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가나안 여자의 믿음

 

1981. 1. 14. 밤 (수)

 

본문: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 가나안에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르기를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지금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뒤에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그대로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이 안타까와서 ‘선생님, 저 뒤에 한 여인이 주님에게 계속 부르짖고  있는데 그 말해서 보내십시오. 어떻게 안 들으셨습니까? 못 들으셨습니까?’  마음에 답답해서 그렇게 주님에게 말을 했습니다.

주님이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아버지가  보내서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려고 왔지 다른 데에 보내지 아니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직까지 찾아 구원하지 못한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내서 내가  왔지 다른 데 내가 오지를 아니했다.’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만 제자들도 ‘이  여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이방 여인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는  것이로구나.’ 하고서 제자들은 포기를 했습니다.

여인이 따라와 가지고 주님에게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하면서  간청을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래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도와 달라고 하는 그 여인에게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해 가지고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랬습니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 또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옳습니다. 참 나는 주님 앞에 그저 버림을  당해야 될 개와 같은 그런 자입니다. 옳소이다. 나는 그와 같은 자입니다.’  반항하는 말이 아니고. ‘옳소이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그  부스러기를 먹고 사는 것이 개가 아닙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말할 때에 주님이 그 여인에게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네 믿음이 크다. 네  믿음이 크다. 네 믿음이 크니 그 믿음의 힘으로 네 소원이 이루어지리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이것을 여기 기록해서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에 기록된 이런 사실들은 이것이 다 이 구원 도리에 이용된  사실들입니다. 구원 도리에 구원 이치에, 구원 이치에 이용이 된 이런 모든  사건들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사건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런 사건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이치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기 위해 가지고 하신 것인 것을  우리는 언제든지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예수님이 네 믿음이 크다 하신 이 칭찬하신 큰 믿음,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은 이 큰 믿음, 이 큰 믿음은 자기가 심히 걱정하고  고통하고 마음에 불행을 느끼고 있는 이 사건이 완전히 나음을 받았습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신 그시로부터 그 딸은 나았다고 여기에 기록이 됐습니다.

그러면 그 환자가 나았을 때에 그 환자도 참 거기에 모든 사람 가운데에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할 그런 기쁨과 그 행복을 그때 누렸을 것이고 또 이 아이의  어머니도 그랬을 것입니다. 만일 거기에 이 여인의 가정에 큰 불행이 있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 같으면 오히려 이 아이가 나음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불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서라도 이 아이의 이 불행을 인해서 조금 근심한  사람은 이 아이가 나음으로 말미암아 조그만한 근심이 없어지고 조그만한 기쁨이  생겨졌을 것이고, 큰 근심으로 되어 있는 그 사람은 큰 근심이 변해서 큰 기쁨이  되어졌을 것이고, 또 이 아이로 인해서 ‘우리 가정은 희망이 없다’ 크게  낙망을 가졌으면 낙망 가진 것이 변해서 큰 희망으로 바꾸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가 나음을 인해서 모든 것이 바꾸어지는 그런 그 현실들을 누리게  됐습니다.

예를 든다면 이 아이가 이렇게 흉악한 귀신이 들려서 참 그 가정이 심히  불행스러워 있는 그런 것을 기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더 불행스러워졌으면  좋겠다’ 싶은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두말 할 것 없이 이  사람들에 대립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 식구가 아닐지라도 이 아이의 가정을  인해서 마음에 걱정하고 불안스럽게 고통스럽게 걱정을 하고 이로 인해서 고통을  당한 그런 사람들은 이 고통이 변해서 다 평강과 기쁨이 됐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의 가정에 이 불행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이 아이들의  대적들에게는 이 아이가 나음으로 고통이 됐을 것이고 또 이 아이편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고통이 변해서 기쁨이 되어졌을 것입니다.

