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자의 믿음

 

1988. 1. 10. 주일오후

 

본문:마태복음 15장 21절∼28절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는 이 표적의 말씀, 문서 계시의 말씀이라고 하면은 이 글로 써서 하나님의  구원 도리를 가르쳐 보이는 것을 말해서 문서 계시라 그렇게 말하고, 또 이 자연  모든 만물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을  가리켜서 자연 계시라, 자연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자연 계시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이런 표적을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것을 가리켜서 표적 계시라, 이런 형식의 역사를 통해서 가르친다고 해서 역사  계시라, 형식 계시라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계시를 읽고 또 듣고 또 다른 사람이 깨달은 것 내가 깨달은  것 그런 모든 것을 우리가 들어서 종합해서 깨달았을 때에 우리가 이런 일을  닥치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이대로 실행을 해 봐야 됩니다. 이대로  실행을 해 봐야 실제로 되나 안 되나 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볼 수 있고  체험해 볼 수 있지 이렇게 말씀은 말씀대로 듣고 제가 실제로 이런 일을 닥쳤을  때에 이대로 행해보지 아니하면 어떻게 그 말씀대로 하면 되나 안 되나 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전부 다 이 계시 종교로서 하나님께서 열어 보여 주셔서  우리가 아는 건데 땅에 있는 불교나 뭐 유교나 모든 종교는 그것은 계시 종교가  아니고 그것은 사색 종교입니다. 저희들이 찾고 연구해 가지고서 아는 것이기  때문에 찾아 봤자 제 속에 있는 것 연구해 봤자 제 속에 있는 것이지마는서도  기독교는 순전히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밖에 타에게 있는, 곧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 때에 우리가 받아서  들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 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표적 계시라 말은, 표적이라  말은 속에 무엇이 있는 것을 겉어머리로 그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가리켜서  표적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여게서 여인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껍데기 볼 수 있는 것이요 이것이  가리키고 있는 속에 알맹이는 뭐인가 하는 그것을 오전에도 증거했습니다.

그러면, 알맹이를 우리가 듣고 배우고 했으니까 우리들이 이 여인의 형편과 자기  형편을 이렇게 살펴봐서 여인의 형편과 자기 형편이 같을 때에는 자기의 이 행동  방편이 여인과 같이 하면 다 성공을 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가 어떤 형편과 처지를 만나든지 반드시 그럴 때에는  ‘성경에 보자, 나와 같은 형편과 처지를 가진 사람이 누구냐? 나와 꼭 같은  형편과 사정과 처지를 가진 사람들이 누구며 또 그는 그때에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했으며 자기에게 대해서 어떻게 했으며 그 모든 상대하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을 성경에 빠짐없이 다 말해 놨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 가지고 그 형편에는 그 방식대로 우리가 신앙 생활하고 저  형편에는 저 방식대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은 다 해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우리에게 못 할 것이 없는 온갖 방편을 신구약 이 성경 말씀에 다 보여  주시기 때문에 그것만 알면 자기 형편 사정이 성경에 없는 형편 사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와 꼭 같은 형편 사정이 성경에 다 있으니까 이 성경에서 자기와 같은 형편  사정을 찾아 가지고 거기에 그 사람은 어떻게 해서 실패를 했으며 어떻게 해서  성공을 했나? 그때 그 사람이 실패한 사람은 이렇게 했으면 성공할 터인데  이렇게 하지 안해서 실패했다, 그 사람은 과연 이렇게 했더라면 실패했는데  이렇게 해서 성공을 했다 하는 그런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다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니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우리가 당할 모든  실패를 다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고 또 우리가 얻을  모든 성공과 승리의 그 길을 낱낱이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성공과 실패의 사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또 인간 성공과 실패의  사전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간이, 복과 화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화와 복의 사전이라,  사전. 사전이라는 그 책을 찾아 보면 다 자기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아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전이라.

또, 금생과 내세에 어떻게 하면 성공하며 실패하느냐? 어떤 사람은 비참해지고  어떤 사람은 행복스러워지느냐 하는 그런 것도 낱낱이 가르치고 있는, 금생과  내세를 다 똑똑히 정확히 가르치고 있는 사전이라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 신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보배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그러나 안 그러나 하고서 실지로 이 법칙을 사용해 본  자마다 그대로 결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기가 경험해 보고 나서  옳은 것을 경험한 사람은 자꾸 옳게 나가고 삐뚤어진 것을 경험한 그 사람은  자꾸 하나님을 부인하게 되고 삐뚤어지는 길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암만 듣고  배우고 알아도 내가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죽고 사는 것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이 말씀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이 말씀을 그렇게 아무나따나 등한히 들을 수가 있으며 또 이  말씀을 아무나따나 이렇게 해석해도 저렇게 해석해도 된다고 그렇게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잘못 해석해서 잘못 배웠으면 자기는 잘못 그 방편을 취할  터이니까 필연은 틀림없이 멸망을 받는 것이고 바른 방편을 바로 배웠으면  자기는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기에, 이 성경을 바로 깨닫는 것과 잘못 깨닫는 것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잘못 깨닫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해독이 되는 것이고 바로 깨닫는 것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이런데 뭐 아무나따나 이래 돼도 저래 돼도, 제가 평상  가야 모를 걸 들어봤자 그까짓 거 뭐, 도야지가 진주를 압니까? 도야지가 진주를  모르고 밟고 물고 뜯는다 했어. 하나님의 이 생명의 도리를 암만 보배를 말해  줘도 제가 경험해 보지 안하니까 맞는지 틀리는지 알 게 뭐이요? 만창 일생 동안을 속여도, 속이고 꾀워도 그 가르침을 좋다고 일생 동안 속으면서  기분만 좋으면 따라다닙니다. 또 자기를 일생 동안 바로 가르쳐도 자기가 보배인  줄 모르기 때문에 무시하고 멸시를 합니다.

