사는 되고서 떠나도, 좀 있으면 장로될 건데 못 하고 떠났습니다. 그  아들이 장로할라 하는데, 옆에서 교회들도 모두 장로 시킬라 하는데 아직은 장로  안 된다 제가 못 시키구로 해서 장로를 안하고 지금 집사로 그래 충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이 말씀을 근거해 가지고 ‘말씀에 이러니, 말씀에는 이러니 내가  요렇게 하는 것이 말씀대로 됐다.’ 요것을 꼭꼭 따져 가지고서 그래 살아야  됩니다. 크고 작은 것을 그래 따져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그럴 때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의 권위를 대우하는 것이  당신을 대우하는 것이요 이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당신을 무시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두 가지를 하면, 두 가지 하는 데 대해서 오해하지 말고 이  땅은 물질을 말한 것이고 아비 친척 집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니까 물질이나 사람에게 붙어서 주님 따라가는 데에 지장이 되고 주님  따라가지 못하도록 주님을 딿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상관이 없지마는 따를  수 없을 때에는 부득이 그를 뿌리 닿고서 주님을 딿는 것이 그것이 진리라  그말이오,   여기에 뭐 넉넉한 지식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뭐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아비  집을 떠날 때에 울면서 떠났겠습니까 춤추면서 떠났겠습니까? 울면서 떠났어.

 우리가 땅 위에 세상에 모든 것을 사랑하고 좋지마는 평가적으로 주님보다 좋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보다 주님이 더 좋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 내가 은혜의 빚을  졌고 이런 책임이 있고 땅 위에 온갖 책임이 있고 온갖 그 은혜의 빚진 것이  있지마는 주님에게 진 것만치 못졌기 때문에 모든 땅 위에 있는 그 은사를  주님과 마주 이렇게 대립이 될 때에는 할 수 없이 주님이냐 이 은사냐 할 때에는  이 은사보다 주님의 은사가 크기 때문에 주님에게 속할 수밖에 없고 땅 위에  어떤 책임이 중한 책임이라도 주님과 나와의 책임보다 더 큰 중한 책임이 없기  때문에 땅 위에 자는 책임을 뒤로 두고서 주님과의 관계 책임을 첫째로 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내가 주님을 딿겠습니다마는 아버지가 죽었으니 장사 지내게  하여 주옵소서’하는 그것은 세상에 은혜의 빚이라고 하면은 뭐 과거에는  군사부라 이렇게 말했지마는 부모가 은혜가 제일 큰 은혜라고 인간으로서는  성경에 말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인 관계의 계명에는 오계명을 부모의 그  사은에 대한 것을 가리켜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부모가 제일 은혜 중에는 제일 큰 은혜인데 부모가 살아  있으면 오늘 못 하면 내일 하고 할 수 있지마는 죽어서 장사 지내니까  마지막이니 이거 안 하면 안 되는 마지막 사은에 대해서 마지막이라 말이오.

 마지막 사은이지마는, 마지막 사은이지마는서토 그 사람이 ‘주님을  딿겠습니다마는 이제 내가 장사지내고 그 다음에 딿겠습니다. 먼저 가서 장사  지내게 해 주욥소서.’ 주님이 대노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죽은 자로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서 호통을 쳤습니다.

 왜? 방부에 은사 중에는 제일 부모 은사가 제일 큰 은사요 그 은사에 대해서  사은한다는 것이 마지막 죽어서 장사지내면 그것으로써 끝나버리니까 사은 중에  제일 최종이요 절정이요 모든 은사 중에 제일 최종인 그 은사인데 그 은사를  주님 딿는 거와 비교를 했을 때에 주님이 야단을 쳤습니다.

 그것은 네가 너거 부모에게 그 부모의 은사에 네가 빚을 져서 거기에 대한 사은  하는 그것보다 내가 너를 구속한 그 사은은 천 배 만 배 억만배도 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먼저 두노? 먼저가 다 뭐꼬?   네가 나를 따르면서, 주님을 딿는데, 주님을 지금 따르면서 ‘지금 아버지가  세상을 떴으니 저 장사하러 가야 됩니까 안 가야 됩니까?’ 그렇게 물으면  주님을 제일 첫째로 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라면 주님께서 ‘오, 이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네가 가서 잘 안장하고 오라.’  이렇게 말씀했을 거라. 그런데 ‘먼저 가서 했기 때문에 먼저 가서 하니까 보다  그걸 먼저, 어림도 없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가족을 작별이라 하는 말은 세상에서 책임이 많습니다. 국가 책임도 있고 민족  책임도 있고 오만 책임이 있지마는 인생에게 책임으로서는 자기가 가정을  이뤘으면 가정 책임이 제일 중요하다 하는 것을 그 성경에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 책임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가족 책임이지마는 가족 책임을 먼저 가서  뭐 작별이나 하고, 그러면 가족 책임에, 작별하는 거는 그저 찍해야 마지막  아닙니까? 작별하는 그 마지막 인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여기에서 보아서 ‘보다’ 나보다 부모와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자기 목숨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보다가 말을  많이 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내게 은혜 베푼 것도 무엇보다 크고, 또 당신이 나에게  사랑하셔서 모든 수고한 것도 뭐보다 크고 나를 위해서 영원히 노력하시고 수고  하신 것도 뭣보다 크고, 또 내게 준 소망이나 희망이나 그런 은혜도 다른 걸로  비교 못 할 만치 크기 때문에 주님은 뭣보다도, 땅위에 무엇보다도 당신을 높일  때에는 당신이 다 그걸 일반적으로 정상적으로 보지마는 당신보다 무엇이든지  높여서, 주님보다 무엇이든지 앞세우고 크게 높여서 먼저 생각하는 것도  시기합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보면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 말을 너희가 헛되이  생각하느냐?   이러니까,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른 것을 생각해야 되고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위하는 것은 뭐 좋아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위하는 것은  우리가 가정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도 주님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서  가정에게 생명 버리는 것, 주님 위해서 가정에게 생명 바치는 것도 마구 주님은  좋아서 입이 벙긋벙긋합니다. 이분은 제일 머리라는 그 머리를 두고 시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이래서, 십계명 중에 제일 첫째가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하는 것은  하나님의 그 무서운 시기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또 이계명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인 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질투에서’나온 계명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내 인도를 받아라. 요거 단단히  기억해요. 하나님께서 버리라는 것은 버릴 때에 그것이 순종이요, 또 가라 할  때는 가는 것이 순종이요, 떠나라 ‘할 때는 떠나는 것이 순종입니다.

 주님 명령 따라갈 때에 무엇이든지 떠날 수 없는 것, 버릴 수 없는 것, 놓을 수  없는 것 그런 것이 있으면 어찌 된다 했습니까? 성경에 뭐라고 말했어요?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라. 그 말씀이 어데 있지요? 10절, 10절이지? 네,  13장 10절인데 이제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라 그말은 뭣이든지 주님  따라갈 때에 주님 따라가면서 오만 것 다 할 수 있어요. 이런데 주님보다 자기를  더 강하게 붙들고 있어서 주님에게 못 따라갔으면 못 따라갔지 이거 버릴 수는  없다 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내게 합당치 않다.

