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제일교회 세운 아펜젤러

2007.05.15 19:30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중선     번호 : 53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3/06/29 (일) AM 11:24:29     조회 : 78  

■ 선교불모지에 교육으로 복음전파-정동제일교회 세운 아펜젤러

아펜젤러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소서"

1885년 4월5일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 감리교 아펜젤러 목사의 방한 첫 기도다.

그는 18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났다. 한국에 왔을 때는 갓 결혼한 27세의 새신랑이었다. 집안은 원래 장로교이었고 그가 18세때 신앙적으로 결정적 회심을 한 것도 장로교회에서였다. 그러나 대학을 다니면서 여러 신앙유형을 접하게 되고 감리교로 옮겨간다.

27세 새신랑으로 입국

아펜젤러가 평생 선교동역자 장로교의 언더우드를 처음 만난 것은 한국에 오기 두해 전인 83년 하트포트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연맹 집회에서였다. 그리고 이 집회를 계기로 아펜젤러는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된다.

사실 두 사람의 친분관계로 후일 한국에서의 장·감 양 교파 선교구역 분할도 큰 마찰 없이 추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입국 직후 두 사람의 형편은 완전 상반된 것이었다. 언더우드와는 달리 아내를 동반했다는 이유로 아펜젤러는 인천서 일주일을 머무르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지 채 4개월밖에 되지 않아 서울의 정세는 불안하였고 외국인 여성의 입국은 무리라는 미국 대리공사 폴크의 충고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 충고의 이면에는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의 일단이 엿보인다. 미국은 한국의 완전독립을 회교기조로 삼은 까닭에 서양 각국의 한국과의 조약교섭이 종교자유문제에서 걸리곤 하는 상황에서 미국선교사들에게만 특혜를 주어 한국정부를 곤란하게 하고싶지 않았던 것이다(백낙준, 「한국의 개신교사」).

"우리정부(미국)의 대표자들은 우리가 아무 일도 해서는 안된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10년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그들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할까봐 한인들보다 더 염려하 고 있다"

장·감 분할 마찰없이 추진

사실 선교사들도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부응, 적극적인 전도활동에 앞서 의료와 교육사업에 주력하였 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19일에 재 입국한 아펜젤러도 우선 교육사업부터 시작한다. '폴크'를 통해 "고종황제께서는 당신이 한국사람의 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니 대단히 고마운 일이라 말씀하셨다"는 전갈을 들은 아펜젤러는 사람들이 눈빛도 다르고 키도 큰 서양인을 두고 "무슨 동물이 진화되어 그렇게 되었는가 했지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했던" 상황에서도 우선 8월부터 스크랜튼이 소개한 이겸나 고영필 두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학교출신들이 외국공관 통역으로 기용되자 학생들은 점차 늘었고 이듬해 6월 고종은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였으니 오늘날 배재학원의 전신이다.

한옥 구입 '벧엘예배당' 설립

87년부터 보다 적극적인 전도활동을 개시. 부활절에는 한국에서 출생한 첫 외국인인 그의 맏딸 애리스 와 일본대사관 통역관 다카히라 등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이어 배재학당 학생 2명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이 해에 한국감리사로 임명된 그는 선교본부에 학습인 1명, 원입인 1백명, 주일학교 30명, 학교학생 30 명을 보고할 수 있었다. 아직도 종교자유령이 내려지지 않았고 한국인 기독교인은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1866년 이래의 법령이 유효한 때였다.

일찍부터 외국선교사들의 거점이었던 정동에 자리잡은 정동제일교회의 신식 벽돌예배당.