그것은 어데 있습니까? 그거는 실제로 실험해 보지 안한 데서 그렇습니다. 실험해  보지를 안하는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실험을 해 본 사람들은 주의  말씀은 한 말씀이 천천 금은보다 낫다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실험해 보지 안한  사람이야 그 신구약 성경을 보느니 재미 있는 소설을 보고 잡지를 보지 누가  성경을 볼 맛이 누가 있겠소? 안 해 본 사람은 세상에 의학이나 과학이나 어떤  과학을 대가리 싸매놓고 공부하지 신구약 성경을 읽을 필요가 뭐 있느냐 그렇게  생각됩니다.

일생 동안 대가리를 싸매고 세상 모든 학문을 공부하는 거게는 생명이 하나도  없는 것과 여게는 지극히 큰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런 썩은 글을  읽을라고 노력하지를 않습니다.

그걸 노력하는 것도 읽는 것도, 이것을 알아야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바로 깨닫고  발표한 것을 내가 읽을 수 있겠고, 또 이것을 바로 깨닫는 데에 이 자연 계시  자연 만물의 모든 물리를 알아야 이걸 깨닫겠다 해 가지고서 신구약 성경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 세상 공부를 하지 신구약 성경을 떠나서 뭣을 행복이 있다고 해서  공부를 하는 그자는 예수 믿는 자 아닙니다.

학생들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자는 벌써 처음부터 어릴 때부터 그렇소. 내가  공부하는 거 이거 뭐이냐? 예수 믿는 그 도리를 깨닫기 위해서,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 공부하지 예수 믿는 데서 행복받을 수도 있고 이 공부에서도 행복받을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아무리 학문이 많아서 세상에 고관대작을 하고 큰 재벌을 가졌다 할지라도 가진  재벌과 가진 권세와 존귀가 그것이 똘똘 뭉쳐서 자기의 일생을 망치는 그  결과밖에는 맺지 안하는 그런 것도 있습니다.

홍포입은 부자는 그 사람이 명철하고 아주 사업술도 있고 또 인인 교제의  사교술도 있고 모든 정치술도 있고 또 경제술도 있고 모든 게 능했지마는 그게  능했기 때문에 불쌍하고 가련한 홍포입은 부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리석지  맙시다.

우리 교회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봐야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나는 지금 여게 혹  청년들은, 어떤 거는 보면은 이거 중학생, 고등학생, 혹 대학생에도 혹 그런 것이  뜨문뜨문하게 보여지기는 하나 그것들은 그거 지금 현재로는 그렇지마는 그것이  성년이 돼 가지고 사회 생활에서 사회 성공을 하고 또 자기 모든 어떤 출세  성공을 하고 하면 그때 내가 있을란지 없을란지 모르지마는서도 그런 것도  시기가 늦고, 또, 주일학생에 대해서는 좀 그런 것이 많이 보여집니다. 보여지지마는 거게  대해서도 나는 많이 절망합니다. 왜 하고 있느냐? ‘저거는 뭐이 될 거다’ 했는데  고걸 꼭 삐뚤트리기는 제 에미 애비가 꼭 삐뚤트립니다. 조거는 조리 됐으면  하나님이 조걸 붙들고 쓰셔서 물질로 말해도 한국이 아니라 세계 제일 갑부가 될  것이고 정권으로 말해도 위대한 정권을 가질 것이고 과학으로 말해도 세계  유명한 과학자가 되겠고 고리 되겠다 했는데 요 에미 애비가 들어서 그걸 꼭  망쳐 버립니다.

어떻게? 에미 애비가 들어서 ‘땅 위에 있는 그것보다 하나님이 못하고 하나님보다  그게 낫으니까 하나님 버리고라도 고거 해라’ 이래 가지고 전부 제 자식 제가  망치고 다 요렇게 되는 것이 내 앞에 있는 모든 교인들입니다. 이 탄식입니다.

언제까지 이라다가 멸망을 자꾸 거듭하고 있을 것인지 모르겠소.

예수 바로 믿으면 삼 년이면 경제 그까짓 거야 당장 부자돼. 삼 년이면 돼요.

나도 경험하고 체험했어. 모든 사람 들어보면 다 믿음의 사람들 다 그랬어.

아무리 바보라도 그것이 사십 세까지만 신앙 생활을 바로 하면 다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는, 세상 사람이 모르는 사람됩니다. 세상 사람이 알 수 있는 위인 그까짓  거야 위인 돼 봤자 세상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지마는서도 세상이  전연히 모르는 사람, 평가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위대한 사람들이 다 되는 것이  제가 보는 대로는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지 말아요.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지식과 이 마귀 지식 인간 지식 이 두 가지 지식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데, 두 가지 지식 속에 자기 지식이라는 자기 경험 체험,  그것은 자기 지식인데. 자기 경험 체험이라 하는 그 지식에서 ‘아, 왼쪽 거 요놈은  성공 같으나 실패다. 오른쪽 요거는 실패 같으나 결국은 성공이다. ’ 요렇게  경험해서 경험의 지식을 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은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의 것이  다 제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보고 살고 하나님의 모든 것은 그에게  맡깁니다. 그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고로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예수님이 땅 위에 와서 생애한  것을 누가 그 바보 생활이 아니라고 누가 했겠습니까? 다 실패 생활 아니라는  것을 누가 그렇게 인정했겠습니까마는 성공이오. 또 사람들의 머리가 열리고  보니까 한 마디 한 마디, 한 걸음 한 걸음 걸은 것이 전부 다 성공 걸음이요 다  생명 걸음이요 다 승리의 걸음입니다. 하나도 흠과 점이 없었어. 인간들이 볼 수  없어 그렇지.