 왜? 그에게 종이기 때문에 그에게 종이니 평소에는 내 종같이 하고 있지마는  마지막에 그것의 종이 되느냐 내 종이 되느냐 둘로 견제가 될 때에는 날 버리고  거기에 속할 것이기 때문에 아예 거기에 속해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주님의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그러면, 주님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니까 생명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지, 전지와  관계 못하지, 전능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지, 영원 완전과 관계를 가지지  못하니까 막 썩는 것 아닙니까?   주님이 당신보다 앞세우는 것, 당신보다 보다 이렇게 앞세우고 높이고 더  강하게 더 친밀하게 더 나를 주관하도록 내가 그에게 더 속하여 있는 그런 것을  주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그 시기해가지고 시기해서 하지  말라고서 그 시기심이라고 성경에 말해 놨어요. 세상과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말씀을 네가 헛되이  네가 생각하느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런데, 주님이 그 시기로 그렇습니까 우리를 사랑으로 그렇습니까? 어떻게  사랑으로? 어떻게 사랑으로? 그런 거 뭐 다 용서해서 주님보다 좋은 것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모든 것 다 그런 것 있어도’ 그래 다 좋다 그만 이라면 더  사랑으로 좋지 않겠소?   왜 그랍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왜 그런 것을 하나도’두지 못하도록 합니까?  시기해서 그렇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런 이유가 뭐이요? 저 중간에 있는 분들  한 번 대답해 보십시오. 뭣 때문에 그렇습니까? 주님이 뭣 때문에 그래  하십니까? 한 번 대답해 봐요. 이앞에 조사님이가? 한 번 대답해 봐. 뚱뚱한  조사님. 조사님 아니가? 뭐요? 사랑 때문에? 그래 사랑 때문에 그런데 사랑  때문에 그렇다는말은 맞기는 맞았는데 뭐 사랑 때문에 그러면 뭐 그렇다고  사랑하시면 더 좋지 뭐. 연단이라? 아니야, 연단 아니야. 연단은 아니라.

 주님과 그 사람과 그 사이에 그게 들어서 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게  들어서 주님과 그 사이를 끊기 때문에.

 이래서, 사로잡는 자는, 무엇이든지 붙들고 하나든지 갈라 하면은, 붙들고 갈라  하면 그것에게 붙들려서 하나님께 따라가지 못한다 그말입니다.

 주님과 떨어지면 멸망받기 때문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만 뽈끈 잡지  다른 것 잡고 따라오지 말아라. 그라다가 보면, 딴거 잡고 따라오다 보면 그게  들어서 그만 주님을 못 따라가구로 만들어 버리면 못 따라간다 말이요, 거기에  붙들려서. 강한 데 붙들리는 것 아닙니까, 강한 데 붙들리는 것?  그러기 때문에, 주님과 나와의 연결된 결합의 밧줄보다, 사랑의 밧줄보다  땅위에 무엇이든지 그와 나와의 연결된 밧줄이 강한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그걸  정리해야 되지 그거 정리하기 전에는 주님과의 연결은 못 되니까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축복은 자기에게 올 수 없도록 가로막힙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어데 붙들려 매였느냐 하면은 본토에  붙들려 매였고 친척 아비 집에 붙들려 매여 있고 사람에게 붙들려 있고 물질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물질과 사람에게 붙들걸데에서 네가 거기에서 해방을  받아라, 거기에서 떠나라.

 떠나고 나니까, 떠났으면 우리가 결론적으로 한 번 계산을 대 봅시다.

아브라함이 하란에 그때 있을 때와 하나님 인도받아 떠나 가지고서 그 뒤에 물질  받은 것은 어찌 됐습니까? 비교하지 못할 만치 큰 부자됐습니다. 또 사람 부자는  어찌 됐어? 사람 부자도 크게 됐습니다.

 이러니까, 이걸 자꾸 보고서 깨달아 가지고 ‘주여! 옳소이다. 이제 주님이  버리라는 것 버려 가지고서 손해 가는 것 없고 주님께서 따르라는 데 따라  가지고서 손해 보는 것 없다.’ 요게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겠습니다.

 확신이 있어서 독침을 찌르고 독약을 먹이고 고문과 고형해도 ‘주님 말씀  지켜서 주님이 하라 하시는 대로 해 가지고 손해 가는 것 없다’ 매 한 번 맞고  주님 하라는 대로 하는 것과 열 번 때려도 요동 안 하고 하라는 것과, 한 번  맞으면서 주님 시키는 대로 세상에게, 시키는 대로못 하구로, 하나님 시키는  대로 못 하라고 매 한 번 때릴 때에 한 개 맞아도 주님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변치 않고 열 번 맞아도 변치 않고,  그러면, 많이 맞아도 변치 않는 것이 좋습니까 한 번도 안 맞고 변치않는 것이  좋습니까? 한 번도 안 맞고 변치 않는 게 좋아요? 그래? 그래? 그렇습니까?   그렇지 안해요? 부부간이라도 뭐 산골짝에 둘이 살면서 서로 애정 깊게 사는  그것보다 이 도시에 나오니까 그 미혹이 많아서 별 남자들이 자기 아내에게  달라드는데 뭐 미남이 달라들어도 욕을 받지 꼼짝을 안 하고 돈 많은 자가  달라들어도 꼼짝 안 하고 어떨 때는 붙들려서 막 죽인다고 협박을 해도 그  정조를 요동치 안하고,   그러면, 그런 일 없는 것과 그런 일이 많이 있어도 요동치 않는 그 아내와의  대우가 같겠습니까? 가치가 같겠습니까? 없는 게 좋아요 많이 있은 게 더  좋아요? 그러면 처음에 대답한 거는 다 틀렸네요.

 이러니까, 그런 걸 자꾸 평소에 연습을 해요, 평소에 연습을. 백지 ‘자,  오늘은 지금 나를 꺼꾸로 단다. 꺼꾸로 달아 놓고 소금물을 코에 다들인다.

오늘은 팔창질을 뒤로 돌려 가지고 한다.’ 이럴 때에 뭐 감당을 못 하겠어요.

 이러니까, 나는 그게 겁나. 그 사람들이 그 각목을 딱 모배기로 이래 놓고서  이래 딱 꿇어 오래 앉히면 뼈가 동가리가 난답니다. 자꾸 들어가고 들어가고  이라니까 뼈가 딱 끊어진대요, 동가리리가 나고. 그 앞정갱이가 얼마나 아플  것입니까? 그래 놓고도 고문할 터이니까 아이구 그래 놨을 때 이거 내가 아파서  견디지 못할 터이니까 나중에 못 견디면 이 벌소리 하기 쉬울 터이니까 그때  공산주의자들 모양으로 혀를 끊는 것도 좋지만 그거 혀로 증거를 해야 되니  그것도 안 되겠고 이러니까 기도할 수밖에 없어.

 주님이여, 각목을 대고 주리를 틀고, 그 뭐 한 겨울에 옷을 벗겨 놓고서 이제  나가 있다가 나중에는 물을 마구 찌끌뜨려 가지고서 그래 가지고 또 인제 껑껑  얼궈 가지고서 똑 그 언 명태 모양으로 언 것을 들어다가서 또 온돌에 갖다 놓고  버쩍 뜨시게 해 가지고서 그 얼음이 녹이니까, 언게 녹으니까 얼마나 하겠소? 또  그런 것도 이거 참 뭐 기가 차지,   또 한 이레나 여드레나 좁겨 놨다가서 밥을 주는데 아주 밥에다가 소금을 막  되게 섞어 가지고서 소금밥을 해서 얼마든지 먹으라 하고 주니까 이걸 먹어  놓으니 물이 얼마나 쓰이겠소? 그 물 먹고 싶은 거 굉장해요. 물을 앞에다가  놓고서 손에 대일똥 말똥 딱 그래 놓고서 ‘네가 항복하면 울 준다, 항복하면 물  준다.’ 이라니까, 그런 걸 말을 들으니 그런 고문과 고형이 있을 때에는  나로서는 이길 수가 없어요.