이제 큰 믿음을 인해서 주님이 그 가정에 그 큰 믿음을 인해서 권능의 은혜를  베풀었을 때에 이 큰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 인해서  은혜받은 자들의 원수는 절단이 나는 그런 결과가 됐고 이 은혜를 받음으로  인하여 이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은 불행이 변하여서 행복으로, 근심이  변하여서 기쁨으로, 절망이 변해서 소망으로 바꾸어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세상에서 되는 일은 좋으면 좋지 나쁜 것까지, 자기에게 대해서 대립되는 것까지  정리가 되어지는 그런 일은 안 됩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은 요 두 가지가 정리가 된다는 것을 여기에서 가르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와 가지고 이루어지는 일은 요 믿음으로 은혜받은  요자에게 속한 모든 것은 불행이 행복으로 바꿔져 버립니다. 믿음으로 된 것은  저만이 아니고 저에게 속한 모든 것까지 다 불행이 행복으로 바꿔집니다. 불행의  양이 있는 것만치 행복의 양으로 바꿔집니다. 불행이 컸으면 큰 행복으로  바꾸어지고, 근심이 컸으면 큰 기쁨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믿음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와 가지고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그  일은 모조리 불행은 행복으로 바꾸어집니다. 불행의 그 중량만치 행복의  중량으로 바꾸어지고 또 자기를 대적하던, 자기를 대적하던 모든 대적들은  대적이 된 그 대적의 양만치 그것은 절단이 나 버리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다니엘이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 구원이 그에게 임했을 때에 그 자체도  한없이 존영해지고 행복스러워졌지마는 그와 대립된 그 대적들도 대적의 양이  있는 것만치는 모조리 절단 나버렸습니다. 아마 그때에 총리 둘이 있었는데 총리  둘 있는 그런 사람들은 제일 극형에 아마 처하게 됐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하는 일은 이 면이 좋으면 저 면이 나쁘고  이러하지 이 면도 저 면도 모든 면이 좋아지는 일은 없습니다. 약도 쓰면 그  약이 요 병에는 유익하지마는 다른 면은 그 몸에 해가 됩니다. 요 면은 성공이  됐지마는 요 면 성공으로 인해서 다른 면이 손해를 봐지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하는 일은 침 맞는 것 한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마치 온상을 꾸며놓고 화초를 기르면 온상  안에는 잘 자라지마는 온상 밖에는 추워서 나오면 그만 그것이 얼어  죽어버립니다. 이렇지마는 봄이 척 오면 하나님께서 봄을 이렇게 이르게 하면  봄이 되면 온상 밖이나 온상 안이나, 사람 모르는 저 돌틈이나, 뭐 개울이나,  만당이나 할 것 없이 전체가 다 움트고 잎 피고 꽃 피고 열매의 준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가지고 되는 일은 자기가 아는 일만  그것이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모르는 그 모든 면까지 전체가 치료가  돼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은 마치 봄이 돌아와 가지고 이런 모든 식물들이  움트고 자라는 것과 같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인간들이 어떤 과학을  이용하든지 어떤 인간의 단체나 노력으로 하는 것은 마치 인공으로 만든 이런  온실과 같은 그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범사를, 자기 위신에 대해서나, 자기 몸에 대해서나, 자기  가정에 대해서나, 사업에 대해서나, 출세에 대해서나, 명예에 대해서나, 경제에  대해서나, 사업에 대해서나, 모든 쾌락에 대해서 어떤 면이든지 믿음을 인해서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되는 것은 봄이  돌아와 가지고 되는 것과 꼭 같습니다. 자기가 상상도 못하는 모든 면까지  해결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치료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한 말씀 한 말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리하고 정돈하고 고치고  하는 이것은 우리는 이 고쳐지는 것이 효력이 어느 정도 그 효력의 범위가  나겠느냐? 효력의 범위가 어느 정도냐? 우리는 모릅니다. 성경은 이것이  조물주와 모든 피조물과의 그 관계가 다 올바로 맺어지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자유의 율법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자기가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오는 ‘여인아,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대로 우리가 주님이 칭찬할 수  있는 믿음, 주님이 이 믿음을 사용해 가지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는 이  믿음을 마련해 가지고 이 믿음을 인해서 믿음을 통하여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 가지고 이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 방편을 쓰는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이 낫고, 금년보다 명년이 낫고, 이 사건보다 다른 사건이  낫고, 이 전체에, 마치 봄이 오면 전 안팎에 음지 양지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이  온기로 말미암아 새 움이 터 오르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돌봐 주시면 모든 면이 봄 동산과 같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서 모든  것이 새로운 그 역사와, 새로운 건설과,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소생 이런 것이  우리가 입으로 형용할 수 없는 이 무한한 모든 면이 전체적으로 새로와져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 방편을 쓰는 사람을 인간 그 방편 가지고 하는 사람이  당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아는 면의 치료보다도 모르는 면의 치료가 더 많고, 아는 면의  유익보다도 모르는 면의 유익이 많습니다. 왜? 이는 우리를 기뻐해서 하나님께서  전지한 지혜로 전능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만드신 이분이 모든  면을 당신이 다 책임지고 치료해서 전체적으로 골고루 이렇게 잘되도록 좋게  이렇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흠점이 없고 가면 갈수록 점점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이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말씀은,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그말은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 그말이오.

