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2007.05.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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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사
선지자선교회

서 론 - 교회사 공부에 앞 서

“예수를 잘 믿으려면 교회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라고 순교하신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실로 우리는 주님이 피 흘려 사신 主의 敎會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그 가운데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보수하다가 간 앞 선 성도들의 모습에서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함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또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시대 따라 사람 따라 타락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경각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은 바뀌고 시대와 상황은 바뀌어도 그 속에 흐르는 원리는 같으니, 인간사(人間事)의 여러 타락, 개혁, 부흥의 원리를 배워 놓으면 시대(時代)를 보는 안목(眼目)이 생겨져서 오늘을 진단하고 앞을 대비하는 준비하는 신앙생활이 되어 큰 유익이 될 수 있고,  또 그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와 접목시킬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반성과 도전의식이 형성되어 신앙에 큰 힘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사를 통하여 수많은 신학을 접할 수 있습니다. 또 수많은 이단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열심있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되고, 교권주의로 타락하고 빠지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교회가 어떤 때 부흥하며 어떤 때에 타락하는 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2년여에 걸쳐 만들어졌다 하나 여전히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또 Touch하지 않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는 것을 자인합니다.  그것은 교재를 가능하면 인물(Persons)중심과 그 시대를 정평정가하며, 오늘과 대조를 시도함으로써 가능하면 신앙의 실리(實利)위주로 나가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그렇게 된 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비록 크게 만족할 만한 교재는 못되지만, 그런대로 유익한 공부가 될 것입니다. 이 교회사 공부를 통하여 자기를 돌아보고 시대를 돌아보는 동기부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길 기원합니다.

           Soli Deo Gloria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애를 써서 만든 사람.

♡ 표지그림 : 화란 암스텔담에 있는 영국 청교도들이 세운 「순례자의 교회」
             17세기에 세웠으며 지금도 이 모습대로이다. 18세기의 펜화를
             박성보 회원이 보고 다시 그린 것임.

차 례

특별부록 : 신구약 중간사
서론 -  교회사 공부에 앞 서

제 1 장 . 초대교회 (초기)
       1. 초대교회의 배경 - 국가적배경및 문화종교적배경,바리새파, 열심당원,
                      사두개파, 엣세네파, 시나고게, 디아스포라, 산헤드린어
       2. 초대교회의 시작
       3. 초대교회의 특징
       4. 로마제국의 박해와 순교자들

제 2 장 . 초대교회 (후기)
       1. 속사도 교부
       2. 니케아 이전 교부 - 변증가,헬라교부,라틴교부
       3. 니케아 이후 교부
       4. 이단연구 - 영지주의, 에비온주의, 말시온파, 신플라톤주의
              참고 - 이방종교 (조로아스터교, 미트라교, 마니교)
       5.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의 공인
       6. 초대교회의 변질과 분파주의

제 3 장 . 로마제국교회
       1. 니케야 회의
       2. 수도원 운동
       3.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4. 교황제도 - 이시도리안 교령집
       5. 동서교회분리
       6. 이슬람교

제 3 장 . 중세교회
       1. 기독교의 유럽전파
       2. 샤를레망 대제와 신성로마제국
       3. 교황과 황제 (1)
       4. 교황과 황제 (2)
       5. 교황권의 타락
       6. 십자군
       7. 중세기의 미신신앙
       8. 신약교회 고수주의자들
       9. 중세 교회의 두기둥
제 4 장 . 종교개혁
       1. 종교개혁전의 선구자들
       2. 루터의 종교개혁
       3. 칼빈의 종교개혁
       4. 칼빈주의 VS 알미니안주의
       5. 영국의 개혁
       6.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종교개혁
       7. 재세례파와 예수회

제 5 장 . 근대의 기독교
       1. 청교도 운동, 웨스트민스트회의
       2. 기독교의 미국전파
       3. 경건주의와 모라비아교도
       4. 감리교의 큰 별들 (1)
       5. 감리교의 큰 별들 (2)
       6. 19 세기의 미국교회
       7. 19 세기의 영국교회

제 6 장 . 한국의 기독교
       1. 초기의 선교
       2. 한국교회 급성장과 부흥
       3. 한국교회의 수난
       4. 장로교의 분리
       5. 신흥종교의 난립



참고서적
시드니 휴턴 著    「基督敎 敎會史」          성서교재간행사 「성서백과대사전」
윌리스턴 워커 著  「世界 기독교 교회사」     베이커 著      「신학사전」
정수영 著         「새 敎會史」              삼성출판사     「大 世界의 歷史」
박광성 著         「敎會史」                 정성구 著      「실천신학 개론」
박광성 著         「한국 교회사」            손봉호 著      「사도신경 講解」
모이어 著         「人物中心의 교회사」      신성종 著     「엠마오 성경연구」






신구약 중간사














●차 례


1. 전 마카비 시대
(1)바사 (Perssian Empire)에 속한 시대
   1)앗수르(Assyrian Empire)의 멸망
   2) 페르샤 제국의 등장과 주변국 멸망
   3)페르샤의 멸망
(2)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
(3)애굽에 속국된 시대(B.C285-204년)
(4)수리아에 속국된 시대(B.C 204-168년)

2. 마카비 시대  (B.C 168-63년)

3. 후 마카비 시대 (B.C 63- A.D 70 년)
(1)안티파터
(2)헤 롯
(3)가이샤라 대소동과 예루살렘 함락

참고 - 역대 로마 황제들








서 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유다 멸망 이후부터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어버린 A.D 70년 상간의 공백기간일 것이다. 즉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는데, 신약에 와 보니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궁금함을 풀고자 중에서 쉽게 간추린 내용을 공부코저 한다. 신구약 중간기인 유다 멸망 년도인 B.C 596년에서 예루살렘 멸망인 A.D 70년까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전 마카비 시대
① 바사에 속한 시대 (B.C 536-330년)
② 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
③ 애굽에 속한 시대 (B.C 285-245년)
④ 수리아에 속한시대(B.C 204-168년)

2. 마카비 시대  (B.C 168-63년)

3. 후 마카비 시대 (B.C 63- A.D 70 년)




제1장.전 마카비시대


(1)바사 (Perssian Empire)에 속한 시대

1)앗수르(Assyrian Empire)의 멸망
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무렵 성경의 중심지인 메소포타미아에는우리가 잘 아는 앗수르라는 대 제국이 있었고, 그 위로는 메디아(Media), 옆으로는 리디아(Lidia), 그리고 아프리카에는 애굽(Egypt) 등의 큰 나라들이 있었고, 작은 나라로는 유다, 이스라엘, 시돈, 엘람 등이 있었다.

② 그 중에서 가장 강대국은 앗수르였다.  이 앗수르가 B.C 724년 살만엣셀 5세때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호세아 왕을 포로로 잡고 이스라엘을 3년간 공격 끝에 멸망을 시키고 말았다. (사르곤 2세때, B.C 721년)

③ 이 강대한 제국도 앗슈르바니팔 (B.C 688-627년) 말년에는 스키타이인의 침입과 내부 반란 사건, 그리고  B.C 626년 갈데아 장군 <나보폴라살>의 신 바벨론 제국을 세움으로 인하여 대 제국은 점차 쇠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죽은 후, 아들들의 상속 싸움으로 인하여 제국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신바벨론 제국의 나보폴라살의 공격과  메소포타미아를 엿보던 메디아(메대)의 칵사레스의  연합군은 마침내 B.C 612년 여름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두달 동안 포위 끝에 아주 철저히 파괴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게 해 버렸다. 앗시리아의 왕은 살해되었고, 거리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수 세기를 걸쳐 고대 오리엔트 전역을 압도했던 거대한 제국 앗수르는 흔적도 없이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2) 페르샤 제국의 등장과 주변국 멸망
① 앗수르의 멸망 후, 오리엔트는 한 동안 갈데아(신바벨론 제국), 메디아, 리디아, 애굽 등으로 나누어져 분립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바벨론(Babylonian Empire)은 느부갓네살(B.C 605-562년) 때에는 황금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② 그는 B.C 586년에 유다를 멸망시켰으며, 애굽과 싸워서 이겨 가나안과 페니키아(Poenecia) 전역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죽음 (B.C 562년) 이후, 바벨론은 급격히 쇠퇴해 가게 된다.

③ 이러한 때에 고대 오리엔트의 종막의 주역을 하게 되는 페르시야 제국(Perssian Empire)이 성장하고 있었다.

④ 폐르샤 왕조의 가계(家系)

           시조(始祖): 아카이 메네스(B.C 7세기 초)
                             ꠐ
                       데이스 페스 (B.C 660년 전후)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ꠐ
장남 아리아람네스(B.C620전후)   차남 키로스 1세(B.C 620전후)
       (파 르 사 왕)                   ( 르마슈와 안샨 총독)
                ꠐ                                    ꠐ
     아들 아르사메스                      아들 캄비세스 1세
     (B.C 580 전후)                         (B.C 600-559년)
                                                     ꠐ
                                             아들 키로스 2세

⑤ 여기서 캄비세스 1세가 사촌인 아르사메스를 쫒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메디아의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게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고 여기서 난 것이 성경에서 바사왕 고레스로 불리우는 키루스2세(CyrusII)인 것이다.  고레스 2세는 오리엔트 4 강국중 메디아, 리디아, 바벨론 3국을 차례로 멸망을 시켰다.

㉠ 메디아의 멸망
하란을 빼앗으려는 메디아 왕을 견제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나보니도스 왕은 젊은 야심가인 고레스 2세와 동맹을 맺는다.  이에 불만인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인 고레스 2세와 전쟁을 벌리게 되나 여기서 고레스2세는 대 승리를 하여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를 포로로 잡고 메디아를 멸망시키게 되는 것이다.

㉡ 리디아 멸망
고레스 2세는 에게해 쪽으로 칼을 돌려 리디아 왕 크로에수스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불응하자 할리스 강 유역에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승리가 없는 가운데 겨울이 되어 봄에 다시 싸우기로 기약하고 돌아간 크로에수스에게 고레스 2세는 봄을 기다리지도 않고 수도 사르디스(사데)로 진격하여 리디아를 멸망시켰다. (B.C 546년)

㉢ 동방으로
그후 고레스 2세는 동방의 이란 고원을 차례로 함락하여 점령하였으며, 이어 중앙 아시아인 아크사르테스(시르)강 - 아랄해에서 천산산맥 쪽으로 흐르는강- 까지 수비대를 두었다.

㉣ 바벨론의 멸망
이어 그는 쇠퇴해진 바벨론을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켰던 것이다. (B.C 538년) 이때 섭정 왕자 벨사살이 저항을 하였으나 곧 멸망당하고 말았다.

㉤ 유대인의 본국 송환
그후 그는 B.C 536년에 유대의 왕자 세스바살을 위시하여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등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폐허된 예루살렘의 성전을 건축케 하였던 것이다.

3) 페르샤의 멸망
고레스 2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 : 성경의 아닥사스다 (B.C 530-522년 재위)는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중지시키고 애굽을 공격하여 멤피스를 함락시키고 애굽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 캄비세스 2세가 죽자, 그가 아들이 없는 관계로 그의 사촌인 다리우스1세 (B.C 522-486년)가 왕 위에 오르게 되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완성이 된다.  이 왕 때 영토는 인도까지 병합하게 된다. 그러나 폐르샤 제국은 B.C 498년 아테네와의 제 2 차 페르시야 전쟁 - 일명 마라톤 전쟁  아테네가 이김 마라톤의 기원- 과  제 3 차 페르시야 전쟁( 일명 살라미스 해전)과  그후에 도 계속 마케토니야와 전쟁을 하는 가운데 국운은 점차 기울어 지게 된다. 그러다가 B.C 336년 알렉산더가 마케도냐 왕으로 즉위하여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와 전쟁에서 이겨, 이란 고원까지 함락시키게되니, 이리하여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고, 유다는 헬라의 통치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B.C 330년)

(2)헬라에 속한 시대 (B.C 330-285년)
알렉산더는 바사를 정복하고, 이어서 애굽을 정복하였으며, 동방으로 인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B.C 323년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인하여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  그가 죽자 헬라 제국은 네 장군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① 애굽 - 프틀레미 (Ptolemy)
② 마케도냐, 그리이스 - 안티파터 (Antipath)
③ 동북부 트리키아 - 리시마쿠스 (Lysimachus)
④ 수리아 - 셀루커스 (Seleucus)

유다는 처음에는 프톨레미와 셀루커스의 경합지 였으나 마침내 프톨레미의 통치에 들어가고 말았다. (B.C 285년)

(3)애굽에 속국된 시대(B.C285-204년)
이 때 주목할 만한 일은 프톨레미 2세의 명령에 의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구약 성경 70인역(LXX)이 헬라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70인경은 히브리어를 모르는 헬라어권 문화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유대교를 전하는 큰 공헌을 하였으며 신약에 인용된 구약 성경이 모두 70인경에서 왔다는 사실로도 그것이 신약 시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4)수리아에 속국된 시대(B.C 204-168년)
① 애굽과 수리아와  싸움에서  수리아가 이겨 유다는 수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이 때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는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인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가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 12년 동안 볼모로 잡혀 있다가 온 자로서, 모세 율법에 충실한 모든 유대인들을 개종시키지 아니하면 다 죽여 버릴려고 하였다.

② 그리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자, 할례를 행하는 자, 히브리어 성경을 가진 사람은 다 사형에 처하였으며, 곳곳에 이방 신상을 세웠다.  더우기 예루살렘 성전 가운데 쥬피터(Jupiter)의 신상을 세우고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의 피로 제단을 적시었다. 이것이 마카비의 혁명을 가져오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제2장. 마카비 시대(B.C 167-63)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유대교 말살 정책에 , 모딘(Modin)의 늙은 제사장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그의 다섯 아들과 함께 수리아의 관원을 죽이고 대항함으로써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계속 실패하였으나 결국은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마타디아스의 큰 아들 유다스 마카비가 주피터의 우상 숭배로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한 후,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11월 25일을 하누카 (빛의 절기)라 하여 지켜오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부터 이스라엘은 하스몬 (마타디아스의 고조 할아버지)家의 통치시대가 계속되어 그런대로 명맥이나마 독립을 유지 하였던 것이다.

하스몬 가계(家系)
                         마타디아스
                             ꠐ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ꠇ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ꠐ               ꠐ        ꠐ
유다스마카비    요나단       시  몬
        ꠐ
                          요한 힐카누스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알렉산더 얀네우스                  아리스토 불루스
         (B.C 102-76)
동생 미망인과 결혼하여 국민의 반감을 삼
        ꠆ꠏꠏꠏꠏꠏꠏꠏꠏꠍ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ꠐ        ꠐ
힐카누스2세             아리스토불루스2세 (B.C 66-63)
대제사장                알렉산드라가 죽은 후 형을 물리치고
아내 알렉산드라는 王            왕이 됨.

이렇게 되니, 시몬의 손자 힐카누스 2세는 왕위를 찾기 위하여 당시 시리아에 와 있던 로마 장군 품페이우스에게 당시 에돔 총독인 안디파터 (마태1장의 헤롯 아버지)를 통하여 중재를 의뢰하였다. 이에 품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삼 개월 간 포위 공격하여 아리스토불루스 2셀르 잡아 로마로 데려가고 힐카누스2세 역시 왕이 되질 못하였다. (B.C 63년) 이리하여 마카비 시대는 끝이 나고 로마의 속국시대가 시작되어 헤롯 가문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제3장. 후 마카비시대(B.C62-AD70)



(1)안티파터
① 후 마카비 시대란 한 마디로 로마의 통치시대를 말한다. 이 때 부터 유대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은 안티파터와 그의 둘째 아들인 헤롯이다.  안티파터는 처음 품페이우스(Pompeius)를 지지하였으나 품페이우스가 케사르와의 권력투쟁에서  몰락하였기에 케사르쪽으로 기울어졌다.

당시의 애굽의 왕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이렇게 두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또한 부부였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에 쫒겨 나 있었다. 이때 케사르에게 클레오파트라는 단신으로 보호를 요청하며 숨어 들어왔다.  22세의 나이로 그는 케사르의 마음을 사로 잡았고, 케사르는 클레오파트라가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프톨레미 13세와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안티파터가 케사르에게 3,000명의 군사를 보내 도와 주었다.

그러나 안티파터는 나중에 힐카누스 2세 파에 의해 독살되고 말았다.그러나 그의 둘째 아들 헤롯은 로마로 가서 안토니우스의 환심을 사서 그의 추천으로 원로원에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케사르가 황제가 될려다 부르투스 등에게 암살을 당한 뒤, 2차로 출범한 삼두정치의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안토니우스 중 한 사람이었다.


(2)헤 롯
헤롯 (재위기간 B.C 37 - 4년)은 헬라화 정책을 급진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행동을 하였다. 그는 정치가로서, 건축가로서는 유능하였지만 가정생활은 대단히 불행하였다. 남을 믿지 못하는 그의 성격은 10명의 아내 중 2명을 죽였고, 처남 하나와 아리스토불루스 등 아들 셋과 장모까지 죽였다.  더우기 아기 예수를 죽이기 위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이를 모두 죽인 것을 우리는 마2:16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 헤롯이 B.C 4년 70세의 나이로 죽은 후,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영토는 세 아들에게 나누어 졌다.

아켈라오 - 팔레스틴 남쪽 부분 ( 마 2:22)
빌    립 - 팔레스틴 북동쪽    (눅3:1, 막6:17)
헤롯 안디바 - 갈리리와 베뢰아 (눅3:1)


이 중 아켈라오와 안디바는 친형제이며 빌립은 이복(異腹) 형제였다.
아켈라오는 분봉왕 9년 동안 백성들을 너무 압제적으로 다스려 A.D 6년 당시 로마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면직시켜 지금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로 유형을 보내 버렸다. 빌립은 요단 동쪽 지역에 도시를 만들어 황제를 존경하는 뜻으로 그 이름을 가이샤라 빌립보 (마16:13)라 하였다.

안디바(재위 B.c 4-A.D39년)는 헤롯의 아들 중에 가장 유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로마로 여행하는 도중에    그의 이복 동생 빌립의 아내인 헤롯1세에게 죽은 아리스토불르스의 딸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고, 헤로디아는 헤롯의 현 부인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의 공주인 아레타를 물리칠 것을 조건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마 14:4과 막 6:18에 있듯이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마 14:10)

A.D 39년 헤롯 안디바는 현 본봉왕 지위보다 더 높아지기 위하여 로마에 간 사이에 헤롯1세의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먼저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눅3:1의 디베료)에게 고발하여 헤롯 안디바를 쫒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았다. 이 헤롯 아그립바 1세 (재위 A.D 37-44년)가 행12:1-3에 있듯이 사도 야고보를 죽였고, 베드로를 체포했으며 초대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을 괴롭힌 사람이다.  그는 A.D 44년에 죽었고, 그후 행25:13에 나오는 즉 사도 바울의 변론을 듣던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즉위하였다.

헤롯의 가계 (家系)
                      안티파터
        ꠐ
                        헤 롯-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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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켈라오      빌 립   헤롯안디바   아리스토불루스1세
(마2:22)     (눅3:1)   (눅3:1)     아버지인 헤롯1세
                      세례요한을      에게 죽음
                      죽임(마14:10)        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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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 아그립바1세
                                   (행12:1에 나오는 헤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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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 아그립바2세
                                  (행25:13에 나오는 헤롯)

(3)가이샤라 대소동과 예루살렘 함락
① 이렇게 하여 계속 로마의 통치를 받아 오던 중 A.D 66년에 유대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것은 헬라인들은 유대인의 시민권이 없음을 주장하였는데, 로마의 관리들은 헬라인들에게 유대의 시민권을 줘 버렸던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② 이에 로마는 A.D 70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황제 때, 황제의 아들 디도 장군은 정예의 4군단을 이끌고 4월 부터 9월 까지 격심한 공격을 하여 예루살렘은 함락이 되고 여호와의 성전도 성벽도 도시도, 다 폐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전사한 자가 110만명, 포로가 97,000여명이라 전해진다.

③ 이어 A.D 132-135년에 걸쳐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전멸하고 말았다. 이후 부터는 유대인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만 1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 함락 기념일에만 폐허된 여호와의 성전 벽에 매달려 잃어버린 가족과 나라를 생각하며 통곡의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허가될 뿐이었다. 이것이 지금도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통곡의 벽」이다.

