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노회(고려측) 40년사

2008.06.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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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노회(고려측) 40년사
선지자선교회
자료출처: 진주노회 40년사,
발행인: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진주노회,
편집인: 진주노회40년사 편집위원회, (글.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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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飮水思源)는 말이 있다. 금년은 진주노회가 조직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로서 이제는 오늘의 진주노회의 근원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진주는 서부경남의 중심도시로서, 또 1925년 이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로서 경상남도 지역에서 중요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유가적 정신이 강한 보수적인 도시로서 특히 배일사상이 강했으며, 민족의식과 민족교육의식이 강했던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에 기독교가 전래된 후 복음운동은 인접지역으로 확대되었고,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이 지역 교회와 노회는 고신교단의 설립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념적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서의 복음 전래와 진주노회가 조직되고 발전해 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없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이번에 진주노회 설립 40주년을 기념하여 진주지역에서의 기독교전래 과정과 진주노회의 조직과정과 발전에 대해 정리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진주지역 기독교 선교 초기에서부터 경상대리회, 경상노회, 경남노회를 거처 해방 후 고신교단의 형성과 진주노회의 조직. 합동과 환원. 그리고 그 이후의 진주노회의 발전에 대해 계략적인 과정을 언급하였다.


1. 호주장로교 선교부와 경남지방선교

1) 기독교의 한국전래와 선교활동

기독교와 한국간의 접촉을 보통 1-200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보다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2세기 이전에 한국과 기독교의 접촉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보통 근대이전의 접촉으로 8-9세기경 중국을 통한 경교(景敎,Nestorian)와의 접촉, 1593년 임진왜란을 통한 접촉,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을 통한 천주교와의 접촉 등을 들 수 있다.

개신교의 경우 독일 루터파 선교사로 1832년에 내한했던 귀츨라프가 내한한 첫 선교사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화란, 영국인등에 의한 접촉이 있었고, 보다 직접적으로 한국교회의 형성에 기여한 선교부는 만주지방에서 선교하였던 스코틀란드 연합 장로교회 선교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1872년 중국선교사로 파송된 존 로스(John Ross.羅約한) 멕킨타이어 (McIntyre,馬勤泰)등은 만주지방에서 한국인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고,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882년에 최초의 한글성경, 곧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백홍준, 서상륜에 의해 1883년부터 매서 전도가 시작되었다.

1887년에는 첫 한국어 신약성경본인 [예수셩교젼서] (Ross Version)가 간행되었다. 스코틀란드 연합장로교 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으므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한국선교를 시도하였던 바 후일의 한국교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여러 접촉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1880년대 이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장로교회의 경우 1884년 이래로 미국의 북장로교(1884).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1889),미국 남장로교(1892) 카나다장로교회 (1897)를 통해 선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들 4대 장로교 선교부는 1893년 선교부간의 연합체인 '선교사 공의회'를 조직했는데 이들은 상호 협의와 합의를 거처 선교지역을 분활하였다. 이 분활안을 보통 '예양 협정' (Comity Arrangemen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선교부간의 인적, 재정적 낭비를 막고 단시일 안에 한국을 복음화 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미국 북장로교는 제령, 강계, 평양, 서울, 청주, 안동, 대구, 등 평안도, 황해도 경상북도 지역을 맡게 되었고, 미국 남장로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등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방을 맡았다. 또 카나다장로교(후에 카나다 연합교회)는 함경도지방과 간도지방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선교부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로 불리었는데 이들은 부산과 경남지역을 선교구역으로 하였다. 그래서 진주지방은 호주 선교부의 관활지역이 되었고 호주 선교부에 의해 이 지방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호주선교부의 선교활동

앞서 언급한 바처럼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두 번 째 장로교 선교부는 호주의 빅토리아주 장로교회(Presbyterian Chruch of Victoria)였는데 한국선교는 1889년 10월 데이비스 목사(Rev.Joseph Henry Davies)와 그의 누이 메리 데이비스(Miss Mary T.Davies)양에 의해 시작되었다.

데이비스는 한때 인도 선교사였으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선교사로 일한 지 22개월 후에 귀국하여 멜보른 대학교를 졸업하고 카오필드 문법학교(Caufield Grammar School)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일했다.

그는 다시 인도 선교사로 가려고 했으나 한국선교의 긴박성을 알리는 중국주재 영국성공회 선교단체인 씨 엠 에스(CMS)소속인 월푸(John R.Wolfe)주교의 편지를 읽고 한국선교를 자원하게 되었다.

성공회에 속해 있던 그는 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장로교로 이적한 후 에딘버러의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신학수업을 마친 후 1889년 8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 hip Union)의 파송을 받고 1889년 8월 21일 멜보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한 여행을 시작하였고, 그 해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10월 4일에는 서울에 도착하였고 언더우드(H.G.Underwood). 헤론(Dr.Heron)등과 함께 생활하며 한국어를 습득하였다. 서울서 5개월을 보낸 후 아직 선교사가 없는 지방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한 그는 메리는 서울에 남겨둔 채 1890년 3월 14일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서울을 떠난 그는 수원, 과천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지방을 거쳐 경상도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그는 부산에 도착한 다음 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한국에 온지 겨우 6개월 만이었다. 당시 부산에 체류했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J.S.Gale)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 영선동 뒷산에 매장하였다.

그의 죽음은 호주교회로 하여금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데이비스를 파송했던 청년연합회는 1890년 7월 23일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한국에 선교사를 다시 파송 지원하기로 결의하였다.

또 1890년 창립된 장로교 여선교회연합회(P.W.M.U.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도 데이비스양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결과 1891년에는 청년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멕카이 목사(Rev.J.Mackay)부부와 여선교회 연합회의 파송을 받은 세 사람의 미혼선교사인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퍼셋(Miss Mary Fawcett)양 등 5명의 선교사들이 1891년 10월 내한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부산진에 주택(선교관)을 마련하고 한국인과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구체적인 전도활동을 개시하였다. 그 후 1894년에는 아담슨(손안로,Rev.A.Adamson),1900년에는 엥겔(왕길지Rev.G.Engel),1910년에는메킨지(매견시,Rev.N.Mackenzie),메크레이(맹호은,Rev.F.Macrae),1911년에는 멕크라렌(마라연,Dr.C.McLaren)등 여러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부산, 경남지방에서 값진 봉사를 하였다.

