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7교회-에베소교회-처음사랑

 

1987. 10. 2. 밤 (금)

 

본문: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여게 제일 중요한 것은 에베소 교회가 버린 처음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이 제일 중요한 것을 전장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첫째로 행위가 훌륭하고, 또 수고가 훌륭하고, 또 참고 견디는 계속성이 훌륭하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함이 훌륭하고, 또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를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이 훌륭하고, 또 네가 참은 것이 훌륭하고, 또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딘 것이 훌륭하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 훌륭합니다. 다 이렇게 훌륭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면 이렇게 훌륭한 행위가 있지만, 이 처음 사랑이 뭐인지? 이렇게 훌륭한 행위가 구비하지만 처음 사랑 버림에 대해서 이 훌륭한 행위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처음 사랑이 무엇인지? 이렇게 훌륭한 행위를 했지만 주님은 그 행위를 인정치 아니하고 다 버려 버립니다. 이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 훌륭하고 구비한 신앙 생활을 했다 할지라도 처음 사랑 버리면 주님은 그까짓 거 아무것으로도 보지 안하고 다 던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이 처음 사랑 이게 뭐인지? 또 그렇게 훌륭한 행위를 했지만 칭찬은 하나도 없고 책망뿐입니다. 훌륭한 행위를 했지만 칭찬은 없고 책망뿐입니다. 그러면 이 처음 사랑 이것이 뭐인지 이것을 똑똑히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또 “이 처음 사랑의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를 옮긴다 했습니다.

그러면 처음 행위가 뭐인데? 처음 행위 버리고 보니까 아무리 훌륭한 행위를 했지만 주님은 그것을 뭐 한 내끼도 인정하지 않고 다 책망뿐입니다.

또 이렇게 훌륭한 행위 했지만 촛대를 네게 옮기겠다. 촛대라 말은 1장에도 많이 말했는데 이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를 상징해서 촛대라 그렇게 말씀했는데 교회를 옮긴다 말입니다. 교회를 없애버린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 보기에는 교회가 있지만 참 교회는 없애버린다 그 말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으면 참 교회는 없애버리겠다. 내가 그 자리에 교회를 두지 않고 교회를 딴데로 옮기겠다, 그 자리에는 그 교회를 없애겠다, 그러면 교회를 없애겠다,에베소 교회는 교회를 없애겠다 그 말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교회를 없애겠다. 이거 참 아주 중요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이기는 그에게는” 이긴다는 것은, “네가 처음 행위를 가지라”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는데, 그 다음에는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러니까 행위 이꼬르 사랑, 사랑 이꼬르 행위, 사랑이란 말이나 행위란 말이나 같은 것을 여게다가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랑과 행위가 둘이 딴것이 아니라 둘이 내나 같은 것인 것을 여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기는 자는” 하는 것은 처음 사랑을 가진 자, 또 처음 사랑을 버렸던 자가 이제는 처음 사랑의 행위를 가지는 자 그것을 가리켜서 이기는 자라 한 것입니다. 버린 사랑을 찾고 곧 버린 행위를 찾아라. 버린 행위 찾는 것이 이기는 것이요 버린 사랑 찾는 것이 이기는 것인데 버린 사랑이나 버린 행위나 같습니다.

그러면 밑에는 행위라고 말했고 위에는 사랑이라고 말했고, 그러면 사랑이라는 말이나 행위라 말이나 꼭 같은 말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자는 처음 사랑을 도로 찾고 또 그 처음 행위를 도로 찾아서 가지게 되면, 처음 행위를 가지게 되면 무슨 효력이 있느냐? “내가” 하는 건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한다”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 먹으니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낙원에 거처한다 그 말입니다. 그 사람의 거처가 하나님의 낙원이라. 그 사람의 처소가 하나님의 낙원이라. 하나님의 낙원에 산다 말입니다.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산다” 그러면 하나님의 낙원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요, 곧 다른 말로 말하면 천국이요, 하나님과 같이 동거 동락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낙원” 하나님과 함께 사는 낙원,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낙원.

“낙원에 있게 되고”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생명나무의 과실이라. 그러면 생명나무의 과실이라, 우리가 다른 데에서 “없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이라”고 그렇게 다른 성경에서 우리가 많이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는, 이 나무라 말은 비유인데 “생명나무라” 생명은 뭐이 생명인가?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될 때에 연결된 그것이 생명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된 그 연결이 생명이요 하나님과 사람과 절단되는 것이 그것이 사망입니다.

그러면 생명나무라 그 말은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을 가리켜서 생명나무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한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의 결과로,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의 결과로 맺어지는 그것을 네가 양식으로 먹을 것이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의 결과를 네게 주어서 먹게 하겠다.

그러면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 가지고, 하나님과 연결된 연결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 열매 먹는 것입니다. 그 양식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할 수 없는 큰 참 축복입니다.

네가 처음 사랑을 버렸으므로 “어데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이 떨어졌다 말은 공중에서 뚝 떨어졌다는 그 의미보다도 연결이 끊어졌다 하는 그 의미가 더 강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니까 필연적으로 또 타락입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네가 타락했다. 그러면 이 처음 사랑을 버리면 하나님과 연결 끊어져 타락되고, 연결이 끊어져서 떨어지고 타락되고 부패해지고, 떨어지고, 또 연결이 끊어진 이 연결을 어서 이어야 되지 잇지 안하면 촛대를 옮기겠다, 교회를 없애겠다 했습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없애겠다 그 말은 구원을 없애겠다 하는 그 말입니다. 이것은 해석을 다른 사람이 암만 다른 해석을 할라 해도 하지 못합니다. 촛대를 옮기겠다 하는 말은 곧 세상 빛을 옮기겠다, 곧 구원을 옮기겠다, 너희의 구주를 옮기겠다, 생명이 옮겨지니까 빛이 없습니다.

이래서 너에게 영감의 은혜를 제거할 것이고 진리의 은혜를 제거할 것이고 주님의 피공로의 은혜를 제거해서 너는 영 구원만 얻고 있지 이 심신의 건설구원 영광구원 행위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경을 볼 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처음 사랑을 버린 자에게는 이 두 가지가 없어집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자에게는 이 두 가지가 없어집니다. 또 이 처음 사랑은 버릴 수도 있고 또 제가 가질 수도 있습니다. 버릴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다고 여게 말했습니다.