우리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일을 못 합니다. 우리가 믿을 때에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는 것 모르는 것, 참 모든 것을 구비해서 당신이  주실 때에 무엇이든지 주실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해라  하시고 그대로 할 때에 그걸 통해서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실 때에 당신의 뜻으로 주시지 다른 걸로 주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뜻으로 주셔. 이리 해라 하는 그것 주시는 그것이, 그것이  막바로 내가 원하는 그것입니다. 그걸 줄 때에 그대로 하면 그게 이루어지고 안  하면 안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그 하는 그것이 그대로 하면 그대로 되는 그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 계약이기 때문에, 조건부 계약이기 때문에. 뭘 달라 하면은 ‘네가  요것 해라’ 할 때에 그것 하는 그것이 내가 하나님께 구하는 그게 되는 게  아니고, 그것 할 때에 ‘네가 내가 하라 하는 대로 요대로 했으니까 내가 너에게  요것 하면 내가 주마고 약속했으니까 네가 요래 했으니 내가 준다.’ 그 한 것은  아주 하나님에게 받는 것과는 엉뚱하게 딴것이지마는 그렇게 약속하시고  조건부로 당신이 당신의 뜻을 주실 때 그대로 행하면 그 행하는 그것이, 그것이  되어지는 것도 있고 그 행하기 때문에 그 행하는 그걸 인해서 당신이  베풀어주시는 역사가 하나님의 하시는 방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돈을 주실 때도 말씀으로 주십니다. 당신의  뜻으로 주셔. 돈을 주실 때도 뜻으로 주시고 죽음에서 내가 살아나는, 죽음에서  살아나는, 생명이 살아나는, 내가 거기서 죽음에서 구출되는 그 구출도 줄 때에  또 말씀으로 주십니다. 뭐 구출 줄 때는 당신의 능력이 와 가지고서 이 죽음을  물리치고 이래 건져내지 않습니다.

또 우리에게 무슨 큰 낭패가 났습니다. 큰 낭패된 그런 어려운 일이 오면 그걸  하나님 앞에 ‘이것을 해결해 주옵소서’ 그렇게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때에 당신이 나서 가지고 사람과 말할 것은 사람과 말하고, 또  물건에 할 것은 물건에 말하고, 자연을 발동할 것은 자연을 발동시키고 이래 안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에 그 문제 해결을 당신이 주실 때에는  ‘그러면 네가 요것 해라’ 또 말씀을 줍니다. `요것 해라.' 그것 하면 그 하는  그것이 해결되는 방편이 되는 것도 있지만 안 되는 게 많다 그말이오. 그것 하면  당신이 요것 했으니까 당신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을 구하든지, 또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든지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꼭  말씀으로 주시지 다른 걸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주시니까 받는 게 뭐이냐? 그 말씀으로 주실 때 그 말씀대로  하면 그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히11:1)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은 내가 그것을 행하면  내가 소망하는 그것이 실상으로 이루어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실 때에 그 말씀대로 하는 그것이 그  실지의 그 일이 되는 방편으로 주시는 것도 있고 하나님이 계약 조건으로 주시는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하나님이 주실 때에는 말씀으로 주시기 때문에 그 말씀으로  주시는데 그 말씀대로 실행을 하면은 ‘네가 이렇게 실행하니까 내가 이것 해  주마.’ 또 어떨 때는 실행하면 실행하는 그것이, 그것이 되어지도록 그런 게  있습니다.

실행하니까 그 실행한 것 조건부이기 때문에 실행하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이  엉뚱하게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것 있고 실행하면 실행하는 그것이 그 일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시든지 주실 때에는 믿음을 통해  주시지 믿음을 통하지 안하고 주시는 일은 없다 그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때에 믿음이 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뭣이 믿음이냐? 두 가지 합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 말이오. 뜻이라면 뜻, 명령이라면 명령, 하나님  말씀이라면 말씀, 하나님의 지도라면 지도, 그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명령이나 하나님의 지도나 한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 하나, 그 다음에는  내가 순종하는 것 나 하나. 요 둘이 합해서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시든지 주실 때에는 반드시  그때에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을 주시는 것이 그 말씀대로 하면은 그것이 되어질 수  있는 그것이 되어지는 이치에 맞은 말씀도 있지마는 안 맞는 게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그걸 우리에게 주실 때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대로 하면은 그 일이  되기는 커녕 정반대로 박살이 되고 절단이 나는 그런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이것이 그 일이 성사가 되는  데에 이치에 맞으면 내가 그대로 순종하지마는 이치에 안 맞으니까 내가 순종할  수가 없다. 이 순종하면 내가 큰일나겠다.’ 그게 뭐이냐? 그게 자기를 믿는  것이지 하나님 믿는 것 아닙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은 자기 믿는 사람이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도 아니요 인정하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이 말씀대로 하면 이는 반드시 절단이 나 버리는데  절단이 나 버리는 것을 하나님이 명령할지라도 자기 보기에는 절단날 일이지마는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신실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 생각에 절단날  것 같지 나를 믿으면 안 해야 되겠고 하나님을 믿으면 해야 되겠고 그럴 때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어서 할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 앞에서 받으려고 하면 반드시 그것을  주실 때에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옵니다. 내가 그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내가 받을 수가 있고 믿음을 안 지키면 실상이 안 돼 버립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상이라” 소망하는 것이 실상으로 되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든지 주실 때는 먼저 그 조건부로 믿음부터  내게 받습니다. ‘네가 이것 해라.’ 하면 믿음이 되고 안 하면 믿음이 안  됩니다. 하면 믿음이 될 때에는, 다니엘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 지키는 것인데  ‘기도하겠습니다’ 하니까 다니엘은 어찌됐습니까? 사자구덩이에 집어넣지  안했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키는 그것이 자기가 아주 박살나는  그런 것으로 보여지고 또 그렇게 되는 일도 하나님이 시키십니다.

