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24.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

  선지자선교회

249>제국주의에 제출한 일본 총독의 한 보고서에서 미나미(Minami) 총독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40만 명의 아주 담대한 군대가 있다. 그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251>전쟁에서 퇴역한 미나미 장군이 1936년에 한국의 총독이 되었고, 그는 철혈정책을 휘두르며 한국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공포심을 자아냈다. 종교탄압의 행정적 도구로는 1936년부터 총독부 시책인 국제명징 강행과 그 해 12월부터 발효된 조선사상보호관찰령이 있었으며, 그리고 1937년부터는 국가총동원 시책이 시행되었다. 일본어는 의사소통의 공적인 매개 수단이 되었고, 학교에서 유일한 교육 언어로 선포되었다. 한국어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과정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완전히 사용 금지되었다. 일제는 심지어 한국인의 이름마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제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 정책을 강요하였다. 민족 동화 과정이 가속됨에 따라 일본은 민족정신 총동원의 필수적인 과정의 하나로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 정책을 완수하기 위해 그들은 교활한 정책을 취했다. 그들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은 기독교 학교들과 교회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일제는 효과적인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의 견고한 기초를 뿌리 채 뽑아 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252>1932년에, 학교들을 중심으로 한국민들로 하여금 신사에 참배하도록 하는 일제의 조직적인 압력이 시작되었다. 이런 정책은 선교의 주요한 문제로 부각되었고, 곧 기독교계 학교들과 한국교회가 주목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학생들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정책은 일본 자국 내에서 보다는 한국과 대만에서 더욱 더 강력하고 긴박하게 집행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이로 인하여 교회는 지속적으로 심각한 갈등 속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1935년 가을, 평남지역의 일본인 도지사는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를 조사하기 위해 숭실대학의 학장이었던 윤산온(George S. McCune) 박사와 숭의여고 교장이었던 스눅(Velma L. Snook) 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히자, 만일 그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교육권이 박탈당할 것이라는 협박과 함께 6일 동안 신사참배 문제에 대하여 재고하도록 제안하였다. 맥큔과 스눅은 평양에 잇는 선교사들과 선교실행위원회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통보하였다. 그 때 그들은 평양 시내에 있는 27개 장로교회의 목사들의 모임을 소집하였다. 그러나 거의 모든 목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신사참배 하는 것을 거절하라고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충고하였다. 지금까지 언급된 내용을 당신들은 경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사에서 신격화 된 영들을 참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이 신사참배 강요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말할 수 잇는 이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선교사들 당신들의 교회의 신앙을 수호하기를 요청합니다.

 

253.19351231일에 북장로교 선교회 실행위원회가 맥큔 교장의 집에서 열렸다. 위원장인 허대전과 소열도, 그리고 노해리(Harry A. Rhodes) 등이 모여 심각하게 논의한 후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약속한 6일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 신사참배가 왜 불가능한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윤산온은 신사의 제식에 있어서 종교적인 여러 가지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 또한 신사에서 신들을 경배하고 있는 사실이 확실함으로 기독교 신자인 나로서는 신앙 양심상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평안남도 지사에게 보냈다. 장로교 신앙과 전통에 철저했던 마포삼열은 처음부터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 교리, 그리고 기독교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신사참배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처사로 인식하였다. 그가 심혈을 기울려 세우고 애지중지 일구어 놓은 기독교 학교들, 특히 소위 삼숭(숭실대학, 숭실중학, 숭의여고)이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1938331일 부로 폐교처분을 받앗을 때에는 인간적인 회한이 누구보다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독교 학교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또 타협할 수 있었지만, ”기독교요소를 배제할 수 없었다. 마포삼열은 이 점에 있어서 매우 정직했던 인물이었다. 기독교 진리를 믿고 그대로 실천하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는 성실과 진실로 일관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의 교육사업은 한 때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일본 제국의 신사참배 강요와 맞서 싸우다가 페교의 조치를 받기는 했으나 초지일관한 셈이다. 이 폐교 조처를 마포삼열은 오히려 달게 받았고, 열의로써 기독교 학교의 긍지와 미래를 낳았다고 보았다. 폐교는 일시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곧 끝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폐교의 지붕 위에 새로운 서광이 비칠 것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이교(異敎)의 사신(邪神) 우상 앞에 서서 절하기보다는 폐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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