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38년된 병자

 

1989. 6. 7. 수야.

 

본문: 요한복음 5장 1절∼18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 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못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데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임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묵상기도)  지나간 삼 일간도 주님의 은혜 안에 보호하셨다가 또 이렇게 삼일 예배로 모여  주님 앞에서 새로움을 받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까지에 베푸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옵고 이 은베에 합당한 자로 날마다 진실되이 살아가지 못한 것을  항상 주님 앞에 자복합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 각자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대속함을 입은 남녀노소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지극히 크심을 믿게 하시고 주님의 진실하심과 완전하심과  신실하심을 확신하는 저희들이 됨으로 주님과 주의 말씀과 모든 영감과 섭리에는  거짓도 과장도 가감도 어누리도 없는 모두가 다 정확하며 참되시고 온전하심을  믿는 저희들이 됨으로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과  주님이 선포해 놓으신 이 법도와 교훈과 계약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는 자는 다  세상을 이기고 자기도 이기고 악령도 이겨서 과연 주님의 후사가 되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때에 주님와 후계자가 넉넉히 될 수  있는 실력과 경험과 체험을 땅 위에서 얻어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의로운,  연단되어 온전하고 구비한 자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오니 확신하는 은혜를 이 시간도 더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곳마다 주의 사활의 대속을 받은 자들이오니 불쌍히  여겨 주셔서 믿음을 더하여 주사 주님이 구름 타고 오시기 전에 온전함을 이루어  영광의 찬미의 실상이 이루어지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다 기록하려고 하면 온 세상에도 기록된  책을 둘 만한 그런 곳이 없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고 간단한 육십육 권 신구약  성경으로 종결을 지웠습니다.

 그런고로 육십육 권의 이 말씀 안에는 주님의 많은 그 교훈과 역사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고 또 성령님이 친히 이 말씀과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역사해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구약 성경  말씀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기본구원에 대한  것을 말씀하신 그 부분이 있고 또 기본구원 얻은 우리들이 우리 행위를 통해서  건설구원을 이루는 거기에 대한 부분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이 신구약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의 구원의 도리로  이렇게 받아서 연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혹 잘못하면 역사적으로 어떤 그런  하나의 형식이 이루어졌다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역사 소개를 하고 과거 무슨  그런 상황들을 우리에게 소개한 것으로서 그렇게 알면 이 안에 큰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을 우리가 은혜받지 못하고 관련을 가지지 못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없는 것을 아무나따나 더 과장을 해서 하는  것도 그것도 큰 사고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외에 더 가해서  말하는 자에게는 이 성경에 잘못된 데 대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그 고난을  주시는데 그 징계의 해를 더 많이 받는다고 이렇게 말했고, 또 여기에 내용에  담겨 있는 내용을 감해서 말하면, 자기가 몰라서 덜 말하는 건 좋지마는 그  내용을 아니라고 이렇게 감하는, 감한 주장을 하는 그 사람에게는 이 구원에서  제감시키겠다 그렇게 계약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십팔 년 된 나은 이 역사인데 이는 그때에 그런 역사적인 그  사실이 있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으로 그치면 이 사실이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구원 도리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관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우리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다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의 절기에 된 일입니다. 유대인의 절기라는 이 절기는 다른 데  기록하기는 나팔 부는 절기라 이렇게도 말하는데 이 절기는 곧 송구영신하는,  우리 나라로 말하면 설과 같은 그런 절기입니다.

 그래서 옛날을, 옛것은 보내고 새것을 맞이한다는 것으로 우리는 십이월  삼십일일을 언제든지 송구영신하는 그런 예수의 절기로, 그 해의 머리의 절기로  그렇게 삼아 가지고 우리들은 지킵니다. 그러면 삼십 일일까지는 다  지내갔으니까 그것은 다 지내간 것으로 그렇게 모든 모든 정리 정돈을 하고 또  일일부터는 새해를 맞이하니까 새것을 맞이하니 새것으로 또 이제 시발돼서  나아가자 하는 그런 뜻을 가지고 모두 다 설을 새는 것입니다. 그 절기입니다.

 이 삼십팔 년 된 병자의 이 나은 이 사실이 왜 하필 송구영신하는 이 절기에  됐는가 하는 그것도 우리는 거기 대해서 내용이 있는 것만치 생각해서 우리  구원에 계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특실히 여기에 기록된 삼십팔 년 된 환자가 낫게 된 이것은,  송구영신하는 절기에 하필 된 것은 옛것은 다 지내보내 버리고 새것이 될 수  있다는 이 새것을 맞이하는 그런 데에 큰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시기를 송구영신  절기에 이 일이 생겨졌습니다. 주님이 삼 년 동안에나 공생활 이 복음 전도를  하셨기 때문에 이날이 아니고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데 하필 이  송구영신하는 이날에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은 우리들에게 이것도 하나의 구원  도리로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옛것은 옛것으로서 청산하고 새로와 질 수  있다. 그 옛것을 버리고 새로와질 수 있다 하는 그런 중요한 은혜의 계약을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데까지 아주 못쓰고 실패되고 큰 낭파되는 그런 일이 과거 현재까지  계속돼 와서 우리가 어떤 궁지에 빠졌을지라도 거기에서 다시 헤고나와 가지고  새것이 될 수 있다, 새로와질 수 있다 하는 다시 새로와지는 이 갱신의 은혜를  말씀합니다.