이 말씀을 오후에 또 보는 것은 내나 그 말씀을 또 알도록 하기 위해서 다른  각도로 지금 또 좀 알도록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증거할라고 합니다.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 딸이 나으니라」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러면 예수님이 칭찬한 믿음 이 믿음, 「네 믿음이 크도다」 이 믿음  가지니까 그만 소원대로 다 됐습니다. 이 믿음 가지니까 소원대로 다 됐어.

이러니까 이 믿음 가지면 자기 소원대로 다 됐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그것이 인간의 고통이요, 원하는 대로 된 그것이  성공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망치는 실패요, 이러니까 우리는 자기 소원대로 다  되는 것도 ‘네 믿음이 크도다’ 하는 이 큰 믿음 가지는 것이고 또 자기가  실패인지 성공인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전부 성공이 되는 것도 ‘네 믿음이 크도다’  이 큰 믿음 가지는 것이고, 금생에도 이 큰 믿음 가지는 것이 성공이고 내세에도, 영에도 육에도, 자기에게도  자기에게 속한 자에게도 전부 이 큰 믿음 이것이 들어서 다 성공을 합니다.

그러면, 이 큰 믿음이 뭐인가? 이것을 우리가 간단하게 그저 깨우칠 터이니까  여러분들이 이걸 듣고 이런 형편과 사정을 당할 때에는 꼭 요렇게 해야 됩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하는 이 믿음은 예수님이 무엇을 보고서 그렇게 칭찬을  했는가? 이 여인은 예수님을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그 구주인 것을 알고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이 내 소원을 다 들어 주시고 나에게 은혜 주시고 축복해  주시리라 하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 주님을 믿는 것 그 여인에게  하나 있었고,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이 하나 있었고, 또 주님을 소망하는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님을 소망하는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주님에게  간구하는 그 간구가 있었습니다. 요 세 가지 있었어.

주님을 믿는 것, 또 주님을 바라본다 말은 주님을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이면  된다. 주님이면 된다. ’ 자기 소원은 주님이면 다 이루어 주실 수가 있다.

‘주님이면 된다’ 주님을 믿는 것, 주님을 소망하는 것, 하나는 주님에게 간구하는  것 요 세 가지를 이 여인이 가졌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가지지 안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가졌습니다. 다  가졌는데 왜 이 여인에게 대해서는 ‘네 믿음이 크다’ 말했습니까? 믿음이 크다 말은 이 세 가지가 크다 그말입니다. 믿음이 크다 말은 이 세 가지가  크다 말이오. 주님을 믿는 것, 주님이 해 주신다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 주님을  소망하는 것, 또 주님에게 이 간구하는 것 이 세 가지가 크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세 가지가 조막만 해서 주먹덩이만한 쇠덩이가 와 가지고 때려 주니까 바싹  깨져 버립니다. 이 세 가지가 비유컨대 이 서부교회 집채만치 크니까 집채보다 큰  폭탄이 와서 때리니까 바싹 깨져 버립니다.

이 크다 말은 이거저거 온갖 것이 와 가지고 이 세 가지를 깨어서 없앨라고 어떤  게 와서 달라들어도 깨어지지 안하고 그런 것을 다 능가하는 것을 가리켜서 크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주님은 뭐 전능자라, 전지자라, 완전자라,  창조주라, 대주재라, 주권자라, 개별 섭리까지 주권하시는 주님이시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 ’ 온갖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지저분하게  말하지마는서도 바람만 불어도 다 날아가 버리고 없습니다. 물만 쓸어와도 다  쓸려가 버리고 없습니다. 어떤 인간이 데리고 한 시간 만 중얼중얼 놀려 버리면은  다 싹 뭉캐져 버리고 없습니다. 자기에게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 모든 그  어려움의 사정만 부딪혀도 고만 그런 것 다 박살나버리고 없습니다.

여인의 믿음을 크다고 한 것은 이것은, 모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다 이  여인의 이 세 가지를 깨뜨리고 있습니다. ‘저렇게 여인이 뒤에서 자꾸 부르짖고  저렇게 고함을 지르고 있는데 말도 안 하고 그렇게 냉정스럽게 그렇습니까?  돌아보고 말 한 마디라도 해서 가라든지 오라든지 하십시오. ’ 이제 모든  사람들이 ‘주님은 널 다 배척하고 괄시한다' 이렇게 말했지마는서도 거기에 이  여인이 믿는 것이나 소망하는 것이나 간구하는 것이 요동치 않습니다.