버릴 수도 있고 가질 수도 있다. 이 처음 사랑은 제가 버리려면 버리고 가지려면 가질 수 있다. 요거는 궁극적은 다 하나님이 주권이지만 요게는 순전히 사람이 버리려면 버리고 취하려면 취하고 자유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똑똑히 밝혔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제가 찾으려고 애를 쓰니까 찾아지고, 제가 무시해 버려 버리니까 버려지고, 또 제가 안 버리고 가지려고 애를 쓰니까 가져지고, 사람이 하니까 되어지는 것 같고 안 하면 안 되는 것같이 그렇게 보여지는, 인간의 그 유한한 주권이지만 인간의 주관 주권을 여게다 두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이 뭐인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될 것은 처음 사랑을 버리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버린다. 이것도 큰 일 아닙니까? 또 처음 사랑을 버리면 교회를 없애버린다. 너는 교회가 안 된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와 자기와 하나가 될 때에 교회가 되는 것인데 촛대를 옮겨서 교회를 없애버리니까 피공로의 역사도 없고 영감 역사도 없고 진리 역사도 없고 모든 성도들이 협동해서 협조하는 모든 협조의 은혜도 없고, 그러면 피의 은혜가 없고 영감의 은혜가 없고 진리의 은혜가 없고 모든 성도의 협동하는 은혜가 없고, 이러니까 너는 교회가 아니다.

완전히 교회를 네게서 옮겨서 너는 교회 없는 자가 된다, 너는 교회가 아닌 자가 된다 하는 말이니 이 말씀은 곧 우리에게 나타나 있는 교회는 기본구원, 영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있는 교회들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영 구원을 얻은 그 증표로 행위구원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원료를 받는 것인데 행위구원을 이룰 수 있는 온갖 구비한 은혜는 받았지만 행위구원을 이룰 수 있는 행위구원의 역사의 구원 은혜는 없다 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간단하게 말해서, 네가 처음 사랑을 버리면 하나님과 너와는 연결이 끊어져 연결이 없다. 하나님과 너와는 연결이 없어진다. 또 하나는 네게는 건설구원이 없어진다.

촛대 옮긴다 말은 여게 나타난 촛대는 교회를 말한 것인데 이 교회는 건설구원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뭐 기본구원 영 구원을 보수하는 그 교회가 아니오. 이는 순전히 심신의 건설구원 행위구원을 이루는 교회지 영 구원 기본구원을 보수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뭐 보수를 이거 제가 보수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 안 하나 영 구원은 튼튼하게 영원 불변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교회는 건설구원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첫사랑을 네가 버리면 하나님과 너와는 연결이 완전히 끊어져 버린다. 완전히 끊어진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다. “어데서 떨어진 것을” 하나님과 너와 연결이 뚝 떨어져 가지고 툭 타락하게 된다. 또 네게 건설구원은 하나도 없다. 이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요 두 가지. 처음 사랑을 버리면 이 두 가지가 네게 없다.

또 이 처음 사랑을 가지게 되면은 무엇이 있게 되느냐? 처음 사랑을 도로 찾아 가지고 가지게 되면은 뭐이 있게 되느냐? 7절에 내리읽어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이기는 그에게는” 이기는 그에게라 말은 버린 첫사랑을 찾는 자라 그 말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버린 처음 사랑을 다시 찾는 자, 버린 첫 행위를 다시 찾는 자, “처음 행위를 가지라” 이래,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행위를 찾는 자,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찾는 자, 그러면 처음 사랑을 찾는다는 말이나 처음 행위를 찾아 가지는 것이 버린 사랑을 찾아 가지는 것이오.

이러니까 요 사랑이라는 말씀과 행위라는 말씀이 하나라 하는 요것을 꼭 잡아야 됩니다. 사랑이라는 말씀과 행위라는 요 말이 둘이, 처음에는 사랑이라 해 놨고 그 다음에는 두번째는 행위라 했지만 내나 그 말이 그 말이라. 곧 사랑이 행위요 행위가 사랑, 사랑을 행위로도, 우리들로 하여금 알기 쉽기 위해서 사랑을 행위라고 말해 놓고 또 행위를 또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도로 찾은 자를 가리켜서 이긴 자라고 말했는데 이긴 자는 뭣 주느냐?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이기는 자, 이 찾는 자는 하나님의 낙원에 살게 된다, 하나님의 낙원에 살게 된다.

“네가 지존자를 거처로 삼았으므로 이런 재앙들이 네게 이르지 못한다. 천인 만인이 네 곁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들이 너에게 가까이 오지 못한다. 낮에 흐르는 살과 밤에 역사하는 이 모든 밤낮으로 역사하는 그 재앙들 그런 것들이 너를 해하지 못한다.” 사람을 걸려서 삼키려고 인간 멸망시키는 그물을 악마의 마귀가 총총 그물을 쳐 놓고 있지만 그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낙원 생활 한다”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았다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안에 살게 된다. 하나님과 동거 동행 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과 첫째 동거하게 된다, 하나님과 같이 살게 된다 그것을 가리켜서 “낙원에 있는 과실 먹으리라” 낙원에 있기 때문에 낙원에 있는 과실을 먹지 그리 안 하면 뭐 줍니까? 첫째 낙원에 있고, 낙원에 살게 되고, 같이 한 자리에서 사나 사람 보기에는 한 자리에 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낙원 생활에 있고 하나는 지옥 생활에 있고, 이러기 때문에 두 여인이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밭에서 일하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자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이것 다, 일하는 것도 말해 놓고, 거처하는 것도 말해 놓고, 농사 짓는 것도 말해 놓고 이랬는데 통틀어서 말하면 낙원에서 농사 짓는 사람, 낙원에서 일하는 사람, 낙원에서 자는 사람, 이것이 하나님의 낙원 안에 있는 사람과 하나님의 낙원 밖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낙원을 준다. 처음 사랑을 찾으면 낙원에서 살게 한다. 우리가 아무리 인간적으로 목사 장로 집사 권사 뭐 아무리 유명해서 총회장 노회장 총공회장 또 온갖 뭐 신학자 박사 개혁가 온갖 이름이 다 있어도 낙원 생활 못 하는 자 있습니다.

이래서 선지자노릇도 했고 귀신도 많이 쫓아냈고 또 복음도 많이 전했고 능한 일도 많이 했다 했지만 주님이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첫사랑을 찾으면, 처음 사랑을 찾으면 하나님의 낙원 생활 하게 된다 요거 말했습니다. “낙원 생활 하게 된다” 낙원에 살게 된다. 또 하나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한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한다.

