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라크에서 메카까지(니느웨 에서 땅 끝까지)
선지자선교회 이라크 선교 열전 김종성 목사

모태신앙으로 자라온 저에게 성령 체험은 멀고도 힘들며 어렵고 상관없는 신비에 속한 일로 여겨졌고 무관심속에 무지의 영역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던 중 1975년 대전 괴정동 중앙공무원 연수 중에 의식을 잃고 영계를 다녀왔고 다음날 주일 낮 예배시에 대전 순 복음 중앙교회에서 요나의 설교를 듣던 중 평생 처음 성전에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면서 뜨거운 성령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요나의 설교를 듣던 중 언젠가는 니느웨 성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강한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하리라는 굳은 의지를 품게 하셨고 세계선교의 비젼을 갖고 인류복음화의 구체적인 꿈이 잉태된 것이다. 이 꿈을 이루고자 27년간 동분서주하며 40여 개국에 170여 차례 해외선교성회를 인도하던 중 마12:41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는 말씀과 더불어 계속 그치지 않는 포성 가운데 매일 수십 명씩 죽어가는 지구촌 최악의 위험지구인 이라크에 니느웨가 현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2003년 7월말 옛, 앗수르 수도 니느웨를 향해 비장한 각오로 중동선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적잖은 두려움과 위험부담도 있었지만 처음 사명감 깨닫고 회개와 결단과 하나님께 향한 약속의 열정은 벅찬 기대감과 아랍선교의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여러 차례 해외를 다니며 주로 경제적으로 위기에 놓인 국가들을 선교해오던 인천의 호산나찬양교회 정대순 목사를 비롯해 대전의 김향미목사, 이사야장로 평생을 아프리카, 동남아 오지에서 순교적 정신으로 선교해 오신 김명길 선교사, 황성문 전도사등이 나와 함께 동행 하고 인천공항에서 모든 수속절차를 마치고 요르단에 도착하여 여행사 소개로 안내자를 만나게 되었다. 안내자의 인도아래 GMC 택시를 빌려 육로로 12시간이상 달려 이라크 바그다드에 도착하였으며 요르단 택시기사가 계속 경고하며 주의사항과 경고를 반복하며 강도를 조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연속으로 품어대는 줄담배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고행의 강행군 끝에 바그다드 중심의 무너질 듯한 호텔에 숙박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건물 곳곳에 포와 총탄 흔적이 있는 그리고 밤새 포성, 총성이 이어지는 이라크의 밤은 공포보다는 전쟁 중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미 한국에서 전화를 통해 요르단 주둔 이라크 사역을 힘쓰시는 권혁관 선교사에게 우리의 선교계획을 알렸고 협조를 요청했으나 위험상황을 알리면서 만류했지만 우리는 사명감과 확고한 의지 때문에 강행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우리의 목적지는 바그다드가 아니고 오직 니느웨(모술) 지역 복음화이었기에 바로 무작정 택시를 빌려 니느웨로 향하였고 약 4시간가량 달려 현지에 도착했다. 전혀 어떤 정보와 연고, 안내자 없이 니느웨 시내를 배회하던 중 반갑게도 LG 상사 대리점을 발견한 후 혹시 시내에 개신교 교회가 있는지를 알아보니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어느 천주교회를 소개받아 찾아갔는데 루터교회였다. 루터교회에서 다시 개신교에 대해서 알아보니 아주 가까운 거리에 160여년 된 장로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너무 감격스러웠고 눈물이 날 정도였다. 160여년전 미국 어느 선교사님이 개척하신 교회였는데 수십 년간 정상적인 운영이 안되고 기도모임만 가져오던 중 2-3년 전에 이집트에서 아스랍 모세 목사님이 오셔서 목회를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 교회 장로님을 통해 듣게 되었다. 장로님 협조로 갑자기 모여든 2-30명의 성도들과 함께 부흥회를 하고 가지고간 선물과 선교비 1200여 달러를 전달하여 앰프구입과 어린이들 구제, 교육비로 사용케 한 후 성전 마당에서 하룻밤 유숙한 후 장로님의 제안과 요청으로 니느웨 초등학교 운동장 성회를 약속하고 다시 바그다드로 향하였다. 바그다드에서 개신교 교회를 찾을 수 없어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한국선교사님들이 한명도 바그다드에 상주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확인한 후 요르단으로 향하였다. 그 후 계속 하여 이라크 성회와 선교에 대한 집중적인 중보기도에 들어갔고 2004년 4월 니느웨 성회를 위해 준비하던 중 다시 2004년 1월에 김명길 선교사와 함께 모든 절차를 거쳐서 지난번과 같은 코스로 니느웨 와 사전에 전화,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니느웨 장로교회에 도착하여 아스랍 모세 목사와 그 장로님을 만나 구체적인 성회일정과 계획을 의논하고 신학교 설립에 관한 상세한 의논을 마친 후에 후원금과 컴퓨터, TV 등 여러 가지 지원과 기도회를 갖고 다음 성회장소를 니느웨 체육관으로 확정한 후 다시 바그다드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

10여명의 한국 목사님들을 모시고 와서 니느웨 복음화 성회를 체육관에서 1000명 예정으로 개최하기로 약속하고 동원계획, 진행, 예산 등을 논의한 후 결정하고 진행시켰다. 한국에 도착 즉시 교단 총회장이시며 총회 산하 연합선교 신학교(22개 신학교 운영 중이었음) 총장이신 허민영 목사님과 여러 동역자들에게 보고를 드리고 20여명의 목사님들의 참석 의사를 확인한 후 본격적인 성회 준비와 신학교 설립에 관해 기금모금에 들어갔다. 이미 계획하고 약속된(4.5-14) 선교일정에 맞춰서 추진하던 중 이라크 사태가 점점 악화일로에 있었고 바그다드 변방지역 팔루자에 미군의 민간 공습으로 인해 심각한 전투가 민병대 저항세력에 의해 벌어진 상황이었다. 미군시신을 불 질러 팔루자 거리에 끌고 다니고 처참한 사상자들이 발생한 사건이 전 세계에 알려진 시점이라 약속한 목사님들 대부분이 이라크 선교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나에겐 그런 위험한 상황이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에 선교하라고 보내실 때도 그 악독이 하늘에 사무치는 멸망직전 상태였음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이야말로 제 2의 니느웨 회개운동과 구령운동의 최적기라고 판단되었기에 두려워하며 연기하거나 취소할 이유도 명분도 없기에 기다리는 니느웨 영혼과 신학교 설립을 절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교각오로 이라크 입국할 특전사를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목숨도 물자도 아낌없이 투자하는 현실에 천하보다 귀한 아랍권, 회교권 13억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순교의 피가 절대 필요하다는 확신 속에 모든 준비를 강력하게 진행 시킬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약속된 분들은 여러 가지 구실로 거의 다 취소가 되었고 전혀 새로운 분들로 구성된 용감한 지원자들이 10여명 재구성이 되었는데 총회장이시며 총장이신 허민영 목사님께 보내드린 선교준비를 위한 팩스 서류가 교인들에게 발각이 되면서 신성교회 성도님들이 우리교회에 쳐들어와 항의를 하겠다는 소식이 왔다. 왜 이 위험한 시기에 이라크 죽음의 현장에 우리 허민영 목사님을 보내드려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입장을 어떻게 표현하고 수습해야 할지 심히 괴로웠다. 두렵고 싫어서가 아니라 총장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니느웨 성회가 너무 중요하고 전 세계에 마지막 회개운동과 선교운동의 큰 기폭제가 될 것은 이미 기도응답으로 받았고 엄청난 사명적인 확신 가운데서 진행 추진되는 선교 사역이었기에 반드시 총장님이 이번 선교의 주역이 되셔야만 하였다. 이 일은 설득이나 변명으로 저 신성교인들의 거센 항의와 반대운동을 잠재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 할 수밖에 없고 이 성회와 신학교 설립의 중요성과 절대성을 총장님께 계속 강력하게 주지시키고 하나님의 시급하고 중차대한 명령사역임을 확인시켜드리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부산선교신학교 개원예배 시에 갈등과 고민에 빠진 총장님을 협박에 가까운 어조로 단호하게 이라크 선교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 받고 조금도 오차 없이 추진하게 되었다.

한.복.총의 실제적인 지휘자로써, 유명무실한 복음단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고 명실상부한 사역단체임을 하나님과 만인 앞에 선포확인 받아야 되며, 이로 인해 기회주의적, 무사안일주의의 선교사님들의 각성과 교권주의, 명예주의, 구태의연한 권위주의, 물량주의, 패권주의, 극히 미온적인 라오디게아교회식 적당주의 등 잠든 요나식 세계교회에 엄청나고도 신속한 지구촌 각성, 회개운동을 폭발적으로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복.총을 깨워야만 했으며 한국교회를 흔들어 깨워서 세계선교에 횃불을 잡고 선두주자로 달려갈 자가 바로 허민영 목사님으로 확신되었기에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반 강제로 사자굴 속에 집어넣으신 세밀한 계획의 실행이요 시나리오였다고 분명히 믿었다.

