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재건 운동과 고려파의 형성

2008.06.0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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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    神    大    學  
선지자선교회 論 文 集   第 12 鞭
1984. pp.169~204

       교회재건 운동과 고려파의 형성(1945~1952)

                                                              李  象  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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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시작하는 말

1. 해방과 교회재건 운동

(1) 해방과 수진성도들의 출옥
(2) 북한에서의 교회재건운동
(3) 남한에서의 교회재건운동

2.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재건운동과 개혁신학 확립운동

(1) 경남노회 재건운동
(2)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신학 확립운동
(3)경남노회와 신사참배문제
(4) 박형룡교장의 고신이탈과 경남노회의 분열

3. 고려파 교단의 형성

(1) 총회의 경남노회문제처리와 평신도들의 항거
(2) 제36회 총회의 경남법통노회(고려파)단절
(3) 총로회의 조직

참고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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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지로부터의 조국의 해방은 민족사적인 차원에서나 교회사적인차원, 그 어느 편으로 보더라도 역사의 전환기였다. 이 해방과 더불어 한국교회는 적어도 두 가지 과제를 지니게 되었다. 첫째는 일제통치하에서의 기독교 탄압, 특히 신사참배강요로 말미암은 한국교회의 범과를 청산하고 교회재건 운동을 통한 영적갱신운동의 과제이며, 둘째로는 한국교회에 신학적 기초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의 현실은 실로 혼란했다. 참다운 교회 재건운동이 전개되지 못했고 일제하에서 주도권을 행사해온 친일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영적갱신 운동은 방해를 받아왔다. 해방후 북한과 남한에서 교회재건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북한의 경우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남한, 특히 서울을 중심한 교회재건 운동은 단지 외형적, 기구적 재건에 그치고 말았다.

특히 부산 경남지역(경남노회지역)에서의 한국교회를 향한 회개운동과, 일제치하의 죄과에 대한 청산과 정통적 개혁주의 신학 확립운동이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일부의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심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대한예수회 장로회 총회로부터 단절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배경 가운데서 고려파는 태동되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법통노회의 싸움은 교권적 야욕에서 출발한 분파운동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싸움이었고 진리에로의 수렴을 위한 투쟁이었다.

고려파가 태동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동인은 한국교회, 특히 장로교회에까지 요구된 신사참배에 대한 항거와 저항운동 그리고 장로교회 안에 자리해온 신신학운동(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 혹은 친일적 세속주의)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래서 이것은 해방된 후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 청산하는 영적갱신운동과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통한 개혁주의 신학 확립운동으로 투영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파운동은 신앙양심에서 볼 때는 회개운동으로, 신학사상으로 볼 때는 개혁주의 신학운동으로 구형화 되어갔고 이것은 신학적 자유주의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평신도들의 줄기찬 항거운동에 의해 확산되어 갔던 것이다.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로부터 단절되고 총 노회를 조직(1952)한지 30여년이 경과된 이제 지난날의 고려파형성의 배경을 살피고 앞으로의 한국교회를 향한 우리의 사명을 확인하는 일은 유익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본고는 시도되었고 8.15해방 이후 교회재건운동에서의 고려파의 기구적 형성이 이루어진 1952년까지의 역사를 고찰하였다.

1. 해방과 교회재건운동

(1) 해방과 수진성도들의 출옥

1945년 8월 15일

이날은 우리 민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한반도를 위시하여 만주와 중국을 강점하고 아시아 대륙과 세계제패를 꿈꾸던 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하므로 이 땅에는 일제의 식민 통치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이다. 더구나 이날은 기독교 신지들에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민족적 해방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회가 태양신의 압박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는 영적인 출애굽이었다. 1910년 강재적인 한일합방 이후 신사참배 강요 등 무수한 박해와 탄압을 받아 왔고 1942년에는 일제의 강요로 각 교파가 그 고유한 명칭을 버리고 소위 『교단』(敎團)이라는 일본식 교파 명을 가지게 되고, 1945년 8월 1일에는 개신교 각 교파를 소위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란 이름하에 강제 통합하여 일본기독교단에 예속되는 등 갖가지 탄압과 수난을 당해 왔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해방은 더욱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1945년 8월 18일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투옥된 옥중 성도들과 한국의 목사, 장로 등 기독교 지도자들을 몰살할 8·18 대학살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이 밝혀졌을 때 한국민족의 해방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는 기독신자들의 감격은 더없이 큰 것이었다. 하나님은 일제의 잔인무도한 대학살 계획이 실행되기 3일전에 이 땅에 해방과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신 것이다. 8·15해방은 삼천만 겨레 누구 한 사람이라도 기쁨으로 맞이하지 아니한 사람이 있으리오마는 한국의 기독교인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민족의 해방과 신앙의 자유를 얻는 날이었으므로 그 기쁨은 한층 더 컸던 것이다. 8월 17일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5년 혹은 7년간 투옥되어 있던 주의 신실한 종들이 평양, 대구, 광주, 부산, 등 각 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조선 총독 ‘아베’에 계획에 따른다면 소위 조선 총독부  보호 관찰령 제 3호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기 꼭 하루 전이었다. 하나님의 손길은 이렇게 놀라운 것이었다.

이때 출옥한 30여명 중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한 이들로는, 고흥봉목사(당 51세):평북 강계출신, 김린희 전도사(당 38세):평북 선천출신, 김형락 영수(당 43세):평북 정주 출신, 김화준 전도사(당 37세): 평북의주 출신, 박신근 집사(당 37세):평북 선천 출신, 방계성 전도사(당 58세):부산 출신, 서정환 전도사(당 40세):평북 강계 출신, 손명복 전도사(당 35세):경남창원 출신, 안이숙 선생(당 38세 여):평남 박천 출신, 야대록 집사(당 32세):평북 초산 출신, 오윤선 장로(당 75세):경남 함안 출신, 이광록 집사(당39세):평북 의주 출신, 이기선목사 (당 67세):평북 의주 출신, 이인재 전도사(당 40세):경남 밀양 출신, 이현속 전도사(당46세) :경남 함안 출신, 장두희 집사(당 35세): 평북 위원 출신, 조수옥 전도사(당 32세):경남 하동출신, 주남선 목사(당 58세):경남 거창 출신, 최덕지 전도사(당 45세 여):경남 고성출신, 채정민 목사(당 74세):평남 개천 출신, 한상동 목사(당 45세):경남 거창 출신 등이며 대구, 광주, 부산, 청주 형무소 등에서 출옥한 이들로는 김야모, 김두석, 김영석, 손양원, 엄매나, 이술연 등이다.

이렇게 해방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얻은 한국 교회는 남북한에서 각기 교회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8·15해방은 국토, 국가의 분단과 교회 분단의 깃점이 되었다.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 전에 뜻하지 않은 국토분단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일본이 항복하기에 앞서 1943년 11월에는 연합국 원수들이 ‘카이로선언’을 발표하여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한국을 미소 양국이 분단 점령할 것을 밝히고,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이를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미소 양군은 38선을 한계로 남북을 분단 점령하였다. 처음은 그것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조치였지만, 그 한계선이 점차 굳어지고, 군사력은 정치세력으로 둔갑하여 조국강산이 자유와 공산 두 세계로 양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경악과 실망은 해방의 환희를 능가했던 것이다. 조국의 통일을 위해 그간 미소 공동위원회가 거듭 회합했으나 결렬되고, 국내 지사들의 온갖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조국의 통일은 날이 갈수록, 그리고 노력을 기울일수록 멀어지기만 했다. 드디어 신탁통치문제가 일어나 반탁과 찬탁으로 남북은 대립이 되어, 남한은 더 이상 세월을 허송할 수가 없어 1945년 5월 10일, UN의 감시하에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를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남북 분단은 사실상 고정화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교회재건 운동은 남북한에서 각기 달리기 시작했다.


(2)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운동

한국 교회 재건운동은 북한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 중에서도 종래 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평양을 선두로 한 관서지방이었다. 그것은 평양 감옥에서 전후 7, 8년간의 옥고를 겪으면서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최후까지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정조를 지킨 이기선목사, 채정민목사, 한상동목사를 위시하여 약 20여명이 출옥하여 교회재건의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까닭이다. 또 일제의 강요로 강단을 떠나 지하에 숨어있던 다수의 지도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교회재건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성지(聖地)로 알려진 평안북도 선천읍을 중심한 평안노회와 같은 곳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일제가 조작, 강요한 소위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日本 基督敎 朝鮮敎團)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회 휘하에 있던 많은 교회들은 해방과 더불어 교회재건에 전력하였던 것이다. 원래 북한에는 교세가 강했고 따라서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했기에 교회재건의 의지 또한 강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사참배 강요로 문을 닫았던 평양의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많은 교회들은 다시 문을 열고 여러 지역의 교회와 노회를 재건하는데 전력을 다 하였다.

장로교의 경우 1945년 9월 4일 산정현교회에서 평양 임시 노회를 열어 일제의 학정에 못 이겨 치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역사를 남긴 죄과를 통회하고 이 노회는 부흥회와 3일간의 금식기도를 하며 통회자복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교회 재건운동은 사실상 출옥성도가 중심이 된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된 70여명의 교직자 중 최석봉, 최상림, 박관준, 김윤섭, 수기철, 박의흠 등 50여명은 옥중에서 순교하고 남은 20여명은 출옥 후 저들의 가정이나 교회로 돌아가지 않고 주기철목사가 섬겼던 평양 산정현 교회로 가서 그곳에서 약 2개월간 머물면서 기도하던 중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제반 문제를 협의하였다.

동년 9월 20일 경 그들은 다음과 같은 한국 교회 재건 기본원칙을 발표하고 한국 교회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1) 교회의 지도자(목사 혹은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므로 권징(勸懲)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痛悔淨化)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2)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4) 교회재건의 기본원칙을 전한(全韓) 각 노회(各 老會) 또는 지(支) 교회에 전달하여 일 제히 실행케 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이것은 신사참배, 동방요배, 미소기바라이 등 일제치하에서의 죄과를 청산하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보다 정결한 교회를 건설해 보자는 것이었다. 이 재건안은 당시 교권을 행사해 왔던 현역 교역자들에게는 다분히 독선적인 것으로 이해되어 적지 않은 마찰이 일기 시작했다.

