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 일대기

2014.02.09 21:03

김반석 조회 수: 추천:

● 언더우드 선교사 일대기
선지자선교회 (Horace Grant Underwood:1859-1916, 57세]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런던에서 6남매중 넷째로 태어났고, 1872년[13세]에 미국으로 아버지와 형과 함께 이민을 갔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26살] 부활절에 제물포 항구에 첫 발을 디딘 후 31년간 그 몸을 불태워 복음을 전하고, 1916년[57세] 과로로 몸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쇠약해져,  미국에 신병 치료차 귀국하셨다가  그해 10월에 돌아가셨다.
  
1. 서론

언더우드 선교사는 26살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한국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로, 그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제부터 그의 생애와 함께, 그가 와서 하나님 말씀과 함께 교회개척· 교육· 의료· 문화· 경제· 건축· 정치· 외교· 모든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그는 1911년[52세] 한국에 처음으로 신구약성경을 완역· 출판하여 배포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에 처음으로 신구약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일을 완수하였다. 1911년[52세] 신구약성경 번역을 완수하고 출판하여 배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와서 말씀과 함께 교회개척· 교육·  의료·  문화·  경제·  건축·  정치·  외교·  모든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차차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한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많으나, 간단히 그의 업적 중 한 가지만 먼저 기록해 본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처음으로 신구약성경을 번역하여 출판하는 일을 완수하였다. 1911년[52세] 신구약성경 번역을 완수하고 출판하여 배포하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그 한 해 전인 1910년, 대한민국은 국호를 빼앗기고 독립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본다. 한국 백성은 세상적인 나라를 빼앗겼으나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이다. 나라를 잃고 서러워하며 상한 심령으로 준비된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의 다스리심이 임하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시면서 그 뜻대로 만유와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신다.

이 기쁘고 복된 소식을 전하러 언더우드는 이 땅에 찾아와 가장 귀한 선물,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였다. 그가 와서 말씀과 함께 교회개척· 교육· 의료· 문화· 경제· 건축· 정치· 외교· 모든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차차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한다.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한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니라

                                                 1.    서론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2008년은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가 한국에 첫 개신교 선교사로 도착한지 123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역사에서, 우리가 그 생애와 업적을 알고 연구하고 기억해야할 인물들 중에 한 사람 택하라고 한다면, 단연코 언더우드를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언더우드는 한국의 복음화와 한국을 현대화하는데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제물포에 발을 디딘 후 31년동안 그의 헌신적 선교사역을 통해 그는 한국에 개신교회를 개척하였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조선인의 마음'이란 언더우드의 기도문을 살펴보겠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그가 개척한 교회와 번역한 신구약성경, 설립한 병원과 대학, 출간한 신문 등은 모두 한국 역사에 처음 있었던 일로, 그의 신실한 선교사역을 통하여 한국은 모든 분야에 현대화가 이루어졌다. 한국의 현대 풍요를 가져온 원동력인 언더우드를 알아야 우리는 미래를 바로 예측할 수 있다. 이 위대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조명하는 것이 가장 그를 포괄적으로 바로 알아가는 길일까?

이 땅에서의 그의 삶 30년을  1.유년시절, 2.청년기, 3.선교 사역기 등의 세 시대로 크게 나누어 살펴보겠다.

2. 유년시절 (1859~1872, 1세~13세)

언더우드 선교사는  1859년 7월 19일 런던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언더우드가 태어났던 1859년에서 그가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가기 위하여 영국을 떠났던 1872년까지,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로 세계가 영국 깃발로 덮일 때였다. 영국 전성기에 런던에서 자랐던 그의 가문의 신앙과 가계, 가업, 교회활동, 유아기 신앙교육, 그에게 신앙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다.

  그의 아버지, John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의 친구로는, 고아의 아버지요, 세계선교 후원자로 유명한 기도의 용사 죠지 뮬러, 노예해방을 가져온 윌버포스등 당대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부친 John은 잉크를 발명하여, 빅토리아여왕의 남편 알버트공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던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누렸던 사업가였다.

  신앙이 독실한 가정에서 자라났던 언더우드는, 4세 때 이미 선교사로 나갈 것을 결심하였다. 그가 일찍 세계선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외증조부 와우(Alexander Waugh) 목사님의 영향이 컸다 .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늘 세계를 바라보던 언더우드가 자라나던 당시의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전성기로 세계를 다스리던 영국에서, 어린 언더우드는 그 세계를 마음에 품고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큰 시야를 가지면서 자랄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를 6세 때 여의고, 10세 때 언더우드는 그의 형 프레드와 함께 불란서 기숙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 죤의 사업이 부도나게 되자, 언더우드는 불란서 기숙학교라는 귀족적 분위기로부터 혹독한 가난의 연단을 그 후 10여년간 받게 되었다.

                                               불란서 기숙학교에서의 경건 생활

  그의 부인이 쓴 전기 (L.H. 언더우드지음. 이 만열 옮김. 언더우드: 한국에 온 첫 선교사.  기독교문사. 1993) 에 나오는 언더우드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언더우드가 그렇게 성경말씀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볼 수 있는 한 면이 있다.