어떤 분들은 우리들의 선교사역을 비난하면서 무모하고 정신 나간 영웅심리의 표출이요 돌출행동이라고 공격할지 모르나 이런 각오와 굳은 결의로 인하여 니느웨 선교가 출발 된 것이었다. 드디어 유서를 작성하고 순교를 굳게 결심하고 「21세기 제2의 니느웨성 회개운동의 전 세계화 」란 기치를 높이 들고 이라크행 특전사의 총진군이 시작되었다. 한.복.총 대표회장께 정확한 신고와 교계에 국민일보를 통해 구체적인 선교일정과 내용을 소상히 알리고 기도부탁을 한 후 모든 절차 수속 확실하게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특별 신고까지 필한 후에 방콕을 거쳐 암만에 예정대로 도착되었다.

방콕에서 암만으로 가던 중 기내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잠을 청했는데 생생한 찬양이 갑자기 귓전에 메아리치는 것이다. (큰 권세 주께 있으니. 큰 권세 주께 있으니 너는 가서 주의 복음 전하라 주가 너 항상 지키리라)주변을 살펴보니 다들 곤히 잠들어 있었고 계속 277장 이 찬양 후렴만 들려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으려나 약간의 불안감도 들면서 성령께서 바짝 긴장을 시키며 기도하라 하시는 것이다. 풀무불속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 사자굴에서 살려내신 하나님, 순교가 주님의 목적이시면 기쁨으로 순교 제물로 드리길 원하며 사역이 목적이시면 평탄하게 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뤄주소서. 다만 하나님 크신 영광만 나타내주소서. 이 기도와 찬양후렴을 따라하노라니 잠을 도저히 이룰 수 가 없었다. 기내에서 유엔 이라크 평화 재단 총재이신 김종갑 집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유익한 정보를 알려주셨고 니느웨 까지 동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선교사역에 동참 협력할 의사까지 확약해 주시면서 이라크 바그다드 중심가 팔레스틴 호텔 커피숍에서 미팅약속까지 하고 암만 공항에서 헤어졌다. 우리일행 중에서는 암만의 일정과 약속을 취소하고 김종갑 총재님과 함께 바그다드로 곧바로 동행하자는 제의도 있었으나 예정된 암만 스케줄을 일방적으로 변경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동행할 수가 없었다. 2004년 1월에 만나게 된 한승호 선교사를 통해 암만의 선교일정과 이라크 동행의 선약이 있었고 약속대로 공항에 나와 계셨었는데 우리일행을 보자마자 크게 당황한 모습으로「이라크 입국 절대 못합니다.」 하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일행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지만 낙심과 좌절감에 빠졌고 심한 갈등이 일어났다. 숙소에 도착하여 여러 가지로 숙의 끝에 3가지 의견이 나왔는데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가자. 요르단과 이스라엘 성지순례와 선교사역을 하자. 이라크 행을 진행하자. 등 거의 5분 간격으로 요르단과 이라크의 대사관 영사관에서 교대로 심각한 우려를 전하면서 절대 이라크입국을 저지하는 당부와 지시가 오는 것이었다. 밤 10시 숙소에 다시모여 최종적으로 이라크 입국포기와 요르단, 이스라엘 일정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의 마음 중심에는 「죽어도 나는 가리라」는 불변의 의지와 각오는 굳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세밀한 행동 요령을 준비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밤 10시 30분 GMC 한대를 불렀고 일행들에게 소신을 밝힌 후 출발에 앞서 함께 기도드렸다. 그리고 일행들에게는 양국대사관과 한국에 나 혼자 행방불명된 것으로 보고하라고 전하고 선교일정 마친 후에 다시 요르단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한 후 출발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선교비 약2,000여만원을 거의 반씩 나누어 나와 김상미목사 둘이서 보관하고 떠났다. 요르단과 이라크 국경선에서는 보통 1-2시간 경과하여 출입국 절차가 진행되고 무척이나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속을 거치게 된다. 이때부터 엄청난 긴장감이 시작이 되는데 형제나라인 요르단의 운전기사들도 자주 겪는 노상 무장 강도들을 심히 두려워하며 반드시 커튼 칠 것과 담요 뒤집어 쓸 것을 계속하여 강요한다. 지독스러운 골초들의 줄담배 연기 속에 질식할 것 같은 고통도 감내하면서 생 고문을 당하며 12-13시간 고속 주행을 해야만 바그다드에 도착할 수 있다. 중간에 3-4차례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기사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의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대화 분위기를 확인하면서 몇 차례 되돌아가자는 기사를 안정시키며 영어도 못하는 입장에 바디 랭귀지 총동원하여 기어코 팔루자 근처까지 초긴장 속 고속주행으로 강행하였다. TV에서 생생한 현장을 목격한 그 피비린내 나는 팔루자 거리에 도착했다. 수많은 대형트럭 각종차량이 왕래하는 바그다드 입구의 작은 도시로서 이 지역을 거쳐야만 바그다드에 들어가게 된다. 김종갑 총재의 만남 약속만 아니어도 고속도로에서 곧장 니느웨로 갈 수 있고 팔루자 그 위험한 도로를 통과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연락할 방법도 취소할 수도 없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의 팔루자에 들어서야만 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팔루자 도로 양편에서 복면한 저항세력들이 로켓포와 기관총등 무기를 들고 중간 중간 3-5명씩 모여서 거의 모든 차량을 특히 미국산 GMC차량은 반드시 검문하며 외국인은 모조리 차에서 내려야만 한다. 팔루자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운전기사가 큰소리로 커튼을 치고 엎드리고 담요를 뒤집어쓰라고 호통을 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순종하지 않았다. 커튼 활짝 열고 고개를 밖에 보이도록 허리를 펴고 담요도 옆에 제켜놓고 277장 찬송 후렴을 계속 불러댔다. 큰 권세 주께 있으니. 큰 권세 주께 있으니. 너는 가서 주의 복음 전하라. 주가 너 항상 지키리라 - 계속 계속 방언과 함께 찬송만 불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누구도 이 차를 세우는 자가 없다.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나에게 밖에 있는 민병대들이 함께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마치 다니엘이나 그 친구들이 된 것처럼 어서 빨리 잡혀 순교의 제물이나 되고 싶은 마음으로 잡히기만을 기다렸는데 그대로 바그다드까지 안전하게 한번의 검문도 없이 통과한 것이다. 정말 너무나 싱거운 홍해바다, 요단강 건너기, 사자와 천국 춤을 추는 기분이 들었다. 또한 이 차 기사는 팔레스틴 호텔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바그다드에 들어서자 긴 한숨을 몰아쉬며 빙긋이 웃음을 띄고 「알라 알라 」를 연거퍼외쳐 대길래 곧바로 온리 지저스 온리 지저스(only JESUS)라고 나도 더 큰소리로 외쳤다. 기사의 등을 두들겨 주며 약식 안마를 잠깐 해주면서 더 크게 「온리 지저스」를 반복하니까 기사도 「오케이 온리 지저스」를 따라서 하는게 아닌가?