호주 장로교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로 1940년 와킨스(왕영애,Miss I.Witkins)양을 파송하기 까지 7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들은 부산에 선교기점(1891)을 마련한 이후 인접한 경남지역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결과로 진주(1905), 마산(1911), 거창(1913), 통영(현 충무.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설치하고 전도, 교육, 의료 등 3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호주 선교부의 선교지부와 관할지역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교지부\f0 구분  설치년도              관할지역
  부산진지부       1891     부산, 초량일원, 동래, 울산, 언양, 양산, 김해
                            밀양, 창영, 기장, 울릉도
  진주지부         1905     진주일원, 사천, 곤양, 하동, 남해, 삼가, 산청, 의령
  마산지부         1911     마산일원, 함안, 칭원, 창원
  통영지부         1913     통영일원, 거제, 공성, 진해, 용남(통영군)
  거창지부         1913     거창일원, 안의, 함양, 합천, 초개


2 .진주지방에서의 기독교의 전래

진주는 경상남도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적 중심이었고 1925년 이전까지는 경상남도 도청소재였다. 또 이곳은 사회신분상 계급의식이 강했고 경남지방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곳이었다. 선교사들이 볼 때 이 지역은 서부 경남지역에서 중심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이곳의 복음화는 인접지역 선교를 위해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진주지역 선교를 경남지역의 타지역보다 우선 시 하였다.


1) 진주지방 첫 선교사 커를(Dr.Hugh Currell)

진주지방에서 사역한 첫 선교사는 1902년 내한한 커를(Dr.Hugh Currell)의사인데 그는 호주에서 온 최초의 의료 선교사였고 진주지방에서 전도한 첫 외국인이었다. 그는 1915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13년 간 이곳에서 일하면서 진주지방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의사이자 목사이기도 했던 그는 1902년 5월 19일 내한하였다. 아일랜드 북부지방인 안트림(Antrim)에 인접한 카를로이(Carnlough)에서 출생한 그는 1892년 벨파스트(Belfast)에 있는 아일랜드 왕립대학교(Royal University of Ireland)의 퀸스(Queens)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고 의사가 된 그는 만주지방으로 가서 선교사역에 동참하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 당시 아일랜드 장로교회는 만주지방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하고 있었고 또 의료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호주로 인도하였다.

1889년 호주로 이주한 그는 빅토리아주의 벤딩고(Bendingo)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카아브람 (Kyabram)에서 일반의로 2년 6개월간 일하였다. 그 후 그는 한국선교사인 아담슨을 만나게 되면서 한국선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담슨으로부터 한국, 특히 부산 경남지방에서 일할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를 자원하였다.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은 그는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YMFU)의 파송을 받고 1902년 5월 19일 내한하게 되었다.

커를 의사가 내한함에 따라 호주 선교부는 전도와 교육활동에 이어 의료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커를 의사는 1902년 10월에 작성한 1902년 5월부터 9월까지의 사역에 관한 보고서에서 자신은 한국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진료를 시작하였다고 했고 몸이 심히 아픈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환자들을 돌보아야 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시약소를 쓸만한 공간이 없었으므로 부산진의 일신여학교의 작은 교실 하나를 빌려 사용했는데 매일 평균 20여명에게 치료를 해 주거나 약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커를이 한국에 온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았던 1902년 9월에는 부산과 경남지방에 콜레라가 발행하여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일본을 통해 유입된 이 때의 콜레라 때문에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를은 약품과 소독약을 분배하고 주사를 놓아주며 치료에 임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공헌이었고 한국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다. 1903년 엥겔목사와 함께 기장, 기찰, 암평 지역으로 의료순례여행을 다녔고, 아담슨과는 양산지역으로 순회하며 치료와 시약을 베풀었다.

이 당시 부산지방에는 일본인 의사도 있었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운영하는 작은 병원이 있었기 때문에 부산지방에서 사역하던 커를 의사는 진주지방으로 옮겨가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시약소 마저도 없는 경남지방의 다른 곳으로 가서 봉사하는 것이 보다 뜻 있는 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허락을 받아 부산을 떠나 진주로 갔는데 이것이 진주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을 개설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커를 의사 내외가 자신의 조수였던 박성애(1877-1961)부부와 함께 부산을 떠나 진주로 간 때는 1905년 10월 20일이었다. 이들은 진주성 내면 4동(북문안)에 있는 정경철씨 소유 초가집을 임시 거주지로 얻었고 이곳에서 이 지방 복음화를 위한 전도, 의료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2) 전도활동과 첫 교회의 설립

커를의사 부부와 그의 조수인 박성애 부부는 남도 제일의 양반도시이자 배일(背日)사상이 강했던 이곳에서 전도하는 일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견했으므로 우선 의료활동을 통해 간접선교를 중시하였고 또 교육활동을 통해 어린아이와 청소년 그리고 부녀자를 대상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이곳 진주의 인구는 약 4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전도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그의 의료활동 때문에 이 지방에서 신임을 얻게 되자 전도의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곧 거주지를 봉래동으로 이전하였고 이곳에서 초신자들을 모아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05년 설립된 진주교회(옥봉교회라고도 불렸음)였다.

커를의사가 진주에 도착한 지 2개월 후인 1905년 12월에 쓴 보고서에서는 당시의 전도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이곳에서의 저의 사역은 실로 많은 관심을 얻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큰 격려를 받고 있으며 전망은 매우 밝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믿는 자의 수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매 주일마다 3차례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평균 20여명의 남자와 7명의 부녀자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노방전도와 쪽복음서를 판매하는 매서전도도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주하는 한옥이 이 지방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일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좋은 여건입니다.

진주지방에서 첫 집회가 시작된 때는 1905년이지만 조직적인 집회가 시작된 것은 1906년 부터였다. 커를의사와 박성애부부가 전도한 이들이 첫 회중이 되었고 이들은 이 지방뿐만이 아니라 인접한 지역에서의 복음운동에 중요한 도움이 되었다.

진주지방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던 때는 1907년 6월 23일이었다. 이날 10명의 성인과 3어린아이가 유아세례를 받음으로 진주지방 첫 수세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해에 약 30여명이 학습을 받음으로 진주교회는 날로 성장하여 갔다.

박성애는 후일 전도사로(1907), 장로로(1915)봉사하였고,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지방 첫 한국인 목사가 되어 (1919)진주교회의 첫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었다.