  언더우드에게는 프레드라는 형이 있었다.  그는 언더우드와 같이 불란서 기숙학교에 갔을 때,  친구들이 모두 그냥 잠을 자는데, 언더우드와 둘이서 저녁기도를 하고, 주기도문을 외운 후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처음에 이런 낯선 행동을 보던 불란서기숙학교 학생들은 그들을 비웃고 야유했으나, 차차 그들의 진실함과 친절함에 오히려 친구들이 감동하여 그들의 저녁기도를 따라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얼마 후 프레드형은 몸이 약해져서 임종이 가까워 오게 되었다. 그 때 그는 동생 언더우드에게 내가 중요한 소원이 있는데 들어달라고 말했다.  그것은 바로 시편 119편을 언더우드가 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언더우드는 그 긴 시편을 임종하는 형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또 형을 살릴 수 있을까하는 소망으로 형 앞에서 다 외워 형을 기쁘게 하였다.  이 두가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더우드 가문의 경건한 자녀교육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부모와 자녀들이 주일을 성수하고, 교회에 갔다와서 오후는 말씀 묵상으로 경건하게 보내고, 늘 말씀가운데 살았던 열매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언더우드의 아버지 죤은 그의 동업자가 사기를 쳐서 부도가 나자, 그의 아버지는 이 일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과 분을 품지 말자고 가족들을 독려하고는, 새로 살 길을 찾아 1872년 13살 때 언더우드의 전 가족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그의 어머니를 여섯 살 때 잃는 슬픔을 겪었는데, 이제 13살의 어린 나이에 또다시 혹독한 가난의 시련에 봉착한 것이었다.

   3. 청년기 (1872~1885, 13세~26세)

  13세의 언더우드가 미국에 이민갔던 1872년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막 끝나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당시 미국은 남북한의 찢어진 상처들을 치유하는데  D.L. 무디의 부흥운동이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전역에서 부흥회를 이끌어, 청년들을 복음신앙으로 이끌었고, 또 YMCA운동을 통해서 경건한 미국청년문화를 선도하고 잇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고, 선교지로 향하여 달려 나가게 되었고, 미국에는 제 2 각성의 여파로 성령의 크신 은혜가 전국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한편 언더우드 가족의 미국 이민생활은 한마디로 바닥생활이었다.  농장일에 익숙지 않은 아버지와 형이 노동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동안, 언더우드만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뉴저지 덜함의 회중교회에 언더우드 가정은 등록교인으로 다니고 있었는데, 이 교회의 맥번 목사님으로부터 언더우드는 무료로 헬라어와 라틴어를 배우며, 대학 예비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가 1876년 뉴욕대학에 입학하고도 점심을 굶으며 허기진 배로 수 십 킬로를 걸어 통학하며 공부하던 중, 대학 2학년 되던 20세에 그의 아버지 죤이 세상을 떠났다.

이런 큰 슬픔을 겪으면서도 언더우드는 뉴욕대학을 졸업할 때 우등생으로 답사를 하였지만, 그가 1880년 뉴 브른슨  신학교를 가게 되었던 것도, 그 화란개혁신학교가 등록금과 기숙사비 일체를 무료로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름방학동안에는 책외판원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뉴브른슨 신학교(화란개혁신학교)에서의 대학생활 동안에는 그 도시에서 열렸던 부흥회와 구세군 행사등, 은혜로운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고, 얼마 후부터 설교자로 여러 교회에 초빙되기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신학공부를 하면서 인도에 선교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고 그 곳 선교에 필요한 간단한 의료기술도 공부하였다. 그러던 중, 한 번은 당시 뜨겁게 모이던 신학생 선교대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만주의 죤 로스가 보낸 한국선교에 대한 부르심을 듣게 되었다. 1,200만명의 한국백성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데, 이제 막 미국 등 외국에 문을 열어 은둔국가의 이미지를 고치게 된 한국에 갈 교사가 없느냐고 간절히 애타게 부르는 도전을 듣게 된 것이다.  이 부르심에 감동하여, 언더우드는 신학교로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한국에 꼭 선교사로 나가라고 간곡히 부탁하기 시작하였다.  친구들 속에 한국에 갈 선교사를 한 명도 찾지 못하자, 그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안타까움을 절실히 느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가까운 교회에서 그는 목회자로 초대를 받아 선교지에 가기까지 임시로 시무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동시에, 자신이 인도가 아니라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는 뉴욕의 장로교 선교부 본부로 가서 자신을 한국에 선교사로 보내주기를 부탁했다.

  예상 밖으로, 당시 뉴욕 장로회 선교본부에는 한국 선교헌금이 전무하였다.  한국은 세계에 당시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망과 좌절을 느끼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4. 선교 사역기 (26세~56세)

(1) 한국 개신교 첫 선교사역 (1885~1895, 26세~36세)

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했으나, 선교헌금이 없어 못 떠나고 있던 언더우드는 어느날, 미국 동부의 교회에 목회자로 초빙을 받게 되었다.  그에게는 한국선교의 길은 열리지 않고 미국에서 목회하는 길만 열린 듯 보였다.  

그는 한국선교의 문이 열리기까지 초빙한 교회에 가기 위하여 취임승락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막 넣으려던 찰라였다. 아주 조용한 음성으로 그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물으셨다.  "한국은 어떻게 하려느나?“하고 말이다.  그 세미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언더우드는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부르셨다는 그 확신을 떠올리면서, 편지를 우편함에 넣는 대신, 곧장 장로교선교회본부로 발을 옮겼다.  

선교회본부에 들어갔을 때, 그를 맞이한 사람은 지금 막 새로 부임한 선교회총무 엘링우드였다.  언더우드는 새 총무에게 다시 질문했다.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 기금이 들어온 것이 있느냐고 말이다.  바로 그 때, 엘링우드총무는 기뻐하면서 며칠 전, 한국선교에 써달라고 5,000불이 도착해 있어, 선교회의 이사회를 통해서 언더우드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이 안이 통과되면 바로 한국선교사로 나가게 될 것이라면서 축하해 주었다.  그의 말 그대로,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는 한국에 파송될 선교사로 임명받고,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한국에 가기 위해 일본으로 가는 배에 승선했을 때, 그 배에는 아펜젤러 (Apenzeller)가 신혼의 신부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승선해 있었다.