④ 이리하여 그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되어 세계 각처로 뿔뿔히 흩어져 유랑하며 갖은 핍박과 설움을 겪으며 약 2,000여년 간을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일찌기 예수님이 마24:1-2에서 말씀하셨듯이 성전의 돌 위의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무너뜨리게 된다는 예언과 마27:25에 있듯이 포악한 군중들이 빌라도를 둘러싸고 큰 소리로 외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 달고 대신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던 그 날의 스스로 자원했던 저주가 그로 부터 얼마 후에 분명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참고 - 역대 로마 황제들
Julius Caesar (B.C 46-44) - Augustus : 옥타비아누스(B.C31-A.D14) 예수님탄생 - Tiberius(A.D12-37) 예수님처형 - Caligula (37-41) - Cladius (41-54) - Nero(54-68) 바울처형 - Galba(68-69) - Otho (69) - Vitelius(69) - Vespasian(69-79)예루살렘 멸망 - Titus (78-81) - Domitian(81-96)그리스도인 박해, 사도요한 유배 - Hadrian(117-138) - Antonius Pius(138-161) - Marcus Aulelius(161-180) - ----  Constantine(306-337) - Jullian(361-363)다시 이교신앙회복 - Jovian (363-364) 기독교신앙 재수립 - Theodosius(378-395) 기독교 국교 선언
                        1981년 1월 30일 완성
참고서적
신성종 著  엠마오 성경연구   배제민 著  구약역사개론
오 할레이 著 성서핸드북   삼성출판사  전집 대세계의 역사
             ① 극동의 여명            ② 그리이스, 헬라
             ③ 대로마 제국
제1장. 초대교회(초기)

제 1-1장. 초대교회의 배경

1. 정치적 사회적 배경
초대교회는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유대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리고 당시 유대에는 헬라인, 로마인, 그리고 여러 타민족들도 있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다. - 신구약 중간사 참고

(1) 애굽시대 (BC 1600-1200) - 출애굽과 해방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야곱때 애굽으로 내려가서 430년 동안 거대한 민족을 이루었다. 후에 모세의 지도로 가나안에 돌아와 4-500년동안 강대한 왕국을 세운다. 후에 솔로몬의 말년에 나라는 남북으로 분열된다. 북쪽의 10지파는 ‘이스라엘’이라고 하였으며 이 나라는 BC 721년 앗수르(Assyria)에게 멸망되고, 남쪽의 두 지파는 ‘유대’라 하여 BC 586년에 바벨론(Babylonian Empire)에 의해 멸망된다.


(2) 바벨론 시대 (BC606-536) - 나라의 멸망과 포로
BC 586년 완전 멸망되기 이전에 (BC 606) 포로되어 갔던 이 민족은 포로생활 70여년을 보낸다. 그 후 BC 536년 포로들이 본국에 돌아와 성전 재건과 함께 국민생활을 하게 된다.


(3) 메대.바사시대 (BC 536-330) - 포로의 석방과 귀환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풀려 고국으로 귀환해서 성전재건과 신앙운동을 회복하려고 진력한다. 이 무렵에 구약성경이 모두 완성된다.


(4) 헬라시대 (BC 330-167) - 헬라문화와 언어생활
알레산더 대왕이 BC 336년 20세의 나이로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의 지배아래 있던 동쪽 나라를 모두 정복한다. BC 332년 팔레스틴을 침략하여 유대인들을 알렉산드리아에 거주케 하고, 자기가 정복한 영토마다 헬라 성읍을 건설한다. 그리고 헬라문화와 헬라어를 보급한다. 알렉산더가 BC 323년에 죽자 제국은 넷으로 분열된다. 동쪽인 시리아는 Selecus가, 애굽은 Ptolemy가 차지한다. 팔레스틴은 애굽에 속하여 BC 301-198년까지 애굽의 지배를 받는다. 이 무렵 유대인들은 대체로 평화롭게 살았고, 알렉산드리아는 유대교의 중심지가 된다. BC 198년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대왕이 다시 팔레스틴을 정복하여 수리아 왕조 지배로 들어간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iphanes:BC 175-164)는 유대교 말살정책을 썼다. 성전을 더럽혀 돼지를 바치고, Jupiter제단을 만들고, 할례를 금하고, 성경을 가진 자를 살해하고 하였는데, 이가 마카비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이리하여 BC 165년부터 100여년 간은 유대가 독립하여 마카비 가문에서 다스리게 된다. 이 시대를 마카비 시대 (Maccabee)라 한다.


(5) 로마시대 (BC 63-AD 476) - 정치적 예속
BC 63년에 유대는 로마의 품페이 장군에 의해 정복된다. 로마는 팔레스틴을 에돔(에서의 후예) 자손인 안티파텔에게 통치를 맡기고, 안티파텔은 자기의 아들인 헤롯에게 유다의 왕위를 계승시킨다. 이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보이려고 성전을 재건한다. 그는 잔인하여 예수님의 탄생시 베들레헴 어린이들을 살해하였으며 부인을 10명이나 두어 그의 많은 아들과 자손들이 신약교회시대에 활약한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유대교의 회당인 ‘시나고게’가 생겨지고, ‘디아스포라’ 또 바리새파, 서기관, 사두개파, 엣세네파, 열심당원, 산헤드린어 등이 생겨졌다.


2. 문화적 종교적 배경

(1) 회당 (Synagoge)
유대인의 회당제도는 바벨론 포로기간 중에 생겨났다. 유대인들이 고국에서 정상적으로 살 때는 성전에서 제사행위로 예배를 드렸으나, 바벨론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었고, 민족은 각처로 흩어져서 제사가 불가능하였다. 이 무렵 포로중인 유대인들이 성전 대신 회당에 모려서 율법을 강론하였고, 시편을 낭독하였다. 이 무렵이 유대교의 틀을 갖추는 시기이며, 포로 후 환국해서도 성전과 함께 회당제도가 각 동리마다 보편화된다.  이 회당제도가 생긴 후에 새로이 생긴 직제가 있다. 그것은 소위 ‘서기관(Scribe)’ 또는 ‘율법사’라는 랍비들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성경을 복사하는 일을 하였으나, 차차 성경 연구와 해석을 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2) 디아스포라 (Diaspora)
유대인들이 포로 귀환 때  다 돌아오지를 않았다. 그들은 바벨론, 앗수르, 시리아, 베니게, 소아시아, 헬라, 애굽, 알렉산드리아, 로마 등 각처에서 흩어져 살게 된다. 이들은 각 나라에 살면서 회당을 중심한 종교생활을 했는데 그것이 바울의 세계 선교의 디딤돌이 된다.


(3) 공회 (Sanhedrin)
BC 3세기에 시작된 유대인 최고의 기관이다. 구성은 71명으로 제사장, 사도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 등으로 구성되었고, 대제사장이 사회를 하였다. 산헤드린의 기능은 종교적, 도덕적, 또는 정치적 일까지 하였다. 종교기능으로는 유대인 전체를 관리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사법권으로 사형을 선고할 수 있되, 로마 정부의 비준을 얻어야만 집행할 수 있었다. 산헤드린의 행정기능으로는 세금 받는 일이 포함되었다. 로마제국은 황제 아래 각 식민지 국가들 위에 총독들을 두었고, 이 총독들은 지방관이나 성읍의 원로들에게 세금징수를 위임하였다. 이렇게 되자 총독의 위임을 받은 산헤드린은 그 일을 세금 청부인인 세리에게 맡겼다. 따라서 세리는 로마 정부의 세금을 직접 걷어내는 임무 수행상 백성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받았다.


(4) 바리새인들 (PHARISSES)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130여년 전에는, 마카비(Maccabees)라는 가문에서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이 때 권력잡은 사람들은 점차 헬라주의(헬레니즘)와 세상권력 욕망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통치자 요한 힐카누스는 제사장 가문들과 동조하여 사두개파(Sadducees)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은 종교적 확신을 갖지 못한 세속적(世俗的)종파였다. 이들은 율법의 깊은 뜻도 모른채 의식만을 주장했으며, 부활이나 인간의 영혼의 불멸(不滅)등을 부인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이 있었으나 국민들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속주의와 헬라주의를 거부하는 쪽이었고, 신앙의 순수성과 율법의 말씀을 지킬려는 입장이었다.  이때 이런 백성들의 입장을 잘 대표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이었다.  바리새라는 뜻은 “분리자”(Separate)를 뜻하는 것이다. 이들은  정치적 종파가 아니었기에 소수였다. 이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었으며 사탄과 천사의 교리도 가지고 있었다. 또 메시야에 대한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바리새파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사도중 가장 학식있는 바울은 스스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하였다.  이들의 시작은 좋았으나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것은, 이들이 나중에 중심은 없고 외식으로 흘러 버린데 있었다.


(5) 열심당원 (Zealots)
열심당원은 바리새파에서 파생된 무리들로서, 로마에 반항 운동을 일으킨  급진적이고 호전적인 유대인 반란단체를 말한다.  이 운동은 B.C 6년경 갈릴리 사람 유다에서 시작이 되어 주후 66년 가이샤라 사태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잠시 독립까지 시켰으나 주후 74년 마사다(Masada)요새의 사수자들의 자살로 끝을 맺게 된다. 신앙적으로 그들은 참된 신이신  하나님외는 누구도 이스라엘의 <왕>이나 주(主)>로 예배할 수 없고 따라서 어느 이방인도 이스라엘을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로마 황제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외국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우상숭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순수성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군사력을 사용하였다. 예수님의 제자중에도 열심당원인 셀롯인 시몬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열심당원의 모습을 나타내었다.

(6) 사두개인 (SADDUCEES)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바리새인들과 에센파와 더불어 유대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친 무리들이다. 이들은 B.C 88년경에는 정권을 장악하여 바리새인들을 박해하였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소수의 귀족 가문들과 화합하여 성전을 관할하였으며, 또 산헤드린 회원들의 대다수가 사두개인들이었다.  그들은 로마인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왔으며 일반 백성들과 가난한 제사장 (가난한 제사장 대부분이 바리새인이었다) 과는 멀리했다. 그들은 초대교회를 조직적으로 박해를 했으며 (사도행전4-5장) 율법을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겼으나 선지서들은 다른 성경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혁신(革新)을 싫어했으며 따라서 육체의 부활을 부인했으며,(눅20:27-33) 또 사후(死後)의 상급과 형벌을 부인했다.  그들은 메시야적 소망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애국심이나 종교적인 열심 따위를 멸시하였다.


(7) 에세네파 (ESSENEES)
에세네파의 기원은 마카비 전쟁 약 50여년 전부터 시작된다. 이때는 헬라제국이 한참 전성기 때였다. 헬라문화로 인하여 유대종교가 쇠퇴할 때에 외래문화에 반기를 들고 사해 근처의 ‘엔게디’에 모여 공동생활을 하며 지낸, 유대인의 금욕주의적인 한 종교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노동하며 자원해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사유재산을 부인하고, 소박한 단벌 옷으로 만족하였다.  이들은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교훈에 헌신하며, 집단적으로 예배하는 가운데 안식일을 엄숙히 지켰다.  모세 숭배가 극심했고 육식 거절, 그리고 결혼은 이 집단의 일체성을 파괴하는 것이라 하여 배척하였으며 맹세를 중히 여기고 영생을 믿었다. 세례 요한도 아마 여기 출신인 듯 하다. 이 에세네파에 정식으로 가입을 위해서는 3년 간의 예비기간을 두는데, 그때에 정결하게 되는 의식을 갖고, 또 그들의 내부 문헌에 대한 비밀의 엄수성 등에 대하여 교육을 받는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주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예물을 보냈으나 그들은 일반 제사장들을 참된 제사장으로 인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자세히 연구하여 앞날을 예언하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역사가 요셉푸스는 에세네파의 숫자를 약 4,000명으로 추산했다.  쿰란 동굴의 발굴물들이 이 에세네파의 유물이라는데는 많은 학자들이 동감하고 있다.  이 에세네파는 2세기에 기독교와 유대교로 흡수되어 없어진다.






제 1-2장. 초대교회의 시작


(1) 교회의 설립과 조직

●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시작이 되었다.
   초대교회는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예루살렘 교인들은 성전출입에
   충실하였으며 말씀을 순수히 지켜 나갔다.

● 조직은 단순하였으며 초기는 베드로가, 그리고 후기는 ‘주의 형제’로
   불리우는 야고보가 주도(主導)를 하였다.

● 스테반의 순교후, 예루살렘 교회는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고, 야고보는
   목베임의 순교를 당하는 등의 혹독한 박해를 받고 흩어지게 되었으나
   이것이 도리어 복음을 유대 밖으로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초대교회의 선교의 중심지는 안디옥교회(시리아의 수도)였다.
   여기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워졌다.

(2) 초대교회의 주요교리
구약성경과 예수님의 교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승천 등을 주로 전하였다. 최대특징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케리그마(Κηρυγμα)였다.

(3) 예배
● 기독교는 유대교의 배경에서 새롭게 탄생되었기 때문에 처음 3세기 까지는
   유대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안식일과 주일 양일에
   지내다가 차차 주일에만 지냈다.

● 장소 -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 개인의 집, 초기에 있어서는 성전과 회당에서
          거행되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일반 집이나 또는 적당한 공공장소에서
          예배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오래지 않아 특별히 예배만을 보기 위한
          예배당을 세우게 되었다.
● 순서 - 기도와 말씀증거, 그리고 성만찬
● 내용 -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초점으로 ,특히 부활을 기뻐하는 일에 초점.



(4) 초대교회의 생활
● 사회생활로는, 신자들끼리는 가능한 인접하여 살려고 하였다. 그리고 극장,곡예장,
   검투, 종교제전 등에 참여하지 않았고, 우상과 관계된 일에는 전혀 관계하지
   않았다. 또 전쟁과 사형을 반대하였다.

● 종교훈련으로는 주일예배 외에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까지 금식하였다.
   매일 기도하는 것, 밤에 기도하는 것, 어려운 사람을 돕는 자선행위등을 하였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대개 3년동안 교육을 시켰다. 이 기간에는 기독교 교리에
   관한 교훈을 받았으며 자기들의 신앙을 생활 속에 증명해야만 하였다.

● 영적인 능력이 풍성하였다. -병고침, 귀신쫒음, 활발한 전도 등

●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였다.

● 사랑의 생활 - 평등, 자선사업, 봉사, 여성의 지위향상

● 순결 - 일부일처제, 음란, 음주 방지

● 징계: 개인적인 충고 - 공중앞 징계 - 교회추방 - 회중은 그와 사교단절

교회의 규율은 상당히 엄격하였다. 초기의 교회는 그들이 믿는 그리스도의 지상생활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시대에 있었으며,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였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교회에 대한 심한 핍박을 견디어야 하며, 적의(敵意)가 찬 이교주의에 대항하여 교회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규율이 엄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단자, 배교자 또는 큰 죄를 지은 자는 교회에서 쫒아 내었다. 교회는 마땅히 순결한 생활을 유지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실 교훈을 받은 다음에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제1-3장. 초대교회 특징

신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초대교회의 특징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신약교회 이후에 생겨진 교회들은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고 굴절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교가 아무리 자기들이 교회의 모델이라 하여도 그들은 너무 성경과는 멀리 떨어져 갔고, 오늘날 수많은 개혁교회 역시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초대교회와는 거리가 있다. 이같은 전제하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약교회의 틀을 살펴보아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조명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다.


(1)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교회
지상에서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삼지 않는 교회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실제 그렇지 않는 교회가 대부분이다.

① 로마 카톨릭
신앙과 행위의 근거 규범으로 세 가지의 근거를 갖고 있다. 성경과 전통(Isdorian교령집에 비롯된 각종 교회의 회의결정, 교황들의 지시문서, 성자들의 가르침)을 믿는다. 또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교황의 지시를 성경과 동등시한다. 그러기에 성경만이 유일의 권위일 수 없다. 어떤 면에서 성경은 전체 신앙중 30%의 영향력을 가질 뿐이다.

② 개혁교회
성경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에 없는 규약, 회칙, 헌법 등이 자꾸 만들어지고 있다.  다양한 의견들의 난립을 억제하고 질서 유지상 필요한 면도 있지만, 간사한 인간들의 심성은 현실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자기를 유리하게 하고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③ 신약교회가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실례
행 13:1-3의 안디옥 교회의 회무처리
행 15:6-29의 예루살렘 교회의 안건처리
마 19:15-17의 교회에서의 문제처리


(2) 믿는 자의 만민 제사장권의 보장
벧전 2:9에서 ‘왕같은 제사장인 성도들은 왕이며 또 제사장’이라 했고, 히 13:11-15에서 ‘찬미의 제사로 우리도 제사를 드릴 수 있다’고 했다. 이같은 성경적 근거 위에서 믿는 성도가 다같은 평등의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초대교회는 실행하였으나, 지금은 그러하질 못하다. 로마카톨릭은 신부과 신과 인간과의 중간존재로 서열이 정해져 있고, 개혁교회도 목회자는 성직자이며 목회만이 성직으로 고집하는 것도 그러하다. 초대교회는 목사이든 신자이든 모두가 다 동일한 평등성을 실천하였다.


(3) 독립 개교회 중심의 행정정치
신약교회는 예루살렘교회 (행 2장), 사마리아교회 (행 8장), 안디옥교회 (행 13장)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고린도교회, 에베소교회등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들은 개 교회가 독립해서 자치적으로 행정을 해나가는 독립교회였다.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교회가 사마리아교회의 일에 협조를 하나 간섭을 하지 않았고, 안디옥교회가 母교회라고 다른 支교회를 다스리지 않았다. 오늘날 카톨릭을 비롯한 어떤 교단에서는 각종 제도적 간섭 기관들이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 협조를 하고 협력을 할 수는 있지만 상급기관의 입장에서 다스리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4) 핍박받는 교회
신약교회 성도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한결같이 핍박을 당한다. 우선 예수님 자신도 핍박을 받으셨고, 사도들도 다 핍박으로 순교를 당하였다. 신약성경 전체를 펼쳐볼 때 고난당하지 않은 성도가 없으며, 핍박당하지 않는 제자가 없다. 현대교회중 기독교 신앙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제자들의 핍박의 길을 빼버리고 번영과 축복만 강조하는 것은 교회의 심각한 변질화이다. 신약교회는 역사 속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핍박을 받아왔다. AD 63-313년까지는 세속 정치인 로마 정부의 관권으로부터 핍박을 받아왔고, AD 313-1500년대까지는 교권 정치인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수많은 핍박과 죽음을 당해왔다. 그후 1600년대에는 영국 국교회가 순수교회를 핍박하였고, 현대에는 사회복음과 신학이 복합된 단체들과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을 빼버린 번영위주의 신학자들, 또 편파적 성령운동가들이 순수교회들을 핍박하고 있다. 순수한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핍박이 계속되고 있다.


(5) 선교와 복음이 팽창되는 교회
신약교회의 처음 시작은 120여명 정도였다. (행 2장)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숫자는 3천명으로 늘어났고(행2:41), 그후 예루살렘 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남자만 5천명 이상이 되었다. (행 4:4)  그후 안디옥교회 때에는 사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수를 헤아리지 않고 그냥 ‘큰 무리’라고 하였다. (행 5:14) 사도시대 말경에 교인의 총수는 약 50만명이 되었으리라 예측된다.  이렇게 번져가는 무리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또 안디옥,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 로마, 서반아 등 계속 팽창되어졌다. 신약의 초대교회는 그토록 무서운 박해와 핍박과 순교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수로 팽창되어 갔다. 아울러 오늘날에도 순수한 교회는 반드시 지역적으로나 수적으로도 팽창되어 가야 한다.


(6) 형제애로 다져지는 교회
신약교회 어디서든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예루살렘 교회(행2:43-47)도 그러했고, 사마리아교회도 빌립의 전도를 받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는 교회모습으로 나타난다. (행 8:8) 안디옥교회도 그러했고 (행13:48) 빌립보교회(행 16:11-40)도 고난 중에 개척되었으나 그 교회의 성격을 보면 기쁨이 넘치는 교회였다. 데살로니가교회도 큰 기쁨의 좋은 소문이 퍼져나간 교회였고(살전1:8), 가장 문제많은 교회였던 고린도교회 마져도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교회”(고전 1:2)라고 하였다.

신약교회는 어느 교회든간에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다.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 7교회중 가장 모범적인 교회인 빌라델비아교회는 그 말의 뜻이 ‘형제의 사랑’이란 뜻이다. 왜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을 받지 않았던가 ? 그 간단한 대답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는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메말라 있다. 보수 교회들은 ‘진리’는 있을지 모르나 ‘은혜’는 약하고, 자유주의 교회는 ‘진리’도 ‘은혜’도 다 약하다. 우리 교회 역시 신약의 초대교회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진리만 아닌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은혜운동도 회복해야 한다.


(7) 제자를 양육하는 교회
신약성경 안에 ‘제자’라는 단어가 무려 250여회 반복되고 있다. 신약교회는 예수님이 12제자를 양육하여 그 제자들이 초대교회를 이룩하였다. 그런데 12제자는 다시 더 많은 제자들을 양육한다. 12제자에서 120여명의 핵심제자들이 나오고 이들의 영향으로 500여 형제(고전 1:15)로 번져갔고, 그 다음에는 3,000명으로 늘어났다. (행 2:41) 그리고 이 숫자는 계속 늘어난다.  여기에 대해 네비게이토의 창시자인 Dawson Trotman은 예수님의 초기 관심은 대중이었으나 대중은 지속적으로 부흥하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이 필요했었고 하였다. 제자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고 또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희생이 따라야 한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은 하기 어렵고 또 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면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다. 예수님이 이 땅위에서 예배당 지은 일도 없고, 써놓은 책 한 권도 없었지만 3년 동안에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면서 그들을 훈련시킨 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제자들이 전 세계를 뒤집어 놓고 말았다. 베드로는 마가를 길렀고, 바울은 디모데를 길렀고, 요한은 폴리갑을 길렀고, 폴리갑은 익나티우스를 길렀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부터 비롯된 ‘제자양육’의 길은 농도와 형태가 다른 뿐 기독교 2천년사에 계속되어 온 것을 보게 된다. 현대교회가 너무 수적인 물량주의적 사고방식 때문에 더디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제자양육의 모범을 기피한다면 교회는 주인의식이 없는 구경꾼으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8) 종교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교회
예수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가 살던 시절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다. (마22:21) 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에 말씀하시면서 또 “내가 왕이라”(요 18:37)에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하에 살고 있던 유대사람이었으나 유대 사람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유대나 로마를 초월한 우주의 왕으로 자기를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활동하셨지만 이 세상속에 파묻혀서 살지 않으셨다.