 이러니까 ‘주님! 어짜든지 그럴 때 나를 도우셔서 주님이 도우셔서 이기게 해  주셔야 되지 나는 이길 힘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하루 삼십 분  부탁을 하되 간절히 안 하고는 할 수가 없어. 간절히 부탁을 안 할 수가 없어.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삼십 분 기도하는 것도 ‘공연한 그거 조짜배기로 다  뭐 기도를 틱 왜 기도를 자꾸 그래 해 쌓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러분들 지금부터라도 자기의 미래와 자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위해서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잃지 말고 계속을 하도록 하십시오.

 이래서, 여기에 이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가라.

그렇게 가라 하면 가면 뭐한다 했습니까? 가면 어떻게 해준다고 했어? 요걸  믿어요.

 큰 민족을 이루고,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은 자기의 혈육의 자손이 많아진다  말이요 또 자기에게 돌아와서 자기 사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손이 잘되는 것 또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돌아와서 자기  사람이 많아지는 것 이런 거, 그 방법이 어떤 방법입니까? ‘큰 민족을 이루고’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서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큰 민족  이루는 것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되어지는 것, 또 복의 근원이 되어지는 것, 너를  축복하는 사람은 축복해 주고 저주하는 사람은 저주하게 되는 것, 또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서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면. 자, 이 복이 몇 개나 됩니까? 민족이 큰 민족 되지, 또 뭐이요? 이름이  창대하게 되지, 또? 복의 근원이 되지, 또?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한다 했지, 또 하나는? 땅에 있는 모든,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서 복을 받으리라. 그러면 몇 개입니까? 다섯 가지.

 이 다섯 가지인데 다섯 가지 복이 남에게 있습니까? 내 자체에게 있습니까?  이게 얼마나 편리합니까? 남에게 있으면 남이 내 말 들어 줄라 합니까? 나  복되게, 만일 나 복된 것이 어떤 사람에게 매였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하,  당신이 나에게 복되게 해 주는 것 당신에게 매였으니까 좀 복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사정을 할라고 하면은 그 사람이 얼마나 교만할란지?   나는 여기에 내가 OO교파에서 그새 제명돼서 나올 때에 신앙 동지가 없어서  어떤 사람 하나 동지가 있었는데 그 사람하고 같이 갈라 하니까 그 사람이 가서  동지로 같이 갈라 하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쪼를 빼고 저렇게 쪼를 빼서 내가 그  앞에서 ‘나는 독단으로 걸어갈란다. 하나라도 같이 걸어갈라 하니까 짐이 되고  아예 거기에 아부해야 되고 굴해야 되고 다 아니꼬와서 안 되겠다. 네야 오든지  말든지 나는 나 혼자 간다.’ 그라고 내가 그때 나서서 독보로 걸어 왔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내 복이 달렸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좀 복 되구로 해 달라  하고 사정을 하만 그 사람이 잘 들어 주겠습니까? 잘 들어주겠습니까?  아니꼬와서 못 할 것이요, 아니꼬와서. 얼마나 쪼를 쭉쭉빼고 막 기름을  짜겠습니까? 아니꼬울 거라.

 그래 가지고서 아무리 싹싹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이 싹싹하고 좋은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할까? 남의 말 거절 안 하고 잘 듣는 사람, 순하게 잘 듣는 사람  누구를 말할꼬? OOO목사님 한 번 말해 볼까? 우리 OOO목사님이 나에게 거부 잘  안해. OOO목사님 말할까? 그래도 OOO목사님을 택해 가지고 OOO목사님이 너에게  복을 주면 될 터이니까 그분이 복 주도록 그래 정해 주겠다 하면 나는 기가  차겠습니다.

 가 가지고 O목사님 나 좀 복되게 해 주십시오, 내 민족을 창대케 해 주십시오.

내 이름을 창대케 하시고 크게 해 주십시오, 또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사정을 하면은 아마 O목사님 얼마나 교만해? 그러면 아예 들어오면 인사도  안 하고 ‘저거 또 온다.’ 이래 가지고서 떡 오면 이럴 거라. 떡 이래  가지고서, 앉으라 소리도 안 하고 이래 ‘글쌔 줄 때 되면 주지 뭘 그래?’  나중에 가서 이렇게 교만될 거라. 안 그럴 사람 별로 없어. OOO목사님은 안  그럴까? OOO목사님은 그래 놨으면 탁 호통을 칠 거로구만. 뭐 이렇게 자꾸 와서  괴롭게 하거라.

 이런데, 주님은 이 큰 민족이 되는 것이나 이름이 창대케 하는 것이나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이 나 축복하면 축복해 주고 저주하면 저주받는  이런 권위라든지 땅에 있는 모든 족속들이 다 나로 인해서 복받는 이런 큰 복을  다른 사람과 관련 있습니까? 자기 단독에게 매였습니까?   자, 자기 단독에게 매인 데 대해서 여러분들 다행스럽게 생각합니까 이걸  불편하게 생각합니까?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좀 한 번 손한번 들어 봐요,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분들 손 한 번 들어 봐요. 다행스러워요. 다행스러워요.

이제 내게 매였으니까 나만 하나만 잘하면 돼. 나만 하나만 잘하면 돼. 나만  하나만.

 요걸 거머쥐고, 뭐라 하든지 욕을 하든지 뭐라 하든지 하나님이 그 민족을 큰  민족 만든다 하는데 천하 인간이 반대하면 다 어쩔 거라? 큰 민족 만들라면,  만들어 주시도록만 내가 할 것만 내가 하는 날이면 큰 민족 만들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방해하면 하나님이 방해 받는 것 아니라. 방해 받든지 말든지 큰 민족  만드는 거는 당신 할 일. 나할 일만 해 놓으면 큰 민족 만드는 것은 다 한다  말이오.

 떡 나 할 일 해 놓고 난 다음에 큰 민족, ‘하나님이여 어째 약속에 큰 민족  준다 해 놓고서 지금 이렇게 시들시들 이렇습니까? 언제입니까?’ 가끔 가다 한  번 독촉이나 한 번씩 할까 딴 거는 아무것도 할 것 없어.

 ‘내 이름이 창대케 한다 했는데 이름이 지금 자꾸 희미해지는데 언제 할  랍니까?’ 설설 독촉이나 하지 그라면 하나님 진땀이 바짝바짝 흐를거라. 이거  안 하실 수 없어요. 이렇게 믿어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는  변함없다. 틀림없다.’ 이런 걸 단단히 믿고 하나님 앞에 막 송사를 할 만치  확신을 가져요.