   1884년 일본에 도착했을 때, 언더우드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고 나서 그리스도인이 된 이 수정을 만나, 그에게서 일본에 머문 3개월동안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번역판으로 나온 마가복음서를 입수하게 되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제물포항에 도착

1885년 4월 5일 부활절날 제물포항에 드디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가 도착하였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조선인의 마음'이란 언더우드의 기도문을 살펴보겠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

그러나 당시 미국 공사였던 푸트 (Foote)는 한국의 정세가 너무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임신중이던 아펜젤러 부인의 입국을 반대했다.  그래서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가고, 언더우드만 입국하여 서울로 향했다.

   당시 한국에는 알렌 (Allen)이 외국인들을 상대로 의료행위를 하고 있을 뿐, 한국사람들을 위한 선교사는 한 명도 아직 없었다.  미국 공사 푸트는 갑신정변 직후 개화파가 쫓겨나고, 수구파가 조정을 장악한 상황에서 더 경직된 한국상황을 감안해서 미국인들이 일절 선교하는 것을 못하도록 시달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등 개화파의 칼에 맞아 죽음에 이르렀던 민영익을 알렌이 치료하여 살려줌으로 그는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선교의 문을 여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한편 아펜젤러는 감리교 첫 선교사로, 정동교회를 개척하고 배재학당을 세웠다.  또 그를 뒤이어 한국땅을 밟은 스크랜튼(Scranton)은 현재 동대문에 병원 (이화여대 부속병원 전신)을 세우고, 그와 함께 한국에 선교를 위해 왔던 그의 어머니 스크랜튼은 고아 한명을 데려다가 가르침으로 이화학당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현재 이화여중고, 예원, 이화여대의 전신이다.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푸트공사의 관찰과 달리, 한국사회가 복음전도에 열렸고, 무르익었고, 또 열정적으로 복음신앙에 반응함을 보고, 한 시라도 놓칠새라 초를 다투면서 노방전도, 일대일전도, 내륙지방 방문전도등 과감한 전도사역을 펼쳐 나갔다.

  이렇게 담대하고 용감한 언더우드의 사역은 사사건건 알렌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선배로서 알렌은 아직 한국의 선교는 외국인들 속에서만 해야한다는 그의 말에 언더우드가 따라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알렌과의 갈등이 너무 심해지자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장로교선교사로서 사임의사를 표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 갈등은 알렌이 고종의 특명을 받고 미국공사로 발령되어 그가 한국을 떠남으로 일단락이 지어졌다 (김 인수교수편저, 언더우드목사의 선교편지, 1885-1916. 장로회 신학대학 출판부, 2002).

  심한 갈등으로 고통하던 언더우드가 한숨을 돌리게 되었을 때, 알렌 후임으로 부임한 헤론(Heron)을 언더우드는 맞이하게 되었다.  헤론은 의료선교사였던 알렌과 같이 선교회의 기획, 예산 모든 것을 단독으로 시종일관 처리해 나가려고 하였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적 환경에서 자랐고, 또 개척선교사로서의 여러 가지 교육, 교회건축, 성경번역등 수많은 계획을 이행하고 있었던 언더우드에게 매우 받으들이기에 힘든 상황이었다.

  언더우드는 헤론의 독단적 의사결정에 반대하여 번번히 맞섰고, 또 본부에 이렇게 갈등이 심하니까 해결책을 제시해달라고 누차 편지로 알렸다.  전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 문제상황에서, 헤론이 질병으로 사역 중 소천하게 되었다.  막상 헤론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언더우드는 그의 장례 및 장지까지 다 마련하여 동료선교사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는 성의를 보였다.  특히 서울에는 장지를 주지 않으려는 정부에 계속 탄원하여, 마침내 양화진을 선교사묘역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고아원 시작

   독신으로 첫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언더우드에게 처음 주어진 과제 한 가지는 어린 고아 김 규식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 어린 아이는 양반의 자제이나, 정쟁으로 아버지가 강원도로 귀양가자 친척들이 궁핍하여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혼자 벽지를 뜰어 먹으며 굶어죽어가던 중 언더우드가 발견하게 되었다.  이 어린아이를 살리고자 그는 고아원을 시작하였고, 이 고아원이 점차 자라서 경신학원으로 발전하였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사랑받는 수제자로 자라서, 미국 유학 후에 언더우드를 도와서 교회개척, 교육사업에 힘썼고 그는 해방 후 이 승만대통령과 함께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크게 노력한 대표적 학자요, 정치가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첫 세례를 준 것과  릴리아스 홀튼(Lilias Horton)과의 결혼이었다.  8세연상이었던 호톤은 민비의 시의로 파견되었던 의료선교사였다.  그들은 신혼여행으로 이북지역을 3개월간 다니며 내륙지방 전도를 단행했다.  그 기간의 모험과 도적떼를 만났던 일, 그리고 가는 곳마다 복음에 열려 있어 많은 전도의 수확을 거둔일, 또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서 세례를 베푼 일등은 그 부인이 쓴 전기에 자세하고 흥미롭게 나온다.  언더우드는 부지런하게 열심히 선교에 임하여, 1885년부터 90년이 되기 전에 이미 새문안교회와 경신학원을 설립했고, 성경번역에 착수하였다.

