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갈등론(목사, 장로의 갈등을 중심으로)

2012.03.09 22:47

김반석 조회 수: 추천:

● 역할 갈등론(목사, 장로의 갈등을 중심으로)
선지자선교회   
(2년 전에 쓴 이 글을 갈등, 갈등하다가 보냅니다. 글에는 항상 반향이 오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에게 공히 욕먹을 일을 왜 나는 굳이 하려는 것일까요? 제 견해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서로 나누면 완전한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이 글을 읽고서 목사님들도, 장로님들도 제게 돌을 던질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의 주변의 옳고 그름을, 나의 보는 눈으로 언제든지 말할 것입니다. 이 글은 약 1,500여 명의 사람들과 1,000여 명의 목사님들, 100여 명의 장로님들이 같이 보고 있습니다. 저는 겸허하게 지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 사람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 관계는 정말 갖가지이다. 교회 안에서 가장 갈등하기 쉬운 역할 관계는 어떤 것일까? 대충 다음 6가지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 주관이기에 정답은 아니겠지만, 참고로 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1. 목사와 장로 사이

나는 부목사 시절 무궁교회 장달윤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을 이해하고, 장로를 아름답게 다스리는 목사의 처신을 기교롭게 잘 배운 적이 있다. 한국 장로교 내의 목사, 장로 갈등의 수위는 이제 위험선을 넘어 폭발 직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사”부터 말해 보자.

원색적으로 말하면 목사의 제일 원수(?)는 장로이다. 목사들이 장로 때문에 도저히 목회를 할 수가 없다. 가로 막는 장로만 없다면 목사들이 얼마나 속 시원히 목회를 잘 할 수 있을까? 못된 장로들 때문에 고통당하는 목사들의 사례는 정말 기가 찰 일이라, 일일이 입에 담지도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목사는 정말 아직도 목사의 자격이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목회를 장로라는 고리로 묶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는 하나님이 손을 보시고, 새롭게 빚어야 할 일들이 까마득히 남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섬김을 몰라 제대로 목회할 그릇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들이 받고 거역하는 장로라는 채찍으로 연단하시는 것이다.

현장에서 실제로 장로에게 고통당하며 목회하는 분들은 이런 제 말을 들으면 정말 화를 낼 것이다.“네 놈이 무엇을 아느냐고? 네 놈이 목사라면서 진정 장로에게 당하는 고통을 아느냐고?” 그런 분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도 겪었기 때문에, 아니 처절하게 겪었기 때문에, 알아도 너무나 잘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유 없는 고통과 매를 절대 대시지 않는 분이시다. 만일에 어떤 목사에게 희한하고 못된 장로가 들러붙어 괴롭힌다면, 그는 장로를 탓하기 전에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를 물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일정 기간을(보통 10년 미만에 다 끝난다) 삶의 고통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사람은 이론과 판단이 아니라, 삶의 고통의 댓가가 따라야 답을 찾고, 마침내 변한다.

“장로”는 어떤가?

장로들에게 목사는 더 이상 예전의 하나님의 종의 권위가 없다. 한 마디로 목사들이 목사 같지 않고, 저질스러우며, 씹어도, 대들어도, 심지어 짓밟아도 좋은 만만한 밥이라는 것이다.
이제 장로들에게 목사는 더 이상 권위의 대상이 아니다. 교인들에게, 교인의 대표인 장로들에게 이러한 판단을 받고 만 우리 목사들은 진정 회개해야 한다.

