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선교회 가나안 여자의 믿음

 

1981. 1. 16. 새벽 (금)

 

본문:마태복음 15장 21절∼25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어제 아침에는 이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주님이 칭찬하신 믿음의 큰 그 증거  첫째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렇게 부르짖었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고 그대로 걸어가셨습니다. 이러니까  제자들이 보기에도 너무 냉정스럽게 하시고 아무런 상관 없는 것으로 표시를  했습니다.

이것이 그 여인에게는 주님이 말 없이 자꾸 걸어가시니까 소원이 더 급박하고  뜨거워졌습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저렇게 가시니 아무래도 이번에 내가 이  해결을 받아야 되겠다.’ 하는 그 소망이 또 급박하고 강해졌습니다. 이러니까  이 여인이 급히 달려서 주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더 마음에 더 뜨거워지고 더  힘을 내게 됐습니다. 그것을 어제 아침에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제자들이 ‘저렇게 뒤에서 부르짖고 있으니까 무슨 말하든지 해서  보내십시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다른 데 보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에게 보냈다.’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에게  보냈다 이렇게 주님이 또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그때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그들이  이스라엘이오. 다른 데로 보낸다는 것은 다른 것은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족속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 여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고 이방 여인입니다. 이러니까  그 제자들이 들을 때에 ‘이 여인에게는 주님이 오심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만  왔지 이방 사람들에게는 오시지 아니한 것이니까 예수님께서 대답도 안하시고  그렇게 상관 없는 것으로 행동을 취하시는구나’ 이렇게 제자들은 봤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간구하는 것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간구에 대해서 정반대입니다, 정반대.

여인은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으려고, 예수님의 이 도우시는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에게 보내서 왔지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이스라엘에 보냈지 이스라엘 아닌 그 이방에게는 보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씀했으니까 이 여인은 이방 여인이니 이 여인에  대해서는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했습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하니까, 받으려고 간구하니까 ‘나는 네게 온 것이 아니다’  이랬으니까 거부 반대 아닙니까? 거부 반대의 말로 그 모든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모든 제자들은 다 그렇게 듣고 ‘이방 여인에게는 보내지 않은  것이니까 이 여인은 가나안 여인이기 때문에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고 그래서  예수님이 거부하시는 것이로구나’ 거부하는 것으로 이렇게 여겨졌는데 이  여인은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거기에 거부를 당하는 것으로 돌아가지 안하고  거부를 당하는 거기에서 그 거부를 초월하고, 거부를 능가하고, 거부를 넘어서  예수님에게 달려와 가지고 그 앞에 절을 하면서 ‘나를 도우시옵소서’ 그러면  더 예수님에게 겸손히 간청하면서 절하면서 ‘도우시옵소서.’ 겸손히 간청하는  그 간청으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붙었습니다.

이제 멀리 있던 여인이 주님에 가까이 딱 와서 그만 주님을 가로막아 서 가지고,  가시는데 가로막아 서 가지고 그 앞에 절하면서 ‘나를 도우시옵소서’ 도움을  간구했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보시고 `네 믿음이 크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에게 대해서 소원을 가지고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실 이는 주님밖에  없는 주님에게 소망과 소원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이런 순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과 예수님은 정반대 됐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은  반대됐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은 반대가 됐어! 예수님과 여인은 반대가 됐습니다.

누가 봐도 반대요. 제자가 봐도 ‘반대하는구나. 예수님이 이 여인에 대해서는  반대하시는구나.’왜? ‘이스라엘에 보냈지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하셨으니까  이 여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말이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방 여인이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여인에게는 온 게 아니다.’ 여인의 그 간구에 대해서 반대했다  말이오. ‘나는 여인에게는 온 게 아니다’ 반대했습니다.

반대로 이렇게 사람 보기에는 꼭 반대인데 이래도 이 여인은 반대되는,  반대하시는 그 입장에서 도리어 주님 앞에 가로막아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절하면서 ‘나를 도와 주옵소서’ 하는 그 간청을 했었습니다.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또 그 다음에 또 엄청난 말씀을 또 했습니다.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치 않다’ 또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것은 다음  시간에 하고.