                                  에비슨 (Oliver R. Avison) 의료선교사 내한

그 후 1889년 부인  릴리아서와 막 태어난 아들 원 한경과 함께 언더우드는 안식년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를 초청하는 교회마다 가서, 그는 한국선교를 위한 일군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던 중, 카나다 토론토를 방문하여, 언더우드가 선교보고를 나누게 되었을 때, 토론토대학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 (Oliver R. Avison) 박사가 크게 감명을 받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나갈 의사를 밝혔다.  

애비슨박사의 결정에 그 부인은 기쁘게 동의하였고,  곧 세 자녀와 만삭된 아내와 함께 벵쿠버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넷째 아기를 출산하였다. 에비슨을 파송한 선교단체는 토론토 기독절제학생회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금주서약을 한 독실한 학생들의 모임으로, 이 선교단체는 후에 하디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에비슨박사는 서울에 올라오자 말자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마침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말자, 그는 밤낮으로 수고하여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한국 조정에서는, "서양사람들에게 가면 살 수 있다"는 벽보를 붙였다.  서울에서 시체가 줄을 이어 나가고, 가족들이나 친척들까지도 아픈 사람에게 가까이 하면 병에 전염될까봐 무서워했고, 심지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도 많이 거리에 갖다 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아직 숨을 쉬는 자들을 구하여 내어 병을 고쳐주고, 전도를 하는 가운데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고종과 민비와의 교제이다.  부인 릴리아스 호톤이 민비의 시의로 섬기던 중 결혼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고종과 민비는 언더우드를 친구와 같이 여기게 되었다.  고종은 언더우드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고, 민비는 언더우드선교사의 교육에 대한 구상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당시 조정의 모든 대신들 자녀들을 교육시킬 육영사업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시작하도록 권하고 그 기금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1895년 고종 32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서 민비가 일제의 칼에 시해됨으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종은 이 사건으로 너무도 큰 두려움에 잡혀, 언더우드선교사와 에비슨선교사가 매일밤 그의 옆에 있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언더우드선교사는 고종에 대하여 신실한 친구로 가장 어려울 때 옆에서 그를 지켜 주었다.  동시에 그는 정교분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켜 나갔다.  

                                  정교분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킴  

고종이 자기와 대신들이 모두 세례를 받겠으니 미국 군대를 불러서 일본을 무찔러 달라고 부탁했을 때, 언더우드선교사는 자기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러 온 사람이므로, 국제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음을 밝혀 성경에 나온 정교분리정신을 한국의 조정에 보여주었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에 힘을 입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을 때도 언더우드선교사는 그 일에 관여치 않았다.  갑신정변 (1884) 직후 그가 한국에 왔고, 그 후 동학란과 갑오경장 (1895), 노일전쟁, 을사보호조약 (1904)등으로 한국의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한복판에서, 언더우드선교사는 항상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오직 한 가지 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그 일에만 전념해 나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바로 설 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모든 것은 따라올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 6:33).

이와 같은 언더우드선교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 권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교회는정치를 간섭해서 안되고, 정치는 교회를 간섭해서 안된다는 성경에 입각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바로 인식하고 실천한 것이었다.

                                       교회 설립에 3자법칙 엄격적용

한편 언더우드는 한국에 첫교회인 현재 새문안교회를 1887년 만주선교사 죤 로스목사님을 모시고 첫 예배를 드리며 세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두 명의 장로를 세움으로 시작하였다.    3자법칙에 의거하여 미국에서 한국의 교회건축비를 대주는 일을 언더우드는 금하였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교회건축을 위해 헌금하고 저축하며, 각자 힘닫는대로 건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교회건축에 드는 돈이 당시 교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 심히 어려워하였다.  바로 이 때, 전념병 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새문안교회 교인들에게 당시 고종왕이 상금을 하사하게 되었다.  이 상금으로 교회건축은 그 결과 신속하게 완성되었고, 서울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져 입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해서 한국 교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나가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력전도와 교회의 자치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2) 언더우드선교사의 사역 확장기 (1896-1906,37세~47세)

두 번째 선교사역기는 선교확장기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언더우드는 성경번역을 계속하면서, 교회개척, 사경회, 주일학교대회, 선교사훈련, 선교지 분할, 찬송가출판, 신문발행, 미션학교 증가, 선교법칙으로 3자 법칙 실시, 유럽과 미국 방문, 선교보고를 통해 한국선교에 모든 교파와 각 나라 교회가 동참하여 큰 선교단이 한국에 일하게 하면서, 선교회 대표로 연합사업에 힘씀.

  언더우드선교사는 이 시기에 성경번역에 더욱 힘썼다. 이는 만주에서 죤 로스선교사님이 번역하여 1881년부터 1888년까지 (?) 출판했던 신약성경이 당시 조선 북부지방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서북사투리가 너무 심하여 서울에서 표준성경으로 쓰이는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일본에 머물동안 (1885년 1-4월 월?) 그는 갑신정변의 불발로 일본에 피신해 있던 이 수정으로부터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다.  이 수정은 당시 최고의 지성인으로 일본에서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자 곧 성경번역에 힘써, 마가복음 번역을 완수하고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인 번역본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전도와 교회개척에 귀하게 쓰였다.  그럼에도 신구약성경 전체의 번역은 언더우드선교사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아펜셀러와 언더우드는 서로 연합사업에 힘썼는데, 특히 성경번역에 함께 힘을 합했다.  성경번역을 위해 배로 목포를 향하여 오던 중, 아펜셀라가 타고 있던 배가 뒤집히게 되었다.  어린 소녀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 소녀를 살려낸 후 아펜셀러선교사는 급류에 휘말려 익사하였다.  진정,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말씀을 살아서도 죽을 때에도 실천함으로써, 그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선교사의 영원한 귀감이 되었다.  성경번역사업은 아펜셀러 사후에 레이놀즈등 선교사의 협력으로 계속되어다.  