3) 의료활동

커를과 박성애는 첫 거주지인 진주성 내면 4동(북문안)에 있는 초가집의 방 한 칸으로 시약소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의료활동의 시작이었다. 커를은 시약소를 중심으로 의료, 보건 증진을 위해 봉사하였는데 비록 시설과 장비가 미약했으나 후일 병원이 설립되기 이전까지 연평균 7,000 명이 의료혜택을 받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당시 이 지방의 가장 흔한 질병으로는 피부병과 종양, 폐결핵, 눈병 등이었는데 이것은 주거환경과 비위생적 환경에서 오는 것이었으므로 환경개선, 위생교육, 검역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를은 이 지방에서의 병원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추진하였다. 호주 장로교 여전도회가 1906년 6월 825파운드를 보낸 이후 호주 교회의 계속적인 지원으로 1913년에는 경남지방 최초의 병원을 개원하였는데 이것이 봉래동에 설립된 '배돈 병원'(Mrs.Paton Memorial Hospital)이다. 이 병원은 호주장로교회의 탁월한 선교사였던 페이튼 선교사의 부인의 서거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녀의 이름을 따라 배돈 병원으로 명명된 것이다.

병원설립이 준비되고 있을 때인 1910년 간호사인 클라크양(Miss F.L.Cler- ke)이 내한하여 진주로 배속되어 커를를 도왔고, 1911년에는 의사 멕클라겐 (Dr.C.I.McLaren)에 내한하여 진주 배돈병원에 배속되었다. 한국명 마라연으로 잘 알려진 멕크라렌은 당시 한국에서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는데 1911년부터 그리고 1939-1941년은 진주 배돈 병원에서 1923-1938년까지는 서울 세브란스병원과 의전에서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다.

1918년에는 여의사 데이비스양(Dr.E.J.Davies)이 내한하여 진주 배돈병원에서 봉사하였다. 그녀는 이미 1910년 내한하여 부산의 일신여학교에서 봉사한 언니(Miss M.S. Davies)와 함께 근 30년간 한국에서 사역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에 온 첫 호주 선교사였던 데이비스 목사의 조카들이었다.

배돈병원에서는 진료만이 아니라 간호사 양성에도 힘을 썼는데 처음에는 간호사는 여성들에게 적절한 직업이 아니라는 오해 때문에 지원자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과부와 문맹자를 간호사로 교육시켰고, 1930년대부터는 지원자가 늘어 자격을 갖춘 여성을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1939년에는 간호사 손양과 이양을 호주 멜보른에 유학을 보냈는데 귀국후 손양은 세브란스에서 이양은 배돈 병원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이 병원 원장으로는 커를(1915년까지),멕크라렌(1915-1923),테일러(Dr.W. Taylor,1923-1938),데이비스(Dr.J.Davies,1938-1941)가 봉사하였다. 배돈 병원은 경남 유일의 병원으로서의 이 지방 의료선교의 중심지였다.


4) 교육사업

커를의사 부부는 이곳에서 의료사업의 시작과 함께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노력의 결과로 설립된 학교가 이 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시원 여학교(The Nellie R.Scholes Memorial School)였다. 이 학교는 커를의사가 진주에 도착한 그 이듬해 그의 집에서 진료소를 열고 집 정원에서 인접한 지역 아이들을 모아 초등교육과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600년의 역사를 지닌 고도(古都) 진주에 세워진 첫 근대학교의 시작이었다.

1907년에는 교육학을 전공한 스콜스양(Miss Nellie R.Scholes 柴校長)이 진주에 파견되었는데, 그녀는 이 지역 교육책임자로서 1919년 4월 사망 시까지 값진 봉사를 하였다. 커를의사 부인에 의해 시작된 이 학교를 시원여학교라고 명명한 것도 1907년이래 12년간 교장으로 봉사한 스콜스선교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학교에서 일한 선교사로는 캄벨(Miss A.M.Campbell,甘梅義)커(Miss. E.Kerr,巨怡得),클레크(Miss F.L.Clerke.可佛蘭西)등이었다.

이 학교는 1921년 당시 재학생이 250여명에 이를만큼 크게 성장하였고 이 지역 유일한 여학교로 명망을 얻었으나 역시 신사참배 거부이유로 일제에 의해 학교 폐쇄령이 내려져 1939년 폐교되고 말았다.

진주지방에는 시원여학교와 더불어 남학생을 위한 광림학교 역시 호주선교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노진현목사, 한상동목사는 목사가 되기 전 이 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한 바 있다.

호주선교부가 운영하는 남자학교는 일정기간이 지난 후 한국인 교회에 운영을 위임한다는 정책을 견지하였지만 광림학교만은 호주선교부 예산으로 유지되어 왔다. 당시로서는 진주의 한국인 교회가 광림학교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선교부는 세계 대공항의 여파로 광림학교 운영에 필요한 선교비 충당에 어려움이 있어 1929년 광립학교를 폐교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결정이었으나 진주의 배돈병원 운영이 보다 시급하였기 때문에 호주선교부로서는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광림학교가 폐교된 이후 학교건물은 경남성경학교가 인수하여 사용하였다.

진주지방에서 일한 선교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괄호안의 연대는 진주지방에서 일한 기간임)

커를(거열후,Dr.H.Currell,1905-1915),
켈리(Miss Kelly,1907-1911),
엘리스 니븐(Miss Niven.1924-1927)
스콜즈(Miss Scholes,1907-1919,
리알(Rev.Lyall 1909-1916),
클라크(Miss Clerke,1910-1920),
데이비스(Miss Davies,1913-1915).
메크레(Rev.Macrae,1910-1913),
메크라렌(Dr.McLaren,1911-1923,1939-1942).
캄벨(Miss Campbell,1911-1922).
켈리(Rev.Kelly,1912-1913).
나피아(Miss Napier,1920-1935),
라이트(Rev.Wright,1924-1928).
커닝햄(Rev.Cunningham.1013-1927).
랭(Miss Laing 1913-1932)
에베리(Miss Ebery,1918-1919),
데이비스(Dr.Davies,1918-1941),
멕코기(Miss McCauge,1930-1940),
커(Miss Kerr.1921-24,1927-28).
츄르딩거(Rev.Trudinger.1925-280),
엔더슨(Rev.Anderson.1033-35).
딕슨(Miss Dixon.1025-36,37-38).
던(Miss Dunn.1936-37).
볼란드(Rev Borland,1929-32,35-39),
에드거(Miss Edger,1934-41),
코트렐(Rev.Cottrell,1933-35),
스타키(Rev.Stuckey,1935-40),
아우만(Miss Aumann.1939-41).