이같은 삶의 자세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는 세상과는 분리되어 세상을 초월하되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교회였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가 너무 타 종교와의 대화라는 명분으로 종교화 되어가는 것은 교회의 변질을 의미한다. 오히려 초대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향한 관심에 대해 그 진의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예루살렘 전 시민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안디옥교회는 그리스도를 많이 닮은 ‘그리스도쟁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다. (행 11;26) 에베소교회는 복음으로 인해 우상장사들이 문을 닫는 역사가 나타났다. (행 19:27) 또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군인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났다. 신약교회는 종교성을 탈피하고 세상으로 부터서도 분리되는 교회였다. 이 원리는 오늘날도 지켜져야 한다.




제 1-4 장. 초대교회의 박해와 순교자들

처음 얼마 동안은 로마정부는 기독교를 법적 보호아래에 있던 유대교의 한 분파(分派)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다른 것을 알고 혹독한 핍박을 하기 시작하였다. 로마의 정책은 종교의 자유를 부여하여 식민지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신을 예배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한 편 로마 황제를 존경하며 그를 경배해야 되며 로마 제국의 모든 법률을 복종한다는 국가정책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러질 않았다. 오직 하나님외에 예배할 수 없었다. 이들은 황제가 제정한 법률을 지켜야 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라야 가능했다. 이래서 이들은 결국 로마 황제와 정부로 하여금 적의를 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가장 선한 황제들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신전(神殿)에서 제사를 드리거나, 기독교신앙을 포기하면 처벌하지 않았으나 신실한 기독교 신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시련은 순교(殉敎)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AD 64-313년까지 길고도 긴 세월 동안 황제들이 계속하여 기독교도들에 대한 핍박을 멈추지 않았던 원인은 무엇인가 ?



(1) 핍박의 원인
● 무신론으로 인정받았다.
로마제국은 헬라, 로마신화에 나오는 많은 신들을 믿고 있는데, 기독교는 모든 신을 다 거부하고 오직 유일신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그들을 볼 때 무신론자라고 하였다.

● 사회생활의 부조화가 나쁜 여론을 조성했다.
즉 로마제국의 검투와 무용술로 강인한 군인정신을 영웅시하였다. 그래서 검투나 싸움이 사람과만이 아니라 맹수까지라도 싸웠는데,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들어간 곳에는 싸움으로 영광을 얻을려고 하지 않고 사랑으로 상대에게 감화를 주려고 하였다. 이런 정신이 그 당시 사회와 조화가 되질 않았다.

● 자신과 돈에 무관심하였다.
로마인은 모든 목표가 출세지향적이었고, 그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기독교는 자신의 출세보다는 이웃에 관한 관심을 강조했고 또 돈같은 것에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이같은 사상은 로마의 시민정신에 마약같은 존재였다.

● 가정에 충실하고 자기 부정의 미덕이 용납되지 않았다.
잦은 이혼과 노예제도 등이 로마의 가정생활이었으나 기독교는 그러질 않았다.

● 무지와 오해
기독교도들은 옛날은 물로 심판하였으나 이제는 불로 심판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지기들끼리 만나면 ‘주의 살과 피를 마신다’고 하는 식인종같은 교리를 갖고 있고, 또 누구든지 형제와 자매라 하여 근친상간의 혼음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상상하였다.


(2) 대표적인 박해
데시우스황제와 디오클레레티안 황제때는 제국 전반에 걸쳐서 기독교를 아예 없앨려고 하였다.  이 기간에 교회는 쓰라린 경험을 당했다. 대부분의 박해는 사회에서 추방, 직업과 사업방해, 고문과 처형 등이고, 단 기독교를 부인하면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당한 고난은, 이 시기의 통치자와 관리들이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였다. 초기의 수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죽음으로 사수하였다. 그들은 참수 당하였으며, 화형에 처해졌으며,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겼으며, 끓는 기름에 던져졌다. 그들의 사지(四肢)는 절단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신앙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갖가지 방법에 의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박해자 앞에 섰을 때도 보석과 같이 빛났다.

이 박해시대에는 교회는 지하에서 비밀히 예배를 드렸고, 또 때로는 갖은 고난과 순교까지 당해가면서 신앙생활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박해가 그치면 드러내 놓고 교회가 성장하고 번창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그친 때라고 하더라도 또 언제 새로운 박해가 일어날지 모르는 위협을 느껴 가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박해 시대는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을 숙청하며 단련시키는 기간이었다. 이 박해시대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순교한 사람이 많았다. 반면에 박해 시대에 신앙을 저버렸다가 박해가 끝나면 곧 교회에 돌아와 실권을 회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로 인하여 교회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다. 신앙을 지킨 사람들은 교회를 순결하게 보존하기를 원했으나 이런 변절했던 교인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와 교회가 약하고 불순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박해가 심해질 때 순교자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로마는 강압적인 군사를 가지고 있었고, 기독교인은 진리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화형장이나 십자가 앞이라도 기꺼이 나갈 수 있는 증인들 이었다.

이 시기는 참으로 교회사에 있어서 영웅적인 시기였다. 육신적인 무기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교회가 그저 십자가와 사랑으로 대로마제국을 상대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당한 고통은 전율한 만한 것이었지만, 우리를 감탄케 하는 것은 그들이 당한 고통의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 고통을 감당한 신앙에 있는 것이다. 모든 계급의 남녀 곧 고귀한 원로(元老)와 유식한 감독, 무식한 직공들과 불쌍한 노예들, 사랑스럽고 얌전한 부인들과 처녀들, 백발이 성성한 정신적 지도자들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다 고통을 감당하되 무정하고 냉정한 성품이나 완고한 반항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고요한 침착성과 겸손한 인내와 믿음, 그리고 승리의 소망을 가지고 감당하였다. 이처럼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고상한 성자들의 충성심에 감사한 나머지 교회에서는 성자(聖者)들의 유물이나 신성한 유언을 존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를 지나는 동안에 이 존경심은 차츰 성자와 성자들의 유물을 경배하는 경향으로 흐르는 폐단을 낳게 되었다.


no
로마황제
박해이유
박해방법
발생사태
1
Nero
(64-68)
로마시 방황
생일연에 촛불대신 태워
죽임. 짐승에게 던짐.
십자가. 목벰        
베드로, 바울 순교
2
Domitian
(81-96)
황제예배불복,국가내 별도국가형성        
재산몰수, 추방, 살해
사도요한 유배,
카타콤 시작
3
Trajan        
97-117)        
비밀결사, 사회생활부조화 (성도들의 완고함)
집회불허, 처형
황제예배 참여시        
     처형않음        
익나티우스 순교
4
Marcus
Aulelius
(161-180)
질병과 흉년을
기독교인에게 전가
불에 단군 쇠로 고문,
죄로 고문
폴리갑,
져스틴 순교
5
Septimius
Severus
(193-211)
왕후가 태양신
사제의 딸, 황실은
신의 집,황제는 해
기독교 입교 금지칙령
이레니우스 순교
6
Dicius
249-251)
기독교 때문에  
빈곤해 진다
재산몰수,악형,국가와
신들 앞에 절하고
제육 먹고 증명서 받기
오리겐 중형,
키프리안 도피
7
Vaverian
(253-260)
병과 흉년이 기독교인 때문에 신이노함으로
재산몰수,예배금지,어기면 사형, 신사참배,어기면 사형
키프리안 순교
8
Dioclel-
  etian
(284-305)
급격히 성장하는
기독교를 꺾고
국가제사부흥위해
교회파괴, 처형,
성경몰수, 성직자 체포
고문,제사강요        
니코메디아교회
파괴,수많은순교        



□ 참 고 : 순교자들
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반역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대하여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배운다. 보통 악령은 이 전쟁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 인간 대리자를 통하여 역사한다.  거짓된 종교들과 보통 국가의 권력층들을 이용하기도 한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당한 고난은, 이 시기의 통치자와 관리들이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였다. 초기의 수많은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을 죽음으로 사수하였다. 그들은 참수 당하였으며, 화형에 처해졌으며,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겼으며, 끓는 기름에 던져졌다. 그들의 사지(四肢)는 절단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신앙을 증오하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갖가지 방법에 의해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박해자 앞에 섰을 때도 보석과 같이 빛났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터툴리안-



□ 참고: 카타콤 (CATACOMB)
카타콤이란, 초대교회 성도들이 죽은 자들을 장례지내는 지하묘지를 말하는데, 여러 곳에 있으나 대표적인 것은 로마에 있다.  카타콤은 부드러운 바위(석회질)를 파서 만들었으며, 로마에 있는 것은, 폭은 2.4 m - 3 m, 높이는 1.2 m - 1.8 m, 총 길이가 560 KM 이상 연장되어 도시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면적은 약 250정보가 된다. 카타콤은 거미줄 같이 복잡하여서 안내자가 없으면 곧 길을 잃게 되고 다시는 지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된다.  카타콤은 최초에는 돈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족과 사환들을 위하여 묘실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내부의 구조는 지하복도와 묘실로 되어 있다. 벽은 관같이 우묵한 방들이 계속 줄지어 있으며 방 속에는 시체를 1 - 4 구까지 안장할 수 있다. 이 카타콤에 묻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기까지 로마의 카타콤에서만 175-400만 명에 이른다.  초대교회의 박해가 심해지자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으로 피난하였다. 카타콤의 광대함, 소름이 끼칠 만한 어둠, 착잡한 신비성, 꾸밈이 없는 비문(碑文), 회화, 조각, 유물, 예배의 흔적 등은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로부터 콘스탄틴 대제 때까지 이르는 동안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 기간 중에 가졌던 사회생활과 가정생활, 그들의 빈곤하면서도 경건한 생활, 헌신적 정신, 그들이 받은 시련과 고통, 그들이 가졌던 신앙과 소망을 생생하고도 감명 깊게 보여주고 있다. 이 카타콤의 생활에서는 약한 사람이나 병자 등은 얼마 살지 못하였는데, 이것은 습기와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 등 건강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좋지 못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었다.


(3) 핍박의 결과

1) 좋은 결과
● 순교를 두려워 하지 않는 신앙유발 핍박이 아무리 거세게 밀어닥친다 해도 주의 이름으로 순교당하면 최고의 면류관을 받는다는 영적영웅주의가 크게 대두되었다.

● 교회의 팽창 핍박으로 인하여 교회가 약화되지 않고 도리어 더 크게 팽창하고 넓게 번져갔다. 예루살렘교회가 자신들만으로 안주할 때 문제만 생겼으나 핍박으로 인해 퍼져나갈 때 교회는 더 크게 되었다.

● 교회의 정화 교회 성도들은 언제 어떤 핍박으로 어떤 운명이 될지 모르는 초긴장의 상태에서 삶으로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청결함이 되어졌다. 이같은 교회의 정화는 핍박이 계속되는 한 유지되었으나 교회가 안정되고 평온할 때부터는 분쟁과 함께 부패가 시작되었다.

● 교리(敎理)의 형성
밖으로부터 공격해오는 이단사상과 적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믿는 기독교에 대하여 핵심교리를 구성해서 방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사도신경을 위시한 교리가 구성되었다.

2) 나쁜 결과
● 기독교를 변증하려다 세상 철학이 도입되었다.
기독교 자체의 순수한 복음과 생활의 모범으로 저들에게 인정을 받기 보다는 세상의 유명한 철학자의 말이나 용어들을 기독교 용어로 번안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것이 후에 신학으로 연결되기도 하였다.

● 교회의 의식이 성례화 되어갔다.
주의 만찬이나 세례식은 의식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이 무슨 신령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되어져 갔다. 결국 그것은 의례적인 의식으로 타락되어갔다.

● 지도자의 손실
핍박으로 유능한 지도자들을 많이 잃게 되었다.
● 지나친 성직자 존중제도
지도자가 귀하다 보니 지도자를 크게 추앙하는 제도가 생겨졌다.

● 금욕주의
핍박이 멈추자 믿는 사람들 마음에 영웅적인 순교의 길을 택한 선배들에 비해 너무 안일한 생활을 한다고 느껴 심적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자기 몸을 자학함으로 선배들의 신앙과 견주어 보려는 금욕주의가 생겨진다. 그 결과 금식행위, 수도원생활, 독신생활, 기부금제도 등이 갖가지 금욕주의가 생겨난다.


□ 참고 : 예루살렘 멸망
(1) 멸망 이전의 상태
● 예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의 함락을 예언하셨다. (마 23:37-39)
● 로마 관리들이 부패할 대로 부패하였다. (행 24:26)
● 대제사장의 타락 (행 4:6)
   당시 대제사장은 로마 정부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로마 정부가 임명하였다.
   따라서 당시 종교계의 타락이 얼마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인민들의 폭동
   행 5:36에 나오는 ‘드다’의 폭동
   행 5:37에 나오는 ‘갈릴리 유다’의 난
   행 21:38의 난을 일으켜 4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를 가던 애굽인



(2) 직접적인 원인  
● 가이사랴의 소란
로마 정부는 유대인에 대한 식민정책으로 예루살렘에는 천부장이 파견근무를 하였고, 총독은 그의 새 근무지로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에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런데 로마가 이 가이사랴에 신도시를 건설하면서 본토인인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특혜를 주지 않고 헬라인들만 우대하였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극력 반대하는 헬라인의 유대인 시민권마져 주었다. 이에 분개한 유대인들이 반항하자 로마 군대는 유대인들을 수만 명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유대인들의 반항은 전 국민적 공감대로 확산되었다.


● 수리아 총독의 개입
유대인의 반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유대 총독의 힘이 모자라 수리아 총독에게 원정을 요청하다. 수리아 총독은 네로 황제에게 건의하여 로마로부터 원군을 요청받게 되는데 그때의 장군이 Vespasianus였다. Vespasianus는 AD 68년에 예루살렘까지 접근해 왔다. 그런데 로마에서 네로의 자살로 인하여 네 장군들이 왕위 쟁탈전을 벌리게 된다. 이것을 안 Vespasianus는 본국으로 회군하여 자신이 황제가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Titus에게 유대정벌을 명한다.

● Titus 장군의 예루살렘 함락
Titus 장군은 부친의 사업을 완성하려고 69년 후반기에 발군하여 70년 유월절경에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조국의 위기를 깨닫고 전국에서 200만 이상이 예루살렘에 운집해 기도운동을 펼친다.  Titus는 70년 4월부터 7월까지 예루살렘 성벽의 외곽을 포위하고 밖에서의 모든 공급로를 차단한다. 성안의 200만 이상의 유대인들은 식량부족, 식수부족으로 아사상태에 이르게 된다. 성안의 주민들은 땅굴로 탈줄 작전을 시도하다가 실패로 끝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굶주리고 지쳐서 로마군에게 함락되고 만다.

(3) 함락의 결과
함락의 결과로 엄청난 결과들이 뒤따랐다.
● 인명피해가 100만명 이상이 참살 당하고 10만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 예루살렘의 성벽은 다윗왕 때 수축되어 전래해오는 것이 3면이 다 파괴되고
   유일하게 서쪽 벽 하나만 남게된다. 이 벽을 「통곡의 벽」이라 한다.
● 예루살렘이 정치, 종교의 힘을 상실하게 된다.
   교회도 母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고 안디옥 교회가 크게 부상한다.

제2장. 초대교회(후기)

신약교회가 맨 처음 시작된 곳은 예루살렘교회였다. 그 다음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로는 안디옥교회가 중심지가 되었고, 그 다음으로 교회의 중심지는 알렉산드리아가 된다. 여기서 구약성경이 헬라어로 번역(BC 150년경 70인역)되기도 한다. 그리고 로마교회가 또 교회의 중심지가 되어 중세교회까지 지속한다. 이렇게 기독교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나갈 때 이들 교회의 지도자들이 누구였는가 ? 그들이 바로 ‘교부’(Church Father)들이었다. 교부란 사도들 뒤를 이어 교회 건설과 교리 발달에 크게 활약하여 후세에 중요한 영향력을 남긴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 교부들은 시대에 따라서 사도적교부(속사도교부), 니케아회의 이전교부,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로 나눈다.



제 2-1장. 사도적교부 (속사도교부)

이들을 속사도교부 ( 續使徒敎父 : Apostoic Fathers ) 또는 사도적 교부라고 부르는 것은, 저들이 사도들과 교분이 있었던 교부라는 뜻이다.  또 이들이 교부들 중에 가장 오래된 교부라는 뜻이다. 속사도들은 거의 사도들로 부터 직접 기독교신앙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은 훌륭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외부의 무서운 세력으로  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그들의 수족(手足)이 짤리우고, 생명을 잃어가면서 교회를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이들 「속사도교부」들의 피흘림 후에 「교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1. 로마의 클레멘트 (AD 92-101, Clement of Rome)
이 사람의 신원은 잘 알 수 없으나 빌 4:3에 나오는 클레멘트가 아닌가 추측한다. 이 사람이 AD 92-101년 까지 로마교회의 장로였다고 한다. 이 사람이 고린도 교회에 남긴 두 통의 편지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 내용은 교회의 분쟁을 치료하는 길은 사랑과 겸손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아 지도자(장로,집사)에게 순종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감독, 장로는 구약의 제사장과 같이 평신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작은 문제라고 할지 모르나 이런 주장은 나중에 엄청나게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동기부여가 되어진다.


2. 익나티우스 (Ignatius)
당시 최대의 교회인 안디옥교회의 감독으로 트라얀 황제때 순교당한다.(AD125년) 그는 순교당하기 전에 일곱 통의 편지를 남기는데, 편지에 나타난 그의 사상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교회에 대한 충성, 이단경계 및 증오, 감독의 권위에 대한 순복, 순교자의 영광 등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자랑스러워 하고 사자의 이빨에 찢겨짐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순수한 빵이 되기를 갈망하였다고, 또 “나는 온 세상을 다스리기 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겠다.”라고 하였다.  

그는 영지주의를 맹비난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가현성이고 허울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체적으로 당하는 자신과 수많은 사람의 순교도 비현실적이라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는 박해를 이기기 위해 교회가 단결해야 하며, 또 교회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뜻으로 ‘Catholic Church’란 말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또 그는 감독의 권위에 대한 순복을 강조하기 위해 감독직을 너무 고조하였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감독이 한다. 고로 감독의 마음은 하나님과 같고 장로의 마음은 사도와 같다.”라고 하며, 최초로 감독직과 장로직이 약간 다른 것같은 암시를 한다. 이것이 다음 단계에 가서 감독과 장로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장로보다는 감독이 더 높은 직급으로 통용되는 시대의 서장을 열게 된 것이다. 그는 세례를 기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래서 “세례는 거룩하게 하는 효력을 지닌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엉뚱하게 세례로 중생이 가능하다는 「세례중생론」으로 비약하게 된다.

우리는 익나티우스의 정열적 순교의 미담과 함께 그로 인해 뒤따라 생겨진 단점들을 보게 된다. 즉 순교를 너무 지나치게 찬양함으로 평범한 삶에서 신앙을 구현하는 생활 속의 신앙을 과소평가하는 비교의식을 심었고, 감독직을 도를 넘어서서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고, 의식을 과도하게 주장함으로 ‘성례주의’의 기초를 닦게 되는 것을 본다. 익나티우스는 주님 보시기에 영광스런 순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7통의 편지들은 간사한 인간들이 선용하기 보다는 악용하는 나쁜 선례를 남겨놓았다.


3. 폴리갑 (Polcarp, AD 69-155)
아시아 7교회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익나티우스의 친구이며 이레니우스의 선생이다. 영지주의에 대항한 정통주의적 사도신앙의 계승자이며 당시에 가장 뛰어난 기독교 지도자이다. 그가 빌립보 교회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단에 대하여 아주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친구 익나티우스는 이교도들을 대항하고 증오하는 편이었으나, 폴리갑은 원수의 박해와 핍박에도 사랑과 겸손과 인내로 그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말하였다. 폴리갑의 순교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Antonius Pius황제때 군인들에게 시골농장에서 체포되었을 때 전세계 교회와 사람들을 위해 두 시간이나 기도하였다. 투기장에서 서머나의 지사는 그리스도를 욕하면 벙면하겠다고 권유하였으나 폴리갑은 “내가 86년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봉사하였으나 그는 나를 해롭게 한 일이 없거늘 어찌 내가 나의 왕 나의 주를 모독하겠느냐”고 거절하였다. 지사는 그에게 화형의 무서움을 말하니 그는 “금세의 일시적인 불보다는 내세의 영원한 불이 더 두려우니 지체말고 시행하라”고 하였다.
4. 헬마스 (Hermas AD 97-140)
이 사람의 신원은 잘 알 수 없으나 롬 16:14에 나오는 ‘허메’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헬마스’는 바울의 연하 친구이며, 로마의 파피어스 감독의 형제라고 전해온다. 이 사람의 과거는 불행한 가정 출신으로 한 때 노예로서 고생하다가 로마의 기독교인의 집안에 팔려왔다가 복음을 듣고 개종한 듯하다. 헬마스가 쓴 「목양자」(Shepherd)라는 책이 내려온다. 내용에는 5개의 환상과 12계명, 10비유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의 사상을 보면, 다니엘서부터 계시록까지 말세에 대한 설명과 함께 도덕적인 계율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율법주의적으로 공로의 신앙을 강조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보다는 교회의 의무준수와 도덕적으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다. 특히 10비유중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지대가 존재하는 것처럼 설명함으로 훗날에 ‘연옥’의 교리를 만드는 기초를 놓게 하였다.


