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교단분열

2008.04.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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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사 교단분열
선지자선교회
● 파벌이 교단 분열 초래

한국 교회만큼 분열을 계속한 교회는  아마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최근 문화부가  집계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의 간판을 내건 교단이 무려 1백 개가 넘는다고 한다. 세계의 교회들이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연합과 일치를 위해 노력하면서 여러 가지 가시적인 연합의 실례를 이끌어낸 것에 비하면 한국 교회의 이 같은 '분열증후군'은 이제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와있다.

분열은 파벌에서 온다. 한국 교회가 1백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 그토록 많은 분열을 기록했다는 것은 곧 그만큼 많은 수의 파벌이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교단 내부에도 여러 갈래의 파벌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 파벌들 사이에 교권과 이권을 둘러싼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한국 교회 분열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에 파벌이 생겨나고, 이에  따른 분열현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선교 초기에 있었던 지역별 분할선교 정책 등으로 인해 노정 된 지방색, 둘째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교권을 둘러싼 갈등, 셋째 잘못 이식된 근본주의 신학, 넷째 일제  식민치하에서의 상처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적 오류 등이 그것이다. 물론  편을 가를  때마다'신학적인 견해차'를 내세우긴 했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거쳐 왔던  분열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같은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장로교단에서 가장 먼저 갈라져 나간 교단은 해방 직후 분열된 '고려파'였다. 대부분의 교회가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동안 여기에 끝까지 반대해 옥고를 치렀던 부산 경남지역의 교회들이 한상동 송상석 목사를 주축으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교단을 형성 한 것이다.

그 이후에는 이른바 '신신학' 논쟁으로 인해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된 '기장측'이 분리돼 또 하나의 장로교단이 탄생한다. 이때 기장의 주축을 이룬 세력들은 대부분 함경도 지역과 호남 지역 출신들로, 신학논쟁의 이면에는 분할선교 정책으로 인한 지역색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예장 기장 고려파의 세 교단  체제가 약 10년 동안 계속된 후, 예장은 또 한번 분열의 홍역을 치르게 된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8회 총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논란 끝에 비상정회 한 후, 둘로 갈려 양측이 연동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속회함으로써 완전히 두 교단으로  갈라진 것이다. 이때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한경직 목사를 주축으로 '장로교는 통합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고 해서 '통합측'이라고불리게 됐다. 또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한 그룹은 이전에  갈라진 고려파와 다시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이라고 일컬어지게 됐다.

예장의 일부와 고려파가 연합해 구성된 합동측은 이후 교권과 지색을 둘러싼 분열을 계속한다. 먼저 갈라져  나갔다가 돌아온 고려파가 고려신학교의 인정문제를 놓고 다시 교단을 이탈,  본래의 고려파로 환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고신측'이 됐으며, 고신측을 '환원파'라고부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이면에는 고려파의 거두인 한상동 목사가 3년 연속 총회장을  맡는 문제, 다시 말해서 교권문제가 깊이 자리잡고있었다.

고려파가 환원한 후 합동측의 교권은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출신과 호남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 그룹의 거두는 정규오 목사였다. 이 그룹은 고려파 환원 이후 12년 동안 합동측을 지배해 왔다.

이 과정에서 소외됐던 중부 영남 출신들은 절치부심 끝에 이영수목사를 중심으로 뭉쳐 드디어 교권 장악에 성공, 무려 17년 동안 합동측의 교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 두 그룹의 교권 다툼으로 인해 야기된 사건이 이른바 1979년 64회  총회에서 발생한 합동측  주류 비주류의 분열사건이다.

당시 이영수 목사 계열, 즉 중부 영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교권에서 소외돼 있던 비주류측(황해 평안 호남 계열)은 64회 총회에서 교단탈퇴를 선언하고 정규오 목사를 중심으로 '합동보수'라는 교단을 세운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 후 이 '합동보수'는 호남세를 중심으로 한 '개혁측'과 이북 출신과 호남측 일부로 구성된 '합동보수측(현재 홍은동 소재 총회)'으로 양분된다.