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는 보냄을  받지 안했다’ 할 때에 이것은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지식은 이는 ‘나는  이방 여인이라. 그러기 때문에 이방인 나에게는 상관없는 예수님이라. ’ 예수님은  내게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그렇게 자기의 지식이, 자기 지식뿐 아니라  그 골짝 지식이 다 그래 알고 있고 이스라엘 전국 지식이 다 그렇게 알고 있고  사마리아에 이 가나안에 있는 그 모든 지식이 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 지방에 있는 모든 지식이 ‘예수님은 네게는 상관이 없다고 지금 말하고 있지  않느냐?’ 상관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모든 지식이 이 여인이 예수님에게 믿고  소망하고 간구하는 것을 다 이것을 ‘네게는 보내지 안했다고 보냄을 받지  안했다고 말하는데 네가 자꾸 그렇게 하느냐?’ 이렇게 하는 그 말이지마는서도  모든 지식이 들어서 여인의 이 믿음을 깨뜨릴라고 했지마는서도 여인은 그 골짝  지식, 이스라엘의 온 전국 지식이 다 그랬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냈지 다른 데 보내지 안했다’ 그말은 이스라엘  백성 아닌 이방인에게는 보내지 안했다는 그말입니다. 그말이오.

그말이 있었지마는서도 이 여인은 그말로써 ‘이래 모든 지식이 다 나한테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보니까 모든 지식대로 예수님은 내게는 상관없는  예수님이다. ’ 이랬겠지마는 거기에 약발을 받지 안했어. 거게 피해를 받지  안했어. 모든 인간들의 지식에 피해를 받지 안했어.

‘자녀의 떡을 취해서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것도 그 나라의 전  지식입니다. 전 지식이 이방 사람은 개로 취급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에게 베풀 은혜를 이방 개에게 베푸는 것이 마땅치 않지  않느냐 하는 그것도 모든 인간의 지식입니다.

인간의 지식 이 모의 지식 저 모의 지식 인간들의 온갖 지식이 주님을 믿는  것이나 바라보는 것이나 간구하는 것을 다 약화시키고 이것을 다 소멸시키고  없앨라고 했지마는 거게 따그락따그락, 그럴수록이 더 따글따글 해지고 더  야물어졌지 거게 대해서 조금도 요동이나 흔들리지를 안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모든 지식을 다 부인했습니다. 모든 지식이 다 방해를 해도 그 방해를 받지  안했습니다. 어떤 인간은 예수 믿는다고 열심히 그래도 무슨 이런 철학 서적을  보면은 그만 거게 까뭉캐집니다. 어떤 인간은 한국에서 잘 믿다가 미국 가 가지고  한 삼사 년 만 있으면 미국에 있는 그 수많은 모든 학문들에게 까뭉캐 가지고  바싹 뭉캐져 가지고서 콩가루가 돼 가지고 옵니다.

부산서 예수 잘 믿고 열심히 믿는다는 그런 목회자들이 서울 가면은 그만 서울에  수많은 사람들의 지식에게 바싹 갈려 가지고 가루가 돼 버립니다. 제가 먼저  교역자회에 ‘서울 가면은 전부 사람들 다 베린다. 서울에 있는 사람 나는 믿지  않는다. ’ 왜? 그 사람들이 전부 신앙이 다 병들어 버렸기 때문에.

그래 나는, 내가 미국에도 한번 좀, 한번 가고 싶은 마음은 뭐, 내가 보나 안 보나  거게 있는 것, 보나 안 보나 내가 옆에 가 보는 것보다 더 똑똑히 보고 있는데  가고 싶은 것은 ‘글쎄 미국이라 하는 것이 성경에 있는 천국에 비하면  억억억억억만분의 일도 안 되는 그까짓 거 다 똑똑히 보면 다 송장이요, 똑똑히  보면 다 불탈 소돔 고모라 성이요 다 그런 건데 그 뭣이 높고 귀해서 거게  가면사람들이 환장을 하고 그렇게 변해지는가?’ 나도 미국 가 있으면 변해지는가  안 변해지는가 그거 좀 한번 보구로. 안 변해집니다! 뭐 변해져, 지기를! 그럴수록  더 똑똑히 보여지지. 왜? 많은 사람들이 다 죽은 송장이 막 늘어져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이,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는 보냄을 받지 안했다는 그말을  들을 때에, 자녀에 줄 떡을 취해서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냐 하는 그말을 들을  때에 그것은 그 나라의 지식입니다. 그 나라의 모든 지식이, 이 말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인데,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 나라의 지식으로 해석을 해 보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나 믿는  것이나 간구하는 것은 다 헛일이라 하는 그 결론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래도  거게 대해서 침해를 하나도 받지를 안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의 믿음을 크다고 칭찬한 것은 모든 그 지방 지식, 시대 지식, 세계  지식, 과학 지식, 철학 지식, 윤리 지식, 이종교 지식, 모든 지식, 어떤 지식이  와서 뒤흔들고 찝고 비틀트려져도 주를 믿는 믿음이 요동치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이 요동치 않고 주님에게 간구하는 간구가 요동치 않는, 자기에게도 그 지식이 있어. 여인에게도 그 지식이 가득 찼어. 여인에게도 그리  알고 있어. 다 그런 거니. 여인이 들을 때도 그래 들었기 때문에 ‘옳소이다마는’  말했어, 인정하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지식, 남의 속에 있는 지식, 높은 사람 속에 있는 지식, 과학자  속에 있는 지식, 세계의 모든 대사업가들 속에 있는 지식, 서양 지식, 동양 지식,  옛날 지식, 현대 지식, 미래를 꿈꾸고 있는 그 모든 미래 지식, 어떤 인간의  지식에게도 하나님 믿는 것과 바라보는 것 간구하는 것 이 믿음이 침노를 받지  안하고 조금도 요동치 않는 이 믿음을 주님이 가리켜서 칭찬했습니다.