 자기가 복의 기관이 되지, 천하 모든 만민들이 다 자기를 인해서 복받게  하시겠다고 했지, 이러니까 내 밖에 나와의 관련된 것, 나와의 관련된 것, 내게  필요한 것, 내게 좋은 것, 그 모든 것을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어울러 가지고  되도록 해 놓지 안하고 내 단독이 하면 되도록 해 놨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편리하고 좋습니까?  그러기에, 이 창세기 12장을 읽어 보고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들은 막 좋아서  춤을 춥니다. 아이구 사람들 만나 가지고 할라 하는 것, 요새 국회의원도 보니까  그것도 하나 할라고 이제 그 모두 국회의원 하나 할라고서 어떤 사람들은 큰  자리를 펴, 자리를 앞에 회 놓고 큰절을 하고 다닌다고서 그렇게 말해요. 그것도  참 그 사람 위대한 사람이라.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자기  명예니 뭐 지위니 뭐 자존심이니 다 내버리고 모든 것 다 투자해 가지고서 자기  목적하나 달성할라 하는 사람 위대한 사람입니다.

 내가 그 사람의 이름을 뭐인지 모르겠어, 한신인가 그 뭐인가 모르겠어. 오래  돼 놔서 잊어 버렸어. 그래 이 사람이 지금 일국에 대원수로 이 대장으로서  정권을 재겠느냐 안 잡겠느냐 그렇게 시험해 볼라고서 그라면서 그 한백이가  아주 그때 모사인데 그분에게 지도를 받을라고 하니까 내가 이 사람 지도해  가지고 성공을 하겠는가 안 하겠는가 시험하기를 ‘나 너 지도할 수 없다.

지도를 받을라면’ 중국은 남녀가 아주 영 차이가 많습니다. 그 여자는 남자의  하나의 소지품과 같이 그렇게 여겼어요. 이랬는데, ‘여자가 월수 있는 여자가  이제 다리, 를 떡벌리고 이렇게 있는데 그 밑으로 네가 나오너라. 그라면 내가  너를 지도하겠다.’ 그거는 뭐 모욕 중에는 그런 모욕이 없고 이거는 참 역사에  없는 그런 모욕인데 그라니까 ‘예’ 하고 그거 설설설 기어 나가갔다가 기어  들어와 가지고 그래 왔거든. 그것 보고서 ‘됐다’ 자기를 꺾을 줄 알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를 꺾을 줄 알고 자기를 비울 줄 알고 아는 사람이라야  성공한다 그거요.

 이래사, 유리들도 이거 뭐 그것보다는 좀 다르지마는 주님 앞에 나아갈 때는  우리 소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개의치 안하고 자기를 완전히  비워 가지고서 달라드는 사람이야 성공합니다.

 아버지에게 주님이, 빌립보 2장 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과 동등된 본체의  하나님이지마는 아예 동등 될 걸로 여기지 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상  피조물의 형상까지 입었고 죽기까지 복종했습니다. 이라기 때문에 위대해서  성공했어.

 이라니까, 우리도 주님 앞에서 우리 소원을 이룰라 할 때에는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달라들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두 가지 순종,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그라면은 그렇게 주님이 버리라는 것 버리고 또 순종하라는 것  순종하고, 주님이 하지 말라는 것 하지 안하고 하라는걸 하고 이거라 그거요.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하는 것은 버리라 말 아닙니까? 버리라 말이오.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하고 가지는 것을 가지지 말라 말이오. 버리라는 건 가지지  말라는 것이라.

 이래서,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요 두  가지, 주님이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건 안 하고 요 두 가지 하면은 복이  몇 가지 있다고 했습니까? 다섯 가지. 이 두 가지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안 하면은 복이 몇 가지 있다고 했어요? 이 다섯 가지 외에 또 더 필요한 복이  있습니까? 없어.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자기 인해서 복을 받으리라 했으니까 이러니까 그만하면  천하 민족이 다 자기로 복을 받으면 그 사람은 인간의 구세주라 그말이라.

인간의 구세주. 예수님이 구세주인데 예수님의 대리자라. 구세주라. 요것을  잡아야 돼요, 잡아야.

 집안 잘 돼, 자기 가족이 잘 되구로 하는 데는 어떻게 해야 돼츠? 순종이요,  순종.

 우리가 OOO목사님 사모님 여기 있네. 이 사모님은 아마 기도 많이 하는  모양이라. 나는 그 가정, 우리 OOO목사님은 그분이 우리 교회 사찰노릇하다가  목사가 됐는데 사찰 노릇할 때에 옆에 집에서 마구예배당에, 우리 변소 때문에  저거 우물 나빠졌다고서 똥물을 퍼 가지켜서 예배당에 와서 그만 찌트려 버려요.

오면 아예 OOO목사님은 어데로 갔는지 없습니다. 그만 방에 들어가 가지고서  욕을 하거나 말거나 가만히 들어 앉았어. 그 사람은 단단히 지켜. 악을 악으로  대항하지 안하고 사람으로 더불어 다투지 안할라 하는 그 죄짓지 안할라 하는  것이라.

 그렇게 욕심쟁이지 알속을 차리지, 또 두 내외분이 어떻게 기도 많이 하는지  이래 놓으니까 그 딸들도 시시하다 했는데 이거 시시한 딸들이 사위도 본 것도  시시하다 이래 했는데 이게 딸도 위대하고 사위도 위대해서 이제 뭐 그 위대한  목사들이라, 다. 지금 아직까지 목사 덜됐고 이제 전도사로 있지마는 위대한  사람들이라. 뭐 가족을 따라가지를 못해요. 지즈까지 이래 보니까 그 가정 참  보니까 따라가지를 못해. 어떤 가정관 비교해도 못 따라가요.

 이러니까, 여러분들 이제 오! 내 민족이 크게 되는 데에는 법칙이 있다. 내  이름이 창대케 되는 데는 법칙이 있다.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데는 법칙이 있다.

욕하는 사람도 많고 비방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를 해치는 자는 하나님이 해치고  나를 유익되게 하는 사람은 유익되게하는 이 참 유일한 법칙이 있다. 나만 좋은  게 아니라 천하 모든 민족이 나로 인해서 복을 받는다 이 법칙이 있다.

 자기 인해서, 자기로 인해서 복 받는 사람이 많으면 좋아요 적으면 좋아요?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이 자기 인해서 복받는데 이렇게 되는 법칙이 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좋겠소 안 좋겠소? 자,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까 안 좋겠습니까?  이보다 더 종은 보배가 있겠소?   이거는 누구하고 누구하고 협동을 해야 됩니까? 누구하고 누구하고 협동해야  돼요? 아니야. 협동할 것 없어. 단독이 돼, 단독이 하나님은 계약 상대자로 있기  때문에 내가 그라면 당신은 응하지 안할 수가 없어요, 나 혼자 단독이 하면 돼,  나 혼자. 나 혼자 단독이 하면 되는 이런 일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갈급을 가지면서도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엉뚱한 일을 하고  있다 그말이오.

