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M 에 대한 비판 - 장로교 정통의 입장에서

2007.05.1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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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78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4/05/07 (금) PM 11:28:33     조회 : 318  


■ CCM 에 대한 비판 - 장로교 정통의 입장에서  

글쓴이: 박양  날짜 : 2004/04/18  조회 : 77  


한국교회에 CCM이 주는 교훈  



한국 모든 문화의 주역의 역할을 한 교회문화가 세상문화의 급진전과 함께 교회문화는 참새가 황새를 좇아가듯 처참해 보인다고 하면 이해가 가리라 생각한다. 교회문화 중에서도 음악문화는 그 존재마저도 상실한 느낌이 든다. 교회의 다른 분야들의 발전은 끊임없이 계속하는 반면에 소위 교회음악이라고 하는 찬송의 문화는 정체된 체로 그 방향은 물론 이제는 교회가 갖추어야 할 찬송의 존재성마저도 잃고 말았다고 하겠다.


1983년 통일찬송의 출발은 교회일치에 어느 정도 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고사하고 한국교회의 찬송가 사상 최고로 저속한 작품으로 찬송으로서의 기본 가치마저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교회음악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그 근본은 558장이나 되는 곡들 중에 찬송이라고 엄격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곡들은 고작 2 ∼ 30%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 통일찬송에 대한 논란은 거세만 갔고 이로 인해 찬송가는 새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각 교단들은 물론 교회음악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10 여 년 전부터 부록찬송과 새로운 찬송들이 만들어지면서 교단들의 인준을 받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는 부결로 아직도 부정적인 요소가 많은 가운데 미궁 속에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이런 사이에 90년 초반을 넘어서면서 CCM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한 복음송은 온누리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경배와 찬양”이라는 기치아래 빠르게 확산이 되면서 이제는 복음송이라기 보다 교회 청소년들의 대중음악을 넘어 예배에까지 그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그리고 CCM의 발전은 곧 바로 교회음악의 이원화를 만들어 냈다. 그러한 가운데 통일찬송가는 청소년들로부터 밀려나 흘러간 옛 노래 신세로 전락하였다.


2 ∼ 30명만 모이는 교회라면 의당히 드럼을 위시해서 각종 전자악기가 극장 무대를 방불하리만치 기본 형식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저녁예배(소위 찬양예배) 시작 전에 청년들이 앞에 나가 두들겨대며 고함치는 음악들은 모두가 CCM으로 청년들은 신바람나게 춤추며 노래하고 어른들은 쇼를 구경하는 방관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부르는 곡을 어른들이 따라 할 턱이 없기 때문이다.


리드를 하는 자는 마치 자기가 은혜를 불어넣는 듯이 가사를 반복하여 시끄럽게 읊어가며 성도들의 감정마저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있다. 나는 감정이 없어도 진행자가 오른 손을 들고 노래합시다. 두 손을 들고 노래합시다. 심지어는 기도까지도 자신의 지시를 요구하며 만세삼창을 하듯 주여! 삼창을 강요하는 등 온갖 동작을 지시하고 있다. 그럴 때면 곤혹스러워하는 자들이 한 둘이 아닐 것으로 안다. 그러면 그런 자들은 마치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은혜가 없는 자들로 낙인을 찍게 된다.


우리 한국교회들처럼 자신의 감정의 자유를 상실한 성도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CCM은 세상의 유행을 불태우는 음악들처럼 교회 청소년들의 음악으로 최고의 상품화 된 것이다. 물론 CCM이란 처음부터 미국에서 상품화되어 들어온 장르의 음악이다. 그리고 이런 음악들은 복음이라는 탈을 쓴 상업적인 음악임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세상 음악들이 그러하듯이 CCM역시 상업적인 인기몰이를 조장을 하며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복음송 경연대회나 CCM 경연대회장을 바라보노라면 그 현장부터가 교회라는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싸이키 조명과 그들의 외모의 모습은 어디를 보나 교회적인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특히 곡의 성격을 보면 세상음악을 그대로 옮겨놓았고 부르는 창법 또한 이상한 음율들은 신음소리 같은 것으로 성스러운 가사에 먹칠을 하고 있다.