 다시 새로와지는 이 은혜에 대해서 삼십팔 년 된 이 환자가 낫게 된 이것은  우리에게 다시 새로와질 수 있는 이 소망을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 표적으로, 이  형식 표적이라는 이 형식을 가지고 구원 도리를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거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성전 울타리 문에 양문이라는 문이 있고 성전  울타리 밖에는 성전이 아니고 성전 울타리 안에는 다 성전이라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또 그렇게 상대합니다. 그런데 성전 울장, 성전 그 담장에  양문이라는 문이 있는데 그 문 안에는 성전이요 그 문 밖에는 다 이 세상입니다.

세상 일반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들이고 그 성전 그 담장 안에는 모든 사람이 다  성전으로 이렇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바로 양문 곁에 거기에 행각 다섯이 있는데 그  행각이 다섯이 있는 그 안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는 것을 말했습니다. 별별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얼핏 생각하기는 다 성전 안에는 거룩한 백성들만 있고 그 안에는 근심  걱정 없고 다 참 무한한 소망을 가지고 아주 행복스러운 사람들만 있다고,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들만 있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지마는 실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모든 각종의 환자들이 솔로몬의 행각에는 가득 차서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은 이것도 하나의 구원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도 사람들 보기에는 하나님의 교회라, 이거는 하나님의 교회니까,  저 예수 믿는 사람이라 이렇게 하니까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서는 다 하늘에  소망과 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봄으로서 근심 걱정 고통 없는 사람들만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정칙이요 또 거기에는 죄가 없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들만 다 살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다 정상입니다.

그런데 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세상이 상상도 못 할 그런 온갖 그 심령의  환자들, 육체의 환자들, 모든 생활 환자, 경제 환자, 모든 정신 환자 이런  환자들이 교회 안에는 많이 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이제 베데스다라 하는 그런 못이 있었는데 그 못에는 천사가  가끔 내려오면 못 물이 똑 물이 끓는 것 모양으로 동해지고 동해질 때에 그때에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기만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되니까 이 소문이  퍼져서 거기에 있는 환자들이 다 이 기회를 자기가 소망하고 모든 환자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자기 병을 낫겠다 하기 위해서 모여들고 또 이제 모여들다  보니까 거기에는 참 의인들이 많이 출입하니까 자비한 사람들이 또 긍휼의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니까 다른 데 가는 것보다도 좀 구제도 잘해 주고 하니까  그런 모든 소망들을 가지고 사람들이 모였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것도 하나의 우리 신약 시대의 교회는 이방인들이 다 믿고 하는 이  교회인데 신약 교회에 내부가 이러하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뭐 교회라면은 그는 다 튼튼한 소망을 가지고 항상 절망이  없고 낙망이 없고 언제나 기쁘고 즐겁고 다 의인들만 이렇게 모이 것으로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게 정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실은 교회가  그런 정상의 사람들이 되지 못하고 비정상의 교회가 돼 가지고 있다 하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지금도 어느 직장에서든지 혹 말할 때에 '저 예수  믿는 사람이 저러나? 저게 또 집사라지 뭐 장로라지 목사라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인식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은 다 온전하고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상이 그렇지 안하니까 그들이 놀래고 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라, 신약 교회의 형편이라 하는 것을 여기에 보여 줍니다.

 이래서 그저 교회만 다니면 다 된다고 이방인들은. 혹 안 믿는 사람들은 그래  생각하자마는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그저  예배당이나 출입하고 주일이나 지키고 또 사람들이 잘 하나님 처럼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나타난 것만 가지고 평가하지 그 비밀을 우리가  평가한다는 것은 그 실수하기 쉽기 때문에 언제든지 나타난 그 결과를 보고  우리는 모든 것을 평하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요 또 세상에 모든 법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뭐 집사니 권찰이니 장로니 목사니 이렇게 사람들이 모두 선택해 가지고  이렇게 성직을 맡기고 이렇지마는 실은 그 속에는 여러가지 병 뭐 그 사람의  인격의 각종의 병, 사상의 각종의 병, 정신의 각종의 병, 또 소망의 각종의 병,  소망도 뭐 병든 소망이 얼마나 많고 또 그의 계획이나 또 모든 지식이나  비판이나 뭐 전부가 병이 얼마나 각종 '그 안에는 많은 병자가 있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들도 교회에 자기가 나오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 하고 신앙 모든 의식의 행위를 한다고 해서  이것으로써 완전타고 생각을 하지 말고,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것은 이것은 공심판에 대해서 대속을 했지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대속하시지를 아니하셨습니다. 만일 대속을  하셨더라면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서  갚음을 받는다 그런 말씀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속을 했으면  왜 뭐 또 받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속은 공심판에 대해서  공심판적으로 대속을 받았고 사심판적으로는 대속을 받지 안했습니다. 그러면  '한번 대속 받았으면 받았지 또 무슨 대속 안 받은 게 있겠는가?' 그렇게 이렇게  혹 조부랍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나 그것은 생각이 모자라 그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한 가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이 행정법에 걸립니다.