이 시기에 또 하나 기억될 일은 옥중의 이승만을 전도한 아펜젤러를 도와 이승만구명운동에 언더우드가 매우 힘썼다는 사실이다.  언더우드는 이 승만을 출옥하도록 돕기 위하여 고종과 기타 조정의 인물들에게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 승만은 5년 6개월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1904년 출옥하였다.

   청년 이승만

여기서 잠시 유영익박사가 쓴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학교 출판부) 필독을 권한다.  청년 이승만은 이씨조선 왕가 후예로 어릴적부터 천재성이 뛰어나 모든 한학을 10세 이전에 이미 통달하고, ?세에 영어를 배울 목적으로 아펜젤러가 세운 감리교 선교회의 배재학당에 들어가 뛰어난 재능이 인정되어 재학 중 영어 조교로 활동하였다. 이승만은 자신이 왕가후손이었음에도 고종의 무능함을 한탄하며, 강화도령 철종을 왕으로 모시고 박영효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왕조를 세우기로 당시 개혁세력들과 합의했다.  

그러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이승만은 1898년 투옥되었고, 무기수로 투옥되었다. 옥중에 있을 동안, 이승만은 아펜젤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되자 ?서양의 신이라고 배척했던 예수가 자기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자, 어둡던 감옥에 밝은 빛이 비취었고, 감옥은 복당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후 감옥에서 이상재등 당시 양반층 젊은이들을 중심한 동료 죄수들 40명을 전도했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선교사님들이 차입해 준 미국 대학과 대학원의 많은 분량의 책을 읽었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글 중에는,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가 설립의 중요성에 대한 논고, 신문출판을 통한 국민계몽의 중요성에 대한 글, 미국의 민주적 교육행정이 나라 발전에 끼치는 지대한 공헌에 대한 연구등이 있다.  특히 마지막 교육에 대한 글은 방대한 자료를 모은 것으로, 하바드대학의 시작과 발전에 대하여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쓰고 있다.  

이승만은 출옥 후, 고종의 밀사로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호소하는 밀서를 가지고 테오도르 루스벨트대통령에게 전하고자 떠났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워싱턴 죠지 타운 대학 학사 (1907), 하바드대학원 석사 (1908), 프린스턴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1910)을 단시간에 마치는 천재성을 보였다.

1910년 가을 그가 귀국할 때는 한국은 국가 정체성을 잃어 버린 뒤였다.  그는 YMCA 총무로 청년들을 규합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썼으나, 1902년 일본총독부가 조작한 ?105인사건“에 연루자로 지목되자, 이 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국제적 역할을 위해 1902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그 후, 그는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외교노력을 경주했고, 하와이와 미국본토,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를 오가며 한국사람들을 규합하는 노력을 1945년까지 계속하였다.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국가가 수립되고 현재까지 발전하는데는 이 승만이 놓은 청사진이 매우 중요하다.  장기집권과 하야라는 정권말기의 오점으로,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너무 과장된 면이 적지 않다.  

선교사의 헌신적 전도와 후원 아래 이승만은 그리스도를 믿고, 한국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일념으로 평생을 살았다.  인간을 존중하는 민주적 국가의 선명한 청사진을 가지고 평생 이승만이 달려가도록 만든데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같은 헌신적 선교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음을 후대들은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언더우드선교사의 선교 완숙기 (1907-1916, 47세~56세)

  언더우드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1911년에 있었던 신구약성경 번역완수 및 출판이다. 성경번역과 그 뒤를 이은 성경출판과 반포는 한국 역사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나라를 잃은 이 땅에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보내사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새 역사를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새 나라에 대한 밝은 비젼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어떤 환란이나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더욱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정책으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핍박을 당했다. 그러나 이 기풍, 주 기철, 손 양원등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바치면서 오히려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 갔다.  하나님께서 선교 50년된 한국교회에 이렇게 불 같은 연단을 허락하심은 교회를 정결케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마침내 이 땅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다스리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젼으로 견고하게 서가게 되었다.  한글 성경을 가지고 교회마다 열렸던 사경해는 이 땅에 교회가 부흥하는데 큰 밑걸음이 되었다.

                                      교회 설립에 3자법칙 엄격적용

한편 언더우드는 한국에 첫 교회인 현재 새문안교회를 1887년 만주선교사 죤 로스목사님을 모시고 첫 예배를 드리며 세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두 명의 장로를 세움으로 시작하였다.    3자법칙에 의거하여 미국에서 한국의 교회건축비를 대주는 일을 언더우드는 금하였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교회건축을 위해 헌금하고 저축하며, 각자 힘닫는대로 건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교회건축에 드는 돈이 당시 교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벅차 심히 어려워하였다.  바로 이 때, 전념병 퇴치에 기여한 공로로 새문안교회 교인들에게 당시 고종왕이 상금을 하사하게 되었다.  이 상금으로 교회건축은 그 결과 신속하게 완성되었고, 서울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져 입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통해서 한국 교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나가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력전도와 교회의 자치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정교분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킴

고종이 자기와 대신들이 모두 세례를 받겠으니 미국 군대를 불러서 일본을 무찔러 달라고 부탁했을 때, 언더우드선교사는 자기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러 온 사람이므로, 국제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음을 밝혀 성경에 나온 정교분리정신을 한국의 조정에 보여주었다.