그렇게 되는 일을 시키시는데 그 일을 실행하는 것은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역사의 통계로서는 박살 될 일이라도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역사와 정반대로 초자연의 역사로 당신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그 일을 합니다.

그 사람은 역사를 초월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요, 모든 통계를 초월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요, 이치에 맞지 않는 비합리를 초월한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는 사람이, 아주 꼼꼼한 것 같지마는 모든 일을 좀 더딘 것  같아도 성급히 제 눈에 당장 해결되고 이렇게 지딱지딱 되어지는 그런 것을  바라는 그런 경거망동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어짜든지 하나님이 해 주셔야  모든 것이 다 봄동산같이 모든 게 펴 나간다. 하나님이 안 해 주시면 펴 나가지  안한다. 좋은 것 같아도 자꾸 끝이 받쳐서 안 돼진다. 하나님이 해 주셔야 모든  것이 전면적으로 전체적으로 이것이 펴 나간다.’ 요것을 굳게 잡고 하나님이  와서 해 주시도록 그런 방편을 취하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이요, 멀리 보는  사람이요, 넓게 보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시야가 넓은 사람이요, 그 사람이  원시하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깊이 보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나를 축복으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실 수 있도록 요 방편을  취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눈이 밝은 사람이요, 아주 멀리, 넓게, 깊이 보는  사람이요, 그 사람의 지혜가 전체 면에 다 퍼져 가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안 해 줘도 하나님에게 거슬려서라도 요거는 눈앞에 당장  성공된다.’ 해서 하나님이 해 주시지 안하는 그것이 되어지는 것을 노리고  하나님을 거슬려서라도 될 수 있다고 해서 하는 그것은 화약 지고 불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미련한 사람 넓게 길게 전체면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그와  같이 하는 어리석은 자의 놀음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은혜로 해 주시는 요것을 우리가 바라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아무래도 내 보기에 ‘당장 이러면 성공이 되고 이러면 실패되겠다.’ 해도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성공이 돼야 되지, 또 하나님이 파괴시키지 안하시면  아무도 파괴할 자가 없다는 이 하나님 한 분에게 모든 건설과 파괴가 주권되어  있는 요것을 꽉 믿어두는 요것을 하나님이 원합니다.

꽉 믿어두는 요 믿음을 가지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도록  이렇게 하려고 하면은 어째야 되느냐? 이것은 내가 믿음 준비해야 된다. 믿음의  댓가로 당신이 해 주시지 믿음 외에 딴걸로 해 주시지 안해. 이러니까 믿음 없는  당신이 은혜 베푼 일이 없습니다.

이러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으로 나음을 받았다” “믿음은 하나님으로 일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믿음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는 것이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요 믿음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은혜를 받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믿음 중에도 이 믿음을 지키려 하면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이 다 절단나야  믿음을 지킬 요런 믿음이 있을 때 요 믿음을 지키는 것은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보다도 하나님을 더 높이 낫게 여겨서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소유보다 나아 줘야 되겠고, 그 사람의 몸보다 나아 줘야 되겠고, 그  사람의 생명보다 나아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바라봤는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생명만치 그에게 효력이 없고, 몸만치  효력이 없고, 그의 소유만치 효력이 없다면 하나님 바라본 게 손해보지  안했습니까? 나아 줘야 될 거라 그말이오.

