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이치에 입각한 성경해석

2010.02.25 17:06

김반석 조회 수: 추천:

진리 이치에 입각한 성경해석


선지자선교회 <서론>

구약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는 역사적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출애굽 역사입니다. 이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는 당시 구약 성도에게는 구원으로 인도하셨고 또 우리 신약 교회에게는 형식적 구원도리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교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비유로 하신 말씀이 많은데 우리 구속 받은 성도들에게 비유적 구원도리로 주셨습니다.

이 구약의 상징적 말씀과 신약의 비유적 말씀에 대해서 우리들은 성경을 근거해서 해석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이 각자의 깨달음대로 해석을 해서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해석을 하고 어떤 목회자는 저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그 해석이 각자의 깨달음에 따라 다릅니다. 이렇게 각자의 깨달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어 왔는 것이 그 동안의 교회사였기 때문에 그런 면에 대해서 거의 당연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말씀 자체도 진리이며 그 깨달음의 해석도 진리적 이치에 입각하여 해석되어야 합니다. 진리적 이치에 입각하여 해석되어야 된다는 말은 성경 말씀 자체가 성경 말씀을 해석해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해석하는 그대로 해석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한데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고 원어나 그 어떤 것을 근거해서 해석을 하면 그 해석은 성경적 해석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상징적 말씀과 비유적 말씀 중에서 성경적 해석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시해 보고자합니다.

상징적 말씀 중에는 구약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널 때 이스라엘을 쫓던 바로의 '병거'에 대해서와 비유로 말씀하신 중에는 신약 주님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쉽다는 그 '부자'에 대해서입니다.

<본론>

● 병거

구약 출애굽 때 바로의 병거가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을 쫓는데 대해서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만 대하기 싶습니다. 물론 애굽은 세상을 상징하고, 바로는 마귀를 상징한 것으로 바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병거에 대해서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바로 해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을 해하려고 쫓는 바로의 병거라는 정도로만 대체로 알고 있습니다.

▪(출14:6-7)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특별 병거 육백 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그러면 바로의 특별 병거 육백 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는 무엇을 상징한 말씀인가? 이에 대한 상징적 말씀을 성경이 해석하여 주시는 대로 성경적 해석을 해보겠습니다.

출14:6-7의 병거에 대해서 슥6:1-8에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네 병거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는데 그 산은 놋산이더라 *첫째 병거는 홍마들이, 둘째 병거는 흑마들이, *셋째 병거는 백마들이,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 메었는지라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하늘의 네 바람인데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것이라 하더라 *흑마는 북편 땅으로 나가매 백마가 그 뒤를 따르고 어룽진 말은 남편 땅으로 나가고 *건장한 말은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고자 하니 그가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나가서 땅에 두루 다니라 하매 곧 땅에 두루 다니더라 *그가 외쳐 내게 일러 가로되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북방에서 내 마음을 시원케 하였느니라 하더라’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을 모셔 섰던 천사들이 타락하여 땅에 떨어진 것을 말씀합니다. 즉 그래서 사14:12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출14:6-7의 바로의 병거에 대하여, 슥6:1-8에 그 병거에 대한 속성을 자세히 말씀하여 알려주시고, 또 계6:2-8에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하셨으니, 그 병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자세히 해석을 해주고 있습니다. 즉 사단과 사단이 부리는 병거들로 인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이 해를 입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단이 부리는 병거를 계13:1-18에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하셨으니, 그 병거의 말들은 바다에서 나오는 열 뿔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 짐승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를 가리켜서 육백육십이라 하셨습니다. 그 육백육십육에서 육백은 바로의 특별 병거 육백 승을 말씀하고, 육십육은 애굽의 모든 병거들을 말씀합니다. 이에 대한 주석은 ‘성경적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해석을 하였으므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부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부자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의 사람에 대한 계명을 다 지켰으나 주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 하실 때에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여 간 청년으로 여기는 것이 대체적입니다.

▪(마19:23-26)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이 비유에서 말씀하시는 부자는 어떤 부자를 말씀하는가? 계3:17-19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셨으니,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 부자를 말씀합니다.