5. 바나바 (Barnabas AD 70-130)
이 바나바는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는 아니다. 이 사람의 편지가 전해져 오는데 그 내용은 유대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잘못됨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즉 안식일 준수나 할례 시행이나 율법 준수 등으로 기독교 신앙에 혼란이 되는 것에 대해 철저하게 반격한다. 그리고 주의 날, 즉 주일을 지켜야 되는 점과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앙은 주님이 곧 오실 것을 믿는 천년왕국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바나바가 누구였는지는 모르나 반 유대적 성격이 강한 점과 사상이 히브리서의 저자와 비슷하다고 해서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닌가 하고 추측한다.



제 2-2장. 니케아 이전의 교부들


1. 변증가(辨證家)
교회에 대한 조직적이고 세계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발전해졌다. 그런데 교회를 핍박하는 주체는 로마의 황제들이었고, 또 시민들의 여론을 조성하는 이들은 철학가나 이교도들이었다. 이같은 공격에 맞서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변호하고 반격하는 사람들을 변증가라 한다.  변증가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변증의 글을 써서 황제나 고위 관리에게 바침으로 기독교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오해가 풀리기를 바라는 동기에서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사상을 비방하는 이교도와 철학자들에게 기독교를 이교철학과 비교함으로써 기독교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글이었다.


(1) 져스틴 (Justinus AD 114-165)
① 125년 사마리아의 수가 세겜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스토아철학을 배우가 나중에 플라톤철학을 배우게 된다. 스스로 철학연구의 극치에 이르렀다고 자부할 무렵 바닷가에서 노인을 만나 노인으로부터 구약에 약속된 것과 신약에서 성취된 것을 설명해줌으로써 기독교를 믿게 된다. 이후 성경을 연구하며 철학자의 복장으로 각처를 돌아다니며 죽는 날까지 지성인들에게 전도하며 생애를 보낸다.

② 저서 - 대변증서(기독교란 어떤 것인가? 밝힘) Antonius Pius황제께 보내는글
          소변증서 (로마 원로원에게 보내는 글)
          트리포와의 대화 (유대인불신자로서 당시에 가장 뛰어난 인물)

③ 153년경 황제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아들 들에게 변증서를 보내어 정부의 적대감정으로 부터 기독교를 변호.  신자들이 억울하고 불공평한 재판을 받는 것을 변호함. “기독교인을 처벌하려면 분명한 증거를 가진 범죄사실에 근거를 두고 처벌해야지 실제 인물됨을 알아 보지도 않고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름만으로 처벌해서는 안된다.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라고 함.

④ 져스틴은 기독교를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려고 그 당시 철학의 옷을 입혀 기독교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변증을 목적으로 성경보다는 플라톤의 사상을 더 이용함으로 결국에는 기독교와 철학이 유사한 것처럼 기독교를 격하시키고 말았다.


(2) 오리겐 - 헬라교부에서 논함.


2. 헬라 교부

변증가의 시대가 끝나고 신학을 건설하는 시대가 접어든다. 이 무렵에는 지역과 언어의 차이로 헬라 교부들, 라틴 교부들로 분리된다. 헬라 교부는 두 파로 나뉘어 진다.

●소 아시아파 - 사도 요한의 뒤를 이은 사람들로 성경주의를 표방하며 사색이나
              철학보다는 성경대로의 단순한 신앙을 강조한다.
              대표자로는 이레니우스와 히폴리투스 등이 있다.

●알렉산드리아파 - 헬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고전(古典)과 철학을 이용하여 신학을
                 연구하려 했다.대표자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오리겐
                 등이 있다.
소 아시아파

1. 이레네우스 (Irenaeus AD 115-202)
발전도상 초대교회의 최대의 신학적 지도자. 사도요한의 직계제자인 폴리갑에게서 배웠으며, 헬라 고전과 신구약 성경에 능하였다. 프랑스 Gaul지방 (리용)의 감독으로 지낸다.  영지주의를 막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영지주의와 이단들에 대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격은 관대하고 온유하였으며  신앙은 성경에 입각한 정통신앙이었음. 구속문제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음. 119년 순교


알렉산드리아파

1. 클레멘트 (Flavius Clement)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철학과 고전에 있어서 소양이 풍부하다. 클레멘트는 아덴에서 출생하여 (AD 160년경) 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그는 스승인 판테누스가 세운 교리학교에서 스승을 이어 12년간 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알렉산드이아의 장로로써 무리없이 철학과 기독교의 혼합(?)이라 할만큼의 이 운동을 무리없이 추진했던 핵심인물이다. 그는 가르치기를 진정한 철학의 목적은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철학은 무용한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철학이 그 소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야만 되며, 만일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만족할 만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말하기를 기독교는 모든 철학이 가질 수 있는 선보다도 더 많은 선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오류는 하나님을 철학으로 기독교를 해석하여 교리의 뼈대를 세울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지상생활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 상당한 영지주의의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의 가현적 개념에 파고 들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신학체계를 세우지는 못했고 그 바톤을 유명한 오리겐에게로 넘어갔다.


□ 알렉산드리아 학파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활동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이름이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2년 알렉산더 대제에 의해 설립된 도시로서 600년 이상 고대 로마 제국의 제 2 도성으로 군림했다. 무역과 학문의 도시였기에 많은 헬라인들과 유대인들이 모여 들었고 학문의 도시답게 이 도시의 도서관은 로마제국에서 가장 유명하였다. 이 도시에서 그 유명한 70인역 구약 성경이 번역되었다. AD 3세기 경에 신플라톤주의 (Neo Platonism)도 여기서 발흥하였고, 유명한 영지주의자 바실리데스(Basilides)가 여기서 가르쳤다. 유대주의, 플라톤주의, 헬라철학, 동방의 신비스런 종교들도 여기로 모여들었고, 기독교 역시 AD 185년경 스토아 철학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판테누스(Pantenus) 지도 아래 교리학교가 설립되었고, 그의 제자인 그 유명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Flavius Clement)때에 와서 더욱 더 체계가 서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종교발전은 서방교회와 달랐다. 서방교회는 영지주의와의 투쟁으로 인하여 철학에 대한 강한 불신감이 조성되어서, 터툴리안 같은 교부는 철학과 기독교 사이에서는 어떤 연관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래서 서방교회는 영지주의와 투쟁을 겪으면서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교훈에 의지하는 보수주의로 나아갔고, 더불어 조직도 공고히 해 나갔으나, 알렉산드리아는 그러질 못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들은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있는 철학을 교육받았으며 그들의 영향을 받으며 살 뿐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이끌려고 하였다. 그러다보니 기독교는 당시에 가장 우수했던 철학체계인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철학을 결합해서 철학과 기독교가 거의 혼합되었다 할 만큼 친밀한 유대관계로 되어 있었다. 결과로 여기서 기독교 영지주의가 발생하였다.


2.오리겐 (Origen AD 185-254)

1) 생애
그는 18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부터 성경을 배웠고, 또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배워서 당대 최고의 신플라톤주의 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Septimius Severus의 박해로 스승인 클레멘트가 추방되자 A.D 203년 18세의 어린 나이로 클레멘트의 교리학교에서 가르치게 된다. 또 당시 신 플라톤 철학의 거두인 암모니어서 삭카 (Ammonus Saccas)에게도 배운다. 그의 생활은 극단적인 금욕주의여서 그에게는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다. 6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극한 가난과 금욕주의로 살아간다. 그는 맨발에 두 벌 옷이 전부였과, 잠은 맨바닥에서 잔 세월이 더 많았다. 그의 행동은 그의 교훈과 다름이 없었으며 그의 교훈은 그의 행동처럼 성결했다. 그는 끓임없는 학문과 신앙에 심취하였고, 수 없는 박해와 고문과 추방의 연속속에서 지내다 결국 250년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로 251년에 순교하였다.

2) 그의 학문과 신학
고대 교회에서 오리겐만큼 순결한 신앙인은 별로 없엇다. 그는 다방면에서 학문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특히 성경의 원문비평과 주석에 뛰어났다. 특히 246년-248년 사이에 쓰여진 「켈수스를 반박함」은 이교도들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답변서로 고대세계가 내놓은 기독교 신앙의 변론서중 가장 확신에 찬 저서이다. 그의 신학은 그 역시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때론 이것이 장점이 되어 켈수스 등에 의한 철학의 기독교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그러나 이것이 그에게 단점으로도 역사하여서 그의 신학의 주류는, 성경의 해석을 철학적 개념으로 해석하고 조화시키려고 하여서 학문의 시험대위에 기독교를 올려놓는 그런 일을 하였다.

3) 그의 주요 신학 내용
● 한 하나님을 믿었다.  구약과 신약의 동일하신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성부에서 태어나 인간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위치
   는 제 2의 하나님이나 피조물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체
   계 안에서 Nous(정신,사상)으로 이해를 하였다. 여기서 만물은 창조되었고 그는
   피조물 중에 최상위의 존재이다.

● 성령에 대하여서는 교회의 전통에 얽매여 인정을 하였으나 그의 사상 세계 안에서
   별 비중을 두질 않았다. “성령은 그 명예나 권위에 있어서 성부, 성자와 동일한
   존재이다.”

● 부활과 내세의 상급을 믿었다.

●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었다.

● 악마와 천사존재를 믿었다.

● 세상은 유한하고 결국 죄악으로 망한다.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다.

● 그의 우주관은 다분히 플라톤적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와 그뒤 정신세계가
   있는데 정신세계가 실제 세계이다.

● 구원은 Logos(말씀)가 인간이 되시고, 죄 지은 일이 없는 인간의 영혼이 순수한
   육체와 결합으로 이루어졌으나, 부활후 승천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으로 흡수되었고, 그후 인간을 완전히 벗어나 신이 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행할 때 되어진다. 그래서 구원은 그리
   스도의 제자는 죽을 때, 악인은 지옥에 가나 나중에 구원을 받는다. 심지어 마귀
   와 인간전체가 다 구원을 받는다.

●영혼 선재설을 믿었다.


4) 그의 영향력
●그의 사상, 그의 신학체계는 동방교회에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기독교를 변호하고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높이는데 공로를 세웠지만, 유감스럽게도 신앙과 지식과를 혼동하여 유식한 그리스도인은 보통 믿음만 가진 그리스도인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상을 남겨놓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풍조가 알렉산드리아 사상계를 지배하였다.  또 그의 성경해석법은 히브리 원어, 헬라어, 그리고 다른 번역판을 대조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식음도 전폐하며 정력적으로 책을 썼지만, 그런데 문자 한 글자 한 글자에서 신령한 뜻을 찾는 우화적 해석방법은 성경전체에 흐르고 있는 맥락을 놓치고 만 경향이 있어, 특정한 부분에서 그의 과도한 집착이 성경 전체를 잃고 좁은 골짜기에서 평생을 방황한 그런 면도 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성경과는 다른 다분히 플라톤적인 그의 사상은 결국 정통파에서 이단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A.D 399년 알렉산드리아 종교회의에서,  AD 544년 유스티안 황제 때,  AD 553년 제 5차 공의회에서 그는 각각 이단으로 판정받았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특히 그가 죽은 후 50여년이 지나서  그 유명한 니케아 종교회를 있게 만든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Arius)와 콘스탄틴 황제와 절친한 관계를 가졌던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 등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적 사조에 입각한 성경해석 및 對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신앙세계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러한 사조의 신학흐름은 오늘까지 여러 모양으로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유감스럽게도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리겐의 인격에 있어서는 파랄은 말하기를 “초대 교회사에 있어서 오리겐처럼 고상하고 탁월한 인물은 없었다. 그처럼 교회를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어릴 때 부터 늙기까지 꾸준히 활동하고 또한 조금도 책잡힐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쳤다.


□ 참고 - 켈수스와 오리겐의 격론
켈수스(Clesus)는 2세기 후반의 가장 흉악한 철학자이다. 플라톤의 철학에 능하고, 스토익학파의 기질을 가진 자였는데, 기독교를 대항하기 위하여 「참 말씀」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전적으로 기독교를 비방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하여 오리겐이 공박하였다.

●켈수스는 복음의 단순성에 대하여 비판하기를
“기독교에 있어서 가장 선하고 참되다고 하는 것은 플라톤이나 그 밖의 어떤 헬라 철학자들이 이미 말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더 우수하였다.”

●오리겐 - “복음의 단순성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베푸시는 긍휼의 사신으로서 가장 적합하다. 플라톤의 화려한 문장은 소수의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뿐이지만, 보다 단순한 문체로 쓰여진 책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이다.”

●켈수스 - 기독교는 「믿음」에다 탁월한 지위를 둔다고 비난하였다. 그저 모든 면에서 이유를 묻지말고 믿어라, 질문을 바라지 말고 믿어라 한다고 비난하였다.

●오리겐 - 기독교는 질문을 등한시하거나 참된 진리를 멸시하지 않는다. 기독교에 있어서 믿음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원리에 적당한 탁월성을 돌리는 것 뿐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철학을 연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철학을 연구할 재능도 여가도 가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들이 철학을 몰라도 믿음으로 죄에서 의로 전환된다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 기타 - 성육신 반대



3. 라틴 교부

1. 터툴리안 (Tertullianus AD 150-220)
고대 교회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카르타고의 유복한 이교도 가정에서 태어난 (150-155년) 그는 법율을 공부하였고, 특히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였다. 190-195년경 그의 나이 40세에 개종을 하여 예수를 믿게 된다. 타고난 청교도 주의적 기질을 가진 보수신앙의 개혁자였다. 후에 세속화되어 가며 힘을 잃는 무기력한 교회에 각성운동을 일으킨 몬타니즘 분파에 가담하여 엄격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의 문체는 선명하고 풍자적이었으며 읽기가 쉬웠었다. 그는 라틴 신학에 불멸의 공적을 남겼다.
神 學 - 이레네우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와 철학을 분명히 차별하였다.
즉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최고의 철학적 지혜를 능가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철학체계로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아덴이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냐 ?」라는 글에서 철학자는 말을 만들어 내는 자이고 그리스도인은 행위를 만들어내는 자로 완전히 다른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헬라철학을 맹렬히 공격하고 기독교는 일체의 공상적 사변을 정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를 알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로 무엇을 이루셨는가를 알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순되는 고로 나는 믿는다’ (Credo puia absurdumn est.)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실로 하나님의 道는 인간의 合理가 아니다. 비합리의 합리성이 기독교이다.  철학은 사람을 파고 들어 가는 것이고, 신앙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

●원죄의 교리를 가짐
“어떤 의미에서 본질적인 죄라 할 수 있는 것이 인간 영혼의 부패한 근원에서 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은 이러한 죄의 본질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진다.” 또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 되고 이 노여운 하나님의 진노는 회개로서 만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삼위일체 교리의 창시자
“성부, 성자, 성신, 이 모두가 하나이며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이러한 섭리의 신비는 일체(一體)를 삼위(三位)로 구분하여 성부, 성자, 성신으로 정위(定位)한다고 해서 손상되는 것이다. 아니다. 이 셋은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양식상의 구분이며 능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태상의 구분이다. 성부, 성자, 성신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위계, 존재형식, 체제는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써 그 본질과 능력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

●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바른 구분
“우리는 신과 인간이 서로 혼합됨이 없이 예수라는 한 인격안에서 공존하는 이중상태를 보게 된다.”

● 그는 2-3세기에 교회를 그토록 괴롭혔던 영지주의에 대하여 대부분의 교부들은 영지주의나 이단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기독교의 우수성을 주장했었으나 터툴리안은 그러지 않았다. 터툴리안은 이단들에게 성경을 펴놓고 반론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단들은 성경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자기 멋대로 해석함으로 그들에게는 돼지 앞의 진주를 던지는 격으로 보았다.

결론 : 우리는 속사도, 변증가, 교부들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것은 이들이 생명을 걸고 복음과 교회를 잘 지켰다. 그러나 이들의 세대에 와서는 조금씩 교회가 변질되고 지도자들이 성경을 떠나서 자기의 주장과 잘못된 가르침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 핍박이 가져온 결과가 컸다.
황제들이 조직력과 권력의 힘으로 교회를 핍박하니 지도자들은 우선 자기에게 닥친 현실문제 수습에 급급하다 보니 성경의 뜻보다는 부년 상황 적응에 임기응변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이 전해준 의식을 기피하려는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의식 자체가 큰 힘이 있는 것처럼 성례전 신학을 만들게 되었다.  또 지도자들이 계속 희생되다 보니 지도력의 결핍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정도이상의 성직자 존중제도등이 그것이다.

● 교부들 시대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되어 있지 않고 구약만 존재하였으므로 성경의 원리대로 따르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었다. (신약성경의 정경화는 AD 397년 완성

● 초기 교부들의 작품들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즉 Hermas가 중간지대인 연옥개념을 말한 것이나 Origen의 우화적 해석등은 성경에 없는 주장인데도 저들이 지도자였다는 것 때문에 그 영향이 컸다.

●철학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 기독교를 세인들에게 변증하기 위해 세인들이 아는 철학을 인용하다 보니 성경은 멀어지고 철학이 교회에 자리잡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 각종 파벌들의 난립으로 불필요한 힘을 낭비케 만들고 진리수호보다는 곁길에 정력을 낭비하게 되었다.
제2-3장. 니케아 이후의 교부


1.동방교부

1) 가이샤라의 유세비오(260-339)

팔레스틴에서 출생. 315년에 가이샤라의 감독이 됨.
저서 - 교회사, 콘스탄틴 대제전(大帝傳), 복음의 준비, 복음의 증명 등

2) 아다나시어스 (Athanasius 328-373)
시종일관 정통을 고수한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니케아회의에서 아리우스의 학설을 깨뜨림.  다섯차례에 걸쳐 추방과 유배에도 신앙양보를 않음.
* 저서 - 로고스의 성육신, 아리우스를 반격하는 서한 등

328년에 28살의 젊은 나이로 동방교회의 최고의 권위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46년간 감독직에 있으면서 끈기 있게 아리우스 주의와 대항하여 싸웠다. 그는 다섯 번이나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는데 4번은 아리우스주의의 치리자에게 당했고, 한 번은 배교자 쥴리안에게 당하여 총 20년간을 귀양살이 하였다. 그러나 다섯 번이나 교회로 다시 돌아와 감독의 직분을 다하였다. 말년에 이르로 평화스럽게 살았으나 열심으로 이단을 반박하는 글을 쓰는 날들을 보냈다.

그가 일생 동안 걱정하고 목적한 바는 그리스도의 神性을 입증하려던 것으로서, 그는 이 그리스도의 신성이야 말로 그리스도교 신앙 체계의 머릿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아리우스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신앙에 대한 가장 위험한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많은 핍박을 당하였지만 상대편을 핍박하지는 않았다. 그는 정통은 믿음을 권고는 할지언정 억지로 믿게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원리를 그대로 지켰던 사람이었다.

3) 크리소스톰 (Chrysostom) 345-407
원래 이름은 존(John). 그가 죽은후 후세인에 의해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란 의미를 가진 크리소스톰으로 불리웠다. 381년 집사, 386년 안디옥 주교직을 맡음. 안디옥교회 큰 부흥. 탁월한 설교자. 주로 기독교 생활윤리를 다루었다. 나중에 여자의 사치스런 옷차림을 비난한 것이 왕후 유독시아(Eudoxia)에게 오해를 받게 되고, 결국 정죄, 면직, 유배되어 407년에 죽고 말았다.

존 크리소스톰은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존은 법률가로 안디옥에서 태어났다.  23세에 세례를 받은후 법률가의 길을 가지 않고 수도사의 길을 가려고 시리아 산악지대의 수도사들과 합류하여 4년동안 수도생활의 규율을 배운 후 다시 2년 동안 혼자서 금욕생활을 한다. 이같은 6년간의 은둔생활 후 고향 안디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집사가 되고 곧 감독이 된다. 그런데 그의 명 설교의 소문이 전 세계로 퍼진다.

그리하여 398년에는 황제가 있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다. 콘스탄티노플은 사치와 향락에 젖은 도시로 온갖 음모술수가 난무하는곳이었다. 이에 크리소스톰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어 성직자들의 생활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독신이던 일부 사제들이 소위 ‘영적자매’를 두는 일이나 성직자들이 부와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나, 교회 재정이 공개되지 않고 사용되는 일을 개혁하였다. 이같은 개혁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고 일부 소수에게는 증오를 유발시켰다.

크리소스톰은 개혁의 운동을 성직자들에게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촉구하였다. 이렇게 되자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교회당은 이 청교도적인 예언자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 들었다. 당시 시민들은 크리소스톰을 존경하고 따랐으나 유력자들은 이 목소리에 견딜 수가 없었다. 여기서 황제의 아내 ‘유독시아’가 크리소스톰 제거 음모를 꾸며 도시를 떠나도록한다. 그러자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교회를 점령한다. 크리소스톰은 조그만 시골 ‘쿠쿠수스’에 정배되어가서 거기서 글로써 세계를 감동시킨다. 이리되자 크리소스톰은 더 시골인 흑해의 해변으로 귀양을 간다. 그는 귀양가는 도중에 중병에 걸려 죽게 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라는 말이었다.