3. 경상대리회, 경상노회, 경남노회 하에서의 진주지방교회


1) 경상대리회 시대

앞서 언급한 바대로 주한 네 장로교 선교부는 선교지역 분활 정책에 따라 각기 다른 지역에서 선교하였지만 하나의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선교부 간의 협의와 합의에 따라 1907년에는 하나의 노회, 곧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노회가 직접적으로 한국의 전국 교회를 관장하기 어려웠으므로 그 휘하에 7 대리회를 두기로 하였는데 경상대리회는 그 7 대리회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진주지방의 교회는 경남지방의 다른 교회들과 함께 경상대리회 관할 하에 있게 되었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될 당시의 경상대리회 산하의 교회수는 186개, 목사는 9명, 장로는 6명, 례교인은 13,110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독노회가 조직된 직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7인에게 목사 안수를 베풀었는데 이들 7인 곧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은 장로교 첫 목사가 되었다.

경상대리회 시대 초기에 장로가 된 분으로 심취명, 정덕생, 이현필, 김봉명, 김응진, 이윤팔 등이 있었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를 보통 경상대리회 시대라고 부른다.


2) 경상노회 시대

노회가 조직된 지 4년이 지난 1911년 모인 독노회에서는 1912년에는 7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시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11년 12월 6일 부산진 예배당에서 경상노회가 조직되었다. 17명의 목사와 10명의 장로들이 모인 이날 창립노회에서는 왕길지 목사를 노회장으로 홍승한을 서기로 선출하였다. 이와 같이 각 대리회가 노회로 개편됨에 따라 1912년 9월에는 [죠션야소교 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진주지방은 부산 경남의 다른 지역과 함께 1907년 이래로 [경상대리회] 관할하에 있었으나 1912년부터는 [경상로회]의 치리하에 있게 되었다.

이해(1912.9)총회에서 보고된 통계에 의하면 경상노회에는 목사 18명 ,장로 18명, 조사 40명, 교인수는 23,985명, 남녀 전도인은 21명, 예배처소는 457개처였다.

1916년 6월 22일 대구 성경학교에서 모인 제12회 경상노회에서는 노회를 경북, 경남노회로 분립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총회에 청원하였다. 경남지방의 교회가 경상노회 관할하에 있던 1912년부터 1916년까지를 보통 경상노회 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3) 경남노회 시대

그 후 1916년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제5회 총회에서는 경상노회가 헌의 한 노회분립안이 가결되어 경상남,북도의 교회를 관장하던 기존의 경상노회를 경북노회와 경남노회로 분리하기로 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경남노회는 1916년 9월 20일 부산 일신여학교 강당에서 조직되었다. 이날 목사 14명(이중 3사람은 한국인 목사였는데, 그들은 심취명, 김기원, 정덕생 이었다).장로 11명이 모인 창립노회에서는 왕길지 선교사가 노회장으로, 정덕생 목사가 서기로 피임되어 경남노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창립노회에서는 부산-마산, 통영-진주, 거창등 3시찰회를 두고 교회를 관할하기로 하였다. 이 경남노회는 1943년까지 존속되다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해방 후 다시 재건되었다.

진주지방의 교회는 부산과 경남지방의 교회들과 함께 1916년부터는 경남노회 관할하에 있었다. 경남지방에서 교역자가 된 초기 인물로는 심취명, 박성애, 정덕생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박성애(1919), 박영숙(1919), 김도식(1920), 김응진(1921), 김길창(1923), 김만일(1924), 박승명(1924), 한익동(1924)이, 목사로 여병섭(고성읍), 박윤민, 권재학을, 1918년에는 오형선, 송상호, 장종일, 최윤기, 이천오, 변기상, 이상소를, 1919년에는 주현성, 배원기, 최사옥, 김덕경, 김석호, 안성욱, 오규욱, 안정순, 주남도, 서해을을, 1920년에는 강우경, 김래봉, 김복식, 허진장, 연식지, 김수정을, 1921년에는 김길창, 이흥필, 최상림, 박시순, 우명두, 강상은 등을 각각 장로로 장립하였다. 이들이 이 지방 초기 장로들이었다.


4. 일제하에서의 교회, 해방과 고신교단의 형성


1)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한국은 거듭된 일제의 침략을 받아 오다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이라는 강압에 의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무단통치를 단행하였고 경찰과 헌병대를 일원화하여 '헌병 경찰 제도'를 만들어 조선인을 혹독하게 통치하였다.

1910년에는 '범죄 즉결법'이라는 무서운 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고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한국사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반도사]를 편찬. 식민사관을 정립하였고, 조선통치를 이념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후일에는 한국어의 사용 금지는 물론 한국인 고유의 성마저 쓸 수 없도록 강요하는 소위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은 일대 수난을 맞게 되었다.

일제 통치 기간 많은 한국인이 징용으로 전쟁터로 탄광 노동자로 징발되어 자유와 인권이 유린된채 이국의 하늘에서 죽어갔고 초등학생에 지나지 않은 12살 아이에서 50대 여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의 부녀자들이 정신대란 이름으로 전장으로 끌려갔다.

이 기간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심각한 것이었다. 일제의 조선통치와 기독교 정책은 일관되게 '분할을 통한 다스림'(Devied and Control)이었다.

특히 1925년 이래로 신사를 건립하고 1935년 이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한국인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일대 탄압과 수난의 역사를 엮어 갔다. 신사참배 강요는 1935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분열, 무력화시키고 식민 통치 방해가 되는 기독교를 탄압할 목적으로 시행된 일제의 정책이었다.

1937년으로 접어들자 시국은 더욱 암울해지기 시작하였다. 7월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였고, 9월 6일은 애국일로 정하여 일본 국기게양, 동방요배가 신사참배와 함께 요구되었다. 그해 10월에는 황국신민서사가 제정되어 모든 모임에서 암송토록 요구되었다. 그리고 '일면일신사'정책을 수립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웠다.

이와 같은 일제의 정책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하였으나 탄압과 회유에 못 이겨 다수의 교계 지도자들이 마지못해 친일적 배교의 길을 갔다.

그러나 주기철, 고흥봉, 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등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고 저항했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경남지방 경우 한상동, 손명복, 이약신, 박경애, 조수옥, 최덕지, 이찬수, 이현속, 주남선, 최상림, 황철도 등이 신사불참배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이다.

