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부선 선교사 평전  - ● 40.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합동 그리고 환원

  선지자선교회

421>고려신학교는 1950년대 후반에 이르게 되면, 교회소송문제에 대한 견해의 차이와 박윤선 목사의 주일성수 문제로 불거진 이사회와 박윤선 교장과의 갈등과 대립으로 상당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 한국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모든 외국 선교부의 협력을 도모하면서 보수신학을 확립하려고 서울로 올라간 박형룡도 순탄한 길을 걷지 못했다. 19486월에 장로교신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하고, 그 다음해에 총회 직영 신학교로 허락 받았으나 그 길이 평탄하지 않았다. 장로회신학교가 1951년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와 함께 총회 직영이 취소되고 총회신학교가 신설됨으로, 박형룡은 교장 자리를 감부열(Archibald Campbell) 선교사에게 내어 주었다. 그러나 수년 후인 19539월에 다시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여 그의 신학교육의 사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한국 장로교회는 1952년의 고려파 분열에 이어 1953년에 기장파의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김재준 목사를 중심한 신학의 자유를 구가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를 중심으로 일제 치하 말기에 탄생을 보게 된 조선신학교는 해방 후 그야말로 유일한 신학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을 얻기는 했지만 반대하는 보수주의 목사들의 숫자가 점증하고 있었다. 해방 후 한국에 복귀한 외국의 선교사들 가운데 캐나다 선교부를 제외하곤 조선신학교에 대해 냉담하였다. 이런 와중에 1947418, 51명의 소위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이 대구에서 열린 총회에 신학교의 신학적 입장과 교수들의 가르침에 항의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422>교수들이 빈번하게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미명 하에 유포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발이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1930년대에 이미 보수신학에 대한 자유 진보파의 신학적 반발이 있었으며, 그 논쟁은 주로 성경관을 중심으로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보다 더 적극적인 신학입장 표현이 있었고, 자연히 논쟁의 정도는 더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박형룡 박사가 만주에서 귀국하자, 서울에 잇는 보수적인 목사들 사이에 수도에 보수적인 신학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었고, 박형룡이 고려신학교의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에 오자 그들의 소신을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1948620, 서울의 창동교회에서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35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와 함께 장로회신학교도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함과 동시에 두 신학교를 병합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런 가운데 신학교간의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1951525일에 모인 제36회 총회에서는 양 신학교를 다 폐쇄하고 새로운 하나의 총회 직영신학교를 설립하는 결정을 내렸다. 조선신학교 측에서 볼 때, 이 결의는 결과적으로 조선신학교가 총회직영 신학교임을 취소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423>그 이듬해 대구 서문밖 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서는 성경에는 비록 오류가 잇지만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김재준을 성경무오설을 부인한다고 하여 제명처분하기로 가결하였으며, 조선신학교 졸업생은 교회의 교역자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1952917, 조선신학교를 옹호하는 35명의 목사와12명의 장로가 모여 호헌대회를 열고 총회의 처사에 대해 불법이라고 항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3년에 모인 제38회 총회에서 김재준의 목사 파면을 결의하자, 조선신학교 인사들은 새로운 총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54년에 분파 된 이 총회를 한국기독교장로회라고 칭하였다. 한국 동란 와중의 분열된 한국 장로교회는 여전히 분열의 조짐이 제거되지 않은 채 혼란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한국 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에 대한 의견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분열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1956920일에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1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활동에 착수하였다. 국제기독교협의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CCC) 회장인 칼 맥킨타이어(Carl Mclntire)1959년에 한국을 방문하기 4년 전에 이미 경북노회의 헌의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적 정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연구위원들 가운데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세계교회협의회가 용공이라는 것과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외에는 WCC는 단일교회 운동이라는 밝혀지게 되었다.

 

424>WCC를 공격하는 보수주의적인 목사들은 한국 장로교회의 보수와 신앙의 순수성 보존이란은 기치 아래 WCC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자들을 향하여 비판하고 있었다.

 

425>19536월 조선신학교 측과의 분열 이후, 장로교회 내부의 WCC의 회원 교회로 남아있기를 원하는 에큐메니칼 인사들과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미국의 복음주의협의회(National Associaton of Evangelicals, NAE)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골은 깊어만 갔다. 전자의 중심 인물은 한경직이고, 후자의 정신적 지주는 박형룡이었다. 그런데 3천만원 사건으로 박형용은 19583월에 신학교 교장직을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며, 복음주의 진영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은 신학교 이사와 총회 총대의 다수를 확보하고자 모든 정치적 역량을 동원하는 가운데 1959924일 제44회 총회가 대전 중앙교회에서 소집될 예정이었다. 두 진영간의 갈등과 대립은 총회로 모여서 이 문제를 처리하고 취급하는 과정에서 서로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가운데 격화되었다. 경기노회에서부터 총대 선출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중에, 한경직, 강신명, 유호준 목사 등 훗날 통합 총회를 구성한 인사들이 총대 선출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자신들을 중심으로 노회를 구성하고 새로운 총대를 선출한 양측이 모두 총대를 보내자, 경기노회 총대문제가 개회 벽두에 대두되고 말았다.

