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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스 선교사 - 3. 첫 번째 안식년(1879-1881)

 

1879년 안식년 로스목사는 이 기간 중에 펴냈던 두 책의 원고와 4복음서, 사도행전 및 로마서의 첫 번역원고를 가지고 갔다. 그 이전 선교부로 보낸 편지엔 이와 같은 성서번역에 관해 언급이 없었으므로, 언제 어떻게 그가 이런 사업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로스목사의 조선어 교사가 이응찬이었으나, 김양선과 다른 교인들을 만났던 것은 1874년이 아니라 1876년이었을 것이다. 김양선은 이응찬과 의주에서 온 다른 세 사람이 로스목사에게 가서 조선어 선생이 됐고,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믿고 있다.

 

5월 중순 로스목사는 두 번째 고려문 방문이 있었으므로, 그해 말이 되기 전에 주로 그의 친구들에게 연락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의 첫 세례는 1876년쯤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응찬은 맥킨타이어목사에게서, 나머지 사람들은 로스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이성하, 김진기와 백봉춘이다.

 

김양선의 생각에 성경번역은 1875년에 시작했다고 했다. 왜냐하면 로스목사가 이응찬을 1874년에 만났으며, 1년 후에 성경번역이 시작됐으니 1875년이었을 것이다고 했다. 그런데 자료에 따르면 로스목사가 이응찬을 1876년에 만났으니 성경번역은 1877년에 나왔으니, 성경번역은 조선어 공부가 끝날 때 시작됐다고 볼 수 있으므로 1877년에 시작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 같다.

 

서상윤이 로스목사의 첫 조선어 교사였었다고 하나, 김양선은 서상윤과 그의 동생 서경조가 1878년 로스목사를 만났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서상윤은 1879년 세례를 받았다. 아마 이런 일은 성경번역 후 2년 지난 다음 있었는 듯하다. 성경번역 시작은 두말할 것 없이 여러 사람이 했던 것이 분명하다.

 

번역할 때 어떤 방법이 있었는가? 번역은 네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두 번, 세 번, 네 번째 번역은 근거로 증명될 만한 것이 있으나, 첫 번 째의 기록은 없다.

 

1880년 말 맥킨타이어목사는 선교본부에 편지하기를 첫 원고는 1878-1879년에 시작됐고, 두 번째 원고는 로스목사가 안식년으로 간 후 시작했다. 한문을 사용해서 로스목사와 사람들은 번역을 시작했다.

 

1880년 말 맥킨타이어목사는 새로 성경번역을 시작했고 헬라어 성경을 사용했다. 에딘버러 본부에 편지를 보낼 때, 맥킨타이어목사는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을 끝냈고 누가복음을 시작했다. 매일 맥킨타이어목사와 두 사람은 3시간 내지 4시간을 일했다. 이때 세 번째 번역했고, 맥킨타이어목사는 세 번째 역자에게 1881년 봄까지 번역의 [천로역정]을 완성하도록 부탁했다.

 

매일 아침 7시에서 9시까지 맥킨타이어목사는 소장역자를 불러서 번역했고, 저녁엔 소장역자에게 가서 그의 번역을 수정했는데, 처음에는 중국성경을 보고 번역했고, 그 다음에 헬라어 성경으로 수정했다. 1880년 맥킨타이어 목사의 보고서에서 마태복음은 네 번 번역했는데, 이것은 그것을 대단히 자세히 번역했다고 했다.

 

그때 로스목사는 조선에 성서번역에 대한 비용을 여러 단체들에게 부탁했다. 맨 처음 스코틀랜드 성서회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880년 영국 및 해외 성서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의 주필인 라잇(Wright)박사와 얘기했는데, 그는 번역을 위해 첫 지원을 약속했다. 그리고 18812월 여러 후원자들에게 인쇄와 출판의 도움을 부탁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성서회가 지원할 수 있었으나, 그때 영국의 극심한 불경기로 활자를 위해 130파운드만 제공할 수 있었다. 자선사업가 로버트 아링톤은 1876년 종이와 누가복음, 요한복음의 3,000권의 인쇄비용을 돕겠다고 했고, 그는 1876년 두 번째 고려문을 방문하도록 도왔다.

 

글라스고우와 던디(Dundee)는 무명의 자선사업가들이고, 맥킨타이어 목사를 선택해서 5년 동안 첫 조선 선교사의 봉급을 지불하는데 동의했다. 여러 다른 후원자 중 재미있었던 것은 엘진에 있는 국민학교부와, 랜즈타운(Lansdowne)에 있는 가난한 사람에게 1파운드 15실링과 10실링을 각각 주었다.

 

조선 내의 번역에 관한 소식이 멀리 전해졌다. 로스목사가 없을 때 맥킨타이어목사가 부쳤던 보고서에서 방문하고 싶은 사람,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한문성경을 읽고 세례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1879년 여름 그의 조선어 교사와 해성에서 예배를 볼 때, 제 나라 국민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왔다. 1879년 말 "이번 여름에 11명의 한국인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1876년에 로스목사가 압록강가에서 조선어 성경을 나누어주었기에 이 사람들은 모두 영구로 가서 영국선교사를 찾았다.