그러면 생명나무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 그것을 생명나무라 요렇게 해석하는 것이 요것이 틀림없다고 보입니까? 혹 그래도 해석할 수가 있다 그렇게 보입니까? 요 생명나무는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을 가리켜 생명나무라 하는 요 해석을 그 외에 딴 해석은 없다고 보입니까 또 얼마든지 있다고 보입니까? 어떻습니까? 요거 외에 딴 해석은 다 틀렸다고 그렇게 믿어지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틀림없소. 요 외에는 다 말하면 조짜배기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서 먹게 한다” 하나님과 연결된 과실이라 말은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 그게 과실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 “과실을 주어 먹게 한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결과로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뿍뿍 행하며 온전히 이루는 그것을 가리켜서 “먹게 한다” 말했습니다. 요 해석은 틀리요 옳소? 요것은 틀립니까 안 틀립니까? 내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이 대속하신 그 대속의 공로 그 대속의 공로를 자기가 점점 연구하고 깨닫고 그 대속의 공로로 한 걸음씩 두 걸음씩 점점 더 뿍뿍 깊이 들어가고 넓게 퍼져 나가는 요것을 대속의 공로가 내게 와 가지고 역사해서 그 공로가 내게 충만히 역사해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먹는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한다. 하나님과 나와의 연결된 그 연결의 결과로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는 이루고 온전히 행한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게 분담된 내 구원과 내게 분담된 모든 사람의 구원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를 보내신 이의 뜻 아닙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 나를 두셔서 ‘이것 저것 하고 오라’ 이랬는데 그분이 맡겨 주신 하나님의 뜻,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하면 그 이상 더 뭐 성공이 있습니까? 완전 아닙니까?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한다” 너는 생명나무 과실,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 가지고 네게 해당된 모든 하나님의 뜻을,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네가 감당하고 가야 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할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을 버렸는데 이 사랑을 도로 찾으면 몇 가지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했습니까, 손가락으로? 여게는 모릅니까? 버린 첫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는데, 하나님을 첫사랑을 버렸는데 이 버린 사랑을 도로 찾으면 여게 몇 가지 준다고 7절 이하에 계약이 돼 가지고 있습니까? 몇 가지 준다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여기 대구에서 오신 양반들은 모르는가배. 몰라? 이거 참 모르면 안 됐는데. 자, 한번 뻐뜩 들어 봐요.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손가락으로. 이제 따라 들어요, 두 가지. 대구에서 오신 집사님들도 이래 들어. 둘 들어. 요래 들어. 어린 아이가 돼 가지고 부끄러울 것도 없어. 어쨌든간에 모르거든 종아리 더러 맞아 가면서 꼭 배워서 알아야 돼요. 알아야 구원이 되지 모르면 구원 안 돼.

두 가지 주시고, 이 첫사랑을 버린 것을 회개해서 도로 찾지 아니하면, 첫사랑이 처음 행위요 또 처음 행위가 첫사랑입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행위, 또 처음 사랑. 처음 행위, 처음 사랑. 처음 행위, 처음 사랑. 같은 말이라. 처음에는 처음 사랑이라 했고 그 다음에는 처음 행위라 했어. 이러니까 행위나 사랑이나 요 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이제, 버린, 제가 버린 처음 사랑, 제가 가지려고 하니까 가져지는 처음 행위.

그러면 처음 행위하고 사랑하고 두 가지가 아니라 처음 행위가 곧 처음 사랑이요 처음 사랑이 처음 행위인데 버린 처음 사랑 처음 행위 요것을 도로 찾아서 가지게 되면 두 가지 주시고 이것을 잊어버리고ㅡ아니, ‘잊어버렸다’와는 달라.

‘잊어버린' 요거 자꾸, 요거 말을 내가 자꾸 실수하는데 잊어버렸다 말은 요거 취소합니다. 잊어버린 게 아니라. 제가 버렸어. 제가 버렸어. 또 제가 찾으면 돼.

누가 뭐 뺏아서 잊어버린 게 아니고 제가 버렸어. 제가 버렸으니까 제가 찾으면 돼요.

제가 버린 것을 찾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몇 가지 행하시겠다고 했습니까? 버리고 찾지 아니한 사람에게는 몇 가지 행하시겠다고 했습니까, 몇 가지 행하시겠다고? 예, 요거 또 두 가지입니다. 두 가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뭐이요?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 이제는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겠다. 나와 너와는 뚝 떨어지고 상관하지 않겠다. 요거 처음 사랑 버리고 찾지 않는 자에게는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똑 떨어지고 상관 없습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떨어집니다.

또 하나는 뭣 됩니까? 또 하나는 뭣 되지요? 촛대를 옮긴다. 촛대는 이 촛대 말이오. 불켜는 촛대. 불켜는 촛대 말입니다. 촛대는 이 계시록에 뭘 가리켜서 촛대라고 합니까? 교회를 가리켜 촛대라는 그 해석은 다 맞습니까? 이의가 없습니까? 촛대를 옮긴다는 말은 그것은 교회를 옮긴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옮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중생된 것은 믿고 난 다음에 중생되는 것 아니고 중생되고 난 다음에 믿습니다. 이렇는데, 중생된 자가 믿는 교회 생활은 영 구원을 위해서 합니까, 천국 가기 위해서 합니까 건설구원 성화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합니까? 일호입니까 이호입니까 삼호입니까? 손가락으로 들어 보이소. 일호입니까 이호입니까 삼호입니까? 뻐뜩 좀 높이 들어 봐요, 저 뒤에 모르는 사람 좀 알도록. 이래 이래. 뻐뜩 들어 봐, 이래. 그래.

촛대는 불켜는 등대라고도 하고 촛대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교회를 옮긴다. 교회를 옮긴다 하는 말은 뭣을 옮긴다는 말입니까? 저 ○○교회 전도사 말해 봐. 촛대 옮기면 뭐이 안 돼? 엉뚱한 거 생각하고 있었구만. 구원이 안 돼? 뭘 구원이 안 돼, 구원이 안 되기를? 왜 구원이 안 돼? 촛대 옮기면 뭣이 안 돼요? 저 ○○○교회 집사님? 지금 교회는 건설구원 성화구원 영광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옮긴다는 말은 너에게는 건설구원 성화구원 행위구원 영광의 구원은 없다 그 말입니다. 맞습니까? 해석 틀려요? 굳게 잡아요.

이러니까, 처음 사랑 버리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뺏들어 버리고 버린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다시 찾아 가지면 하나님께서 두 가지 주시고, 이 사랑을 버리면 두 가지 뺏들고 버렸던 사랑을 도로 찾아 가지면 두 가지 주시고, 이거 맞아요? 자, 또 한번 복습합시다. 처음 사랑이 곧 처음 행위인데 처음 사랑을 버리면 주님이 몇 가지 뺏드시요? 손가락으로? 두 가지 뺏드시고, 또 버렸던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다시 찾아 가지면 몇 가지 주신다고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녜, 잘 알았습니다. 잘 알았어.

그러면 이제 문제는 이렇게 처음 사랑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 중요한데 이 처음 사랑을 해석을 잘못 하면 큰일 나. 아무나따나 꿰어 맞춰 가지고 되는 거는 아니라 그 말이오.