 이래서, 우리는 요것을 굳게 잡습시다. 굳게 잡고 놓지 말아요. 또 재삼 이렇게  말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에게 한 말로 말하면 순종입니다. 뭐 돈이 붙들어도 순종  중단하지 말고 인간이 순종 중단하지 말고 애정이 붙들어도 순종 중단하지 말고,  주님에게 거스리는 일을 하는 그 사람이나 물건이나 하는 그것은 자기의  뭐이요? 뭐입니까? 자기의 뭐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데에 살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자기가 그것을 이기면 그것이 자기에게  상받게 하는 것이 되지마는 그걸 져서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죄를 범하게  됐으면 그거는 뭐입니까? 내가, 그로 말미암아 내가 범죄한 것, 나로 하여금  범죄케 한 것은 그것은 여러분들 뭐입니까? 나로 말미암아 범죄케 한 것은 그거  뭐입니까? 그거 뭐이요? ,   나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은 원수입니다. 원수. 원수. 원수를 그것을 이겨서  내가 그로 말미암아 범죄하지 안했으면 그는 나의 복받는 데에 이용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범죄케 하는 그런 것들을 이용하는 법칙이 뭐이요? 나를 범죄케하는 그런  것들을 내가 내게 보배로 이용하는 방법은 뭐이냥 하면 그것이 범죄체 할 때에  범죄만 안 하면 범죄케 하는 그것은 나를 복받게하는 이용물이 결국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이 다섯 가지 문제, 민족 문제, 자기 이름 문제, 자기명예  문제, 또 뭐꼬? 복의 근원이 되는 문제, 또 다른 사람이 나를 해하는 데  복수하는 문제, 다른 사람이 나를 해하는 복수하는 문제, 복수하는 문제, 또  천하 만민이 나를 인해서 복을 받도록 하는 문제이 다섯 가지 해결짓는 방법을  이제 배웠는데 해결짓는 방법은 한 말로 말하면 뭐입니까? (순종) 한 말로  말하면 뭐입니까? (순종) 한 말로 말하면 뭐입니까? (순종) 그러면 순종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순종을 가리켜서 뭐이라고 말합니까? 믿음.

 이래서, 미국이 극단에서 아주 그 절단하게 되는 그런 위기를 만났을때에  미국에 어떤 그 부흥사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부흥사 그 이름을 잊어 버렸다고,  무디, 무디 선생이라고서 하는 분이 부흥사인데 그분이 미국을 그때 중흥시켜  가지고서, 궁지 에서 구출해 냈습니다. 부흥강사로 돌아다니면서 이래 가지고.

 그분이 말하기를 세상에 수입 중에는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이 없다. 믿음보다 더  수입하는 것이 없다. 믿음만 가지면 이 다섯 가지가 수입되지, 이 다섯 가지  수입 할라면은 이거 뭐 가져야 돼요? 믿음 가져야 돼요. 믿음은 이렇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믿음이 뭐입니까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하는 거라. 간단해.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

 주님이 시키시는 것은 몇 가지 이지요? 두 가지. 하나는 하지 말라는 것,  하나는 하라는 것 그 두 가지뿐이라,  이것만 하면, 우리가 아무리 제가 뭐 대통령이 수입해도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오. 믿음으로 수입한 것은, 이보다 더 큰 수입이 없어, 그래도 그분이  말하지를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을 하는 것은 없다 그렇게 말했어. 위대한  사람입니다.

 오후에 또 딴거 말할라 했는데 이거 그만, 이제 여러 번 다 해서 인제 그만  이것은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아브라함하고 롯하고 부자가 됐어. 부자가 됐는데 그때에 어데  가서 있을 때에 부자였습니까? 벧엘에 있을 때 부자라. 복은 어데서 받았는 고?  벧엘에 올라가면서 복 받았어. 회개하면서 복 받았어. 요거 변하지 안해요.

회개하면서 복 받았어.

 벌써 이상합니다. 여러분들 그런 경험 없어요? 회개만 할 마음만 가지면 벌써  복이 수루루 올라 하는 것이 똑 봄날이 되면은 얼음이 슬슬 녹아지고 날이  따뜻해지고 자꾸 풀 이파리가 뾰쪽뾰쪽 새 움이 나는 것처럼 한가지입니다.

 ‘회개를 할라 하고’ 회개할라고 하나님 뜻대로 살라고 마음만 가지면 모든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분위가 달라져요. 원수도 달라지고 독사도  달라지고 시랑이도 달라지고 맹수도 달라지고 달라져.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회개하고 살라고 하면은 모든 게 달라져 버려요.

 그런 경험 있습니까? 그런 경험 있어요? 저게는 말 안 하네. 경험 없어요? 그런  경험 없어? 있어? 있어 없어? 그래, 있을 거야. 다 있어. 없는 사람 없어요.

 이랬는데, 너무 많아 놓으니까 그만 시비가 났어. 사람들은 자꾸 일방지식으로  뭐이든지 많으면 좋은 줄 알지마는, 아들은 유명한 아들될라고 애를 쓰지마는  창세기 6장에 보십시오. 홍수 속에 매장당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매장당했어요?  어떤 사람들이 매장당했어? 여반에 한 번 대답해 봐요. 유명한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이 다 매장당했어요. 유명한 사람들, 모? 용사, 또? 네피림, 이런  사람들이 잘나서 하늘도 꿰뚫을 것같이 보여졌지마는 하나님 말씀 순종 안  하니까다 물속에 매장돼서 전멸 당하고 말았다 말이오.

 등신 바보 같지마는 하나님 시린 대로 한 노아의 여덟 식구만 홍수 심판을  이기고 드부렁 드부렁 떠 가지고서 이 우주를 상속받았습니다.

 이런 것을 안 아브라함이 이 살림살이가 부자가 되고 이러니까, 그것도 성경에  여러분들이 열람해 봐요. 여기에 오늘도 보니까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그 소돔 들이나 고모라니 그거는 뭐 같다 했소?  여호와의 동산 같다 그말은 땅 위에서 제일 존귀한 자리 복 있는 자리가  여호와의 동산입니다. 애굽 땅은 또 기름지고 모든 것이 물풍한 곳입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모두 다 좋은 끝에는 그게 멸망했고, 좋은 끝에는 멸망을  했고 곤고한 끝에는 다 거기에서 하, 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부자되는 것 좋아요 가난해지는 것 좋아요? 부자되는 것  좋아요, 부자되는 것 좋은데, 부자되는 것 좋은데 교만해서 멸망받을까 조심해야  됩니다. 부자되는 데는 조심 없으면 멸망받습니다.

 또, 가난한 자는 뭣 가져야 돼요? 가난한 자는 겸손은 저절로 겸손해져 버려.

가난한 자는 소망을 가지고, 소망을 가져. 가난한 사람은 소망을 가져. 가난한  사람은 소망 가져야 돼요. ‘하나님이 해 주신다. 내가 지금은 이렇지마는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다.’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걸 소망만 가지고 있으면  소망 그대로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해 주실 걸 소망하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밉상으로 보일라하겠소  곱상으로 보일라 하겠소? 하나님에게 소망 가지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곱상으로 보일라고 애를 써요. 가난에서는 하나님에게 소망 가지기만 하면은  그만 성공합니다. 가난한 것은 문제가 없어요. 가난한 거는 소망만 가지면 그만  모든 것이 창대하게 되는데 이제 부자는 조심하지 않으면 그만 넘어집니다.

큰일나요.

 시비가 났어. 시비가 나 가지고서 이라는데 이제 아브라함이 보니까, 거기에는  그런 말씀이 있어. 거기에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곳에 같이 살았더라  이렇게 말했어. 왜?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말이오. 저거 숙질간 같으면 뭐  싸워봤자 저거 식구끼리 싸우니까 관계없지마는 거기에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  하는 그 말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보고 있다. 저것들 하나님 섬긴다는 백성인데  보고 있다. 이라니까 이게 문제라 그말이오.