행정법적으로 걸리면 행정법에서 그 죄에 대해서 처벌을 합니다. 또 거기에서  한번 했으면 다냐 하면 그렇지 않고 또 이 개인, 개인 소유권법이 있기 때문에  소유권법에 또 있으니까 그 법이 남아 있습니다. 또 소유권법에 해결을 했다  할지라도 또 인류에게는 도덕법이라는 이 도덕법이 있기 때문에 도덕법에 걸린  그거는 또 그게 걸려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해결이 안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는 하나 지었지마는 그것이 이 법에 걸리고, 행정법에 걸리고, 또  인인 관계의 그 개인 소유, 소유권법에 걸렸고, 그런 또 도덕법에 걸렸고, 또  그거는 하나의 사회법에 걸렸고, 또 믿는 사람이면 그런 게 다 해결됐다  할지라도 종교법에 또 걸립니다. 이거 모양으로 우리가 범죄했으면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심판법에는 예수님이 다 대속을 했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서  우리를 유황불 구렁텅이에 지옥 보낼 자가 아무도 없고 우리는 거기서 통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행위에 대한 그 법은 예수님이 대속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  법은 받아서 죄를 범했으면 그 죄의 형으로 멸망을 받고 또 의를 행했으면 의의  법으로서 상급을 받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좀 처음 들으면 얼떨떨할  것이나 이제 예수님의 대속은 공심판 죄를 대형해서 없앤 것이지 사심판의 그  형을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똑똑히 구별해서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것도 지금 우리 총공회서만 말하고 있는 교리와 신조지 일반  교계에서 말하고 있는 거는 아닙니다. 요게 나가면 또 몰라서 많이 떠들어질란지  모릅니다.

 이래서 총공회 교리와 신조와 행정이 오늘까지에 나온 모든 일반 교계의 교리와  신조의 그 바탕 위에 또 거기에 새로운 그 개달음과 새로운 움싹이 나온 그것이  있어 종전 우리가 장로교에서 예수 믿던 거와 다르다 하는 그걸 알아야 하고,  장로교 교인이 될라면은 일반 이 구교 천주교 교리와 신조와 이 개혁교는  다르다, 개혁교 가운데서도 감리교와 또 성결교와 장로교가 각각 다르다. 장로교  가운데서도 총공회가 또 다르다 하는 이 교리와 시조를 똑똑히 모르면 그 사람의  신앙이라 하는 것은 설 수가 없고 옳은 행위가 되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물이 동하면 처음 들어가는 사람들은 다 낫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  많이 모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우연히 이렇게 된 게 아니고  이것이 영원 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 속에 든 것입니다. 그냥  당장에 무슨 일시 이리 된 일이 아니고 영원 전에 하나님이 절대적인, 조금도  다시 변경이 없는, 다시 개정이 없는 완전한 이 예정으로 되어 있는 그 예정  순서가 하나씩 둘씩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 능력의 섭리로 성취돼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송구영신하는 이 절기에, 또 성전 안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환자들이 있었는데 그 환자들이 모인 것은 하나는 천사들이 내려와서 권능으로  병낫기 위해서 모여들고 또 구제받기 위해서 모여 들었다, 이래 많은 환자들이  있는데, 물이 동하면 낫는다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고 이런 운동이 다 이 절기날  삼십팔 년 된 환자가 낫게 된. 삼십팔 년 된 환자가 낫게 된 이 일을 중심으로  삼아서 모든 것이 다 준비 공작으로 그래 가지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송구영신 절기에 이 많은 환자들이 모여든 가운데에서 삼십팔  년 된 환자가 낫게 된 이 모든 거기에 조건들이 전부 이 삼십팔 년 된 환자가  낫게 된 이것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그런 것을 만들기 위해서 그것의 배경으로  모든 배경 작업으로 이런 것들이 있어진 것이고 그 실상은 삼십팔 년 된, 환자가  낫게 된 요것입니다. 그날 송구영신하는 그날 된 것도, 성전 밖에는 이런데 성전  안에는 거룩한 줄 알았는데 이런 환자들이 있다는 이런 것도 전부 요 중심이  삼십팔 년 된 환자가 그중에 제일 중환자지마는 완전히 낫게 됐다 하늑 요것이  중심으로 우리에게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우리가 오늘 저녁에 다시 한번 새기면서 우리가 또 연구하고  이 도리를 구원 도리로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이 삼십팔 년 된 환자가 그 환자  중에 제일 중환자입니다. 제일 중환자로 여기에 제가 말한 것 보니까 뭐 '내가  가기 전에 다른 사람이 갑니다. 나는 너무 중환자이기 때문에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이 별 소리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 어쨌든지 한 말로 말하면  그중에 제일 중환자입니다. 제일 희망이 없고 제일 불쌍하고 가련하고 제일 아주  불행이 제일 많은 불행을 가지고 있는 이 삼십팔 년 된 환자입니다. 그랬는데 이  삼십팔 년 된 환자는 이 날 주님을 만나는 이 순간에 그는 완전히 해결을 짓고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제일 행복된 사람이 됐습니다. 제일 기쁜 사람이  됐습니다. 그것이 요 계시의 중심입니다. 어떤 종류의 불행자든지, 어떤 종류의  불행자고, 또 어떤 정도의 극심한 불행자고, 또 어떻게 희망이 없는 제일  비참하고 불행한 자일 지라도 요 믿음 하나의 도리로서 완전이 돼져 버린다.