본인은 모 신학교에서 찬양신학을 강의하면서 록 음악을 비롯하여 세속적인 장르를 가지고 만든 모든 CCM이나 복음송들은 하나 같이 사단이 뿌린 악의 씨라고 명명한 바가 있다. 이러한 견해와 주장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CCM의 연주 현장들을 보지 않고서는 그 이유를 말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가끔 건전하게 느껴지는 곡들도 눈에 띄기도 한다.


오늘도(2002년 8월 15일) 기독교 TV에서 진행한 CCM 경연대회를 보면서 그들의 모습과 경연장의 분위기가 세상의 노래자랑과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고 해야 할지 답이 없다.

우리는 문화라는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서 세상과 교회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를 한번 쯤은 생각해 볼 의미가 있다고 본다. 교회가 만약에 세상의 보이는 문화들을 다 수용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으로 교회와 세상을 구별할 것인가? 말이다. 세상이 벗는다고 교회도 벗어야할 것인가? 세상이 술에 취한다고 교회도 술에 취할 것인가?


- 크리스천 록 음악을 하는 자들의 정당성의 소리는 이렇다. -

“록 음악을 평가하는 것은 박자나 소리 그 이상의 것이어야 하고 세속적인가 크리스천적인가 하는 것도 부차적인 문제다. 그것은 가사와 가수의 생활방식, 그 음악의 추구하는 목적 그리고 영상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음악을 평가하기 위한 네 가지 기준이다.” - 크리스천 록 중에서 -

그리고 “크리스천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록 음악은 20세기 말을 주도하고 있으며 앞으로 4 ∼ 5세기 동안은 그러할 것이다.” - 칼빈 밀러 -


이들의 말을 따로 설명을 할 필요 없이 한마디로 이들은 술이 취해도 뒤뚱거리거나 흔들리지도 않고 똑바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몸에 문신을 하고 남자들이 귀고리를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땋고 다녀도 그들의 생활방식은 아주 은혜스럽고 건전하고 근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말은 "그 음악이 추구하는 목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록 음악이 어떤 음악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물론 이들이 말하고자하는 목적이란 비록 사람들은 록 음악이 악한 것으로 판단할지라도 자신들의 목적은 록이란 음악의 한 장르로서 사용될 뿐 이것은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어지기 때문에 목적으로 봐서는 선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는다. 복음이 선하기 때문에 수단이야 어떠하든지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좀더 원색적인 표현으로 창녀를 구하기 위해 창녀가 되어야 하는가? 목적이 선하면 수단 또한 선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본인은 1998년쯤으로 생각되는 어느 초여름에 강남에 위치한 아름다운 땅(사랑의 교회에서 운영)이라는 카페 같은 다방에서 예레미 크리스천 록 그룹이 연주하는 곳에 참여하여 실제적인 체험을 하고 록이나 헤비메탈음악에 대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음악에 완전히 취한체로 의식 없이 마구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며 마약이 따로 없구나 하고 그들의 영혼이 불상해 보였으며 이것이 곧 크리스천 록의 본질이며 한국교회 청소년 음악의 현 주소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느꼈다. 더욱이 안타까운 사실은 어른들이란 볼 수도 없었으며 교회음악을 지도하는 어떤 자들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세상음악에 버려진 청소년들에 대한 교계 지도자들의 무지요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소위 교회음악을 교육하고 교회음악에 관한 악보를 출간한다고 하는 어떤 목사는 과거에는 그렇게 생각을 안 했는데 문화의 변질 때문에 복음이 중단될 수는 없으므로 이제는 교회에도 기계와의 춤을 추는 DDR기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사 말대로라면 복음을 위해서라면 머지않아 마약도 공급해야할 때가 멀지 않았구나 하고 그 목사를 다시 한번 보았다.


미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에이즈 환자도 목사로 안수해야 한다는 논쟁이 있었으며 동성애자들에게도 목사로 인정해야한다고 하였으며 미국의 모 감리교단에서는 보수 교회들의 반발과 지탄 속에서도 동성에 자의 결혼 주례도 허용하여 실행하고 있다.