2. 서방교부

1) 암부로시어스 (Ambrosius)
● 서방제일의 성직자. 독일에서 출생. 374년 북부 이태리의 지방장관이 되나, 곧 재산과 권력을 포기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밀라노의 감독이 되었다.
● 성품은 온화하나 대적자에게는 단호하였음. 그리스도인인 데오도시우스
(Theodosius)황제가 데살로니가인 7,000명을 학살하였을때, 성찬식 참여에서 쫒아냄. 나중에 황제가 죄를 회개하고 8개월 후에 성찬에 참여시킨 확실한 신앙의 지도자.
● 니케야 신앙에 철저히 서서, 추호도 아리우스파와 타협을 않했다.
로마제국의 몰락에서 오는 충격 속에서 교회가 힘차게 살아남는데 없어서는 안 될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어거스틴에게 세례를 주었다.  397년에 사망하였다.



■제 4세기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하나가 암부로시어스이다. AD 373년 이태리 북부의 가장 큰 도시인 밀라노교회의 감독이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의 후임자를 놓고 도시 안에서는 큰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왜냐면 밀라노의 감독의 위치가 대단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알기에 당시의 교회 (아리우스파와 정통파)는 서로 자기들 편 사람을 주교로 선출하려고 필사적으로 경쟁을 벌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격렬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감독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밀라노 도시의 총독으로 있던 ‘암부로시어스’는 유능하고 공정한 행정가로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암부로시어스는 선거 현장에 나가 시민들이 질서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는 뛰어난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린 아이 하나가 “암부로시어스를 감독으로”라고 외쳤다. 군중들은 이에 호응하여 암부로시어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암부로시어스 자신은 감독직을 원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곧 고위관직으로 임명될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군중들을 설득하고 회유시키다 못해 그 도시를 탈출할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암브로시어가 감독으로 선출된 것을 황제가 기뻐하였고, 이를 어기면 황제의 분노를 살 가능성이 있었다. 이리하여 373년 12월 1일에 밀라노감독이 되었다.

■감독이 된 후 사제의 도움을 받아 신학을 공부한다. 원래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방교회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가 된다. 암부로시어가 감독이 된 후 얼마 안 되어 야만족인 고트(Gots)족이 밀라노를 쳐 들어와 많은 시민들을 포로로 잡아간 후 몸값을 요구하였다. 이에 암부로시어스는 교회 소유의 금은 기명과 장식품을 녹여 피난민들과 포로들의 몸값을 마련하였다. 이때 그의 약점을 노리던 아리우스파들은 감독이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비난하였는데, 이 때 암부로시어스는 “주님을 위해 황금보다는 영혼들을 보존하는 것이 더 낫다--- 교회는 저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요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황금을 소유하고 있다.--- 금그릇보다는 살아있는 질그릇이 더 소중하다.”고 하였다. 암부로시어스의 뛰어난 설교가 전 세계적으로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밀라노를 찾아왔다. 그중에 어거스틴도 있었다. 그리하여 암부로시어스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는 황제와도 미묘한 관계를 유지한 때가 많았다. 당시 서로마제국의 황제는 ‘발렌티니안 2세’(Valentinian II)였는데, 그 황후가 아리우스파라 아리우스적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암브로시어스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암부로시어스는 교회가 오염되는 것을 용납않았다. 그러자 황후와 오랜 세월 동안 대결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암부로시어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황제의 병사들에 의해 예배당에서 포위된 채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병사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감독을 위협하였으나 그는 찬송가를 부르며 조금도 굴하지 않았었다. 또 정통신앙을 가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데살로니가시의 폭동으로 그곳 경비 사령관이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데살로니가 시민 7천명을 살해하였다. 그 후 황제가 교회로 들어 가려고 할 때 암부로시어스는 황제를 가로막고 “그 자리에 멈추어라. 양 손에는 불의의 피가 가독한 자, 죄로 더럽혀진 너같은 사람은 회개하기 전에는 성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거룩한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막았다.  이때 경호원들이 칼을 뽑아 들고 암부로시어스에게 대들었다. 그러나 암부로시어스의 인격과 권위 앞에 황제는 진리를 발견하고 그 앞에서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다. 위대한 밀라노의 감독이며 신학자요, 성자였던 암부로시어스는 397년 4월 6일 부활절 주일날 숨을 거두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같은 시기에 황제에 대항하여 승리한 암부로시어스가 일한 서방교회는 그 후로 라틴어 사용과 함께 크게 강성해갔고, 심약한 황제에 순응하여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배의 길을 따른 크리소스톰의 동방교회는 그 뒤로 계속 약화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 2-4장. 초대교회 이단연구


1.영지주의(Gnosticism)

● 영지주의란 2세기 초엽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한 집합적 종교현상을 가르키는 말이다.  영지주의는 동양적 신비주의, 헬라의 철학,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사상, 유대교 및 기독교의 구원사상 등의 광범위한 사상의 집합으로 그 기원은 그리스도 이전에도 있었던 것으로서 몇 사람의 유대인 철학자들이 이교국(異敎國)으로부터 그 나라의 종교와 문화적인 요소를 들여온 데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시대를 거쳐서 영지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 최대 영향력을 가진 때는 주후 135-160년 사이이다. 영지주의란, 초대교회를 뿌리부터 흔들만큼 아주 위험한 이단(異端)이었다.  주후 2세기에 홍수와 같이 교회에 밀려 들어 왔다.  그리하여 3세기 초에는 로마제국의 거의 모든 교회가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영지주의에 오염이 되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그 무서운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들의 무서운 영향력은 기독교의 근본 자체를 뒤집을 만큼 위협적이었으며 이로 인해 교회는 형성이후 가장 심각한 위협에 봉착하게 되었다.

● 이 사상이 만연될 수 있었던 것은 초대교회의 상황이 조직면에서 허술한데다 무엇보다 교리가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단발생요인) 그런 만큼 피해는 컸고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결국 이 위기를 극복했고 이 시험을 통하여 보다 치밀한 조직과 「사도신경」등의 교리와 신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초대교회의 다소 은사중심의 성격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 영지주의는 “지식”(그노시스)에 근거한다고 자처하였다. 그들이 말하는 지식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지식이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의미의 초자연적 의미의 초자연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지식은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이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주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게 되고 악한 물질세계로 부터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는 무지와 망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영지”를 통하여 영적인 해방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神性과 자신의 일체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영지는 사도들이 아주 절친한 그의 제자들에게만 전수하는 비밀의 가르침으로써 완전한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 해서 이 “영지”를 다 소유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 이들의 근본관념은 현상세계를 전적 악한 것으로 보고, 인간이 항상 돌아갈려는 선한 세계로 구분하였는데, 이것은 페르샤의 이원론과 플라톤의 이데아(Idea)세계와 현상세계로 구분짓는 것에 영향받은 것이다.

● 영지주의는 본도의 마르키온파와 발렌티누스파와 바실리데스파 등이 있고 가장 영지주의에 대하여 많은 대항을 하면 신학으로 논박한 사람은 이레네우스를 들 수 있다.

● 영지주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를 그 온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인, 유대인, 애굽인, 로마인, 동양인들이 모이는 국제도시로서 이들이 만나서 자기들의 철학과 문화를 서로 교환하며 또한 융합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작하여 각지에 있는 기독교교회에 이 이상한 교훈이 들어가게 되었다.

● 이들이 주로 사용한 성경은 요한복음과 바울서신이다. 초기 영지주의의 상당한 부분이 이원론적 성격이 강한 마니교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래서 이 두 세력은 다 신화적인 우주론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영지주의를 꺾을 수 있을 만큼 교리가 확립되고 신학이 발전되었을 때 비로소 영지주의의 위협은 끝나게 되었다.

● 영지주의(靈知主義)는, 요일2:22, 4:2-3에 분명히 언급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한 사람의 평범한 인간이었다.”라고 주장을 하였다. 또 모든 물질은 근본적으로 온전히 악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이 나쁘게 창조(創造)되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최고의 존재가 아니라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 불리우는 열등(劣等)한 신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알려지지도 않는 분이시고 그는 세상에서 무한히 떨어져 있는 신령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부토스(βυθοσ:Butos)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들의 논리근거는 성경이 아니라 헬라와 애굽, 페르샤, 인도 등의 신화와 철학 등에서 끌어 왔었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자기들 나름대로 곡해(曲解)하고 성경의 해석을 고치어 심지어 이방 종교의 가르침까지 관련시켰다.

● 기독교의 전승(傳承)에 의하면, 기독교 영지주의의 창시자는사도행전 8:9-24에 나오는  시몬 마그너스(Simon Magnus)라고 한다.  사도신경은 이 영지주의로 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 진 것이다.


영지주의 교리

1) 이원론 사상
모든 것의 기원을 두 개로 본다. 하나님도 악한 하나님과 선한 하나님이 있는데, 악한 하나님이 물질계를 지배하고, 선한 하나님이 정신계를 지배한다.

2) 유출설
영지주의자들에 의하면 (Valentinus의 이론) 천지개벽 후에 하나님에게서 많은 신들이 떨어져 유출되었다. 최초 최고의 선한 하나님이 긴 세대(아이온)을 거치는 동안 신이 떨어져나와 또 다른 신이 되고, 그 신은 또 긴 세대 후에 또 떨어져 나간다. 이렇게 거듭된 유출에 의해 맨 마지막 신은 맨 처음 신보다 저급한 신이 된다. 그리하여 맨 마지막 신의 이름은 ‘데미우르고스’이다. 이 신이 구약에서 말하는 여호와이다. 이 여호와는 조물주와 같고, 창조주보다 못한 신이다. 이 데미우르고스는 물질계를 지배하고, 창조주는 정신계를 지배한다. 따라서 신령한 정신계를 지배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저속한 물질에 불과한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했다는 것은 전혀 틀린 말이라고 한다.

3) 가현설(假顯設)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이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은 그가 진짜 인간이 아니고 그는 하나님으로서 다만 인간처럼 보였다가 사라진 것뿐이다.

4) 구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특별한 지식, 즉 「특별한 비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영적계급에 속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완전한 멸망으로 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속에 있는 영적 원리를 신령한 지식으로 터특하게 되면 스스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점은 그가 세상에 오셔서 자기 스스로 완전한 해탈을 통하여 인간 스스로 구원이 가능한 것을 보여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지식을 얻어야 하고, 또 신령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것과 반대되는 물질적 요소인 육욕을 될 수 있는 대로 학대하고 괴롭혀야 했다. 이리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따랐다. 또 정반대로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육체가 아니고 영이니, 따라서 육체는 이러나 저러나 소멸된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괜찮다는 극단적인 쾌락주의도 생겼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이후 여러 면에서 잘못된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영지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교회가 철학을 사용하다보니 성경보다 철학이 더 우위에 오르게 되는 점과 영지주의자들의 금욕사상이 중세기까지 금욕주의로 영향을 주었다.

① 구약 성경중 유대교적 요소를 거부.
②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 부활 등의 실재성을 거부.
③ 금욕과 방랑생활
④ 우주는 구약에 나오는 하급신(下級神)이 창조한 것이기에 모든 것이
   불완전하고 악하다.
⑤ 그리스도는 최고 아이온이며, 유령과 같은 상태의 가현했다고 주장.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 예수라는 사람안에 일시적으로 깃든 것이라고 주장.
⑥ 속죄는 영지(靈知)를 통해서 되어진다.
⑦ 인류는 물질적 인간과 정신적 인간으로 나누어진다.


□ 참고 - 사도신경(使徒信經)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신앙고백으로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의 귀한 신앙유산이다.   사도신경은 증거나 설명을 곁들이지 않고, 간단하고 적극적인 믿음의 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성은 주로 세례식에서 관례적으로 행하여져 온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순서에 따라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도신경은 이름과는 달리 사도(使徒)들에게서 유래(由來)된 것은 아니다.  물론 사도들에게서 유래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그 전설에 의하면 사도신경의 열 두 마디는, 12 사도들이 각 한 마디씩 말한 것을 베드로가 모아서 로마로 가져 간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도신경이 형성되기는, 초대교회(初代敎會)에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무서운 이단(異端)이 교회에 강력히 들어오면서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성도에 대한 신조(信條)와 교리(敎理)의 가르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조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의 시초가 「사도신경」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음의 규칙”이라고 불리워 졌는데, 이것을 가지고 이단이냐, 아니냐를 판가름 하였다.

내용은, 처음에는 세례식의 고백에서, “ 예수는 주(主)십니다. ” 라는 간략한 것이었으나, 주후 170-235년경의 히폴리투스 시대에 이르러 신조는 확대되어 다음과 같은 세가지 질문이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어졌고 이를 확인한 후에라야 세례를 주었다.

첫째 질문 :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
      답  : 내가 믿습니다.

둘째 질문 :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신과 성모 마리아로 부터 나셨으며 본디오 빌라
            도의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사 죽으셨으며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
            데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오른 편에 않으셨으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답  : 내가 믿습니다.

셋째 질문 :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까 ?
      답  : 내가 믿습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내가 믿습니다.” 하던 문답형의 신조는 점차로 하나로 연결되어, 끓어짐없이 “내가 믿사오니-”라는 우리에게 낯익은 귀절로 시작되는 선언형으로  바뀌어 졌다. 이때가 대략 341년경이다. 그 후 주후 850년경 샤를마뉴 궁정을 통하여 유럽에 본격적으로 전파되었고, 12세기에 이르러 서방 교회 어디를 가나 세례시에는 사도신경의 골격으로 세례문답을 하고 예배시에도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2. 에비온주의 (Ebionism)
에비온주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 일파를 말한다. 이 에비온주의자들은 대체로 AD 67경에 발생하여 79년경에는 요르단 동쪽에서 번성했다고 한다. 이들이 믿는 바는 예수를 믿되, 영지주의적 요소인 그리스도의 신성을 배격하고 인간 예수를 믿는 점과 유대교적 요소인 율법의 필요성을 믿는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부인하고 메시야적 사명도 부정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행한 일들은 예언자중 하나와 같은 일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예수가 행한 기적들도 과거에 예언자나 선지자가 행한 기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교훈이 엄격했기 때문에 율법이 필요하다. 율법의 제도는 불필요하나 (희생제도 등) 그 대신 정결한 생활, 금욕, 절제가 율법처럼 지켜져야 한다.

이렇게 하여 율법을 성취하는 자는 모두가 그리스도가 될수 있다. 이같은 에비온주의자들의 영향은 5세기에 이르러서야 사라진다. 그러나 초대교회 구성원들의 거의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전에 믿던 유대교적 요소를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 많은 혼란과 지장을 준 것이 에비온주의였다. 에비온주의자들이 이같은 공격 때문에 교회는 올바른 기독론을 수립 형성하는데 촉진제가 되었다.




3. 말시온파 (Marcionism)
말시온은 소아시아 본도(Pontus)지방의 시노페(Sinope)감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와 물질세계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뜻을 발전시키고자 144년경 대도시 로마로 진출한다. 그러나 로마교회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그러자 말시온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따로 교회를 세워서 종파운동을 시작한다.

말시온의 주장은 독특한 면이 있다. 그는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과 구약 여호와 하나님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구약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인류들 가운데 특별히 한 민족만을선택하였던 독선적인 하나님이었다. 자기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은 반드시 복수하고마는 독한 하나님이었다. 구약의 하나님이 독선적이고 보복적이고 정의만 내 세우는 심판의 하나님인 반면에, 신약의 하나님은 복수심이 전혀 없는 자애로우신 하나님이고 구원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신약의 성부 하나님은 오직 영적인 세계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독선적인 구약의 하나님은 이 세계와 물질계와 그리고 인간들을 만드셨다. 그런데 인간들이 이 물질세계와 여호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시달림을 당하고 있을 때 신약의 선하신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구원코자 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서 나신 인간이 아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면 그는 성부 하나님이 보낸 분이 아니라 구약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분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 말시온은 구약의 성경을 부인하였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주신 좋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열등한 여호와가 준 말씀이므로 교회에서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적 냄새가 나는 유대적 요소들은 되도록 피하였다. 심지어 신약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서신만 참된 경전이라 하였다. 이같은 움직임은 초대교회가 구약성경을 너무 중시하여 율법주의가 득세하기 때문에 온 반동이었다. 말시온은 철학과 율법을 동시에 배격하고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만을 주장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은 사상이해나 율법제도에 익숙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금욕생활의 실천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말시온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오직 영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믿는자의 부활도 영적 부활로만 믿게 되었다.

말시온은 영지주의보다 더 큰 위험을 교회에 가져왔다. 왜냐면 앞서 말한 대로 구약의 창조설을 다르게 설명했고, 성육신 교리도 부정해야만 했으며, 부활도 영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등 너무 극단적인 쪽으로 해석을 했기 때이다. 이리하여 자기들 주장이 일반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교회에서 분리하여 독자적 교회와 독자적 성경을 갖는 교회를 세웠다. 이같은 운동은 수세기 동안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교회는 이같은 말시온의 영향으로 정경을 조속히 매듭짓는 데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꼭 이해하고 넘어갈 것은 말시온이 활약할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정경(正經)으로 채택되지 않은 때였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27권이 정경으로 채택된 때는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였다.


4. 네오 플라톤주의 (Neo Platonism)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사상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종의 범신론(汎神論)이다. 발생원인은 기독교로 인하여 로마종교가 없어질까하여 생겼다.  개조는 암모니어스 삭카 (Ammonius Saccas) 이다. 유명한 학자는 삭카의 제자인 플로티7누스 (Plotinus)로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과 우주 안에 있는 하나님과 조화에 힘을 썼다.  신은 절대적 존재이며 완전하여 그로 부터 모든 하위존재가 나온다는 것이다.
로고스 ⇒누스 (νοψ s) ⇒ 세계혼(World Soul) : 물질세계 ⇒ 개인영혼

특색은 재래식 철학사상에 종교적 요소를 가미하였다. 도덕은 금욕적이며, 구원관은 신비한 사색을 통하여 영혼이 하나님께로 상승하여 일치한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는 기독교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오리겐, 어거스틴의 신학에서 특히 그러하였다.

□ 참고 - 플라톤의 사상
플라톤의 사상은 13세기까지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플라톤의 사상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영향을 많이 미쳤는가?  플라톤은 아테네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BC 427-347) 플라톤은 소크라테의 제자였다가 스승이 별세하자 (BC 399) 그의 후계자가 된다. 그는 BC387년에 아테네에다 아카데미 학원을 창설하여 20여년 동안 가르치는 일과 저술활동을 한다. 이 플라톤의 사상은 13세기까지 기독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스콜라철학)으로 바뀌어질 때까지 플라톤의 사상은 기독교 교부나 지도자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은 물론이고 어거스틴의 신학사상에는 플라톤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면 그의 사상은 무엇인가 ?  그것은 플라톤의 사상 중 2원적 세계관과 영혼불멸 사상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세계가 있다고 했다. 이데아의 세계는 선한 것이고, 그것의 정점은 곧 하나님이며 하나님이 모든 사물의 근원이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선재적이다. 여기에 아이디어를 얻은 어거스틴은 영혼의 기원을 선재설로 주장하였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선재적(先在的)인데, 범죄로 인하여 현상세계인 육체와 결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혼 자체는 본래 이데아의 선한 것이므로 그것은 영원히 멸할 수가 없고, 그것은 비물질적이며 생명력을 가진 영원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육체는 죽어 소멸되지만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이데아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구원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  여기에 대해 초대교회는 많은 혼동을 가져왔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보이지 않는 영혼”(눅 24:39참조)만이 구원된다고 믿지 않고 영과 함께 부활되는 육체(영체)가 구원받을 것을 믿는 全人的 구원을 믿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와 같이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에비온주의와 반 유대주의적 배경을 가진 말시온주의와 헬라철학의 배경을 가진 네오 플라톤주의와 모든 것을 섞어 혼합하려는 영지주의 등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같은 시련 속에서도 당신이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쓰러지지 않게 붙드셨고, 자라게 하셨다. 이는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5. 조로아스트교(Zoroaster)
B.C 7세기 경에 일어나, 페르샤에 있었다는 Zarathustra를 예언자, 교조로 하는 종교이다. 고레스 2세도 믿었다. 고대 제국에서 중세 사산조(Sasan朝)까지 때때로 페르샤 국교가 되었으나, 이슬람교에 의하여 거의 멸망하고 지금의 인도의 파르시 (Parsee)라고 불리우는 수 만명의 신자가 있을 뿐이다. 주신(主神)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h)의 이름에 의하여 마즈다교, 의례(儀禮)에 의하여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승직(僧職)은 마기(Magi)라 한다. 미트라교는 이 종교에서 파생되었다. “전지의 주, 아후라 마즈다는 태양신적인 빛의 신으로 어둠속에 있는 악신 앙그라마인유(Angramainyu)와 싸우는 선한 신이다. 인간은 선신(善神)의 축복을 받아 그 보호 밑에서 악과 싸워야 하며 최후의 심판에서 상벌이 있다고 한다. 불을 신성히 여겨서, 불의 근원은 하늘에 있고 불은 주신(主神)의 영, 상징이라는 신화로 특히 존중된다.  사원이나 가정에서도 성화(聖火)를 간직하고 그 앞에서 기도한다.


6. 미트라교(Mithra)
고대 페르샤의 종교. 신앙 대상은 불멸의 태양 미트라 신이며, 미트라는 원래는 이란과 인도 민족에서 하늘을 맡은 신으로 숭배되었다. 점차 태양신, 광명의 신으로써 인류에게 모든 착한 것을 주고 풍요의 신으로써 천 개의 이목(耳目)을 가지고 있다. B.C 3세기 경 이미 많은 신중의 유력한 신으로 우상화 되었다. 특히 로마의 군대와 군 출신의 황제에 의하여 비호되었다. 교리의 내용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나온 것 같으며, 후에 파생한 마니교(Mani)교의 모태였다.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에 이르고 현세의 죄업과 고난을 초탈(超脫:淨化)하여 도달하는 내세의 존재를 믿는다. 의식은 기독교와 비슷하여 한 때 세계 종교로 번창할 기세도 보였으니 기독교의 출현으로 쇠퇴하였다.



