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의 선교적 상황

2007.05.16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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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중선     번호 : 19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5/06/13 (월) PM 11:26:19     조회 : 118  

■ 연해주의 선교적 상황  

이름:이용훈 선교사
2003/8/16(토)
조회:111

극동러시아의 상황


1) 전반적 상황

극동 러시아 연해주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보다 1년 늦게 개방된 지역으로서, 개방이전에는 러시아 최강의 극동함대가 위치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현재는 철도를 통하여 러시아 내륙이나 유럽으로 지나는 모든 물동량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는 지역이다.  수도인 모스크바와는 9000㎞. 비행기로 9시간, 기차로 일주일이 소요되며, 시차는 7시간이다.  

겨울은 11월에 시작되어 3월까지 계속되며, 평균기온은 -15∼- 25℃. 주변의 바다가 모두 얼 정도다. 연해주의 면적은 165.9평방 킬로미터로서 북한정도의 크기이며, 중국과 국경을 접하는 지역에 서울시 세배만한 큰 호수가 있다. 최대의 도시는 블라디보스톡, 그 주변으로 나호드까, 우수리스크, 아르쫌등 중소도시들이 위치해 있다. 인구는 총230만이며 그 중  1/3이 블라디보스톡인구다.

개방이전에는 군함등 군설비공장이나 어업, 건설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았으나, 개방이후 군수산업이 퇴조하고, 밀려드는 외제품에 경쟁력을 상실한 제조업 공장들이 문을 닫게 됨에 따라 무역업이나 상업, 자동차수리와 관련된 업종, 재 건축업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중국과 북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 때문에 연해주는 지정학적으로도 요충지로서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중국과는 우수리강(흑룡강)을 사이에 두고 양국의 국경도시를 통하여 물적 인적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로인해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등지에는 중국인과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북한의 근로자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따라서 선교적으로 볼때 이지역은 러시아인, 고려인, 중국인,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다민족 선교(multiple people mission)가 가능한 지역이다.

연해주에는 정교회가 각 도시마다1∼2개씩 존재하고 있으며, 정교회의 수도원, 성경학교등이 존재하고 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세(勢)가 다소 약한 편이다. 러시아= 정교회국가 라는 상식이 연해주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미 2002년말 연해주에서는 국가에 법적으로 등록된 개신교회의 수가 정교회의 수보다 더 앞서는 것으로 공식발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통계적인 수치만은 아니다.  

대 사회 기여도 면에서도 개신교는 월등하게 다양한 방면-고아원, 마약 알콜중독자를 위한 사역등등,  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이고 있다.

연해주내의 개신교는 현지 복음주의 침례교 30여개,  우크라이나 선교단체가 개척한 교회 20여개, 오순절교회 30여개등이 존재해 있으며, 90년 개방이후에 들어온 한국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30여개가 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빠르찌산스크, 나호드까, 아르쫌, 스빠스크, 레소자보스크 등지에 분포해 있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최근 2-3년내에 블라디보스톡등 대도시는 물론이고 연해주 일대 작은 촌락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선교활동이 이뤄지고 있으며, 그 결과로서 생겨난 각 마을단위마다 존재하는 크리스챤 그룹들은 잠재적인 교회라고 할수 있다. 한편 블라디보스톡에는 한국선교사에 의해 크리스쳔 인터내셔널 스쿨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연해주는 현대 선교의 필수불가결한 특징인 협력과 연합이 잘 이뤄지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 선교사들간의 협력은 물론이거니와 현지 교단과의 협력도 모범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재 우리 한인선교사들의 협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장로교 연합신학교다. 96년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러시아복음화를 위한 현지 교회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개교한 신학교는 한인 선교사들에 운영되는 연해주의 유일한 연합신학교라고 할수 있다. 이 신학교에는 15명이상의 현지 선교사들이 학교의 운영과 교수를 책임지고 있다. 7년동안 이 신학교에서 배출된 현지사역자들은 모두  20명으로서 연해주 각지에서 러시아복음화의 주역으로 사역중에 있다.