그러면 이 여인이 “네 믿음이 크도다” 한 이 믿음은 무슨 믿음이기에 이렇게  주님이 칭찬하시고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즉시 당신의 권능과 사랑과 은혜로  가지고 이 여인에게 당면된 사건이 해결돼, 그뿐만 아니라 모든 주변에 따라  있는 모든 것이 다 행복되게 영광스럽게 모든 면을 전면적으로 해결해 주셨는가?  그 여인의 믿음을 크다 했으니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그것을 여기에서  말씀해 놨습니다.

거기에 첫째는 뭐 간단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못 들은 척하시고 그대로 걸어가십니다. 그대로  걸어가십니다. 그럴 때에 이 제자들은 ‘왜 저 지금 여인이 부르짖고 있는데 뭐  좀, 저렇게 부르짖고 있으니까 좀 응답을 해 주셔야 되지 그렇게 냉정스럽게  모르는 척하시고 그만 못 들은 척하시고 아무 상관없이 그렇게 가십니까?’  답답해서 말했다 말이오.

주님이 그러면 제자들 만치 자비성이 없어서 긍휼성이 없어서 그 여인이 그래  말할 때에 못 들은 척했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보다도 더 듣고 계십니다. 그  여인의 믿음이 그 순서로 요 삼 계단 순서를 통과해야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이루시기 위해서 주님은 역사하고 계시는데 사람이 볼 때는  주님이 내 몰라라 하는 것같이 합니다. 안 들은 척합니다.

이랬는데 그 제자들은 그런 신앙이었지마는 이 여인은 왜 칭찬을 받았느냐?  예수님께서 못 들은 척하는 거기에 떨어지지를 안 했습니다. 못 들은 척하는  그것을 디디고 넘어선 신앙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주님의 도우심을, 주님의  은혜를 소망하는 사람은 이것을 극복하는 이것을 초월한 신앙이 아니면 이 일이  안 됩니다.

우리가 무슨 사업을 경영하면서, 우리가 가정 생활이나 무슨 우리 생활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주님의 축복을, 주님의 도우심을 각각 제대로 주님에게 대한  소망을 바라지 않습니까? 소망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에, 요 간편하지마는 요  여인과 같이, 일 년 믿어야 아무 소용없고, 이 년 믿어도 소용없고, 삼 년  믿어도 소용없고, ‘저것들 뭐하려고 저래 예수 믿는고?’ 제자들이 보고  ‘주님, 저렇게 부르짖으니까 좀 말을 해서 보내십시오. 왜 못 들은 척하고  암말도 안 하고 앞으로 뿍뿍 걸어가시고 도무지 못 들은 척하십니까?’ 그것이  주님이 못 들으신 것이 아니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지금 그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믿음을 만드는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이 큰 믿음을 만드는 내적  주님의 긍휼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이 볼 때는 그렇지마는.

이러기에 우리가 주를 향하여서 나아갈 때에 얼마 동안 아무런 예수 믿어야  소용이 없다, 아무 효력이 없다, 예수 믿어야 아무런 효력 없고, 아무 소용없고,  아무 무슨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하는 그런 단계에 낙심하지 안하는, 그 단계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거기에서 그래도 부르짖고 뒤에 따라옵니다.

뭐 뒤에서 부르짖으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뒤에 고함을 지르고, 그 제자들이 지금 환하게 들릴 것 아닙니까? 이래도 주님은  못 들은 척하고 앞으로 뿍뿍 걸어갑니다. 못 들은 척하고 상관없이  걸어가십니다. 이래도 그 여인은 낙망하지 아니하고 뒤에서 그럴수록 빨리  따라오면서 호소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 믿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할 때에 얼마 동안 주님이 내게  대해서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그런 시기를 만났을 때에 그때에 우리에게 성패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이 제자들과 같이 ‘주님이 내게 대해서는 못  들은 척한다’ 하는 그것이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낙망하면  성공을 못 합니다.