동년 11월 14일부터 일주일간 평북노회가 주최한 ‘평북 6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회집되었는데, 이때 출옥 성도와 현역자간의 마찰은 분명해졌다. 이 집회는 해방을 기념한 부흥 성령 집회였지만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전국적인 치리회 구성이 어려웠으므로 각 노회와 지방회를 통솔할 어떤 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어, 이 모임에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이때 출옥성도 이기선 목사와 만수 봉천 신학원장 박형룡 박사가 강사로 초빙되었는데, 박형룡 박사가 전기한 한국교회 재건의 다섯 가지 원칙을 발표했을 때 1938년 신사참배 가결 시 총회장이었던 홍기택 목사를 비롯한 일부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요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사참배 회개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자기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물론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수고의 경중이나 회개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와 교회재건을 위한 의지의 문제였다. 그러나 홍택기 목사 등은 수고의 경중이나 회개의 방법을 들어 참된 교회재건의 이상을 흐리게 하고 신사참배의 범죄에 대한 깊은 인식과 회개가 없는 교권적인 자기 변명적인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외형적인 교회를 어떤 형태로나마 유지한 것은 인정하나, 일제의 군국주의와 식민통치의 굴종, 부일(附日) 한 것이 어떻게 정당시 될 수 있으며 높이 평가 받을 수 있는가? 이때부터 이기선 목사 등은 교회재건이 순탄치 않음을 직감하였고 박형룡 목사는 교역자들의 태도가 구태의연하여 회개의 빛은 없고 계속하여 교권유지에만 급급한 것을 보고 봉천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앞에서 언급했던 평북 6노회 교역자 퇴수회에서는 평동(平東), 평북(平北), (龍川), 의산(義山), 산서(山西), 삼산(三山)노회 대표자간의 북한 5도 연합노회의 조직에 관한 의견의 합의를 보았으므로 이들 6노회와 평양노회가 중심이 되어 5道 16노회 대표가 모여 연합노회 조직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년 12월 초에 5도 연합 노회(五道聯合老會)가 소집되어 잠정적으로나마 총회를 대행할 기관이 된 것이다. 이것이 보통 ‘이북 5도 연합 노회’라고 불리는데 회장에 김진수 목사, 선정된 임원으로는 김철훈 목사, 이유택 목사, 김길수 목사 등이었다. 이때 결의된 중요한 안건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① 북한 5도 연합 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인 협의 기관으로 한다.

② 총회의 헌법은 개정이전의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통일 총회가 열리기까지 그대로 둔다.

③ 전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한다.

④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⑤ 조국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독립기념 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 교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⑥ 북한교회를 대표한 사절단을 남한에 파견하여 연합군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이북 5도 연합회가 총회 아닌 연합 협의회로 머문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남한에서 1947년 총회 계승을 선포했을 때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북한에서의 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지력과 영력을 지닌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의 재건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래서 연합노회는 신사참배 거부로 폐쇄되었던 평양신학교 재개를 결정하고 이 일을 김인준 목사에게 위임하였고, 김재선 목사를 총무로 하는 독립기념 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 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또 남한이 38선으로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체 총회를 열 수 없었으므로 남한교회와의 긴밀한 연결을 갖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남한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소련 군정당국의 근거 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연합군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사절단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남한 교회와의 접촉이 가장 주된 목적이었다. 이때 이북 5도연합회를 대표하여 남한으로 파견된 위원은 증경 총회장 이인식 목사와 평동 노회장 김양선 목사였다. 그들은 월남하여 남한교회와 요로(要路)에서 북한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여 남북한 교회간의 상호연락의 길을 열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 이와 같은 교회가 정비되며 재건이 본격화되고 있을 때 무신론 공산정권은 기독교 박멸정책에 나섰다. 그들은 입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들고 나왔으나 실제로 그 반대였다. 북한에서의 교회재건 뿐만 아니라 자치회나 건국준비회 혹은 정당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이 사실은 북한에서의 기독교회의 위치를 잘 말해 주는 것으로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게는 공산정권 수립에 대한 위협적인 실체로 인식되었다. 이리하여 40여 년간 일제의 탄압을 받아왔던 교회는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또 다름 형극의 역사를 맞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숨 가쁜 현실이었다.

1945년 9월초에 조직된 기독교 사회 민주당은 신의주 제일교회 윤하영 목사와 제2교회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평안북도의 기독교인을 기반으로 한 정당이었다. 이 정당은 지방마다 교회를 중심으로 지부를 조직하여 갔고 후에는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여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또 평양에서는 김인식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 자유당의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의주 학생의 봉기가 있자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세력을 브로조와의 잔재요소로 간주하고 그 근절을 계획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의 자유를 〈김일성 강령〉에서 표면적으로 내세운 공산주의자가 직접적인 박해를 할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하여 그 실행은 지체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북괴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6년 11월 3일 주일(主日)에 실시하기로 하였다. 저들은 선거일을 의도적으로 주일로 정하여 교회탄압의 구실로 삼으려 한 것이다. 동년 10월 20일 이북 5도 연합회는 주일 선거 문제에 대한 대책을 결성하고 다음과 같은 총의를 표명하였다.

“북한의 2천 교회와 30만 기독교 신도들의 신앙의 수호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다음 5개조의 교회행정의 원칙과 신앙생활의 규범을 책정 실시 중에 있은 바, 자(玆)에 인민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 5개조에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어떠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 종교와 정치의 엄격한 구분과, 교회당은 예배 이외의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 할 수 없다는 것, 현직 교역자가 정계에 종사할 때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공산당의 술책은 적중한 셈이었다. 북한의 30만 성도들은 여기에 항거하다가 그들의 계략적 박해에 직면하였다. 이들은 토옥과 강제노동으로 교회탄압을 강행하는 한편 주일예배와 목사의 설교는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교역자들은 연달아 구속되었다. 탄압만으로는 부족함을 감지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 정부의 서기장으로 있는 목사인 강양욱을 중심으로 기독교연맹(基督敎聯盟)이라는 어용단체를 조직하여 전(前) 중국 산동 선교사 박상순 목사와 원로 목사이자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를 감언이설로 꾀어 가입시키고 교회의 이름으로 남한을 공격하고 김일성 정권을 지지케 했다. 한독당(韓獨當)사건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황해도와 함경도의 교역자들의 대량 가입으로 힘을 얻은 동 연맹은 총선거 직전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발표했다. 즉,

1.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지지한다.

2. 우리는 남한 정권을 인정치 않는다.

3.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4. 그러므로 교회는 선거에 솔선수범한다.

는 것이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현실이었다. 괴뢰정부는 각 교회에 명하여 이 결의문을 교인 앞에 낭독케 했다.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투옥과 추방으로 위협하였고 동 연맹을 통한 교회의 탄압은 한층 더 노골화 되었다.

1948년에는 김익두 목사를 회장으로, 김응순 목사를 부회장으로, 조택수 목사를 서기로 하는 기독교연맹 총회를 조직했고, 이북 5도 연합회회장 김진수, 김인준, 김철훈, 김유택, 허천기, 김길수 목사등 주요 간부들을 검속했다.

그리고는 신학교도 통합시켰다. 그때 평양에는 장로교의 평양신학교와 1946년 9월에 창립된 감리교의 성화(聖化)신학교가 각각 600명이상의 신학생을 가졌으나, 1950년 3월 장·감 양 신학교를 강제 통합시켜 “기독교 신학교”를 만들고 정원은 120명으로 축소 시켰다. 이와 같은 공산정권의 박해가 노골화 되어 교회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북한 교회의 지도자 김화식(金化湜;1894~1947)목사가 기독교 자유당 조직과 관련하여 피검되어 1947년 11월에 순교하였고, 같은 해 평양신학교 교장이던 김인준이 소련군에 잡혀 순교했고, 이정심(李淨心;1901~1947) 역시 그해 12월 8일에 고문으로 순교했고, 김철훈, 김유택, 김길수 목사, 등 평양 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순교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북한 교회는 목자 없는 양떼가 되어 점차 쇠잔해져 갔고 북한에서의 교회 재건운동은 사실상 좌절되고 만 셈이다.

한편 출옥한 지도자인 이기선 목사 등은 1945년 9월 20일 발표했던 한국 교회 재건원칙을 그대로 실시하는 교회들을 규합하여(1946년부터 평북지방에 30여 교회를 설립) 재건했다. 1949년 기독교 연맹의 강압이 미치자, 이것을 바로 신사참배의 강요와 맥을 같이하는 행위로 단정하고 동년 5월 중순경 기존 노회와는 별도로 독노회(獨老會)를 조직하였다. 이는 교회의 발전과 행동통일을 위하여 또는 현 기성회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설립하고 운영되었다는  의미에서 ‘독노회’라고 이름 하였다. 여기에 가담한 교회는 평양 산정현 교회를 위시하여 선천, 신주의, 강계 등 평안북도와 황해도 등지의 30여 교회였다. 이 독노회가 세칭 혁신복구파(革新復舊派)인데 혁신과 복구를 주장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하에서 조선교 장로회가 일본 기독교단으로 변질했으므로 일본 교단적인 요소를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고, 일본 교단에 가담하여 소위 황민화(皇民化)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직분자와 교인권을 복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회개를 중심한 예배, 3일간의 금식기도, 6개월간의 혁신기간 등을 골자로 하는 ‘혁신에 관한 내용’과 근신기간이 만료된 교인은 목사의 복구문답을 통해 정당한 교인이 되고, 목사직은 시무투표로, 기타 직분은 장로교 헌법에 의해 투표로 선정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복구에 관한 내용’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공산치하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고 이들이 1951년 1·4후퇴 때 많이 월남하여 남한의 재건과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북한에서의 재건 운동은 사실상 좌절되고 공산치하에서 오늘날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3) 남한에서의 교회 재건운동

남한에서의 교회 재건운동은 크게 서울과 경남노회를 중심한 두 가지로 대별해 관찰할 수 있는데 우선 서울을 중심으로한 교회 재건운동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서울에서의 교회재건은 앞 절에서 언급했던 북한과 차항에서 언급할 경남 일우의 교회재건 양상과는 그 성격과 의도가 판이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서울에서 진행된 해방 후의 활동은 교회 재건운동 이라기보다는 치리회의 정비와 계승,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극히 외형적인 재건에 그치고 말았다. 서울은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세력의 중심지였고, 신사참배 반대투쟁으로 투옥 혹은 출옥했던 지도적 인물이 없었던 것도 그 이유였다. 그래서 해방 전후 서울에서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을 그대로 존속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교단은 일제의 강요와 교회내의 친일세력의 합작품으로서 장로교와 감리교 등 당시의 여러 교파를 망라하여 조직한 혼합주의적 기독교 단체였던 것이다.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이 창립된 지 불과 15일 만에 해방이 되고 보니 여기에 가담했던 지도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저들이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므로  해방된 조국에서의 신속한 대처 혹은 변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저들은 1945년 9월 8일 남부대회란 이름으로 새문안교회에 모여 교단의 존속을 논의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로교의 김관식(그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의 통리였다.), 송창근, 김영주 목사 등이었고, 감리교의 변규홍, 이규갑, 박연서 목사 등이었다. 민경배는 “여기 교권과 정치적 야욕이 동원되었을지도 모른다” 고 말하고 친일의 불명예가 혹시 이 교단의 존속을 통해 상쇄되는 굴절된 정신의 표현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고 말했는데, 이것은 지극히 점잖은 완곡어법이라 하겠다. 또 민경배는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단일 한국교회의 원대한 희망이 이러한 형식으로나마 계승, 확립될 가능성을 주창한 것은 가찬할만한 일이었다.“ 하고 있는데 외형적 교회의 기구적 통일은 그 어떤 것 보다 우선한다는 사고는 극히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의 진정한 통일은 기구적 외형적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고백적 통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임은 김리교측의 퇴장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개회벽두에 변홍규, 이규갑 등 수십 명의 감리교 대표자들은 감리교의 재건을 선언하고 퇴장하므로써 이런 시대착오적인 기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장로교 측에서도 자교파(自敎派) 환원을 희망하는 교역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으므로 마침내 남부교회는 성과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이것은 남한에서의 각 교파의 복원운동을 촉진시키게 되어 1945년 9월 말까지 장로교, 감리교, 구세교, 침례교, 안식교 등 각 교파의 복원작업이 진행되었고, 장로교의 경우 1946년 6월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를 조직하였다. 남한교회만의 총회였기에 ‘남부총회’라고 이름 하였다.