그후 이 합동 비주류계열은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해 오늘날 80개가 넘는 수많은 장로교단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합동 비주류 계열의 분열은 철저하게 지방색과 교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해 분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합동측은 1979년 9월 대구에서 열린 제64회 총회에서 정규오 목사를 주축으로 했던 비주류계열측과 분열 이후, 주류계열을 형성했던 이영수 목사가 교단을 이끌어 왔다. 이목사의 독주는 85년 70회 총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17년간 교권을 손에 넣고 교단을 좌지우지했던 이목사는 이 총회에서 모든 공직에서  해임된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 총회였다.

이 총회에서는 그동안의 재산유용문제, 총신대 불법운용문제, 지도자 비리문제 등이 긴급동의, 이 동의안 제출로 이영수 목사의 모든 공직 해임과 기독신보의 배태준 사장 해임을 결의했다.

이후 합동측은 87년 제72회 총회를 계기로 '교단 정화'의 기치를 내걸고 이영수 목사를  무너뜨리고 교권을 장악한 김현중 목사를 주축으로 한 강경파가 비주류계열인 개혁파에 의해 또다시 무너지면서 극심한 파벌간의 다툼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렇듯 주류와 비주류로 갈라진 총회는 해마다 서로 교권을 장악하기 위해 총회장을 비롯해 전 임원 선거에 막대한 소모전을 전개한다.

비근한 예로 지난 88년 대구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73회 총회는, 그 전해에 열린 72회 총회보다도 더 극심하게 개혁파와 강경파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점철됐다. 당시 개혁파의 경우에는 이성헌 목사와 이봉학목사, 한명수 목사와 김동권 목사, 김인득 장로가 주축이 돼 72회 총회에서 장악하지 못한 기독신보사 이사진 개편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또 강경파의 경우에는 김현중 목사와 임태덕  목사, 김만규 목사와 서기행 목사, 윤재동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지난 총회에서 실패한 임원진 구성에 총력을 다했다.

73회 총회에서 개혁파가 교단을 장악한 이후 합동총회는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며 정책교단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교단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 교권 위한 싸움만 계속

한편 원래의 교단으로 환원한 고신측에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한 부산측과 송상석 목사를 중심으로 한 마산측이 서로 갈등관계에 있었다. 한목사는 명실공히 고려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데에 반해 법리해석과 행정절차에 밝았던 송상석 목사는 교단의 행정적 지도자였으며, 두 사람 휘하에는 제각기 빼어난 후배와 제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 두 그룹의 갈등이 교단의 분열까지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한목사 후예들은 '돼지파'로  그리고 송목사 후배들은 '부곡사단'으로 아직까지 교단을 양분하고 있다. 두 그룹이 이 같은 명칭을 갖게 된 데에도 재미있는 뒷 얘기가 있다.

한편 두 그룹의 갈등으로 인해 교단의 일부가 송상석 목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경기노회를 주축으로 한 일부 세력과 이전에 고려파를 탈퇴한 바 있는 이기진 목사 등이 이 고소에 반대하면서, 교단을 탈퇴해 새 교단을 세웠다.

이때 탈퇴한 그룹의 우두머리가 바로 석원태  목사였으며, 이 그룹이 오늘날의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측으로 발전했다. 이 교단을 '반고소고려측'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같은 '파벌'과 '파벌로 인한 분열'이 장로교단, 혹은 보수를 표방하는 집단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리교와 성결교, 그리고 침례교 등에도 파벌로 인한 갈등과 진통이 역시 도사리고 있다.

이상에서 볼 때 한국 교회 교세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단의 행태는 한국 교회 전체를 좌우했다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장로교단과  함께 한국 교회 3대 교단 중의  하나인 감리교와 성결교는 어떤가.