크리스천 록을 하는 자들의 말처럼 록은 앞으로도 4 ∼ 5세기는 갈 것이라고 했는데 본인은 오히려 사단의 대표적인 음악인 록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세대에는 어떤 더 사악한 음악들이 교회음악을 다스릴지는 과히 짐작이 서질 않는다. 벌써 오래 전부터 테크노의 열풍은 최단 시간 내에 록 음악의 열풍을 잠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록은 또 다른 형태를 변질시키며 자생의 할로를 찾기에 급급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크로스 오브를 뛰어 넘어 모든 전통, 정통, 장르, 방법들을 무시하고 어떤 것이든 수용(용해, 혹은 짬뽕)하는 퓨전(Fusion)문화가 신속히 그 흐름을 타고 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이겠는가? 라고 할 때 교회들은 어떤 특별한 대안들이 없다. 그러다 보니까 미국의 자유주의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예배의 방법 그 모습 그대로를 답습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교회들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영혼들을 양육하기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데 오히려 귀중한 생명들을 담보로 썩어지고 불타버릴 건물교회(성전이라고 위장한)의 건축 붐이 무너져 간 유럽교회의 모습을 재연들을 하고 있다. 교회들은 진정으로 각성들을 해야 한다. 목사들은 세습을 일삼고 명예와 부를 축적하며 자기 아성 쌓기를 중단하고 급변하는 세속문화에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고 투자해야 할 것이다.


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십자가에서 예수를 발견한 적이 있는가?! 강대상 중심부에 걸어놓은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보았는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 하늘을 찌르듯 한 십자가는 세상의 등대요 빛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들의 최고의 전도방법은 도둑갈메기 같이 성도를 어떻게 하면 잘 뺏어오는가에 달렸다. 그래서 지하교회들이나 영세 교회들은 주위에 대형교회가 들어온다면 초비상이 걸린다. 어떤 교회는 아예 보따리를 싸고 멀리 출행랑을 한다. 대형교회는 그것도 모자라 대형버스를 돌리며 싹쓸이 작전들을 펴고 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며


세상의 썩어빠진 모습이 오늘 교회의 모습들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것인가? 말이다. 세상을 마구 쫓고 빨리 쫓아가는 것이 문화인이 아니라 항상 문화에도 정도를 살피며 중도를 걸으며 자신을 살필 줄 아는 자가 진정한 문화인이요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이제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들은 교회문화 중에 특히 교회음악에 대한 교육에 더 세심한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교회가 갖는 예배와 음악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또는 바늘과 실처럼 어느 한쪽도 떨어질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며 목회자나 성도라면 찬송은 예배와 영원히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평생 목회를 사명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교회음악에 무지하다는 것은 목회에 무관심하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말이다.


교회음악이란 북치고, 장구치며 신바람나게 춤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는 찬미의 제사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의 입술에 열매”(히 13:15)로 나타날 때 비로소 찬송의 회복이요 예배의 회복으로 청소년들의 바른 음악관, 바른 찬송관, 바른 예배관을 깨달으며 그들은 비로써 세속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회가 지녀야할 문화란 어떤 것이든 간에 “거룩성” 과 “경건성”이 우선 되어야 하며 지나친 감성, 감정적인 것도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문화적인 요소라 할지라도 그 내면의 본질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세상은 문화적인 본질을 들어낸다면 교회는 문화를 통한 계시를 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CCM이나 복음송으로 일컫는 것들은 나타내고자 하는 가사(계시)의 의미보다 음악에 빠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하든가?


사단의 문화는 앞으로 어떤 흉악한 모습들로 나타날지는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는 이미 세상문화에 노출이 아닌 오히려 혼합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선악을 가릴 줄 아는 영의 눈을 밝게 교정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들도 이제는 청소년들이나 문화나 환경의 조류에 휩쓸리지 말고 교회가 지녀야 할 하나님의 명령인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의미를 깊이 새기고 교회는 먼저 “땅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소금이 되지 못한 빛은 가증한 것이요 악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