아아! 목사에게서 풍기는 저질스럽고, 상스럽고, 세속적이며, 인간적인 냄새여! 똑똑한 장로가 어찌 그것을 모르리! 문제는 목사를 목사로 대하지 않는 이러한 악하고 못된 장로가 내가 볼 때에는 전체 장로 중에 5% 정도는 되고, 이 사람들이 목사와 갈등하며, 온통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다 흐려 놓는다는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 장로들이 한국교회의 실세라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노회, 또는 지역 단위로 합동하여 움직이며, 후배 장로들을 가르치고, 교사하고, 선동하고, 목사를 대적하는 법을 조직적으로 세뇌시키며, 사탄의 악을 조장하고 다닌다. 이들은 주로 정치색을 좋아하며, 노회의 중진들로, 교단의 핵심 인물들로 행사한다. 법으로 따지기 좋아하며, 특히 목사 죽이는 일을 너무 너무 재미있어 하며, 중심에 하나님은 없고, 권모술수만 잔뜩 부리고, 명예, 권력, 돈, 지위, 존경, 인기, 세몰이... 등을 좋아 한다. 사탄이 이런 것들을 제일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주로 노회나 총회 총대로 나서는 사람들이 그 대부분의 주역 들이다. 나의 이 말에 이를 갈면서 욕하는 장로들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 이미 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종으로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아프지 않은 곳은 찔러도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러나 아픈 곳을 찌르면 당장 반응이 온다. 나의 이러한 신랄한 지적에 그러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장로 당신은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정말 지옥 갈지 모른다. 어쩌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임하였는지 모른다.

이들 타락한 몇몇 못된 장로들 외에 95% 이상의 장로들은 정말 착하게, 순종 잘 하며, 목사 같지도 않은 목사도 하나님의 종으로 받들며, 목사가 정말 인간적인 냄새가 풍겨도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정 심판해야 한다면 하나님이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리고 견디지 못하면 정든 교회를 버리고 그만 떠난다. 그래서 못된 목사들도 지옥 가야 맞다.

아아! 사탄의 주구(走狗)들인 목사와 장로들이여! 그대들 앞에 놓여진 심판의 무서움을 깨달을진저!

이상 말한 두 종류의 목사와 장로들은 간단히 말하면 지옥 갈 사람 들이다. 이들이 바로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목사 장로 갈등의 선봉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들을 심판하신다.

그러면 정상적인 목사, 장로의 갈등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해결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나, 또한 지난하기 그지없다. 원리 원칙으로 돌아가면 답은 금방 나오지만 목사 입장, 장로 입장에서 각각 생각하면 답은 전혀 엉뚱해진다. 내가 속한 노회에서도 장로의 목사 안수 문제가 불거져 목사와 장로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 되었는데 결국 아무 해결책도, 대책도 내놓지 못하고 수면 아래 시한폭탄으로 잠복하고 말았다. 이 문제는 언제 또 다시 터질지 모른다.

목사, 장로의 역할 갈등론에 있어서 내 견해는 일목요연하고 간단하다. 목사는 장이요, 장로는 참모이다. 목사는 장로에 대하여 당회장으로서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 처음부터 아예 목사에게 엉겨 붙을 장로는 세우지 말아야 한다. 장로는 부목사처럼 목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 충신이 되어야 한다. 잘못하는 불량한 목사에 대한 견제 장치는 이미 법적으로, 현실적인 장로제도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이 가장 간단한 나의 목사 장로 갈등론을 해결하는 대원칙이다.

사실 목사 같잖은 인간 때문에 장로 같잖은 인간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장로를 세울 때에는 교회 상황이나 목사의 개인 입지의 유익을 위하여 세우지 말고, 장로의 그릇됨을 보고 임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잘못 세운 장로들이 결국 목사를 잡아먹는 식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면 물러가는 전임목사가 개인 이권이나, 자기 노후 대책이나, 이런 저런 사욕으로 세운 엉터리 장로는 어찌할까? 요즈음은 이상하게 목사들이 장로 권사들을 수십명씩 한꺼번에 세우는 운동을 앞다투어 벌이는 것 같다. 왜 그런 전시행정을 할까? 그렇게 한꺼번에 무더기 장로, 권사를 임직하면 목사의 주가가 올라가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렇게 세워진 엉터리 장로 때문에 새로 온 후임 목사는 목회를 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나? 고스란히 희생양이 되는 수 밖에는 없다.