7. 마니교 (Manicheism)
(1) 교조 : 마니 (Mani) 216 - 277년
당시 로마 제국의 동방인 페르샤 지방의 바벨론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도와 중국까지 여행을 하고 돌아와 마니교를 세웠다. 그는 석가모니, 예수, 조로아스터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최고의 마지막 계시자라고 하였다. 마니교의 신자들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중국까지 퍼져 있었다 당시의 페르샤의 사산왕조는 그를 우대했으나 조로아스터교의 승려들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가죽이 벗겨 죽임을 당하였다.


(2) 교리 (敎理)
① 마니교는 영지주의만큼 잡다하게 많은 종교들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페르샤의 토속종교, 조로아스터교, 헬라철학, 과학, 불교, 힌두교, 바라문교, 유대교, 기독교 등의 절충주의였다.

② 그래서 이들의 교리에는 윤회사상도 나타나고, 빛과 어두움의 이원성, 보혜사와 예수의 중요한 역활 등 여러가지가 나온다.

③ 주요교리는 페르샤의 이원론에 근거하였다. 즉 태초에 두가지 적대적 본질이 존재했는데, 선과 악, 빛과 어둠, 하나님과 물질이 그것이었다고 한다. 선은 광명, 악은 암흑이다. 인류는 어둠의 세력(악마)이 빛의 세계에 침임함으로 반작용으로 생겨졌다. 그러므로 인류가 돌아갈 곳은 빛의 세계(해탈)이다. 구원은 이원론적 본질을 이해하게 될 때 되어지며, 해탈하기 위해서는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3) 조직
마니 - 12사도 - 70인 감독 - 교사 - 행자

□ 참고 -  이원론(二元論)
이원론이란 특정한 상황이나 영역을 두 개의 상반되는 요인이나 원리들로써 설명하는 해석상의 한 이론이다. 일반적으로 이원론은 어떠한 중간매체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이원론에 의하면 세상에는 상호 적대적인 두 세력 - 그 하나는 모든 선의 근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악의 근원임 - 이 있다고 한다.  가장 뚜렷한 종교적 이원론은 고대 이란의 조로아스터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로아스터교에 있어서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아리만(Ahriman)은 서로 각각 우주의 근원적 존재들인데, 전자는 선한 세력을 대표하고, 후자는 악한 세력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우주는 이 양대 세력의 투쟁장이며 각각 빛과 어두움으로도 표현된다. 대부분의 이방 종교 들마다 온건한 형태의 이원론이 내재해 있다. 예컨대 이것들은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구분되거나 혹은 중국 철학에서처럼 실테가 양(陽) 과 음(陰)으로 구분되는 것 등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수정된 이원론이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분이시고 사단은 타락한 피조물로서 어느 곳에나 악을 침투시키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 의미의 이원론은 아니다. 왜나면 기독교 신학에서는 사단이 궁극적이며 근원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으며 또한 사단은 궁극적으로 이 우주에서 배제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제2-5장.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공인


1.콘스탄틴 대제 (大帝)

① 교회에 대한 박해는 A.D 313년 끝나게 되었다. 그것이 콘스탄틴이라는 로마황제로 인해서 였는데, 그는 기독교의 마지막 박해자인 갈레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 황제의 자리를 두고 권력투쟁에 있었다. 여기서 콘스탄틴은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5명의 경쟁자를 물리쳐야 하고, 특히 막센티우스라는 강한 상대를 물리쳐야 했었다.

② 312년 로마근교의 밀비안(Milvian)다리에서 그는 그의 군대와 함께 하늘에서 십자가와 “그대여 이것으로써 싸워 이기라”라는 큰 글을 보았다.  그 날 밤 중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십자가를 창과 방패에 달도록 명하심. 그후 그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대승리를 하고 황제가 되었다.

③ 이후 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고 교회에 대하여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다.  
  이로써 기독교 박해의 종식을 고하게 된다.

④ 업적- 국비로 교회건축.  주일휴업.  교직자 세금과 병역의무 면제 등,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종교자유를 선언(기독교공인). 후에 기독교제국의 수도를
         만들기 위해 비잔틴땅에 새수도 만듬(콘스탄티노풀)


2. 콘스탄틴이 기독교에 끼친 공헌
콘스탄틴 자신은 기독교에 대한 보호자로 자인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인 황제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자기의 정치적 야망과 국론통일 등을 위하여 기독교를 이용한 그런 사람이었다. 콘스탄틴은 황제로서의 장래의 성공은 옛날의 퇴폐적인 이교보다도 그리스도교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그는 공공연하게 교회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보호하였다.그의 정책도 교회를 중심삼아 세우게 되었다. 눈치 빠른 정치가이고, 인간성을 지혜롭게 파악했던 콘스탄틴은 기독교의 위대한 잠재 세력이 로마제국을 다스려 나가는 데 얼마나 유용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좋아하면서도 콘스탄틴 자신은 평생동안 태양신을 섬기고 로마제국의 수장으로서 이교도의 대사제로서 칭호인 폰티펙스 막씨무스 (Pontifex Maximus)라는 이름을 그대로 갖고 있었으며, 또 그 임무를 다 한 것을 보면 그가 꼭 기독교 신자만은 아닌 것 같다. 자기의 사후를 계승할 세 아들에게도 로마의 이교의 신의 이름으로 호칭을 받게 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평생동안 세례를 받지 않다가 죽기 직전에 화급한 나머지 세례를 받게 된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으로부터 전쟁에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를 갖고 기독교에 상당한 호의를 베푼 것은 사실이다.  콘스탄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을 12월 25일의 태양신의 예배일인 사투날리아로 정했다. 그 이전에는 주현절로 1월 6일을 지키던 것을 이교도의 축하일로 옮기자 이교도들 역시 반대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콘스탄틴은 우리가 본받거나 감화를 받을 만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기억할 만하고 인간성을 깊이 연구해 볼 만한 인물이다.


3. 기독교 공인
콘스탄틴 대제 이후의 황제중 어떤 사람은 잠시 기독교를 멀리하고 다시 우상숭배로 돌아갔으나, 다시금 기독교로 회귀하였고,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기독교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4. 그 후의 변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특권이요 영광이 되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국의 가장 훌륭하고 높은 지위들이 주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곳에서나 지도자가 되었다. 많은 이교도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들이 전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높은 지위를 얻고 출세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아마 이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적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분명히 바람직 하지 못하다.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 느껴진 것은 황제 자신이 교회를 다스리기로 결정했던 때였다. 主 에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왕이 되시므로 세상의 어떤 권세라도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영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는 최고의 통치권을 가지신다. 그러나 콘스탄틴 대제는 감독들의 회의와 교회 대표자들의 모임을 소집할 뿐 아니라 이러한 모임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주재(主宰)하였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으로 향하여 마음껏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였으나 그의 통치가 가져다준 혜택은 양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좋은 측면도 있었고 나쁜 측면도 있었다.  교회안에 평화가 찾아 왔을 때 세속적인 물결도 휩쓰려 들어왔다. 회심의 체험도 없고 마음 속에 성령의 역사(役事)도 느끼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양적인 요소가 질적인 요소를 희생시켰다. 박해의 불길은 교회의 순결을 지켜 주었다.



제2-6장. 초대교회의 변질과 분파주의


1. 신약교회가 타락하게 되는 원인

① 혹독한 박해 때문이었다.
AD 64년 네로가 로마시의 화재의 원인을 기독교도들에게 전가시키면서 가혹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뒤 계속하여 300년까지 200여년이 넘게 혹독한 박해는 멈추지 않았다.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현실보다 신앙적 이상이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그 이상을 지키고 따르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많은 저항이 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다 당하였다. 그러나 교부들은 자기들이 당면한 현실 타개가 이상보다 더한 급선무였다. 이같이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회의 변질을 가져왔다.

② 이교사상과 철학의 영향이 컸다.
기독교는 처음 수세기 동안을 이교도들을 개종시켜야 했다. 유대교, 헬라의 철학, 동양의 각종 종교, 헬라, 로마에 뿌리를 둔 이방 종교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방 종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 종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타 종교의식과 비슷한 것처럼 혼용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세례는 동방종교에서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오해되기도 하였고, 헬라의 각종 신들의 예배가 카톨릭에서는 각종 천사들의 숭배로 발전되기도 하였고, 또 페르샤나 가나안에 있었던 여성신 사상은 성모 마리아 사상으로 대치되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타 종교로부터 영향을 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 요소가 있었다. 이같은 점들이 기독교를 본질에서 떠나 부패하게 만들었다.

③ 의식의 남용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신약교회 당시 의식은 한낮 의식일 뿐이다. 그러나 사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부터는 이교도에서 개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독교적인 것과 이교적인 것을 혼합시켜 놓았다.  그중에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세례’가 무슨 마술적인 것처럼 남용되었다. Justin이나 이레네우스는 세례가 신비한 효력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여 ‘세례중생론’으로 나아갔다. 그뿐 아니라 익나티우스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영혼의 자양분을 준다’고 순수한 의미로 말을 하였지만, 그것이 나중에 화체설로 발전한다. 이렇게 평범한 의식이었던 것이 차츰 발전하여 ‘성례’(Sacrament)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성례전의 신앙은 가지수가 점점 늘어나서 중세 때에 카톨릭은 30여가지까지 제정되었다가 현재는 7개로 한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많은 성례가 바로 교회를 타락시켰다.


④ 교회 행정상의 난맥이 교회를 부패시켰다.
초대교회의 평범하고 동등했던 직분이 2세기로 옮겨지면서 감독직이 다른 직보다 더 크게 부상한다. 이렇게 하여 감독직이 장로직보다 우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초대교회는 감독이나 장로가 다 똑같은 직분이었다. 그런데 장도들 중에서 보다 뛰어나고 강력한 지도자에게 교회 운영관리를 맡기며 그를 ‘목자장’(벧전 5:4)으로 전문직 행정사인 감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머지 비전문적인 장로들을 감독과 분리하여 그냥 ‘장로’라고 불렀다.

이렇게 발전하여  3세기에는 수 많은 장로들 중 하나를 감독으로 뽑아 감독은 지역의 책임자이고 장로들은 그냥 개교회의 지도자로 구분하였다. 나중에 4세기 때 세 곳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은 대교구 감독이 되었고 나머지는 각 지방의  소감독이 되었다. 이같은 발전이 드디어 전체 교회의 감독자인 교황제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에 많은 직분이 있는 것이 좋은 일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성경에 없는 교회 행정제도는 자동적으로 교회의  부패를 가져온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성경에 없는 여러 행정 직분의 남발은 유익보다는 교회의 부패를 가져올 확률이 크다. 우리는 이같은 과거를 보고 현재를 반성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할 것이다.

⑤ 교회와 국가의 연합이 교회의 부패를 가져왔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마 22:21)라고 하셨던 말씀에 의하면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분명히 하였고, 또 초대교회는 이것을 분명히 지켰다. 그런데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국가와 교회는 연합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황제들이 친히 교회의 회의를 소집했고, 교회의 결정을 황제가 인정하느냐 부정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교회의 흐름이 달라졌다. 교회 지도자들도 영적 힘으로 지도자 역할을 다하려 하지 않고 정치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 진출을 기하였다. 이렇게 되자 신앙적으로 경건하고 영력있는 지도자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 이런 사람들은 그런 정치적인 술수를 쓰는 사람들에게 밀릴 수 밖에 없으니까 - 또 지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전체 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권위로 인정하는 관행이 만들어졌다. 어디서나 다수가 모인 회의에는 술수좋고 재능있고 재치있는 자가 회의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게 마련이다. 교회의 힘은 다수가 결정하는 전체 회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참고 단계요, 실제 교회의 힘은 진리가 힘이요, 영감이 교회의 힘인데, 교회 회의를 통한 결정이 곧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게 되면서 교회의 부패는 점점 더 커진다. 교회 회의주의는 교권의 경쟁, 비진리가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⑥ 이 외에도 기독교인의 예배와 생활을 변화기키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계속 작용한다. 즉 극단적인 금용생활로 그리스도께 충성을 증명하려고 한다든지, 모든 성도가 다 같은 형제요 자매라는 일체감을 빼 버리고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 이같은 대세의 물결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2. 분파주의자들

그러나 그 같은 대세 속에서도  무언가 저항을 하고 반대운동을 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을 이름하여 ‘분파주의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들은 왜 대세의 물결 속에서 반항을 하고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던가 ?  후세의 사가들은 이들을 그저 도매금으로 이단 또는 분파주의자라고 몰아 부쳤으나, 우리는 이들이 과연 신앙이 없고 이교도들과 같은 이단들이었는가 아닌가를 논하기에 앞서 그들의 주장이 무엇이기에 그런 평을 받게 되었는가를 사실 그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몬타너스파 (Montanists)

1) 몬타너스(Montanus)는 소아시아 브루기아지방에서 출생하였다. 156년경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 스스로 성령의 대변자로 자처하였다. 그리고 자기를 보혜사 성령께서 사용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자처하였다. 성령께서는 자기를 황홀한 지경에 사로 잡히게 한 다음에 말씀을 주시는데, 그때의 자기 말은 개인의 말이 아니라 보혜사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몬타너스의 활동은 소아시아를 중심한 여러 교회는 물론 서방교회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되자 이들을 마귀의 집단으로 거부하는 층과 또 하나님이 보낸 시대적 개혁운동으로 보는 상반된 반응이 일어났다. 이에 브루기아 지방의 주교들이 172년경 회의를 열고 이들을 유죄로 판결하자, 몬타너스는 이 결정이 사탄의 결정이라고 서방교회에 자기들의 입장을 호소한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이레니우스’(Irenaeus)는 동방교회의 화평을 생각하여 몬타너스의 호소를 묵살한다. 이렇게 되자 몬타너스는 모든 교회로부터 완전 분리하여 독립교회를 세운다. 몬타너스의 후계자인 ‘데오토투스’는 보다 철저한 조직을 강화한다. 그리고 자기 종파에 속한 이는 ‘프뉴마티코이’(영적인 자들)이라 하고, 일반교회의 추종자로 성령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프쉬키코이’(육적인 자들)라고 부르면서 자기들 스스로 우월감을 가졌다.



2) 몬타너스파의 주장

① 정 통
몬타너스주의자들은 정통 기독교의 가르침과 사도들 신앙의 근본 진리에 대하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믿었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이 모여 제정한 교리나 계율 등은 믿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리나 계율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가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② 이적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
몬타너스주의의 오류는 이적의 은사 특히 예언의 은사를 몹시 강조한 것이었다.

③ 주의 영인 성령을 받은 자는 다 똑같은 제사장이다.
교회의결정은 다수의 주교들에 의해 이루어져서는 안 되고, 오히려 신령한 성령의 사람들이 다 동일한 제사장적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활동을 일정한 형식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처럼 제한해서는 안된다.

④ 사죄의 권한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있다.

⑤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믿었다.

⑥ 금욕주의
몬타너스 파는 금욕주의와 교회의 규율을 지킴에 있어서 광신적으로 엄격하였다. 이것은 기성교회의 규율이 점점 해이해지는 경향, 특히 박해 기간에 교회에서 떠나갔던 사람과 변절하고 죄에 빠졌던 사람들을 교회에서 도로 받는데 엄정하지 않던 경향에 대한 강력한 항거의 표시였다. 또 금욕주의를 강조하여 여자의 사치스로운 의복을 금하고 금식과 극단의 고행을 장려하고 재혼을 금하였다. 또 박해 때에 숨는다든지 도망하는 것을 정죄하고, 변절했던 사람이 교회에 다시 들어 오는 것을 금하였다.

⑦ 신앙생활의 근본에 대하여는, 기성 교회주의자들은 교회의 제도나 교리에 익숙한 것을 말하나 몬타너스주의자들은 경건한 삶이 곧 신앙이라고 하였다.


3) 몬타너스파의 영향
이들의 운동은 교회가 무미건조한 의식주의로 흘러가는 데 반항하여 엄격하고 청순한 신앙운동을 회복하려던 청교도적 개혁운동이었다. 그래서 교부들 중 박학다능한 터툴리안 (Tertullian)도 그의 마지막에는 이 운동에 가담했으므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2세기 후반부터 6세기까지 소아시아는 물론이고 동.서방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의 강한 주장 중 하나가 기성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바람에 많은 정치적 박해까지 받게 되었다. 이 몬타너스파는 3세기의 노바티안파와 4세기에 도나터파로 이어진다.




4) 몬타너스파에 대한 평가

① 비판적인 시각
a. 사도의 계시가 단회적인데 자기들에게 계속 주어진다고 한 것은 특수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못한 점이다.
b. 참된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성령의 무리라고 하여 스스로 영적 엘리트
   의식에 도취되었다.
c. 성도가 박해 때는 순교로, 평화 때는 금욕적 생활로 성도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하여 지나친 금욕주의적 신앙으로 기울어 졌다.
d. 지나친 말세사상의 강조로 현세의 의미와 사명을 강조하는데 소흘히 하였다.

② 긍정적 시각
a. 몬타너스의 운동은 이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 안에서 교회의 개혁과
   성도의 경건생활을 찾으려는 운동이었다. 이같이 교회내에 갱신운동을 같은 교회
   의 직분을 가진 자들이 저들을 정죄하오 파문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b. 오늘날도 개 교회마다 보면 성령에 사로잡힌 능력을 구하기보다는 제도와 조직의
   힘 안에서 그 능력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최초의 의로
   운 길을 나름대로 찾으려고 한 성도들이다.
c. 따라서 오늘날 몬타너스파의 부분적 요소만 가지고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다. 우리는 양면을 다 보면서 어찌하여 이런 사람들이 생겨났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몬타너스파를 영지주의나 그 밖의 여러가지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아 교회가 변질되어 가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몬타너스 파는 신앙보다도 지식을 강조하는 사상을 반대했으며, 교회의 규율의 문란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이 문란해짐을 막으려 했으며, 교회가 세속화되어 감을 제지하려 하였고, 교회 안에 계급제도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으며, 또한 당시에 일어나는 특별한 섭리와 계시를 믿지 않을려는 사상을 막으려는 운동이었다. 몬타너스파는 고의적인 분열자들이 아니라, 2세기에 있어서 한 개의 중요한 청교도적 분파 운동이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개혁하기를 원하였지만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들을 분파주의자로 몰았던 것이다.

(2) 노바티안파 (Novatians)

1) 노바티안의 기원
노바티아누스(Nopvatianus)는 소아시아 브루기아 출생으로 전해진다. 개종하기 전에는 철학자였다. 개종한 후 회개의 삶은 현저한 모범적 생활이었다. 후에 로마교회의 장로가 된다. 여기에 못마땅하게 여기는 적수가 있었으니 ‘코넬리우스’이다.  이 무렵 데시우스 황제 (AD 250-251)의 심한 박해로 인하여 순교자들과 변절자들이 많이 생겼다. 이 박해로 인하여 로마 감독인 파비아누스가 순교한다. (AD 250) 이때 기회를 노리던 코넬리우스는 변절자로 소문난 ‘제프리누스’(Zephyrinus)의 도움으로 주교에 취임한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박해 때 변절했던 자들이 다시 교회로 들어 오려고 할 때 그를 용납해야 하느냐, 아니면 벌을 내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코넬리우스는 관용론의 입장이었고, 노바티아누스는 책벌론자였다. 그러다가 코넬리우스가 로마의 감독이 되자 노바티아누스는 묵과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노바티아누스의 입장을 지지하는 카르타고의 ‘노바투스’(Novatus)가 이탈리아 교회의 새 감독의 추천으로 또 다른 로마교회 감독으로 노바티아누스를 세운다. 이리되니 로마교회의 감독이 두 사람이 되었다. 이무렵 노바티아누스는 스스로 교회 정화를 표방하고 과거에 변절한 자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려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맞선 코넬리우스는 60여명의 주교회의를 열고 노바티아누스를 정식으로 정죄하였다. 그러자 노바티아누스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간가. 이들 노바티안들은 몬타너스 운동과 합세하여 7세기까지 존재하다가 사라진다.


2) 노바티안의 주장
표면적으로는 로마 교회의 감독직을 놓고 경쟁한 것 같으나 실은 주장은 다르다.

① 코넬리우스 주장
a. 교회는 교회가 필요한 관례를 제정할 수 있다. (마18:18참조)
b.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모든 이를 교회 안으로 소속시켜야 한다.
c. 교회는 믿음으로만 아닌 ‘랩시’ (Lapsi : 죄를 용서한다는 대속의 속전)에 의해서
   라도 잃은 자를 되찾아 놓아야 할 책임이 있다.

② 노바티아누스의 주장
a. 교회는 성도들이 교제하는 곳이다.
b. 교회회의는 참작할 필요가 있으나 교회회의가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 참된 권위는 성령의 지도에만 따라야 한다.
c. 사람이 지은 죄가 ‘랩시’에 의해 도움이 된다고 하면 그것은 물질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우상숭배와 같은 사상이다.