또,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하시는 일, 주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하시는 일이  이렇게, 부르짖어도 못 들은 척 하셨지, 이스라엘 외에 다른 데는 보내지  안한다고 하셨지, ‘이스라엘 외에 다른 데 나를 보낸 줄 아느냐?’ 이거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자기 지식으로 본다면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소망을 주요 희망을 주요  그 간구를 듣소? 어떻습니까? ‘나는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 딴데는 보냄을 받지 안했다’ 하는 말은 그  여인에게 말할 때에 여인의 지식으로 들을 때에 소망이 됩니까 절망이 됩니까?  믿는 걸 돕습니까 믿는 것을 박살을 냅니까? 소망을 박살냅니까 북돋워 줍니까?  간구를 더 간구하도록 힘을 줍니까 간구하는 것을 완전히 박살을 내는 말입니까?  어떻소? 어떻습니까? 어떤 말입니까? ‘자녀에게 줄 떡을 뺏들어서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하는 말은 그 여인이  지금 믿고 바라고 간구하는 것을 북돋우는 말이요 박살시키는 말이요?  어떻습니까? 박살시키는 말이라. 그래도 조금도 요동치 안해. 깨지지 안해. 조금도  헐어지지 안해. 이 믿음을 주님이 칭찬했습니다.

정말로 주님이 그를 박멸하는 것이면 그가 박멸이 되겠소 안 되겠소? 박멸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박멸이 됩니까 안 됩니까? 주님이 박멸하면 박멸되지.

그러면 주님이 박멸 안 할 것을 거짓부리로 박멸할 척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주님이 그러면 그 여인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러면 안 준다 이렇게 거짓말을 한  것이겠습니까? 주님에게는 거짓이 없어.

여인 제 지식으로 들을 때 그렇게 들려졌지 주님은 여인을 박대하는 말씀을  했습니까 그 여인을 북돋우는 말씀을 했습니까? 인간의 지식으로 들을 때에는  예수님의 하시는 것이 박살내는 걸로 들려집니까 북돋우는 것으로 들려집니까?  박살내는 것으로 들려지지마는서도 실상은 북돋우는 것입니다.

못 듣는 척하는 것은 이런 순서를 일어나도록 하셔 가지고서 듣고 이런 순서가  일어나도록 해 가지고서 이런 순서가 일어남으로써 그 여인의 천추만대에 복있는  여인을 만들고 그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한 것이지.

그런데, 인간 생각으로 볼 때는 ‘하, 저렇게 부르짖는데 못 들은 척하고 가네.

예수님은 귀가 먹은가봐. 저 양반이 좀 귀가 먹은 모양이라. 저럴 때는 볼 때는  좀 잔인해.

장로나 그런 사람이 오면 이렇게 나사로 같은 부자나 마르다나 그런 사람 말하면  들을 것인데 저 여인이 와 하니까 여인을 무시해서 들은척 만척 하네. ’ 모든  사람이 볼 때 증오심이 나서 ‘선생님! 저 뒤에서 저렇츰 부르짖는 게 안  들립니까? 말 한 마디 하면 가든지 오든지 할 건데 그래 못 들은 척 하십니까?  참 잔인하다. ’ 아마 욕도 했을란지 모를 거라, 그 뒤에.

‘예수 선생이라 하더니마는서도 아주 못됐구만. 사람을 너무 차이 두고  멸시하는구만. 저렇츰 부르짖는데 세상에 못 들은 척하고 소보다 더 하구만.

미련하구만. ’ 뭐 별 사람이 많이 있었을 거라. 정말로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해치고 여인을 무시하고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습니까 여인을 정말로 그들이 상상  못 할 높은 차원에서 사랑했습니까?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 외에 다른 데는 보냄이 없다’ 그말은 뒤에 보니까 여인이  잃어버린 이스라엘입니까 여인은 참으로 이방 여인입니까? 사람 보기는 이방  여인이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성경대로 보면은 택함을 입은 알뜰한 하나님의  딸입니다.

이러니까, 딴데 보냄을 받지 안했다 그말은 내가 너 볼라고, 너한테, 너와 같은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왔는데 내가 어데 딴데 가겠느냐? 너와 같은 자를  구원하러 왔다고 이렇게 한 말씀인데 인간 지식으로 들을 때는 정반대로  들려졌어.

여게서 깨달을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 지식으로 볼 때는 전부 꺼꾸로  해석이 됩니다. 이러니까 물 위로 걸어 오신 것은 제자들을 구원하러 오셨는데  제자들의 그 인간 지식으로 볼 때에는 그들이 원수로 삼아서 물귀신 온다 그렇게  그들이 봤으니까 그들의 견해가 정반대라 그거요. 이걸 우리가 알아야 돼요.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합당하냐’ 그말은 여자 너, 여인 너에게 베풀  은혜를 딴데 어데 베풀겠느냐? 너에게 베풀 은혜 너에게 베풀지 너에게 베풀  은혜를 내가 택함받지 않는 그런 인간에게 내가 할 것이냐 하는 그말이니까 그  여인에게 할 것이니 여인에게 베풀 은혜를 아무데도 딴데 줄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정확히 말씀하시마는서도 인간 지식으로 들을 때에는 그렇게 들려진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 지식으로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멸시 천대 배척 모욕하는  것으로서 자기 지식 인간 지식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대해서 배척,  모욕, 멸시, 천대 이렇게 훼방, 멸시하고 배척하고 욕하고 이렇게 보이니까 이거  세 가지 외에 더 큰 욕이 어데 있습니까? 인간이 암만 해 봤자 멸시 천대 배척  욕 그 해치는 것 그거 외에 딴거 없어.

