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스 선교사 - 6. 마지막 선교활동(1900-1916)

  선지자선교회

20세기 초 그전 해 2,500명을 합쳐 만주 교회 교인수는 11,000명이 되었다. 그 동안 여러 기독교 조직이 성장했으나 제일 자랑스러웠던 것은 만주교인과 선교사에게 있어서 두 번째 맞는 중국인 목사의 안수식이었다.

 

모두가 교회의 발전을 확신했으나 북청사변은 이것을 짓밟았다. 로스목사가 2월 안식년으로 간 다음 시작되어 6,7월에 크게 약탈하는 소동을 벌였는데, 이 사변의 목적은 외국인 및 그의 조직과 관계 있는 중국인을 쫓아 버리는 운동이었다.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철수했다. 9월 선교보고서에서 그 상황을 분석하면서 로스목사는 그 운동을 중국의 주권 보호운동으로 설명했고, 개신교 선교사는 중국정치에 방해하지 말자고 강조했다.

 

만주 선교사는 7월말 중국을 떠났고, 만주 북부 선교사는 불라디보스톡으로 망명했다. 이 반외국인 운동은 선교사와 관련된 사람도 포함되어 요양의 전도자와 장로는 한국으로 도망갔다가 나중 평양에 있는 미북장로교 선교사인 사무엘 마펫 집에 머물렀다.

 

흥경 전도사는 로스목사에게 살인과 파괴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흥경과 영릉과 통화에 있는 교회가 파괴되었고, 120명이 죽었다고 편지에 죽은 사람 이름을 기록했다. 봉천에 있는 큰 예배당이 파괴된 것이 대표적이겠으나, 다른 곳에서도 파괴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일이 있었으나 연합장로교와 자유교회 통합회(Union Proceedings of the United Presbyterian and Free Churches) 앞에서 중국은 사변적인(궤변적인)문명을 가졌으므로 선교사를 보낼 때에는 신앙심 깊은 지식인만 보내라고 강조했으며, 큰 재난이 있었어도 중국인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

 

1901년 정월과 2월에 로스목사는 만주의 교회 지도자에게서 계속해서 신자들의 고통에 대한 연락을 받은 까닭에, '신음하는 만주교인을 위해'('Appeal on Behlf of the Suffering Manchurian Christians')라는 기사를 써서, 본 교회에게 만주 교회에 대한 후원을 요청했다. 쓸 때에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사람이 없었으나, 생계에 위협을 받아 새생활을 시작할 때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특별한 도움을 부탁했다.

 

로스목사는 본교회가 만주의 교인들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 비참함은 우리 때문에 닥쳤다. 죽음과 파괴는 우리가 전했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시작했다"고 했으며, "북청사변가들의 눈에는 만주교인의 죄란 외국인과 교제한 죄이며, 본교회의 책임은 생활의 회복"이라 했다.

 

311일에 선교를 후원하는 기도회에 모였다가 영국을 떠나 바로 만주로 갔다. 19일 이탈리아 제노아시에서 프릿츠 하인리히호를 타고 428일에 영구에 도착했다.

 

만주에 도착할 때 많은 선교사가 자기 선교지로 되돌아가 파괴된 것을 파악했다. 그 중에서 파괴가 제일 심했던 곳은 플러목사가 설교했던 봉천 동쪽지방인 영흥과 흥경에서였다.

 

조오지 더글라서(George Douglas)선교사는 일본에 있을 때에 평양의 사무엘 파펫 선교사를 통해 요양의 왕장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왕장로는 마펫 선교사 집으로 피신했고, 요양교회는 파괴됐으며 피신한 경로인 압록강과 한반도의 상황을 설명했다. 평양에 갈 때 의주와 선천으로 갔고, 거기에 있는 한국교인에게서 형제처럼 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선교사는 190011월과 12월에 두 번 모여 상태를 평가했고, 190158일 재평가해서 선교사업을 위해 다시 선교사를 임명했다. 평가시에 동쪽 선교지역이 제일 박해를 심하게 받았고, 북쪽은 비교적 부드러웠다고 했다. 류목사가 앙갚음에 대해 반대했으나, 선교사들은 중앙정부가 개인에게 보상을 주면 교인들이 낙담을 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회의에서 건물 건축계획을 반대했으나, 앞으로 교히가 더 크게 발전할 수 있고 또 새 선교사들을 위해 본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1901년 여름에 로스목사가 만주교인의 고통과 순교사를 수집해서 9월 선교보고서에 주만주 조선교이들의 박해보고서를 보냈다. 많은 사람이 조선으로 도망갈 수 있었으나, 4사람이 통화에 가서 사형당했다. 중국 교인들처럼 조선교인이 재산을 도둑질 당했으므로 ,이것은 "북청사변 대신 도둑정변이 간도에서 성행한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느꼈다.