계3:17-19 말씀에 대한 해석은 ‘성경적 요한계시록 주석’에 해석을 하였으므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이렇게 구약 성경의 상징적 말씀과 신약 성경의 비유적 말씀이 이렇게 세밀한 구원도리가 있는 것을 성경적을 근거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은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적으로 해석해야 성경적 해석이 됨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하지 않으면 성경적 해석은 안 되고 성경적 해석과는 거리가 먼 임의적 해석이 되고 맙니다.

구약 성경의 상징적 말씀이 되는 출애굽 때의 바로의 특별 병거 육백 승은 스가랴서에서 네 병거의 말로 해석해 주셨고, 그 네 병거의 말은 계시록에서 짐승으로 해석해 주셨으며,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짐승의 수를 육백육십육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해석하여 주신대로 그대로 해석하는 이것이 성경적 해석입니다.

또한 신약 성경의 주님의 비유 말씀에서 부자는 계시록에서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그 부자인 것으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 새롭게 아는 것은 그동안 요한계시록 말씀이 장차 있을 역사에 대한 계시적 말씀으로만 대하던 것을 이제는 구약의 상징적 말씀과 신약의 비유적 말씀에 대해서 직접 명확하게 해석을 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이러한 역할을 하고 이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해석의 그 방편적 원리를 성경이 성경적 이치로 조명하여 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확인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러함을 상고해 보건데 요한계시록을 모르면 구약의 상징적 말씀과 신약의 비유적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그 외부적 윤곽은 잡을 수 있으나 그 내부적 구원도리는 잡을 수 없겠다는 것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계시적 역할과 위치도 있지만, 구약과 신약에 대한 상호 연결성의 위치와 또한 구약과 신약 성경의 구원도리에 대해 직명성(直明性)을 가지는 역할도 함께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첨부>

성경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깨닫는 것이 그 당시 시대마다 최고에 도달하는 연구와 해석과 깨달음이 있었음을 아는 우리들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이 정도의 성경연구와 해석과 깨달음에 있어서 이전 시대보다 새롭게 더 많이 깨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다음 시대는 또 그 시대를 감당하는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보다 더 앞서고 더 새로운 성경연구와 해석과 깨달음을 주실 것으로 아는 우리들입니다.

그러하나 바로의 병거가 가지는 구원도리나, 스가랴서에서 말씀하는 네 병거의 말에서 가지는 구원도리나,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네 말과 또 네 말이 되는 짐승 곧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대한 구원도리나 다 같은 구원도리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부자에 대한 구원도리나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부자에 대한 구원도리나 다 같은 구원도리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말세가 가까워 올수록 주의 종을 통해서 구원도리를 새롭게 자세히 알려주시는 것은 우리 심령이 점점 더 어두워서 더 새롭게 더 세밀히 알려주시려는 주님의 은혜역사입니다. 그렇지만 구원도리를 더 추가해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대가 성경을 더 새롭게 연구했다고 이전 시대보다 더 새로운 성경 연구를 한 것이 아닌 것은 같은 진리의 구원도리에 대해 외부적 형태를 달리 나타냈을 뿐 그 속에 내부적 구원도리는 같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구원역사는 시대에 따라 변동이 없으며, 진리 또한 시대에 따라 주시는 차별이 없으며, 주님의 대속의 피 공로 또한 시대에 따라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아담 하와 때보다 구약 때의 성도가 심령이 더 어둡고, 구약 때보다 신약 때의 성도가 심령이 더 어둡고, 신약 중에서도 말세가 되어 갈수록 성도의 심령이 더 어둡기 때문에 시대별로 더 새롭고 더 세밀한 깨달음으로 알려주시는 그 차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말세의 성경 깨달음이 신약 초기 때보다 교리가 더 새롭고 세밀하여 앞선 것 같지만 앞선 것이 아니며, 또한 신약 초기의 성경 깨달음이 구약 때보다 더 새롭고 세밀하여 앞선 것 같지만 앞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리의 정립면에서는 앞서나 성도의 심령면은 더 어둡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말하면 구원도리는 시대와 상관없이 그대로이며 그 구원도리를 깨닫는 것은 그 시대를 감당하는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