이런데 이 처음 사랑을 이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은 주 한테 주 모아 놓으면 다 알 수가 있어요. 처음 사랑이 뭐인지? 하나님과 끊쳐진다 하니까 그거 있으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거 없으면 하나님과 끊쳐진다 하니까 그거 뭐일까요? 뭐이겠어? 그거 있으면 하나님과 연결되고 그거 없으면 하나님과 끊쳐진다 하니까 그거 뭐일꼬? 뭐이겠어? 짐작할 수 있습니까? ○조사? 그건 틀림 없지요? 주님의 대속 그 외에 딴것이야 아무 게 없어도 주님의 대속만 있으면 하나님과 끊쳐지지 안하는데 처음 사랑 버리면 하나님과 끊쳐진다고 하는 것 보니까 그거는 대속밖에는 없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또 촛대는 건설구원을 이루는 교회인데, 건설 성화구원을 이루는 교회인데 이 처음 사랑을 버리고 다시 찾지 아니하면 교회를 옮겨버린다. 건설구원을 이루는 교회를 네게서 없애버린다. 그러면 그게 뭐일까? 뭐이 없어져야 우리에 건설구원이 없어질까? 예? 뭣을 없애면 우리에 건설구원이 없어지겠습니까? 생각을 해 봐요.

자, 없애서 우리 건설구원이 안 되는, 없애서 우리 건설구원 안 되는 것이 뭐입니까? 무엇을 없애면 우리의 건설구원이 안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이 대속 공로 그 외에 딴거 있습니까? 대속 공로 그 외에 딴걸 없애서 우리 건설구원 안 될 수 있습니까? 아니오. 대속 공로만 있으면 우리 건설구원은 아무도 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두 가지 해석이 단단히 되지 안했습니까? 됐지.

또,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 자, 처음 사랑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 했으니까 처음 사랑이 뭐일까? 하나님의 낙원에는 뭣이 있어야 하나님의 낙원에 가서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낙원 생활은 뭣이 있어야 하나님의 낙원 생활 할 수 있습니까? 돈이 있어야 되겠소, 세상에 문화 있어야 되겠소, 과학 있어야 되겠소, 지식 있어야 되겠소, 용모가 있어야 되겠소, 훌륭한 행위가 있어야 되겠소? 뭐 있어야 되겠어? 뭐 있어야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거 생활 할 수 있을런지? 뭐 있어야 하나님과 동거 생활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한번 생각해 봐요.

뭣이 있어야 하나님과 동거 생활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거 생활 할 것이 뭣이 있으면 동거 생활 할 것인지 좀 한번 찾아서 자꾸 한변 생각해 봐요. 뭐이 있어야 됩니까? ○○교회 전도사님? 예수님의 구속 있으면 하나님과 동거 생활 되고 구속 외에 딴거는 다 가져도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 사랑을 찾아서 가지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 했으니까 ‘처음 사랑이 뭐인가? 하나님의 낙원? 그것만 가지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다.’ 예수님의 구속 외에 딴거 뭐 있겠소? 그렇지 않습니까? 요거 과학적으로 똑똑히 알아서 변동 못 하게 요래 알아야 돼요. 이렇기 때문에 교리는 자기의 생명보다 귀중하기 때문에 요렇게 똑똑히 알지 안하면 생명 바쳐 살지를 못해요.

처음 사랑을 찾아 가지면 “생명나무 과실 먹는다”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 생활 한다.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 생활, 그 처음 사랑을 찾아 가지면 하나님과 연결이 된다.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된다” 하나님과 연결된 결과로써 하나님의 보내신 뜻을 다 성취할 수 있다.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 고거 가지고, 연결의 능력, 연결의 혜택, 연결의 권위, 연결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해당된 모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다 이루고 갈 수가 있다.

그러면 처음 사랑이 뭐입니까? 뭐를 가져야 하나님과 연결돼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기 것 삼을 수 있습니까? 뭣이라야? 뭐 하나면 돼? 그런 것이 둘입니까 서입니까 그런 것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나와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 연결된 그 생명의 권위, 연결의 권위인데 연결의 권위를 뭣을 가지면 연결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연결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이 우주나 세계나 몇 개나 있습니까? 그 연결된, 생명이라 하는 것은 힘이라 말인데 연결된 그 완전한 힘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말합니다.

생명은 능력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다 활동 모두 해. 생명이 있으면 우리 온 전신을 다 움직여.

이러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그 권위 있는 생명으로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성취할 수 있다.

그러면, 뭣이 있어 가지고 하나님과 나와 연결된 그 생명을 가질 수 있을까? 뭣이 있으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자, 몇 개나 됩니까? 한번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몇 개나 됩니까? 하나뿐이라? 하나뿐이면 뭐인데? 하나뿐이면 뭐입니까? 하나뿐이면 뭐입니까? ○○○조사님? 그래, 그러면 맞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버리면 두 가지 없다 하는 그것도 뭣 버려야 되는가? 예수님의 이 구속 버려야 되지 딴거 버려 가지고는 그렇지 안해. 이 구속 버려야 되고, 또 찾아 가지면 두 가지 주신다 했는데 그것도 예수님의 구속 외에 딴거 가지고는 이 두 가지를 받을 수가 없어.

그러면 이 사랑은 이거는 필연적으로, 이 사랑은 절대적으로 처음 사랑이라는 이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입니까? 해석을 이리 저리 할 수 있습니까? 처음 사랑이라는 이 해석을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 한 가지 해석 외에, 예수님의 구속 외에 딴것으로는 해석할 수 없습니까 딴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없습니다, 없어. 이러면 확실히 우리가 알았다 그 말이오.

그런데 처음 사랑을 가리켜서 처음 행위라고도 말했고 사랑이라고도 말했으니 행위는 뭐입니까? 행위는 우리 마음의 움직임과 우리 몸의 움직임을 가리켜서 행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구속의 사랑이, 이 예수님의 구속 이것을 가리켜서 사랑이라, 구속의 사랑이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구속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움직이는 그 움직임은 뭐입니까? 예수님의 구속이 우리에게 와 가지고 움직이는 움직임 그것이 곧 처음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원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삼으시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됐다, 우리에게 사죄를 주셨다, 칭의를 주셨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을 주셨다, 영생을 주셨다, 부활을 주셨다,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자유의 해방을 가졌다, 하나님의 공심판에 통과됐다.

이런 걸 세밀히 몰라도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 자가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서 구출돼서 하나님 아버지 아들이 됐다, 우리는 영생하는 천국의 구원을 얻었다, 이래서,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 믿기로 척 작정하고 나니까 예수님의 이 구원을 인해서, 진리도 잘 모르면서 예수님을 척 믿기로 시작하고 나니까 예수님의 주신 이 구원을 인해서 어쩐지 기쁩니다. 어쩐지 기뻐. 예수님 믿기로 척 작정하고 나니까, 뭐 분석을 해서 기쁜 것도 아니고 어쩐지 기쁩니다. 어쩐지 기쁘고 어쩐지 감사하고 또 어쩐지 하나님이, 사랑이 딱 붙고 정이 딱 들어붙고, 자, 이거 세상에 인간도 자기 아무리 뭐 유모를 정하려 하고 양아버지 양어머니를 정해 놔도 그거 대번에 정이 안 가는데, 예수님을 척 믿고 하나님 아버지 척 부르니까 그만 아버지와 자기하고 사랑이 딱 연결이,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와의 이 연결이 딱 들어붙어지는 그런 꼴 경험한 사람 손 들어 봐요.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니까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와 아주 사랑이 연결이 딱 되는 그래, 어쩐지 하나님 아버지와 자기와의 사랑이 연결이 딱 되는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 손 한번 들어 봐,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 그런 경험 가졌어요.