 문제인데 이 롯은 이거 그래도, 롯은 좀 예의도 있고 체면도 있지마는 롯에게  속한 그 모든 종업자들은 롯이 가르치는 것이 아브라함만치 못 가르쳤기 때문에  이것들은 무례하게 욕심만 부리고 저거 좋도록만 할라고 뿍뿍 세워대고 그렇다  그말이오. 이래 가지고 시비가나요.

 시비가 나니까 아예 롯의 진에는 그 종업자들이 막 똘똘 뭉쳐 가지고서 ‘주인  양반 아무래도 이번에는 사람이 한 번 결정하는 것은 그것은 뭐 일시 고 일시  미안은 일시 미안이지마는 평생 우리가 고난을 어찌 당하겠습니까? 이러니까  큰집 주인 아브라함하고 주인 롯하고 둘이 시비할 때에 눈을 지끈 감으십시오.

지끈 감고 아예 모른 척 하고 계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일할  터이니까.’이라면서 자꾸 그라지,   또 집에 들어가면 또 딸들 둘이 자꾸 박지기를 긁어대, ‘아버지 아무래도  그라면 안 됩니다. 아버지 아무래도 그라면 안 됩니다.’ 또 할멈이 자꾸 그래  쌓는다고 볶어대지 이라니까 롯이 볶여서 못 견뎌. 롯이 볶여서 못 견뎌.

 종업자들이 볶아대지 또 가족들이 볶아대지 이런데 그러면 아브라함 가족들은  볶아대지 안했겠습니까? 아브라함 가족들도 볶아 댔어요, 그만치는 안  볶아댔지마는. 뽀르르 갔다 오더니마는 ‘여보 주인양반, 그거 저 접에 우리  작은 집에는 막 목자들이 똘똘 뭉쳐 가지고서 지금 뭐 일심 단결해 가지고서  만일 그만 그 주인 롯은 모르는 척하고 뒤로 돌아 나 앉아 있으면 막 우리가  앞에 들어서 싸워대겠다. 우리는 뭐뭐 예의고 체면이고 차리지 안하고 마구  싸워댈 터이니까 한 번 눈을 지끈 감고 우리가 이번에 좋은 걸 택해야 되지 잘못  택하면 우리가 평생 고생이니까 망합니다 이렇게 막 단결합시다.’  이라니까 아브라함 목자들도 ‘아무래도 요번에는, 그래도 큰집이 큰집인데 뭐  큰집 대우를 해야 되지 그럴 수가 있는가? 아무새도 요번에는 그걸 양보하면 안  됩니다. 양보하면 뭐 그거 다 줘 버렸는데 가나안에는 자. 붉은 자산뿐이고 풀  한 포기도 없고 물도 없는데 어찌거기에 가 삽니까?’  아브라함 가족을 과 또 그 모든 목자들과 시비가 났어. 시비가 났는데 얼마  동안 이래 생각하면서 그뭐 어떻게 할까 이렇게 자꾸 걱정을 하다가 아무래도 이  싸움이 없어지지는 안하겠고 이라면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겠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지겠고 이러니까 근심 걱정을 되게 하다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꼭 물질 가지고 시비를 하고 이렇게 하면 이게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바라는 사람이가? 주님이 얼마나 섭섭하겠나? 그 물질이 없어도 또  내가 이제까지 섬겨 나오는 그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내가  배척할 수가 있겠나? 노엽게 할 수가 있겠느냐?   이래 가지고 룻도 아브라함도 고민 중에 고민입니다. 이라는데, 행여나  아브라함은 롯이 먼저 말할까, 또 롯은 삼촌이 말할까, 이래서 지금 가슴이  도근거려 이라고 있는데 할 수 없어서 아브라함이 말을 했습니다.

 말을 해서, ‘너나 우리나 한 골육인데 하나님에게 욕돌리지 말고, 우리가  서로, 서로 나뉘는 게 좋겠다. 네 앞에 모든 게 있으니까 너 좋은 데로.

차지해라. 너 차지하고 남는 것 내가 하겠다.’ 이렇게 선포를 했습니다.

이라니까, 그만 롯의 가족들 뭐 거기에 목자들 다 ‘아이고, 참 큰집 아브라함  주인님이 참 점잔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래 야단을 쳐 참 뭐 감사합니다’  이래 절도 많이 했을 거로구먼.

 이라면서 롯은 있다가서 ‘이거 참 내가 미안합니다. 미안하지마는 이것들이  하도 저래 쌓으니 내가 어짤 수 없습니다.’ 하면서 했는데 롯은 속에 도둑놈이  들어 앉았다 그말이오. 앉았으면서 그래 체면만 차리지.

 이래서 아브라함이 ‘그러면 네가 어데로 가든지 택하면 나는 남는 걸 내가  차지 하겠다’하고서 그 롯이 소돔 들을 차지하고 도시로 가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그 자산 벽지 물도 없는 데 거기에 있게 됐습니다.

 거기 떡 떠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너 왜 좋은 건 다내 주고  여기에 있느냐?’ ‘네, 그거 뭐 자꾸 그라는데 그거 안 줄라 하면 시비날  것이고 시비나면 그거 또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섭섭해 그럴거고 하니까 뭐  하나님 계시면 다 되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풀보다 물보다 나는 하나님이 낫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이라니까, 하나님이 척 찾아 오셔 가지고 ‘그래?  너는 나만 바라보네. 그라면 내가이제부터 책임이 무겁구만.’ 14장 1절에  ‘내가 네 방패와 상급이 되겠다’ 그렇게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둘이 갈라져 버렸어. 둘이 갈라졌어.

 이것이 왜 이리 됐느냐? 이거는-우리의 신앙 노선을 알리기 위해서 이렇게 해  놓은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신앙 노선에 갈라지는 것이오. 이래서,  롯의 신앙도 있고 아브라함의 신앙도 있고 이 신앙이 둘로 갈라집니다.

 이래서, 서부교회도, 롯의 신앙도 있고 아브라함의 신앙도 있고, 이 자리도  롯의 신앙도 있고 아브라함의 신앙도 있고, 우리가 어떨 때는 아브라함의 신앙  따라가다가 또 롯의 신앙 따라가다가 자꾸 이렇게 바꿈 같이를 하는데 이 노선에  대해서 똑똑히 가르쳐 주셔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르치는 도리를 여러분들에게 간단하게 말을 하겠습니다.

 자, 아브라함과 롯이 둘이 지금 시비하는데 아브라함은 이렇게 나좋도록 할라  하면은 내가 뭐 큰집이니까 의례히 가나안 내가 차지하지, 이라면 내가 가나안  차지하지마는 이라면 롯 저게 모든 종업자들이 악을 피우고 독을 피우고 막 이래  쌓으면은 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불안하시고 얼마나 섭섭해 하시겠는가?   이러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 생각하면 양보해야 되겠고 자기와 가족들과 모든  사람들 생각하면 좋은 것을 자기가 차지해야 되겠고 이래 가지고서 이랄까  저랄까 지금 고민 중에서 생각을 했습니다.