또 정동에 한국 최초의 르네상스식 건물인 벽돌집(지금은 남아있지 않음)을 세워 학교로 사용하였고 인근에 한옥 한 채를 구입하여 교회로 삼았다. '벧엘예배당'에서 10월9일 처음으로 정식예배를 드리니 바로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다. 그의 행적은 서울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회가 출범하기 전인 4∼5월에는 평양을 답사, 선교요충지임을 확인하고 돌아왔고 88년 봄에는 정부의 소환명령으로 중도 포기했지만 언 더우드와 함께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여행에 나서 평생 조선팔도중 6개 도에 걸쳐 7천2백리길을 돌았다고 하니 당시 교통사정등에 미루어 그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전도여행을 통해 소래와 의주 교회 등을 보고는 한국인데 희한한 전도전략을 수립, 정동교인 2명에게 개신교 첫 전도가 증명서를 주니 그 한사람이 나중 정동교회 2대 목사가 된 최병헌이다.

성서번역에도 주력해 87년에는 성서위원회 90년에는 언더우드 등과 협의, 「한국성교서회(기독교서회 전신)」을 창설했디. 현지인 전도사나 현지어 성서번역은 초기 선교사들의 전략적 탁견으로 오늘날 한국의 해외선교사업에서도 유념할 대목이다.

개신교 첫 전도사 배출

한편 아펜젤러는 한국청년운동에도 큰 공을 남겼다. 갑신정변 때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96년)한 서 재필과 손잡고 기독교청년운동을 벌였으며 독립협회 운동도 적극 후원하였다. 97년 정동교회 안에 엡워 드코청년회를 조직했고 99년부터는 언더우드와 함께 YMCA운동을 주도, 1901년에는 배재에 최초로 학생YMCA가 설립되기도 했다.

군산 앞바다서 생애 마감

1902년 성서번역자회 참가차 조사 조한규, 목포출신 정신여학교 학생과 함께 일본상선을 타고 목포로 향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안개로 배가 침몰하여 그의 열정 어린 한국선교 18년의 종막을 고한다. 생환한 미국인 탄광기술자 '보울비'가 '물에 잠기면서도 함께한 비서와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애쓰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증언할 뿐이다.

1남2녀 자녀 모두 뒤를 이어 장남은 배재학교 교장으로, 장녀는 이화학당 교장으로 봉직하다 한국 땅에 묻혔으며 막내 역시 이화학교 교수로 한국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 정동교회에 아펜젤러 기념비가, 89년 배재총동창회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역에 추모비가 세워 졌다. 무지와 억압의 결박을 끊고 이 땅에 진리를 확장시키려는 기도가 섭리사의 요체라면 아첸젤러 또 한 이에 해당한다.

/전인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1.02.23-119 김반석 2019.05.26
20 (한부선) 한부선 선교사 평전 - 서문 file 선지자 2014.03.25
19 (한부선) ● 한부선 선교사 선지자 2014.03.25
18 (존 로스) … … 선지자 2014.03.23
17 (존 로스) … … 선지자 2014.03.23
16 (존 로스) … … 선지자 2014.03.23
15 (존 로스) 죤 로스 선교사 - 한글 성경 최초로 번역 선지자 2014.03.23
14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비문 file 선지자 2014.03.23
13 존 로스 선교사 - 7. 로스목사의 업적 file 선지자 2014.03.23
12 존 로스 선교사 - 6. 마지막 선교활동(1900-1916) 선지자 2014.03.23
11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5. 교회 내에서 영적인 근원들의 심화(1888-1900) 선지자 2014.03.23
10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4. 교회의 건설(1881-1888) file 선지자 2014.03.23
9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3. 첫 번째 안식년(1879-1881) file 선지자 2014.03.23
8 (존 로스) 존 로스 선교사 - 2. 선교활동 초기(1872-1879) file 선지자 2014.03.23
7 (존로스) 존 로스 선교사 - 1. 사상의 형성(1842-1872) 선지자 2014.03.23
6 (존 로스) JOHN ROSS(존 로스) file 선지자 2014.03.23
5 (죤 로스) ● 죤 로스 선교사 선지자 2014.03.23
4 언더우드 선교사 일대기 김반석 2014.02.09
3 Again 1907… 아, 하디 선교사여! 선지자 2007.06.15
» 정동제일교회 세운 아펜젤러 [1] 선지자 2007.05.15
1 새문안교회 세운 언더우드 목사 [1] 선지자 2007.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