이렇게 자기 지식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자기가 듣고 접할 때에 자기에게  대해서는 더 없는 험하고 멸시하고 천대하는 모욕이 됐습니다. 모욕이 됐을 때에  여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모욕이 됐을 때에? 예수님이 실상 예수님은 모욕한 것 아닙니다. 아니지마는 인간 지식으로 들을  때에는 아주 모욕과 멸시와 천대 배척하는 것으로 이렇게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견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때에 이 여인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자기 지식으로 견해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 자기에게 대해서 그렇게 배척 멸시 천대로 그렇게 들려지고 견해될  때에 여인은 ‘옳소이다’ 「옳소이다마는」 나는 과연 그런 배척을 당하여야,  멸시를 당하여야, 천대를 당하여야, 모욕을 받아야, ‘나는 참 개 같은 인간입니다.

’ ‘옳소이다마는 개도' 이거는 뭐이냐 하면은 예수님이 개에게 주는 게 마땅하냐  하니까 제 지식으로는 예수님이 저를 개라고 하는 것인 줄 알고 ‘주님이 나를  개라고 하는 것도 마땅합니다. 나는 참 개입니다. 개 수성과 같은 이래 인간성이  없는 이런 짐승 같은 인간입니다. 개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주님의 하시는 것이, 자기 지식으로 주님이 하시는 것이 자기에게는 한없는 멸시,  배척, 모욕하는 것으로 들려져도 그것을 자기가 ‘나는 안 그런데 왜 그렇게  멸시하는가’ 하지 안하고서 `당연합니다’ 하는 긍정을 한 이것을 하나님이 그를  칭찬했습니다. 긍정하는 것을.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모든 일이,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일은  인간 지식으로 볼 때에주님이 우리에게 멸시하는 일이 없습니다. 천대한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배척하는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를 모욕하는 일이 한번도  없습니다. 언제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고 돕고 하는 이  일만 하십니다.

하는데, 우리 인간 지식이 잘못돼서 인간 지식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이거는 참 무정하게 한다. 냉정하게 한다. 너무 이거 내 몰라라 한다. 나를  멸하신다. 나를 치신다. 하나님이 나는 저주하신다. 나는 돌보지 안하신다. ’  이렇게, 주님의 하시는 일이 인간 생각으로 볼 때에는 ‘전적 이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여지는 일 많다 그말이오. 많애.

어떤 사람에게 자기 자녀가 입학 시험을 쳤는데 입학에 떨어지고 이라니까  ‘이거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는다’ 또 자기의 알뜰히 서로 서로 사랑하는데  사랑하는 남편이 달칵 죽어버리니까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한다’  아이일랑 주렁주렁 낳아 놓고 있는데 그 둘이 사는데 그만 아내를 딱 죽여  버리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너거 몰인정하게 한다’ 그런 일이 많다 그말이오.

이 여인은 그럴 때에 자기 지식으로 볼 때는 주님이 하시는 일이 자기를 전적  아주 배척하고 멸하는 걸로 보여졌지마는서도 그렇게 생각지 안했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나는 이렇게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지마는서도 주님을 나는 믿는  것과 바라보는 것과 간구하는 거는 요동치 않습니다. ’ 했습니다. 요 신앙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내게 하시는 일을 인간 지식대로 해석해서 어떻게 해석이 되어서  주님의 하시는 일이 자기에게 참 못할 일 하는 어떤 해석이 되는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미국에 백작 벼슬을 한 사람인데, 백작이라면 다 요새로 말하면 무슨 장관이라  하나? 장관. 다 그 이상 사람을 백작이라 하는데 그 백작이 당한 일을 아무가  봐도 이해 못 할 일이지마는서도 나중에 가 보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도 그런 말 있습니다. ‘인간 만사가 북마옹이라’ 인간의 당하는  수많은 일들이 북쪽 변방에 말먹이는 그 첨지가 당한 일이다. ‘이렇게 불행이다’  ‘불행인 줄 어찌 아느냐? 좀 있어 봐라. ' `아이고 행복입니다. 불행인 줄  알았는데 행복입니다. ’ ‘행복이라? 좀 있어 봐라. ' `아이고, 불행입니다. ' 이렇게  인간은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일관적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들은 다 자기 주관  인간 지식대로 견해해 가지고 하나님을 인간 지식대로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다 자기를 얽어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관되지 못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서 관철하지 못한 인간의 지식에 네가  피동되지 말아라.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이 인간 불완전한 지식대로 조부랍게  견해해 가지고서 주님 앞에 죄를 범하는 그런 일을 하지 마라.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고 소망을 절단내지 말아라.

