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25. 신사참배 가결과정과 그 이후

  선지자선교회

256>일본의 교육정책의 책임자였던 와타나베는 맥큔 박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신사참배의 실질적인 본질과는 대조되는 기독교 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다음과 같이 교묘하게 전달하였다. “신사와 종교는 우리 일본 제국의 헌법에 의해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다.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에 가서 참배하도록 하는 이유는 학생들의 교육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단지 학생들의 애국심과 신의를 표현하게 하는 것뿐이다.” 기독교 학교들에 신사참배를 강요해 나가면서, 일제는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논리로 설득과 위협을 가중시켜나갔다. 일제는 그들의 신사참배 강요정책이 학교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음을 확인한 후에, 교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257>초기에는 한국교회 전체를 향하여 전면 공격을 하기보다는 반대 성향이 강한 목사들과 성도들을 중심으로 설득과 회유작업에 나섰다. 이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구금 및 체포하거나 고문을 가하는 등 갖은 핍박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이 정책은 그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e일제는 일본에 잇는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해 주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역할은 신사참배에 대하여 일본 정부의 입장을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수용하도록 권고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일제는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하도록 모든 압력을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 전에 평양경찰 서장은 193892일 평양 시내에 있는 모든 선교사들을 소집했다. 그는 앞으로 있을 총회에서 선교사들에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침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논쟁도 허락될 수 없으며, 황제의 모욕이 되는 그 어떤 안건에 대해서 결코 찬성투표를 허용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또한 총회의 400여명이나 되는 총대들을 그들의 관할지역 경찰서에 미리 호출하여 신사참배 가결 제안에 찬성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258>삼엄한 경비와 위협 속에 1938년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개최된 제 27회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는데, 이 때 방위량 선교사는 당시 총회장인 홍택기 목사에게 언권을 요청하여 그 가결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 신사참배 가결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법에 위반된다는 역설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묵살되자 방위량 외에도 권세열(Francis Kinsler)과 허일(Harry James Hill) 등을 비롯한 10여명의 선교사 총대들이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선교사들 역시 개인적으로, 또 나중에 집단적으로 신사참배 문제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는데, 그것은 한국인들의 문제라는 이유에서였다. 일제는 그 문제를 아예 논의조차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신사참배를 허용하자는 동의안이 제기 되었을 때, 일제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던 사회자는 그 동의안을 지지하는 내용 외에는 발언을 허럭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회장, 규칙이오!” 라며 살벌한 분위기의 적막을 깨트리고 한 젊은 선교사가 소리지르며 항거하는 일이 총회 석상에서 일어났다. 장인인 방위량 선교사의 언권을 봉쇄하고 각본대로 신사참배 동의 재청을 받고는 ()”는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하려 할 때에, 피 끓는 젊은 선교사 한부선은 참을 수 없이 외친 것이다.

 

259>그 당시 일본인 형사의 엎어치기로 한부선은 총회가 열렷던 예배당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수모를 겪으며 끌려나갔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그의 신앙은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기만 하였다. 그 후 한부선은 환란과 핍박 중에도 순수한 신앙을 지켜나가려는 한국인 성도들과 서양의 기독신자들에게 한국의 엘리야로 각인되었다. 27차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을 남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권영찬 목사를 비롯한 25명은 총회의 결의가 하나님의 계율과 조선예수교장로회 헌법에 위배될 뿐 아니라, 우리들에게 발언을 허하지 않고 강제로 회의를 진행한 것은 일본 헌법이 부여한 선교자유의 정신에도 어긋난다라는 취지의 항의서를 전달하였다. 또한 선교사들도 총회 직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항의서한을 제출하였다. 한위렴이 작성한 이 항의문의 내용은 첫째로는 신사참배 결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에 위배되는 것이며, 둘째는 총대들이 어느 안건에 대해 반대의사를 개진하며 반대 투표를 할 수 잇는 권리를 봉쇄한 것은 한국 장로교회의 헌법과 규칙에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며, 셋째는 강제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하는 것은 일본 헌법에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위반하는 처사이며,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처사는 보통 회의법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언급하였다.