감리교도 여느 교단과 마찬가지로 미국 감리교에 의해  선교가 시작되었다. 한국 선교 당시 미감리교회는 현재와 같은 하나의 교단이 아니라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한국 선교도 따로 하게 되었다. 먼저 들어온 북감리교회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충청지역 등 남쪽에서, 좀 늦게 들어온 남감리교회는 평양 개성 철원 등을 중심해 북쪽으로 선교지역을 나누어 가지고 선교에 임했다. 그러나 1930년 남북 감리교회가 한국 땅에서 역사적으로 합동해 '미국연합감리교회'란 하나 된 교단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때 미국 연회에 속해 있던 한국감리교회도 미국 교회로부터 독립하여, 조선기독교감리회로 출발하게 되었고 초대 총리사(현재의 감독)로 남감리회에 속해 있던 양주삼 목사가 뽑혔다. 그러니까 세가 단연컸던 북감리교회측인 서울세가 약세였던 남감리교회측 평양세에게  패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에 따라 평양세와 서울세가 그의 재임 8년동안 대립하는 양상에 빠졌으나, 드디어 1939년에는 북감리교회측 이김종우 목사를 앞세워 양주삼 목사를 밀어내고 대권을 잡게 됐다.

이렇게 되자 남감리교회측은 평양에 성화신학교를 세우고 힘을 양성하게 됐고 이때부터 감리교의 파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양측은 대단한 대립을 보여왔으나 일제에 의해 국내의 전교파가 해산되고 일제의 작품인 조선기독교회로 단일화되면서 친일과 비친일로 서로다투던 양상은 다른 교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감리교가 파벌싸움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해방 이후 부흥파와 재건파로 갈라져 싸움을 벌인 데서 비롯한다.

부흥파는 일제하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형성된 것으로 선교 초기로 돌아가야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후에 성화파의 모체가 됨). 또 재건파는 해방 직전의 양태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후에 호헌파의 모체가 되었다.


● 계파간 선거전 치열

이들 두 파의 싸움은 일제치하에서 입은 피해를 염두에 두고 벌인 싸움인 탓으로 매우 치열했다. 그러다가 6 ,25전쟁이 일어나고 북에서 많은 사람이 월남하면서 부흥파로 집결되어 성화파가 탄생됐다.

주로 조선기독교회에서 활동했던 이들로 구성된 재건파가 피난중 충청도세와 천안에서 호헌파를 형성해, 이후로 양파는 피나는 싸움을 벌였고, 이로 인해 교단은 50년부터 58년까지 분열된 상태로 보내다가 다시 합동이 되었다. 비록 합동은 되었으나 양 계파의 골이 얼마나 깊었던지 당시의 감독 선출을 위한 투표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김종필감독이 약 80번, 이환신 감독이 1백14번, 윤창덕 감독이 27번의 투표 끝에 뽑힌 기록을 남겼다.

이 같은 양 계파의 싸움과 횡포 속에 소외됐던 이들이 정동파를, 정동파에 대전출신들을 규합하여, 복음동지회를 조직하게 되었고 이 계파는 한때 기세 등등해 감독까지 배출했으나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미약한 상태이다.

호헌파는 70년대 약관의 김창희 목사가 교단의 상징적 인물인 원로 홍현설 목사를 물리치고 감독에 당선됨으로써 교단이 다시 분열, 합동하는 과정에서 신구계열로 갈라졌다.

그 원인은 김창희 목사의 당선에 반발한 마경일 목사 등이 교단갱신의 기치를 내걸고 중앙연회(일명 갱신총회)를 따로 조직해 3년을 보내다가 호헌의 일부와 합의해 교단이 다시 하나가 된 데 있다. 이 와중에서 성화는 쇠퇴일로를 걷다가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다. 또 성화쪽의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었던 갱신도 오래가지 못하고 지금은 사라졌으나 현직 감독 7명 중에 3명 정도가 이 계파  출신이지만 이는 엄격히 말해 학연이 낳은 결과이다.