 

이런 어려운 때조차 로스목사는 선교보고서에 선교방법원리를 설명했던 바넥(Gustav Warneck,1834-1910)교수와 논쟁했다.

 

로스목사는 교회를 세울 때에 선교사의 지식과 열심보다는 그의 인격이 더 중요하며, 희생하는 마음 없이 자기 문화의 가치와 개인의 쾌락을 선행한다면 전도인 마음에 방해될 것이라고 했다. 교회가 먼저 예수님의 마음으로 희생하는 자를 찾는다면, 다른 선교문제는 해결될 것이라 했다.

 

같은 해 4월 신학생의 기숙사 준비와 다음 학기의 학업계획 때문에 바빴고, 다음 학기엔 15명의 학생을 원했다고 전했다.

 

1902년 선교사들은 파괴된 교회를 재건키 위해 5월에 노회겸 선교회의를 열었는데 부인들을 포함해서 42명이었다. 이 해부터 몽고지역의 선교책임은 런던 선교회에서 아일랜드 장로교로 넘어 갔다.

 

6월에 한 학기를 마칠 수 있었으므로 로스목사는 기뻐했는데, 전도부에는 85명이 있었고 목사부엔 16명이 있었다.

 

814일 보고서에 북청사변 문제가 제기 될 것인가를 전했다. 봉천에 있는 총독은 그 사태를 즉시 수습했고, 로스목사는 더 이상 이런 일이 나지 않기를 원했다. 99일 보고서에서 시골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전했으나, 아직 봉천에 있는 부속 예배당은 문을 열지 못했다고 전했으며, 또한 러시아 군인들은 요하에서 서쪽지역으로 철수했다고 전했다.

 

1902년은 '만주에서 선교방법'('Mission Methods in Manchuria')이라는 책을 썼고, 그 다음해에 출판했다. 14년간 책을 쓸 기회가 없었으므로 이 책은 많은 갈채를 받았다. 20년 동안 현대 선교사들이 따라 갈 방법은 성바울의 그것이다. 하면서 만주의 경험을 따라 이 책을 썼다. 서양교회의 모방으로 교회를 건설해서 안되고 완전히 독립되고 민족성과 맞는 교회를 건설해야 된다고 말했다.

 

1903328일 신학원의 목사부는 신학기를 맞아 학생이 16명이 되었고, 전도부는 46일부터 개강했으며 학생은 94명이 되었다. 전도부는 전도사교육을 담당했고 그 중 우등생을 목사부로 보냈다.

 

교회는 천천히 북청사변의 파괴를 복구해 가고 있었다. 710일 본부는 영국 대사관에 로스목사를 만주 선교회의 대표자로 임명했다. 11월의 새 학기에는 목사부는 1학년에 5, 2학년에 2, 3학년에 5, 4학년에 10명으로 전체 22명이 있었다.

 

영국과 외국 성서회 대표자 트러리의 영향을 받던 때로서, 로스목사는 맹인 신자를 위해 특수 점자 교육을 시작했다.

 

19041월부터 러시아와 일본 전쟁에 대한 헛소문이 나돌았고, 로스목사는 시골은 조용했으나 전쟁에 대해 염려한다고 전했다. 봄학기가 시작되면서 체력소모 때문에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로 진황도(진황타오) 근방의 북대하 해수욕장으로 갔다. 안정을 취하던 중 노.일전쟁이 시작되어 주만주 선교사는 철수해야 했으나 몇 명은 자기 지역에 남아 있었다. 로스목사가 가을에 만주에 갈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는데 7월 편지를 보면, "나는 여기서 지방의 위험에 직면해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건강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라고 하며 이것이 자기에겐 새로운 것이라 했다.

 

824일부터 로스목사는 전 중국 교회의 앞날을 결정하는 중대한 회의가 북대하 빼이타로에서 열려 참석했다. 북경에 있던 선교사가 중국 선교사를 전체에 대해 독립된 중국 교회 설립의 가능성 여부를 제기함으로 회의가 열렸다.

 

4가지 중요한 질문의 내용이 90내지 97퍼센트 결정되었는데, 내용은 찬송가 통합 가능성, 교회와 부속 예배당의 언어통일, 상제와 성령은 하나님과 성신을 상징하는 언어의 통일과 여러 선교회의 통일 선교회 설립 등이었다.

 

로스목사가 만주에서 한 통일운동과 같이 전 중국에서도 같은 통일운동이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했다. 94일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목사는 만주로 다시 가서 노.일전쟁 중 봉천에서 살게 되었다. 11월 말 모든 선교사들은 자기 구역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19051월 만주에 있는 선교사들은 모두 전쟁이 확산되고 소모건은 끝날 것이라 믿었다. 시민들과 군인들이 대량 학살되고 만주는 많이 파괴되었다. 만주 총독부의 도움보다 선교부가 만주인에게 더 많은 비상구조를 했다.