노바티안의 강경론이 안디옥교회에서는 환영을 받았고, 서방교회와 특히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키프리안은 노바티안의 주장을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 노바티안은 왜 그런 주장을 하였을까 ?  그의 입장에서는 교회가 배교한 자와 같이 더럽혀진 자들을 아무 조건없이 다시 받아들임으로 합법적인 성직의 수임기구를 타락하게 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거룩을 때 묻히는 것이라 보았다.  또 교회는 죄를 해결하도록 위임받은 기관인데 죄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무조건 용납하는 것은 저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죄를 나누어 갖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3) 노바티안의 영향
이들 노바티안은 신앙의 정절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자기들 주장과 맞지 않게 행동을 하는 이들과는 교제를 멀리했다. (재건파와 비슷) 이같은 이들의 진의는 다른 이들에게 이해되지 못하였다.  카톨릭교회는 이들을 자기 세력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강요하였으나 끝내 고집하면서 독자적인 신앙노선을 펼쳐 나갔다. 이들은 6세기 또는 7세기까지 유지되다가 자체 내 몰락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면 그들은 왜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그토록 어려운 신앙생활을 하였을까 ? 이것을 단지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쯤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들은 분파주의자이며 이단자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런 오명을 쓰게 된 것은 그의 신학상의 성격보다도 대부분의 이유는 그가 처해있던 환경 때문이었다.  그의 교리관은 몬타너스나 터툴리안의 것과 마찬가지로 주로 정통적이었다.



(3) 도나터스파 (Donatists)

1) 도나티스트의 기원
도나티스파는 ‘디오클레티안’의 박해가 끝날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파 역시 일찌기 몬타너스 파와 노바티안 파가 지니고 있던 퓨리턴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도 역시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교회의 계율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들이 생긴 직접적인 원인은,  교회는 극심한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변절자들이 생겼다. 변절자들은 비단 신자들뿐만 아니라 감독들 중에도 있었다. 그 중에 ‘펠릭스’(Felix)라는 북아프리카 주교가 있었다. 펠릭스는 박해 때  성경을 버리고 성물들을 부숴버림으로 노골적인 변절자로 알려졌다.

박해가 끝났을 때 감독 중 중요한 자리인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멘수리우스’(Mensurius)가 죽자 (311년) 그 후임으로 ‘카에킬리아누스’(Caecilianus)를 선정한다. 그런데 이 카에킬리아누스를 감독으로 안수한 안수위원중 한 사람이 변절자로 소문난 펠릭스였다. 카르타고의 감독은 변절자들을 엄호하고 도리어 엄격한 신자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엄격파들은 카에킬리아누스의 임직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마조리누스’(Majorinus)를 따로 선출하였다. 그런데 마조리누스가 선출된 후 곧 사망하지 그의 후임으로 ‘도나투스’(Donatus)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카르타고 교회 안에 카에킬리아누스와 도나투스라는 두 감독이 존재하였다. 이때 다른 교회들은 어느 감독을 인정하느냐 하는 어려움이 생겼다. 그런데 로마교회의 감독은 카에킬리아누스를 지지하였다. 여기에 콘스탄틴황제까지 합세하였다. 즉 제국의 통일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바랐던 황제는 다수 감독의 의견을 따랐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도나티스트들은 “황제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항하고 나섰다. 그리고 저들은 ‘세상의 군주와 간음을 범한 교회’ 또는 ‘황제의 조직망 확대에 가련하게 고용된 고위성직자’라고 비난하고 교회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330년경에는 270여명의 주교들이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이 확장되었다.


2) 도나티스트의 주장

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맞다.(마 22;21, 롬 13:7, 고후 6;15-16) 그러나 분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하는데 있어서 보다 성경적인 태도를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도나티스트들은 자기들의 순수성만을 주장하고 남들과의 대화를 거부한 채 독선적인 길을 걸어갔다. 그래서 정부로 부터 간섭받는 것도 싫어하고, 정부의 지시에도 거절하는 일을 큰 영예처럼 여겼다. 이렇게 되닌 국가로 부터 불필요한 탄압을 자초하게 되어 결국에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만다.

② 신자의 생활에 관한 문제
a. 엄격한 교회 훈련에 의한 신앙생활
b. 개인 신앙 양심의 보장
c. 회중정치의 교회
d. 유아세례 반대
e. 선교하는 교회 등을 강조하였다.

이들의 주장과 신앙은 성경에 있는 주장이었다. 이들의 삶 역시 특색있는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저들의 단점은 자기들과 맞지 않으면 상대방을 공격하고 그리고 분리하는 분파적 기질이 강했던 점이다. 이같은 분파적 기질은 현대교회 안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이 처음 출발할 땐 배교했던 주교의 안수는 효력이 없다는 교회의 규율문제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편을 드는 국가와 황제에 대해 거부하며 싸우는 것으로 확대된다. 이들이 처음에는 국가의 반대를 피하다가 나중에는 반 정부운동으로 과격하게 확산된다. 이리되니 황제가 앞장서서 핍박함은 물론이고, 이들을 반대하는 세력도 함께 가세하여 괴롭히게 된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참 교회라는 영적인 우월감에 사로잡혀 살다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한다.

도나터스 파는 대체로 전의 2세기 동안에 있었던 몬타너스 파와 노바티안 파와 마찬가지로 교리와 조직에 있어서는 정통이었다. 이들이 바란 것은 순결한 생활을 하며, 교회의 규율을 보다 엄격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분파를 이룰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들은 당시의 교회에 있어서 청교도들이었다. 이 운동은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그들의 교훈과 법규의 대부분은 기성교회에서 채용되어 그중의 어떤 것은 교회의 정통신조가 되었다. 몬타너스 파, 노바티안 파 및 도나터스 파가 주장하고 또한 이로 인하여 박해를 당하던 교리와 대부분의 주장들은 교회에서 채용되어 수도원주의와 수도원의 계규로 삼게 되었다. 만일 몬타너스, 노바티안, 도나터스 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판단을 명철하게 하여 너무 광신주의로 흐르지 않았다면 이들 지도자들과 그들의 운동은 기독교 사상의 발전과 기독교 생활의 정화에 있어서 훨씬 더 유익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그랬다면 이 분파들은 당시로부터 오늘날까지 비난의 대상이 되기보다도 교회를 정화키고 부흥시킴에 있어서 큰 공로자가 되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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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사교재 : 「내 주의 나라와」 P













제3장. 로마제국교회


제 3-1 장. 니케야 회의


1.제 1 차 니케야 회의 (Nicaia)

(1) 소집자 : 콘스탄틴황제
(2) 시기 : 325년 5-6월
(3) 장소 : 콘스탄티노플
(4) 방법 : 각 감독은 장로 2명 수행원 3명 대동
(5) 동기 : ① 부활절 지키는 문제 - 동방은 유월절, 서방은 주일중시
              결론은 춘분지나고(3/21)만월(滿月)지나고 그후 오는 주일
           ② 아리어스 학설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위기를 맞음.


(6) 아리어스학설 논쟁
① 아리어스는 리비아사람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장로. 성경해석에 통달한
   일류학자였음. 열정적이고 금욕적인 생활로 인하여 추종자가 많았다.

② 그의 학설 -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다. 신성(神性)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다.

③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알렉산더에게 반박. 이에 동방의 많은 교회들에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어스의 학설이 유포됨.  교회가 일대혼란에 빠짐.

(7) 회원의 파벌
① 아리어스 파 - 소수
② 알렉산더 파 - 소수
③ 중립파 - 가이사라의 유세비오 (다수)
(8) 결과 - 아리어스의 성경해석이 잘못됨을 확인.
           예수님의 신성(神性)확인. 니케아 신경 반포. 아아리어스 추방
그후 교회의 문제가 있을시 마다 세계기독교대회가 개최 (8차까지:879년)


니케야 회의는 기독교 세계대회의 효시가 된다. 이 대회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되는 대회이다. 그러면 니케야 회의는 왜 열리게 되었는가 ?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교리적 논쟁이 크게 확대되어서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열리게 되었다. 문제는 기독론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의 안디옥에서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가 다른 선지자보다 강력하게 작용하여 로고스가 되었다고 보고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다음에야 하나님은 그에게 신성을 부여하였다고 하였는데, 안디옥교회는 이것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인 ‘아리우스’(Arius)는 이 사모사타 바울의 영향을 받은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주장을 답습하였다.

아리우스는 키가 육척이 되고 설교가 명쾌하며 논리가 정연하였고, 또 정열적인데다가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아리우스는 예수의 인성만을 강조하였다. 즉, 예수는 본래 신의 본질로 처음부터 있는 분은 아니고 창조함을 받은 장자이므로 영원치 못하며 그 본질에 있어서도 아버지는 시작도 없으나 아들은 시작이 있음으로 그리스도는 신이 아니고 제2의 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예수는 인간의 육체를 가졌으나 인간의 영혼은 갖지 않았다. 예수는 인간들의 영혼이 아닌 로고스를 가졌다. 따라서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중간적 존재라고 하였다.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알렉산드리아 교회 감독인 ‘알렉산더’(Alexander)가 회의를 주장하여 아리우스의 이단설을 정죄하였다. 그리고 아리우스를 따르는 자들을 파문하였다. 그렇지만 아리우스와 같은 안디옥 학교 동문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동방교회에서 막강한 힘으로 아리우스를 지원하였다. 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 황제의 측근으로서 그 세력이 대단하였다. 여기에 힘입은 아리우스는 계속 책과 대중노래로서 자기의 주장을 보급하였다. 그러다 보니 정통 신앙을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의 교회와 자유로운 새 사상을 주장하는 안디옥 교회 출신자들 사이에 심한 논쟁과 함께 반목이 증폭되어 갔다.

교회가 이렇게 대립되어 가는 것을 콘스탄틴 황제가 크게 염려하여 국가통일의 성업을 위해서 국론이 하나되어야 한다고 믿고 두 파벌간의 분쟁을 종식하려고 노 감독 ‘호시우스’(Hoius)로 하여금 조정을 시도했으나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큰스탄틴 황제는 최후 수단으로 전 로마제국 안에 있는 모든 감독회의를 개최하여 세계교회가 하나라는 모습을 나타낼려 하였다. 그리하여 소아시아의 니케야에서 AD 325년 5월 20일에 전 로마제국 안의 감독회의가 황제에 의해서 소집되었다. 이때 모인 감독의 수는 약 300명 정도였고, 서방교회에서는 겨우 6명만 왔다. 그 이유는 먼 길에다 헬라어를 몰랐고, 또 박해 때 불구가 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 로마교회는 감독이 연로하여 장로2명만이 왔다.


회의 결과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주장을 하였다.
① 알렉산드리아 교회파의 감독 약 20명중 수석책임자는 알렉산더 감독이고
   수행자 대표는 아다나시어스였다.
② 아리우스파 감독 약 20명 중 수석 책임자는 니코메디아의 감독 유세비우스
   수행자 대표는 아리우스였다.
③ 거의 대다수였던 중간파 중 수석 책임자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로 유명한
   역사가였고, 어용신학자로 혹평받던 자였다.

개회날 콘스탄틴 황제가 개회사를 하였고, 진행은 호시우스와 유세비우스가 하였다.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비슷할 뿐(Homo ousios = like substance) 본질이 동일한 것(Homo ousin = like substance)은 아니다’고 하였다.

이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히고 회의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절충안을 내었다.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분쟁으로 싸우기 보다는 서로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자고 제의하고 절충안을 내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지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시니 아버지와 비슷한 본질을 가졌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회의가 한창일 무렵 정통신학의 수호자인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인 ‘아다나시어스’가 책임을 승계하여 ‘아버지와 아들은 동질이며, 아들도 아버지와 같이 영원하신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만일 아들이 피조물이라면 아들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신과 인간이 결합되는 ‘성육신’(Incarnation)한 분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아다나시어스의 주장이 회의의 대세를 판정하였다. 결국 아다나시어스의 종질론이 다수의 지지를 얻어 가결되었다. 그 결과 유세비우스가 제출한 것을 수정하여 「니케야 신조」가 채택되었다. 이 신조에 참석한 회원들이 전부 서명하였는데 아리우스와 애굽의 두 감독이 서명을 거부함으로 그들은 일루기아 지방으로 유형판결을 받는다.

□ 참고 : 아다나시어스 (Athanasius)

295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하였다. 아리우스 논쟁 초기에는 그는 집사였으며, 개인 비서로서 알렉산더 감독을 수행하였다. 328년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알렉산드리아 감독에 선임되어 잇단 공격과 5차례에 걸친 추방에도 불구하고 373년 서거할 때 까지 그 지위를 고수하였다. 그는 한 마디로 큰 신앙의 인물이었다. 그는 구원론이 논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살리심과 참되신 신성(神性)이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한 인성(人性)과 하나 되심으로써만 인간에서 신에로의 변화가 이루어 질 수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에게도 성화(聖化)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는(그리스도) 우리 인간이 신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 자신은 인간이 되셨다.”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 주의의 가장 큰 결점은 주님의 신성을 무시하여 참 구원의 기초를 마련하지 못하는게 있다고 하였다. 그는 아리우스주의 자들과 양보없는 투쟁으로 인하여 그의 생애에 5번이나 추방을 당하였다. 주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오 등에 의하여. 373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존경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 참고 : 니케아 (Nicaea) 신경 (주후 325년 : 318교부들의 신경)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자이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 그리고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며, 즉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독생하셨으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온 참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온 빛이시며, 태어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똑같은 본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존재케 되었으며,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 오셔서 성육신하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았다거나, 그의 시대 이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거나, 또는 그가 無로부터 존재케 되었다거나, 또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다른 실재 혹은 본질을 가지고 계신다거나, 또는 그는 피조물이라거나 가변적이라거나, 변덕스럽다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편적 사도 교회가 저주합니다.


2. 니케야시대(313년 - 590년)의 대체적인 신앙적 모습

① 그리스도의 그림과 동상숭배 - 회당과 각 가정
② 성자숭배(聖者崇拜) - 순교자묘소에 모여 예배,
                        묘소에 성전건축 (성베드로성당)

③ 유물예배(遺物禮拜)- 의복, 형기구가 고가(高價)에 매매됨.(병낫는다고)

④ 성모숭배(聖母崇拜) - 영구처녀설 주장

⑤ 천사숭배(天使崇拜)

⑥ 예배는 설교보다 의식을 치중. 의식이 기독교의 권위를 더 해주는 것이 아님

⑦ 성탄절 - 12월 25일 지키는 것으로 확정
          기원은 로마의 12월에 삼대절기가 있는 것과 융합

        * Satunalia : 12-24일 지킴
        * Sigillia  : 어린이에게 인형선물을 줌
        * Barumaria : 동지제





제 3-2 장. 수도원 운동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고나서 기독교 안에는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났다. 즉, 초대교회 신자들로부터 시작해 근 300여년 동안 모든 기독교 신자들은 로마 관리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느냐, 아니면 기독교를 배교하고 이방종교를 따르느냐 하는 선택을 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국교가 되고나서 핍박이 사라졌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이며, 새로운 경륜이라고 경하해마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편에서는 기독교가 변질되고 타락되는 위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세상을 비판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국교가 된 후부터 권력의 보호 아래 세속화 되어가는 모습으로 판단했다. 과거의 교회는 너무 좁은 문에다가 찾는 이가 적었다. 그러나 국교화 된 후의 교회는 너무 넓은 문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드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감독들은 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경쟁을 하고 있었고, 교회 내에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보다는 부유하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모임처가 되었다.

교회가 이렇게 변화되어 가는 가운데 뜻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같은 상황 속에서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세상정치와 야합해야 되는가 ? 교인들도 세상과 마찬가지로 사치와 허영을 용납해야 하는가 ?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사치스런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는 것과 과거 신앙선배들의 수난의 삶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 이같은 당면한 현실 앞에 차츰 새로운 각성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교회 안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이들이 주님을 보다 자유롭게 섬길 수 있다는(고전 7:8) 바울의 말씀에 근거하여 금욕주의 현상이 나타났다. 또 독신주의에 대한 충동은 주의 임박한 재림에 관한 기대감으로 더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밖으로부터 영지주의나 스토아학파의 영향도 컸다. 저들은 육체야말로 영혼의 감옥이므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고 하면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내.외부적 영향으로 박해 중에 순교가 미덕이던 것처럼 평화시에는 순교 대신 금욕주의가 크게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영향으로 독신생활은 물론이고 금식과 금욕을 예찬하는 수도원 운동이 새로운 영적 유토피아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독신 성직자들, 결혼을 멀리하는 구별된 처녀들, 인가가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에서 은둔자의 생활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수도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monk' 즉 고독을 의미하는 ‘모나코스’에서 유래하였다. 처음 수도사들은 인간들을 떠나 고독을 찾았다. 그 후에 혼자 거주하는 수도사로 ‘은자’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도망자’ 혹은 ‘피신한 사람’ 등을 의미한다.



1. 안토니 (Anthony)

최초의 수도사 또는 은자가 누구였을까 ?  여기에 대해서는 제롬이 쓴 「폴」이라는 사람의 전기와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 전기가 있다. 안토니는 250년경에 애굽의 나일강변 작은 촌락에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그의 부모가 일찍 죽으면서 남겨 논 유산을 가지고 평생 살 수가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 복음서 강해를 듣는 중에 “만약 완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19:21)는 말씀대로 안토니는 자기 재산을 다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의 여동생을 위하여 약간을 남겨 두었다. 그런데 그 후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마 6:34) 말씀을 듣고 여동생 몫의 재산도 처분해 버리고 그녀를 교회에다 맡긴 후 사막을 향해 떠났다.

안토니의 초기 생활은 동리를 떠나 수도생활을 하는 노인과 함께 생활하다가 다음에는 무덤에서 생활을 한다. 이 무렵 그는 처분한 재산과 옛날의 쾌락을 즐기는 마음 때문에 악마의 환상에 많이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다시  깊은 사막의 버려진 성채에서 생활하며 기도와 명상, 그리고 지혜를 구하는 생활을 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수도생활에 관한 지식과 획심으로 그를 찾는 방문객들이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방문객에게 시달리지 않을려고 여러 번 거처를 옮겼으나 방문객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안토니는 두 차례 대도시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하여 신자들을 격려한다. 그는 결국 356년 106세의 장수를 누리고 자기 매장지를 비밀로 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 안토니의 전기에 의하면 이 무렵 사막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수의 남녀였다. 저들은 바구니와 명석을 짜서 빵과 기름을 바꾸어 생활해 나갔다. 이들의 재산은 최소한의 의복과 깔고 잘 거적에 불과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교만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서적의 소유를 배격하였다. 이들은 기억에만 의존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2. 기둥성자 시므온 (Symeon)

고행을 하며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양상은 여러 가지로 다양하였다. 그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들에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일생을 사는 주상성자들이 있었다. 시므온은 수리아 사람이었다. 그가 원래는 목동이었으나 수도사들의 전기를 읽고 감동을 받아 수도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는 수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를 여러번 시도하다가 건강을 해친다. 그의 극단적인 금욕생활은 단체생활에 지장에 주었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추방을 당한다. 시므온은 산 속 깊숙이 가서 쇠줄로 발을 묶고 고행을 계속하였다. 그것으로 만족을 못 얻은 그는 423년부터 안디옥 동쪽 16마일에 있는 들에서 개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30년간 은둔생활을 하였다. 그는 짐승가죽으로 옷을 삼고 쇠줄로 목을 감았다. 제자들이 올려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하며 날마다 순교적 각오로 고행을 계속하였다. 그가 기둥가에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그를 구경하러 찾아가서 보고 그의 초인적인 금욕생활을 감탄하였다. 시므온이 올라선 기둥의 높이가 처음에는 한 자 남짓 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여섯 자 이상의 높은 기둥 위에서 살았다. 이같은 시므온의 고행에 감동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기독교를 전혀 오해하여 동방의 고행 종교와 유사한 것처럼 여긴 변형된 이기적 영웅주의였다.


3. 베네딕트 (Benedict)

서방교회 안에서 수도원을 개척한 사람은 베네딕트(AD 480-543)이다. 그는 480년경 중부 이태리에 있는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일찌기 그는 로마에 진출하여 공부하는 중에 로마 시민의 타락상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그는 로마 동쪽에 있는 ‘수비아코’(Subiaco)라는 고산동굴에 들어가 3년간 고생과 명상에 힘썼다. 그러나 단독 수양의 많은 어려운 점을 깨닫고 수도원 건설에 뜻을 두게 된다. 베네딕트는 자기를 따르는 동지들을 모아 아폴로 사원의 옛 터인 ‘몬테 캇시노’(Monte Cassino) 언덕에다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이 외에도 12개의 수도원을 세운다. 그런데 베네딕트의 수도원의 규칙은 이전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 특이하였다. 즉 이전에 수도사들은 주로 자기의 개인적 수도와 경건생활에 주력하는 것이 그 주된 목표였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자기 자신을 위해 경건생활을 철저하게 함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가난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고치고 이웃들에게 전도하는 일을 힘쓰게 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 베네딕트가 실시한 수도원 규칙은 여러가지로 특이하였다. 즉 수도원의 모든 운영은 원틱적으로 민주적 방법으로 운영하였다. 그리고 수도사들의 생활은 자기 스스로 생활을 해결해 나가도록 자신이 책임진다는 것과 또 수도사들에게 고행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들은 사회봉사, 교육활동, 선교사업 등에도 여력을 쏟도록 했기 때문에 이같은 수도원 제도는 중세 로마 사회의 정신적 요람지로 발전한다. 이 수도원에서 목사, 감독, 선교사, 교황은 물론, 학자 저술가, 성자, 예술가, 추기경 등이 배출된다.

제 3-3 장.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


1. 페라기우스 논쟁
동방교회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냐, 피조물이냐로 논쟁할 때, 서방교회는 죄와 구원문제를 논하였다.