 또 롯도 그랬소. 롯도 이거 뭐 번연히 저 좋은 것을 큰집 삼촌에게 드리면은  삼촌도 좋아할 것이고 또 예의도 바르고 윤리도 바르고 하나님도 잘한다고 하실  것이고 그러나 내가 절단나니까 이거 어떻게 하나? 하나님 좋게 하나 나 좋게  하나 둘로 이라다가 롯은 아무래도 하나님 좋게 하는 그거 하면 내가 평생  고생일 거고 그라니까 어라 그만 눈 지끈 감고 나 좋게 하는 것 하자.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가 우하면 대가 좌하리라 이렇게 해라하고 난  다음에는 그동안에 한 시간이 갔는지 하루가 갔는지 열흘을 갔는지 그동안은  기도하고 생각하자 하는 고 여유의 기간을 줬던 것입니다. 그 기간이 여기  기록되지 안해도 필연적으로 기간은 있었어요. 하루든지 하루밤이든지 있었다  그말이오.

 있었는데 거기에 생각해서 아브라함도 생각하고 롯도 생각했는데 롯은 하나님  기쁘게 하는 것보다도 자기 유익된 길을 택한 것이 롯의 택한 걸음이고  아브라함은 내가 손해가고 내가 해로울지라도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길을  택해야지 한 것이 아브라함 택한 길입니다.

 이래서, 그 두 깊이, 하나는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길 아브라함이 택했고 자기  기쁘게 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 현실이 그때 당면한 그런 환경 현실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나님을 위주로 그렇게 택했고 롯은 자기 위주로  택해서 두 집이 갈라졌습니다. 또,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은 생각하니까 이렇게  온 가족들이 시비를 하고 저와같이 하지마는 전 가족들은 다 지금 요단 들을  택하라고 하지마는 그걸 택하면 하나님이 섭섭해 할 터인데 하나님의 뜻이  뭐인가 가만히 밤새껏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가족들 그 소원을 들을라고 하면은  하나님의 뜻에 위반이 되겠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할라고 하면은 가족들의  의사에게 다 대립이 되어지겠고 이러니까 하나님 대립하나 가족 대립하나,  하나님 의사를 딿나 가족 의사를 딿나 둘 중 어느 거 할꼬? 밤새도록 생각했고  롯도 또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하다가서 이제 그 이튿날 딱 작정하기를 아브라함은 이제 내가 가족들  소원하는 그 의사를 듣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해야지 하면서 작정을  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할라 하면 모든 게 낭파되어지니까 이제  가족들과 모든 목자들이 말하는 모든 사람의 의사를 따라서 내가 할 수 없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이래 가지고 갈라졌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의 그 여론과 중론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따라갔고  롯은 하나님의 뜻 보다도 모든 사람의 의사를 따라갔고 이래가지고 둘이  갈라졌습니다.

 또, 그 요단 들에 그 내용을 지금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밤새껏  생각하니까 이 요단 들은 물 좋고 땅 좋고 풀 좋고 편리하고 이거는 참 조건  좋다. 뭐 물 좋지 땅 좋지 풀 좋지 또 평지지 이거야 뭐 백프로 좋습니다.

좋은데 이 가나안은 발간 자산이니까 풀없지 물 없지 비탈이지 이러니까 안 됐다  말이오.

 이러면, 조건으로서는 백프로 좋은 조건이 있고 백프로 나쁜 조건이 있는데  아브라함은 자, 내가 조건 좋은 것을 택하겠느냐 하나님의 축복주시는 것을  택하겠느냐? 하나님의 축복을 내가 받을라면은 조건 나쁜 것을 차지해야 되겠고  또 조건 좋은 것을 차지할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겠고 밤새껏 씨름하다가  아브라함은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받는 그 길이 낫다 해서 그 길을 택했는데  롯은 정반대로 택했습니다.

 뭐 가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이야 뭐 그렇다고 안 줄까니? 그러니까 이제 조건  좋은 그것이라야 되지 조건이 나쁜 이 자산에서 물도 없이 어떻게 한다 말이고?  이 목동들 다 부애가, 화를 내 가지고 도망을 칠 것이고. 또 모든 소 짐승들은  다 먹을 것 없어 삐쩍 말라 쭉쭉 뻐드러지고 이꼴을 어찌 보노?  이러니까, 롯은 조건 좋은 것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받을  수 있는 길를 택해서 둘이 갈라졌습니다. 둘이 갈라졌소. 갈라졌는데 그러면  갈라진 이 두 걸음을 가리켜서 일호로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중하게 여기고  귀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자기보다 하나님을 크게 자기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낫게 생각하고 자기 위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하는 요 생활이 무엇이냐 다른 말로 하면은 요것이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요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은 자기보다 하나님을 높여서 자기가 하나님에게 속하고, 하나님을  자기에게 귀속시켜서 이용할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에게 속해서  하나님에게 이용을 당하고 하나님에게 따라서 그에게 복종해서 그에게 속하여서  살라고 하는 것이 요것이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을 택했습니다.

 롯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위주로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인본을 택했습니다.

인본을 택했어. 신앙을 택한 게 아니라 인본을 택했어. 사람을 앞세웠어. 요거  맞습니까? 신앙주의의 대립이 인본주의라 하는 것이 맞습니까? 맞아요!  여러분들이 똑똑히 깊이 생각해 봐요.’ 이랬는데, 아브라함은 신앙주의로 걸었고 롯은 인간을 근본으로 삼는 인본주의로  걸어서 둘이 갈라졌습니다.

 그 다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사에 복종하는 것, 하나님의 의사에  복종하는 걸음을 걸었으니 이는 하나님 독재주의입니다. 독재주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독재주의에 속해서 살았습니다. 기독교는 독재주의라 말은 기독이  독재한다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롯은 무슨 주의입니까? 모든 사람의 여론들을 따라서 했으니까 그거 무슨  주의입니까? 민주주의입니다. 롯은 민주주의요 아브라함은 독재주의입니다.

그러면, 독재는 사람 독재입니까 하나님 독재입니까? 기독교 독재주의라. 그거는  하나님 독재주의요. 기독교는 하나님 독재주의인 걸 알아야 됩니다. 이런데  뻔뻔스럽게 기독교는 민주주의지 독재주의 아니라고서 막 글로 써 내고 대항을  해 놨습니다.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어  기독교는, 기독이라 말은 그리스도라 말이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독재주의입니다. 그리스도의 독재지 양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콩하면 콩  팥하면 팥하고 그분의 한 분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기독교요 하나님의  사람이라. 아브라함은 천인 만인이 말했지마는 그 의사에 딿지 안하고 하나님 한  분의 의사에 따랐어.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독재주의에 따라갔습니다.

독재주의에 속한 사람이오.

 롯은 민주주의, 인본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라 그거, 민주주의. 사람들의  주장을 하는 것이라. 민주주의. 사람을 주로 삼는 것이라 말이오. 민주주의는  다수 가결이 민주주의입니다. 독재주의는 천인 만인이 하든지 말든지 하나님 한  분의 의사에 딿는 것이 독재주의입니다.