 

260>이러한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제는 계획대로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통한 한국민의 황국 신민화와 교회의 신앙을 훼절시키는 작업을 그대로 진행시켜 나갔다. 평양 기독교 친목회 회원인 심익현 목사는 총회원들이 즉각적으로 신사참배를 실행할 것을 특청 하였고, 부노회장이었던 김길창의 인솔 하에 전국 23개 노회장들은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하였다.

 

261>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최후까지 버텼던 장로교회가 허물어진 상태에서 장로교회의 핵심이요 교역자 양성의 본산지인 평양신학교에서도 신사참배에 대한 태도가 찬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938년 봄 노회부터 신사참배 결의를 강요하고 당시 교세가 가장 강했던 평북노회부터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를 성토하였다. 이 노회 소속 학생이었던 장홍련은 신학교 교정에 있는 김일선 목사의 기념 식수 벌목 사건을 계기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준비하다가 한창선, 김양선, 안광국, 장윤성, 지형순, 조윤승, 장윤홍, 등의 신학생들과 박형용 교수가 함께 검속 되어 투옥되었다. 평양신학교의 한국인 교수들이었던 박형룡과 이성휘 등은 신사참배 강요정책에 반대해T지만 채필근, 김관식 등은 교회와 학교는 분리되어야 하며 종교응 문부성에서, 신사는 내무성에서 관장을 하니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강변하였다. 신사참배를 찬성한 이들은 후에 친일 교단에 선봉에 서서 비신앙적이고 반민족적인 일에 앞장서게 되는데 이것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평양신학교 재학생이었던 이인재는 당시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평양신학교에 다닐 때 나와 많은 동료들은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모두 투옥됐다고 증언함으로 거의 모든 신학생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 당시 학생 수는 108명이었고 전쟁이 일본에 불리한 국면으로 전개되던 때인 만큼 그들의 학정은 날로 가혹해져갔고, 죄 없는 죄수(?)들은 감옥에서 하나 둘 죽어 나가기 시작하였다고 회고하였다.

 

262>“위주(爲主) 수난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간주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동참했던 이인재는 1940513일 일본 관헌에 의해 체포되어 1945817일에 출옥하기까지 54개월 동안 옥중에서 순수한 신앙을 지켰던 인물이었으며 말년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보내다가 2000년에 소천하셨다. 한국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한 이후, 교회의 신앙적 변절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1939년 한경직이 목회하고 있었던 신의주 제2 교회에서 제28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는데, 그 총회에서 윤하영이 총회장에 선출되고, 신사참배 가결 못지 않게 치욕적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이 결성되었다. 그 연맹의 이사장은 총회장 윤하영이 맡게 되고 총간사는 정인과 목사가 맡게 되었다. 그런데 신사참배에 가담한 자들 중에 프린스톤신학교에 유학했던 한경직과 송창근, 그리고 김재준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신앙적 입장과 사역 사이에는 일관성보다는 현실에 순응하는 경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263>반면에 프린스톤 출신 가운데 박형룡과 한부선 같은 이들에게는 신학과 사역에 분명한 일치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264>요하네스 보스(Johannes G. Vos)는 당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세속 통치자의 통제 아래 놓여있는 교회의 상태에 대해서 종교를 통제하는 세속 통치자야말로 인간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였으며, 또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찬탈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신사참배 가결로 인하여 무너진 한국 교회는 일제의 교활한 종교정책에 의해 더욱 신앙의 변질이 심화되었다. 기독교 고유의 예배 의식에도 일제는 황국 신민화의 일환으로 일본적 방법을 강요하였다. 시국인식과 협조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국기 게양대를 만들도록 하였고, 교인들에게 국기에 대한 배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항국신민서사 제창을 하도록 강요하였으며, 서력연호 사용을 금하였다. 일제 말기의 주일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붓갓네살 신상에게 경배하는 것 같은 비극의 시간이었다.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은 친일교단들의 조직과 아울러 이 교단들을 내세워 성경과 찬송가의 내용을 폐지하거나 개편하는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19434월에 조직된 전필순을 의장으로 하는 조선 혁신교단은 일제의 지령대로 성경의 제한적 사용을 주도하였다.