이렇게 반대로, 반대의 주님이 됐을 때에 그때에 그 반대로 인해서 물러가지  안하고 그 반대되는 그때에 도리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와서 주님 앞에 이래  걸어가시는, 걸어가시는 그 주님 앞에 가로막아 가지고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하면서 ‘나를 도우시옵소서’ 이렇게 여인이 말했습니다. 요것이 주님 앞에  칭찬받을 수 있는 큰 믿음입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즉시 됐습니다.

그러면 요 큰 믿음으로 인정받는 이 큰 믿음이 된 원인이 세 가지인데 세 가지  중에 하나는 어제 아침에 말했고 둘째 것을 지금 오늘 아침에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이렇게 나아갈 때에 어떤 일이 있는고 하니  주님은, 곧 주의 말씀은 주님이신데 주의 도는, 주님은, 주의 도는 내게 대해서  정반대로 되는 그런, 주님의 말씀이 내게 대해서는 정반대 되는 이런 일이  옵니다. 정반대 되는 이런 일이 옵니다.

다니엘은 모든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는데 다니엘은 살아야 될 형편에 하나님의  말씀인 그 계명은 다니엘이, 하나님 말씀은 기도하라고, 하나님 말씀은  다니엘에게 기도하라고 하는 게 하나님 말씀이오. 다니엘은 기도하게 되면 어찌  됩니까? 자기는 절단나는 일 아닙니까? 자기는 죽는 일 아니요? 그러면 자기에게  정반대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람이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나아가는데 그 형편이 똑 현실이 자기 형편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일을 지켜도 아무 낭패가 되지 안할 그런 형편이 되면  좋겠는데 어떻게 어떻게 돼 가지고서 이제는 자기가 주일을 지키면 자기는 그만  사업이고 뭣이고 그만 절단날 수 있는 그만 그렇게 자기 형편에 하나님의 도가  정반대로 거슬려지는 그런 형편을 만나게 됩니다. 거슬려지는.

자기가 주일을 지키려고 하면 그 주일 지키는 것이 자기 형편에 거슬리지 안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 지켜도 아무 낭패될 일도 없고 주일 지켜도 뭐 상관없이  일들이 순조롭게 될 수 있는 요런 그 형편이 될 때도 있는데 하필 이번에는  주일을 지키면 자기 형편이 아주 사업이 절단납니다. 주일 지키면 그날 받을  돈을 못 받고 돈을 떼버린다든지, 또 지금 자기 사업에 큰 약속이 돼 가지고  있는데 그 약속이 하나 바로 의논이 돼져야 될 터인데 주일을 지키려고 하면 그  의논을 하지 못하니까 자기에게 그만 낭패가 되어지고 하는 그런 일로 온다  그거요.

또 그 사람하고 자기가 친밀해 가지고 그 사람 덕택으로 지금 살고 있는데, 그  사람 덕택으로 살고 있는데 어찌 어찌 돼 가지고서 그 사람이 말하기를 ‘야,  너는 예수 믿기 때문에 미안하기는 미안하지마는 요 거짓말 한 마디만 해 달라.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신용을 하니까 네가 거짓말 한  마디만 해 주면 내가 지금 요번에 이것 어려운 문제를 해결을 짓고 일이 형통이  되겠는데 이 거짓말 한 마디만 해 달라.’이러니까 자기는 거짓말 할 수 없는,  성경에는 거짓말하지 말라 하니까 거짓말 할 수 없는데 자기 입장은 거짓말 안  하면 그 전주와 그 관계가 뚝 떨어져 버리니까 자기는 모든 게 절단 날 그런  입장에 딱 매인다 말이오. 이러니 이 꼭 낭패 되도록만, 주님은, 주의 말씀과  주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주의 도는 자기와 정반대되는 그런 형편만 자꾸  몰려진다 말이오.

몰려지니까, 아무가 봐도 이것 하나님 앞에 지금 뭣을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를  받으려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도와 자기와 반대되는 요런 일만 자꾸  생겨지니까 하나님의 도가 자기 일이 형통해지도록 뭘 이래 해야 될 건데,  형통해지도록, 말씀대로 자기는 살려고 말씀을 바라보는데 자기 일이 하나님이  계명을 어기지 안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하는데 척척 일이 형편이 돌아가고  잘돼야 될 터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자기 일이 하나님 말씀대로 이와 같이 해도 그 일이  척척 잘 풀려 나가고 일이 잘돼 나가야 될 터인데 일이 요 꼬구라져 가지고,  일이 꼬꾸라져서 어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와의 자꾸 마찰만 생겨진다  말이요, 형편이.