 

426>복음주의자들은 정회하고 흩어졌으나, 에큐메니칼 측은 선교사들과 함께 상경하여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연동교회에서 속회함으로 연동측 장로교회 총회를 결성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정한 날짜대로 1124일에 서울 새문안 교회가 아닌 승동교회에 모여 소위 승동측 장로교회 총회를 열었다. 총회를 사회하던 노진현 목사가 속회를 선언하고 한국 장로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승해 왔던 순수한 성경적 신앙을 지키며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과 칼빈주의 정통신앙을 고수함을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승동측이 신학적 전통성과 법적인 정당성을 확보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27>당시 승동측과 연동측의 그 분열된 교회의 규모로 보나 서로 비방하던 혼란과 비행으로 보나 이 분열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가장 추악한 분열이었다. 그 이후 교회의 분리나 분립을 예사롭게 보는 교회관이 형성되었다.

 

428>한부선은 WCC에 대한 한국 장로교회의 입장 차이로 말미암아 빚어진 분열에 대해서도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혔다. 이론적으로는 “WCC는 초교파가 아니다. 이는 교회가 아니고 교회의 친교와 협의기관뿐이다.” 그리고 어떤 중앙 집권제로 말미암아 지배되는 단일 교회를 조직함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겠지만 실제로는 이 운동에 가입하도록 국법까지 사용하여 시도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소위 연동측에서 발표한 승동측 통합거부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면 결과적으로 한국 기독교 연합회, 세계 기독교 봉사회, 예수교 서회, 성서공회, YMCA, 연세대 등 각 선교회와의 관계를 끊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위협적인 언질도 불사하였다. 한부선은 미국 연합장로교회가 이루어질 때에 이 운동을 반대하는 교단을 국법을 이용하여 교회 재산을 빼앗는 처사를 자행하면서까지 연합에 동참하도록 권력을 사용하는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안타깝게 주시하고 있었다. “초교파 혹 세계적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한 말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다. 그 실상을 보면 그들의 선전과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을 볼 때 그 이론과 실상과의 차이가 있지 아니한가 의심할 수 밖에 없다그가 반대한 것은 권력과 억압으로 연합시키려는 것과 신앙이 같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연합시키려는 것이었지, “요한복음17:15-21에 있는 대로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의 말을 듣고 세상에서 구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이루어진 참 연합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429>그리고 한부선은 WCC 운동 속에 배태되어 잇는 불신사상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한 입장이었다. 한부선이 반대한 것은 초교파적 연합사업이 아니라, 그 연합사업의 신학적 입장이 신신학적이며 자유주의 신학적이고 또한 용공적이고 세속적일 때는 거부의 자세를 분명히 취한 것은 사실이다. 고신 교단이 WCC적 에큐메니칼 운동을 반대하며 NCC 탈퇴를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430>분열의 진통을 격은 승동측은 19608월 고려파와의 합동을 제안하였다. 이 시기에 고려파 역시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제안에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은 고려파가 당면한 문제와도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잇었다. 고려파의 정기 노회에서 일제하 신사참배 문제에 걸린 인사들에 대한 좀 더 관대한 태도를 취할 것을 주장했는데 그 요구가 총회에서 관철되지 않자 19명의 목사들이 새로운 노회를 구성하고 보류노회라 부르면서 고려파로부터 분리하였다. 또한 이미 전술한바 있는 박윤선의 주일성수 문제로 인하여 고려파는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어쨌던 경기노회 문제와 박윤선의 주일성수 문제로 인하여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고려파는 합동 제의에 쉽게 응하게 되었다.

 

431>19608월 서울에서 양측 지도자들의 모임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고 과속으로 치달은 합동(合同)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양측은 19609월 총회에서 합동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고려측은 920일부터 23일까지 부산 남교회에서 모인 제10회 총회에서 진주노회가 제출한 승동측과의 합동 헌의안을 받아 승동측과의 합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하동 추진위원 9명을 선정했다.