그러면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인간 증에는 그 가운데는 제일  불행스러운 사람이었었는데 예수님 만난 이후로부터는 거기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제일 행복된 사람이 됐습니다. 뭐 도복 입고 성전에 제사드리러  들어가는 제사장들도 있었을 것이고, 거기에는 레위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또  일반인들로서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많이 있었을 터인데 어쨌든지 거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은 삼십팔 년 된 환자였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아마 기쁘기도 제일 기뻤을 것이고, 또 좋기도 제일 좋았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이 주목하고 뭐 모든 인기도 막 그리 막 집중됐을 거라, 모든 사람이.

삼십팔 년 된 환자가 나아 가지고 뛰고 굴리고 이렇게 하니까 인기도 제일  집중되었을 것이라.

 우리 대구에서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작대기를 질고 근근히 이래 다니지  이랬는데 그 반신불수가, 내가 O목사님한테 물으니까 '그러면 좀 어떻게  나았느냐?' '많이 나았습니다.' 그래 뭐 과거에는 층층대를 못 올라가서 이  난간을 거머쥐고 이래 올라갔는데 뭐 그때 와 가지고는 층층대 한 가운데로 막  훌훌 뛰고 올라가면서 좋아서 뭐 그라는데 그랬다고 O목사님이, 내가 사실을  알아 보기 위해서 말하니까 그렇게 말을 합니다.

 이러니까 그날 밤에도 보니까 거기에 많은 사람들이 뭐 수천 명이 그래  있지마는 아마 그 중에 그 사람이 제일 기쁜 모양이라. 제일 기쁜 모양이고 제일  좋아하고 또 모든 사람이 그뭐 그거 반신불수 나은 거 그거 반신불수니까 옷도  얄궂게 입고 뭐 갑자기 그래 됐지마는 옆에 내가 안 가 봤지마는 옳게 씻지도  뭐, 그 누가 말하는데 그 앉았던 자리 가서 옆에 가니까 찌린내가 어떻게 나든지  뭐 일어나지도 못하니까 거기 앉아서 그만 자꾸 그만 오줌을 자꾸 쌌어. 그만.

거기서 오줌을, 거기서 나오지도 못하고 하니까 거기서 그만 오줌을 싸서 가니까  뭐 찌린내가 굉장히 나더랍니다. 이래도 그만 그 사람이 인기는 제일 집중이라.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모두 다 다른 사람이 박수를 해 주고 뭐 이번 모두 눈이  전부 다 그리 돌려졌어요 이러니까 인기 집중을 했어 인기가 그 사람에게  집중됐지 제일 기뻤지 한 것 모양으로서 이 삼십괄 년 된 병자가 그때 나아서  기뻐 즐거워하면서 뛰면서 하나님도 찬송하고 또 성전으로 뛰어 들어가고 이제.

평상 못 들어가 봤는데 지금은 인제 병신이 나으니까 성전 들어갈 수 있거든  성전으로 뛰어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한다는 그 광경을 가만히 생각해 볼  때에 아마 그 자리서는 인기도 그 사람이 제일 높았을 것이고, 또 기쁨도 제일  많았을 것이고, 또 소망이나 희망도 아마 그 가운데 있는 사람 가운데 제일 컸을  것이라. 소망과 희망도, 자, 소망이 일등이라, 희망이 일등이라, 기쁨이  일등이라, 만족이 일등이라, 인기가 일등이라, 이만하면 일등 아닙니까? 그 이상  뭐 더 행복이 어데 있겠소? 이렇게 된 것이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  예수님이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는 그 말씀에, 이제까지 일어나고  싶지마는 주님이 하시는 그 말씀을 이제 의심없이 딱 믿고 그대로 하니까  일어섰습니다. 그대로 하니까 나았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그만 딱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요것 가지고 완전히 이거 뭐 백팔십도 변화라 할까, 제일  불행스러운 사람이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이 돼 버렸어. 제일 천물이 제일 존귀한  사람이 돼 버렸어. 제일 낙망되고 절망된 사람이 제일 큰 소망과 희망을 가진  사람으로 돼져 버렸어. 이거는 아주, 아주 완전히 변화됐지, 완전히 이거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정반대로 변화되지 안했습니까?  요것이 하필 송구영신하는 그 절기 때에 된 것이 뭐이냐? 요렇게 옛것은 삼십팔  년 된 환자의 비참한 그런 것은 다 없어지고 완전히 나음으로 말미암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요 새로와지는 요것이 있다,  신약 교회 안에는 세상이 볼 때에는 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의인이라' 이렇게 보기 때문에 어데 가서 교인이라 하면 그만 벌써 다른 사람이  알기를 '가만히 보자' 교인이 아니면 그 십 배 죄를 지어도 '그뭐 다 사람이  그럴 수 있는데' 인정하고 이해하고 다 관용하고 동정하고 이라는데 예수만 믿는  줄만 알면 '예수 믿는 게 저렇단다' 해 가지고 그만 그래 버립니다.