아관 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에 힘을 입어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을 때도 언더우드선교사는 그 일에 관여치 않았다.  갑신정변 (1884) 직후 그가 한국에 왔고, 그 후 동학란과 갑오경장 (1895), 노일전쟁, 을사보호조약 (1904)등으로 한국의 국내외 정세가 급변하던 한복판에서, 언더우드선교사는 항상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정치와 거리를 두고, 오직 한 가지 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그 일에만 전념해 나갔다. 이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바로 설 때,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모든 것은 따라올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태 6:33).  

이와 같은 언더우드선교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 제 4권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성경의 가르침을 좇아서, 교회는정치를 간섭해서 안되고, 정치는 교회를 간섭해서 안된다는 성경에 입각한 정교분리의 원칙을 바로 인식하고 실천한 것이었다.

                                  에비슨 (Oliver R. Avison) 의료선교사 내한

그 후 1889년 부인  릴리아서와 막 태어난 아들 원한경과 함께 언더우드는 안식년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를 초청하는 교회마다 가서, 그는 한국선교를 위한 일꾼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던 중, 카나다 토론토를 방문하여, 언더우드가 선교보고를 나누게 되었을 때, 토론토대학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 (Oliver R. Avison) 박사가 크게 감명을 받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나갈 의사를 밝혔다.  

애비슨박사의 결정에 그 부인은 기쁘게 동의하였고,  곧 세 자녀와 만삭된 아내와 함께 벵쿠버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넷째 아기를 출산하였다. 에비슨을 파송한 선교단체는 토론토 기독절제학생회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금주서약을 한 독실한 학생들의 모임으로, 이 선교단체는 후에 하디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에비슨박사는 서울에 올라오자 말자  진료소를 개설하였는데, 마침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말자, 그는 밤낮으로 수고하여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한국 조정에서는, "서양사람들에게 가면 살 수 있다"는 벽보를 붙였다.  서울에서 시체가 줄을 이어 나가고, 가족들이나 친척들까지도 아픈 사람에게 가까이 하면 병에 전염될까봐 무서워했고, 심지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사람도 많이 거리에 갖다 버리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중에 아직 숨을 쉬는 자들을 구하여 내어 병을 고쳐주고, 전도를 하는 가운데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바로 고종과 민비와의 교제이다.  부인 릴리아스 호톤이 민비의 시의로 섬기던 중 결혼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고종과 민비는 언더우드를 친구와 같이 여기게 되었다.  고종은 언더우드선교사를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되었고, 민비는 언더우드선교사의 교육에 대한 구상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당시 조정의 모든 대신들 자녀들을 교육시킬 육영사업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시작하도록 권하고 그 기금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1895년 고종 32년에 을미사변이 일어나서 민비가 일제의 칼에 시해됨으로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종은 이 사건으로 너무도 큰 두려움에 잡혀, 언더우드선교사와 에비슨선교사가 매일밤 그의 옆에 있어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언더우드선교사는 고종에 대하여 신실한 친구로 가장 어려울 때 옆에서 그를 지켜 주었다.  동시에 그는 정교분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지켜 나갔다.                    

                       이기풍목사를 첫 해외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

1907년에 언더우드와 사무엘 마펫은 장로교 평양신학교가 배출한 첫 7명의 목사 중 한 명이었던 이기풍목사를 첫 해외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하였다.  한국교회는 시작부터 선교를 중요한 사역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언더우드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자들을 말씀과 교회개척으로 잘 훈련한 결과였다.

                             끈길진 대학교 설립의 필요성 요청으로 대학교 설립

언더우드는 제물포에 도착한 그때부터 이미, 한국에 대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일군으로 만들어 세계로 내어보내야 한다는 비젼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 선교하면서 그 중요성을 확신하였다.

한편 서울에 대학교 설립을 제안한 언더우드에 대하여, 평양주재 선교사들과 대다수의 당시 주한 선교사들은 반대했다.  이유인즉 한국과 같은 작은 나라에 대학교가 하나 이상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언더우드는  대부분의 선교사들 주장을, 본부에 보내는 편지에서 조목조목 반박하였다.  평양주재 선교사들과 뉴욕 선교본부는 그의 말에 수긍할 기미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언더우드는 그의 확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수년간 지속적으로 편지나 회의를 통해서, 그리고 여러 가지 자료를 준비하여 서울에 대학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동료선교사들과 미국 뉴욕 장로회 선교회 본부에 인식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수년간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침내 선교부가 서울에도 대학을 허락하겠다고 1914년 승락하여 총독부에 대학 허가 신청서를 내고, 공식적으로 인준받아서 1915년 처음으로 종로 2가 당시 YMCA 건물 이층에서 연희전문학교가 시작되었다.  

                                        대학교 설립 과정의 과로로 소천

그의 부인은 전기에서, 또 그 아들 원한경박사는 언더우드의 장례식 후 장로교 본부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언더우드가 질병으로 심하게 앓게 된 데는 대학설립허가를 둘러싸고 그가 장기간 논쟁과 설득작업을 하면서, 심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언더우드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인허가 받는 과정에서 선교사들과 선교본부로부터 적지 않은 오해와 비방을 감수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언더우드가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는 일을 뚫고 나가는데 어떤 방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과 용기, 그리고 불굴의 의지가 있었음을 또한 잘 보여준다.  만약 그 때 언더우드가 연희전문을 포기하였다면, 한국이 오늘 도달한 세계적 수준의 기독교 선교 및 기독교 교육, 의료, 문화, 정치, 사회복지 등등 모든 분야의 발전이  가능했을까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에 죽도록 충성

언더우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뜻을 보이셨을 때, 믿고 순종하며 실천하면서 어떤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지나친 과로로 언더우드는 1916년 4월 미국으로 귀국한 후, 6개월 뒤인 10월에 소천하였다.  그가 그렇게도 돌아오기를 원했던 한국에 그가 다시 온 것은 1999년 5월 20일로, 그가 양화진에 묻힌 그의 아내와 아들 내외 옆에 다시 이장하게 된 때로, 그가 소천한지 84여년 후의 일이 되었다.  

