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잘 한다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2007.05.17 01:16

선지자 조회 수: 추천:

■ 질문: 설교를 잘 한다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선지자선교회

답변: 이영인 목사님

1.하나님 전하라는 내용을 전하는 것이 첫째 2.받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는 것이 둘째입니다  


너무 넓게 질문하시면 답변도 겉돌 수밖에 없습니다. 혹 필요하시면 재 질문이나 보충질문을 해 주시고, 일단 가장 일반적으로 드릴 수 있는 내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전하고 싶은 내용을 전했으면 설교로서는 백 점입니다.

①노아는 당대를 상대로 목회 했던 분입니다.

노아 600세 되던 해에 천하를 멸하는 홍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 120년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당대 교회를 향해 홍수를 미리 경고했고 피할 길을 열었습니다. 노아는 당대를 향해 세운 하나님의 종이었고 당시 노아에게는 순종하는 교인도 있었고 반항적인 교인도 있었고 오늘처럼 별별 교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②노아의 설교는 직계 가족 말고는 아무도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노아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뜻은 '120년 후 홍수'와 '방주 준비' 두 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당대 교인들에게 설교할 때 '120년' '홍수' '방주'라는 단어만 들어갔다면 좋은 설교입니다. 위에 있는 단어들을 빼고 무엇으로 주제를 삼아, 어떤 청산유수와 같은 달변이 쏟아졌다 해도, 또 듣는 교인들이 그 설교에 감동을 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다 해도, 그 설교는 빵점입니다. 낙제입니다. 그 설교는 살릴 수 있는 사람을 도매금으로 죽이는 '학살'입니다.

노아가 말더듬이였다 해도, 노아가 설교를 짧게 했다 해도, 노아가 설교를 2박 3일간 계속해서 했던 소리를 반복했다고 하더라도 이 3가지 단어만 들어갔다면 역사에 남을 대설교요 사람을 살리는 특효약이라고 하겠습니다. 노아는 당대에 이 3단어가 들어간 설교로 외쳤고 그 시대 사람들은 노아의 설교를 듣고도 한 사람도 감동을 받지 못했으니 노아의 설교는 빵점짜리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볼 때 그렇게 보았고 하나님 보실 때는 100점을 주셨습니다.


③노아 때도 그러했지만 오늘은 좀더 심한 때입니다. 좋은 설교의 기준을 딤후4:3에 말씀했습니다.

마24:37에서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재림할 때, 믿음 없는 세대의 설교 기준이 이렇게 될 것을 미리 말씀했습니다.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했습니다.  

노아 때로 말하면 120년 홍수를 포함시켜 설교하는 것만이 '바른 교훈'이니 곧 잘하는 설교입니다. 이 말 이상으로는 더 잘 할 것도 없고 더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귀를 긁어줄 말이 필요했습니다.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어떤 내용을 듣고 싶어하는지 그 내용들을 잘 배합해서 어떻게 좋은 목소리와 높낮이 조절을 통해서 듣기 시원하도록 전하느냐는 말의 기술자를 찾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120년 홍수'가 빠진 설교는 아무리 좋은 목소리와 좋은 주제로 잘 전달된다 해도 전부 '허탄한 이야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때입니다. 오늘이 그때보다 더한 때입니다.


④딤후4:3-4은 오늘 우리에게 설교 들을 귀와 기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전하는 설교라면 사무엘과 같은 주일학생의 전달이라도 명설교입니다. 이것을 전하지 못하는 설교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일 뿐입니다.

교회마다 하나님께서 그 시간 그 현실에서 따로 전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목회자가 성경과 기도로 찾아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목회자의 실력 첫째는 설교이고, 설교는 성경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외에 모든 인간적인 단점은 덮어두고 참아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그것은 이해를 해야 합니다.

목회자를 탈렌트로 데려온 것이 아니니 보는 데 지장이 있어도 문제삼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를 자기 귀 시원하게 긁어 주라고 맛사지사로 데려 온 것이 아니니 무슨 세상 소식 무슨 자기 체질에 맞는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만을 찾는 목회자가 되고 그것을 전해 듣는 것으로 대만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20년 홍수라는 단어만 들어갔다면 설교는 더 이상 논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 전달된 단어만 전달되었으면 됩니다.


2.듣는 교인에게 은혜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①내용이 바로 전달되면 되었고, 더하여 은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20년 후에 홍수가 있다는 것을 전달만 했으면 가장 중요한 것은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달이 단순 전달에 그치지 않고 듣는 이들에게 감동이 되고 그 전달받은 내용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도록 행동이 나오게 했다면 얼마나 더 좋겠습니까!

전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바른 내용이 전달되도록 첫째 힘을 써야 하고, 둘째로는 듣는 이들에게 은혜가 되도록 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인의 입장에서는 첫째 문제만 해결되었으면 만족해야 합니다. 두 번째 조건인 은혜면까지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 은혜면이라는 것은 인간적인 많은 면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목회자를 기본적으로 좋아하면, 꼭 같은 설교 내용을 들으면서도 감동이 되고, 자기가 목회자를 싫어하면 설교까지도 듣기가 싫어집니다. 그런데 자기가 꼭 진리를 따라 목회자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수시로 변동시키고 또 괜히 시험에 들었다가 또 혼자 회개를 했다가 합니다. 온 교인들이 번갈아 가며 그렇게 됩니다. 따라서 은혜면이라는 것은 주관의 변동과 그 사람의 현재 심정 등 많은 면이 복합되어 은혜 받는 면이 바뀔 수 있으니 교인으로서는 첫째 면만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②은혜면에 도움되도록 생각해야 할 요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참고만 하고 말일입니다.

여러 성구를 자꾸 끌어다 붙이려고 하지말고 몇 성구에 집중하라는 것
교인을 보면서 설교하라는 것
교인의 사생활을 예로 들면 시험 들 수 있다는 것
목회자 자기 이야기를 삼가 하라는 것

이런 것은 이제 수십 가지도 될 수 있고 수백 가지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와 참고할 것 한 가지만 우선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