이때 재야 교역자 배은희 목사를 회장으로 함태영목사를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는데 인물의 변화는 있었지만 체제의 변화는 없었다. 즉 배은희, 함태영 두 목사는 실제의 목회자가 아니었으므로 교회 주도권의 실재적 변화가 없었고 이전 「조선교단」때의 지도자가 계속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곧 1947년 4월 18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리 제 2회 남부 총회에서는 남북통일의 조속한 실현이 희박하므로 1942년 10월 16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제 31회 총회를 끝으로 일제의 강압으로 해체되었던 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계승하여 완전한 총회로 계승하여 완전한 총회를 재건하기로 하고 (제 1 남부총회를 32회로 인정하고) 제33회 총회로 개회 할 것을 결정하였다. 남북한의 교회가 하나의 총회를 만들려는 외형적 통일의 흔적은 나타나지만 참다운 교회 재건운동은 시도되지 못했던 것이다.  

해방 후 교회의 재건과 더불어 교회 부속의 기관들의 재건작업도 진행되었다. 신사참배의 강요를 받자 선교사들은 이에 항거하고, 자진하여 그들이 설립한 학교를 폐쇄하고 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이제 해방이 되고, 그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전국의 학교와 병원들이 재건되고, 또 신설되었다. 가령 서울의 연희대학은 전쟁기에 경제전문학교로 개편되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이전 이름으로 재건되었고, 1946년 1월 백낙준 박사가 총장에 취임하여 본 궤도에 올랐다. 세브란스 의과대학도 전쟁 중 아시아 의학 전문학교로 전락되었다가 해방 후 복구하였고, 1955년 3월 23일 연희대학교와 합병하여 연세대학교를 이룩하였다. 이화여자대학은 1945년 4월부터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불리다가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복구되고 1946년 8월 15일 문교부 승인 제 1호로 종합대학교의 인가를 받았다.

한편, 이북이 공산치하에 들어가자 이북에 있던 학교들이 남한에서 복교하는 수가 많았다. 장로교계에서는 숭실대학을 위시하여 숭실 중·고등학교, 숭의 및 보성여자 중·고등학교 등이 서울에서 개학하였다. 숭실대학은 신사참배로 인해 1938년 폐교되었다가 16년 만에 서울의 영락교회에서 재건되기도 했다. 감리교계 학교로는 평양의 광성 중·고등학교가 서울에서, 개성의 호스돈 여학교가 전주에서 재건되었다. 그 외 해방 전에 설립된 교육기관이 거의 모두 재건되었고, 거기에 많은 중·고등학교들이 신설되었다.



2. 경남지방에서의 교회재건운동과 개혁신학 확립운동

(1) 경남노회 재건운동

한국교회 재건운동은 사실 부산·경남지역의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경남은 남한에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중심지였고,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던 주기철,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이 경남노회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 하에 전국적으로 재건 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이들 주남선, 한상동 등은 평양형무에서 출감한 이후 곧장 남하하지 못하고 북한에 남아 있었다. 출옥 후 곧장 남하하지 못했던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즉, 저들은 오랜 감옥생활에서 고문과 매질 그리고 영양실조로 인하여 육체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건강회복을 위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러한 가운데서도 여러 지역의 집회 인도차 바쁜 나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주남선 목사는 거창교회의 청빙을 받고 1945년 11월경에 남하하였다. 주남선 (원명은 주남고 였으나 1942년 평양형무소에서 개명했다.) 목사는 원래 거창교회 창립 교인으로서 집사(1914년), 장로(1919년 3월)로 봉직하다가 1921년 그의 나이 33세 때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1922년 정월부터 전도사로 시무했다. 1930년 4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6월에 목사 장립과 더불어 거창교회 위임목사로 시무하던 중 1938년 심사참배가 장로교 총회에서 불법으로 가결된 후 주목사도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체포되고(당시 50세) 경남노회에서 강제로 거창교회 위임목사직이 해임되었다. 그후 거창경찰서, 진주경찰서, 부산경찰서로 이감되다가 1942년부터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해방으로 출감한 뒤 거창교회 위임목사로 복직 청빙을 받게 된 것이다.

한상동 목사는 출감 후 평양 산정현교회에 시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하가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1946년 3월에 모친(배봉애 여사) 별세소식을 듣고 남하하여 부산으로 왔다.

주남선, 한상동 두 목사의 남하는 결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의 역사가 그 이후의 교회재건과 영적갱신 운동 속에서 뚜렷하게 투영되고 있었다.

1900년 7월 13일 부산 다대포에서 출생한 한상동 목사는 1937년 3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38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9년 10월부터 경남지역에서 신사참배 바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7월 3일 경남경찰서에 구금되었고, 그 후 평양형무소에 이감되어 있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것이다. 주남선, 한상동 두 목사가 남하하기 전, 곧 북한에서 출옥성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재건 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때인 1945년 9월 2일 부산진교회(당시 최재화 목사 시무)에서는 최재화, 권남선, 김길창, 노진현, 심문태 목사 등 20여명이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과거의 범죄를 회개 청산하고 정통신앙에 기초한 교회건설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 곧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는 대표 최재화, 심문태 두 사람의 이름으로 교회건설과 노회복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선언

과거 장구한 시일에 가혹한 위력 하에 교회는 그 정조를 잃고 복음은 악마의 유린을 당하고 신도는 가련한 곤경에 들어있었다. 이를 저항 구호하기 위하여 일선에 선 우리 하나님의 성군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하고, 혹은 옥중에 최후까지 결사적 충의를 다하였던 것이다. 어시호 세계대전(於是乎 世界大戰)은 종국을 고하고 하나님의 성지가 우주에 나타나며, 암흑의 세력은 물러가고 정의의 은광이 오인을 맞이하자 어찌 이 기쁨을 다 말할 수 있으랴. 오늘날까지 노예의 속박 하에 끌려오던 모든 제도 일절은 자연 해소의 운명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는 과거의 모든 불순한 요소를 청산 배제하고 순 복음적 입장에서 교회의 근본사명을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좌기에 의하여 조선예수회 장로회 경남노회를 재건하려는 것이다. 백만 신도는 이에 순은하심을 바란다.

1.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통신앙을 사수한다.
2. 우리는 조선 예수회 장로회 헌법을 전적으로 채용한다.

1945년 9월   일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     대표   최재화, 심문태

이 선언에서 저들은 종교개혁의 후예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사실상 교단시대의 인물로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인물들인데,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여 영어의 몸이 되었던 이들이 임지로 나오기도 전에 교회재건 운동의 기치를 실행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해방당시 평신도들의 항거정신 곧 비진리를 대항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센 교회재건 의지를 의식하고, 저들의 신변확보와 교권을 유지하려는 기만적인 책략이었지 진실한 의미에서의 영적재건 운동은 아니었다.

이들의 교권유지를 위한 계략은 그 이후 역사에서 잘 드러냈다. 이들이 신앙부흥운동 준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선언서를 발표하고 교회개혁을 외쳤지만 김영재 교수의 표현처럼 :저들은 영적갱신 운동의 원수로 남아있었고 이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승리자들의 그늘 아래서 저들의 죄를 신속히 감추었던 것이다.“

그해 9월 18일에는 역시 부산진교회에서 경남 재건 노회가 조직되었다. 1942년 5월 5일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강제 해산 되었고, 따라서 경남노회가 그해 5월 25일에 해산되었다가 다시 조직된 것이다.

경남노회는 1942년(소화 18년) 5월 25일 “경남노회는 발전적으로 해소(解消)한다” 고 발표하고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 경남교구회로 개편되어 김길창 목사가 해방 때까지 교구장으로 있다가 3년만에 다시 경남노회가 조직된 것이다.

이때 일제하에서 범한 죄과에 대한 자숙안이 상정되었는데 그 내용은,
① 목사, 전도사, 장로는 일제히 자숙에 옮겨 일단 교회를 사직 할 것
②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시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등이다.

이 안은 최재화 목사를 중심으로 강주선, 김상순, 윤순영 목사 등에 의해 제안된 것이며, 이때는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 등 소위 출옥성도가 남하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경남노회 지역에서의 자숙안은 소위 출옥성도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것은 「출옥성도」들의 어떤 교만과 독선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투옥되었던 분들은 그들의 출옥과 동시에 그들 자신의 선성성(神聖性)과 그 양심에 충실했다는 ‘정신성’을 과시하여 ‘출옥성자’로 자처하며, 그 보수로 정신적 특권인 자고자만(自高自慢) 독선을 선포하고 신경과민적인 부정공포증(不淨恐怖症)에 걸려 스스로를 세상에서 절연시켰다. 이것은 그들의 신사참배 항거가 성신의 불가항력 은혜의 감화에서 취해진 행위가 아니었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이 그들 자기노력에 의한 계명 준수는 율법주의적 공적사상에 입각한 것이었음을 입증한다.”는 비판은 호소력을 상실한다.

사실 출옥성도들이 「출옥성자」로 자처하며 어떤 독선적인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이 신사참배 반대투쟁과 투옥이라는 공적사상에 사로 잡혔을 가능성이 있고, 또 있었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것이었고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문제는 해방된 한국교회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은 일제치하에서의 범과에 대한 회개와 자숙이며 너나 할 것 없이 겸허하게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교권주의자들이 회개와 자숙 보다는 교권 쟁탈이나 치리회의 주도권 유지에 급급했던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출옥성도들의 태도가 어떠했느냐 하는 문제보다 우선하는 문제인 것이다.

재건노회에서 이 자숙안은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 결의되었다. 그러나 자숙안 대상자가 되어야 할 일부의 친일파적 교권주의자들은 교묘한 수단을 이용하여 노회의 영도권을 장악하므로서 암암리에 자숙안을 폐기시켰다.

이때부터 노회는 동요하기 시작했고 영적갱신 운동은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10여명의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우리가 양심적으로 이미 해결한 것인데 해방이 되었다하여 죄로 운운함은 비양심적이다.”라고 하였다.

1945년 12월 3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경남교회 제 47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교단시대 인사들의 재건노회의 분쟁이 악화되자 재건노회 직원들의 총사직을 요구하고 출옥한 주남선 목사와 노회원들이 맡아서 재출발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때 주남선 목사는 노회의 평화적 재건은 법보다 은혜로 하여야한다고 주장하고, 손양원 목사를 강사로 부흥회를 하여 은혜를 받고 노회를 개회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길창, 배성권 목사 등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자기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이라고 하여 이 집회에 참여치 않았다.