  언더우드의 가문은 지난 121년동안 연세대학교를 헌신적으로 섬겨서, 학교의 주요한 역사적 건물을 보면 언더우드가문에서 보내온 헌금을 기초한 것이 많이 있다.  이는 언더우드의 형, 죤 언더우드가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발명 제작 판매하여, 당시 가장 성공한 실업가로 갑부가 된 데도 이유가 있다.  그 형은 동생의 사역을 돕기 위하여 물심양면 노력하였고, 연세대학교 첫 부지 30만평을 사도록 기꺼이 헌금하였다.  

                                                   5.  결     론

  2008년은 언더우드가 한국땅을 밟은지 꼭 123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한국교회와 연세대학교는 언더우드의 뜻깊은 업적을 어떻게 기리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언더우드가 번역한  성경에 의해 발달한 한국이기에, 그의 공헌을 기억하는 사업 중 하나로 아직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는 나라나 부족들을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도와나가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선교의 미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하여 우리는 결론적으로 언더우드의 업적을 요약해 보고, 그 선교의 의미, 그리고 특징, 교회사에 나타난 위인들의 공통점을 살펴 보면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아 보자.

                                                         1)    언더우드 업적 요약

결론적으로 언더우드의 업적을 몇 가지 정리해 본다.

1. 성경번역, 출판 및 배포이다. 언더우드는 처음으로 한국어 성경번역을 완수하고 출판하여 배포함으로 이 땅에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였다.  1885년부터 1911년까지 걸렸던 성서번역이 완수되어 출판 반포된 것이다. 성경번역은 한국역사에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진리의 복음으로 가르침 받음으로 교회가 부흥하는 기틀을 놓았다.  또 문맹퇴치에 성경번역이 크게 기여하여, 미래 한국이 모든 부문에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놓았다.

2. 교회 개척이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첫교회 새문안교회를 세운 것을 필두로 전국에 교회를 개척하였다. 교회가 개척되는 곳마다 미신은 물러가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놓임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복음을 전파함으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고, 공의와 사랑이 다스리시는 새하늘과 새 땅이 임했다.  교회의 부흥은 자유민주주의사회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3. 3자(三自) 법칙이다.  자치, 자력전도, 자립 (self-government, self-preaching, and self-support)을 한국교회 개척에 적용했다.  언더우드는 이 법칙을 처음 만들었던 네비우스선교사를 한국에 선교사연합회에 강사로 초빙하여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 방법의 적절한 사용이 가져올 긍정적 결과를 확신하였다.   한국교회는 언더우드의 철두철미한 3자법칙 적용으로, 일본, 중국과 같이 훨씬 역사가 오래 된 교회보다도 더 빨리 자립하여, 교회성장과 세계선교에 있어서 2,000년 교회사에 가장 주목할 성장과 헌신을 나타내게 되었다.

4. 교육사업이다. 그는 일찍 한국에 첫발을 디딜 때부터 대학설립의 비젼을 받았고, 서울에 대학이 꼭 필요하다는 주장을 선교생활을 통해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그의 생각을 반대하던 당시 본부와 주한 선교부와 5년간의 긴 논쟁에서 조금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자기 주장을 관철하여, 마침내 연세대학 설립을 선교부로부터 받았다.  그는 또한 선교사 자녀교육을 위해 1912년 Seoul Foreign School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기독교학교로 미국 밖의 가장 훌륭한 교육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언더우드가 1916년 세운 대학의 첫 이름은 조선기독대학 (Chosen Christian College)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연희전문학교, 경기전문학교로 명칭이 바꼈다가 6.25 후 세브란스와 합하여 연세대학교로 명명되었다. 언더우드의 뒤를 이어 한국을 찾아온 모든 개신교선교사들은 전국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고 평양에 대학교를 세워 한국에 현대교육의 틀을 마련하였다.

5. 의료선교이다.  에비슨 선교사는 한국에서 의료선교의 깃발을 높이 들어,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을 창설하여 한국 현대 의학의 효시가 되었다.  그를 본받아 뒤이어 찾아온 의료선교사들은 평양, 대구, 부산, 광주등, 주요 도시마다 선교병원과 의과대학을 세워 한국 현대의료발전과 한국교회 의료선교의 틀을 놓았다.

6. 출판사업이다. 언더우드가 처음으로 한국에 시작한 출판은 영한사전, 한영사전, 각종 기독서적 번역 및 출판, 그리고 찬송가, 신문간행이었다.  또한 각종 중고등, 대학교, 의과대학의 교과서를 번역출판했다.  언더우드를 뒤이어 한국교회는 출판사업에 주력하여 현대의 큰 발전을 이루었다.

7. 기독교 가정생활이다. 그의 결혼생활은 부인의 증거를 통해 보여주듯 친절과 사랑, 신의와 성실로 점철되고 있다. 그의 아들 원 한경, 손자 원 일한, 증손자 원 한광, 4대가 한국교회와 연세대학교를 섬기면서 본을 보였다.  또한 언더우드는 첫 서양식 건축물로 자기 집을 손수 지어서, 위생적 중앙난방, 입식 부엌, 양식 화장실등을 만들고 늘 각종모임을 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위생적 가정환경을 계몽하였다. 이로써 언더우드는 현대 건축울 한국에 소개하는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특히 절제운동에 힘썼던 에비슨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부터 술과 담배를 정책적으로 금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가정 생활을 성결하게 할 수 있는 귀한 틀을 마련했다.