 

그 해 여름 첫 성경 번역을 몇 달 도왔던 사람이 로스목사와 영국으로 같이 갈려고 영구로 왔다. 같은 해 맥킨타이어목사는 로스목사에게 조선인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전했다. 1880년에 기독교에 대해 관심을 가진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이 사람들은 5-6명씩 떼를 지어 선교사 집으로 와서 며칠 간이나, 일 주일간 성경교육을 받았다. 1880년에는 조선인 30여명이 같은 방법으로 교육을 받았다.

 

그때 영구로 들어오는 조선상인들이 많았을 시기인데, 맥킨타이어 목사가 말하길 "거의 한 달에 한번씩 조선인 성경반을 가르쳤는데, 그것을 광고한다면 더 많이 올 것이다"고 했다.

 

그의 아들 리드몬드와 영국에 도착할 때 로스목사의 가장 급선무는 1879621일에 에디너러에 있는 연합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때 중국선교의 필요성에 대해 강하게 건의하면서 "중국은 미래 아시아 선교의 발판이요, 세계선교를 위해서는 중국선교가 중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중국선교의 전략적 중요성과 문화수준을 높이 평가해서 주장하기를 "평범하거나 국내에서 그 이하 수준의 선교사 파송은 무의미한 것"이라 했다. 이것은 곧 중국파송 선교사는 최고 수준의 실력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로스목사는 동북 중국과 조선의 선교 중심지로서 만주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 해 7월 로스목사는 페이즐리(Paisley)에서 살았다. 그곳은 존.맥킨타이어 부모의 고향일 뿐 아니라, 로스목사의 동생인 도널드가 1878년이래 개업했던 글래스고우와 가까운 곳이었다. 같은 달에 도널드가 선교할려고 선교부에 신청했으나 그 뜻이 성취되지 못하였음을 알았다.

 

또한 페이즐기는 로스목사가 그의 출판사인 제이 앤드 알 파래인(J.and R.Parlane)이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중요시된다. 1879년 말 그 출판사는 로스목사의 첫 번째 큰 책을 만들었다. 페이즐리에 있을 때 로스목사는 그들과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얘기하고, 그때 원고를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동양학 연구의 이정표였는데, 그 제목은 '조선의 고대 근대사'('History of Corea,Ancient and Modern')였다.

 

이것은 그의 세 번째 작품이나 초기 저술 중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책의 영어판은 처음 어떤 서양어로서 출판됐는데, 조선사()에 대해서는 최초의 저술이었다. 물론 드 할드(de Halde)신부의 청제국에 대한 기록 ('Description...de la Chine et la Tartarie Chinoise'[1735])에서 조선에 대해 한 단원을 썼으나, 그것은 내용이나 분량면에서 로스목사의 그것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스목사의 기술 중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는 한국 역사를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자료가 없었으므로 중국역사 자료를 사용해야 했다.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조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로스목사를 거쳐야 됐을 것이다.

 

18805월 로스목사는 에디너러의 시너드(Synod)4)에 참석해서 중국 선교의 최근 현황을 얘기했다. 그가 조선 고대 근대사를 쓰고 난 후부터 시너드에 참석하는 중간에 각 교회에서 설교 현황을 발표할 기회가 없어서, 조선 고대 근대사의 속간인 '만주족: 중국의 현대 왕조'('The Manchus,or the Reigning Dynasty of China')글 쓰기에 몰두했다.

 

시너드가 끝난 뒤 이것은 제이 앤드 앞 파레인 출판사에서 나왔고, 9월에 런던에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잡지는 이를 칭찬했다. 이것이 중국과 중국인의 가능성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에 로스목사를 중국에 대한 열광자로 표현했는데 그가 중국인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왔던 책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 기언과 자료를 사용하는데 생생한 필체로 썼다고 칭찬받았다. 이 출판은 동아시아와 연구에 훌륭한 학자로서 로스목사의 명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로스목사는 저술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첫 안식년에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또한 영어로 동양역사에 관한 책 등 두 권을 썼고, 연합 장로교인을 위해 중국에 대한 소개의 글도 썼다. 188011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 중국의 지리와 인구에 대해 '中國廣大'('The Extent of China')라는 제목을 붙여 썼다. 18811월 같은 잡지에 '중국의 민족'('China's People')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들의 그년성을 찬양했다. 3월과 5월호에 '중국인의 교육'('Chinese Education')이란 제목 하에 중국인 교육제도와 한문과거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1881224일 로스목사는 재혼했고, 두번째 그의 아내 이사벨라스트랩 맥패디언(Isabella Strapp McFadyen)은 그의 여생의 반려자로 그에게서 8명의 아이들이 출생했으나 그중 넷만 성장해서 성인이 되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난 장자 드러몬드는 4월 중순 영국을 떠나 525일 영구에 도착했다. 이때가 그의 저술의 전성기였다. 39세에 로스목사의 사역은 영광스러웠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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