또 선교사로서는 한부선(Rev.Bruce Hunt). 함일돈(Rev.F.Hamilton), 마라연(Dr.C.McLaren), 테메시(Miss Tate), 허대시(Miss D.Hocking)등이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지도 후원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전주지방에서는 강문서, 이현속, 황철도, 그리고 미라연, 서덕기(Rev.J Stuckey)선교사 등에 의해 신사참배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진주지방의 중심교회인 진주교회에 강압적으로 신사참배에 동의하는 결의를 하게 하고, 호주선교부와의 협력을 단절하는 문서를 발표하도록 한 일은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천주교(1936.5.25), 감리교(1938.9)는 굴복하였고. 당시 대표적인 교단이었던 장로교는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여 이를 가결하는 큰 수치를 범했다. 이때 발표된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하고 추히 국민정신 총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 적성을 다하기로 期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1938년 총회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했으나 전국에서 신사 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신사불참배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생활의 순결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고된 싸움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 경남, 지방의 경우, 한상동, 최상림, 손명복, 조수옥, 최덕지 등에 의해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들도 1940년 '일제 검거'에 의해 투옥되었다. 이 당시 투옥된 신자는 약 2,0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50명 정도는 옥사했고 해방 후 30여명이 출옥하였다. 이때 출옥한 인사로는 고흥봉, 김린희, 김형락, 김화준, 박신근, 방계성, 서정환 ,손명복, 안이숙, 양대륙, 오윤선, 이광록 ,이기선. 이인재,이현속, 장두희,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채정민, 한상동 등이었다.


2) 경남노회의 해체

경남노회는 1916년 9월 20일 조직되었고 그 동안 일제의 탄압하에서도 굳굳이 발전해 갔으나 1943년 5월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가결하도록 탄압했던 일제는 1942년에는 각 교파가 그 고유한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1943년 5월 5일에는 한국교회를 일본기독교 안에 편입시켜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개편함으로서 1912년 조직되었던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해산되고 말았다.

즉 당시 장로교 총회장이었던 김응순은 1943년 5월 7일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여 발전적이라는 이름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해체하여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개편하였다. 따라서 총회장은 직제상 통리로 개칭되었다. 그래서 그 해 9월에 개최된 장로교총회는 '제32회 총회'가 되지 못하고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제1회 창립총회'란 이름으로 회집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경남노회도 해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916년 조직되었던 경남노회는 1943년 5월 26일부러 해체 된 것이다. 소위 일본기독교 조선교구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창목사 명의로 발표된 다음의 문건은 이 때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拜界,時下 聖戰에 於建施를 慶賀附記이다.

진자 조선 기독교 각파 합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파 자체가 과거의 불비한 조직을 해소하고 현 일본 기독교단 규칙을 기준해서 우리 반도계의 최적당한 규칙을 작성하여 거 5월 5일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의 발전적 해소를 하고 이에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을 결성하게 된 것입니다. 교단 통리로는 좌천 필근씨가 당선되었고 불초교제가 연성국장겸 경남교구장으로 임명되고, 금성동준씨가 경남 부 교구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그후로 더욱 불초 소생을 위하여 선한 지도 있기를 바라마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일회 경남 교구회를 시급히 개최코자 하와 좌기와 여히 통지하나이다.

소화 5월 14일 경남교구장 김길창(인)
경남교구 각 당회장 전

1.일시:소화 18년 5월 25일 오후 2시 상치회
        동년 5월 26일 오후 2시 교구회

2.장소:부산부 중도정 항서교회당


3) 경남 노회의 재건과 총회의 재건

일제하에서 해체 개편되었던 총회와 노회들이 해방과 함께 다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해방후 부산에서는 신앙부흥준비 위원회가 구성되고(1945.9.2)교회의 기구적 재건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는데, 1945년 9월 18일 경남재건노회가 부산진교회당에서 조직되었고, 그해 11월 3일에는 제47회 경남노회가 부산진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주남선목사가 노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타 지역에서도 노회가 구성되자 1946년 6월 12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제1회 '남부총회'가 회집되었다. 한국 전역을 관장하는 총회로 모여야 했으나 분단으로 인해 사실상 이북의 교회와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남한만이라도 총회를 구성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서 남부총회로 모인 것이다. 이 회의 32회 총회인데 이날 총회에서는 배은희 목사를 총회장으로 함태영목사를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렇게 함으로 총회가 재건되었다.


4) 해방과 교회 쇄신운동

1945년 제2차대전의 종식과 함께 조선은 일제 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 이 해방은 정치적 자유만이 아니라 신앙적 자유를 얻는 날이었으므로 조선인에게는 감격적인 날이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일이었다.

해방 후 교회 재건운동과 쇄신운동은 해방된 조국에서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한 당연한 요구였다. 이 교회쇄신운동은 무엇보다도 바른 신학교육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한상동목사와 주남선목사는 1946년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것은 참다운 신학교육 없이는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고려신학교가 정식 개교된 때는 1946년 9월 20일이었다. 부산진의 구 일신여학교에서 개교되었으나 1956년 4월 현재의 부산 송도(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에 교지를 마련하고 교사를 이전하였다. 당시 한국교계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신학자인 박형룡 박사가 초대 교장으로 봉사하였고, 박윤선박사는 고려신학교의 설립 때로부터 교수로 봉사하였는데, 1948년 5월 이후에는 교장으로 1960년 10월까지 만 14년간 값진 봉사를 하였다. 박윤선은 한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 성경신학자로서 고려신학교에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확립한 학자였다.

고려신학교의 설립과 함께 경남노회안에서 교회쇄신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는데 이 일은 한상동, 주남선 등 신사참배를 반대, 투쟁했던 인사들이 주도하였다. 그러나 친일, 부일 협력자들 곧 신사참배에 응했던 인물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충돌하게 되었고 부산, 경남지방에서는 큰 문제가 야기되었다.

교회재건을 주장하는 이들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바른 신학의 확립,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쇄신운동을 주장하였으나 친일적인 교권주의자들은 교회재건 원칙을 거부하고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므로 저들의 약점을 만회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 경남노회는 한상동 목사 등 고려신학교와 출옥성도를 지지하는 일파, 김길창 목사 등 교권주의자를 지지하는 일파, 심문태, 노진현, 이수필 목사 중심의 중간파로 분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길창, 권남선 목사 등은 1949년 3월 8일 부산항서 교회당에서 기존의 교회조직을 이탈하여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경남노회의 분열의 시작이었고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장로교 총회문제로 비약되었다.