탱크 두 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미군 해병대와 다국적군 특수부대원들이 특별 경비를 서고 있는 팔레스틴 호텔은 아마 이라크 최고의 호텔같이 보였다. 개미굴 같은 철조망 길을 한참 걸어서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그 짧은 영어 단어 몇 개 총동원하여 )요르단에 전화 할 수 있는가 물었더니 도저히 알아듣지 못한 직원들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사우스코리안(South Korean)」 반복해서 묻더니 「오! 코리안 MBC」하고는 나를 8층 MBC 방송실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기쁘고 반갑던지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모든 내용을 MBC 직원에게 이야기 했더니 이 위험한 곳에 왜 왔느냐고 별로 좋지 않은 기분으로 대해줬지만 팔루자가 아주 위험한 상황인데 어떻게 통과 했느냐고 묻기에 모든 것 각오하고 왔는데 아무 위험 없이 평안하게 통과 된 것을 알려줬다. 방송국의 전화기로 요르단 한승호 선교사께 도착소식을 전하려고 통화하게 되었는데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말이 끝나자마자 「다 들어 가기로 했습니다」하는 것이었다. 「예! 한국으로 돌아간다구요?」반문하자 「아뇨 모든 분들이 이라크로 들어간다구요」「뭐라구요 절대로 안 됩니다. 아주 위험 하다구요. 그냥 요르단에 다들 계시다가 약속한 날짜에 만나게 해주십시요. 나는 내일 약속시간에 여기서 김종갑 총재 만난 후 니느웨로 가서 예정된 성회와 신학교 설립예배 마치고 요르단으로 갈테니 그렇게 전해주시고 절대로 이라크 입국 못하게 막으시고 요르단, 이스라엘 성지순례 안내하시고 성회도 인도하도록 수고 좀 해 주세요」하며 당부했으나 굳이 괜찮으니까 이라크 입국을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자기 친구도 이라크에서 요르단으로 무사히 들어왔다고 하면서 GMC 2대로 들여보내겠다는 것이었다. 「정 그러시면 한선교사님이 책임을 지고 함께 동행 좀 해주세요」 라고 당부하자 자기는 다른 일정 때문에 결코 동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극구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일행 모두가 이라크 입국을 결정했으니 어쩔 수 없다면서 굳이 강행한다하기에 「꼭 들어오기로 결정했다면 반드시 영어를 할 줄 알고 모바일 폰을 소지한 기사를 동행시키라고 재삼 부탁을 드리고 도착 예상 시간인 다음날 낮 12시경에 팔레스틴 호텔 앞 대로 건너편에 기다리겠노라고 약속을 한 후 김종갑 총재 일행을 약속대로 만나게 되었다. 김홍재가 왜 혼자 왔느냐는 질문에 모든 상황 설명을 한 후 내일 낮 12시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해주고 그 때 다시 만날 것을 김종갑 총재 일행에게 알리고 헤어졌다. 다음날 까지 금식을 하며 기도하면서 기다리게 되었는데 한밤 중 에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MBC에 찾아가 김경련 직원에게 부탁하여, 라면 한 그릇 대접 받고 요르단에 한성호 선교사에게 다시 통화하여 출발 확인하고 거의 뜬 눈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다음날 낮 11시에 미리 나가 계속 기다리는데 예정시간 30분이 지나도록 GMC가 나타나질 않는다. 12시 40분경 GMC 한 대가 나타났다. 한대는 왜 안보일까?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스쳐가는 순간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모습으로 김상미 목사 한분만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리지 않는가? 아 - 큰일이 발생했구나. 신음에 가까운 비명으로 「다 잡혔어요」「어디서요」「잘 몰라요 여기서 차로 약 30분-40분 거리인 것 같아요」「빨리 따라오시오 청심환은 드셨나요 혹시나 해서 기내에서 상비약으로 준비해온 청심환을 몇 개씩 일행들에게 나눠드린 것이 생각나서 물었더니 다행히 중간에 먹었다는 것이다. 대로를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팔레스틴 호텔 MBC로 달려가 우리 일행이 팔루자에 피랍되었으니 빨리 한국에 좀 알려주시오」 MBC 김영철 부장과 직원 2명이 초긴장 상태로 민첩하게 한국으로 연결시켜 주었다. 김상미 목사는 떨리는 목소리와 울먹이는 소리로 이 피랍사실을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는 MBC 직원들이 아주 위험한 곳이니 절대로 밖에 외출 삼가고 호텔 객실 안에만 있으라고 철저히 당부하면서 객실 2개를 빌려서 각각 머무르도록 배려해 주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부탁하고 수시로 인터뷰하며 한국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다른 언론기관에 알리기 전에 MBC에서 단독 독점 취제의 열정으로 KBS.와 SBS등 여러 한국 언론의 현지 기자들과의 불편한 관계도 엿볼 수 있었고 덕분에 값싼 다른 호텔로 옮기려던 우리 일행은 국구만류한 후 모든 숙박비는 MBC측에서 부담하는 이득을 보기도 했다. 잠시 후 임홍재 대사와 여러 외교관 직원들이 찾아와 자세한 정황을 묻고 함께 기도하였는데 임홍재 대사는 자기도 안수집사임을 밝히고 눈물을 쏟으며 함께 기도하면서 미군 사령부로 연락을 취했으며 잘 될 것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자고 우리를 위로하였다. 우리는 계속 기도하면서 각각 객실에서 일행들 소식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3시간 4시간이 흘러도 소식은 없고 대책도 방법도 없이 오직 주님만 피가 마르도록 부르짖으며 간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유서를 쓰고 순교서약 함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우리 7명 목사님들만 순교 상급 주시려나? 그러나 나는 뭐야! 순교 자격 미달자인가? 무한정 기다리며 울고만 있어야 하나. 순간! 이 시간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렇다 나도 가야지 앉아서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행동하면서 기도하면 되지 더 위험한 곳 니느웨로 가자 성도와 신학생이 기다리는 니느웨로 가자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야 기도는 가면서도 할 수 있으니까 가자 니느웨로 가다가 죽더라도 요나의 무덤 곁에 가서 순교의 피를 뿌리면서 복음을 외치다가 죽자! 호텔에서 절대 나가면 안 된다는 대사관 측과 MBC측의 강한 지시에 불응하고 큰 길 건너에서 GMC만 계속 서서 3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는데 MBC근무하는 이라크 직원과 대사관 근무하는 이라크직원이 내 곁에서 계속 함께 있었고 (나를 감시 하고 있었음) 잠깐 그들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 호텔 입구에 있는 GMC렌트카 사무실에 가서 니느웨로 가는 GMC한대를 빌려서 현지 시간 저녁 6시 30분경에 신학교 개원예배 프랑카드와 가방을 챙겨들고 김상미목사 몰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모술(니느웨)로 출발하였다. 20분도 채 못되어 니느웨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폭파되고, 교전중이어서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운전기사가 차를 돌리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7시에는 다른길로 돌아서 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아침 7시 정각에 만남을 약속하고 호텔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약 7시 30분경 호텔 로비에 도착했는데, 몇몇 외국기자들하고 허민영 목사님과 홍광천목사님이 거기 있지 않은가? 「아! 하나님 이게 꿈인가요 생시인가요!」너무너무 감격한 나는 목사님들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통곡하면서 울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 그렇게도 기쁘고 감사 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니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순식간에 전세계 기자들이 운집하고 인터뷰 홍수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2시간을 지내었는지 기억조차 힘들어졌다. 복음위해 죽고자 하면 살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온세상에 순식간에 알리게 하였으니 오직 주님만 영광 받으소서. 찬양받으소서!