한인 선교사들이 가장 가까이 협력하고 있는 현지 개신교교단은 복음주의 침례교단으로서 러시아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교단이다.

2000년부터는 두 기관이 공식적으로 협력하여 매 격월로 “연해주기독교”라는 크리스쳔 신문을 발간하여 문서선교사역을 펼치고 있다.

한국에서 들어온 한인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는 1990년 뻬레스트로이키로 불리우는 개방이후를 기준으로 잡을때 12년의 역사를 갖는다. 블라디브스톡이 개방되기 이전, 이미 개방도시였던 나호드까에 들어간 선교사에 의해 두 개의 교회(합동, 고신)가 건축을 완료하여 선교하고 있으며, 그밖에 아르쫌에 6개교회중 5개교회가 건축중이거나 완료된 상태, 블라디보스톡에는 3개의 교회가 건축중이거나 완료된 상태며, 나머지는 기존의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로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개신교선교의 장애는 개신교를 이단의 한 종파쯤으로 인식하는 국민들의 정교회의식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개신교에 대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서서히 변하고 있으며, 말씀을 사역의 중심으로 하는 개신교의 특성상 큰 부흥과 성장이 예상된다. 2003년 5월 현재 러시아 연해주 한인 선교사협의회 소속의 한인 선교사들은 목사선교사 전문인 선교사를 포함하여 모든 48가정이며, 소속 교단별로 볼때 장로교가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감리교, 오순절 등의 순서로 나타난다)  


2) 연해주와 한인역사

연해주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 낮선 땅이 아니다. 멀리는 5-6세기 우리의 역사속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로 알려져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으며, 조선말기 계속되는 가뭄과 기근을 피해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 우리의 조상들이 자연스럽게 스며 들었던 우리선조들의 활동무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연해주에 최초로 출현하게 된것은 1860년대 말로서 함경북도의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더 나은 땅을 찾아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그리하여 1917년 러시아혁명 직전 연해주는 수 만명의 한민족들이 주요 도시인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빨찌산스크등지에 소수민족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살던 삶의 터전이었다.

1908년 45397명이던 연해주내의 한인들의 수가 1920년대에는 이미 30만이 넘었다. 이러한 맥락하에서 조선기독교 장로회 총회는 1909년 최관홀 목사를 우리의 동포들이 살고 있던 이 지역에 선교사를 단독으로 파송하여 선교하게 하였으며, 그 이후에 감리교의 손정도 목사가 가세하게 되었다. 그 결과 22년대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등 다양한 교단의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블라디보스톡에만 36개의 교회에 교인수도 2000명을 헤아렸다. 이밖에 우수리스크, 빨찌산스크, 크라스끼노등지에도 수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97년 엘친의 집권당시  '종교법'이 발효되어 개방이후에 진출한 한인선교사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뻔했다. 종교법의 주요골자는 러시아 영토내에 있던 모든 종교기관들을 정리한다는 것이었고, 그 기준은 15년이상 러시아내에 존재했다는 역사성이었다. 따라서 10년도 채 안된 한국선교사들의 교회는 그 존립자체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었다.