그 다음에 쫓아가 가지고 ‘나를 도우시옵소서’하니까, 그러니까 제자들이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냈지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탁 거부해 버렸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왔지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이러니까 그  제자들이 들을 때는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보냈는데 이거는 가나안 여인이기  때문에 그래 지금 거부하시는 것이로구나.’ 거부로 보여졌습니다. 주님이  거부했습니까? 거부했으면 나중에 고쳐 줬으면 주님이 죄지었으려고?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왔다 그 말은 하나님이 불러서 구원하실 이 여인에게  왔다 그 말이요, 막바로. 이 여인에게 오셨다. 여인에게 오셨다는 것을  말하지마는 인간 생각이 들을 때는 ‘이것은 예수님은 이 여인과 상관이 없다고  거부하는구나.’ 거부로 보여졌다 말이오.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서 소망을  가지고 이렇게 자기 힘대로 계명을 지켜 나갈 때에 나가면 예수 믿어서 자기는  절단이 난다. 오히려 ‘예수 믿어서 도리어 모든 것이 안 돼지고 실패되어지고  망한다. 예수님이 나에게는 대해서 거부하신다. 나를 환영하지 아니하시고 내게  대해서는 반대하신다.’ 하는 그런, 주님이 자기에게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것 같은 ‘나는 예수 믿어서 효력이 있는  게 아니라 내게는 효력이 없다. 예수 믿어 효력이 없다.’ 예수 믿어야 아무  효력 없다는 그런 것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그런 순서가 올 때에 그때에, ‘나는  하나님이 나는 버리신 사람이요 내게 대해서는 하나님이 내가 암만 기도해 봐야  응답도 안 하시고 나 혼자 백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내게 상관이 없다.’  요렇게 보여질 수 있는,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거부와 같은 그런 단계를 통과할  때 그때에 우리는 낙망하지를 아니하고 그럴 때에 소망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다가 여인이 와 가지고서 부르짖으니까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러니까 예수님 만나 가지고 은혜 받고 자기 소원 이루려  했는데 예수님이 가나안 인간이라고 아주 멸시해서 개와 같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그런 멸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따라와 가지고 아주 모욕당했고  멸시 당했고 이렇게 됐습니다.

멸시하고 모욕을 할 때에 이 여인은 ‘옳소이다.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러면 이 여인은 자기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도리어  모욕을 당하고 개라는 이런 취급으로 천대를 당하고 이리 됐을 때에 자기는,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한 것 아닙니다.

자기는 ‘나는 이방 여인이기 때문에 참 개와 같은 여인이다. 하나님의 성민에  비해서 개와 같은 여인이다.’ 자기는 자기가 개라고 주님이 자기를 말씀한 게  아니지마는 자기가 들을 때는 자기를 개로 인정하는 그것이 지내친 말이 아니고  자기에게는 합당하다는 그것을 느껴 가지고서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러면 예수님을 향해서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향하여 소망을 가짐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도리어, 좋은 것이 오지 안하고 이 불행스러운 것이 왔습니다.

불행스러운 그런 것이 왔을 때에 불행스러운 것 온 그것이 자기로서는 그런  불행을 당하는 것이 마땅한 자인 줄 아는, 자기를 알아서 자기는 그와 같은  불행을 겪는 그것이 합당한 자로 여기는, 자기에게, 자기 실상을 자기가 알고,  자기는 이방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에게 닥치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오는 그 불행스러운  그런 일이 사회적으로 올 때도 있고, 경제적으로 올 때도 있고, 또 그 직장에서  올 때도 있고, 예수님 때문에 덕은 못 보고 예수님 때문에 천대받고 멸시받고  이것 뭐 손해받고 절단나는 그런 일이 오는 그런 단계가 우리에게 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유익은 보지 못하고 손해보는 그런 단계가 옵니다.