예수 믿기 시작하고 나니까,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나니까 어쩐지 그만 뭐 기쁘고 즐겁고 뭐 이런 거는 그것 다 따져 가지고 이치에 그렇다는 거 아니라, 이성이 그런 거 아니라, 이성이 기쁜 게 아니고, 이성이 기쁜 게 아니고 본능적으로 기쁩니다, 본능적으로 기뻐. 이성이 기쁜 게 아니고, 놓고 따지고 이렇게 계산해 가지고 기쁜 게 아니고 어쩐지 예수님 믿어서 그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이 구원을 생각하니까 기쁩니다. 기쁘요.

또 본능적으로 하나님과 정이 딱 들어붙어서 ‘하나님 아버지’ 하면 그만 뭐 대번에 세상에 육체의 부모보다도 누구보다도 그만 하나님 아버지 하면 정이 딱 들어붙어서 아버지와 자기와가 그만 밀접하게 친밀해집니다.

이 구원을 인해서 첫째 자기에게 기쁨과 평안과 즐거움이 오고, 이러고 나니하나님 아버지에게 대해서 그만 사랑과 정이 딱 들어붙고 그러고 나니까 그 다음에 감사가 옵니다.

생각해 보니까 감사가 오고, 또 어쩐지 처음 믿는 것이 형제를 위해서 수고하고 싶고 형제를 사랑하고 싶고 형제를 사랑합니다. 사랑해 보니까 그 사랑하는 그게, 과거에는 뭘 남한테 얻어야 좋은데 사랑해서 뭘 주고 보니까 어떻게 좋은지? 그걸 뭐 형제를 사랑하고 보니까 어떻게 좋은지 기쁘고 즐거운 그런 체험을 우리가 택한 자면 다 가지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와의 관련된 첫사랑입니다.

첫사랑인데, 이것은 뭣을 마음으로가 아니고, 마음으로만이 아니고 그만 사랑의 행동이 돼집니다. 논리적으로 따져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어찌됐던간에 그만 마음이 움직이기를 이 구원을 인해서 기쁘고 즐겁고, 또 하나님 아버지와 정이 딱 들어붙고 그러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아버지에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고, 예수 믿는 이치도 잘 몰라요. 감사하고, 또 어쩐지 모든 형제에게 대해서 이 사랑에 화평이 또 역사하게 되고 만물도 사랑하게 되고, 그러니까, 과거에 보지 못하던 거, 과거에는 뺏들어야 좋고 이겨야 좋고 삼켜야 좋은데 이상하게도 본질과 본성이 변해져 가지고 봉사해야 좋고, 희생해야 좋고, 주어야 좋고, 나 기쁜 것보다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야 좋고, 이상하게도 사람이 변해진다 그 말이오. 변해져.

이것이 무슨 이성 비판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오. “아바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이걸 본능적으로 이렇게 기뻐지고 즐거워지고 참 흐뭇한 것이 뭐 만족이라. 그만 딴거 근심 걱정 아무것도 없어. 기쁘고 즐겁고 하나님 아버지와 정이 딱 들어붙고 그만 든든한 것이 어데 혼자 가다 밤에 가다 처음 예수 믿어서 뭐 아무 경험도 없는데도 이래 가다가 무서울 때, ‘아버지! 주여!’ 하면 그만 든든해진다 말이오.

아버지 하면 든든해지고 주여 하면 든든해지고 아버지와 주님이 자꾸 불러지게 되고, 또 이제 그러고 나니까 아버지와 자기와 연결이 있고 구원을 인한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본능적으로 기쁘고 즐겁고, 본능적으로 아버지와 친밀해지고, 이 생활을 한참 하고 나니까 새삼스레 그때사 아이구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게 나와요. 감사도 인제, 감사도 할 것 없이 뭐 그만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그만 만족하고 아버지와 정이 들어붙어진다 말이오.

또 그리고, 뭘 네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몸같이 해라, 또 원수를 사랑해라, 뭐 계명 보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어쩐지 그만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인간이 사랑하고 싶고, 형제를 위해서 수고하고 싶고, 봉사하고 싶고, 희생하고 싶고, 뭐 형제를 사랑하는 그 행위가 자꾸 저절로 나오게 되고 이 행위를 하고 나니까 기쁘고 즐겁더라 그거요.

이제 이것이 우리가 이 구원을 처음 믿을 때에 성령의 역사가 와 가지고 우리에게 역사해서 그분의 감화 감동으로, 성신의 감화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신의 감화 감동으로 된 것이요 이것이 주님의 대속의 피공로로 된 것이요 이것이 진리의 그 능력으로 된 것이오.

이래서 뭐 언제 봤다고, 언제 봤다고 그만 성경 말씀은 믿어지게 되고, 성경 말씀은 믿어지게 되고, 또 하나님은 내편이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싶고, 하나님을 욕하면, 하나님 욕하든지 훼방하면 그만 뭐 만정이 떨어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면 만정이 떨어지고, 생전 초면이라도, 예수 믿는 초면인데 예수 믿는다 하면, 속이라고 해도, 속이려고 해도 예수 믿는다 하면 그만 모든 게 아깝지 안하고 그만 기쁘고 즐겁고 그만 좋아집니다.

이것이 자기의 이성 비판이나 지성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영감으로 된 것이고 주님의 대속의 공로로 된 것이요 진리의 그 능력으로 가지고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믿을 때에 다 있습니다. 처음 믿을 때 다 있어요.

자, 여게서, 처음 믿을 때에 그때에 어쩐지 모르고, 뭐 철도 모르고 뭘 몰라 그런지 그만, 그거 그렇게도 생각할 거라. 어쩐지 처음 믿을 때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만족하고 그만 하늘에 소망으로 뭐 제가 다 따놓은 것처럼, 따놓은 것처럼 만족하고 기쁘고 즐겁고 주님과 정이 딱 들어붙고 아버지와 정이 딱 들어붙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만물도 사랑하고 싶고 자꾸 이렇게 해서 어쩐지 그 세계가 변해지고 자기라는 사람이 변해지는, 쑥 변해지는 그런 그 경험을 가진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경험을 가진 사람, 경험을 가진 사람은 손을 들어 봐요. 경험 가진 사람. 놔요.