남한지역 장로교회의 조직체인 (남부총회)는 이 문제를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당시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경기노회 인사들이 교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진리운동을 분산시켜 그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경남노회를 3개 노회로 분리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6.25동란 중에 소집된 장로교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한 경남노회(이를 '경남 법통노회'라고 했다) 대표들에게는 총회장 입장도 허락하지 않은 채 총회에서 축출하고 말았다. 즉 총회는 김길창 목사가 임의로 조직한 경남노회측 대표를 경남노회 총대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다수의 친일적 인사들의 반대로 교회 재건을 위한 노력, 곧 교회쇄신운동은 좌절되었고 신앙적 정기를 바로잡지 못했다. 마치 일제하에서의 친일, 부역행위자를 처단하지 못하므로 민족정기를 바로 잡지 못한 경우와 같다. 이것은 비극적인 결정이었다.


5) 고신교단의 형성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로부터 부당하게 축출된 인사들은 일년동안 총회와 관계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1951년 4월 대구에서 회집된 제37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경남법통노회 총대를 끝내 받아주지 않고 '제명'을 결의하였다. 이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51년 9월 총회는 한상동 목사에게 초량교회의 명도를 요구하였다. 당시 500여 교인의 90%이상이 한상동 목사를 지지했지만 그는 말없이 초량교회를 떠나 그 해 10월 14일 부산 삼일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교회는 그 이후 고려신학교와 고신교단운동의 중심적인 교회가 되었다.

총회에서 축출된 경남법통노회 인사들은 별도의 조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총노회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고신교단의 출발이었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회장 이약신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 서기 홍순탁 목사, 회록서기 오병세목사, 부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주영문 장로, 부회계 김인식 제씨였다.

총로회에서는 한국교회가 범한 신사참배의 죄를 자백하고 자숙하기 위한 3주간의 특별집회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3주간의 자숙의 기간을 보내고 1952년 10월 1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 발회를 공식 선포하였다.

이 당시 고신교단 곧 총노회에 속한 교회는 320여개 교회였고 이중 90% 정도가 부산, 경남 지역에 위치한 교회였다. 이 당시 진주를 중심한 지역, 곧 후일의 진주노회 관활지역의 교회들로는 다음의 교회들이 있다.


진주: 진주교회, 성북교회, 성남교회, 초전교회(4개처교회)

의령: 의령교회, 갑을교회, 칠곡교회, 상일교회, 부곡교회, 정동교회, 용점교회,
      중곡교회, 마산교회, 성삼교회, 서암교회(11개처)

고성: 중앙교회, 덕호교회, 대하교회, 다옹교회, 계산교회, 신생교회

통영(삼천포): 거제교회, 동림교회, 성상교회, 지세포교회, 삼거교회, 백천교회
              가배교회, 지평동교회, 유게교회, 칠천도교회, 연사교회, 죽로교
              회, 이목교회, 제일교회, 장평교회, 노산교회, 창우교회, 장승포
              교회, 송진교회, 구영교회, 황포교회, 농소교회, 신명교회, 원평
              교회, 화삼교회, 욕지교회(26개처)

진양: 반성교회, 남산교회, 농막교회, 평촌교회, 가산교회, 관봉교회, 소욕교회
      주암교회, 이곡교회, 하촌교회, 봉곡교회, 승산교회, 동지교회, 봉평교회
      대곡교회, 말암교회, 덕의교회, 죽산교회, 용산교회, 신풍교회(20개처)

하동: 중앙교회, 화개교회, 악양교회, 황천교회, 남산교회, 고전교회, 진정교회
      진교교회, 장암교회, 북천교회, 옥종교회(11개처)

사천: 삼천포교회, 정의동교회, 학촌교회, 계양교회, 곤양교회, 중정교회, 원덕
      교회, 원사교회(8개처).

산청: 산청교회, 오부교회, 생광교회, 덕산교회, 단계교회(5개처)

남해: 남해제일, 용소, 상주, 상신, 서대, 장포, 내산(7개처)

이상의 교회는 약 85개의 교회로서 진주지방은 고신교단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5. 진주노회의 조직

총노회가 조직될 당시는 경남지역이 중심이었고 따라서 총노회는 경남노회였다고 할 수 있는데 점차 타지역으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그래서 총노회 하에 대구지방회, 경기지방회, 전라지방회를 두고 해 지역 교회들을 보살피게 했다.

총노회가 조직된 그 이듬해인 1953년 3월 6-7일 양일간 부산 삼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총노회에서는 경북노회 조직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1953년 5월 19일 대구 서문로교회에서 경북노회가 조직되었다. 또 1954년 3월 부산 남교회당에서 개최된 제3회 총노회에서는 경기노회와 전라노회 조직을 결의했는데 이 결의에 따라 1954년 11월 경기노회와 전라노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어 기존의 경남노회에 이어 경북, 경기, 전라노회등 4개 노회로 개편되었다.

1956년 4월 부산 남교회당에서 모인 제5회 총노회에서는 기존의 경남노회를 삼분하여 부산노회와 진주노회로 분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56년 6월 5일 제일영도교회에서 부산노회 창립회가 모여 한상동목사를 노회장으로 박손혁목사를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진주노회는 1956년 6월 19일 진주시 봉래동에 위치한 진주교회에서 조직되었다. 목사 17명과 장로총대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이날 창립노회는 한상동목사의 '예루살렘 공의회의 상황사, 부회장에 조수완 목사, 서기에 정순국목사, 회록서기에 정봉조목사, 회록부서기에 박태수목사, 회계에 정상엽장로, 부회계에 조성진장로를 각각 선출하였다. 그리고 임사부(규칙부 포함), 신학부(시취부), 전도부, 학무부(종교교유 면려부 포함), 재정부(재단부 포함), 헌의부등 부서를 조직하였다.

진주노회 산하에는 4 시찰을 두어 해지역 교회를 시찰토록 하였는데 4 시찰과 관활지역은 다음과 같다.

진주시찰: 진주시, 진양군, 산청군.
서남시찰: 사천군, 하동군, 남해군.
동북시찰: 의령군, 합천군
거창시찰: 거창군, 함양군

이상과 같이 1956년까지 여섯 개 노회가 조직되었으므로 그 해 9월 20일에는 부산 남교회당에서 6개 노회 총대목사 52명과 장로 43명 등 95명이 모여 역사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고신)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늘 우리가 속한 고신교단의 총호가 조직되었다.