명예적으로, 활동적으로, 또 취미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사업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오히려 예수 믿어서 자기에게 역효과로 손해가 오는 그런 일이 있을  그럴 때에 사람들은 낙심하기 쉽습니다. ‘아무 소용없고 도로 해만  당한다.’그럴 때에 이 여인이 큰 믿음이라고 칭찬받은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양심적으로 냉정스럽게 생각할 때에 그 말이 자기에게는 지당하다는, 그  지당하다는 그것을 자기는 인정하고 그래도 주님에게 소망하는 그 소망을 끊지  아니하고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이렇게 자기  주관에 대해서 상반적으로 자기 주관을 아주 박살내는 그런 일이 있어도 자기  주관을 전적 부인하고서 자기야 어쨌든지 요 귀신들린 아이가 나아야 되겠다는  그 소망, 요 소망이, 요 소망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부인할 양의 그 양을 다  부인을 하고 남은 그 소망이 있을 때에 그 소망이 그것이 성공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것을 가리켜 주님이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원대로  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요 도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처음에 부르짖어도 못 들은  척 주님이 가시는 그것, 그와 같은 성질적인 그 일이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에  요 이치와 같은 요 성질적인 그런 단계가 우리에게 있는 것, 그럴 때도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계속 노력할 것,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냈다” 그 여인은 가나안 여인 이방  여인이라 말이오. ‘이스라엘에게 보냈지 이방에 보낸 건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자기에는 상관이 없는,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내가 이  기도하고 이러는데 암만 해도 예수 믿는 효력이 내게는 상관이 없는 가배.’ 나  혼자 백지 이렇게 하지 상관이 없다는, 자기에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런 그 단계가 올 때에 그 단계를 극복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유익은 안 오고 모든 면으로 손해가  오고 그 어려움이 올 때에 어려움과 손해가 오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지당하다는  그것을 느끼는, 그 양심에 깨는 그것이 자기에게 있는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게 준비가 되어지고, 이 세 가지 이런 어려움이 와도, 이 세 가지 어려움이  와도 이 세 가지 어려움의 중량보다, 이 세 가지 어려움의 중량보다, 주님이 못  들은 척하는 그 냉면 아니요? ‘나는 이스라엘에 보냈지 나는 딴데 보내지  안했다.’ 거부하는 그것 냉면 아니요? ‘개에게 주는 게 마땅치 않다.’ 이렇게  말씀한 것은 얼마나 멸시요 그 천대요? 이런 종류의 것이 예수님에게 소망을 가짐으로 인해서, 예수님에게 소망을  가짐으로 인해서 그 소망 때문에 내가 내게 현재 손해보는 그 손해의 양이  있습니다. 그 손해의 양이 내게 있을 때에 그 손해의 양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나님께 우리가 소망하기를 백 근짜리를 은혜를 하나 소망합니다. 백 근짜리  은혜를 하나 소망하면 하나님께서 자, 서른 근짜리, 서른 근짜리, 이 백 근짜리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향하니까 서른 근짜리 당장 손해가 보는 일이 있습니다.

서른 근짜리 손해봐도 또 달라듭니다. 또 서른 근짜리 손해가 또 옵니다. 또  손해봐도 또 달라듭니다. 또 서른 근짜리 손해가 또 옵니다. 서른 근짜리 손해  와도 또 달라듭니다.

서른 근짜리, 그러면 구십 근 아닙니까? 이 구십 근이 구십 근 손해를 봐도  자기가 백 근짜리를 원하니까 열 근이 더 많지 않소? 이것보다 이 중량보다 자기  소망하는 그 양이 커졌을 때에 그 사람은 이것을 희생하고라도 소망하게 되는  것이고, 요것보다 요 희생보다도 더 큰 소망의 그 소망을 가져야 주님이 그걸  주실 수가 있지 그렇지 안하면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건 반드시 조건부입니다. 조건부이기  때문에 주님에게 소망하는 그 소망에 따라서 어느 정도 내가 낮아져야 그 소망이  이루어지느냐, 어느 정도 나를 부인해야 소망이 이루어지느냐, 어느 정도 내가  손해를 봐야 이루어지느냐? 이제 거기에 대한 댓가인, 그 댓가는 뭐이냐? 요것  좀 어려운 말이라서. 거기에 대한 댓가는 뭐이냐? 그 댓가라는 것은 자기  부인이요, 자기 깨지는 것이요, 자기 낮아지는 것이오.

요것이 낮아지는 것만치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주님을 소망하는  것이라 말이오. 요것이 깨져도 그걸 가져야 요것보다 크게 소망하는 것이지.

그러기에 거기에 견제되는, 거기에 전제 조건으로 되는, 자기를 부인하는 그것이  “돈 없어도 값을 주고 내라 사라” 값 주고 사라 하는 그것이 곧 자기를  부인하는 그걸 댓가로 말한 것인데.

이러니까 거기에 견제되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전제 조건으로  나열시킬 때에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소망, 거기에 따른, 요만한 것을 주시는  데에는 그만치 너를 부인해야 된다. 백 근을, 백 근짜리를 네가 소망하면은 네가  구십 근짜리를 부인해야 된다. 네가 천 근짜리를 원하면 네가 무슨 한 몇백 근  중량을 부인해야 된다.

반드시 거기에 조건부의 자기를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것이 와지는 것이고, 자기  것을 버림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조건부로 부인되는 그것이 나올 때에  그것보다 더 크게 소망해야 그 손해를 보고도 그걸 잡지 그것을 크게 여기고  저걸 적게 여기면 자기가 참고 견뎌서 그걸 소망하지 안합니다. 그러면 소망하지  않은 것은 그것을 소망하는 것이 그만한 중량으로 실지의 중량만치 자기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믿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 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반드시 주님에게 무엇이든지 구할 때는 내가 구하는 그것이  나는 그 중량이 얼마가 되는지를 모르지마는 주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그만한 중량을 주님에게 구할 때는 ‘네가 이 중량이 얼마나 큰지 네가 아나?  얼마나 큰지 알고 네가 이걸 구하느냐?’