형편이 일치돼 가지고 형통한 일은 닥치지 안하고 자꾸 마찰이 돼서 이 어려움만  자기에게 자꾸 부딪혀 온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럴 때에 사람들은 낙망하기  쉽습니다.

요셉이가 참 주님만 바라보고 이래 사는데 주님만 바라보고 살면 그 모든 일이  설설 풀려 가지고 형통해져야 될 터인데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데 형제들이  자기하고, 자기는 밑에 동생이지 형들은 위에 크지 이러니까 형제들에게 붙어서  살려고 애를 쓰고 형제들에게 미움받지 안하려고 이러는데 하필 하나님께서 꿈을  보였기 때문에 그 꿈 얘기를 안 하면 또 안 되도록 감동이 오지 이 꿈 얘기를  하니까 그만 형제들이 있다가 ‘그러면 우리가 다 네 종이 된다 말이냐?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와 전부 우리 형제들이 네 종이 되고 네 밑에 있다 말이냐?’  이래 가지고 자꾸 요셉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가 요셉으로 하여금  절단나게만 하지 요셉을 형통케 하지 안하고 요셉을 절단나게 하고 요셉을 자꾸  망하게만 자꾸 이렇게 만든다 말이오.

이럴 때에 요셉은 이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축복하지 안하고 나와 함께 하지  안하고 내게 대해서는 자꾸 거슬리기만 거슬리고 낭패만 되어진다’ 이래서  낙망하지 안하고 요셉이는 그런 가운데서도 그럴수록 하나님에게 더  들어붙었습니다.

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볼 때에 이방에 보내지 안했다  하니까 너한테는 지금 반대인데, 반대를 하셨는데 이 여인은 와 가지고서 앞에  절하면서 ‘나를 도우시옵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제자들이  보기에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보기에 ‘여인 저 여인이 저래 하니까 예수님께서  저 소원을 들어 주실 것이라’ 이렇게 보여졌겠습니까, 그 제자들이 볼 때에  ‘공연히 저 애를 쓴다. 예수님께서 아예 선포했는데. 내가 이스라엘에게 왔지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고, 이방 여인이니까 상관 없는 저 여인이 저래 한다.’  이렇게 봤을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여인은 낙망하고 뒤로 돌아가지 안하고 도리어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왔고 또 주님 앞에 더 겸손히 ‘나를 도우시옵소서’ 이러면서 예수님에게  달라들었습니다. 요것을 예수님께서 큰 믿음이라고 칭찬을 하신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소망을 가지고 이렇게 갈 때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형통해지지 안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로 일이 낭패가 되어지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게 무슨 도움이 되지 안하고 도리어 손해가 되어지고,  그러면 주님의 도와 말이요, 주님의 도. 그러면 주님은 말씀과 하나 아닙니까?  주님과 나와의 반대가 자꾸 된다 말이오. 반대가 돼요. 주님의 말씀과 나와 점점  반대가 돼져. 반대가 되어지기를 그 사람 형편은 그 사람의 하는 일에 하는  일마다 자꾸 주님과 반대가 돼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손해나 보여지고 자꾸  주님과 대립이 되어지는 그런 현실이 자꾸 만들어진다 그거요.

그럴 때에 ‘나는 예수 믿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내게 대해서는 낭패되는 일만 생겨지고 마찰만 생겨지고 절단나지는 요런 현실만  자꾸 생겨지니까 주님이 나를 돕지 안하시고 주님은 내게는 축복하시지  아니하시고 은혜를 베푸시지 않는다.’ 요렇게 모든 사람이 볼 때 여겨지는 그런  단계에 옵니다.

그런 단계가 올 때에 그때에 주님이 칭찬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그럴  때에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고 더 주님 앞에 더 겸손해지고, 더 겸손해지고,  그럴 때에 주님에게 호소하는 것은 뭣입니까? ‘나를 도우시옵소서’  `도우시옵소서' 절하고 도와 달라는 요 두 가지, 주님에게, 그런 형편이 왔을 때에 이 여인이 한 일은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와서, 그러면 주님을 가로막아 서 버렸습니다, 그만. 가로막아 가지고 그  앞에 그만 엎드려 버렸어. 그러면 주님 앞에 더 가까와지는 요 행세했고, 또  주님 앞에 더 겸손해지는 요 행세했고, 주님에게 도와 달라는 요 행세했고 요 세  가지만 했습니다.