 이 사람들이 채 그렇게 욕을 하느냐 하면은 예수 믿는 사람은 깨끗한 줄 알고  또 예수 믿는 사람은 뭐 절대적인 그런 소망에 넘치는 희망을 가지고 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살고 있는 줄로 그들이 선인적 관념을 그래 가지고 있는데  실상을 대해 보니까 그렇지 않으니까 그들이 놀라서 욕질도 하고 자꾸 앉아  수군거린다 그거요.

 이래서 교회 안에는 이런 환자들이 있다. 이러니까 나는 교회 다니는 것으로서  만족할 게 아니라 나는 어떤 환자냐 하는 좀, 자기가, 여기 성전에는 각양  환자들이 있으니까 '나는 혹 환자가 아닌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생각해서  깨달아야 된다는 것을 여기에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일 삼십팔 년 된  환자에게 와 가지고 묻기를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할 때에 '낫고자 하다니요?  왜 내가 병신입니까? 왜 나한태 무슨 나를 병신 취급합니까?' 그라면 예수님께서  참 미안할 일이지 제가 병신이 아니라고 딱 달라붙는데야 그걸 뭐라고 말하겠어?  그거 우리가 생각해 보면은 벌써 '나는 환자 중에도 제일 가련한 환자이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라니까 거기에서 희망이 생겨졌지 제가 병  없고 성한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거는 예수님 만나 가지고 이런 은택을 입을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자기가 아무리 또 병신인 줄 알았다 할지라도 낫고자 하는  마음만 없어도 또 헛일 됐을 것이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여기에는 이 마당에는 자기가 병신인 줄 아는, 그 병을 아는 것이 뭐.

예수님 만나면 전부 어떤 병이라도 다 완전히 치료가 되는 것'쇠니까 자기가  어떤 병이 있다는 그 병을 찾아서 자기 병을 아는 것이 첫째 중요하고,  둘째로는 또 '이 병을 주님이 낫아 주실 거니까 주님으로 말미암아 이 병이  낫게 해 주시면 고맙겠다' 하고 낫기를 원하는 또 요게 있어야 하겠고 병 있는  줄 알아야 되겠고 낫기를 원하는 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낫아 주실 때에 나음을 받으면 될 거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제일 첫째 일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자기의 병을 자기가 바로 알아  가지고 병 있는 그것을 아는 것이 첫째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속에 아무도  모르지마는 나만 아는 대로도 흉측한 욕심이 들어 있다. 더러운 성질이 들어  있다. 나는 못쓸 인인 관계에 더러운 교제가 들어 있다. 나는 지금 안 된 더러운  욕심이 있어서 지금 경제적으로나 사업적으로나 그 흉측한 참, 도야지라고 할  만치, 개라고 할 만치, 사나운 맹수라고 할 만치, 배암이라고 할 만치,'  OOO장로가 그때 언제 심령에 대해서 그림을 그려 가지고 한 걸 저한테 한번  가져왔는데 보니까 거기에 뭐 속에 배암도 들었고 뭣도 들었고 꽉 들어 있는데  그림을 그렸는데 아주 그 잘 생각해서 그렸다고 제가 봤습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는 그런 걸로 말한 거와 같이 이 예루살렘 솔로몬 행각에는  수많은 환자들이 가득 찬 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환자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  그래도 희망이 좀 있고, 환자라고 알아도 '뭐 환자면 환자지 누가 나를 낫아 줄  자가 있어!' 하면서 나을 소망이 없는 사람이면 헛일이라 환자인 걸 알고 이제  낫고자 하는 소원이 있고 그 다음에는 나을 수 있다는 확실한 소망이 있고,  환자인 줄 알고 또 낫기를 원함이 있고 나을 수 있다는 그 소망이 있고 이라고  난 다음에는 그만 주님이 낫아 주실 때 나으면 될 것이라 그거요.

 이래서, 기독교라 하는 것은 껍데기 다 예수 믿는다고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는 가운데서 속에는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각종의 그 죄악으로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는 그것을 주님이 아시고 우리에게 요런 계시를 해  주셨습니다.

 이러니까, 오늘밤도 지금 이 밤은 무슨 밤이냐? 송구영신의 밤입니다. 옛것은  옛것으로 다 청산해 버리고 새것이 될 수 있다는 이 송구영신의 오늘밤이 우리가  다 돼야 되겠습니다. 어데까지 됐든지, 아무리 자기가 성자같이 됐다 할지라도  또 보면 고칠 게 있습니다. 또 보면 고칠 게 있고 또 보면 깨끗해질 것이 있고,  이러니까 우리는 죽는 날까지 자기에게 있는 병을 발견하는 것이 이것이 첫째  중요하고,  또 둘째로는, 이 병을 고쳐서 좌우간 내가 이 병을 고쳐서 이제 이 병 없는  사람이 돼야 되겠다, '이 병을 고쳐서 인간병 인격병, 인간병 이 병을 고침을  내가 아무래도 받아야 되겠다, 이거 고쳐야 되겠다.' 요것을 가져야 되겠고,  이제 주님은 우리를 치료하러 오셨으니까, 오늘 저녁에 이 말씀만 해도 주님이  고쳐 줄라고 오셨으니까 주님에게 고쳐 달라고 간청을 해야 되겠다 하는 요게  셋째로 있어야 되겠고.

