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부흥

2007.05.1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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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반석     번호 : 102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5/12/06 (화) AM 00:05:23     조회 : 87  

■ 한국교회의 부흥

작성일: 2005/11/28 11:42:28
작성자: 인보라
  

한국교회는 정녕 침체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서구의 교회들이 그러하였듯이 흥망성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쇠잔해 갈 것인가?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상만을 보고 말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절망은 성급한 판단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이상(겔37:1-10)이 주는 메시지가 소망을 갖게 한다.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마른 뼈들이 바로 한국교회의 실상이라 보면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다. 마른 뼈들을 보면서 절망할 수도 있고, 소망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너는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에스겔에게 물으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한국교회가 부흥될 것을 믿느냐?”고 물으신다.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각자 나름대로의 의견이 있을 것이다. 에스겔처럼 “주님,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현실적으로 한국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과거에 성장하였던 것은 영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외적인 요인들 때문에 성장하였다고 보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들이다. 산업화에 따른 급격한 이농현상과 도시화가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하였고,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로 대변되는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아 교회도 유래를 찾기 힘든 정도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복음을 제시함에 있어 ‘잘 살아보세’의 정성에 맞도록 복받는 면을 강조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외면하거나 축소하여 전하였다. 그래서 잘 살아보고 싶은 욕구가 강한 동안은 교회가 전하는 복음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살게 되자 계속하여 ‘잘살아보세’라는 유성기의 레코드판을 돌리는 것에는 신물이 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매력은 상실되었다. 그렇다면 성장을 구가하였던 70-80년대 한국교회는 성장은 하였지만 부흥을 하였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부흥이 없이 외전인 요소에 힘입어 성장하였던 한국교회는 외적인 환경의 변화로 성장의 동력을 잃고 이제는 성장은커녕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을 붙잡아 두는 것도 힘에 겨워하게 된 것이다.    

부흥은 사람의 노력에 의한 산물인가, 하나님의 선물인가? 부흥이 인간의 손안에 있다면 한국교회는 영영 부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주로 교역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한국교회 교역자들의 지적 능력과 테크닉은 이전보다 일취월장하였지만 주님에 대한 헌신도나 영성은 바닥을 기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영적인 부흥을 이룰 수는 없다. 부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박국의 기도는 부흥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증거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1)

하나님의 선물인 부흥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국교회에 유행하는 두어 가지 신화들이 깨어져야 한다. 진정한 부흥은 자신에게 절망하고 하나님께로 전심전력 향할 때에만 받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붙잡고 있는 신화는 한국교회가 받고 누려야 할 부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깨어나야 할 신화는 무엇인가?

선교를 힘쓰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건강한 교회, 부흥하는 교회는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선교에 힘쓴다고 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1만명이 넘는 선교사를 파송하여 후원하고 있고 다양한 사회사업도 실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한국교회의 영적 현실이 건강하다는 증표는 아닌 것이다. 역설적으로 서구 교회들이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후원하였음에도 쇠퇴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한국교회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선교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러나 선교를 힘쓴다고 해서 부흥이 온다고 하는 착각을 어서 속히 벗어야 한다.

좋은 영적인 프로그램의 실시가 부흥을 가져다주리라는 주장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영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좋은 프로그램을 실시하면 그 프로그램을 필요로 하는 이웃 교회 교인들을 얻기에는 약간의 유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의 영적 니드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 필요한 진정한 부흥을 가져오지는 못한다.

예배당을 근사하게 건축하고 최신식 시설을 갖추면 교회가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예배당을 근사하게 짓고 최고의 시설을 하면 근처 교회들의 흔들리는 교인들을 흡수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실제로 개발지역에서 크고 멋진 예배당을 건축하고 시설을 잘해 놓으면 단기간에 급성장한다. 그것도 교회 운영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부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설교를 잘하면 교회가 부흥한다는 주장이다. 설교를 잘하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의 가려운데를 잘 긁어주고 부담이 가는 주제를 기피하고, 은혜되는 내용, 복받는 이야기를 자주하고 재미있게 하면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설교자가 영적인 능력이 충만하여 설교하면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진정한 부흥은 아니다. 왜냐하면 설교를 잘한다는 교회에 교인들은 많이 늘어났지만 교인들의 영적 수준은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아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부흥을 주실 수 있다. 포스트모던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부흥을 구하는 일이다. 하나님께 부흥에 대한 기대를 갖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구해야 한다.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다. 자신과 섬기는 교회와 한국교회의 영적 실상을 정확히 보도록 해야 한다. 영적 실상을 보고 깨닫는 것도 주님의 긍휼이요 은총이다. 그 때 절망할 수도 있고 소망을 가질 수도 있다. 자신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지만 부흥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영적인 멘털리티가 전환되어야 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부흥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흥을 구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계시는 오고 오는 세대에 부흥을 갈망하는 모든 교회에게 주신 영원한 약속이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대하7:14)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신다. 목회자인 나부터 철저히 회개해야 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가 철저히 회개하고 회개를 요구하는 설교는 성도들에게 스스로 담판을 짓게 할 것이다. 이것은 치열한 영적 전쟁이다.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때 한국교회에 부흥의 기운이 돌 것이다. 어느 경우든 스스로 회개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와 그에 대한 응답이 없이는 한국교회에 부흥은 영원히 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설교자가 회개하였다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한지 오래다. 설교자들이 회개를 촉구하기는커녕 교인들의 귀에 야합하고 그 대가로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 나아가 한국인의 범죄에서 목사가 빠지면 범죄가 구성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악한 길에서 벗어나기는 요원한 것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면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겸비를 요구하신다. 목회자가 먼저 겸비할 때 그의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겸비하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 목회자, 그것도 대형교회나 유명한 목회자들의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래서 교회경영에 성공한 목회자라는 직업군은 생겨나도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교인들을 변화시키는 목회자는 찾기 힘든 것이다. 작은 교회 목회자나 무명의 목회자라고 겸손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크고 유명해지면 대부분 교만이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래서 겸비함은 부흥을 갈망하며 추구하는 모든 목회자의 필수과목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를 요구하신다. 기도의 기능이 많다. 그 많은 기능 중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만이 하나님의 부흥을 누리게 한다. 다양한 우리의 필요들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만이 부흥을 가져오는 요체이다. 많은 기도회가 있고, 많은 시간 기도를 하여도 주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응답받는 자 많으나 부흥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은 우리로 속죄은총을 누리게 한다. 속죄은총의 감격이 우리 가슴속에 강물이 되어 흐르게 한다. 그 감격의 눈물이 우리에게 에스겔이 본 이상처럼(겔47:1-12) 생수의 강(요7:38)이 되어 한국교회를 살리고 한국교회가 처한 삶의 자리를 고치는 역사로 나타날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 전체가 다 부흥되는 역사는 기대하기 어렵다. 겸비하여 부흥을 갈망하는 교회는 부흥의 은총을 입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교회들은 부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