세 가지 할 때에 그 여인이 ‘주님이 그래도 이스라엘에게 보냄 받았지 이방에게  보냄 받지 안했다는 그것은 나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하는 그런 말이겠느냐?’  하는 그 이치나 그런 것 다 몰랐습니다. 그 이치도 몰랐고 ‘주님이 이렇게  거부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그것도 생각지 안했어.

생각지 안했는데 왜 그 여인이 그와 같이 하게 됐더냐 하면은 여인이 그와 같이  하게 된 원인은 자기가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있는 그 어려운 문제 그 문제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무래도 해결을 받아야 되겠다 하는 자기의 소원이 강한  그 소원이 강함으로 인해서 그 여인이 그렇게 하게 됐습니다.

또 ‘암만 이렇지마는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안할 것이라’ 하는 그런 주님의 그  인자성을 바라봄으로 말미암아 이해해서 그런 게 아니고 자기가 소원이 강하니까  아무래도 이분에게 안 되면 말이지요, 그냥 거부하면, 거부하면, 거부해도 또  달라들고 거부해도 또 달라들고 뭐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거부를 해도  기어코라도 한번 이분에게서 이 문제를 해결받지 이제까지 뭐 살림 다  없애버리고 암만 해 봐야 안 낫는데 이분에게밖에는 나을 수 없다 하는 그  소망의 강함을 인해서 주님 앞에 이렇게 간구하고 소원을 버리지 안하고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앞에 그 사람이 이렇게 거부를 당하는 이런 일이 있어도, 반대를  당하는 이런 일을 당해도 그 사람이 반대당하는 그것을 능가할 만한 그만한  소원이 강했고, 그 소원이 강했고, 소원이 강했는데 그 소원은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주님에게만 소망하는 그 소망이 또 뜨거웠고, 이런데 주님이 거부를 하니까 어찌 됐겠습니까? 거부를 하니까 그 사람이,  소원이 뜨거운, 소원 뜨거운 이것이 제일 주동입니다. 소원이 뜨거워 소원이  이것이 강해지니까 주님이 거부하지마는 아무래도 이분에게밖에는 해결받을 수  없으니까 주님께 대한 소망이 더 강해졌고, 소원과 소망이 강해졌으니까, 주님은  자꾸 거부한다 말이오.

거부하니까 소원과 소망이 강해졌으니 거부하니까 여인은 어떤 태도를 해야  되겠습니까? 더 달라붙어야 될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그냥 말해 안 되니까  빌어야 될 것 아닙니까? 안 되면 막 그 앞에 꿇어 어군드려 간구해야 될 것  아닙니까? 더 겸손해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고 그 다음에는 도움을  간청할 수밖에 없다 그거요.

요 성격의, 요 성격의 소원이라야, 요 성격의 소망이라야, 요 성격의 겸손과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라야 요것이라야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끌어올 수가 있고  하나님 역사를 끌어올 수가 있는 것을 여기에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좀  깨닫기가 참 좀 어려운,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무슨 좀 어려움이 있든지 반대돼서 자기와의, 주님의  도와 자기와는 반대되는 그 현상이 자꾸 나타나게 될 때에 그때에 ‘아이고,  그러면 그만 안 됐는가보다.’ 하고서 낙망할 수 있는 그런 소원은 주님 앞에  이루지를 않습니다. 그런 소원은 주님 앞에 이루려는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안해야  됩니다.