궁색하나마 해답을 하나 제시하라면, 그럴 때에 새 목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연단 기간을 어찌하든지 잘 거치면 된다. 그 기간이 1년일 수도 있고, 3년일 수도 있고, 10년일 수도 있다. 대부분 3년 안에 결판이 난다. 쫓겨 가든지, 타협하여 그저 그렇게 살든지... 다 자기 뿌린대로 거두어 가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런 못된 장로를 만나게 하여 목사를 연단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고, 버릇을 고치는 것이다.

나아 가 이런 갈등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목사, 장로 공히 온 교인의 심판을 주기적으로 받을 임기제 도입은 정말 총회가 결의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과거 100여 명이 모이는 부산 00 교회에 전도사로서 담임교역자로 청빙 받았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담임목사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나를 청빙해 간 장로가 2년 만에 나를 쫓아냈다. 그는 나까지 꼭 6명의 목사를 차례차례로 쫓아냈다. 얼마나 교회가 부덕했던지 부산 시내에 온통 소문이 났다.

너무나 괘씸한 것은 내가 엄연히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당회장 권을 다른 교회 목사에게 주고 목사의 손발을 묶어 버리는 것이었다. 교회 재정도, 심방도, 그 어떤 일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꼭두각시였다. 당시에 나는 저런 장로, 권사 때문에 교회 부흥이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날마다 욕을 퍼부으며 살았다.

이제 2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보니, 내가 인간 같잖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버르장머리를 고치시려고, 나를 참된 목사로 만드시려고 그런 교회에 보낸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훌륭한 목사의 그릇인데, 못된 장로가 내 앞 길과 교회의 부흥을 가로 막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척을 하면서 비로소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직시하게 되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목사는 못된 장로라는 혹독한 매를 맞으며 목사다운 목사로 빚어져 가는 것이다.

혹시 장로 때문에 목회를 도무지 못하는 목사가 계시거든, 무조건 열만 받지 마시고 제 말을 한번 참고하시기 바란다. 분명 이 말에 열 받는 목사님들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목사에게 오직 복종하라는 제 말에“무슨 이런 목사 놈이 다 있어?”하는 장로도 있을 것이다. 그런 당신은 정말 회개해야 한다.

한 친구 목사는 지금도 장로 때문에 정말 고통, 고통을 당한다. 한번은 찾아 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그런데, 내가 과거에 했던 짓들을 장로들이 그대로 하고 있더라고... 하나님이 내 버르장머리 고치는 것이지! 내 성질 죽이시려고...”하며 맥없이 웃는 것을 보았다.

목사, 장로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의 대원칙은“목사가 과연 섬기는 정신이 되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이다. 목사가 진정 바른 목사이고 섬기는 정신이 되어 있다면 목사, 장로의 근본 갈등은 분명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전시대적인 사고에 사로 잡혀 장로 위에 군림하려 들면, 양자의 갈등은 꼬리를 물게 될 것이다.

“목사, 장로 갈등론”의 좀 더 세부적인 이야기는 글 말미의 장00 목사님의 글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정말 목사와 장로의 갈등에 대하여 심도 깊게 잘 해부한 여러 편의 글들이 있기 때문이다.

2. 담임목사와 부목사 사이

역시 대원칙은 부목사의 절대 순종, 복종이다. 상명하복이 철저해야 한다. 부목사의 튀는 행동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순종과 복종의 정신이 기본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부목사들은 자기가 참 똑똑한 줄 안다. 대학 4년, 신학대학원 3년 학력이 대단한 줄 안다. 10년 만에 목사가 되었으니 기고만장하다. 이제 갖 목회 견습생으로 출발한 주제에, 목회를 다 아는 줄 안다. 그는 자신이 이제 개론을 배운 한 마디로 무식한 초보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담임목사의 시시한(?) 설교를 들으며,“무슨 설교를 저렇게 해!”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그 판단의 잣대라는 것이 교과서의 이론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설교학 시간에 배운 설교 개론은 절대 훌륭한 설교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 어떤 목사는 평생을 설교하고도 설교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부목사, 그는 아직“목회”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햇병아리도 그런 햇병아리가 없다. 그야말로 목회 견습생일 뿐이다. 제 아무리 잘난 체 해도 목회는 10여 년 이상 해 보아야 그래도 목회에 대하여 한 두 마디 말할 자격이 있다.