 넷째로는, 주님에게 간청하면 주님이 고쳐 주신다 하는 절대 의심없는 소망을  가져야 되겠고, 그라고 난 다음에 다섯째는 뭣만 있으면 됩니까? 다섯째는 뭣만  하면 됩니까? 다섯째는 뭣만 있으면 되지? 시키는 대로 순종하면 돼. 일어서라  할 때 일어서면 돼. 일어서면 돼. 요 틀림이 없는 요 순서입니다. 요 다섯  가지가 있으면 됩니다. '일어서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거는 과거에는 뭐  천사가 내려와서 할 때에는 기다렸지만, 그런 것은 한 사람 들어가면 낫는  것이지 그 외에 사람은 들어가면 낫지 안하지마는 주님에게는 뭐 몇이든지 천  명이고 만 명이고 달라붙으면 다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낫는 그 방편은 여기에 딱 계시하기를 '일어서라, 자리 들고 걸어가라.'  요것뿐이라 그만. 그라니까 그만 돼 버렸어. 주님이 일어서라 할 때에 그망  의심하지 안하고 일어서니까 일어서져 버렸어. 또 자리를 들라 할 때에 드니까  또 그만 들려 버렸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은 이 성경을 기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근 이천 년 전에 기록한 말씀이지마는 이 말씀은 언제든지 이 말씀  안에 내재해 계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기 때문에 내가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는 바로 그 시간 주님이 나에게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 시간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요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래서 내가 그전에는 여기 서부교회 와 가지고도 한 십 년 동안은 늘 말씀할  때에, '오늘 밤에는 요한복음 5장 1절 말씀을 가지고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요한복음 5장 1절로부터 읽었습니다. 이래 그것을 한 아마 한  십오 년이나 내가 그렇게 계속해서 말을 했을런지? 이라다가 지금은 인제 그 말  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벌써 인식이 많이 되고  이랬기 때문에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이  말씀은 이 시간 주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이라 하는 것을 믿는 요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했지만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야 그거 뭐 그대로  한다고 일어서집니까? 안 일어서지지요. 안 일어서 지지마는 주님이 와 가지고  '야 일어서라' 할 때 '예' 일어서니까 일어 서버렸어 또 '자리 들어라' '예'  하고 자리 드니까 들렸다 말이오. 요 시간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친히 말씀해  주시는 요 사실을 믿고 자기가 읽을 때에. 읽을 때에 '요 말씀은 주님이 직접  나에게 하신 말씀이니 이제 요 시간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요 말씀에 내가  요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고 할 때는 거기에는 측량 못할 지극히 큰 능력의  역사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 성경이나 또 지금도 뭐 이 일들이 많이 있는데 이번에도 사람병  고친 게 더 큰데 사람병 고친 것이 대구에서 많을 것입니다. 왔던 사람들은 다  사람병을 다 고쳤을 것입니다. 제가 말 들어 보니까 이 교파 저 교파에서 온  사람들이 거기 가 가지고 뭐 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이제 자기가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깨달음 가지고 새로운 그런 욕망을, 가지고 출발하는 그런 사람이  뭐 거의 다라고 그렇게 할 만치 그렇게 된 그것도 양이 크든지 작든지  종류로서는 다 병 고친 것입니다.

 이래서, 언제든지 주님 말씀을 자기가 읽을 때에 들을 때에 주님이 친히 이  시간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 요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일어서라' 하는 그  말씀과 내가 읽을 때에 그 말씀은 꼭 같은 말씀이라. 주님이 나에게 직접 말씀한  요것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에는 지금도 그때와 꼭 같은 능력이 역사합니다.

 이래서 그대로 순종하니까 일어나졌고, 자리 들고 걸어가라는 것은 이제는  과거와 정반대입니다.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말고 과거는 다 청산해 버리고 새  걸음으로, 다시 그뭐 자리 거기 가서 앉아서 그런 구걸하는 그런 짓 하지 안하고  다시는 그 자리 앉지 안했어. 이제 그놈의 자리를 들고 갔어.