자기와 마찰되는 그런 현실이 온다고 ‘마찰되든지 말든지 아무래도 이 소원은  이루어야 되겠다. 아무래도 주님이 이 소망을 이 소원을 이루어 줘야 되겠다.’  주님에게 소망하는 것, 소원과 소망이 자기와 주님의 도와의 현재 마찰되는,  정반대 되는 여기에 밀려 나가지 안하고 이것을 능가할 수 있는 이 강한 소원,  이 뜨거운 소망, 이렇게 자기에게 마찰되는 이런 일이 되어질수록 더 주님에게  겸손히 달라붙는, 이방 여인이니까 뭐, 그렇지만 이방 여인에게는 ‘이방에게는 오지 안했다’  이랬으니까 이 소원이 크니 이스라엘, 그 사람이 이스라엘 여인이면, 이스라엘  여인이라 하면, 이방 여인이라 하면, 요렇게 자기에게 반대되는, 반대되는,  주님이 반대되는 이런 발표를 했을 때에, 반대되는 이런 발표를 해 ‘이방에게  간 것은 아니고 이스라엘에게 보냄을 받아 왔다.’ 이럴 때에 그 여인이 만일  이스라엘 여인이라고 하면은 어찌 되겠습니까? 소원이나 소망이나 또 주님 앞에  겸손해지는 것이나 주님의 도움을 간청하는 것, 간청하는 것이 이것이 이스라엘  여인이면 그 도수가 강해지겠습니까 이방 여인이면 도수가 강해지겠습니까? 어떤  여인이 도수가 강해지겠지요?  집사님? 어떤 여인이면, 어떤 족속이라면,  이스라엘 족속이면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 대해서 이 모든 것이 좀 이제  뜨거워지고 강해졌을까 이방 여인이면 강해졌을까? 어떻겠습니까? 그것 좀  어렵지요? 뭣이? 소원이? 그렇지요. 소원이 아무래도 안 하면 안 된다. 아무래도  주님에게 소원을 이루어야 되지 주님이 이루지 안해 주면 안 된다.’ 하는  그것이 딴데는 없으니까 자기는 ‘아무래도’ 하는 그것이 강하면, 강하면 다  같이 이스라엘 여인과 이방 여인 그 두 여인이 이 소원을 가지고 이런 형편을  당했으면 둘이 꼭 같은 강함을 가졌다고 하면, 소원의 강함을 가졌다고 하면은  이스라엘 여인이 더 서둘겠습니까 이방 여인이 서둘겠습니까? 이방 여인이  서둘지요. 이방 여인이 서둘지요.

만일 ‘그까짓 것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한번 말해 봐서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그 소원이 약하다고 하면, 약하다고 하면은 이스라엘 여인이 그 일에  대해서 그 마음이 더 강할까요 이방 여인이 강할까요? 이스라엘 여인은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방 여인은 아예 포기하고 낙망하고 가 버리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것입니다.

이 여인은 소원과 소망이 딴데 없기 때문에, 딴데 없기 때문에 그래 할수록이 더  합니다. 안 주려 할수록이 막 결사적으로 달라듭니다, 안 주려고 할수록이. 요걸  큰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요것을 큰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요런 소망이 아니면  안 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병든 사람, 또 사업을 하는 사람, 또 자기가 무슨 출세를  하려는 사람, 하나님에게 죄되지 아니하는 그런 것을 주님에게 소원할 때에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일이 다 주님이 해 주시기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죄되지  안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은 해 주시기로 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주님을 향해서 소망을 가질  때에 요런 성격의, 요런 도수의, 요런 강도의, 요런 소망의, 그 여인으로서는  변동 없는, 변동 없는 그 절대성 있는, 절대는 못 붙이지마는, 변동 없는 그  간청성 요것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라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으로  구하지 말아라” “의심치 말아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다 물결이 흔들리는  것과 같이 두 마음을 품어서 정한 데가 없다” 그러면 간청하는, 간청하는 요  마음뿐이고 ‘간청하다 안 되면 말아라’ 하는 그 마음이 없다 말이오. 그래야  그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좀 어려워서 단번에 여러분들이 알아듣기가 너무 거리가 멀어서 모를 것입니다.

또 오늘 저녁에 또 계속하겠습니다.