부목사 때 담임목사 잘 만나 목사의 인격, 성도 관리, 설교, 기도와 성령과 영성, 목회의 실제적 기술 등을 잘 배울 수 있다면 그 부목사는 정말 복 있는 목사이다. 그러나 그러한 담임목사를 어찌 만나리! 오히려 성질이 지랄 맞은 담임목사를 만나, 정말 피어 보기도 전에 구겨지고 부수어지는 부목사 인생들이 한 둘이 아니다. 담임목사 중에는 도무지 사람을 갈구고 놔두지 않는 정말 정신 이상형들이 있다. 거기에다가 사모까지 가세한다. 이들 또라이 사모들의 행태 또한 가관이다.

정말 이상 성격의 담임목사들이 어디 한 둘인가? 목사 중에는 정신이상자가 의외로 많다. 숨통을 죄고, 일일이 간섭을 하고, 인격 모독을 하고, 자기 개똥같은 목회론을 복음처럼 신봉하며 강요하고, 도무지 이해심이나 타협심이라고는 없고, 무식하고, 예외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원리 원칙도 없고, 상식도 없고, 사례는 쥐꼬리 만큼 주고(자기 돈도 아니면서)... 그런 담임목사는 들이 받는 부목사를 만나 좀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린다. 하여튼 하나님은 사람 만나 사람 고치는데 기가 찬 명수이시다.

내 설교의 한 부분 인용이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님이 목회할 때에 한 똑똑한 부목사가 찾아 와서, 자기를 목사님의 교회에서 섬기며 목사님의 목회를 배우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김목사님이 기특하여 부목사로 채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만에 사표서를 들고 찾아 왔습니다. 이유를 물었더니, 목사님께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김목사님이 말씀 하기를,“이 사람아! 내게 배울 것이 없다고? 배울 것이 없는 목사가 교인을 8만명이나 데리고 30년을 목회하나? 2년 만 가만히 엎드려 배워!”했습니다. 지금 부목사였던 그는 담임목사가 되어 강원도 춘천에서 가장 큰 교회를 짓고 목회를 잘 하고 있다고 합니다.

부교역자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먼저, 부교역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담임목사 노릇을 하려고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젊고, 똑똑하고, 지식도 많고, 아는 것도 참신하고, 힘도, 박력도, 추진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서 말도 하지 않고, 좀 어리벙벙해 보이고, 교인들을 생전 눈에 힘주고 꾸중 한번 하지 않는 자기 담임목사가 무능해 보이고, 답답해 보입니다. 일을 팍팍 밀어붙이지 않는 담임목사의 참신하지 못한 목회 스타일이 심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큰 배의 키는 서서히 돌려야 한다는 진리를 모릅니다. 새 것보다는 오랜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30여 년 목회를 한 후에서야 그러한 경지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싹을 보면 안다고, 이러한 설익은 사람은 절대 큰 그릇으로 자라지 못합니다. 까불다가 끝나 버립니다. 부교역자가 겸손하게 자기 맡은 작은 일을 성실하게, 진실하게, 잘 순종하면서 감당하면 마침내 훌륭한 담임목사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무려 40년을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고 모세의 시종이 되어, 오직 기도만 하며 산 사실을 아십니까?

어찌했거나 간에 담임목사다운 그릇, 부목사다운 그릇이 되어야 한다. 그릇이 못되면 하나님이 불같이 연단하신다.

3.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

원로목사는 은퇴 후 일체 교회 일에서 손을 떼면 된다. 교회가 요청하면 지원하면 된다. 담임목사는 원로목사를 아버지처럼, 형님처럼 대하면 된다. 원로목사가 교회에 자연스럽게 출석하고, 설교도 한번씩 하게하고, 온 교인들이 존경하고, 받들고...

단 원로목사는 교회 업무나 성도에게 일체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상담이나 교회 내부적 갈등에 대한 지시나 선동 등등... 여기에서 모든 문제가 파생된다.
  