 그래서, 오늘밤에는 간단하게 그저 주님이 직접 '일어서라 자리 들고 걸어가라'  하는 요 말씀을 주님이 하실 때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즉시 그 말씀 듣고  그대로 하니까 성공이 돼졌어. 요것을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하는 요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제일 중요한 거. 우리가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는 주님이 직접 그  시간에 나에게 말씀해 주신 요걸 믿는 믿음으로, 주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신  거라, 그뭐 우리가 공연히 끌어다 붙인 게 아니라. 우리가 암만 성경을 외워도  자기가 믿지 안하면 안 되고 언제든지 외운 말씀이라도 지금 자기가 외우면서  '이 시간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 하는 요것을 믿고 그대로 순종할 때 그  능력이 역사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요 사실을 믿는 거기에서 능력이 발동되는  것이지 주님이 옛날 우리에게 하나 성경으로 기록해 주신 말씀이니까 우리는 이  성경으로 읽고 봐야 되겠다 하는 데는 능력이 안 나와 주님이 이 시간 인격,  생존하신 인격이신 주님이 친히 나에게 말씀한 요것을 내가 믿고 자기가 순종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가 가지도록 그  중요성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한 가지 더 가질 것은 여기에 보니까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라니까 병자가 대답해  말하기를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고 또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나이다' 이러니까 그 사람이 '나는 이 행각  가운데에 환자 중에 제일 중환 자입니다.' 하는 그것을 제가 고백을 했다  말이요. '제일 중환자이기 때문에 나는 희망이 없습니다. 또 나를 도와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거기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거 내가  이거 아주 굼벵이같이 구불러 갈라 하는데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가  가지고 벌써 낫고 하기 때문에 아무도 안 가면 내가 그래 구불러 가도 가는 사람  하나도 없고 나 하나뿐이면 내가 구불러 가도 내가 첫째 들어가서 나을 것인데  나보다 먼저 발등치기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헛일입니다.' 이렇게 말했어.

 이렇게 말을 하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에는 기록이 안 됐지마는 '네가  그런 말 하지 말고 일어서서 자리 들고 걸어가라' 이랬지. '그래? 다른 사람이  너보다 먼저 가서 그만 너를 방해를 하네. 또 다른 사람이 도와 주지를  아니하네. 그거 큰일이다. 또 네가 그래 모든 사람 중에 제일 중환자다.' 이런  저 다 필요 없고 다 치우고 '일어서서 자리 들고 걸어가라'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병든 거 뭐 사업에 병든 것이든지, 또 자기의  무슨 신체적병이나, 또 가정의 병이나, 뭐 이 정신병이나, 자기 모든 학업의  병이나, 뭐 병이 우리에게 꽉 찼지않습니까? 그런 어떤 병이라도 상관 없어.

어떤 병 어떻게 중한 병이라도 상관없다 하는, 예수 앞에서는 상관 없다.

믿음으로 해결하는 데에는 어떤 종류의 병 이라도 그 병의 도수가 어떻게 극도로  강하고 심해도 상관이 없다. 어떤 병이라도 병의 도수가 어떻게 돼도 상관 없다.

하필 제일 중환자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온 것은 뭐이냐 하면은 제일 중환자가  됐으니까 그보다 덜 중한 자는 으례히 될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주님의 은혜로 이 모든 치료를 받는 데에는  우리의 모든 병든 거, 몸에 병든 거나, 인격에 병든 거나, 도덕에 병든 거나  무슨 사상병든 거나, 또 행위에 병든 거나, 무슨 경제나 사업이나 이런 거 병든  거 어떤 병이라도 다 병은 병입니다. 병의 종류가 뭐 많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병이라도 예수님 앞에 나온 데는 상관 없다. 어떻게 그 병의 그 도수가 아주  극심하고 높아도 상관없다 요걸 하나 우리가 꽉 잡아야 되겠어. 상관없다.

상관없다 어떤 병이라도 관계 없고 어떻게 중환자라도 상관없다 요것을 우리가  꼭 믿고 잡아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내가 이와같이 하는 데에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 아무도 안  도와 줘도 좋습니다. 누가, 우리는 마귀에게 유혹받아서 주님 한 분이면  해결되는 것이지 뭐 사람의 도움이, '이거는 징계의 도움이 있어야 된다,  자본주의 도움이 있어야 된다, 배경의 도움이 있어야 된다, 뭐 가족들의 도움.'  뭐 그거 필요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도움 아무것도 없어. 그런 게 필요 없어.

도움이 아무것도 필요도 없고, 또 '이걸 내가 이래 할라면 누가 방해하겠다'  방해도 그거 아무 방해해도 상관없다. 돕지 안해도 상관없다. 네가 어떻게  극단의 아주 중한 가장 희망 없는 비참하고 가련한 자라도 상관없다. 요 세 가지  문제를 주님이 다 모두 다 부정하라고 이것을 '그런 걸 상관 없다' 이 말 안  해도 거기 기록은 다 할 수가 없으니까 안 해도 '자리 들고 일어서 걸어가라' 한  요 순서를 보면은 그때에 주님이 '그런 말 하지 마라. 네가 믿으면 되는 것이지  남이 안 도운다고 무슨 믿음이 상판없으며, 다른 사람이 또 방해한다고 믿음에  또 방해가 될 것이며, 또 아무리 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이게 이 세 가지.

