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의 복음병원

2007.05.15 23:37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반석     번호 : 74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3/11/25 (화) AM 00:08:25     조회 : 343  

1, 아래의 글은 고신측 교역자가 복음병원 문제에 대하여 쓴 글입니다.

2, 교회가 사회사업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 주는 글입니다.

3, 백 목사님께서 오래 전에 이런 면을 예견하시고 우리들에게 많이 교훈 해 주셨습니다.

4, 고신에서는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5, 교회의 생명은 기독교 신본주의, 기독교 복음주의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 고신의 복음병원 - 이세령 글 (고신대학원 홈)

관선이사 체제를 통해서 병원이 회복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상황임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정말 이러한 관선이사 상태에서 벗어나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것인가? 만약에 이사를 교회가 직접 파송 하는 일이 회복되었을 때 간접경영이라고 하지만 정말 교회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병원의 경영과 감독이 교회의 손을 떠나서 겨우 회복되고 있음을 볼때-물론 자금의 투자는 별도로 이해하고-진정 교회의 것으로 회복되어야 하겠는가? 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계속 논의 자체가 봉쇄되는 분위기를 만드는가?

즉 공석에서 제 삼자 인수에 대해서 말도 꺼내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는가? 왜 삼자 인수가 안 되는가? 왜 하나님의 뜻은 삼자 인수가 아닌가? 교회가 건사하지 못할 만큼의 비대해진 병원의 소유와 경영의 목적이 무엇인가? 정말 교회가 그 병원을 가지고 어떤 복음에 합당한 일을 하려고 하는가?

복음병원이 경영이 정상화되면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병원으로 탈바꿈하려는 자세를 다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 첨단 시설의 암병원이 되려고 한다면 왜 굳이 교회가 이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가? 더 자금력이 좋고 경영이 효율적인 이들이 맡아서 관리 경영하는 것이 더 국가의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교회는 복음의 정신이 구현된 직접적인 일에 소용되지 않는 재산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한다. 돈과 재산은 현대 사회에서 힘과 권력을 생산하고 자리를 만들어서 힘을 신으로 삼는 타락의 선봉에서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 병원을 포기하자. 경영 정상화 이전에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경영을 정상화해서 사회에 환원하고 교회는 정말 교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섬김의 일에 몰두하자. 잃어버리면 더 부요 해지는 복음의 원리가 교회를 더 굳게 세울 것이다. 돈을 넣지 않고서는 말을 하지 말라는 식의 분위기를 경계한다.

우리는 지난 몇 달동안 관선이사 시대를 바벨론 포로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필자는 바벨론 포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벨론 포로의 의미는 포로 됨에 대한 강조가 성경의 의미가 아니다. 바벨론 포로의 성경적인 의미는 새로운 언약을 맺는 광야와 같은 장소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내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과 대조해서 다시 광야 바벨론으로 가서 이스라엘은 마음에 새로워지는 새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단지 포로로 가는 것만을 성경이 가치있게 판단하지 않는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로 갔지만 성경은 언약을 말하지 않는다. 바벨론 포로가 의미있기 위해서는 마음의 새로워짐, 강퍅함에서 마음의 부드러워짐, 죄의 회개와 사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돌아와서 새로운 교회, 나라를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 관선이사의 사태가 진정한 바벨론 포로가 되기를 바란다면 교회는 이전의 부정과 불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죄를 회개하고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인 수익기관화 하는 과정과 만성화된 악성 방식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보다 병원을 의지해서 교회를 세우고 건물을 세우려 했던 모든 악에 대해서 돌이켜야 한다. 잃어야 할 것은 잃어야 바르게 세울 수 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의 기간은 일 이년이 아니고 두 세대가 더 지나는 칠십 년이 되어야 한다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왜 바벨론에 복종하라고 외치는가? 그것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고 이전의 방식으로의 귀환을 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뽑고, 갈고, 뒤엎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세우고 가꾸는 새언약의 메세지를 선포하였다.

이제 관선이사 체제를 진정한 바벨론 포로라고 생각하는 교회들은 헛된 것에 기초해서 세운 이전의 화려함을 잊어야 한다. 필자는 여러 번 신대원에 대해서 언급했다. 대학을 언급하기 앞서 교회의 참된 교사들은 신대원의 장래에 대해서 솔직하게 결단을 내리기를 촉구한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의 바른 해결을 위해서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지 자명하지 않는가? 현금의 문제가 왜 이런 방식으로 밖에는 갈 수 없는지에 핵심이 신대원에 있음을 왜 눈감으려고 하는가? 사태가 발생하기 전이었다면 전문대학원의 분리가 이루어져서 문제를 달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 기관은 한배를 타고서 이 문제를 맞았다. 그러면 진정으로 사는 길은 죽는 길밖에는 없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논의되기를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