집회후 주남선 목사는 노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수락을 거부하고 노회적인 회개운동과 각 교직자들의 회개운동의 몇 가지 실행조건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대해 찬반양론으로 논쟁이 있었으나 결국 통과되었다. 그리고 결정만 되고 실시되지 않았던 현 교직자들의 자숙을 철저히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노회의 결의를 순종치 않고 여전히 교권 장악운동에 몰두하였다. 자숙안에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들의 주도권 장악운동은 그 후 경남노회를 혼란으로 이끌어갔고 경남노회만이 아니라 한국장로교 전체의 문제로 비화되어 갔다.

1946년 7월 9일 경남 47회 임시노회가 진해읍교회에서 열렸다. 이때는 평양에서 남하한 한상동 목사도 참여하였다.

이 노회에서는 주남선 목사가 노회장에 추대되고 교회의 재건방향은 진전을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일부 교권주의자들은 해방된 한국 교회 갱신을 위한 자숙안에 반대하고 도리어 적극적인 교회봉사가 교회재건의 첩경이라고 주장하면서 교권의 고수를 도모하려고 하였고 출옥신도들을 독선적인 신앙태도라 하여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부 교권주의자들의 작전이 주효하여 다수가 자기 캄프라치에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2)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개혁신학 확립운동

주남선, 한상동 두 목사는 옥중에서 별거되어 있었지만 독일의 패전 소식을 듣고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한국의 독립을 확신하고 옥중에서 교회의 재건방안을 구상하였다고 한다. 이 구상은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로는 수양원을 설립하여 일제의 탄압 아래서 신앙양심을 더럽힌 교직자들을 수양시켜 새출발을 가지게 할 것, 둘째는 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참된 교역자를 양성할 것, 셋째로는 교회를 설립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참다운 신학교육에의 의지로 볼 수 있고, 참다운 신학교육이 교회재건의 기초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출옥한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는 참으로 암담한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교회에 대한 간섭과 탄압이 날로 심해져 사실상 교회의 장래가 암담했고 남한에서는 교직자의 대부분은 영적갱신운동보다는 교권에 집착하여 참다운 대한교회 건설의 가능성이 희박하였다. 또 이 당시 신학교라고는 1940년에 설립된 조선신학교 뿐이었다.

조선신학교는, 1938년 장로교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 이후 평양신학교는 폐쇄되고 당시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구속 혹은 망명하고 신학적인 공백상태였던 1940년에 설립되어 자유주의 신학을 교수하는 학교였다. 이 당시의 상황을 한상동 목사는 이렇게 관찰하고 있다.

‘출옥 이후 이북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남한에 와서 보니 신학교가 있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일본시대 일본식 기독교를 만들려 했던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학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의 주인이 되어 신학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교회를 저들의 손에 맡길 수가 없다는 결론뿐이었습니다.’

한국의 교회를 이 자유주의 신학에 맡길 수 없다는 일념에서 오로지 정통신학을 수립하여 그것을 교회의 지표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학교의 설립을 서두른 직접적이고도 현실적인 동기였다. 그는 신학교 설립을 통해 한국교회에 개혁주의 신학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다. 특히 1946년 6월 12일부터 4일간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 신학교로 가결했을 때 평양신학교의 정신을 계승하는 개혁주의적인 신학교를 설립하는 일은 교회의 긴박한 요청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목사와 신학교 설립을 합의했고 1946년 4월 서울에서 전 만주 동북신학교 교수였던 박윤선 목사를 만나 신학교 설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그의 협조를 얻게 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경기노회 지지를 받고 있는 조선신학교로 가느냐 아니면 한상동 목사가 구상하는 신설 신학교로 가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다가 마침내 한상동 목사의 주장에 협력하여 그해 5월 진해로 내려가 주남선, 한상동, 손양원 목사 등 여러 사람과 더불어 신학교 설립의 합의를 보고 그해 5월 20일 신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23일부터 8월 23일까지 2개월간 진해 하사관 훈련수련관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하기(夏期) 신학강좌를 개최했다. 이것이 고려신학교로 연결되는 신학교육의 시작이었다. 진해는 해방전 조선에 진주한 해군의 총본부였고 일분군함이 항상 정박하였던 곳이며 하사관 훈련수련관은 일본 하사관훈련소였다. 말하자면 일본 군국주의 본부였다. 해방후 이곳에 미 해병대가 주둔했었다. 그 후 부대가 이동한 다음 이곳에서 신학강좌를 개최하므로 개혁주의 신학훈련장이 된 것이다. 이 신학강좌의 수강생은 63명이었는데 그 후에 목사가 되어 잘 알려진 인물들로는 손명복, 이경석, 이인재, 홍반식, 최성봉 등이었다.

이 신학강좌는 한국 신학의 재건이라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한국교회를 향한 개혁주의 신학선언이기도 했다.

1946년 7월 9일 진해읍교회에서 개최된 경남노회 47회 임시노회는 출옥성도들의 신학교 설립을 환영하여 학생추천과 지원을 약속했다. 이 신학교는 한국 장로교회를 이끌 수 있는 권위 있는 학교로써 옛 평양신학교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학교 설립기성회는 만주에 있는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초빙할 것을 결의하고 1946년 7월 남영환 전도사를 특사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전국을 휩쓴 호열자 발생으로, 그리고 해방이후 혼란한 상황 가운데서 만주에 들어갈 수 없어서 박형룡 박사의 도착이 지연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시급한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1946년 9월 20일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부산일신여학교(현재 금성고등학교 위치) 교실 하나를 빌려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날 김치선 박사는 ‘신학과 신조’란 제목으로 설교하였고, 미국 정통 장로교 소속 종군목사 ‘벨솔드’의 축사 등이 있었다. 이 고려신학교 설립이념은 “정통신앙을 파수하여 생활의 순결을 지켜 순교자의 정신으로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개혁주의 신학의 재확립과 개혁주의 교회생활의 재건에 있었다.

교수진으로서는 박윤선 목사, 이상근 선생, 한상동 목사 등이었다. 박손혁 목사, 한명동 목사 등이 강사로 수고하였고 그해 11월에는 한부선 선교사가 다시 내한하여 무보수 교수로 봉사하였다. 교장인 박윤선 목사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출신이었으므로 함일돈, 최의손, 마두원, 한부선 등 웨스트민스터 신학계통의 선교사들과 우호관계가 이루어졌던 것은 당연하다. 특히 한부선 선교사는 만주 봉천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기에 출옥성도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고려신학교와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고신측은 한국에 주재한 다른 장로교 선교부(특히 미국 북장로교)와의 관계는 소원해질 수 밖에 없었고 비협조적일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후일 장로교 총회는 한부선 선교사들을 소위 ‘메첸파’ 선교사라 하여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학제는 본과 3년, 예과 2년, 별과 3년, 여교역자 양성과 3년 등이었다. 초대 교수들은 개혁주의 신학확립을 위해 봉사하였고, 이 당시 특히 강조된 것은 회개와 진리파수(이것은 교지를 ‘파수꾼’이라고 명명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였고, 옛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학제나 교과과정 혹은 성경교육은 평양신학교의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47년 3월 5일에는 교사를 초량교회 유치원으로 이전하였고, 약 한달 후인 4월 19일에는 광복동 1가 7번지로 다시 이전하여 세칭 “보따리 신학교”로 불리웠고, 모일 때마다 회개와 자복과 통회가 있어 “우는 신학교”라고 불리기도 했다. 1947년 4월에는 고려신학교 이사인 송상석 목사(당시 50세)가 자원하여 박형룡 박사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모시기 위해 사선을 넘어 봉천으로 들어가 그를 모시고 9월 20일 무사히 귀국했다.

박형룡 박사는 일찍이 보수신앙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숭실대학을 졸업하고(1920) 그 후 남경에 있는 금릉대학을 졸업한 후(1923) 도미 유학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 신학석사학위를 받고 그 후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에서 1927년 9월부터 9개월간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1928) 그는 1930년부터 평양신학교 교수로 일하다가 1938년 신사참배가 장로교 총회에서 가결되고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일본 동경을 거쳐 만주로 가서 봉천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고려신학교의 초빙을 받고 귀국한 박형룡은 그해 10월 14일 부산 중앙교회당에서(당시 노진현 목사 시무)교장 취임식을 가졌다. 이날 박윤선, 한부선 교수 취임식도 함께 있었다. 박형룡은 “사도적 신학소론”이란 제목의 취임강연을 통해 정통신학 확립을 역설했다. 이때는 조선신학교 학생 34명이 부산으로 내려와 이미 고려신학교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때는 2학기 초로서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교장으로 취임할 것을 알고 편입했던 것이다.

조선신학교는 1940년 설립된 자유주의 신학교육기관으로 1946년 남부총회에서 직영신학교로 인가를 받고 1947년에는 미군정 당국으로 대학인가를 받았던 학교로서 학문의 자유를 외치면서 성서의 역사적 비판과 세계신학에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이 당돌한 신학방법론은 한국 교회에 충격과 반발을 일으켰다. 이 학교에 적을 두고 있던 51명의 학생들은 1947 제33회 총회시에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교수 등의 자유주의적 강의에 반기를 들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일로 이들은 조선신학교를 자퇴하고 그 중 차남진, 한완석, 박창환, 정규오, 조동진 등 34명이 고려신학교로 편입해 온 것이다. 이점은 당시의 고려신학교의 신학적 성격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겠다.


(3) 경남노회와 신사참배문제

1946년 12월 3일 진주 봉래동교회에서 경남노희 제48회 정기노회가 열렸다. 이때 교권주의자들은 사전 선거운동으로 교단시대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고 노회주도권을 잡았다. 이때로부터 신사참배 문제 및 교회재건에 관한 노회분위기는 급선회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이 당시를 회고하기를 “그 때는 누구나 부인할 수 없이 신사참배는 죄가 아니라는 공기로 화하였다.” 고 하였다. 이때 모 노회원이 회장으로 하여금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표명하라고 할 때 도리어 신사참배에 대하여는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도록 가결하고 말았다. 모 회원은 신사참배문제에 대해 충분한 토의를 한 후 명확한 결정이 있어야 할 것을 역설했으나 당시로서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이 노회에서는 지난 노회의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론을 제기하여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도 취소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것으로서 교려신학교에 대한 경남노회의 태도는 명백해졌으므로 한상동 목사는 “불손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퇴장하여 버렸다.