1956년 당시 고신교단에 속한 교회수는 568개처로 알려져 있는데 경기노회 지역에 42개교회(7%), 전라노회 지역에 24개교회(3%), 경북노회지역에 112개처 교회(20%)가 있었고, 부산, 경남지역의 교회는 387개처 교회였다(70%).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교회가 진주 등 경남지역에 산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목사는 111명, 전도사 252명, 장로 157명, 세례교인수는 15,350명으로 보고되었다. 진주노회에 속한 교회중 역사가 깊은 교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05년 설립된 교회: 합천읍교회, 초계교회, 수동교회

1907년 설립된 교회: 의령갑을교회, 대의교회, 거창 대야교회, 안의교회,
                    합천 팔산교회.

1908년 설립된 교회: 하동교회, 산청교회, 삼가교회, 삼천포교회, 장대교회

1909년 설립된 교회: 지수교회, 횡천교회, 신원교회, 거창교회


6. 합동과 환원, 진주노회의 합동과 환원


1) 승동측과의 합동과 진주노회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12년 조직된 이후 하나의 치리조직으로 있었으나 해방이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총회로부터 축출됨으로 1952년 고신교단이 조직되었고 1953년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제창하던 김재준목사가 총회로부터 재명됨으로서 '기독교장로회'로 분립되었다.

또 1959년에는 기왕의 장로교 총회가 WCC문제 등으로 다시 승동측(현 합동측)과 연동측(현 통합측)으로 분열되어 장로교회는 4교단으로 분립되었다. 이 당시의 상황을 도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고신교단이 총노회를 조직한지 7년이 지난 1959년 장로교회가 다시 승동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자. 신학과 신앙생활에서 이념을 같이하는 고신측과 승동측은 교단 합동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였다. 사실 양교단은 교회 분열의 와중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0년 9월 양 교단은 해 교단의 인준하에 통합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약 3개월간의 대화 끝에 양교단은 합동을 결의하게 된 것이다.

합동원칙으로는 신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의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이 명시한 12개 신조, 신학은 칼빈주의 신학에 의하여 합동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때 합동은 기념하여 출판된 찬송가 '새찬송가'이다.

승동측과 합동원칙에 동의하였고 고신측은 합동문제를 각노회에서 수의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노회별      가표수   부표수     기권      계
부산노회      38        7         1        46
경남노회      40        0         0        40
진주노회      47        0         0        47
경북노회      37        1         0        38
전라노회       9        0         0         9
경기노회       9        0         1        10
  합계       180        8         2       190

이 결과에 따라 1960년 12월 13일 서울 흥천교회에서 모인 제10회 총회 제2회 속회에서는 승동측과의 합동을 정식 가결하였고 동일 합동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어떻든 양교단이 1960년 12월 13일 승동교회당에서 고신측 130명, 승동측 233명이 모인 가운데 합동총회를 개최함으로서 하나의 교단인 소위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이 조직된 것이다. 합동총회에서는 한상동목사가 총회장으로 김윤찬목사가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합동할 당시의 고신교단에 속한 교회는 약 600개 교회였다. 1960년 9월 통계로 590개 교회로 집계되어 있다. 또 목사수는 126명, 장로 203명, 전체교인수는 6만 6천 7백여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중 세례교인은 17,503명이었다.

교회수를 노회별로 정리하면 경남노회 161개 교회, 경기노회 23개 교회, 부산노회 100개 교회, 전라노회 30개 교회, 경북노회 121개 교회, 그리고 진주노회는 155개 교회로서 고신교단의 가장 규모가 큰 노회였고 교단전체 교회의 약 26%를 점하고 있다.

고신측과 승동측이 합동하게 되자 여러 지역 노회들도 합동노회를 구성하게되었다. 진주노회는 1961년 1월 17일 진주노회 제10회 1차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1960년 12월 19일자 총회장의 '헌법수정 수의건'을 취급하였다. 이 헌법 수정은 고신측과 승동측의 합동으로 인해 헌법 수정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서는 이 수정안을 축조심의한 결과 26:0으로 수정을 결의하였는데 이것이 교단 합동을 앞둔 마지막 노회였다. 그리고 그해 3월 14일 진주교회당에서 합동과 함께 진주노회도 합동하게 된 것이다.


2) 환원

고신과 승동측은 합동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으나 불과 3년이 못되어 각기 원래의 교단으로 환원하였다. 합동원칙이었던 '신학교 일원화'문제 등과 관련하여 문제가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고신측과 승동측은 '신학교는 총회직영으로 일원화하며-'라고 합의하였는데 일원화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고신측의 환원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고신측은 이 일원화의 의미를(승동측의)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는 행정적인 연계성을 가진 일원화된 신학교 체제로 이해하던 것이다. 그래서 부산의 고려신학교은 총회신학교 부산 분교였고 머잖아 폐교될 위기에 있었다.

여기서 위기를 느낀 한상동목사는 1962년 10월 17일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이 고신교단 환원의 시작이었다. 쉽게 말하면 한상동목사는 어렵게 시작한 학교가 폐쇄되는 것을 원치 아니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환원이란 고신측이 승동측과 합동하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때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부산노회의 고신측 출신교역자들은 1963년 7월 29일자로 환원발기회를 조직하고 고신측의 환원을 시도하였다. 또 8월 29일에는 고신측 인사들에 의한 환원반대성명서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구 고신측 인사들에 의한 노회 환원이 시작되었다. 환원은 노회별로 이루어졌다. 1963년 8월 8일 부산 남교회에 모인 목사 23명과 장로 21명은 고신측 부산노회 환원을 결의하고 김영진 목사를 노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서 8월 12일에는 전라노회가 환원하였고 8월26일에는 경남노회가 9월 3일에는 경북노회가 9월 4일에는 경기노회가 각각 환원하였다. 이어서 과거 경북노회 산하 경주시찰로 있던 교회들은 경동노회라는 이름에 새 노회를 조직하였다.


3) 진주노회의 환원

고신교단이 승동측과 합동을 추진하게 되자 진주노회도 해 지역 승동측과 합동하였으나 이제 진주에서도 구 고신측 다른 노회의 경우처럼 환원 발기모임이 시작되었고 1963년 10월 10일 오후 8시 하동군 진교교회에서 환원노회를 소집하였다. 이날 진주노회에는 목사 16명, 장로총대 15인 도합 31명이 모여 노회를 조직하였다. 진주노회의 경우 합동 전에는 155개처의 교회가 있었으나 85개처 교회가 환원에 가담하였으므로 70개 교회를 상실할 결과가 되었다. 특히 진주 시내 교회가 다 환원에 동참하지 않았던 점은 매우 큰 손실이었다.