 

전쟁 중이 있어도 신학원은 계속 강의를 했다. 3월 말 일본군은 봉천에 주둔했고, 로스목사가 오오야마(大山)라는 사령관 앞으로 가서 교회 보존에 대한 약속을 받았으므로 일본군인은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학원은 별다른 문제없이 신학기를 맞았고, 전쟁은 끝나 사람들이 다닐 수 있었으므로 5월에 노회가 모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일전쟁으로 인해 1904년 노회는 모이지 못했다.

 

맥킨타이어목사가 빼이타이로로 가서 쉬다가 91일 죽어서 로스목사는 대단히 슬퍼했는데, 해성에 있을 때 심장마비가 있어 휴양차 그곳으로 갔었으나 뜻대로 안되었다. 로스목사가 선교보고서에서 그에 대한 찬사를 쓰고 맥킨타이어 목사의 시체는 영구의 외국인 묘지에 번즈 곁에 묻었다.

 

같은 해 여름 로스목사와 부인은 북대하호에서 휴양하고 있었는데, 아마 노.일전쟁 때부터 그의 건강이 약해진 것 같다. 그때부터 선교회 본부로 보내는 편지에 로스목사의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9월에 1908년의 상해 선교 특별모임준비회로 모여 교회통일 방법문제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고, 통화에 샀던 땅을 선교회에 기증했다.

 

19064월에 로스목사는 봉천 북쪽지방으로 순회전도를 했는데, 이번에 특히 일루에 관심이 많았다. 어떤 곳은 8년간 갈 수 없어서 북청사변 때 못 보던 사람들을 아주 반갑게 만났는데, 자기의 연령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로스목사는 그전에 성공적인 목회를 기억하면서 그곳으로 새 선교사가 보내질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5월 노회에서는 자립하는 교회와 중국의 통일된 교회에 대해 많이 얘기했으며, 이런 것을 로스 목사는 원했다. 맥킨타이어목사의 미망인은 자기의 신분으로 선교사가 될 수 있음을 로스목사는 기뻐했다.

 

19074월 로스목사는 봉천 북쪽지역으로 순회전도를 한 후 봉천 서남부에 있는 교회로 갔다. 같은 해 6월 안식년을 맞아 로스목사 부부는 새로 개설된 시베리아 대륙선 열차로 영국으로 갔다. 대륙선으로 가면 더 빠르기 때문에 현재 제트기와 비교할 수 있는데, 2개월이 걸렸으나 기차로는 약 2주일 걸렸다. 로스목사 부부는 도중에 비인에서 잠시 머물렀고, 스위스의 로잔느(Lausanne)에서 여름을 보냈다. 스위스 요양병원에서 오래 머물러야 했으므로 그의 건강상태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을에 스코틀랜드로 갔다가 1111일 중국선교 100주년 기념회에서 특강을 했다. 봉천의 신축된 교회의 개교는 그 전날이었고, 북청사변 때 파괴된 교회를 재건한 것으로 예배 때에는 마르턴목사가 설교했는데, 그는 57년 동안 중국에 있었다.

 

19081월 한달 동안 로스목사 부부는 에딘버러에서 살게 되었으나, 봄에는 로드세이(Rothesay)로 이사했다. 521일에 선교 본부(Foreign Mission Committee)에서 현재의 중국 교회 형편에 대해 발표했고, 특히 만주 교회의 부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시작해서 조선반도 전체로 확산되었던 부흥운동을 통해 만주 교회는 큰 영향을 받았다.

 

중국에 있던 어떤 선교사가 조선에 왔다가 가는 길에 평양에 들러 그 부흥을 목격하고, 하남 선교지역으로 갈 때에 요양에 있으면서 만주 교회에 부흥의 소식을 전했다.

 

그 후 중국인 교인 두 사람이 평양에 갔다 올 때 조선 부흥에 대해 훌륭하다고 전했다. 그 사람이 들어온 다음 만주 교회도 부흥했는데,이 운동은 만주 교회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며 북청사변과 노.일전쟁 때부터 자신을 잃은 교회를 희생시켰으며, 로스목사는 이 운동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만주에서 훌륭한 부흥'('The Marvelous Story of the Revival in Manchuria')을 써서 기념했다.

 

1908년 여름 로스목사 부부는 목사의 고향인 발린토어라는 어촌에서 보냈는데, 그의 거주지는 올드 샌드윅(Old Shandwick)이라고 알려졌다. 109일 글래스고우를 떠나, 14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해 25일에 봉천으로 돌아 왔다.