이 경험 안 가진 사람 있어요? 안 가진 사람은, 그런 것을 어쩌든지 그거 경험 안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은 나는 모르는 사람이오. 그 경험을 안 가진 사람은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 그 사람은 택했는지 불택자인지 지옥 갈 사람인지 나는 모르겠어. 나는 그 사람 하늘나라 갈 사람이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정하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 말은 제가 무슨 지성으로 비판하고 평가하고 노력하고 해 가지고 가진 게 아니야. 본능적으로 가진 걸 말합니다. 본능적으로 가진 것.

본능적으로 가진 그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잊어버리게 되느냐?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이것을 본능적으로 가지게 된 것이 다른 사람이 예수 믿으라고 전도해 가지고 예수 믿기 시작할 때에, 예수 믿기 시작해서 이 구원을 생각할 때에 이 본능적인 기쁨과 평안과 이 별스러운 사람이 돼 버리고 별스러운 세계를 얻게 됩니다. 자기가 이 구원을 생각할 때. 내가 예수 믿기 작정해 가지고 이 구원, 받은 바의 이 구원, 얻은 바의 이 구원, 이 구원을 생각할 때에 그리 된 것입니다.

그리 된 것인데 그 뒤에 왜 잊어버리느냐? 잊어버리는 것은 이 구원은 가졌지만, 이 구원은 가졌지만 이제 구원을 가졌으니까, 구원을 가졌으니까 구원 받은 사람이 그래도 전도도 해야지, 구원 받은 사람이 또 성경도 읽어야지, 구원 받은 사람이 또 봉사도 해야지, 구원 받은 사람이 좀 거석하면 또 신학교도, 성경학교도 또 가서 공부도 좀 해야지, 구원 얻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봉사도 해야지, 이거 하다가 보니까 그만 자기의 시선이 보는 시선이 그만 돌아져 버렸어. 자기의 시선을 돌려버렸어. 자기의 보던 것을 돌려버렸어. 이 구원을 보지 안하고 다른 걸 봤다 그 말이오. 그러다 잊어버렸어.

이 에베소 교회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해서 견디고 게으르지 안한 것을 안다” 이 사람들 이거 하다가 보니까 그만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이거 하다 보니까 처음 사랑 잊어버렸어. 이거 하다가 보니까 처음 사랑 잊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 믿을 때에 본능적으로 영감과 진리와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본능적인, 본능적인 기쁨, 본능적으로 이 구원의 기쁨, 이 구원의 평화, 구원의 사랑, 이게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왔어요, 본능적으로. 뭐 그때 뭣을 알아서 진리를 배워서 연구를 해서 기도한 것도 아니야. 기도한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와 가지고, 어쩐지 이 구원 얻는다고 예수 믿기로 떡 작정하고 보니까 이 구원을 위해서 뭐 어째 좋은지도 몰라. 좋은 것을 왜 좋으노 따져 볼 것 따져 봐도 뭐인지 모르면서도 어쩐지 좋아.

어쩐지 이 구원을 척 자기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척 받고 보니까 어쩐지 좋고, 어쩐지 하나님하고 정이 딱 들어붙고, 어쩐지 주님하고 정이 딱 들어붙고, 이래서 뭐 자기 아버지 어머니 욕하는 것보다도 주님 욕하는 것이 더 분하고, 주님 좋아하면 어쩐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주님 좋아하면 좋고, 주님하고 정이 딱 들어붙고 사랑이 딱 들어붙지 아버지와 사랑이 딱 들어붙고 정이 딱 들어붙어 붙지. 또 성경 진리라면 이는 언제 봤다고 정이 딱 들어붙고 진리라면 좋고 그만 성경의 말씀이라면 그만 다 긍정하고 자꾸 믿고 싶고, 이뿐만 아니라 그 믿기로 작정하기 전에는 사람한테 대해서 아주 강퍅하고 각박하고 좁고 뭐 얄궂도 안한 귀신 구덩이가 돼 있었는데 예수 믿기로 착 시작하고 나니까 어쩐지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턱 누그러지는 것이 관대해집니다.

관대해져. 이상하게도 관대해져 버려.

이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만물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이 산천 초목도 볼 때에 모두가 다 변화가 돼지고 귀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고 뭐 모든 데 대해서 소망이 생겨져.

과거에는 저건 또 왜? 희망 없고 희망 없고 희망 없고, 모두 희망 없고 희망 없고, 모두 다 망해야 되겠고 망해야 되겠고, 죽어야 되겠고, 다 저건 가루를 내야 되겠고, 다 없애버리고, 불에 태워버리고, 전부 다 전부 전멸을 시켜야 될 이것만 내 속에 가득히 찼는데 어쩐지 예수 믿고 나니까 모든 것에 소망이 생겨집니다.

이것도 봐야 좋고 저것도 봐야 좋고 산천도 봐야 좋고 좋고 전부, 달도 보면 좋고 별도 보면 좋고 강물도 보면 좋고 모두 다 좋고 병신도 보면 밉지 안하고 이상한 그 사랑과 자비가 가고 이렇게 변화가 된다 그거요.

그게 뭐입니까? 이것이 다만 ‘예수 믿고 구원 얻습시다’ 하는 이 구원을 자기가, 구원의 전도를 받고 이 구원을 자기가 딱 얻어 가지고 이 구원을 자기가 ‘이 구원 얻어 보자’ 하고 이 구원을 자기가 지금 믿고 이 구원을 자기가 얻어 가지니까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다 생겨진 것입니다.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다 생겨진 것이오.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자기에 기쁨도 즐거움도 평안도 생겨졌고,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하고 인정도 딱 들어붙고, 이 구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인연도 딱 붙어졌고, 이 구원으로 말미암 이제 이 모든 인간들로 더불어도 인정과 사랑과 화목이 들어붙어지고 이랬는데 그 구원 그게 뭐이냐? ‘구원 나는 그 구원 싫다’ 하고 이제 그 구원을 전할 때에 `나도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그 구원을 나도 그 구원에 동참하겠다는 고 마음을 딱 가진 이후에 당장 변화가 돼 버려. 그 구원 그게 뭐인데? 구원 그게 뭐인데 그래 됩니까? 구원 그게 뭐인데 그렇습니까? 그 구원이 세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피와 성령과 진리의 능력이 그 구원에 씨인데 그 구원이 와 가지고서 예수 믿기로 턱 시작할 때 벌써 그 사람이 중생됐고 부르심을 받아 가지고 예수 믿기 시작하는 것이라 말이오. 이상합니다.