그러면 이 교단의 최근 정치판도를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대로 현존하는 계파는 소위  박라인으로 불리우는 호헌 구파와 김 또는 K라인으로 불리우는 호헌 신파가 교단정치의 정상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중이다. 복음동지회가 이 틈바구니에 간간이 끼어 드나 명분뿐이고 별영향력은 미치지 못해 한계에 달했다는 여론이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들 계파 외에 서울 감신 출신과 대전 목원 출신을 중심으로 한 학연이 급속히  머리를 들고 기세가 확대되는 과정에 있어 앞으로 교단정치의 판도에 커다란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이것은지금의 감독수가 잘 말해주고 있다.

한국 땅에서 자생했다고 주장하는 성결교는 60년대 교리해석 문제와 현실참여 문제 등으로 교권싸움을 벌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예수교대한성결교회로 양분되었다.

예성은 다시 연합측으로 분열되었으나 지금은 다시 합해져 하나가됐다. 예성은 지금 교단이 별 잡음 없이 조용한 편이고 기성은 원로와 부흥사들로 선이 그어져 있는 상태이지만 심각한 편은 아니다. 다만 지나친 원로정치에 반발하는 유인물이 작년 총회 때  나오기도 해 교단의 정치판도에 변화가 오리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통합측은 합동측과 분열된 후로 획을 그어 말할 수 있는 확고한 계파는 없다. 다만 영남과 호남, 이북, 서울세로 암암리에  나누어져 교권을 향해 쟁탈전을 전개해 오면서 어느 지역이 어느 지역과 손을 잡느냐가 그때 그때  교권 행방을 결정하곤 했다. 그나마 지금은 4개 지역 5윤번제에 의한 부총회장 선출 방식이 도입돼 지역 내에서만 학연 또는 인맥이 작용하는  정도이며 교단 내 진보 보수 세력이나 젊은층 등은 목소리만 있는 압력단체일 뿐이다.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경우 크게 '대전침신출신'과 '수도침신출신'의 양대 세력들이 제각기 파벌을 형성하여, 갈등을 빚기도 한다. 특히 수도침신 출신들은 교단의 신학교육 정책과 권력배분에서 항상 소외돼왔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총회 때마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수도침신파들에 대한 대전침신파의 공격으로 인한 사건 중 가장 커다란 사건은 아마도 '귀신론'으로 이단시비를 일으켰던 김기동 목사의교단 탈퇴 사건이었다.

수도침신 출신의 김기동 목사는 침례교에 입성한 뒤 문제의 '귀신론'을 통해 교단 최대의 교회 목회자로 급성장했고, 이에 따라 그에 대한 '이단 시비'도 강화돼 급기야 교단을 떠나 '기독교남침례회'라는새 교단을 세운 것이다.

이번 총회를 앞두고 발생한 이른바 '괴문서사건'도 교단  내의 파벌의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다. '괴문서'를 통해 공격의 대상이 되고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수도침신 출신들이며, 더구나 그들의 명단을 다른 문서에서 떼어내  괴문서에 첨부시켰다는 사실이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기독교운동권 내부에도 파벌은 존재한다. 특히 운동노선이나 이념을 둘러싼 이견이 파벌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으며, 이것은 80년대 있었던 '운동권의 좌절'과 지난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운동권의 분열'을 통해 더욱 심화됐다. 특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두 명의야당 후보를 놓고 겪어야 했던 운동권의 분열은 기독교운동권에도 큰 상처를 남겼으며,  그 상처는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사회든지 견해의 차이와 그 차이로 인한 집단화, 즉 파벌형성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파벌간의 긴장관계가 건전한 경쟁을 통해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의 파벌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따지고 보면 한국 기독교의 파벌 자체가 교회의 갱신과 선교사명 완수라는 발전적인 명제로 인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한국 교회는 파벌간의 교권 다툼과 그로 인한 분열의 악순환을 계속해 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 고쳐 나갈 것인가?

중요한 것은 목회자들이 파벌 싸움을 하는 동안 등이 터지는 괴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사람은 일반 교인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