대사관 영사관 직원들과 MBC, KBS, SBS, 등 한국 언론, 우리 일행들은 감격에 못 이겨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 기자들은 떼를 지어 몰려와 자기네 피랍된 사람들의 사정을 묻고자 어떻게 풀려났는지에 대하여 집요하게 인터뷰와 질문 공세 속에 호텔에 모두 집합시킨 상태에서 긴급언론인 부흥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모든 일본의 각 방송신문 언론사 기자들은 울면서 복음의 메세지를 듣고 우리와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대장암 수술을 막 끝내고 함께 이라크선교에 동행했던 이명숙선교사님의 유창한 일본어 통역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 하신 복된 사명 자 였다. 이젠 앞으로의 일정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미 7일전에 김명길 선교사님은 니느웨에 미리 도착하여 성회준비와 신학교 설립준비를 완료하고 우리 일행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성도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있는데 대사관측과 우리 목사님들은 결사반대하고 방해하고 있으니... 우리의 목적은 피랍도 메스컴 홍수 속에 유명한 인사가 되는 것도 세계교계에 우리의 선교열정과 각별한 의지를 천명함도 순교적 결사적 한국선교의 우월성을 과시함도 아닌 오직 니느웨 도성에 교회개척, 선교신학교 설립으로 아랍권 선교와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를 만드는 것이니 어떠한 위험과 희생이 있어도 여하한 장애와 방해와 훼방이 있어도 이번 니느웨선교 일정을 중단하거나 연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늦은 밤 우리일행은 총장님의 방에 다시 모였을 때 부득불 나의 이 의지와 계획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혼자서 계획대로 강행 할 수도 있었지만 혹시 더 큰 충격으로 혼란이 올까봐 일단은 일행들에게 알리고 떠나는 것이 옳을 줄 알고 알린 것이다. 그런데 예상대로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김목사 혹시 영적으로 잘 못된 것 아냐?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어! 그렇게도 가고 싶으면 일단 우리 일행과 함께 한국으로 다 귀국한 후에 김 목사 혼자 한국에서 다시 출발해서 니느웨로 가면 될 것 아냐!』하면서 날벼락 치듯이 분위기는 초긴장 속에 급랭되고 말았다. 사실 이 주장이 옳은 것이다. 전혀 섭섭함이나 반발심이 즉시 표출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은 전혀 요동하지 않았고 일행이 반대 할수록 더욱 니느웨로 향하는 나의 의지는 굳어만 갔다. 일단은 일행을 재워야만 한다. 안심을 시켜서 모두 잠이 들게 한 후 이곳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총장님의 지시대로 하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일행들에게 사과 한 후 각각 객실로 돌아갔다. 그런데 여목사님 들이 내 구두와 여권, 비상금, 선교신학교 개원예배 프랭카드 일체를(심지어 여행용 조끼까지) 다 자기들 방으로 가져가 버렸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젠 니느웨의 모든 일정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아아! 이일을 어쩌나 여러 가지로 후회가 막심했다. 기드온의 32000명 용사 중에 31700명을 돌려보내고 300명만 택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전략을 무시한 나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탓해본들 무슨 소용 있나.... 이젠 다 끝나버렸구나 옆을 보니 총장님은 5분 간격으로 눈을 떠서 나를 계속 감시하고 있고 도저히 니느웨로 향할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 주님 이때에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 모술에서는 모든 성회와 프로그램을 준비해놓고 많은 성도와 신학생들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 중대한 사역을 포기하거나 연기할 수는 절대로 없는데! 주님! 어떻게....어떻게 해야만 하나요...계속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기 시작했다. 총장님은 계속 나를 감시하고 있고....가다가 죽더라도 나는 가야한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는 가야한다. 나는 가리라. 주의 길을 가리라. 주님 발자취 따라 나는 가리라. 이 찬양이 가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가야해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저 니느웨로 나는 가야해. 어떤 이유도 핑계도 용납할 수 없어!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한다. 지금! 지금! 일단 CNN 뉴스 볼륨을 크게 올려놓고 총장님의 동태를 살펴보면서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 오전 7시에 예약된 GMC 차량은 기다릴 것이고 신발은 총장님 신발 끌고 가면 되고 비상금과 여권이 있어야 되는데! 주님은 베드로, 바울을 옥중에서 끌어내신 전능하신 주님이신데 까짓것 죽으면 죽는다. 일단 여기만 빠져나가면 된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고 총장님 가방을 열어서 달리 몇 푼이라도 챙겨 보려고 가방지퍼를 여는데 정말 도둑씨들의 그 애로와 노력의 수고를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다. 원 세상에 1달러도 없는 것이다. CNN 뉴스 소리를 높인 덕분에 드디어 총장님은 꿈나라 속 (팔루자 피랍현장으로)가신 바로 그때 지금이다. 지금 여기서 탈출하지 못하면 모든 일은 끝나는 것이다. TV에서는 15분 간격으로 우리 일행이 피랍 후 풀려나서 호텔에서 서로 포옹하고 감격해 하는 모습을 전 세계에 방영하고 있었다. 속히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객실 문을 열기 시작하여 빠져나가는 시간이 족히 20분을 경과한 것 같았다. 애초 맨발로 나가려 하였으나 미군경비실에서 잡히면 정신병자로 오해 받을까봐 어쩔 수 없이 총장님 구두를 불법 무료임대 한 것이다. 그러나 떠나기 전 다시 우리 일행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분명히 양해를 구하고 신었으니 도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머니엔 약 50$ 정도 있는 것 같다. 모술까지 도착하려면 약 7차례-10차례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데 여권 없이 99% 불가능하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일단 출발했다. 03:30분이었다. 앞으로 3시간 30분을 어디서 숨어 있다가 7시에 GMC를 타고 출발할까? 다행히 호텔 경비를 맡은 미군과 이라크 현지 경비원들을 통과하여 호텔 앞 큰 도로변까지 잘 나올 수 있었다. 김지혜 권사님이 선물로 주신 얇은 긴팔 티셔츠만 걸치고 도주하는 그때는 추운 줄도 몰랐으나 자꾸만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는데 마침 경비병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보초를 서고 있 길래 불도 쬐고 전도도 할 겸 그들에게 접근하였다. 1$짜리 7-8장을 나눠주고 길거리 한쪽에 숨어서 계속 그 짧은 영어 총동원하여 3시간 20분 이상 전도하였다. 이라크 사람들은 정말 우리 한국을 좋아한다. 요르단 이라크는 한국의 중고차들 전시장이다.

얼마나 한국을 좋아하는지 봉고차에 붙은 상호까지 자랑스럽게 붙이고 다니고 매우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다. 일부 극렬주의 테러주의자 빼고는 참 좋은 사람들이다. 강대국들 틈바구니에서 좁쌀 반 토막짜리 꼬리 한국!(러시아의 어느 꼬마의 표현대로) 900차례 외세의 공격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지구촌의 희망의 등대지기 한국! 참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고 대견스러운 대 - 한 민국. 나는 한국인으로서 큰 자부심 긍지를 느끼면서 하나님께 항상 감사드리면서 선교를 엄청나게 즐기면서 산다. 10여명의 이라크 군인들이 복음을 듣고 기뻐하며 결신하였다. 모술 강행의 뜻을 확인한 군인들이 1$짜리 돈을 도로 다 돌려주면서 잘 다녀오라면서 다시 만나면 길 건너 통닭집에서 음식 나누자고 약속까지 하고 정각 7시에 GMC에 탑승한 후 즉시 모술로 달렸다. 우리 일행에게 잡힐까봐 얼마나 긴장하고 간절히 기도하며 경비병들이 숨겨주어 전도하던 그 일이 실로 감격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불안, 염려, 공포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직 니느웨 성회 일념으로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갈 틈이 없다. 니느웨로 가라. 니느웨로 가라. 그곳이 지구촌 선교의 발판이 되어 제 2의 전 세계 마지막 회개운동의 산실이 될 수 있다는 확신아래 나의 가슴은 벅차기만 했다. 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거의 5시간 연속 눈물이 이어진 것 같다. 어제 저녁 막혔던 길은 다 열렸고 계속되는 검문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검문소 통과 때마다 나는 손을 계속 흔들어 댔다. 검문소에서는 오! 사우스 코리아 하면서 나를 반겨 주었고 그때마다 나는 여권대신 이라크 팔레스틴 호텔 MBC 김영철부장이 주었던 명함을 보여주면서 1$짜리 한 장씩 건네주면, 고마워서 무사통과 시켜주는 것이다. 한번도 여권검사 없이 10여 차례 그 살벌한 검문소를 참 은혜롭게 찬송하면서 거쳐 갈 수 있었다. 그야말로 신사도행전을 기록하는 기분이다. 오! 주님! 감사 감사합니다.

바그다드에서 모술(니느웨)까지 약4시간 거리이나 중간지대에 티그리트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곳은 후세인의 고향이며 거의 매일 교전이 벌어지는 곳이고 미군탱크, 헬기, 군용차량들이 거의 연속으로 불타고 있는 곳이며 하루에도 몇 대의 차량폭탄이 터지며 그날에도 유조차(미군)가 전복되어 불타고 있었다.

4시간 거리이지만 5시간-6시간 소요될 때도 있다. 그 날은 특별한 기적과 은혜의 날이었다. 주께서 좋은 차와 기사를 보내 주셔서 그 위험한 길을 달려 현지 니느웨 장로교회에 11:30분경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164년 전 미국 어느 선교사님의 희생적 선교활동으로 시작되어 건축한 무너지기 직전의 낙후 건물 안에 164명(김명길 선교사님과 본인을 포함하여)이 그날 모였다는 소식과 함께 눈물로 모두 서서 간구하는 성도님들을 바라보는 순간 더욱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부흥설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온 인류위해 대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고 3일 만에 다시 사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 일행 목사님들이 다니엘처럼 사자굴에서 5번이나 살아났습니다. 여러분과 전 세계의 성도들이 중보기도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모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랍선교위해 순교할 각오된 분은 손들어 보세요. 약 70여명이 손을 들었고 이어서 복음전파위해 순교각오로 신학하여 목회자, 선교사 되실 분 일어나세요. 약 30여명이 일어나서 결단의 기도를 함께 드렸다. 그렇게 뜨거운 열기는 다니엘 세 친구가 살아나온 용광로를 연상케 하는 데 충분했다. 바로 이어서 160여명의 성도가 강단 앞으로 몰려들며 모두 안수를 사모했다. 지구촌 어디를 가나 안수는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의 한결같은 열망사항이요 한편 터지기 직전의 럭비공에게 덤벼드는(?) 모습들을 보면서 참 잔인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너무너무 사랑스럽고 감격 감동 그 자체였다. 그래. 죽으면 죽는다. 끝까지 해보자. 춥고 배고프고, 잠 못 자고, 쓰러지기 직전이지만 저들을 기드온의 300명 용사처럼 무장시켜서 이라크와 아랍 13억을 구원하는 특전사로 파송한다면 이 한 몸 한 알의 밀알이 되리라. 그러나 성령께서 한 말을 하게 하셨다. “제가 쓰러지면 요나 무덤 옆에 화장시켜서 뿌려주시오. 지구촌 구원위해 제2의 회개운동을 일으킵시다.” 외친 후 생명 다해 한 분도 빠짐없이 안수해 주었다. 안수 후 즉시 담임목사이신 아스랍모세 목사에게 빨리 갑시다. 지금 바그다드에 우리 일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서둘러 가야 합니다. 성회는 끝났으니 니느웨 선교신학교 개원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프랭카드도 선교비도 우리일행도 모두 바그다드에서 기다리니 어서 갑시다. 장로님대표, 신학생 대표를 빨리 선정하여 대기 중인 GMC에 탑승해야 합니다 했더니 난색을 표하면서 현재 니느웨 자체 법령으로 엄격히 규제하고 있어서 당국 허가 없이 출입을 절대 못한다는 것이다.