잘 들어서, ‘요 네 믿음이 크도다’ 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뭣  이루어졌습니까? ‘네 소원대로 되리라’ 당장 이루어졌다 말이오. 그러면 네  믿음이 크도다 하는 큰 믿음 요것이 세 가지 종류인데 하나 어제 아침에 말했고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지금 말해도 여러분들에게 통해서 잘 들리지 안하는 것  같은데 요것을 모르면 헛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소망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소망할 때에 이 소망하는 이것이  이루어지는 그런 형편이 보여지는 게 아니라 말이오. 소망하는 이것이  이루어진다, 기도해도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듯 하면은 힘을 씁니다. ‘하,  소망이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 갑다. 뭣이 돼지는 갑다. 형편이 되는 것 같다.’  요렇게 되어지는 것같이 보여지면 열심을 냅니다. 소망을 두고서 하는데  되어지는 형편이 보여지는 게 아니라 정반대로 안 되어지는 것, 정반대로만 자꾸  나타나게 될 때는 사람이 낙망하고 만다 말이오. 그럴 때가 그것이 이제 성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 사람 보기에 그렇기 때문에 거부같이 이래 보기 때문에  사람이 낙망합니다. 그러면 속에 실상은 예수님이 우리를 놀리려고, 그 여인을  놀리려고 거부했다가 이제는 들어서 환영을 합니까, 거부했다가 들어 주십니까,  예수님은 거부하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딴데 보낸 게 아니라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냈다’ 하는 그 말씀은 그 여인에게 왔다는 발표입니까 안  왔다는 발표입니까? 무슨 발표요? 안 왔다는 발표입니까 왔다는 발표입니까?  왔다는 발표입니다. 그 여인은 주님이 보실 때에는 그 여인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입니까 그것이 이방입니까? 잃어버린 자입니다. 택한  자요.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믿음이 크다 하고 구원했으니까 예수님이  가나안에는 뭣 때문에 왔느냐? 그 여인보고 왔다 말이요, 여인 찾아왔다  그말이오. 다른 데 간 게 아니라 딴 사람 보러 온 게 아니 여인 보러 왔어요. 그  여인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저 먼데서 저까지 찾아오셨다  말이오. 찾아오신 걸 예수님은 말씀하시지마는, 찾아오셔 가지고 은혜를 베푸시는 순서로 예수님은 지금 역사합니다. 은혜  베푸실 순서를 역사하지마는 예수님은 이 여인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것은 그것이 인간이 볼 때에 그렇습니까 실상이 그렇습니까? 어떻소? 실상은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그 일 하려고 지금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데 인간이  보기에는 정반대로 보였습니다. 요것이 주님과 우리와의 사이의 관계입니다.

그러기에 요것을 왜 요 성경을 우리에게 보여 주느냐? 요렇게 보여지는 그때에  요 여인으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견해와 주님의 역사와는 다르다 그말이오.

인간의 주관의 견해는, 주관의 견해에 주님이 나를 버린 것같이 보여지는 그것이  주님이 나를취하는 것이요, 나를 반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것이 주님이 나를  환영하는 것이요, 나를 깨뜨리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것이 주님이 나를  건설시키는 것입니다.

요것을 능가할 수 있는 요, 그 여인이 요걸 알고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참  여인이 요와 같이 한 것이 주님 하시는 일에 딱 들어맞아 버렸습니다. 주님의  하시는 일을 똑 알고 하는 것같이 모든 제자들에게 저 반대한 것이 주님이  역사하시는 일에 딱 들어맞았기 때문에 큰 믿음이 됐어.