이렇게 지역 노회가 환원하게 되자 1963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목사 36명,장로 36명이 부산 남교회당에 모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 환원총회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승동측과 합동하여 소위 합동측으로 불리던 구 고신측은 34개월만에 합동측을 떠나 환원한 것이다.

이 당시 환원한 교회는 425개 교회였는데 각 노회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노회  부산   경남    진주   경북   경동   경기  전라  계
교회수      69   143(163)  85     70     27     11    20  425(445)
목사수      32     35      17     13      7      7     5   116
장로수      40     57      38     29      7     16     5   192
세례교인  2,900  3,000  1,100   1,500   623    623   500  10.246

* 경남노회의 환원교회수는 총회에 보고된 총회자료에는 163개 교회로 되어 있음

합동하기 이전이던 1960년 9월 당시 고신 측의 교회는 590개처, 목사는 126명, 세례교인은 17,503명이었으나 3년 후 환원했을 때의 교회수는 425개처, 목사 수는 116명, 그리고 세례교인수는 10,246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결국 고신교단은 합동과 환원으로 합동이전의 교회수의 3분지 1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렇게 볼 때 고신교단의 승동측과의 합동은 일종의 '무턱대고 한 결혼'이었다.

결과적으로 한국장로교회는 다시 4개 교단으로 분리되어 고신교단은 고려신학교(고신대학교)를 중심으로 합동교단은 총회신학교(총신대학)을 중심으로 통합은 장로회신학교(장로회신학대학)을 중심으로 기장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중심으로 각각 신학교육을 행해 오고 있다.


7. 진주노회의 발전

진주노회는 1960년대는 승동측과의 합동과 환원으로 혼란이 있었으나 그 후 꾸준히 발전하였다. 환원 후 약 1년이 지난 1964년말 당시 진주노회에는 97개 교회(당회수 20), 16명의 목사, 36명의 장로, 그리고 목사 외의 교역자는 49명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8개 노회가 있었고 전체 교회수는 475개 교회였다. 이때에도 진주노회는 153개 교회를 관할하던 경남노회 다음으로 가장 큰 노회였다. (이상은 1965년 [교회록]에 근거함)

또 1970년 (9월)진주노회 산하의 교회수는 100개 교회,1977년(1월)에는 110개 교회,1980년(1월)에는 117개 교회였다.

1983년 우리교단 교회수는 788개처로 보고되었는데 이때의 진주노회 산하에는 130개처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 교단 교회의 18%에 해당한다. 또 이 해의 진주노회 목사수는 34명, 장로수는 121명, 세례교인은 4,071명, 그리고 전체 교인수는 15,368명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런 점을 보더라도 진주노회는 고신교단의 중심노회로서 역할을 감당해 온 점을 알 수 있다.

1984년(1월)에는 132개 교회로 증가하였다. 1986년 4월에 모인 제61회 진주노회에서는 거창,함양,합천,일부 지역을 진주노회에서 분리하여 거창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진주노회에 속한 약 40개 교회가 거창노회 관활하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교단을 위한 발전적 개편이었다. 1990년 (1월)에는 진주노회 산하 교회수는 91개 교회였고, 1995년말 현재 진주노회 산하의 교회수는 99개 교회, 목사는 70명, 장로(피택장로포함)는 162명, 강도사 및 전도사는 56명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상의 자료는 해연도 교단 주소록에 근거함).

1994년 우리 교단 제44회 총회는 진주노회 산하인 진주중부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총회는 1952년 고신교단이 출범할 때,곧 총노회가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개최된 이래 40여년 만에 처음으로 진주노회산하 교회에서 모인 총회였다. 이 총회에서는 진주중부교회의 담임목사인 이금조 목사가 부총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금조 목사는 진주중부교회에서만 28년간 시무해 온 진주노회 중심인물로서 고신측이 환원이후 진주지역 교회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고 진주노회 39회, 46-47회, 52-53회, 70-71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금조목사는 1995년 9월 광주 은광교회에서 모인 제45회 총회에서는 교단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는데 이것은 그 동안 진주노회와 교단을 위해 일해온 그간의 봉사에 대한 합당한 예우라고 할 수 있다.

1956년 진주노회가 조직된 후 여러 가지 어려운 일과 난제가 있었으나 노회조직 40주년이 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장 발전해 온 것은 여러 하나님의 종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의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1968년 (10월-추정) 당시 고신교단의 노회는 8개였고(경기,부산,경남,진주,경북,경동,전라,성진노회) 교회수는 516개 교회였는데 진주노회 산하의 교회는 101개 교회로서 고신교단 전체교회의 약 20%에 달했다. 진주노회는 141개 교회로 구성된 경남노회에 이어 가장 큰 노회였던 것이다. 이 당시 진주노회의 관할지역은 진주일원과 진양,산청,의령,합천,거창,함양,삼천포,고성,하동,남해지역이었다([주교교육],1968.12.pp.6-29).


이상에서 우리는 경남지방에서의 기독교전래에서 부터 진주지방에서의 선교활동 그리고 교회 조직, 진주노회의 조직과 발전, 그 후의 과정을 한국교회사와 고신교단의 역사과정 속에서 살펴보았다.

진주지역에서는 1880년대부터 기독교와의 접촉이 있었지만 1905년 커를(거열휴)이 이주해 온 이후 구체적인 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교회가 설립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자 교회조직과 치리회 구성이 필요하였으므로 주한 4 장로교 선교부는 연합하여 치리회를 조직하였는데 진주지방의 교회는 경강대리회, 경상노회, 경남노회, 그리고 해방후 고신교단이 설립된 후에는 진주노회의 치리하에 있게 되었다. 그 후 진주노회는 고신교단의 중심노회를 발전하였다. 고신교단이 승동측과 합동하고 다시 환원하게 될 때 진주노회도 합동과 환원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중에서도 진주노회는 금년으로 노회 창립 제40주년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

진주노회는 한국교회 역사의 격량 속에서도 꿋꿋이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수호하는 치리회로 변함 없이 성장해 왔다. 역사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제를 위한 것, 곧 과거에의 탐색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일의 교회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 대한 탐색을 통해 내일의 교회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글.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