대부분의 원로목사들은 실권을 쥐고 흔들던 기라성 같은 큰 인물들이 많다. 이들은 물러 간 후에도 후임 담임목사를 2-3명은 갈아 치우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자기 체통 다 구기고, 그 다음에 더 늙어서야 대부분 비참하게 당한다.
  
이건 늙어서 정말 꼴불견이고 불쌍한 모습이다. 늙으면 사람이 추해진다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럴수록 자기 관리를 잘 하는 수 뿐이다.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의 갈등에는 언제나 중간에 이간질 하는 교인들의 작태가 숨어 있다. 이 보이지 않는 사탄의 역사를 막는 길은 원로목사, 담임목사, 장로들이 특히 잘 하는 수 뿐이다. 그 중에 특히 잘 해야 할 사람은 원로목사이다. 냉정한 얘기 같지만, 이미 끝난 사람이니, 깨끗이 사라져라. 노인의 추태를 부리지 말라. 괜히 찾아 와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장로, 권사, 교인들의 말을 듣고 어줍잖은 갈등을 만들지 말라.
  
늙으면 외로운데, 이마저 막으니 참 이 일도 한심하지! 그러나 어쩌리. 원로목사 당신은 이제 끝난 사람인데... 원로장로도 마찬가지이다. 끝난 사람이 현역으로 설치면 문제가 커진다. 작은 일들이 꼬리를 물고 큰 일로 번진다.

원로목사가 있는 교회는 담임목사와 교회가 이러한 사탄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정말 기도해야 한다. 담임목사는 원로목사라는 이 신경 쓰이는 노인을 상목사로 잘 섬기는 수 뿐이다. 사람을 잘 섬기려면 진심으로 하면 힘들지 않다. 가식으로 하려면 힘들지! 일주일에 한번은 꼭 원로목사님을 찾아 가 목회를 배워라. 그보다 더 좋은 스승이 어디 있으리! 사실 문제 일으키는 몇몇 원로목사들이 문제이지, 얼마나 존경스러운 원로목사님들이 많이 계시는가? 이 분들이 도매금으로 매도당해서는 절대 아니된다.

이제 원로목사의 문제는 한국교회 내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다. 아마 원로목사제도 자체가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례 두 가지만 말하고, 넘어 가자.

문제 원로장로의 문제이다. 문제 교회에서 그는 은퇴한지 7년이 지나도록 당회에 꼬박 꼬박 참석하여 담임목사를 물고 늘어진다. 담임목사가 견디다 못하여, “장로님! 은퇴장로는 목사가 발언권을 주기 전에는 일체 말하면 안됩니다.”했더니, 입을 다물더란다.

존경 받는 원로목사님의 이야기이다. 그는 11시 예배시간에 항상 참석한다. 장로님들이 그를 존경하고 받든다. 담임목사는 단에 올라가기 전에 원로목사 앞에 와서 절을 하고 올라 간다. 담임목사는 아들 같고, 원로목사는 아버지 같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왜 우리는 그러한 교회를 만들지 못할까?

4. 교육부 부장과 교육전도사의 사이

엉터리 초보목사 흉내 내는 사람이 교육전도사이다. 그는 이제 시작한 배우는 견습생이다. 설교도 초보, 행정도 초보, 목사연하는 무게 잡는 폼도 초보... 그런데 무게는 아주 잡는다. 부장이나 장로들이 보면 우습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금방 목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학력자이며, 똑똑하다는 것이다. 그는 가능성이 있는, 아무 것도 모르는 망아지이다.

교육부서의 부장은 그를 품고, 존중하고, 목사의 그릇으로 인정하며, 남들 앞에 세워 주며, 최대한 목회 경험을 갖도록 지원해 주어야 한다. 실권이 부장에게 있을지라도 교육전도사를 담임목사처럼 높여 주고, 그의 지위를 교사들 앞에 인정해 주어야 한다.

교육 부서장 때 “내가 교회 터주대감이고, 교육전도사는 일 이년 있다 갈 사람인데, 가만히 있어!”하며 설치는 사람은 훗날 반드시 문제 장로가 되어 담임목사를 괴롭힐 사람이다. 그러지 말고 교육과 행정의 전권을 교육전도사에게 주어라. 그리고 뒤에서 무한정 지원하라.