모술은 미군 해병대 사령부가 있고 너무 위험하여 한국 자이툰 부대가 주둔을 거부한 지역이며 계속하여 총성과 폭음이 들리는 최악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그러면 김명길 선교사와 나만 지금 가겠다고 했더니 10여명이 30분이상 회의를 하더니 비장한 표정을 지으면서 아스랍모세 목사와 대표 장로와 신학생 대표1명등 모두 5명이 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경에 출발하여 바그다드에 6시 30분경 도착했다. 아침 7시 바그다드로 출발하기 직전 분명히 MBC직원인 김경렬씨에게 GMC 사무실에서 전화를 걸어 부득불 모술에 준비된 행사와 동역자 김명길 선교사를 대동해야 하기 때문에 다녀오겠노라고 오후 7시안에 꼭 돌아올 것이라고 밝히고 출발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국내 모 언론에서는 김모 목사 돌출행동, 행방불명, 도망했다등 참 다양하게 맘대로 기사를 내 보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분명하게 알리고 대사관측에도 전하라고 했건만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일어났는지 참 모를 일이다. 아무튼 약속시간 이전에 호텔에 도착해서 참으로 감사했다. 죽을 각오로 (실은 순교제물이 되고 싶은 열정은 아직 식어지지 않는 상태) 덤벼들고 종횡무진 했건만 안이숙 여사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순교자격도 미달된 참 불쌍한 실격자구나 그러나 살려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호텔에 들어선 순간 우리 일행 중 김보화 목사님이 쏜살같이 달려와 나를 안으면서 통곡을 하는 것이다. 또 다시 우리 일행들과 MBC, KBS, SBS 및 세계 언론들이 밀어닥치면서 무슨 일이나 또 발생했나 하는 듯 몰려들기 시작했다. 호텔 안에서 객실사이 복도에서 간단히 신학교 설립예배를 드리려고 준비했으나 프랭카드가 너무 길고 한국목사일행 피랍사건으로 온통 떠들썩하여 호텔에 투숙한 분들의 따가운 시선들 때문에 부득불 호텔 마당에서 잠시 기도회와 신학 설립 선포하려고 준비하는 그 시간 온 세계 언론들이 구름 떼 같이 모여들어 카메라 홍수 속에 파묻힌 채 참으로 감격스런 신학교 설립행사를 치르게 된 것이다. 아!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라 하신 주님 말씀이 떠오르며 예언 성취되는 역사의 현장을 온 세계에 동시에 알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요르단, 이라크를 오가며 선교사역 하시던 NGO 선교사님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고 상당한 갈등과 공격의 빌미로 작용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측량도 어렵고 그저 놀라울 뿐이다.

누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역행할 수 있으랴. 감사와 겸손과 순종으로 주께 영광, 찬양만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전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장님은 호텔 마당에 무릎 꿇고 눈물과 감격의 신학교 설립 기도하시던 그 감동의 순간과 광경!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아니 영원히 그 모습을 지울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 같다. 바그다드에는 이미 한국의 대형교회의 훌륭하신 목사님들이 연합으로 복음주의 신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것으로 그 당시 알고 있었기에 우리도 애당초 바그다드는 상관없이 북부지역 요나 무덤 있던 그 옛날의 앗수르 수도인 니느웨에 신학교를 세우고 교회들을 개척하고 지구촌 마지막 회개운동과 선교운동의 전초기지로 삼으려던 구체적 계획과 기도 속에 진행되던 선교사역 이었다. 이라크를 3번째 방문하기 직전 현지 선교사님들과 신학교재와 운영문제를 상의 하고 또한 공동운영에 관한 협조를 논의 했지만 거절당하였기에 더더욱 우리 자체계획 대로 진행되던 중 피랍사건이 발생한 관계로 부득불 바그다드에서 니느웨 선교신학교 개원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다. 정말 오해와 착각은 자유자재 영역임을 재삼 확인케 된 셈이다. 심지어는 현지 공관원 중에 한 사람이 왜 현지 선교사님들이 사역하는 텃밭을 함부로 밟고 다니 냐고 상당히 불쾌한 어조로 우리 일행의 이벤트형 선교(어떤 사람들의 무책임한 언동 중에서..)를 꼬집어 비아냥 거릴 때 선교럭비공 골잡이인 내가 가만두질 않았다. “누가 당신네들에게 이라크를 전세로 주었느냐,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의도대로 된 일이냐”?. 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자주 겪는 일이지만 현지 선교사님들과 단기 선교팀들의 갈등은 피차 겸손과 질서와 조화 그리고 긴밀한 협력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일행들의 선교사역에 대해 교계언론, 일반언론,및 대부분의 여론등은 모든 어휘를 동원하여 비방, 욕설, 공격, 비판, 악담등 으로 표현했지만, 우리는 오직 요나를 지명하여 니느웨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순종할 뿐이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확신한다.

우리 때문에 고생하시고 염려하시고 어려움 당하시는 대사관, 영사관직원들, 현지 선교사님들 국내외 주의 사자들, 전 세계 성도님들 모두에게 참으로 죄송하고 송구스럽고 기도해 주시고 도우신 모든 분들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바그다드 장로교회 모든 성도님들, 바그다드 온누리교회 모든 분들 모두 감사할 뿐이다. 사랑과 기도의 큰 빚을 더욱 지게 되었고 더욱더 순교의 의지를 굳혀 가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교계 모 신문들 조차 전화 한 통화 확인 절차 없이 돈 주고 풀려났다는 등 온갖 견디기 힘든 모욕과 분노와 비방을 기도로 정리해 가면서 제4차 니느웨 선교를 차근차근 준비하게 되었다. 7월 마지막 주간! 니느웨 성회 1주년을 맞아 신학생 특강과 교회개척예배 계획을 갖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김명길 선교사님과 함께 출발했다. 현지 아스랍모세 목사님의 권유에 따라 시리아를 통해 직접 접경지역인 모술로 입국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다마스커스 공항에 내렸다. 우리나라와 비수교 국가이지만 이스라엘 여행 근거만 여권에서 확인 못하면 입국이 가능하고 비자발급 또한 큰 문제없다는 사전정보를 가지고 도착했으나 비자발급이 안되는 것이었다. 니느웨쪽 알레포 공항으로 국내선 항공 이용하여 이동하여 8시간 만에 비자발급 받고 차를 렌트하여 7시간 달려 국경선에 이르렀으나 테러발생 위험지구라는 이유로 완강하게 거절당하고 다시 알레포와 다마스커스 공항을 거쳐 암만으로 향했고 암만에서 바그다드로 바그다드에서 다시 모술까지 쉴 틈 없이 강행군하였다. 모술에 도착하여 수석장로님 댁에 거하면서 니느웨 장로교회 성회와 신학생 세미나 그리고 임마누엘 교회를 개척하여 설립예배를 드렸다. 4월 피랍사건이후 김선일 선교사 순교사건으로 더욱 긴장되고 악화된 현지사정이었으나 그야말로 목숨 건 순교행진이었는데 너무나 감동적인 기적의 열매가 결실 되었다. 그 중 하나는 지난 4월 12일 성회 때에 안수 받고 은혜 체험한 니느웨 장로교회 반주자가 현지 고교 음악교사였는데 그의 아내가 결혼 14년 만에 불임증 치료받고 지금 임신 4개월이라는 기쁜 소식과 더욱 큰 열매는 2003년 7월과 2004년 1월에 은혜 받은 신학생들이 병 고침 받고 사명감까지 받아 집과 재산 드려 반석교회, 본향교회, 임마누엘 교회 등 세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 순교적 교회의 탄생은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의 작품으로 결실한 성령님의 쾌거였다. 담임 아스랍모세 목사는 신혼여행 중이어서 못 만나고 일정 때문에 반석, 본향교회 설립예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선지자 나훔의 사역지와 무덤현장을 방문 했는데, 수 천년 지난 나훔의 관까지 확인하고 왔다. 요나의 무덤위에는 거대한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는데 반해 나훔의 사역지와 무덤지역은 90%이상 신실한 크리스챤 마을로 변해 있었다. 정말 대조적인 현실을 확인하면서 주의 종들이 진정으로 불평 없이 순종하고 감사함으로 사역해야만 풍성한 열매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보여주는 놀라운 현장을 발견케 할 것이다. 신속하고 민첩하게 일정대로 진행시키는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에 감탄하면서 저녁에 니느웨와 시리아 접경지역으로 이동했으나 계속되는 교전과 총성, 폭음에 질려버린 렌트카 기사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니느웨 외곽도로를 배회하던 끝에 시리아 알레포행을 포기하고 다시 니느웨 장로교회로 돌아오고 말았다. 계속하여 포성은 밤하늘을 흔들어대고 그 참혹한 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한 옛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미군의 야간 순찰 헬기를 비웃기나 하듯이 그 옛날 앗수르 산헤립 왕의 교만의 계승자나 된 듯이 티그리스강변 광란의 축제를 벌리고 죄악의 연가를 읊어대고 있었다.