 그래서, 오늘밤에 지금 말씀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요 강직할 것은 뭐이냐?  언제든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자기가 읽든지 듣든지 할 때에 이 시간 살아  계시는 대주재이신, 사활의 대속을 하신, 대주재이신 대속을 하신 이 주님!  언제나 밤이든지 낮이든지 언제든지 좋아요.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을, 성경을  자기가 읽든지 듣든지 하면서 '주님이 직접 나에게 말씀하신다' 요걸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직접 말씀 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그랬지만 내게 대해  주님이 직접. 내가 성경을 읽을 때에 주님이 직접, 내 눈에 보이지 안해 그렇지  나를 대속하신, 사활의 대속하신 주님이 직접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내가 읽고 싶으면 읽는 줄 압니까? 아니오. 읽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벌써 분위기를 만들었고, 또 성령이 오셔 가지고 우리 영을  일으켰고, 성령과 우리 영이 또 합작이 돼 가지고 주위 환경을 만들고 우리  마음을 일으켜서 성경을 읽도록 성경이 보고 싶도록 하는 데는 얼마나 순서가  많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이것도 제가 읽고 싶으면 읽고 듣고 싶으면 듣고  예배에 참석하면 참석한다고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오. 하나님이 그런 분위기를  다 만들어 가지고 억지로, 참 뭐라 할까? 이런 똑 쇠뭉텅이 끌듯이 억지로 끌어  가지고 우리가 성경을 이렇게 읽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간단히 읽고  싶어 그런 게 아니고.

 이러기 때문에, 그래 공연히 안 그런 걸 그렇게 인정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암만 내가 성경을 외우는 사람이라도 읽을 때에, 제가 외우든지 읽을 때 성경  말씀을 읽든지 외우든지 자기가 생각하든지 설교 말씀 듣든지 할 때에 그때에  주님이 직접 친히 그 시간에 주님이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요것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걸 믿지 안하면 주님을 부인하고 마는 거라. 주님이 와서 나에게  지금 문서에 있지마는 문서에 있는 말씀을 나에게 말씀 하고 계시는데 내가  문서만 보고 말씀 하고 계시는 주님을 부인해 버리니까 주님이 나에게 역사할  수가 없는 거라. 주님이 나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말씀이니 '예, 주님, 이렇게  주님이 말씀 하셨으니', 주님이 친히 직접 말씀하시는 요 사실을 자기가 인정  하는 요 마음 가지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내가 요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요대로 순종하면 되리라는 것.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것, 자기가 그대로  순종하면 된다는 것, 요것만 가지고 순종하면 돼. 요 서이만 하면 그만 돼 버려,  뭣이라도. 그걸 우리가 믿는 게 제잎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뭐이 중요하냐? 그  다음에는 방해하는 그런 것을 미혹받지 안해야 됩니다. 그 모든 다른 주위  환경에 여건 있는 그런 것을 미혹받지 안해야 돼. 내 암만 자체가 어떻게 중한  환자라도 상관 없어. 이 가운데 제일 불행스러운 사람이 제일 행복스러긋  사람으로, 정반대로 이 가운데 제일 불행스러운 사람이 제일 행복스러운  사람으로 완전히 돌변할 수 있는 그것이 기독교라 그거요. 그걸 여기에서 보이고  있어요. 누구든지 요 믿고 그대로 하면 다 돼져. 아무리 중해도 상관없고, 다른  돕는 사람 없어도 상관없고, 방해해도 상관없고 그거는 믿으면 돼.

 주님이 직접 말씀해 주시는 그 말씀인 그 말씀을 듣고 주님이 말씀 하시니까  주님이 일어서라 하는데, 일어서라 하는데 내가 일어서도 안 되면 일어설라고 할  때 일어서지지 안하면 그 책임이 뉘게 있어? 주님에게 있어. 일어서라 했는데  내가 일어설라 해도 일어서지지 안하면 그거는 주님에게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거짓말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일어서라 했으면 일어설 수 있기 때문에  일어서라 하신 것이지 일어서라 했는데 저는 일어설라고 일어서는데 안  일어서지면 그거 주님이 헛된 말 한 것 아니겠소? 주님은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지 않는 주님이시라 말이오. 요게 중요한 비결이 있어요.

 광고합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고, 또 실천 실행해서 경험을 가지고  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지 말고 하고, 새벽기도 빠지지 말아요. 또 은사  위치에 있는 분들은 자기에게 맡겨 주신 양떼를 마음 속에 품어 놓고 기르도록  하고, 어떤 부모는 그렇게 말해요. 내가 말하기를, '그거 좀 그런 거 좀 금지를  시켜야지 안 됩니다.' 이라니까 말하기를, 아니오. 요새는 개방을 해야,  개방식으로 길러야 이거 딸을 치워먹지 개방식으로 기르지 안하면 딸 치워먹지  못한다고 어떤 집사가 나한테 말해.

 개방식으로 해 봐라. 개방식으로 되는가 보자. 개방식으로 해 봐야, 개방식대로  해 가지고 되는 것 하나도 없어. 저거 몸만 더럽히고 행복만 다 깨뜨리고 말았지  개방한다고 되는 줄 압니까? 그런고로 이 통계가 첫 연애가 결혼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치 다 마귀의 유혹을 받는 거라.

 그러니까 깨끗이 살아요. 공연히 뭐 남반사들 그라면 자기 신세 가고 여반사들  그라면 자기 신세 가고 또 성혼한 사람들도 그 잘못하면 다 자기네들 다 신세  가는 것이지 아무 유익이 없어. 오늘밤에 배운 말씀을 기억하면서 즘 삼십팔 년  된 환자가 일어나는 거와 같이 요런 기적이 좀 나타났으면 좋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가십시다.

 안 믿으면 소용 없어.

 


선지자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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