저는 열두 살 먹어서 중생된 것 같은데 학교 가니까 뻑뻑 얽은 고은서 권서라 하는 사람인데, 그때는 책을 권하고 다니는데, 전도사라 말이오. 전도하고 다니는 이를 권서라 하는데 떡 가면서 ‘예수 믿고 하나님 공경합시다’ 이라는데 어쩐지 그만 내게 이상함이 떡 와 가지고ㅡ평생 처음 듣는 말입디다. ‘사람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다니?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공경해?’ 나는 학교 다닐 때도 그 학생들은 나를 좋아했어요. 학생들은 뭉쳐 다니면 한 사오십 명이 뭉쳐 가는데, 한 이십 리 동안을 걸어가는데 학교 가면 학생들은 나를 따라올라고 애를 써도 나는 학생들 같이 안 있어요. 학생들이 다 저리 가면 나는 앞에 가고, 그 학생들은 길가 오다 보면 담배꽁초 그거 흘렀는가 막 이래 모두 돌아다니며 찾아요. 이래 가다가 담배꽁초 하나 있으면 하나 주워 가지고 하나 돌아가면서 한 모금씩 빨아요. 빨고 이래 지금, 그때 그거 사먹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그런 데 싫어서 어쩐지 그만 가면 앞에 가 버려. 앞에 막 이래 가지고 앞만 보고 그만, 저리 가면 이리 가 가지고 앞에만 달려가는데 앞에 가서 그 사람들이 우 따라오면 또 나는 또 처져 가지고 뒤에 가요.

어쩐지 가기를 그리고 이러는데, 그 소리를 탁 듣고 난 다음부터 내 속에는 큰 번민이 생겼고, 번민이 생겨졌고 예수를 믿지 안하는데 부러운 게 생겨졌습니다.

그때 학교 다닐 때니까 학교에서 뭐 그 언제든지, 지금은 이런 뭐 반장 그런 게 아니야. 그때는 급장이 되면 교실에 들어갈 때도 ‘앞으로 나란히’ 하면 쭉 서서 딱 서 가지고 그래 인제 급장이 딱 인솔하고 뒤에 가고, 공부 딱 마치고 나면 나와 가지고 쭉 서면 ‘나란히’ 하면 이 앞으로 쭉 섭니다. 서면 옆에 떡 가 서면 전부 저리 쭉 서고 여기 떡 급장이 서면 다 그들이 경례하고 또 같이 절하고, 이러니까 아주 뭐 좀 그때는 권세가 있어.

이렇지, 학교 가서 뭐 공부하면 언제든지 시간되면은 선생이 아닌데 좀 나가 가르치라 하면 가서 수학 같은 거 가르치고 이랬지, 이라고 또 그 면은 양반 동네요. 서울 연안 이씨라 하면 양반이라고 뭐 굉장합니다. 모두 진사 뭐 급제 이런 사람들입니다. 양반도 부러워하지 안했어.

내가 이학년 때에 나 학예회할 때에 나를 연설을 시켰는데 그 연설시킨 그 연설에서, 할애비의 뼉다귀를 구 대나 팔 대나 십 대나 몇십 대 울궈먹는 그런 쌍놈들 이렇게 쌍놈들이라고, 그 양반들이 막 그때 학예회라 하니까 그 양반들이 큰 갓 쓰고 굉장한 사람들이 왔었는데 거기서도 조상의 뼉다귀를 수십 대 울궈먹는 그런 쌍놈들이 있다고 마구 이래 얼마를 퍼부어 놨는지 그때, 그때 우리도 뭐 그리 양반 아니야. 보통 양반은 되는데도 그만 양반 되게 퍼부어 놨어.

이러니까 나중에, 그러고 실컷 퍼붓고 나서 내러오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퍼부었지. 나오니까 그 사람들이 있다가 ‘저 아이가 어데 아이야? 저 아이가 어데 아이야?’ 욕하는 사람 없고 ‘저 아이가 어데 아이야?’ 그때 그 양반들 나빴어요.

이러니까 부러워한 거 없는데 열두 살 먹어 딱 그 말 듣고 나니까 그만 내 속에는 큰 고통이 생겼어. ‘세상에 부러운 것이 있는데 부러운 것은 하나님 공경하는 게 제일 부러운데 하나님 공경하는 사람이 어데 있나?’ 찾으니까 우리 반에 아이가 둘 있어요. 하나님 공경하는 사람이 둘 있어요.

하나는 정봉조라고 지금 총신파의, 합동측 그 총신 합동측의 총회 총무로 있는 사람인데 나하고 한 학년에 있었고 그 예수 믿고, 나보다 작아요. 또 저 아따, 그 이름도 잊어버렸어. 하나 있고 이랬는데 나는 그 두 학생에게 그만 부러워서 반해버렸어.

내가 반해서 ‘저것들 속에 하나님을 섬기니까 저거 어떤고 보자’ 하고 그래 가지고 만나면 백지 놀려대고 미워하고 이래 가지고, 급장이, 급장이면 그때 뚜드리면 맞아야 돼요. 뚜드리면 맞고 벌 세우면 벌 서야 되고 이러면서 공연히 소제도 시키면 더 많이 시키고 벌도 세우고 이래, 이렇게 미워하기는 실컷 미워하고 애를 먹이면서도 내가 부러운 거는 그 속에 들었다 그거야. 이러다가 나중에 스물다섯 살 먹어서 예수 믿게 됐습니다.

예수 믿게 떡 되고 나 예수 믿을 때에 그때 되기 시작하니까, 예수 척 믿고 시작하고 나니까 마음에 어떻게 좋은지, 그 좋아서 산천이 변해지지 모든 만물이 변해지지 뭐 좋아서 그만, 그뭐 그때 하나님만 좋고, 그저 진리만 좋고, 모든 형제도 좋고, 이러니까 그저 병신이고 뭐이고 그런 사람 뭐 구제하는 거 이런 거 하는 것만 자꾸 좋아하고, 이상한 세계가 열립디다.

그래 가지고 예수님을 믿어서 그것이 인제 없어지지는 안하고 자꾸 이래 계속 나가야 되는 것인데, 그것이 지금은 내게 그게 많이 빈약해요. 그때 같으면 그저 이 구원을 인한 기쁨 이것이 제일 상봉우리가 되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주님 이 둘에 대해서 뭐 죽고 못 사는 이 정이 들어붙고,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이거 뜨거운 불이 붙고 이럴 터인데 그때 요량하면 많이 식어졌어요. 아주 식어졌어.

내가 이번에 이 에베소 교회 대해서 공부하면서 지금 좀 회개를 하려고 하는데 회개가 잘 될런지 모르겠어.

그때는 그뭐 뉘가 전도사도 아닌데, 예배 보고 나면 저 다른 교회 은혜 없는 그런 교회 있다고 그 태령을 넘어서 가면서, 가다가는 밤에 가면 밤에 가다가 거기 가면서 여게 무엇이 친구가 나오지 안할 것인가 이래 가지고 짐승 소리가 나면 좋아서, 짐승 소리가 나오면 자꾸 오기를 기다려. ‘형제여 오라, 형제여 오라, 형제여 오라, 지금 나하고 같이 여기서 하나님 찬미하자.’ 자꾸 이라고 이래서 밤으로 짐승 오는 걸 못 봤어요. 낮으로 새떼는 많이 와요.