그의 탈퇴는 “바로 설 때까지”라는 시한부 탈퇴였으므로 경고의 의미가 더 많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목사의 탈퇴선언은 교계에 큰 방향을 일으켰다. 일부에서는 이 부패한 노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투쟁하기로 하고, 1947년 1월 3일자로 초량, 문창, 부산진, 거창읍, 영도, 남해읍교회 등 6개 교회가 연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고, 부산노회 소속 67개 교회는 제 48회 노회의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를 지지하는 성명서(초안자는 한명동 목사였다)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초량교회에서는 신도대회를 열어 주상수 장로(후에 재건파 목사가 됨)를 회장으로 선출하여 회개운동을 전개하는 등 거센 교회개혁의 봉화를 들자 경남노회는 이 중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947년 3월 10일 구포교회에서 임시노희를 소집하였다. 교권주의자들은 인신공격과 신사참배를 죄로 알고 이에 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한 사람들을 노회에서 처분하겠다고 하였다가 대세가 불리하자 부득이 노회장 김길창 목사 이하 전임원은 총사직하고 비로소 신사참배는 죄란 말을 하고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시대의 범죄사실에 대해 교리적으로 잘못된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한상동 목사에게 탈퇴성명서를 취소하는 성명서를 내라고 종용했다. 이때 한목사는 신사참배는 죄라고 표명한 것은 회개하는 신앙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경남노회 소속 대부분의 교회가 탈퇴성명에 가담하게 되므로 저들의 입장이 난처하게 된 것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고 저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사실 노회임원의 총사퇴는 단지 평신도들의 항거대세에 못이긴 잠정적인 후퇴였지 결단코 자숙하는 의미는 아니였다. 구포 임시노회 소식이 퍼지자 그해 3월 24일 마산 문창교회 등 68개 교회 평신도 대표 200여명이 모여 황철도 전도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경남노희의 부패성과 그 교권주의자들의 비양심적인 태도를 규탄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해방이후의 진리운동은 평신도들의 항거정신이 가져온 결정체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때 일부는 순교자 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다른 일부에서는 “잘 되었으나 못되었으나 내 교회니, 일시적 격분이나 감정을 따라 급속한 태도를 취하느니 보다 서서히 주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리면서 진리파수와 신앙운동을 하면서 노회와 총회를 바로 세워 한국교회를 재건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후자의 의견이 채택되자 일부는 이것은 너무 소극적이며 안일한 태도라고 불만을 토로하고 출옥성도였던 최덕지 목사가 주도하는 재건파로 넘어가기도 했다.

1947년 12월 9일 부산 광복교회에서 경남노회 제 49회 정기노회가 모였다. 여기에서 제 47회 노회시 결의한 자숙안에 대해 불복종한 목사들에게 사과서를 받도록 결의했다.

이 때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는 이사회와 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교회의 원조를 얻는 도시에 적당한 시기에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 승인을 받고자 합니다” 라고 고신의 목표와 운영방침을 밝히므로 교회와의 관계는 다시 회복되었다. 이때 한상동 목사는 47회 노회에서의 탈퇴선언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4) 박형룡 교장의 고신이탈과 경남노회의 분열

1947년 10월 14일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이래 한상동 목사와 박형룡 교장 사이에는 신학교 운영에 관해 약간의 의견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표면적인 차이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째는 총회의 승인을 얻는 문제와 선교부와의 관계였다. 노회와 총회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교회재건을 반대했던 박형룡 박사는 고려신학교를 한국교회를 배경으로 총회직영의 총회신학교로 승격시키는 것을 최종목표로 하고 있었다.
  
“본 신학교는 이사회와 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교회의 원조를 얻는 동시에 적당한 시기에 총회에 청원하여 총회승인을 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박형룡 박사의 신학교 운영방침이었다. 한상동 목사는 이 점에 동의하면서도 그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후론) 또 박형룡 박사는 당시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부선 등 ‘메첸파’ 선교사 외에도 주한 4장로교 선교부와의 관계와 합작을 희망했다. 그러나 한목사는 자유주의적인 선교부의 원조를 거절했다.
  
둘째로 박형룡 박사는 신학교가 전국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총회적 인준을 얻기 위해서는 서울로 학교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과거에 평양신학교가 서울이 아닌 지방(평양)에 있었지만 장로회 신학교로 존속되었던 예를 들면서 고려신학교의 서울 이전을 반대했다.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것은 한마디로 현실 인식에 대한 차이였다.
  
사실 박형룡은 현실 인식에 있어서 한상동 보다 타협적이었으며 한상동 목사를 중심한 인사들의 철저한 자숙과 재건원칙이 사실상 실행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전에 고려신학교 인사들의 입장을 완화하여 전국 교회와 미국 남. 북장로교, 호주장로교, 캐나다 장로교 등 4선교부와의 협상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점은 그가 고려신학교를 떠날 때의 고별 설교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시행도 안 되는) 권징 보다는 복음 전파자 양성에 주력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즉, 철저한 자숙과 영적갱신운동을 일단 뒤로하고 전국 교회를 수용하는 신학교육을 우선시 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현실 인식을 달리하는 신앙노선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서울에 있는 여러 목사들은 박형룡의 상경을 독촉하였고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여기에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과 한부선, 함일돈 등 메첸파 선교사들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인사들의 정치적 계략도, 게제되어 있었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결국 박형룡은 그 이상의 의견대립을 피하고,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고 말았다. 그가 고려신학교 교장에 취임한지 꼭 6개월만이었다.

한상동 목사나 박형룡 목사 양자에게 있어서 한국 교회를 위해서 정통적인 신학교육을 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 인식에는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음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신학교는 어떤 교권주의적 야망에서나 어떤 개인의 지위확보를 위해서 설립된 것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교회재건의 이상을 가진 몇몇 개인의 소명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당시 장로교 전체의 직접적인 요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신학교는 총회의 처리와 교권밖에 있었다. 이것은 이 신학교를 총회와 교권밖에 두므로 정통신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국 교회를 배경으로 하기위해 모처럼의 개혁주의 신학운동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 한상동 목사의 입장이었다. 이것이 한상동과 박형룡의 현실 인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박종칠 교수는 박형룡 박사가 고신교장으로 취임했을 때는 이미 고려신학교가 진해 강좌를 시작으로 (1946년6월) 배태된지 1년이 넘는 기간이 지났을 때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현실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이 시간적인 차이 속에 내재해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타당한 지적이라고 하겠다.

사실 박형룡 박사가 귀국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대했을 때는 해방이 되고나서 2년이 지난 후였고 고려신학교가 설립된지는 1년이 지난 후였다. 그래서 박형룡 박사는 그간의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한 한상동 목사계의 영적갱신운동 세속주의와 자유주의를 대항한 개혁주의 신학적인 열망,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 그 피나는 투쟁의 긴박한 현실을 감득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박형룡 박사가 귀국인사 겸 소감을 말하는 중에 “ 춘풍추우 10년 간 이역에 유리하다가 조국강토에 발을 들여놓으니 금수강산의 경색이 반갑고 백의동포들 면목이 더욱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일 전 세계의 기독교회는 전후 피곤으로 지리멸렬하여 일대부흥을 요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우리 조선교회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동서양 여러 교회에서 부흥의 방법이 여러 가지로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57장 15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케 하십니다.

전후 피곤이 심한 우리 교회는 겸손과 자기 부족을 깊이 반성하는 동회로서 부흥의 은혜를 고대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 전파의 대사업에 합심 협력하여 해방조선의 기독교화를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비록 전후 피곤이 있으나…. 이 자유를 충분히 이용하여 복음 선도에 일일(一, 日)이라도 속히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에 더 많은 수의 전도사를 양성함은 우리 교회의 급무이고 그들의 전도의 효능이 많기 위하여 성경적 복음적인 신학교육이 급히 필요합니다.
  
이 귀국 소감에서 박형룡은 해방된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복음전도의 긴박성을 강조하고 전도상 양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에 반대하여 투쟁해온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의 고투를 거의 의식하고 있지 못한 인상을 주고 있다. 도리어 해방후의 한국사회와 교계의 모습은 단순히 “전후 피곤”으로 표현하므로 (이 짧은 귀국소감 속에서 “전후 피곤”이란 말이 4번이나 사용되었다) 불붙는 현실의 신앙투쟁과 개혁주의 신학확립을 위해 사선을 넘고 박박사를 모시고 온 교회지도자들의 기대에 다소 미흡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때부터 현실인식의 차이가 사실상 분명하게 노정된다고 하겠다.

어떻든 현실 인식을 달리하는 신학교 운영상의 견해 차이로 박형룡은 고신을 떠나 서울로 갔고 거기서 별도의 신학교를 설립했다.

박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나 서울로 간 사건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학생과 교회가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 급기야는 조선신학교에서 박형룡을 따라 편입해온 대부분의 학생 등 당시 고려신학교 학생 반수 이상이 그를 따라 가버렸다. 한상동 목사가 받은 충격도 큰 것이었다. 그는 이일로 일주일 간 입원하기에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박형룡이 고려신학교를 떠남으로써 일시 머리를 숙였던 일부 교권 주의자들은 다시 일어나 교권쟁탈전을 맹렬히 전개하였고,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의 교회갱신운동과 교회재건운동의 이념을 흐리게 하고, 장로교회 분열 운동에 한 계기를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떠남은 그 이후의 한국 교회사와 장로교분열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박형룡이 고려신학을 떠나고 나자 전국교회는 묘한 분위기 속에 술렁이고 있었다. 옥중성도들의 기치하에 구체적으로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영적갱신운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투쟁은 한국교회 전체에 대한 양심의 빛이었고 소리였다. 그러나 박형룡 목사가 고려신학을 떠나므로 한국교회로 하여금 그 빛과 소리의 실체를 흐리게 했다.

당시 박형룡 목사는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였고 한국교회가 인정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해방이후 이북에서 한국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하고 (1945년 11월 14일 평북 6노회 교역자퇴수회에서) 교회 재건운동에 관여 했으며, 1947년 10월 14일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이래 한상동 목사와 함께 일해 왔으므로 그들의 외침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남으로 한국교회 정화를 위한 빛과 외침이 도리어 개인적 야심에서 출발된 분파운동이라는 오해를 낳게 했다. 더욱이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라는 인정을 받은 박박사를 수용하지 못하는 독선적 소수라는 비난의 근거를 제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박박사는 고려신학교 측을 반대하는 교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과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묵시적 연합관계가 형성되었고, 신사참배의 죄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한 인사들이 이번에는 박박사의 그늘 밑에 신속히 몸을 숨겼다. 박박사가 이 당시 한국교회 기상도를 분명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크나큰 과오였다. 이렇게 되자 고려신학교 측에 대한 반대와 비난은 더욱 거세어졌고 경남노회는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후론하겠지만 이때로부터 경남노회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한국 장로교 분열의 구실을 주고 말았다. 이점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이후의 역사를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박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난 후부터 경남노회, 그리고 한국장로교회는 신사참배 문제에서 고려신학교 문제에로의 논쟁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박형룡의 그늘 밑에 신속히 은신처를 찾은 이들은 한국의 대표적 신학자였던 박형룡 박사를 수용하지 못한 고려신학교에 비난의 화살을 모았고 이것이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저들의 약점을 만회하는 좋은 방편이기도 했다.