아! 회개의 대명사요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독점했던 니느웨! 멸망직전에 드라마틱한 구원의 서사시를 노래하던 그 은혜로웠던 요나의 연출무대에서 또다시 멸망직전에 지옥의 빅쇼(big show)를 연출하고 있으니 이일을 어쩌란 말인가? 요나 선지자가 다시 부활 하던가 나훔의 통곡과 탄식이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이 도성을 하나님은 어찌하시려는지! 눈물과 가슴 찢는 고통이 사랑의 주님 피눈물에 섞여 니느웨 장로교회 마당을 적시운다. 극악무도한 마귀와의 격전에서 괴팍한 요나의 억지 순종까지 동원하신 하나님! 박 넝쿨 사랑에 빠져서 악질 습관성 자살 충동증 환자 요나를 출연시키면서까지 12만명의 영혼사랑에 미쳐버린 하나님과의 대조적 연출로 역전승하신 하나님! 니느웨의 은혜 축제현장을 이 밤에 다시 한번 보고 싶습니다.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우며 울고 또 울어야 했던 그날 밤! 니느웨 교회 마당에 지쳐 쓰러진 지구촌 럭비공 선교 미치광이들에게 밤하늘의 별들마저 함께 울어주는 느낌이었다. 오! 주님. 그 날의 자비와 은혜를 이 밤에도 다시 한 번 보고 싶사오니 요나서 마지막 제 5막의 커튼을 지금 열어 주소서! 이른 새벽 요나의 거친 숨결을 가슴에 품고 주유소에서 거의 2시간 애태우다가 4시간을 달려 국경선에 이르니 엊그제 교만과 오만으로 충만했던 시리아의 그 고관이 늠름하게 딱 버티고 있지 않은가? 아! 이 일을 어쩌나 우리만 놀란 것이 아니고 그 위대하게 보였던 시리아 3스타 께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한 충격 바로 그것이었다. 양편 모두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를 멍하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그도 우리도 모두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바디랭귀지를 총 연출하며 너무 위험하니 절대로 입국할 수 없다 하던 그 지역들을 무사히 통과하여 완주를 했으니 다시 그 길로 돌아가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순히 패스시키기에도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2시간 가까이 또 실갱이를 벌이다가 당신은 정말 코리아 태권도 교관이냐는 질문에 발끈한 김명길 선교사는 주먹으로 탁자와 출입문을 거세게 쾅 내리치고 소동을 피우니까 즉각 통과를 시켜 다시 7-8시간 고속주행 끝에 알레포 공항을 거쳐 다마스커스에 도착하니 이미 하루 전에 예약항공기는 떠나버렸다. 얼마나 급박하게 모든 일정이 진행되었던지 시차적응도 시간관리도 망각하고 벌써 지나버린 티켓으로 탑승수속을 밟으려니 우스운 꼴로 국제망신만 당한 것이다. 영어도 못하는 나만 국제 미아로 둔 채 김 선교사님은 시리아 다메섹 시내로 신학교 세운다고 사라져 버렸고 나의 비상금까지 몽땅 김 선교사님께 넘겨버린 상황에서 물 한 모금 살 돈 없이 이미 끝나버린 휴지 티켓을 들고 공산주의 땅 공항 구석구석 헤매면서 피가 마르는 고생현장의 바람 빠진 럭비공 굴러다니는 모습 한번 측은한 눈길로 바라 보십시요! 남의 일로 여기면 재미스러울지 모르나 입장 바꿔 잠시 생각해 보면 상당히 심각해 질 것이다. 어쨌든 기적은 일어났다. 외국에서 이런 꼴 겪은 사람은 우리같이 기도 줄에 생명을 연결한 우리로서도 정말 죽음 직전 같은 고통의 연속이다. 대책 없이 빈 좌석만을 기다리던 승객이 내 뒤로도 4명이나 되는데, 더구나 나는 이미 지나버린 티켓인데 바로 나까지만 좌석배정이 되고 문을 닫아버렸으니 오! 할렐루야. 요나위해 모든 것 예비하시고 진행하시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께서 선교야말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특별최고 최대 관심사임을 재삼 확인시켜 주신 사건이었다. 중간 경유지 암스테르담 공항에서의 12시간 대기시간은 참으로 은혜 충만 그대로였다. 1달러가 모자라 마실 물도 없는 상황에 온갖 피로, 배고픔, 한국에서 이어질 모든 스케줄 등등 참으로 감사 감사의 연발이다. 항상 항공료 절감위해 값싼 여객기만을 고집하고 이용하고 다니다 보니까 마일리지도 거의 전무한 실정인데 가끔은 좌석이 모자란다고 이상한 이유로 이번 여행에서는 1등석 A좌석을 차지하는 뜻밖의 축복도 맛보게까지 하시니 선교중독증 환자들이 겪는 이런 체험은 1200만 한국 성도님들이 다들 함께 경험해 보시기 바란다. 해산의 수고, 죽음직전의 생명이 회생되는 기쁨을 이라크에서 계속 체험하면서 또다시 10월 예정으로 진짜 순교의 프로그램을 작성하면서 암스테르담을 떠나 귀국했다. 제5차 이라크 선교 2004년 10월 가끔 주고받는 이메일에도 더욱 긴장을 고조시키며 이라크 기도를 불붙게 하자는 소식이 온다. 아스랍모세 목사 부부께서 시리아에 피신 중이고 매일 쏟아지는 이라크 자살 폭탄의 비보와 브라운관에 나타나는 참상과 더욱 참혹한 니느웨(모술)의 대형사건들은 긴장의 도를 높여만 가고 하루 빨리 라마단 기간을 기다려 본다. 더욱 잔혹해지고 위험수위가 높아지는 무슬림들의 라마단 절망적인 비보가 오던 중 니느웨 교회 성도가 거의 흩어지고 최종 남은 사찰집사 가정에 무장 세력들이 총 뿌리를 그들 가슴에 대고 교회를 떠나든지 죽든지 선택하라고 위협한 사실. 신학생들 36명이 강의가 중단된 상태, 우리가 7월말 니느웨 교회 떠난 직후 3-4시간 만에 이라크 북부지역 (모술포함) 4개처 교회가 피폭되고 순교 희생자들이 발생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주변 국가들로 피신중이라는 소식을 접한 순간!즉각 지원특공대, 순교결단자 모집에 들어갔는데 박창성 목사(지난 4월 피랍시 현지에 동행 못했음을 늘 아쉽다고 말했기에 제안해 보았음) 이명환 선교사( 참사랑과 희생으로 원주민 선교사역 전문지도자) 이순옥 전도사(기도와 선교에 목숨 걸었다고 늘 괴성을 발하는 전도사) 김명길 선교사와 함께 아예 순교결단예배까지드리고 늘 쓰던 유서보다 더 구체적이고 결정적 유언을 다 작성한 후 비장한 각오와 결의로 제 5차 이라크행을 진행시켰다.