마귀란 놈이 ‘이 봐라. 이거 보면 주님이 널 분명히 배척한 거 아니냐? 이거 보면  주님은 너를, 불택자가 아니냐? 하나님이 널 모른다 하지 않느냐? 너와 상관없지  않느냐?. ’ 이렇게 하는 그런 것은 마귀란 놈이 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인간  지식으로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이 어떻게 부당하고 이해 못 할지라도 인간의  지식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믿어서 그런 데에 침노받지 안하고 믿는 그  믿음이 큰 믿음이요 성공할 믿음입니다.

모든 인간들도 부인하고 자기에 대한 어떤 배척 같은 어떤 일도 부인하고 그저  인간의 지식이나 모든 사람의 행동이나 자기에게 부딪힌 처지나 당한 일이, 내  몰라라 듣지도 안하지, 일호는 암만 말해도 못 들은척 해서 배척했지, 이호는 떡  죽자 살자 가 만나니까 ‘나를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냈는데 딴데 보낸 줄  아느냐?’ 또 배척입니다. 또 부르짖으니까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냐?’ 또 배척이요. 이렇게 배척이지마는서도 인간 지식이 배척이나 이  여인은 여게 침노를 받지 안하고 믿고 바라보고 간구하는 것이 요동치 안했으니  이것이 바로 알았더라 말이오.

그러면, 그 여인이 그래도 믿고 바라보고 간구하고 이랬으니까 자기는 인간의  지식이 ‘이거는 주님이 너를 배척이다, 너를 무시다, 멸시다, 너는 상관없다. ’  이렇게 말한 것으로 그렇게 인간 지식으로 보여졌지마는서도 그 여인은 그렇게  알지 안하고 주님을 끝까지 믿고 바라고 간구하는 것이 요동치 안했어.

그러면, 그 여인이 그렇게 지금 하니까, 그렇게 사실은 배척하고 그런 것인데  그렇게 하니까 주님의 긍휼이 그에게 왔습니까 인간 지식으로는 보기에 그렇게  보여지지마는서도 실상은 그렇지 안한 것이고 그와 정반대로 주님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었습니까, 인간 지식대로 배척과 완전히 거부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그 거부로 보여진 것이 바로 본 것입니까, 주님이 자기를 긍휼이 여기는 것으로써  사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바로 보이는 것입니까, 어떤 겁니까? 그렇게 배척한 것인데 그 여인이 그래도 거게 자극받지 안하고 거게 피동되지  안하고 끝까지 믿고 바라고 간구하니까 그 모든 배척한 그런 것이 결과적으로  합리화 되어서 좋게 된 것입니까, 실상 처음부터 주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한  역사입니까 어떻습니까? 그렇게 여인의 행동으로 그것이 감동되어 변화돼서 나쁘게 한 것이 좋은 결과를  맺었습니까 처음부터 주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하시는 좋은 역사였습니까? 좋은  역사였습니다.

요게서 깊은 진리를 자꾸 요래 깨닫고 저래 깨닫고 깨달아서, 그러기에 큰 믿음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부인하고, 자기 지식도 부인하고, 주님이 섭리하시는 섭리로  자기에게 닥쳐지는 어떤 일이 닥쳐져도, 이거는 일어설 수 없는 만길 물 속에  빠지고 떨어져도 주님 믿는 것과 주님에게 소망하는 것과 주님에게 간구하는  것은 변치 않는 믿음이 요것이 주님이 칭찬하신 믿음입니다. 알겠습니까? 주님이 칭찬하신 믿음은 어떤 것에게 피해를 받지 안하고 어떤 것이든지 다  능가하고 남아 있는 그 믿음인데 뭣을 능가했습니까? 땅 위에 있는 모든 지식을  다 능가하고 그 지식에게 피동받지 안했습니다. 이 지식에 피동받지 안했어.

예수 믿는 것을 저거 아들만 하나 어떻게 해도 ‘우리 아들을 그래?’ 당장 예수고  진리고 뭐이고 다 집어 던진다 말이오. 그까짓 게 신앙이라? 네가 똑똑히 몰라  그렇지 그게 널 사랑하는 것이라. 네게 유익 주는 거라. 주님이 유익 주는 것으로  한 걸 제 지식대로 견해해 가지고서 이걸 주님이 자기를 배척한 거라 요리  꺼꾸로 해석해 가져 가지고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자기를 멸망하는 자멸을  취하는 이런 일을 한다 그거요. 모든 자타 속에 있는 모든 지식을 다 부인하는  신앙이 아니면 안 됩니다.

또, 자기에게 주님이 하시는 섭리나 이런 것을 어떤 섭리가 와도, 어떤 주님이  자기에게 하는 어떤 섭리 어떤 일이 와도, 당장 그런 일 툭툭 어떤 일이 와도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능력과 자기를 책임지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요동치 안하고 소망을 요동치 안하고 간구를 요동치 안하는 이  신앙이라야 됩니다. 그거 주님이 칭찬했소.

이 학생들도 신앙 가진다 해도 여기 지금 고등학교 이래 다니니까 그렇지  대학에나 가 가지고 어떤 유명한 교수나 강사가 와 가지고 이래 하면서 한 한  시간이나 두 시간이나,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삼 년이나 사 년이나 그만 자꾸  삶아 대 이래 말하면은 예수 믿는 것이 슬그머니 의심이 나지고서 그만 그 말만  돼지는 그까짓 거는 큰 믿음이 아니라 새끼 믿음도 아니고 그거는 뭐이요?  뿌스러기 믿음. 가루 믿음이라, 가루 믿음. 알겠어? 학생들 알겠어? 가루  믿음이야. 그까짓 가루 믿음.

