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 생존韓人

2011.03.16 01:17

김반석 조회 수: 추천:

● 쓰나미 생존韓人
선지자선교회
(센다이=연합뉴스) 이충원 특파원 = "쓰나미가 얼마나 무서운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아내를 구해보려고 감싸 안았지만 이미..."

관측 사상 최악의 강진과 쓰나미 속에 일본인 아내를 잃은 한국인 생존자 김일광(金日光.35)씨는 나흘이 지난 15일 오후 연합뉴스 기자에게 자신이 체험을 얘기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무서운 기억을 털어내려는 듯 가끔씩 눈을 감았다.

김씨가 사는 지역은 인명 피해가 집중된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台)시 동부의 가모(蒲生) 지구. 해변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지진이 난 11일 김씨는 아이들을 바다에서 먼 곳에 있는 유치원 등에 맡겨놓은 채 오후 4시부터 트럭 운전을 하러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 2시46분께 처음 지진이 났을 때에는 집에서 5분 거리의 커튼 제작 공장에 일하러 간 아내 걱정부터 했다.

1975년 5월생인 김씨는 1997년 연평도의 해병부대를 제대한 뒤 1998년 센다이에 있는 선배의 일을 도우러 경기도 양주의 집을 떠나 일본에 왔다가 7년 전 직장에서 만난 아내(마요코)와 결혼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딸과 한 살짜리 쌍둥이 남매 등 1남2녀를 낳았고, 지난해에는 가모 지구에 융자로 집을 마련해 다복한 가정을 이뤘다.

지진이 난 직후 아내가 있는 공장으로 두 번이나 달려갔지만, 공장장의 지시에 따라 다른 직원들과 함께 대피한 아내를 집으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이때만 해도 '일본은 지진에 익숙한 나라니까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잠시 후 집으로 서둘러 돌아오는 아내를 마중하러 나갔을 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갑자기 '쏴'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멀리서 뭔가 떠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다음 순간 아내 손을 잡고 부근 초등학교(3층 건물)를 향해서 뛰었습니다."

물결에 휩쓸린 건 학교 계단에 도착하기 직전 체육관 부근을 뛰어갈 때였다. 본능적으로 아내를 껴안았지만, 결국 놓쳤고, 정신이 들었을 때에는 물속이었다.

가까스로 점점 무거워지는 오리털 점퍼와 장화를 벗고, 물 위로 떠올랐다. 7∼8m 높이 물 위로는 또다시 밀려오는 물결이 보였다.

김씨는 체육관 농구대 위쪽에 있는 난간을 붙잡고 수 시간을 더 버텨서 학교로 피했다. 체육관을 나올 때에도 아내의 모습은 찾지 못했고, 시신 3∼4구와 물고기 사이를 헤쳐나왔다. 김씨가 살던 동네에 남아있는 건물은 초등학교뿐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지진 다음 날인 12일 밤부터 9시간 걸려 찾아온 장인.장모가 이와테 구지(久慈)로 데려갔다고 한다. 전화통화가 되지 않아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다. 김씨는 자위대 니가타케(苦竹)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15일 센다이총영사관으로 피신했다.

얼굴과 손에 상처가 남아있는 김씨의 머릿 속은 아이들을 데리고 앞으로 살아갈 일로 가득한 듯했다.

김씨는 모든 고통을 자신이 믿는 종교의 힘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아내는 제가 억지로 데리고 교회에 다녔습니다. 천당에 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손을 잡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으니...저를 살려주신 건 어딘가 쓸 일이 있어서겠죠. 아이들을 위해서 힘을 내고 살겠습니다." 김씨의 두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chungw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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