그 첫 화살은 1948년 7월 「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神聖派)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통해 나타났다. 즉 이들은 이 성명서에서

........ 이제 우리는 생각하십시다. 미국의 남북장로교회에서 작당 분쟁을 일삼아 평화와 질서를 의식적으로 파괴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추방당한 극소수의 그들 (메첸파)의 손에 우리 조선 장로교회를 맡긴다는 것은 조선 장로회를 전 세계적인 대 생명체에서 절단하는 것이며................ 또는 그들의 취하는 지도원칙인 사상에 절대 맹종하는 것은 조국을 잊어버리고 타국에 예속하려는 공산주의자와 무엇이 다르리오. 지난 서울총회에서는 고려신학을 총회와 절연하였고...........

이 성명서 발표와 더불어 고려신학교 문제 해결을 위한 임시노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결국 1948년 9월 21일 부산 항서교회에서 경남노회 제 49회 임시노회가 소집되었다. 고려신학교 문제를 논의할 때에 논의의 주제가 된 것은 ①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이탈한 이유 ②고려신학교가 장로교 총회의 승인을 청원치 않은 이유 ③메첸파 선교사를 교수로 채용하는 이유 등에 대해 따졌고, 이 때 한상동 목사가 답변하였으나 44대 21표로 고려신학교 인정취소를 결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출옥 성도와 고신을 지지하는 교역자들은 성명서와 고려신학교 내용을 재조사하기 위한 조사위원 설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1948년 12월 7일에 열린 제 50회 경남노회 (마산 문창교회 별관)에서 노회 신학부장이었던 심문태 목사가 고려신학교 측에 유리한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노회는 고려신학교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없다고 단정하고 종전의 인정 취소결의를 재확인하였다.

또 신사참배에 대하여 양심 운운한 것은 신학박사라야 해결할 문제라는 발언도 나왔다. 한상동 목사는 이 노회에 참석하여 구약을 부인한 사실과 신사참배, 동방요배, 「미소기 바라이」등 이런 일을 한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때 회원석과 방청석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미소기 바라이」까지 했다면서 통곡으로 참회했다.

이때에 김길창 목사는 “미소기 바라이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이것은 처음 듣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김길창 목사는 일제 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연정국장이었고 경남교구장이었다. 그는 휘하의 교직자를 송도앞바다에서 일본의 신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미소기 바라이」(물세례)를 강행시킨 장본인이었다. 이 때 한목사는 그를 제명처분하자고 했으나 이 제안은 6개월 후에 표결하기로 결정하고 폐회했다. 이때로부터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를 지지하는 일파와 고려신학교를 적극 반대하는 교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파와 중간파 등 3파로 분열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니 김길창 목사는 자신들의 호신책으로 그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경남노회를 별도로 조직하려고 하였다. 다음 해인 1949년 2월 19일자로 신앙신조가 다르고 신앙양심에 구애된다는 이유로 별도의 경남노회 조직을 위한 소집통지서를 보내고, 3월 8일 그가 시무하던 부산 항서교회에서 권남선 목사 등과 별다른 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었다. 이해 3월 7일에는 예정대로 마산 문창교회에서 경남 노회 제 51회 정기노회가 개회되었다. 이것은 지난 회기(50회)에서 정기노회를 매년 3월과 9월 연 2차 소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부산의 김길창 목사가 조직했던 노회에 참석했다가 그것이 불법으로 조직된 것임을 알고 마산 문창교회에서 개최된 노회에 참석하여 사과서를 낸 목사들도 있었다.


  3. 고려파 교단의 형성

(1) 총회의 경남노회 문제처리와 평신도들의 항거

경남노회의 문제는 이제는 총회적인 문제로 확대되어 갔고, 고려신학교에 대한 문제는 경남노회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개교한 이래 경남노회에서는 여러 차례의 논란이 있었으나 총회와는 직접 관련이 없었으므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데 1948년 4월 박형룡 박사가 고신을 떠난 이후부터는 총회적인 문제를 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해 4월 20 일부터 서울 새문안교회서 열린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 34회 총회 (회장 이자익 부회장 이태학)에서 전남 순천노회에서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냐는 문의가 제출되었을 때에 총회는 공식적으로 고려신학교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이때는 박형룡 박사가 고려신학교를 떠난 후였고, 그로 말미암아 고신측을 독선적 분파운동으로 여겼으므로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그는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3대 통리였다.)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1949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모인 제 35회 총회(총회장 최재화,부회장 박용의)에서는 여러 노회로부터의 고려신학교에 대한 문의가 있었고, 총회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발표했다.

“경남노회 사건은 한부선파와 관계하지 말고 고려신학교와는 거의 총회가 결정한대로 노    회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일은 총회결의에 위반되는 일이며 삼가 함이 마땅하오며 기타의    모든 복잡한 문제만은 전권위원 5명을 선정하여 심사 처리하게 함이 가한 줄 아오며, 전권 위원은 김정현, 김세열, 김재석, 서정태, 구연직 5씨를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결정에 의하여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들 경남노회문제에 관하여 파송한 5인의 전권위원은 1949년 5월 27일자로 특히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즉,

“한부선 선교사 일파 및 고려신학교와의 관계는 이미 총회로서 결정한 것이니 노회는 순종하여 이를 실행할 것이며 그들이 독선적 태도를 가지고 교회의 분규와 소란을 일으킴으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관계자들에게 강단을 허락하지 말 것이며 제 35회 총회 이후로도 그 학교와 관계를 계속하며 지지하는 자는 총회를 거역하는 행위이니 노회가 적절히 처리 할 일”

이라고 하고 경남 노회를 3개의 노회, 곧 경남노회(부산지방), 경중노회(마산, 통영지방), 경서노회(진주, 거창지방)로 분리할 것을 결의하고 각 노회의 소집책을 임명했다. 이런 것들을 “쌍방 관계자들에게 심사한 후 교회 건덕과 평화와 발전을 위해” 결의한다고 발표했으나 쌍방 중 하나는 고려신학교 측 인사를 가리킨 말인데, 전권위원 5명이 부산에 와서 쌍방을 한자리에 모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총회 전권위원은 고려신학교에 대한 34회 총회 결의를 환기시키고 고신 관계자와의 강단교류까지 금지시킨 것이다. 이 당시는 조신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인준하고 있을 때였기에 당시의 총회의 신학적 기류를 알 수 있다.

이미 19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남부총회가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한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총회안에는 조선신학교를 중심한 경기노회가 상당한 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전권위원이 경남노회를 3개로 분리시키려 했던 것은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진리운동을 분산시키려 했던 것은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진리운동을 분산시켜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인간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전권위원의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경남노회장 이약신 목사는 그해 6월 23일자로,
  
    1. 우리는 총회 전권위원을 불신함

    2. 우리는 적당한 시기가 오기까지 노회를 분립하지 않고 종전대로 경남노회 51노회           (1949년 3월)를 계승한 경남노회 그대로 나아감.

    3. 우리는 총회 전권위원회 결의 발표를 무조건 철회하기까지 불복종을 계시함.

이라는 내용의 항의서를 발표했다. 또 그해 8월에는

  “경남노회의 싸움은 진리를 위한 싸움입니다. 즉 고전 1:20~12에 속한 싸움이 아니요 고      전 11:9을 목표한 싸움인 것을 알아주시면 다행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하고 「경남노회 사건 총회 전권위원회의 경과 상황 발표에 해답함」이라는 반증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또 이때 경남지방에서는 대표적인 대교회들인 부산 초량교회, 영도교회, 진해읍교회, 마산 문창교회, 진주 봉래교회, 거창읍교회 등 8월 18일 현재 111교회가 “총회 전권위원회 결의문을 무조건으로 철회하기까지 불복종을 지속하면서 지난 3월 8일 마산에서 모인 경남 51노회를 계승하는 경남 전체노회(분립하지 아니한 노회)에 속한 교회로서 보조를 같이 할 것을 선언하는 선서서(宣誓書)를 발표했다.

그리고 이때 3분노회에 속한 총 교회수는 50개처 이내였고 그것도 교회총의를 얻어서 참가한 교회는 극소수 뿐 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총회 전권위원의 불법적인 처사에 대한 평신도들의 항거는 대단한 것이었다. 1949년 8월 28일~29일 양일간 마산 문창교회에서는 경남신도대회를 열고, 이에 참가하였던 1천여명은 선서문을 발표하여 경남노회문제에 대한 총회의 부당한 처사를 항의했고, 동일 기독청년면려회 경상대회원 일동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실로 경남노회를 비롯한 진리운동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역할은 대단한 것이었다. 경남노회 문제해결을 위한 전권위원의 노회 3분 결정 외에도 김성려, 노진현, 이필수 등은 김길창 목사측도 아니고 한상동 목사측도 아닌 중립노회를 조직했다. 이렇게 되자 경남노회는 3분5열이(고신, 중립포함)되었다. 이때로부터 총회와 합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노회를 김길창 목사 등이 불법으로 조직한 노회 등과는 구별하여 보통 ‘경남 법통노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중립의 심문태 목사는 1949년 10월 15일 선포문을 발표하고 합동으로 호소하였으나 분열의 불길은 계속되었다.


(2) 제 36회 총회의 경남법통노회(고려파)단절

1950년 4월 21일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되었다. 이 총회는 전국교회의 관심이 집중되었기에 개회 몇 시간 전부터 방청인이 모여들었고 회의시작 시간에는 빈틈이 없었다 한다.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회원권문제로 회의가 중단되었다가 이틀 만에 간신히 개회를 선언하였다. 경남노회문제에 대한 전권위원회의 보고와 조선신학교 문제로 5일간 갑을박론하며 무력과 폭력이 난무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결국 경찰이 동원되는 등 한국교회 70사상 처음 보는 대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의사진행이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증경총회장과 임원회가 연석회의 하여 경남노회 문제에 대한 총회전권위원장 김세열씨의 보고는 기각하고 “경남노회 사건은 별위원 7명(이대영, 박용희, 권세열, 김광현, 김상권, 이인식, 조승제 목사 등)에게 노회합병, 조직, 해벌 등의 권한을 부여하여 경남노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할 것”을 결의하고 9월 5일 오후 7시 30분까지 정회하고 말았다. 이때가 25일 저녁이었다.

이 총회를 방청한 500여명의 신도들은 총회가 정회한 다음날인 4월 26일 오전 8시에 총회 장소였던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교계 지도자의 반성을 요구하고, 신성한 강단에서 폭행한 김갑천(전북노회 총대), 이홍필(경남 3분노회 비총대)등에 대해 각 치리회로 하여금 적당한 치리를 행하도록 진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치욕스러운 총회가 정회된 지 두 달 만에 6·25동란이 일어났다. 그해 12월 24일 성탄축하 예배 때는 이곳 총회 장소였던 대구 제일교회에서 불상사가 생겨 50여명의 주일학교 아동이 압사를 당하는 비참한 사고가 일어났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총회에서 선정한 별위원 7인이 1950년 5월 12일 마산에 와서 교회 대표자를 소집한 다음 총회가 고려신학교 관계자와 관계를 가질 때까지 그들과 관계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등 다음과 같은 3가지 내용을 선포하였다.