이랬는데 그게 지금 식어졌습니다. 그 식어진 것은 어째 식어진 줄을 몰랐는데 이제 요번에 에베소 교회를 이거 내가 좀 우연히 보라 해서 내가 보면서 연구하는 가운데에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그것이 처음에 어릴 때에 내가 신앙, 처음 믿을 때에 처음 사랑 그 사랑이 굉장한데, 그 사랑이 기뻐서 못 견뎠고 좋아 못 견뎠고 했는데 그 사랑, 그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이 구원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아버지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 우리 본능적으로 있었는데 그게 어째 생겼느냐? 그 생긴 것이 이 구원 때문에 생겼어, 가만히 연구해 보니까. 구원 때문에라 말이오.

그 사람이 뭐 ‘예수 믿고 구원 얻읍시다’ 하나님 믿는데 구원을 생각하니까 제일 첫머리 생각하는 게 뭐이냐 하면 영생을 말할 때에 어떻게 좋았는지, 영생 좋았고 천국 좋았고, 또 만유의 대주재가 우리의 아버지 된 것 좋았고, 또 그러고 난 다음에 모두 죄사함 좋았고.

이래서, 그 구원으로 인해서 거게서부터 다 움돋아 나와 가지고 이 모든 첫사랑이 생겨졌었는데 가만히 그때에 처음 믿을 때에 그때 그 뜨거운 그것이 솔직하고 좋았는데 주님은 그걸 좋아해요.

그걸 좋아하시는데 지금은 뭐 이 교리 신조로만 따지고 이래 가지고 뭐 이성 비판으로만 비판하니까 빼빼 말라서 주님이 참 기뻐하실 수 있는 그때 기뻐함의 그 아름다움의 미가 내게 없어진 것 같애. 그 미가 없어진 것은 어데 없어졌느냐?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하는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래 됐다 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래서, 이 에베소 교회 보고 난 다음에 다른 거 뭐, 제가 늘 기도하기를 ‘주님이여, 내 안에 계셔서 내 언행심사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고, 지정의를 맡아 주관하여 주시고, 희로애락이 주님으로 인하게 하시고, 주님으로 인해서 내 언행심사가 다 시발되게 하시고 모두 접할 때도 주님과 동행해 접하게 하여 주십시오.’ 자꾸 이런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 해야 어짠지 맹맹하고 아무 맛이 없고 재미가 없고 뭣이 뜨거움이 없어.

없는데 이제,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이 구원에 대해서 자꾸 생각해 보니까, 이 구원을 내가 아는 지식대로 생각해 보니까 자꾸 생각해 보니 좋고 기쁘고 즐겁고, 이제 이 구원이 어떠한 구원이냐? 이 열여섯 가지 구원을 제가 말을 하기는 했지만 열여섯 가지 구원을 이거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는 여기에 모든 능력이 나와서 낙원에 있는 것도 여기서 나왔고 또 생명 과실도 여게 나오고 이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열여섯 가지 구원을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면 거게서 우리가 하나님의 온갖 능력을 받아 가지고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가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고 이 구원을 생각지 안하면 다 절단난다.

이러기 때문에 “구원의 투구라” “구원의 투구라” 투구라는 것이 이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 투구인데 우리에게 우리 신앙 인격에나 우리 생활이나 모든 데 대해서 이 구원이 제일 두부에 좋은 것을 보호한다, 이 구원이 우리 신앙에 제일 대가리를 보호한다, 이 구원이 우리 기쁨의 대가리를 보호한다, 이 구원이 우리 소망의 제일 머리를 보호한다, 이 구원이 제일 우리에게 우둥지되는 이거 제일 중요한 것이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래서, 오늘 저녁에 설교하다가 이제 그만 너무 지나가 버려서 이거 지금 또 좀 허크러진 것 같은데, 어쩌든지 처음 믿을 때에 그때에 이 구원을 인해서 본능적으로 기쁘고 즐겁던 거, 본능적으로 주님과 아버지가 사랑스러웠던 거, 또 본능적으로 이제 진리가 사랑스러웠던 거, 본능적으로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던 거, 그 본능적으로 된 그것을 우리가 찾아야 주님이 기뻐하시지 고거 없으면 암만 행위 있어야 소용 없습니다. 왜? 주님이 다 싫다 했어.

그러면 그것을 왜 이 에베소 교회가 잊어버렸느냐? 잊어버린 걸 가만히, 그것 때문에 잊어버렸다 소리 안 해도 에베소 교회를 연구해 보니까 이 여덟 가지, 또 하나 더 보태서 아홉 가지, 그만 주님이 주신 이 구원을 바라보는, 구원을 바라보는 여게다 전 시선을 막 기울였는데 그만 이 주님을, 주님이 주신 구원, 주님이 주신 이 구원을 바라보던 이 눈이 주님이 주신 구원을 바라보던 이 구원은 내비두고 구원의 소행이 되는 이런 행위도 저런 행위도 저거 할라 보다 보니까 그만 잊어버려 버렸어.

내가 여기 부산 오기 전에는 참 천국 생활도 했고 모든 사람이 다 부러워했고 나도 뭐 굉장한 기쁨을 가졌었는데 그만 부산 와 가지고 다 버려버려. 백 목사 부산 와서 버렸어요. 백 목사는 부산 와서 버렸고 서부교회와 우리 진영에 한 근 백 교회 되는 교회는 백 목사 버리는 통에 그들은 바로 잘 됐고 그래요.

왜? 그때는 이제 이 구원만 바라보니까 기쁘고 즐거워서 뭐, 언제든지 집에 못 있고 산에 가 있고, 저 뭐 범이 노는 그런 깊은 산에 가서 그저 밤이 맞도록 거게서 또, 며칠이든지 거기 가 있다 그러고, 해방도 제가 산에서 단식기도 하다가 해방을 만났습니다. 산 위에서.

이랬는데, 여기 와 가지고 내가 에베소 교회와, 똑 내가 에베소 교회와 같애.

에베소 교회와 같이 이거 뭐 교리 신조 이거 또 연구하려 하고, 또 교인들 이거 거석해 가지고 교인 또 뭘 어쩌려고 하고, 또 주일학교 뭐 어쩌려고 하고 자꾸 이러다 보니까, 이 일도 중하지만 이거 하다 보니까 그만 구원을 잊어버려 버렸어.

내가 구원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내게 하나님이 지금 기뻐하고 만족하지 안하는 게 있다 하는 것을 내가 깨달았어요.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해서 처음 믿을 때와 같은 그 본능적으로 주님이 기뻐할 수 있던 그 산 신앙 그것을 찾아 가지도록 노력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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