마지막에 주님 구름 타고 오시면 그런 지식은 다 불타 버리고! 그와같이 인간을  유혹시킨 자는 유황불 구렁텅이에 다 던짐을 받을 것이고! 하나님 말씀은 참 돼! 이러기 때문에, 여게서 교수도 있지마는 교수는 이래 가르쳐도 ‘이거는 인간  지식이요 이보다 더 좋은 지식이 있으니 하나님의 지식은 다 산 지식이요 살리는  지식이라’ 그말 한 마디를 결론으로 딱 하고 ‘인간의 지식은 암만 좋지마는서도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필요한데 이거는 결론적으로는 다 죽는 지식이요 죽이는  지식이라’ 고 말 한마디를 강의하고 난 다음에 고 말 한마디를 끄트머리로 딱  결론을 시간 시간이 지운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당장 세계 이런 교수로 세울  거고 당장 그런 사람을 정권을 줘. 정권을 대번 줘. 대통령 대번 돼, 뭐. 대통령  인간들에게 돈 쓰고 뭐 죄지어야 되는 줄 알아? 그까짓 놈의 것 돼도 소용없고  하나님이 주시면 아무도 방해하지 못해. 우리 사는 것이 여게 있는데 이걸 안 해.

이래 가지고서, 내가 이번에도 여기 양성원에 교수들 보고서 내가 야단을  쳤습니다. 실컷 가 가지고서 진리를 가르치라 해놓으면 진리 냅두고서 저 옛날  켸켸묵은 거 옛날 것 그런 거 하나 가지고서유대인들이 ‘이 어짠일이고?’ 놀래  가지고 `이거 어짠 일이고?’ 깜짝 놀래 가지고 지금 깨달았는데, 깨닫고 나니까  슬그머니 ‘야, 놀랄 것 없다. 목수의 아들 아니냐? 저거 엄마가 마리야 아니냐?  저거 누이동생이 다 우리 마을에 있지 않느냐? 저거 누이가 지금 우리집 옆에  있지 않느냐? 별 사람이 아니라. ’ 이렇게 깨달음을 까뭉캐버리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양성원에 있는 모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이러니까, ‘처음 들었다. 이상하다. 야, 참 이래 믿은 이거 잘못 믿었다. 다  헛일했다. ’ 이랬는데 와서 그 사람들이 ‘어어, 그거 그리 놀래지 마. 그 별것  없어. 이런 거라. ’ 이래 버리니까 ‘별것 없는데 여기 있을 거 뭐이냐?’ 그래  가지고 양성원에 왔다 다 도망 다 가버렸어. 양성원에 왔다 갔어. ‘너거가 죽이는  역사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너거가 어떻게 견디겠느냐?’ 내가  말했어. 요번에 교역자회 때 말했어. 이것도 여러분들이 똑똑히 알아야 돼.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고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는 것은 그 여인은 딸이  귀신들렸는데 귀신들린 딸이 나았지마는서도 ‘소원대로’ 했으니까 이와같이 하는  사람은 자기의 소원이면 돈 소원하는 사람 돈 소원 이루어질 것이고 권세  소원하는 사람 권세 이루어질 거고. 왜? 이와같이 지금 믿음만 지키면 권세  소원하는 사람은 권세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돼. 돈 소원하는 사람은 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돼져. 자격이 돼져. 자격부터 기르고 보배를 줘요.

이러니까, 이제 모든 지식을 다 부인하는 것, 모든 지식에게 피해를 받지 않는  믿음, 또 주님이 자기에게 어떻게 섭리하신다 해도 그 섭리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는 믿음, 옆에 사람들이 어떻게 지금 믿음과 소망과 간구를 헐어뜨려도 옆에  사람들, 모든 제자들이 있다가 ‘햐, 참 잔인하다. ’ 뭐 많이 수근거렸어. 오래  그와같이 수근거렸을 거라.

수근거려서 여인으로 하여금 그 간구하는 것을 그만 간구하지 말라는 그런 걸로  그 간구하는 용기 다 거석해지고 악만 나오도록, 분해서 ‘에, 예수한테 자꾸 해  가지고서 안 고쳐 주면 욕이라도 한 마디 해야 되겠다. ’ 할 만치 ‘욕이라도 한  마디 한번 내 퍼부어 버려라. 그렇츰 그래 쌓지만 못 들은척 하고 어데 그런  잔인한 분이 어데 있노?’ 이랬지만 거게 충동 안 받았어.

모든 주변에 있는 인간들의 충격으로 믿음, 소망, 간구가 요동치 안했어. 자타의  지식, 천하에 있는 지식 통계로써 요동치 안했어. 주님이 자기에게 역사하심이  인간 지식으로 볼 때는 어떻게 곡해 오해 할 만한 그런 역사지마는서도 조금도  주님의 사랑이나 주님께 대한 소망이나 믿음이 요동치 안했어.

다만 뭣만 있었소? 주님 믿는 것, 바라는 것, 간구하는 것, 주님 이것뿐이라.

주님과 자기 사이는 이 셋뿐이라. 주님과 자기 사이는 이 셋 외에는 아무것도 못  들어왔어요. 주님과 자기 사이에는 이 세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지 안했어.

어떤 게 와도 용납지 안했어. 천하 지식이 다 와도 용납지 안했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달라들어도 용납지 안했어. 자기에게 어떤 현실이 부딪혀져도 용납지  안했어. 이게 신앙이라!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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