① 고려신학교 관계자는 총회와 관계를 가질 때까지 그들과 관계하지 아니할 것을 성명할 것.

② 경남 51노회(1949년 3월 전으로)로 돌아가서 노회를 조직한다.

③ 6월 7일 부산진교회에서 노회를 소집한다.

이와 같은 것은 부당한 불법적인 처사였다. 총회나 별 위원회 활동은 고려신학교와 이들을 지지하는 경남(법통)노회만을 없애려는 의도가 확실해졌다. 이때 178여 교회 중 경남법통노회가 133여개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3분 노회를 지지하는 교회는 26개 교회 정도였고, 19개 교회는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이 불법적인 처사에 대하여 120여 교회 대표들은 다음과 같은 항의서를 별 위원장에게 제출하였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항의서 전전을 그대로 소개한다.

抗議書

별지 서명 날인한 朱萬守 외 249명은 귀 특별위원회에서 발송한 소집통지서에 의하여 5월 12일 마산집회에 참석하여 경남지방노회에 관한 처사가 불법임을 인정하고 下記 各項이유로 항의하며 來 9월 총회에 진정키로 하고 경남에 別老會 조직여부를 불문에 붙이고 우리는 경남법통노회 임시노회 소집을 청원하여 대책을 강구키로 하고 자에 항의하나이다.

1950년 5월 13일

경남노회 교회 대표자 대회



1. 5월 12일에 마산서 소집된 경남지방 교회대표자회의를 소집한 특별위원회는 총회의를 무시한 처사임(즉 전권위원장 권세열씨의 보고는 기각하고 특별위원 보내기로 가결된 일).

2. 특별위원이 받은 권한 외에 월권적 간섭을 감행한 일(고려신학 관계자에 자복서 제출을 요구)

3. 경남 51노회(1948년 2월전)로 환원시킴은 1948년 12월에 피선된 총회 총대들이 35 총회에 임부원으로 일한 것을 취소할 수 없음.

4.  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목적 중에 경남노회건을 가입한 것은 총회 결의된 것을 재론 없이 파기하지 못함.

5. 경남노회 분열 원인이 신앙신조와 신앙양심 문제임을 여실히 입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신학 관계와 총회 불복종 이유에 귀결시킴은 경남노회 실정을 오인한 처사임.

6. 경남 법통노회가 어떠한 논단을 받을 지라도 우리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자로서 경남 법통 노회를 절대 지키기로 서약한 교인들임을 添言함. -이상-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특별위원장 귀하

또 경남법통노회 측은 1951년 3월 14일 「별위원회」에 별다른 노회가 있을 수 없다고 진정서에 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법통노회란 말은 분열되지 아니한 경남노회 원상 그대로를 말함인즉 불법으로 분열하여 나간 것이 모체인 법통 노회에 들어오면 통일될 터인데 재조직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② 경남 51회 노회를 재조직하였다는 것은 장로회 정치 11장 2조에 위반된 처사인데 기어코 노회를 조직할려고 하면 법통노회에 속한 목사 장로를 다 치리하든지 장로회 헌법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③ 마산서 모인 51회 노회는 35회 총회가 법통으로 공인하였고, 36회 총회가 전권위원회 보고를 기각함으로 법적으로 재승인한 까닭입니다. (이 실권은 아무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④ 우리는 언제든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사람으로 지낼 것입니다마는 장로회 신조와 헌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이 교파를 이루고야 말 터인즉 총회는 특별 고려하여 만일의 불상사가 없도록 사전에 방비하심을 강요하나이다.

      ⑤ 36회 총회시(대구)에 카나다 선교회 수반 선교사가 성경 영감설을 부인한 일은 규명하시고 36회 총회가 장로회 신조 제 1조를 강조하여 위반자를 엄정 처단하겠다는 결의는 꼭 실시하여야 총회의 권위가 설 것입니다. (불이행됨)

      ⑥ 대구총회시에 총회장에게 폭행하고 총회를 수라장화시켜 총회를 정회케한 책임자를 규명하여 후일의 폐를 근절케 할 것입니다.

      ⑦ 총회 별위의 잘못 지도로 지난 3월 14일 부산 중앙교회당에 회집하여 조직된 별노회를 총회가 승인하는 그 시간은 곧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 동란을 일으키는 선전포고인줄로 알게 되겠아오니 파당을 만들일, 교권과 자기 세력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계책을 물리치시고 동란의 큰 책임을 총회가 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생각건대 총회가 고등정책을 쓴다는 것보다 관대한 처분이라는 미명하에서 법통노회에 속한 교회, 목사, 장로, 고신까지 잘라내지 않는다 하고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두고 별위 지도로 조직된 별노회를 인정한다는 것은 경남노회 분규를 영속시킨다는 대명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통일의 최선의 방법은 무조건으로 경남노회를 원상으로 회복시킴에 있을 뿐이며 또한 노회 회무진행은 별위의 부인권 행사를 인정하고 노회를 정돈케 함에 있는 줄로 알고 삼가 그렇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1950년 4월 21일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열렸던 제 36회 총회가 정회하고, 같은 해 9월 5일 에 속회하기로 결의했지만 6.25사변으로 모이지 못하고 다음해인 1951년 5월 25일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36회 총회가 속개되었다. 이때는 총회 장소에 입장권을 발부하여 총회장 참석을 제한 시켰고 고신측 인사는 황순득, 안용준 목사 두 사람만이 입장이 허락되었다. 경남법통 노회 (고신측)의 12 명의 총대는 총회원석에 앉지도 못했다.
  
이북의 공산주의자의 침략으로 임시수도 부산은 온통 피난민의 도시가 되었고 전국의 교회는 경남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적군의 말발굽에 유린당하는 등 민족은 일대 시련에 처해 있었으나 교계의 교권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교회가 시련에 처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고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기는 커녕 도리어 빈축을 사는 싸움하는 집단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 민족의 아비규환으로 부산까지 내려간 이 총회에서 경남지방 특별위원의 보고서가 낭독되었고, 이 일방적인 보고서는 그대로 채택되어 별위원들이 조직한 별노회의 교권적 행동으로 총회에서 축출당하고 말았다.

총회는 합법적인 경남법통노회를 부인하고 불법총대를 받아들이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신앙과 진리를 부르짖고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아무런 정당한 교리적, 정치적 이유 없이 쫓아내고 말았다. 이 총회에서는 신학교 문제로 논란이 심했고, 결국은 조선신학교와 박형룡 박사가 고신을 떠나 서울에서 세운 장로회신학교를 완전히 폐교시키고 단지 총회가 직영하는 신학교만을 세우기로 결의한 것도 특기할 일이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로 폐교되고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되어 해방을 맞자 1946년 제 1회 남부총회는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했었고, 고신을 떠난 박형룡이 1948년 5월 20일 ‘장로교 신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양 신학교의 인가가 모두 취소된 것이다. 총회 결의에 따라 감부열 선교사를 교장으로, 박형룡 등을 교수로 하는 총회직영의 총회신학교를 대구에 설립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장로회신학교를 개편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당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교 총회에 경남법통노회총대가 다시 참석하여 총회와의 관계정상화를 힘썼으나 총회는 경남법통노회가 파송한 12명의 총대를 제명 처단하고 “고려신학교, 그 관계단체와 총회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제언명으로 경남노회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이때 경남법통노회 총대였던 엄주신 장로가 고별선언을 하므로 1950년부터 시도된 총회와의 관계정상화는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에서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경남법통노회(고려파)의 별도의 치리회 조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재건과 영적갱신운동을 전개하던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인사들의 신사참배 죄과에 대한 회개와 자숙안은 끝까지 시행되지 않은채 폐기되고 말았다.

해방이듬해인 19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렸던 남부총회에서 “제 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이를 취소한다”라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범과에 대한 진실된 통회가 없었으므로 1948년 5월 제 34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재취소하는 동시에 신사참배 결의 일에 해당되는 주일을 통회자복일로 정하여 실시토록 했다. (1954년 안동에서 모인 제 388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제삼 취소하고 자숙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도리어 총회가 신사참배의 범과를 통절히 뉘우치지 못하였다는 증거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고, 일부의 교권주의자의 자기명예를 위한 제스츄어에 불과한 것이었다. 신사참배의 죄과는 하나님과 직접 해결될 문제라던 종래의 입장과는 달리 자숙안을 결의한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편 1951년 5월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경남법통노회(고신측)가 축출 된지 약 3개월 후인 그 해 9월 8일 총회는 한상동 목사에게 그가 시무하는 부산초량교회의 명도(明渡)를 요구하고 나왔다. 김양선 목사는 이때의 일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교회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교권주의자에게 바친 때문에 일어난 일대불상사들이었다. 한국교회 70년사에 있어서 이처럼 교권이 행사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초량교회의 약 500여 교인 중에서 오직 20~30명만이 총회를 지지했고 9할 이상의 교인이 한상동 목사와 경남법통노회를 지지했지만, 한상동 목사는 빈손으로 초량교회를 나와서 10월 14일 주일 저녁부터 주영문 장로 집 뜰을 임시 예배처로 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으나 주장로의 뜰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교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예배는 우산을 받쳐 들기는 했으나 비를 맞으면서 온통 눈물바다를 이룬 감격스런 예배였다. 이것이 삼일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삼일교회는 고려파 운동의 중추적인 교회로 성장해갔다.

한편 경북노회에서는 제 48회 정기노회가 1951년 7월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회집되었다. 출옥성도와 고려측을 향상 협력해 오던 경북노회가 돌연 태도를 변하여 고려신학교 학생추천을 엄금하고 고려신학교에 대한 지지자나 관계자들은 8월 15일까지 관계를 끊고 돌아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명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신앙운동을 막아보려는 소이였다. 이렇게 하여 1951년 8월 19일 주일 대구 서문교회에서의 고려파의 신앙노선을 따르는 김주오 장로, 박복달 집사, 신정순 선생, 서옥련 선생, 김계초 선생, 서경애 선생 등 6명을 제명처분 하였다. 그것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교인을 제명한 첫 사건이었다.

이렇게 되자 이들을 동조하는 많은 성도들이 서문교회를 나와서 1951년 8월 26일 대구 서문로교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경북에서 일어난 최초의 고려파 운동이었다. 이 경북지방에서의 고려파 운동은 그 외의 지역으로 퍼져나갔는데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도 경남법통노회를 중심한 고려파 운동은 줄기차기 확산되어갔다. 1951년 4월 당시 이 법통노회를 지지하는 교회가 270개 처에 달했고, 그해 10월 15일자 “청년면려”지에 따르면 “진리를 파수하고자 항의자로 걸음을 걷고 있는 우리 경남노회 안에 있는 교회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방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날로 발전하는 중에 있습니다.” 라 하고 281개 교회의 173명의 교역자가 고려파 운동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또 1951년 12월 10일자 ‘면려청년’지는,

총회가 관계를 끊고 별노회와 전국 각 노회가 부인할지라도 경남법통노회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든든히 서 있으며 소속된 300여 교회는 모두 다 요동하지 않고 만세반석이 되신 그리스도의 터 위에 든든히 서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고 있다.
1952년 총노회가 정식으로 조직될 때는 이미 300여 이상의 교회로 성장했음은 분명하다.