그러면 엉터리 교육전도사는? 교육 부서장인 당신이 직접 손을 보겠다고... 왜 그런 악역을 감당해? 그냥 내버려 두라. 하나님이 다 뜯어 고쳐 쓰신다. 교육전도사는 쓸 데 없는 지위 다툼 하지 말고, 형님처럼, 선배처럼 교육 부서장 들을 대하면서 상호보완 하며, 서로 존중하고, 업무에 있어서 의지하도록 해야 한다. 목사 싹도 어릴 때 보면 다 나타난다.

그러면 문제 있는 부장이나 교육전도사는 어찌 할까? 그런 부장은 자라서 문제 장로가 된다. 그런 교육전도사는 자라서 문제 목사가 된다. 그리고 각자의 인간관계 갈등과 연단으로 하나님이 직접 빚어 가실 것이다.

5. 서리집사와 안수집사, 권사의 사이

잘난 집사들이 안수집사, 권사들에게 엉겨 붙는 경우 들을 많이 보았다. 능력 있는 젊은 집사가 무능하고 늙은 장로나 권사, 안수집사에게 대들고 무시하는 경우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설치다가 곧 도태된다는 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설치는 사람이 오래토록 교회를 섬기며 중진이 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설치면 설칠수록 적을 만들고 스스로 자기 자리를 없애 버린다. 문제는 이렇게 당하도록 유도하는(?), 길을 가로 막는 똥차 같은 장로, 권사, 안수집사들의 문제이다. 이들의 무능함과 교회를 노쇠하게 만드는 죄악을 어찌할까? 할 수 없이 길고 긴 갈등과 도태의 과정을 거치며, 고통으로 정화되어 가는 수 뿐이다.

6. 목사와 사모의 사이

목사와 사모 사이의 역할 갈등은 의외로 심각하다. 내가 판단해 볼 때에 목사 사모가 정말 은혜 받고, 성령으로 그 인격과 사역이 거듭 나야 한다. 그냥 배운 지식과 사회 경험으로 목회를 보고 논단한다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늙어 죽도록 계속된다.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나는 사모에게 묻겠다. 사모들에게 꼭 한 마디 하라면 어줍짢게 목사를 지도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특히 설교 평을 하지 말라. 가만히 보면 사모들이 언제나 상목사이다. 그러면 내 남편 목사는 절대 목회에 성공하지 못한다.

성공한 목사들의 사모를 보면 정말 목사를 품고, 격려하고, 항상 칭찬하고, 순종 복종하며, 오직 기도하며, 목사를 위하여 희생한 사모 들이다. 목사에게 최고의 어머니, 누님, 여자의 역할을 묵묵히 잘 감당한 사모 들이다.

사모들은 사모가 목사의 설교를 칭찬할 때에 얼마나 목사가 좋아하는지를 도무지 깨닫지를 못한다. 반대로 사모가 설교를 내리 까면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의욕이 상실되는지를 모른다. 내가 만일 사모라면 나는 목사를 끝없이 칭찬하여 최고의 설교가로 만들 것이다.

주일 오후에 일정을 다 끝내고 피곤하여 교회에서 쉬고 있는데, 사모의 문자가 왔다.“당신의 설교 언어 구사력은 너무나 탁월하여, 정말 하나님이 크게 들어 쓰실 날이 가까웠음을 느낍니다. 소수의 교인들이 듣기에는 그 설교가 너무 아깝습니다.” 나의 대답 왈“큭! 기분 좋다. 나 줄 돈 없는데...”

이렇게 사모들은 개똥같은 내 목사 설교를 칭찬해야 한다. 그러면 목사는 나날이 달라져 갈 것이다. 반대로 비판하면? 유감스럽지만 10년이 가도 그 설교 그대로이다. 그리고 목사 사모는 점점 멀어져 간다. 사실이다. 진리이다.


(글:새성교회 배종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