 

434>여러 가지 진통 속에서 합동총회가 196012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렸으며, 박형용은 에배소서 4:1-14에 근거하여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435>그리고 이 새 교단의 이름을 합동이라고 정하였다. 그러나 밀월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결국 이 연합은 이혼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 무계획한 시험 결혼과 같은 것이었다. 연합이 이루어진지 10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분열의 조짐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학교 문제, 불공평한 임원선출, 타락과 교권 다툼 등으로 인하여 연합의 들뜬 분위기는 이내 가라앉고 분리의 아픔이 너무도 빨리 시작되었다. 통합측과 합동측이 WCC 문제로 분열되었을 때, 합동측과 고신측은 신학적 동질성을 확인하며 교단 합동을 무리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신학교 문제를 포함한 갈등 요인들이 부각되면서 합동의 의미가 약화되고 있었다. 고신측과 교단연합을 한 후, 신학교 단일화 문제는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였다. 박형룡이 정통장로교 한국선교부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신학교 교수로 봉사해 달라고 하는 초청에 대해 다소 주저하고 있었던 선교사들에게 교단 직영이 아니었던 고려신학교가 교단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양교의 이사회를 단일화한 후 통합된 신학교는 총회의 감독을 받기로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결정되었다고 언급하였다. ”양 이사회의 합동은 빠른 기간 내에 양 신학교의 합동을 의미하며, 이러한 과정에서 총회의 간섭이나 권고는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436>또한 46회 총회에서 진정한 합동을 위하여 신학교육의 단일화가 매우 시급하다는 인식 하에 다수결로 결정되었음을환기시키면서 과거와 현재의 한국교회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잇듯이 신학교가 단일화되지 않고서는 교단의 화합이 어렵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문제를 둘러싼 이견은 좁혀지지 않은 채, 분열을 막아보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한상동과 그의 추종자들은 결국 신학교를 분리하였고 실제적인 이탈은 196210월에 완료되었다. 그 이듬해인 19639월에 부산에서 따로 총회가 소집되었다. 고려파는 자신들을 환원이라고 호칭하면서 고려파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하였다. 승동측과 합한 고려파 소속 교회들은 약 590개였으며, 그 중 445개의 교회가 분리에 가담하였다. 경남지역에서는 90%가 넘는 교회(175개 중 163)가 환원한 반면, 다른 지역에서는 그 비율은 40-60%에 불과 하였다. 환원 된 후 교려파의 총회가 회집 되었을 때, 합동을 추진했던 한상동 목사는 이 일에 책임을 지고 모든 직무로부터 은퇴를 선언하였다.

 

437>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헌신적인 입장에서 후퇴한 고려파의 편의성에 기초한 사고가 승동파와의 성급한 연합을 통해 드러났다.

 

438>1961년 합동측과 고려파가 교단 합동을 시도한지 2년이 지난 1963년에 고신의 환원을 통하여, 우리는 교단의 분열보다 합동이 얼마나 더 어려운지를 절감하게 된다./ 이런 분열의 아픔을 겪는 와중에서도 정통장로교 선교부는 양 교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을 결정하였고, 여러 지역과 다양한 교계 인사를 알고 있었던 한부선은 분리된 교단을 잇는 가교(架橋) 역할을 자임하였다. 정통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한부선은 고신교단 총회에, 간하배는 합동교단 총회에 참석함으로 양 교단 사이의 앙금을 풀고 화합 지향적으로 나갈 수 잇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였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1.02.23-119 김반석 2019.05.26
»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40.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과 합동 그리고 환원 선지자 2014.03.26
59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9. 한부선과 한국교회 개혁운동 선지자 2014.03.26
58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8. 경남노회 분규와 고려파의 분열 선지자 2014.03.26
57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7. 박형룡과 고려파 선지자 2014.03.26
56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6. 한부선과 한국 장로교회의 지로(指路) 선지자 2014.03.26
55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5. 한부선의 신학교육과 교회개혁 운동 선지자 2014.03.26
54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4. 경남노회와 교회개혁운동 선지자 2014.03.26
53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3. 해방과 한부선의 귀국 선지자 2014.03.26
52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2. 미국에서 싸운 한부선의 “태양신과의 전쟁” 선지자 2014.03.26
51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1. 한부선의 교회와 국가 분리개념과 양심의 자유 선지자 2014.03.26
50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30. 죄수 한부선과 “감옥송(Prison Song) 선지자 2014.03.26
49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9. “장로교 언약문서”와 “한국의 청교도들” 선지자 2014.03.26
48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8. 만주에서 태양신과 싸우는 한부선 선지자 2014.03.26
47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7. 만주와 한국교회의 역사 선지자 2014.03.26
46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6. 한국 선교부 내에서의 다양한 반응들 선지자 2014.03.26
45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5. 신사참배 가결과정과 그 이후 선지자 2014.03.26
44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4. 신사참배 강요와 한국교회 선지자 2014.03.26
43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3. 일제의 신사참배(神道) 강요정책 선지자 2014.03.26
42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2. 한국에서의 미 정통장로교 선교와 한부선 선지자 2014.03.26
41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21. 한부선의 북장로교 탈퇴와 뉴브룬스윅 노회에의 헌정 선지자 2014.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