이랬는데 이 여인이 이와 같이 한 것은 이 사실을 알고, 알아서 했습니까, 뭣이  들어서 이 여인은 달라붙었고 겸손해졌고 도움을 간청했고 이런 이 세 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여인이 ‘너거 제자들 보기에는 그렇지마는 주님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왔다는 것은 나한테 왔다는 말이다.’ 이것을 알고 이렇게 했습니까 이 여인이  한 것은 뭘로써 이렇게 했습니까? 소원이 강한 그게 들어서 이 여인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요렇게 또 ‘아무래도 주님 아니면 안 된다.’ 그 소망의, 소망이 여기에도 있고  ‘안 되면 저기 하지. 안 되면 말지.’ 소원이 안 되면 말지가 아니라 꼭 돼야  되겠고 또 딴데는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요것을 그가 가졌기 때문에 소원과  소망의 견고한 그 강도가 들어서 이런 것을 능가하고 말았습니다. 요런 강도적인  소원과 소망이 아니면 주님은 우리에게 일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우리 보기에는 소원한 것 같지만 속에 주님 보실 때는 안 믿는 것뿐인데, 안  믿는 것뿐이고 속에는 안 믿는 것뿐인데 어떻게 주님이 일할 수 있습니까? 안  믿는 자에게 불신하는 자에게 일할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안했어요? 이러니까  그것이 섞임이 없이 소원과 소망이 된 데는 요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런 사람이  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은 신실하신 약속한 걸 어기지 않는 분이라 요걸 확실히  믿으니까 이삭을 잡아 제사를 드리라 했는데 잡아 제사드리면 불에 태워  번제드리면 죽이는 것 아닙니까? 불에 태워 죽이는 것 아닙니까?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인데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어기지 안하는 하나님으로 확실히 믿으니까  아브라함은 그 번제드릴 때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네 아들 이삭에게서 네 자손이 많이 날  것이다. 혈육의 자손이 날 것이다. 장가가 가지고서 아들 낳고 이렇게 낳을  것이다.’ 요걸 하나님 약속을 했는데 하나님이 불에 태워서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아브라함은 이 두 가지를 믿으니 번제로 하라 하니까 순종하고 믿고  번제로 태워 죽일 것이고 또 하나님이 아이 낳을 것을 지금 약속했기 때문에  그것 믿고, 이러면 아브라함에게는 그 이삭에게 대해서 어떤 생각이  나오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한 것도 신실히 지키시고, 또 번제로 태워 죽이라 하니까 요 말도  믿고 번제로 태워 죽여야 될 것이고 또 하나님은 이삭이 생산을 할 것으로  요렇게 하나님이 약속을 했고, 이러니까 아브라함은 그때에 이 이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가졌겠습니까? 이삭은 이제 불에 태워 죽이면, 불에 태워 죽이면 재가 돼서 죽어 재가 됐을  것으로 그렇게, 재가 될 것으로 아브라함이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재가 될  것으로 인정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인정했지요. 인정했는데 또 아이 낳을 것을  또 하나님이 말씀했기 때문에 또 그걸 믿으면 또 어찌 됩니까? 어찌 됩니까?  재에서 살려낼 것, 재에서 살려낼 것 요걸 믿었다 말이오. 요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태워서 죽여서 재가 될 것도 인정했고 ‘재가 되면은 이제는 그만 끝났다.’  ‘하나님께서 아이 낳는다 했는데. 육체의 자손을 낳는다 했는데.'  ‘그러면 어찌 낳겠노?’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약속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재봉지를 인제 살아 나 가지고 아이 낳는다.’ 이걸 믿었다 말이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시킬 것을 그때에 아브라함이  부활이라 하는 그 지식을 가졌습니다. 요 두 믿음으로 이제까지 부활이란 말이  없었는데 아브라함이 먼저 부활이라 하는 요것을 첫 지식으로 발명했습니다.

그것도 여러분들은 좀 아마 알아듣기가 좀 어려운 말일 것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하나님과 자기와 마찰돼 대립이 되는 그것을 능가할 수 있는 그런  강한 소원, 강한 소망, 그 여인은 그게 들어서 해 놨어, 딴게 아니고. 요럴 수  있는 요 소망과 소원의 강한 요 강함을 인해서 요 강도가 들어서 거부에서  물러가지 안하고 기어코라도 달라들어 가지고 더 뜨거워졌고 더 강해졌고,  강해진 요 믿음을 가리켜 큰 믿음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5436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 810104수야 선지자 2015.10.21
5435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10117토새 선지자 2015.10.21
5434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80110주전 선지자 2015.10.21
»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5절/ 810116금새 선지자 2015.10.21
5432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10116금야 선지자 2015.10.21
5431 가나안 여자의 믿음/ 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880110주후 선지자 2015.10.21
5430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장 38절-39절/ 800207목새 선지자 2015.10.21
5429 가르치고 가르침 받는 것의 생명은/ 갈라디아서 6장 6절-8절/ 870617수새 선지자 2015.10.21
5428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70611목새 선지자 2015.10.21
5427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70612금새 선지자 2015.10.21
5426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70613토새 선지자 2015.10.21
5425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80920화새 선지자 2015.10.21
5424 가르침의 중요성/ 요한계시록 2장 23절/ 890122주새 선지자 2015.10.21
5423 가인과 아벨의 신앙/ 창세기 4장 1절-12절/ 750713공과 선지자 2015.10.21
5422 가장 기쁘고 행복한 자는 38년된 병자/ 히브리서 5장 7절/ 850419 지권찰회 선지자 2015.10.21
5421 가정_부부제도의 비밀/ 에베소서 5장 22절-6장 4절/ 880605주전 선지자 2015.10.21
5420 가정교회/ 에베소서 5장 22절-33절/ 800217주전 선지자 2015.10.21
5419 가정교회/ 에베소서 5장 22절-27절/ 800218월새 선지자 2015.10.21
5418 가정교회/ 에베소서 5장 27절/ 800220수새 선지자 2015.10.21
5417 가정교회/ 에베소서 5장 22절-33절/ 800224공과 선지자 2015.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