만 근짜리를 한 근짜리로 알고 구하면 그것 모르고 구하기 때문에 그걸 줄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그 중량이 어느 정도 큰가 요것을  전제로 볼 때에 하나님은 그걸 시험합니다.

시험할 때에, 보배로운 것 있으면 내가 주님에게 구하는 소망하는 것과 이것과,  ‘이게 크고 좋은데 이것 하지 내가 그것 안 할랍니다.’ 헛일 안 한다 그거요.

‘이것이 없어도 그게 좋습니다. 그게 큽니다.’ 이렇게 해서 그 중량의 양에 도달해야 하나님께서 주실 수가 있고 또 그래야 그  가치를 알아야 그것을 제가 가지고 있지 그것 그렇지 않으면 받을 수도 없고  받아야 보관을 못 하고 그 은혜를 헛되이 저버리기 쉽다 말이오.

또 그것을 받는 데는 자기를 어느 정도 부인을 해야 그것을 받아서 선용이  되어지지 부인 안 하고 받아 놓으면 그게 악용이 되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기 때문에 거기 대한 자기를 부인하는  양만치 부인이 돼져야 되어지기 때문에 그 부인을 그것을 하도록 전제로 둬  가지고서 그걸 부인해야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신앙이 되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에 대해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계2:10)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인이 이 믿음이 크다 하는 이 말씀은 그 여인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넉넉한 댓가가 되는 믿음이 된다는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고, 그러면 이 크다는  그 믿음은 어떤 것을 가리켜 말씀했느냐? 이 삼 계단으로, 못 들은 척,  ‘이스라엘에게 보냈지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거부, 마지막에는 ‘자녀의  떡을 개에게 준다.’ 이로 인해서 주님에게 도로 자기에게는 오는 참 모욕적인  해 이것이 와도 이것보다, 이것보다 자기의 소망하는 그 소망의 소원이 더 크고, 이렇게 자기에게, 모든  사람이 볼 때에 자기에게 이런 주관에 와도 이래도 자기의 주관을 부인하고  이래도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의무와 책임과 요 관련이  있다는 요 소망이, 놓지 안하고 요 소망이 굳게 끊어지지 안하고 소망을 잡고  있는, 이런 것들을 능가한 소망을 가진 그것을 믿음이 크다 하시면서 주님께서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향할 때에 “네 믿음이 크도다” 하는 요 믿음, 요  믿음은 삼 단계의 순위를 거쳤기 때문에 그 삼단계 순위 그런 성질과 같은 것이  주를 바라볼 때는 반드시 우리에게 일 단계 이 단계 삼 단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미리 예배 지식으로 가지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에 요와 같은 것이  있으면 이미 예비 지식으로 가졌기 때문에 ‘아, 요 일 단계가 온다.’ 또 그  다음이 올 때 ‘이 단계가 온다.' 그 다음이 올 때 ‘삼 단계가 온다. 인제  된다.’  이럴 수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할 능력을 가지고, 모든 환경을  극복한 이 능가한 소망을 가지고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형식을  가지고서 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그것을 삼 단계로 기억만 하십시오. 아마 여러분들이 들어도 잘 모를지 모르니까  요다음에 언제 금요일날 밤일런지 혹 주일날인지 한번 더 똑똑히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주를 향할 때에 주님이 내게는 상관하시지 않는 것으로  보여지는 이 모든 암흑의 토막, 주님이 나를 정반대하시는 것으로 보여지는 모든  암흑의 토막, 주님으로 인해서 도리어 손해만 와지는 것으로 보여지는 이 암흑의  토막, 이것은 주님이 이렇게 하심은 아니고 주님은 ‘자녀에게 줄 네게 줄  은혜를 개에게 주겠느냐? 흩어져 있는 잃어버린 이스라엘 너를 찾아서 이까지  왔는데 너를 버리겠느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여인으로서 더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간절한 심령을 일으키는, 주님은 내적으로 이렇게 구원 역사를 하고  있지마는 인간 주관들이 볼 때는 이렇게 보여지는 이것을 여인은 부인하고  주님에게 소망을 가지고 나아갔기 때문에 칭찬받은 믿음으로서 소원이 이루어진  이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 가지 성질로 보여지는 그 순서를 밟을 때에 주님은 나에게 구원해  주시려는 그 순서의 공작을 하고 계시는 이 사실을 부인케 하는 인간 생각, 내  주관, 내 관념, 내 모든 경험 이런 것을 완전히 부인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이 큰 믿음을 가지게 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주님, 우리에게 이 가나안 여인과 같은 이런 믿음을 연구하여 가지고 이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저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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