                               2) 언더우드 선교사의 네 가지 성격적 특징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젼에 기초한 국제적 세계관

    언더우드선교사의 성격에 나타나는 첫번째 특징은 그의 세계관이 매우 글로벌하다는 것이다.  한국을 선교하면서, 그의 시선은 항상 중국, 아시아,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는 그가 안식년에 귀국할 때 미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중국과 홍해를 거쳐 유럽을 거쳐 가는데서 잘 나타난다.  처음 한국에 선교하러 올 때에도 영국에 가서 친척들과 만나서 인사를 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다.  

    그가 이렇게 세계를 품에 품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자라난 빅토리아여왕 치하의 시대적 배경에 있다.  빅토리아여왕은 영국역사에서 가장 나라가 번성했던 시대를 다스렸다.  1800년대 영국은 세계를 석권하는 대영제국으로 그 국기에 해가 지는 날이 없었다.  인도, 카나다, 오스트렐리아, 남아프리카, 중국, 아프리카, 남미등의 요지마다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풍요로움 가운데 중국에는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으로 영국은 오명을 남겼고, 1차대전 이후, 그 모든 속국은 차차 독립을 시작하여, 2차대전 후 모든 속국은 다 독립하게 되었다.  

   언더우드가 런던에서 자라던 그 시기는 바로 빅토리아여왕의 전성기로, 그 시대에 온 세계는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국의 지도층이 이렇게 온 세계를 지배함으로 인하여, 영국 국민에게 세계는 바로 그들의 무대였다. 이렇게 세계를 조명하는 관점을 언더우드선교사에게서도 찾을 수 있음은 그가 1859년에 태어나서 1872년 13세에 미국으로 이민갈 때까지 그는 바로 빅토리아여왕시대 세계의 중심지인 런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가 Royal Asiatic Society 한국지부를 만들고 국제사회에 한국학의 최초의 좋은 논문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한 것도 국제적인 그의 세계관에 기초한 학문적 성과였다.

    한편, 국내에서 정치적으로 언더우드는 분명하게 정교분리의 성경적 입장을 고수하였다. 고종황제와 신실한 친구관계를 유지했으나, 고종황제가 자신이 세례를 받겠으니 미국 협조를 구해달라고 제안을 했을 때, 언더우드는 그 제안을 거절하며 정교분리의 원칙을 고수하였다. 동시에 언더우드와 그의 부인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일제침략의 어려움으로 혼돈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끝까지 가장 신실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갑오경장, 동학란, 을사보호조약, 한일합병의 정치적 혼란가운데 시종 언더우드는 한국을 사랑하며 신실한 사랑으로 한국 조정과 사회지도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본이 되었다.

    언더우드가 가졌던 국제적 세계관은 역사적 환경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이해, 곧 성경적 세계관에서 왔다 (계시록 11:15). 그리스도께서 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바라며 그 나라가 임하도록 모든 열심을 다해 섬긴 것이다.  곧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한 것을 알고 믿으며 그 나라가 확장되도록 생명을 다 바쳐 충성한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르심: 교회연합 정신

    언더우드의 두번째 성격적 특징은 교회연합 정신이다.  그는 교회연합을 선교지에 실현하려고 선교협의회, 선교지분할, 교회협의회, 성서공회, 찬송가공회등, 항상 교회연합정신에 입각하여 선교하며, 교육하며, 출판하며, 배포하는 일에 힘썼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가 손을 댄 모든 일에 그는 사랑과 인내, 근면과 성실, 모든 선함으로 행하면서, 어떤 갈등이 일어날 때, 끝까지 연합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가 세운 새문안교회와 기독교서회, 세브란스병원은 물론이고, 그의 뜻을 받들어 세운 연세대학교와 그 속의 연합신학원은 항상 교회연합 정신에 입각하여 이사진과 학과과정이 구성되었다. 특별히 그가 창안했던 선교회의 한국 분할선교정책은 선교의 중복과 선교회간의 경쟁을 사전에 예방하여 선교의 효율성을 크게 높이며, 선교회 사이에 건전한 협력을 이끌어 냈다.

    이렇게 언더우드선교사가 교회연합정신에 뛰어날 수 있었음에는 그의 외증조부, 와우박사의 영향이다.  와우박사는 London Missionary Society 창립멤버 중 한 사람으로 33년간 그 선교회에 봉사하면서, 28년간 선교사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고, 그 선교회를 교회연합체로 조화롭게 이끌어 많은 존경을 받았다. 언더우드 소천 후 일년 안에 언더우드선교사의 전기를 쓴 그의 부인 릴리아스 호톤은 언더우드선교사가 외증조부의 교회연합정신을 매우 정확하게 물려받은 것을 보면서, 영적 유전법칙에 경이로움을 표한다 (Underwood of Korea, 16-17쪽). 언더우드의 부인은 그 전기에서 언더우드는 사랑과 믿음, 용기와 긍휼의 사람이었음을 역사적 사건들을 기술하는 가운데 생생하게 보여준다.

   언더우드에게 나타난 이러한 사랑에 기초한 일치정신은 궁극적으로 요한복음 17:21에서 온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되어 일치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흩어진 공동체가 하나되어 머리되신 주님을 섬기는 것을 언더우드는 바른 그리스도 공동체의 존재양식으로 이해하고 믿고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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