정말 이번만은 마지막 순교코스가 되길 원했고 갈망했다. 이번 일정은 시리아 선교신학교 개원예배와 신유성회 그리고 이라크 니느웨 선교신학 특강과 두개의 개척교회 (반석, 본향교회) 설립예배와 마지막 순교의 피를 니느웨 장로교회 정문에 쏟으면서 천국 복음 전하다가 운명하는 일정이었다. 2개월 이상 기도와 철저한 준비 끝에 극적으로 준비된 선교비로 4차와 같이 시리아 다마스커스 나사렛교회에 도착했다. 이 나사렛 교회는 에브라임 목사님이 담임하시고 둘째딸 사위 목사님이 부목사로 재임하면서 7개국에서 피신 온 목회자와 신학생, 성도, 난민들이 주간마다 요일별로 모여 예배하고 공동생활 하며 고아원과 초등학교까지 운영하는 아주 귀한 교회이다. 5-10분 거리에 바울이 부활하신 주 예수를 만난 장소와 기념교회가 있고 그 바울기념성전 지하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면서 선지자 아나니아 옛 거주지와 광주리에 숨겨 피신한 그때 성벽, 직가 거리등, 2000년 전 바울의 숨결을 느끼며 사도행전의 실제 배경거리, 무대를 거닐면서, 시리아 유일한 신학교 개원과 대 신유연합성회를 진행시켰다. 성전 밖까지 몰려온 시리아 성도님들, 이라크 난민들, 콩고, 수단, 이집트, 이란, 요르단, 케냐, 한국 등 그야말로 국제 연합 성회였다. 박창성 목사님 통해 역사하신 성령님의 귀하신 사역들, 각색병자들이 주 예수님의 은혜로 치유 받고 놀라운 기적, 표적들이 나타났다. 유별나게 유창한 영어통역 현지 아랍어 통역 이명환 선교사님 이순옥 전도사의 내적치유 은사사역 등 엄청났다. 마지막 중대한 결단과 헌신의 시간! 「여러분 중에 주 예수님을 믿다가 순교각오한 분은 일어나시오. 」100여명이 즉시 일어났다.「 다시 여러분 중에 순교신앙으로 복음 증거할 신학지원자 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으시오」 하니까 제일 먼저 에브라임 담임목사와 39명의 신학 지원생들이 일일이 앞에 나와 무릎 꿇고 안수 받으며 눈물 쏟는 헌신 결단자들이 줄을 이었다. 「다시 이 땅에 못 만나면 저 천국 본향에서 만납시다.」 할렐루야! 2일간의 성회와 시리아 다메섹 선교신학교 개원예배 마치고 그날 밤에 에브라임 목사님 사택에서 저녁식사를 대접받는 시간에 부목사 사모이신 에브라임목사님 딸이 레바논 국영TV 부국장으로 근무 중인데 이번 성회에 참석하여 마지막 순교결단 예배 헌신 기도 시간에 울먹이더니 아예 금식하면서 우리일행의 이라크 입국은 결사반대 방해 공작을 본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 계획을 막을 자는 하나님 한 분이심을 확신하기에 「가는데 까지 가리라!」 집요하게 애원하며 만류하는 에브라임 목사 가족의 강한 저항을 무릅쓰고 김명길 선교사님은 밤을 세워 순교목걸이와 프랭카드를 준비하였다. 이라크 입국 전전날 밤 가끔 습관적인 잠꼬대 설교와 강의 방언 예언 등을 처음 목격한 박창성 목사님이 나의 잠꼬대 내용을 속기사처럼 기록하여 영어로 번역하고 정리하고 그 내용을 순교목걸이에 영어와 아랍어로 기록하고 프랭카드에 옮겨 써서 10개의 순교목걸이와 두장의 프랭카드를 제작하고 각각 목걸이 2개씩 분배했다. 아무도 영어로 아랍어로 번역하는 일에 협조를 해주지 않고 방해만 하니까 밤새우며 대학교수들을 만나서 약간의 사례를 주고 제작을 끝낸 것이다. 아침 7시경 다마스커스 공항에서 이라크 바그다드행 정기노선 소형비행기에 탑승하고 바그다드에 도착했는데 비자 문제로 입국은 거절되고 다시 그 비행기로 요르단 암만까지 가서 비자 신청했으나 공휴일이어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또다시 지난 4월의 일들이 재현되었다. 자! 여기서 어떻게 되나 경비, 시간, 상황 등을 종합해 볼 때 육로로 14시간 야간 운행하여 그 위험한 팔루자! 우리 일행이 5-7차례 겪었던 피랍현장이요, 김선일 선교사의 순교지인 악마의 사각지대 팔루자를 통과하여 니느웨로 갈 것인지 암만에서 하루 유숙하고 시리아로 가서 한국행을 택할 것인지 두 팀으로 나뉘는 일이 발생했다. 다들 시리아로 향하시고 나 홀로 육로를 통해 이라크로 가겠습니다. 보슬비는 우리의 미음 속까지 적셔 오는데 점점 깊어가는 암만의 빗길! 나그네들은 암만 생각해도 답답하기만 했다.

이 때 이순옥 전도사가 나는 죽어도 김 목사님 따르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모두 동행하기로 결정하고 GMC사무실로 향했다. GMC사무실 직원들 조차 극도로 긴장한 모습에 만류하면서도 되돌아올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기고 위험상황도 불구하고 운전기사가 우리의 의지대로 따라주었다. 최악의 긴장상태로 이라크와 요르단 국경선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 동안 여러 차례 통과한 지역이지만 더더욱 불안감과 공포의 분위기가 차안에 엄습해 온다. 나 혼자 이 지경을 지날 때도 너무너무 평안하기만 했는데..... 왜 주님께서 중대한 사역현장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3제자만 동참시키셨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게 되었고 두려워하는 일행위해 집중적 중보기도가 절실히 요청되었다.

전례와 같이 운전기사가 우리일행의 모든 여권을 모아 가지고 먼저 요르단 국경관리 사무실로 수속을 위해 들어갔고 우리도 동행했다. 최고책임자가 최종검토한 후 많은 대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분도 크리스챤이었고 가족도 다 믿음의 가정이었다. 지금 이라크에 입국하면 (참수장면을 연출하면서)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그리고 바로 TV에 나올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한 것이었다. 몇 번을 망설이고 고민하던 끝에 결국 통과 시켜 주었다. 이라크 국경수비대에서도 전과 같이 운전기사가 우리의 여권 모두 가지고 수속 대행에 들어갔고 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절차를 마쳤는데 그 현장에서 이라크 청년 한명이 우리 차 조수석에 동승하였다. 바싹 야윈 그의 눈동자는 붉은 핏발이 서 있었고 살기가 서려 있었다. 꽤 긴 가방에 묵직한 것이 들어있는 듯 보였고 계속 우리를 돌아가면서 유심히 주시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측은하고 가엾은 생각이 나를 사로잡으면서 자그만 소리로 방언기도를 계속 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고속주행으로 팔루자 앞까지 우리 일행은 갈 수가 있었다. 몇 차례 뒷좌석의 우리들을 응시하면서 기분 나쁜 표정으로 대하던 그가 못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채 운전기사와 여러 차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미군 검문소를 불과 수십 미터 앞두고 팔루자 입구에서 내린 것이다. 간단한 영어로 그가 민간 경찰이라고 소개했는데 나중에 이라크 한국대사관에 도착하여 알아보니 그가 바로 민병대였고 저항세력의 행동대원이었던 것이었다.

굶주린 사자를 우리의 경호원으로 동행시킴으로 사자굴 속의 다니엘 그룹이었던 것을 생각하니 한편 소름끼치면서 다시금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도중에 불길한 예감이 들어 팔루자로 들어가지 말고 우회도로 이용하여 곧바로 니느웨로 가자고 여정을 바꾼 것도 성령께서 특별히 주신 지혜였다. 원래 바그다드까지만 계약이 되었고 바드다드에서 쉬고 니느웨로 가기로 되었던 여정을 주께서 바꿔주신 것이다. 도저히 인간의 체력으로 14시간 이상 거의 쉬지 않고 라마단 기간에 금식운전을 20시간 가까이 강행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운전기사는 쾌히 승낙하고 강철 같은 체력을 과시라도 하듯이 곧장 니느웨로 강행군한 것이다. 곳곳에 차량폭탄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아직도 처리하지 않은 채 여전히 길거리와 고속도로 주변에 치열한 격전의 잔해들이 널려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2003년 7월말 처음 이라크 선교차 방문했을때 바그다드에서 니느웨 고속도로에는 채 출동도 하지 못한 채 수 백대의 탱크들이 녹아 있는 모습들, 고속도로 양쪽에 끝없이 늘어서서 불타고 있는 각종 차량과 무기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못했고 거기에 매일 교전과 차량자살폭탄으로 타고 있는 차체들까지 여기저기 보였다

항상 교전이 멈추지 않는 후세인 고향 티크리트 지역에서 또다시 우리 일행은 치열한 교전현장을 목격하고 바로 우리 차량 전방 5-7미터에서 불꽃 튀는 격전장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1시간 이상 전투 현장에서 운전기사와 우리일행도 무기 없는 전투가 벌어졌다. 기사는 차량을 유턴하여 바그다드로 가자고 하고 우리는 더 기다리다가 우회도로를 이용하여 기어코 모술로 가자고 하고 실갱이 하던 중( 만일 니느웨 못가면 한 푼의 돈도 줄 수 없다) 하니까 그제야 우리말을 순순히 듣는 것이었다. 결국 교전은 중단되었고 차량들은 움직이기 시작하여 우리는 모술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러 차례 검문과정도 특별한 어려움 없이 무사통과 되어 교회근처까지 접근했으나 어렵게 접선한 현지 교회 대표 장로님과 신학생대표가 너무 놀라은 표정을 지으면서 절대로 우리를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게 강력하게 만류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이미 시리아의 나사렛 교회 부목사 사모님이 니느웨 교회 지도자들에 연락을 취하여 우리를 곧장 거절하도록 조치한 것이었다. 어쨌든 니느웨 교회 장로님 일행을 만나기 전 우리차량 후방 200미터에서 두 번의 폭음과 함께 거대한 검은 구름이 하늘로 솟았고 순간 화염에 휩싸인 미군 군납차량을 폭파시킨 것이다. 잔뜩 겁에 질린 일행들은 장로님 일행의 간곡하고 절박한 애원에 굴복 하고 극도의 위험한 상황을 직시하고 고집불통인 나를 설득하면서 빨리 모술을 떠날 것을 종용하였고 네 번째 선교 일정과 같이 시리아 국경을 통과하려 했던 여정을 또다시 수정하여 바그다드로 갈 것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니느웨 장로교회 정문에 신문지 깔고 순교 목걸이를 목에 걸고 복음 외치며 순교의 피를 뿌리자고 구체적이며 철저하게 준비해서 왔건만 이렇게도 맥빠진 패잔병이 되어 니느웨 땅에 발도 못 붙인 채 떠나야만 하니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목자 없는 양떼만 버려두고 신혼부부 아스랍 목사는 더 큰 미래 목회와 선교를 꿈꾸며 시리아에 피신 중이었다. 시리아에서 성회중에 우리 숙소에 두 번 찾아왔던 모세목사는 우리에게 생활비와 선교비(신학교 운영비)를 상당한 금액을 요구했지만 우리와 함께 니느웨로 가면 주겠노라고 했으나 100% 죽을 것이 뻔한데 그 위험한 곳에 왜 가느냐고 하길래 약간의 생활비만 건네주고 헤어졌다. 우리일행과 약속을 굳게 한 내용이지만 사실은 나 혼자만이라도 죽음으로 양떼와 신학생을 지키며 모세 목사 돌아올 때까지 이 제단을 사수하려고 굳게 결심했던 것이다. 아! 이젠 다 실패로 끝나는 구나 그렇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계속 고집하면 남아있는