 우리 총공회 정관에 새 놨는데 우리 총공회는 독재주의라. 했소 민주주의라  했소? 우리 총공회는 독재주의요. 독재주의라 말은 그 뭐이냐? 하나님 한분의  의사에 째기 때문에 아무리 구십 구 명이 다 콩을 팥이라 한다고 해도 안  따라가요. 구십 구 명이, 백 명이 다 그랬으면 그대로 하지마는 그거는  틀립니다. 그라다가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면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꾸 성경을 비교해 가지고 한 사람이 말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거기에 딿지 많은 사람 말한다고 거기에 따라가지 안하기 때문에 종다수 가결은  이거는 다 우리는 부정하고 나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바로 깨닫는 숫자가 많아요 잘못 깨닫는 숫자가 많아요? 분명히  그래요? 그러면 잘못 깨달은 숫자가 많고 바로 깨달은 숫자가 적은데 다수를  따라가면은 잘못 깨닫는 거 따라가는 것이요 바로 깨달은 거 따라가는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종다수 가결하는 그 회든지 뭐이든지 어떤 존재도 있으면  시간에 따라서 점점 타락하고 부패해져서 다 파괴되고 마는 것이 그것이  필연성이오 정당성입니다. 여러분들.

 이래서, 우리는 다수가결이 아니라 어짜든지 하나님의 뜻인 하나뿐, 참이라는  바른 것 옳은 것 그것을 따라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한분에게 복종하는  하나님 한 분의 독재주의, 그리스도의 독재주의, 기독교 독재주의, 그리스도 한  분의 독재주의,  이것을, 세계 교회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지마는 암만 많아 봤자 눈도  꼼짝하지 않습니다. 잠시 후에 주님 앞에 가면은 기독교 독재주의가 맞다!  기독교 민주주의로서 종다수 가결은 틀렸다! 하나님이 말하십니다.

 또, 롯은 조건이 좋아야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이라야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주의요. 어데서든지 ‘너 축복받을 수 있나? 축복  받을 수 있다 하면 따라갑니다. 암만 조건 좋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안하고  축복하지 안할 곳은 안 가요. 저 좋아할 곳은 안 가요.

 이러기 때문에, 참된 아브라함은 자손은 어떤 게 아브라함의 자손인가? 이런  조건 저런 조건, 위치가 좋다, 거래가 좋다, 또 판매부가 좋다, 또 제휴가 좋다,  자본이 좋다, 배경이 좋다, 장소가 좋다, 기사가 좋다 말을 해도 아브라함  자손은 시시하게 여깁니다.

 암만 ‘그래 쌓아도. ‘사장님 어떻습니까?’ 말 안 합니다. 말 안 해.

‘이렇츰 좋은데 사장님 만족하고 한 턱 내십시오.’ 아무 말도 안 합니다.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라다가 깨달아서 누가 말하기를 ‘자, 사장님 이렇게 하면; 이런 방편을 쓰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축복하겠소? 안 하겠소?’ ‘그러면 축복하지’ ‘또  이렇게 하면 어떻소?’ ‘축복하지’ ‘저렇게 하면?’ ‘축복하지’ ‘모든 것  다 보이는 조건 나빠도 하나님 축복이면 다 아닙니까?’ 이랄 때에 신자는  ‘아멘! 너를 대리 사장을 세워야 되겠다!’ 그 회사 망해요 안 망해요? 망해요  안 망해요?   여러분들, 기독자 가운데서 조건주의로 나가는 사람과 축복주의로 나가는  사람이 둘로 갈라집니다. 이 자리 앉은 여러분들은 조건을 이제 그 모든 복으로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바랍니까? 이렇게만 하면 여러분이 안 망해요.

시비도 할 것도 없어요.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은 인간들은 다 싫다고 내 버린  것이오. 인간들은 다 싫다고 내 버린 장인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 요긴한 돌이  된다는 것은 모든 면에, 메시야만 아니라 모든 걸 다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것은 인간들이 다 싫다고 버리는 것이오. 버리는 것만  꺼렁꺼렁 쥐었는데 하나님이 축복하시니까 잘 돼요. 조건 좋은 거는 시비가  있지마는 하나님의 축복 위주에서는 시비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내버린 것만  꺼먹꺼먹 껌으면 되는데 뭐 시비할 게 뭐 있어야지?   하나님의 축복받을 것은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싫다 합니다. ‘이런 조건이  있다’ ‘에, 그건 비과학적이다. 비합리적이다. 그거는 비타산적이다.

비통계적이다. 비역사적이다. 다 헛일이야. 안 된다.’ 다 내 버렸는데 하나님이  축복하는 법이 거기에 있거든. 이 말씀에 맞춰 보니까 축복하겠다. 저 말씀에  맞춰 보니까 축복하겠다. 이 아브라함은 이래도 망하겠고 저래도 망하겠는데  하나님의 축복에 맞춰 보니까 됐다 그거요.

 이런고로, 아브라함은 축복주의요 독재주의요 신앙주의였고, 롯은 인본주의요  민주주의요 또 조건주의라, 조건주의라.

 이래서, 서부교회 주일학생들은 네 주일을 거듭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그  학생들이 자라면 오늘 여러분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네 주일을 계속해서  가르쳐서 다 외우고 있소. 물으면 다 알아요.

 이래서,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문제되어 있는 민주주의, 기독교는 민주주의다.

기독교는 민주주의라 말은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의 다수의 의논을 따라서 가는  것이 기독교다 하는 것이고 내가 말하는 것은 기독교는 독재주의다.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그리스도 그 한 분 그분의 주장 한 분을 따라서 가는 것이 기독교다.

 독재주의가 맞아요 민주주의가 맞아요? (독재주의) 민주주의는 타락이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독재주의는 점점 새로워져요 타락해져요? (새로워집니다)  주님 당신 한 분이 뜻만 자꾸 따르면 점점 좋아지지 타락할 리가 있습니까?  타락할 리가 없어. 알고 살아야 돼요. 모르고 살지 말고 알고 살아야 해요.

 자, 이 주의에 틀렸으면 잘못 가르쳤거든 잘못 가르쳤다고 말을 해요, 누가. 뭐  틀렸어? 의문이 있으면 또 질문해요. 내가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어요  이러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신앙주의, 독재주의, 축복주의 이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로 가지고 세상을 살아 나가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  자손들입니다.

 자, 말하십시오. 한 번 해 봐요. 아브라함은 첫째, 여러분 답해. 첫째? 아니,  답을 하라 말이오. 첫째! (신앙주의!) 뭐라 하노? 첫째! (신앙주의!) 둘째!  (독재주의!) 셋째! (축복주의! ) 아멘! 이만하면 형통이라. 달성이라. 아멘!

 다 같이 기도합시다.

 우리를 모으신 이가 주님이시요 또 말씀하신 이가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저희  각자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는 것도 주님 한 분의 역사임을 확실히 믿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으로 각종의 사람병을 고치시려고 또 육체의 병을 고치시려고  말씀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먼저 구하옵는 것은 이 말씀을 주님이 친히  하신 것과 또 이 진영을 주님이, 친히 운영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께서 표적으로  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믿지를 안할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여! 이 역사와 이 운동이 주님이 하시는 것을 과거에도 수백 명의 그  사람병 육체병 고친 것으로써 저희들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강퍅해서 또  잊어버리고 또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항상  시험하다가 멸망함과 같은 이 멸망의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셔서 금번에 주님께서 역사하신 이 말씀으로 사람병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완전히 고쳐 주심으로 본인에게 받은 증거가 확실히 있어서 핑계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육체의 질병을 무슨 병이든지 다 고치셔서 표적으로 보여  저희들이 의심하지 못하도록, 마귀의 유혹에 들지 못하도록 표적으로 나타내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선지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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