 

1908년 말부터 로스목사는 그의 유명한 학술책인 '중국의 원시종교'('The Original Religion of China')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고, 19095월에 스코틀랜드에 가서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고, 1909년 말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 로스목사는 다른 학자와 다르게 중국 고대종교는 유일신교라 했다. 그 이외에 봉천의 제국적 국가의 제사를 설명하고 제단 그림까지도 가지고 있다. 1909년 다른 소식이 없었으므로 조용한 해라 생각되나 건강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19102Foreign Missions Committee 총무는 로스목사에게 같은 해에 에딘버러에서 모이는 세계선교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로스목사는 이 암시를 잘 받았으나 왕복교통비가 없었으므로 선교부에 부탁했는데, 총무는 4월 답장에서 목사의 퇴직여행이 아니면 개인이 경비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전했다. 이 편지에서 로스목사의 건강에 대한 총무의 걱정을 볼 수 있고, 건강이 더 악화되기 전에 퇴직하라고 부탁했는 것 같았다. 67일에 본국으로 귀환해서 에딘버러에 거주했다.

 

세계선교 대회에 참석 후 로스목사는 발린토어로 갔고, 여름 동안 거기에 머물렀다. 7월 초 외국 선교부에서 퇴직할 의사를 발표했고, 38년간의 봉사는 끝났다.

 

그는 병약한 선교사가 되었고, 많은 사람에게서 칭송의 편지를 받았다. 812일에 받은 편지를 보면, 만주 교회 설립자와 번즈 선교사의 후계자로 칭찬했고, 또 그 학술과 문학적 노력에 대해서도 칭찬을 받았다.

 

병약하고 퇴직을 했어도 로스목사는 많은 약속을 지키고 여러 일을 했다. 10월과 11월에 여러 교회 앞에서 중국 교회에 대해 발표했고, 1910년말 로스목사 부부가 마아치홀 크레센트 12번지(12Marchhall Crescent)로 이사가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다.

 

1912년까지는 많은 발표를 했고 거의 다 했던 것 같다. 이것을 하면서 메이필드(Mayfield)연합 자유교회 장로로 봉사했는데, 이 교회는 그의 집과 가까왔다.

 

1913214일에 글레스고우대학교의 기독교 학생회에서 선교사업을 위해 발표했다. 그 후에 받은 편지를 보면 아마 학생들은 내용을 잘 이해했던 것 같다.

 

19141월과 2월에 몇 번 예배를 사회했는데, 416일에 만주선교사들은 다음 연합교회의 총회에 로스목사를, 그가 대표 장로로 선택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그것 때문에 로스목사가 메이필드 교회 대표 장로나 만주 교회 대표 장로가 될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나왔다.

 

같은 해 말까지 여기 저기서 많은 발표를 했고, 이때부터 임종까지 그의 주요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1916년에 '중국 민족의 기원'('The Origin of the Chinese People')이라는 유고집이 되었고, 중국 민족과 그의 사회적 기원을 설명했던 것이다. 그가 가장 깊이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여러 사람은 이 책이 좋은 기념이 될 것이라 했다.

 

1915428일에 런던의 기독교 문학회(Christian Literature Society Conference) 에 참석했는데 그것이 공식적 행사로서는 최후의 것이었고, 같은 해 86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 앞으로 갔다. 811일 에딘버러의 뉴윙턴(Newington)묘지에 묻혔고, 그 위에 그의 사업을 설명하는 비석을 세웠다. 중국에서는 교인들이 로스목사의 죽음을 듣고 봉천의 중앙(동관)교회 제단 뒤에 위패를 모셨다.

 

.로스목사가 죽고 바로 후 그의 아들 핀들리 맥패디언(Findlay MacFadyen)이 불란서에서 191881일 전쟁으로 죽었다.

 

그의 부인 이사벨라(Isabella)15년 후, 19301219일에 글래스고우에서 죽었다. 그의 첫 아들인 드러몬드는 나중 남아프리카로 가서 우스터(Worcester)의 고등학교에서 교감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존 허버트는 연합 자유교회 목사, 딸 이사벨은 로버트 리치 위트(Robert Ritchie Watt)라는 연합 자유교회(United Free Church)목사와 결혼했다. 이 두 사람은 서아프리카 가나에서 선교사로 봉사했고, 그의 조카 릴리안 맥킨타이어(Lilliam MacIntyre)는 고향이 된 만주에서 선교사로 일을 했다.

 

요즈음 로스목사의 후손은 영국, 호주와 남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다. 그의 제일 기념이 될만한 공적은 그가 영향을 끼쳤던 만주와 한국사람들 및 양국의 교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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