 

265>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이 강하게 내포되었다는 이유로 모세오경을, 그리고 내세사상을 유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이유로 요한계시록의 폐기를 명령하였다. 또한 구약성경 전체 뿐 아니라 복음서만 제외하고는 신약 전체의 내용을 설교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고, 이것도 당국이 허락한 범위 내에서만 시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을 폐기토록 조치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의 내용 가운데 신도(神道)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는 이유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구절을 고백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천황의 영원사상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성경과 시도신경의 제한적 사용을 명령한 일제는 찬송가도 그들의 편의대로 개편하고 그들이 보기에 문제가 되는 내용은 폐기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66>한국 장로교회는 19401110장로회지도요체를 통하여 국체에 위배되는 찬송가의 수정을 발표했고, 1941102일에는 신편찬송가중 금지할 찬송가를 장로회보에 공시하였다. 감리교에서는 19414월 일본 기독교 조선감리단의 제1회 총회에서 국체에 어긋나는 찬송가의 삭제를 결의하였고, 11월에는 신정찬송가에서 국체에 위배되는 곡과 가사 중 일부분을 수정하는 공고를 냈다. 이 당시에 한국교회에서 사용되던 찬송가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케 하거나 금지시킨 곡들을 연구한 문옥배에 의하면,신정찬송가신편찬송가에서 구절이나 자구가 수정 및 삭제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발견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호칭인 만왕의 왕’ ‘왕의 왕’ ‘만유의 주’ ‘만유의 주재’ ‘태평 왕등을 전부 ()’ ‘주님’ ‘하나님으로 바꾸었다. 이러한 칭호들이 일본의 현인신인 천황의 신성에 저촉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십자가의 군병구주의 일꾼으로, ‘치러 나가세달려 나가세로 수정하였다. 군병이라는 투쟁적 용어가 일본에 저항하는 의식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셋째, ‘만민만인으로, ‘만국모든또는 세상으로, ‘백성사람으로 수정하였다. 넷째, ‘망할 세상모든 죄, ‘난리큰 일’, ‘악한 세계죄 많은 세상으로 수정하였다.

 

267>신앙의 모든 문제가 일제의 정치적 의도에 조정되는 가운데 신앙의 자유가 유린된 것은 물론이고 국가에 의한 종교의 지배와 탄압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통하여 일제가 신사참배는 단순히 국가의식이라고 주장한 것이 얼마나 허구였는지를 통감하게 된다.

 

268>이러한 가운데, 교회의 부일행위가 신학교육에도 여실히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신사참배 반대문제로 폐교한 평양신학교를 다시 복구하여 소위 후 평양신학교혹은 채필근 신학교라고 불리는 신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친일적 자세로 학교를 운영하여 나갔으며, 이런 자세는 서울에 세워진 조선신학교와 사상적인 면에서나 친일적 자세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러한 신학교육이 지향하는 바는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 양성과 일선 목회자들의 일본화를 위하여 목사 재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일본적 신학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 선교사 기치를 내세우며 순수한 민족 자본으로 새로운 신학교육을 표방했지만 이면에는 일본화의 길을 서슴없이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의 한국교회는 일본의 국책에 순응하는 것을 혁신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하였고, 기독교를 일제의 정책에 완전히 예속시킴으로 역사의 암흑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의 사상 공세에 한국의 공교회는 여지없이 굴복하고 말았으며, 1938년 이후 해방까지 가장 가련한 슬픔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변질은 해방 이후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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