이때 1926년도에 연해주 지역(블라디보스톡, 우수리스크, 빨찌산스크, 나홋까등지)에 한인들의 교회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자료가 발견 인정되면서, 한국 선교사들의 교회는 모두 장로교 혹은 감리교의 이름으로 등록할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70년 공산치하에서 수많은 핍박을 받았던 이곳의 한인들의 슬픈 역사를  오히려 먼 훗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도구로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어간인 1917년.  지구상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러시아에서 발발하게 되면서, 1920-22년의 연해주는 내전의 몸살을 겪게 되었다. 짜르군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영국, 이태리, 일본등이 참전했으나, 혁명군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결사항전끝에 1922년 연해주지역에서의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 소수민족으로서 이 전쟁에서 혁명군측에 가담하여 영웅적인 공을 세운 그룹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연해주에 진출해 있던 한인들이었다. 일 본에 대항하는 반일전선이 혁명기의 러시아의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혁명군의 보조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후 1919년 3.1운동의 좌절이후 많은 한인들이 이곳으로 망명하면서, 연해주는 만주에 이은 또 하나의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1920년대부터 30년대중반까지 이곳에 살던 고려인들의 숫자는 약 20만명에 달했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에는 뻬르바야레치까라는 지역에 신한촌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기관을 운영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극장, 신문발간등을 통한 다양한 문화활동,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레닌사후 스탈린이 집권하게 되면서 연해주에 살고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은 평생 지을수 없는 커다란 비극을 강요당했다. 1937년 스탈린은 러일 전쟁시 한인을 일본군과 구별한다는 명목하에 이 지역의 20만명의 동포들을 수천㎞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이다. 이 대이주(大移住)는 1937년 9월과 10월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겨울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인명이 기차안에서 추위와 배고픔, 질병으로 희생되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오늘, 소련이 해체되고,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15개 공화국들이 각기 독립국가로 분리되었다.  공화국 분리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 흩어져 있던 우리동포들은 각 공화국의 또 다른 민족 차별정책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구 소련시절 소수민족이었던 이들은 독립이 되자마자, 모국어를 부활하는 동시에 다른 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반세기 이상을 살았던 그들은 갑자기 이방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지역의 전통 종교인 회교가 급부상하면서 종교적인 박해까지 받게 되었다. 또 다시 소수민족 차별정책의 희생양이 된 한인(고려인)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살던 극동러시아 연해주를 꿈꾸게 된다)    

  1993년 러시아 정부는 1937년 스탈린에 의한 강제이주는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불합리하게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한인들의 명예를 회복을 약속하는 법안을 제정할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한인들은 옛 조상들의 생활 근거지였던 극동 러시아 연해주로 귀환을 서두르게 된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각국의 이민법이 까다로운데다가 막상 연해주로 귀환한다 할찌라도 저들의 주거 및 생계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어 이들이 연해주로 귀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재, 국내의 매스컴을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각계에서 고려인들을 돕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에 있으나 쉬운일은 아니다.  



3) 블라디보스톡의 선교현황

블라디보스톡은 인구 60만이 넘는 극동러시아 최대의 도시로서, 말하자면 연해주의 수도와도 같은 도시다. 예전에는 러시아 최강 극동함대의 중심지로서 군사도시로 유명했지만, 개방이후 오늘날은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탈바꿈해 가고 있다. 매년 연해주의 각 중소도시에서 보다 나은 교육과 일자리를 찾아 젊은 인력이 밀려드는,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드문, 활기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은 개방된 항구도시로서 철로를 이용한 모든 물동량이 집합되는 기지이기 때문에, 향후 남북이 문호를 개방할 경우 블라디보스톡은 일본-남한-북한-중국-러시아-유럽을 잇는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에는 러시아 정교회 3개, 카톨릭1개, 루터교1개, 현지 침례교회 2개, 우크라이나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개척된 복음주의 계통의 침례교회 2개, 오순절교회 10여개, 은사주의 교회 10여개, 복음주의 교회3곳, 안식교 2개가 위치하고 있으며,  11년여전부터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장로교 감리교회가 15개 존재해 있다.  이 밖에도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같은 이단종파들의 활동도 두드러지며, 한국의 통일교, 엘리아선교회등은 공식적으로 등록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암약중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공공연히 사탄을 숭배하는 Satanist들의 활동도 보고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의 복음화율은 정확한 통계는 나와있지 않으나 현재 도시안에 존재하는 개신교회의 수를 감안해 추산해 볼 때, 1%미만으로 추측된다.  

  현재 개신교 선교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비 협력적인 태도, 아직까지 많은 기성세대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공산주의의 유물사관,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밀려든 물신(物神)풍조 등이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는 오히려 역으로 복음의 진보에 유익한 기회로 작용될수 있을 것이다. 형식적이고 명목적인 정교회에 대하여는 활기 넘치는 감동적인 예배와 말씀으로, 공산주의 유물사관과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에 대해서는 인생의 의미와 영원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생명의 힘을 대안으로, 주의 심장을 가지고 저들에게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