(3) 총노회의 조직

일제하의 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범한 죄과를 회개하므로 한국교회의 정화와 신앙의 순결을 통한 재건을 시도하고 신학적 자유주의와 대결했던 경남법통노회(고려파)는 도리어 독선적이라는 비난과 정죄를 받고 총회로부터 단절되고 말았음은 이미 언급한 바다.

36회 총회에서 실제적으로 절연을 당한 경남법통노회는 1년이 지나도록 총회의 태도가 변함이 없자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모인 제57회 경남법통노회에서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그날 밤 11시 20분에 목사 50명, 장로 37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임시회장 이약신 목사 사회로 찬송46장(신편)을 제창하고 회장이 계2:8~12을 봉독한 후 “죽도록 충성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찬송87장을 제창하므로 예배를 폐하고 역사적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임시회장 이약신 목사가 총노회 설립취지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취지: 현 대한예수교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 계승하기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함.

목적: 전통적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괄하며 개혁주의 신앙운동을 하여 법통노회를 장차 계승키로 함.

그리고는 새 임원을 선출했다. 회장 이약신 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 서기 홍순탁 목사, 회록서기 오병세 목사, 부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주영문 장로, 부회계 김인식 제씨가 피선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경남노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신사 참배한 죄를 자백하고 자숙하는 등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하기 위하여 연구위원을 선정하여 다음과 같이 ‘자숙안’을 결정하였다.

1. 대상: 목사, 장로, 남·여전도사
2. 기간: 3주간(9월 22일~10월 12일)
3. 내용: ①공인죄(신사참배, 신도연맹가입, 미소기바라이)   ②자인죄
4. 방법: 공예배 인도와 성례 주례와 공중기도 인도중시

한편 3주간 자숙한 후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부산 고려신학교에서 부흥회를 개최하고 그 후 삼일교회당에서 총노회 발회식을 거행키로 하였다. 10월 16일에는 발회식 선포문을 낭독하기로 하고 송상석 목사를 기초 위원장으로 하여 4인의 고려신학교 교수들에게 선포문 작성을 위임하였다.

여기에서 특별히 유념할 사실은 경남법통노회가 임의로 총회를 이탈하여 또 하나의 교단 설립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도리어 경남노회와 총회전권위원회와 총회특별위원회의 처사로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로부터 단절되므로 별도의 치리회 조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래서 1952년 10월 16일 오후 7시 30분 총노회를 대표하여 이약신 목사는 아래와 같은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좀 긴 인용이지만 귀중한 문헌으로 알아 전문을 그 당시 철자대로 옮긴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로회 발회식 선포문

인류를 통하여 이루워(이루어)지는 역사는 하나님의 경륜을 버서난(벗어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금 느끼워지게 됩니다.

죽음에 처한 인생을 사망에서 생명의 세계로 옴(옮)기는 십자가의 도 회개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는 하늘의 복된 소식, 감격에서 넘쳐흐르는 회개의 눈물은 우리들의 심로골수(心露骨髓)를 녹여내고 있습니다.

성경에 신앙생활의 3대 요소를 (1) 믿음과 (2) 소망과 (3)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참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참 믿음이 없는 자에게 소망이 있을 수 없고, 하늘에 소망을 두지 아니한 자에게 아버지의 참 사랑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의 믿음은 십자가에 승리며, 우리들의 소망은 하늘에서 빛나서 우리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불태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십자가의 승리가 있을 수 없고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십자가의 승리가 있을 수 없고,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하늘에 소망이 있을 수 없고 참 회개가 없는 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창세 이후로 범죄한 인생이 죄와 사망에 빠져있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붉은 피를 비롯하야 시대시대에 순교성도들의 피로써 진리를 계승시켜 주신 그 크신 사랑의 경륜이 계승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의 뜻하신 이 사랑의 크신 경륜을 일우(이루)시기 위한 신의 명령이 내릴 때마다 순종치 아니한 자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그리하였고, 엘니(리)야가 그리하였고, 요나가 그리하였고, 바울이 그리하였고, 칼빈이 그리하였은즉 금일에 진리의 종들과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이 지상명령이 내리고 있음도 틀림이 없은 사실일 것입니다.

중세기 암흑시대를 광명으로 변케하며 진리를 매몰하던 교권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부패하야 세속적으로 헐러(흘러) 나리고(내리고) 있는 교회를 바로잡아 세우기 위하야 생명을 걸고 싸운 선지와 교부들이며 무수한 성도의 흘린 피가 오늘의 진리노선을 계승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 칼빈 선생께서도 그 시대의 암흑면을 깨치고 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하야 개혁주의(복음화) 운동을 시작한 것이 곧 우리 장로 교회파의 일우워진(이루어진) 교파이니만큼 우리들은 이 개혁주의 진리노선을 떠나서는 장로파 교회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들의 신앙에 만족을 얻을 수 가 없을 것입니다.

왜정말기에 그 무서운 강압과 히날이는(휘날리는) 총검의 위협이 많은 성도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야 신앙생명을 유린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 붉은 심장에서 뛰노는 생명의 피가 진리를 사수키 위하여 혹은 옥에서 죽어나고 혹은 6, 7개 성상의 옥중생활을 감수하였고 혹은 산과 굴속에서 흙투성이의 생활 혹은 유린당한 신앙지조를 지키기 위하야 통회의 눈물바다에 잠긴 자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인생이 약한지라 범죄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뿐만이리요. 시조 아담 때부터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타고(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범죄를 선조에게 전가키고 무책임하기 뻔뻔한 뱃심 좋은 생활을 원치 않습니다.

널피(넓이) 세계교회를 말하기 전에, 한국의 기독교회 전체를 말하기 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언지(어떻게)되어 있는가? 전술한 신학사상과 괴변으로 인한 신앙노선의 곡로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정신을 떠나 이교파적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은 이것이 신앙생활을 붓드러(붙들어)주는 참된 사랑이며, 장로교회 교인된 우리들의 연대 책임감에서 나온 동정과 의분일 것입니다.

일정말기에 떠러터린(떨어트린) 여호와의 영광, 유린당한 성도들의 신앙지조, 상처받은 심령에 자가변호와 자위적 논법으로 시대의 병적인 소위 진보주의라는 신신학사상과 사이비한 복음주의, 허울 좋은 보수주의, 사랑을 요구하되 하나님의 미워하는 것까지 사랑하여 달라는 화평론과 타협론은 속화되어 가는 교권주의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현세생활 처세에 도구로 삼기에는 편의가 될는지 모르나 주님의 몸된 교회를 믿음의 반석 위에 세우고 생명의 등대로 세워 죄악으로 인하여 범죄에 빠져있는 인생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횃불노릇 하기에는 합당치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해방 직후부터 대한 장로회가 장로회 헌법정신으로 복귀하자는 운동을 시작하야 그 방법은 회개운동과 신학사상에 치중하였고 따라서 한국현실에 반영되는 사상문제 등이었습니다.

이 부르지짐(부르짖음)에 호응자도 적지 아니 하였으나 오히려 비난과 비소(鼻笑)로 이 운동을 훼방하는 자의 수도 적지 않다. 우리 한국 장로교회를 임시로 대표하고 있다는 장로회 현가설(現假設)총회를 향하야 혹은 충고 혹은 경고 혹은 진정 혹은 항의와 이의(異議) 등으로 반성과 시정을 요구한 싸움은 결코 대한 예수교 장로회가 밉다던지 시러서(싫어서)가 아니고 장중보옥(掌中寶玉)같이 사랑함으로써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임시 가설총회는 교권주의에 취한 까닭인지, 난치의 병에 걸린 까닭인지 모르나, 반성과 시정요구에는 격분과 증오감으로 반답이 있을 뿐이며 주종(主從)의 순서를 알지 못하고 옥석(玉石)를 구분치 못하는 그들은 적반하장격으로 우리를 이교파적이라 하야 분리단안을 내렸다는 것은 일소에 붓치고(붙이고) 말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우주통일 원칙에 기준하야 한국의 정치적 통일을 기다리며, 한국 장로회 종파 단일성과 한국 장로회 임시 행정기관 단일화를 위하야 최후까지 합동에 노력하여 보왔으나(보았으나) 진리 안에서 하나이 되기에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기 되었다.

불법과 비진리와 불신앙적인 무리들은 일 왈(一 曰) 불법이 법화되었다는 것과 二는 교권주의를 진리에 화신으로 역이며(여기며) 三은 신의 공의를 무시한 무조건 사랑을 신앙의 법칙으로 삼고 있어 그 척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들에게 대한 압박과 비난은 머질(멎을) 줄을 모르고 날이 가두(가도) 새 기세를 뽐내고 있어 가인이 아벨을 대한 것과, 에서가 야곱을 대한 것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부라함(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 대하는 듯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날의 서광을 전망하고 은인자중(隱忍自重)하야 여호와의 지시를 대기중 신학사상과 신앙노선에 따라 교회행정이 갈라지게 된 것은 불가피의 현상을 일우와(이루어) 놓고야 만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미련이 있던 통일기대는 접근될 여지조차 없음이 관파됨으로 우리는 참다 못하야 열매없는 무화과처럼 땅만 허비하며 것가지(겉 가지)로 뻐더(뻗어) 나가는 소위 현 임시 가설 총회를 애김(아낌)없이 베여 바리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헌법대로의 전통적인 장로회 총회를 계승하는 법통총회를 준비하기 위하여 금일 본 총로회 발회식 예배를 거행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구호는 진리투쟁은 최후일각까지이며 전진이 있을 것뿐이고 후퇴 없기를 바래면서, 오 - 할렐루야 아 - 멘

                                             1952년 10월 16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로회 선포문
                                             기초위원 일동

1952년 10월 16일 하오 9시 30분 본회를 대표하야 우를 중외에 선포함.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로회장 이 약 신


이 발회식 선포문 속에 ‘개혁주의’란 말이 3번이나 언급된 것은 고려파 운동의 신학적 성격을 잘 반영해 준다고 하겠다. 고려파운동은 단순히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회 정화운동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적 흐름에 반대한 개혁주의 신학확립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들 고려파는 소위 정통과 전통, 법통이라고 주장해 왔다. 정통이란 신학적 의미에서 정통주의를 지칭함이고, 전통이란 신사참배문제 이전에 정해진 장로교의 신조와 정치, 각종 교리적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법통이란 장로교치리회의 합법적인 계승이라는 점에서 사용된 말이다.

총로회가 조직될 때 총로회의 행정구역은 경남노회 뿐이었으나 지역적 관할을 위하여 산하에 대구지방회, 경주지방회, 전라지방회를 두었다. 그러다가 1953년 3월 부산 삼일교회에서 회집된 제2 총로회에서 경북노회조직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5월 19일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경북노회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경북노회를 필두로 1956년까지 6개 노회가 조직되고 동년 9월 2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고려측) 총회가 역사적으로 조직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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