교우들까지 다 죽을 수 있다고 하면서 빨리 모술을 떠나 달라고 하는 애걸 협박의 현장에서 더 이상 고집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팔루자로 가야지 그러나 어떻게 우리 일행을 따돌리고 나 혼자 팔루자로 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모술에서 바그다드로 돌아오는 길에 줄곧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젠 정말 하나님께서 부족한 이 몸을 순교의 제물로 받으시는구나! 우선 일행을 바그다드 시내 숙소에 잠재우고 최소한 팔루자 까지 택시비만 준비하고 신분확인이 필요 할 테니까 여권을 챙긴 후에 나 홀로 팔루자롤 들어가면 된다.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바그다드 시내에 들어섰다. 제일 싼 호텔을 찾아갔으나. 무조건 한국 사람은 거절한다. 현지 공관에서 들은 바로는 한국 사람인 한사람만 신고해도 3억원의 현상금과 인계 할 경우에는 5억원을 주겠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김선일 선교사의 희생 여파로 초긴장 상태에서 가는 호텔마다 완강하게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팔레스 호텔(팔레스틴 고급호텔 아님) 40$ 짜리 숙소에 겨우 투숙을 결정한 후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우리 팀 재정담당인 이명환 선교사로부터 비상 도피자금을 챙기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 박창성 목사님이 샤워하는 동안 일행과 가족과 성도들 그리고 한선총 회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서를 작성 하던 중 그 날 따라 박 목사님은 초고속으로 약식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바람에 유서를 숨기고 먼저 잠자리에 드는 척 했다. 연속 27-28시간을 차 속에서 지내면서 땅콩 반 주먹, 대구포 한 주먹으로 라마단 기간을 보내면서 강행군을 했으니 모두가 초죽음 직전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요르단 운전기사는 마치 강철 인간으로 보이기도 했다. 「너무 피곤하니까 일찍 잡시다. 」 시계를 보니 대략 현지시간 밤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자정을 시점으로 007 비상탈출을 계획한 나에겐 박 목사님이 큰 장애였기에 우선 박목사를 재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 이게 웬일인가 ? 코골이가 심한 나로선 언제나 박 목사님보다 조금 늦게 잠들기로 철썩 같이 약속하고 거의 성실하게 불문율이 실행되어 왔는데 그만 내가 먼저 잠이 든 것이었다. 1시간이나 잤을까! 갑자기 「“다들 일어나요 왜 이렇게 위험한 일들을 하는 것이요” 」고함소리와 함께 눈을 떠보니 이라크 대사관 직원들과 자이툰 특공대원들이 무장한 채 호텔 문을 열고 비상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었다. 뒤늦게 정보를 입수한 공관원들이 수소문 끝에 우리의 거처를 찾아 비상 구출작전을 실시한 것이다. 죄수 아닌 죄수들이 된 우리는 국제적 보호조치 대상으로 대사관에 감금(?) 보호감시를 받으면서 최고의 귀빈 대우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김선일씨 사건을 모르십니까? 왜들 이렇게 위험하고 무모한 일을 3번씩이나 저질러서 온 국민을 걱정 끼치시는 것입니까?” 세 번이 아니고 다섯 번째 입니다. “언제 또 다녀가셨습니까? 이렇게 무단 불법 입국하시면 곤란 합니다” 무단 불법 입국이라구요, 그게 가능한 얘깁니까? 여기 여권을 보십시요 더 이상 논쟁이 필요 없었다. 아무튼 대단히 죄송하오나 여러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으니 설명도 의미가 없을 것 같으니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라고 답변하니까 「"왜 다시는 안 오신다고 약속해놓고 이렇게 반복해서 위험한 일을 계속하시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선교도 좋지만 제발 이라크에 평화가 있을 때 원 없이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 불필요한 질문과 죄수 다루듯 하는 그들의 언행으로 하마터면 큰 싸움 까지도 일어날 뻔 했다. 내가 언제 당신들에게 다시는 안 들어온다고 약속한일 있습니까? 앞으로 심사숙고 하겠다는 표현이었지 다시 안 온다는 약속한 일 없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를 설득하며 시리아행 귀국이 아닌 암만, 방콕 경유 귀국 일정을 반강제적 권유로 그리고 귀국 경비 일체를 정부 부담으로 하는 조건하에 요르단 대사관측에 인수인계 되었다. 참으로 우리 일행들로 인하여 고생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의 사역은 정부나 세상 그 무엇에 의해 좌우되거나 결정되는 일이 아니라는 확신과 소신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은 초월 극복 감수해야만 하는 고민과 갈등이 당연한 것이다. 바울과 모세의 경우 많은 선교사들과 개척사역자들의 고난과 헌신적 봉사, 순교적 사역 자체가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요르단 공관원들의 따뜻한 배려와 사랑 중에 식당에서 귀빈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한 공관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선일씨 참수장면 보셨나요? 그 참혹한 실제상황을 재현해 보이면서 “무섭지도 않았습니까? 위험천만한 이런 일들을 왜 계속하시는 겁니까?”」 상당히 진지한 질문태도에 무익하나마 평소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역의 신념을 모처럼 표현하고 싶었다. 「어느 섬인지 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으나 어느 식인종 부족을 선교하기 위해 여러 선교사님들이 들어갔는데 모두가 순교를 하고 희생을 당했습니다. 그 후로 몇 분 선교사님이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무모할 정도로 자원하여 계속 들어가 결국 다 순교 당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 그 섬은 90% 이상 복음화 되는 열매를 거두었답니다. 순교의 피를 흘려야 선교의 문과 길이 열린답니다. 우리 한국은 이제야말로 순교의 피에 대한 빚을 갚을 때가 온 것으로 생각되어서 모두가 이해하기 힘든 이 길을 가는 것입니다. 」 주의 깊게 경청하던 그 분이 피우던 담뱃불을 끄면서 「“제가 그 섬에 7년을 영사로 근무했습니다. 파푸아뉴기니 섬이며 90%가 아니고 95% 크리스챤이 살고 있습니다.” 너무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더 이상 논쟁은 없었고 방콕에서 다시 태국 공관원들에게 인수인계후 귀국하게 되었다. 인천공항에 이미 대기 중이던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다시 인계되고 2시간 이상 조사과정을 거친 후 6개월 출국 정지된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실격된 순교자! 미수에 그친 순교행진! 소영웅심리 돌출행동의 무모한 이벤트성 선교! 종횡무진 럭비공 회교권선교도 6개월의 공백으로 막을 내리려나! 선교 미치광이처럼 국내외에 내비쳐진 나의 초라한 모습 속에 아직 다 태우지 못한 채 이글거리는 사명의 불꽃이 남은 숯 조각에 다시 옮겨 붙어 2004년11월19일에 예견되었던 한국 기독교 선교단체 총 연합이라는 옥동자를 출산케 되었고 지금은 매 주마다 전 세계 복음의 불모지를 향해 선교 특전사들이 순교 결단식을 하고 유서를 남기고 신 사도행전을 기록하고 있다. 임마누엘 할렐루야 아멘!

모든 영광 주님 홀로 받으시고 주님의 크신 소원 대로 48억을 속히 살려주소서. 나의 모든 것은 주의 보혈 안에 있나이다! 본향 떠난 실향민 63억이 십자가 그늘 아래 주의 보혈을 지나 온 인류가 영원한 본향으로 나아가기를 소원 하나이다! 이라크에서 메카까지 니느웨에서 땅끝까지 우리의 순교적 선교 열전을 중단 없이이끌어 주시고 기쁨으로 성령님만 의지하며 주님 오실 때까지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 하실줄 믿습니다. 나의 주 사랑의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지구촌 실향민 하나도 마귀에게 빼앗길 수 없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