(1) 페라기우스 (Pelagius)
① 영국의 수도승(修道僧) 명성과 학식이 뛰어난 사람으로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
   였음. 도덕적 성결로 인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음. A.D 400년경 노령의 나이로
   로마에 정착하였다.

② 그의 사상 - 인간의 자유의지 존중. 원죄부정

③ 이런 학설이 그가 에베소 장로가 되어서는 크게 유포되었다.

④ A.D 420년경 사망. 그후 그의 학설은 431년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 후
   로도 꾸준히 그의 학설은 오늘까지 교회내에서 한 경향을 차지하고 있다.

페라기우스 (250-445, Pelagius)는 영국(Britain)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평신도였으나 라틴어, 성경, 교부 등에 관해 교육을 받았고, 희랍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페라기우스는 로마에서 20여년 동안 머물면서 법률을 연구하며 법학도도 인정을 받게 된다. 그는 교황 ‘다마수스 1세’에게 세례를 받고 세상 학문을 그만둔다. 그 후 페라기우스는 삼위일체론을 포함하여 많은 바울서신 주석을 낸다. 그는 인간성의 본질 문제와 자유의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된다.  그는 로마가 고트(Gots)족에 의해 침략당했을 때 (410년) 위험을 느끼고 그의 법률학 제작인 ‘셀레티우스’를 대동하고 북아프리카로 간다. 페라기우스는 아프리카의 어거스틴을 만나려고 하였으나 만나지 못하고 편지만 남겨놓고 팔레스틴으로 간다. 한편 페라기우스의 제자인 세레티우스는 카르타고에 남아서 교회의 장로가 되려고 하여 그의 의견을 발표할 때에 문제성있는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것은,

① 아담은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② 아담이 타락한 것은 오직 그에게만 적용된다.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미
   치지 않는다.
③ 새로 출생하는 신생아는 아담의 최초의 상태, 즉 무죄와 같은 상태로 출생한다.
④ 인류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심으로 이미 영생의 길을 해결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펼쳐서 그는 위험한 사상가라고 경원당하자 에베소로 가서 장로가 된다.  한편 예루살렘으로 간 페라기우스는 그곳에서 장로가 되어 제자인 세레티우스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페라기우스는 성격이 온순하고 품행이 엄정했으며 지력이 명석한 자였으므로 그를 따르는 자도 많았기 때문에 논쟁으로 시비를 가리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생긴 것이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논쟁이다.


(2) 어거스틴 (Aurelius Augustinus)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비하여 우월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거스틴의 영향때문
이다. 중세 카톨릭교회가 가지는 특색은 대부분 어거스틴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① 354년 알제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기도의 사람인 모니카(Monica)였다. 젊은
   시절에는 마니교도 였고, 방탕과 방종에 빠졌다.

② 밀라노에서 암부르시우스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고, 그후 386년에
   회심을 하게 된다. 387년에 암부르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음.

③ 아프리카의 고향에 돌아가서 금식과 기도, 자선사업을 하며 지냄.

④ 저서 - 참회록(하나님이 어떻게 죄와 의심속에서 자기를 구해 진리와 은
                 혜가운데로 인도하였는지를 소개)
          神의 나라 (이교도들에 대한 기독교 변호)- 그의 최대의 저서

⑤ 430년 8월 27일 77세의 나이로 소천

⑥ 그의 신학 - 신비주의적 경건, 삼위일체교리 확고히 함,
           그리스도의 성육신 강조. 택자와 불택자의 구분 예정교리 정립.


2. 어거스틴의 출현

(1) 어거스틴의 회개
어거스틴은 사도 이후 고대교회에서 종교적으로 최고의 절정에 이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서방교회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서방교회가 동방교회보다도 더 크게 발전하는 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는 중세 로마교회의 아버지이고 근대 종교와 신학의 조상이 되었다.

① 그의 출생
그는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아 힙포(Hippo) 근체에 있는 ‘타가스테’라는 곳에서 354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로마제국의 하급 관리로서 전형적인 이교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모친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어거스틴을 회개하게 함은 물론이고, 그의 남편을 말년에 기독교 신자로 변화시킨 신앙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열성적있고, 민감하였으며, 고상함을 탐구하는 면이 있었다. 이래서 이것을 알아차린 그의 부모는 그를 최고의 교육을 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인 대도시 카르타고에 유학을 시킨 것이 그의 나이 17세 때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대도시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또한 도시가 제공하는 각종 쾌락도 추구하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신앙심보다는 도회지풍에 물들어 품행이 단정하여 못하였다. 그 결과 18세에 노예 신분의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는 당시 법률가나 혹은 고급관리가 되고자 웅변학을 배웠다. 당시 웅변술을 배우는 중에 고대 로마의 유명한 웅변가인 ‘키케로’(Cicero)를 배우게 되었다. 키케로는 언어 구사에 뛰어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어거스틴은 웅변술은 언변 스타일뿐 아니라 그 속에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② 마니교인 시절
어거스틴은 진리탐구를 위한 목적으로 마니교를 찾게 된다. 마니교는 이원론적인 종교였다. 마니교는 빛과 어둠이란 이 두가지 요소로 혼합된 것이 현재의 인간의 상황인데, 따라서 구원이란 이 두 가지 요소를 다시 분리시켜 인간의 영혼이 순수한 빛의 광명의 영역으로 귀환하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혼합되어서 혼란스러운 것도 악한 것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혼합시키려는 행위는 더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라면 양 극단의 혼합을 피해야 한다. 그래서 남녀의 겨혼도 악한 행위이고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 또한 악의 계승 산물이다.  

마니교는 이처럼 철두철미한 금욕주의에 기초했다. 삼봉이라 하여 입을 금하고 손을 봉하고, 가슴을 봉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진리를 탐구할 목적으로 마니교에 들어갔으나 자기의 가정생활과 마니교의 교리와 상반된 생활 속에서 갈등을 느끼며 9년간의 고뇌의 생활을 보낸다. 그래도 어거스틴이 마니교를 못 떠나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에 관한 두 가지 문제를 마니교에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가지란 첫째, 성경 전체에는 세련되지 못한 문체와 표현으로 가독차 있다고 보았는데 마니교는 논리가 정연하였다. 또 한가지는 악의 근원에 관한 문제였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배운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 하나님밖에 없고 그 분은 선하신 분이다. 그런데 현실 세상은 악이 충만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 악의 기원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  여기에 대해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고 있으나  마니교는 분명하게 선의 기원과 악의 기원이 따로 있다고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진리추구에 마니교는 명확한 해답을 제시해주지 못하였기에 그는 다시 마니교를 떠나 신 플라톤주의 철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③ 신 플라톤 철학도의 생활
어거스틴은 마니교에서 떠나 새로운 사상에 접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떠나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자리를 옮긴다. (384년) 그는 여기서 그가 가르칠 수 있는 웅변술 교사로 있다가 새 철학인 신 플라톤 주의에 심취한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철학이었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는 모든 존재의 원칙이 하나만 존재한다. 그것은 잔잔한 호수가에 돌맹이 하나가 던져지면 한 가운데서 무수한 동심원을 그려 나가듯이 모든 존재의 근원은 하나인데 계속 퍼져 나온 것들이 오늘의 현상들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심원에 보다 가까울수록 궁극적 존재에 가까운 실재들이고 보다 우수한 것들이다. 그리고 근원에서 멀리 떨어진 것일수록 열등한 것이며, 악이란 것도 사실은 궁극적 존재에서부터 멀리 벗어난 존재들이다. 도덕적 악이란 것도 궁극적 존재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보다 잡다하고 열등한 것들에 사로 잡혔을 때 생기는 힘이다. 이렇게 볼 때 악이라는 것은 비록 실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사물이 아니라 궁극적 존재의 선으로부터 어긋나버린 하나의 방향이다.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궁극적 실재에 접할 수 있는가 ?  여기에 대해 신 플라톤주의에서는 많은 연구와 훈련과 신비적 명상을 통하여 인간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자에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④ 밀라노에서의 갈등의 생활
어거스틴이 밀라노에서 수사학 교수로 생활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의 회개를 위해 평생을 기도해 온 절호의 기회로 여겨 아들을 찾아 온다. 모니카는 아들을 밀라노의 대 설교가 ‘암부로시어스’의 설교를 듣도록 권면한다. 이에 어거스틴은 암부로시어스의 설교를 듣게 되고, 듣는 중에 웅변술 교사로서의 관찰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과거 어거스틴이 성경에 관해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귀절들이 암부로시어스의 풍유적 해석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가 성경의 모든 의심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지근한 신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전 생애를 헌신하여 결국은 웅변술 교수로서의 직업을 버려야만  하였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정욕과 야망도 끊어야만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갈등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 안토니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게 된다.

⑤ 탕자의 회개
어거스틴은 암부로시어스가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는 설교와 함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감화력있는 설교로 그의 인생을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도 수도생활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안 사실에 대해 자신이 몹시 부끄움을 깨닫고 정원으로 뛰어 나간다. 이때 옆집 아이들이 담 넘어서 노래부르는 “책을 들고 읽어라, 책을 들고 읽어라”라는 노래를 들었다. 그는 즉시 성경을 펼쳐 들고 찾아 읽었는데 그 부분이 로마서 13:13이었다. 즉“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시기와 쟁투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였다. 어린아이들의 노래 소리를 통해 펼쳐 읽은 성경말씀은 마치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같은 감동을 어거스틴에게 주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즉시 기독교 신자가 될 것을 결심했고, 자기 아들과 함께 387년 부활절, 즉 34세 되던 해에 암부로시어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는 웅변학 교수를 그만두고 어머니와 아들과 함께 밀라노를  떠나 고향으로 간다.


(2) 어거스틴의 사역
어거스틴의 사역중 가장 오랫동안 일을 한 것은 ‘힙포’(Hippo)에서의 목회사역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391년에서부터 430년가지 무려 35년동안 한 교회를 봉사하였다.

①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391년에 힙포의 장로로 있다가 395년에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그는 신약시대 이후 전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에서는 가장 영향력있는 저술활동과 행정가와 목회자로 활약한다.

② 마니교를 반박하는 초기 저술활동
자기 자신의 인도로 마니교에 빠진 친구들을 위해서 마니교의 잘못을 지적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는 성경의 권위, 악의 근원, 자유의지 문제등을 취급한다.

③ 도나티스트에 대항하는 각종 논문
어거스틴이 목회하고 있던 북아프리카가 도나티스트가 발생한 지역이었으므로 어거스틴은 그의 전 생애 동안 이 도나티스트와 대항한 논문들을 쓰게 된다. 이대  그는 성례전의 효과가 의식 집전자의 인격과 상관없이 예식 자체로 효력있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것이 서방교회의 입장이 된다.
④ 어거스틴의 참회록 이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문 형식으로 쓰여진 영적 자서전이다. 여기서 그의 심오한 심리적, 지성적 통찰력을 증언해 주고 있다.

⑤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 이 작품은 413년에 시작하여 426년에 완성되었다. 여기서 그는 새로운 역사 철학을 제시하였다.

⑥ 삼위일체론 어거스틴 때 와서 완전하고 온전한 신론으로 귀결된다.


3.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논쟁

(1) 페라기우스의 주장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창 1:26)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란 그의 자유의지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뜻이다. 아담은 이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하였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도 그에게 자유의지는 계속 있었으며, 그에게는 죄의 경향성만이 남아있을 뿐 원죄는 없다.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죄의 경향은 있으나 죄의 유전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아담의 후손들은 그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다.

(2) 어거스틴의 주장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을 때는 죄와 상관없는 완전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한 후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아담의 후손들은 출생부터 부패된 존재이다.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만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택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찾는 의욕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찾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셔야만 가능하다.

□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차이점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죄의 벌로 사망이 옴
아담의 죽음은 인류의 例에 불과함
원죄는 유전(遺傳)
유전을 부인
인간의 선택상실
자유선택 가능
하나님의 절대예정
절대적인 예정은 없다
유아세례
유아는 무죄로 구원과는 상관없다
신본신학, 칼빈주의의 기초
인본신학, 알미니안 주의의 기초

(3) 어거스틴과 페라기우스의 차이점

논쟁점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영혼의 기원
유전설
창조설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성은 부도덕하다.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는
경향이 있어 부단히 하나님께
복종하면 죄를 범하지 않을
능력이 있으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의 본성은 도덕적이다.
인간의 타락
정신적, 육체적 죽음은 모두가 아담의 타락으로 얻은 것이며, 전 인류는 그 유전에 의하여 타락된 존재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에게는 악의 기질과 버릇이 있을 뿐이다. 정신적인 죽음은 아담이 준 것이로되 인류에게 그것은 대표적인 例일 뿐이다.
타락후의 인류
모든 인간은 부정한 죄의 성질 을 가진 채 유전되어 나왔으므 로 진정으로 고결함은 불가능 하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전ꠐ
과 같이 무죄한 존재요,자유인
으로 태어났으나 후에 죄를 배워 타락하였다.        
인간의 의지
타락 전의 자유의지는 타락 후ꠐ
의지와 전혀 다르다. 인간은 타락후 자유의지는 상실되었고
죄의 종이 되었다.        
인간의 의지는 늘 자유롭다. 인간은 타락 전이나 후나 언제든지 선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죄의 유전
죄는 유전이어서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본성 중에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담의 죄는 유전될 수 없다.
인간 개개인은 유전된 죄가
없으므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은혜, 구원에 대하여
인간의 은혜는 신의 진리와 성령의 활동이다. 이 은혜가 인간에게 예정의 움직임이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에게만 은혜        
로 주어진다.        
인간은 의지,지혜 등에 의하여 각 개인에게 자연스럽게 부여되어 왔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은혜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예정에 대하여
하나님의 예정은 개인적이어서ꠐ
영원 또는 절대적이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예정이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두 사람의 견해는 완전히 달랐다.  페라기우스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할려고 하였으나 어거스틴과의 논쟁 후로는 그의 주장이 계속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431년 에베소대회에서는 페라기우스 주장이 이단으로 판정을 받고 만다.



□ 참고 : 반 페라기우스설
반 페라기우스설은 서방의 중심 수도원을 건설한 ‘파우스투스’라는 감독이 주장하였다. 그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신의 은혜에 대한 인간은 자기 의사대로 거부할 수도 있고 수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주장도 529년에 같이 거부되었다.


□ 참고 : 어거스틴에 관한 평

① 긍정적인 면에서 그는 삼위일체를 비롯한 몇 가지 신학적 결론은 과거 교부들의 모호함을 종식시킨 큰 공헌을 하였다.

② 그는 중세기 전체를 통하여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주 인용됨으로 인해서 카톨릭 교회의 위대한 박사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16세기 개혁자들조차도 그의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③ 어거스틴의 신학은 헬라의 신 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입은 바가 크다.

④ 그는 교회관에 있어서 실수를 하였다. 그것은 보이는 교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신령한 하늘나라의 소망에 등한시 되었다.




제3-4장. 교황제도-이시도리안 교령집

하나님 나라의 큰 율법 중 하나는, 가장 잘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섬기는 자로 무리 중에 계셨고, 주님을 바르게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갔다.  그러나 그런 모범과 교훈과는 달리 교만과 이기적인 것이 싹트서 교회의 많은 직분자들이 “큰자”로 대접받기를 원하였고, 그리하여 마침내 교황제도가 생겨졌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 세계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의 머리를 로마 교황으로 알고 그를 그리스도의 대리지로 섬기고 있다. 그러면 이 교황의 호칭은 언제부터 생겨났으며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 ?

(1) 로마 카톨릭의 주장

① 마태 16:18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절에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준다고 했고, 또 베드로의 반석 위에다 교회를 세운다고 하였다. 따라서 사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건설 권한을 부여 받았으므로 사도 베드로가 세운 로마교회가 모든 교회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② 행 12:17에 보면 베드로가 옥에서 풀려나와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였는데, 그 다른 곳이 바로 로마라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A.D 42년부터 67년까지 로마 교회를 건설하고 제 1대 교황으로 지내다가 네로 황제 박해 때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③ 벧전 5:13에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라는 말씀은, 이 베드로 전서를 기록한 베드로가 바벨론교회에서 문안을 전했는데 이 바벨론 교회가 바로 로마교회를 뜻한다고 한다.


(2) 성경에 의한 증명
성경에는 베드로가 로마에 간 일이 없다. 사도 행전 12:17에 ‘다른 장소’를 로마로 단정짓는다는 것은 비약된 감이 있다. 또 갈라디아서 2:7-11을 보면 그 당시 ‘게바’는 안디옥에 있었는데, 이때가 A.D 50-55년 어간으로 카톨릭이 주장하는 A.D 42-67년에 로마에 있었다는 주장과는 다르다. 교황권의 기초자를 우리가 살펴보자. 먼저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이 후에 교회 지도자들은 각인각색으로 그들의 주장이 달랐다. 그들 중에는 감독직의 우위를 주장하는 익나티우스같은 사람도 있었고, 로마 교회의 우월성을 주장한 키프리안같은 사람도 있었다.

특히 키프리안(AD 195-258)은 감독이 다스리는 교회는 다 같지만 그중에도 로마의 교회만은 베드로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로마 교회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요 뿌리라고 하였다. 이 이후부터 로마교회의 감독들은 키프리안의 주장을 뒷받침하여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주장하려 하였으나 다른 교회들의 반발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태가 묘하게 발전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AD 330년에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그리이스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이렇게 되자 정치와 경제, 군사적으로 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황제가 수백년 정착해 있던 로마는 황제가 없으므로 해서 정치적으로는 약화되었으나 그대신 종교적 중심지로 더 건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AD 325년에 니케아 회의 때에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교회는 다른 지역의 감독들보다는 좀 더 놓은 ‘대감독’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1. 레오1세 (440-461년재위)-자칭 45대

설교자, 문학가에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난 로마의 주교였음. 모든 사도중에 신앙과 행정면에서 베드로의 우위성(優位性)을 주장하고, 그것은 로마주교가 계승한다고 주장. 그리하여 황제인 발렌티니안 3세로 부터 모든 교회는 로마교회 주교께 복종하는 것을 명하는 칙령(勅令)을 얻어내었다. 이에 많은 교회가 반발을 하였다. 앞서 말한대로 330년 로마 황제궁이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된 이후 로마시에는 정치적 공백 및 약화가 생겼다.

이 무렵 서 로마는 계속 외적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410년에 고트(Gots)족의 침락이 있었는데, 그 후에도 훈(Hun)족과 반달(Vandal)족의 침입이 있었다. (455년)  이같은 민족들의 침략이 있을 때 마다 동로마의 황제들은 군사적으로 서 로마제국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그럴때 마다 서로마제국은 실패하였다. 이무렵 로마의 감독 ‘레오’는 북아프리카의 ‘아틸라’의 반항을 무마시키고, 또 ‘가이스릭’의 불만도 외교적 설득으로 무마시켰다. 이렇게 되자 동 로마의 황제들 입장에서 보면 레오 감독이야 말로 로마를 건재하게 한 구국공신이었다. 이리하여 레오는 정치적으로 황제들의 신임을 얻었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얻는데다 교회적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 레오가 로마교회는 수사도 베드로가 세운 으뜸 교회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교회들은 레오의 주장을 따르지 않았으나 황제들은 레오의 공로로 보아 그같은 주장쯤은 능히 할 수 있는 것으로 추인하였다. 이것이 로마교회가 베드로 수사도를 계승한 교회라는 주장을 하게 된 공식적인 시발이다.



2. 그레고리1세 (일명, 大고레고리 Gregory I 590-604)

① A.D 540년 로마의 원로원 의원의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지방장관이 되나
   수도원 생활에 매력을 느껴서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하고 수도자가 됨.

② 590년에 교황으로 선출. 거절하고 변장하여 도망치다가 잡혀서 교황됨.

③ 업적은 교회의 중요한 지위에 청렴한 수도자 채용
          교직매매(Simony)를 금지.  교직자의 결혼금지,
          영국의 전도를 위해 어거스틴 파송.
          서구를 통일하여 교황권을 장악. 실제 권한은 황제보다 우위.


롬바르트족의 이태리 침입시 이태리를 방어하는데 주도적인 역활을 하였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 거주) 이후 로마 주교는 영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에
같이 큰 영향을 갖게 되었다.



(1) 그레고리의 배경
레오 1세가 로마교회가 수사도의 계승교회라는 주장을 한 다음, 그레고리 1세는 로마교회 감독은 곧 교황이며,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이론을 수립한다. 그래서 그레고리는 마지막 교부요, 최초의 교황이 된다. 그레고리는 540년경 로마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원로원의 의전관이었고, 모친은 돈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전 가족이 성자 호칭을 받을 정도로 좋은 신앙의 집안이었다. 그레고리는 573년에 로마의 지사 물망에 오를 정도로 출세의 길이 보였으나 그는 정치적 출세보다 종교적 헌신을 택한다. 그리하여 574년에 수도사가 되고 나중에 586년에 로마로 돌아와 성안드레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가 교황의 비서가 된다. 교황 펠라기오 2세가 죽자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되니 590년 9월 이었다. 그로부터 604년까지 눈부신 활동을 한다.

(2) 그레고리의 활동
그레고리는 극심한 고행을 즐겼다. 그의 성격은 야심이 많았고, 의협심이 대단했다. 그는 하나님 외에는 어떤 인간에게도 겸손하지 않았다. 그의 신앙관은 첫째, 로마교회 감독은 베드로의 후계자이고, 또한 베드로의 후계자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제는 반드시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고 믿었는데, 이것이 1139년에 사제의 독신법으로 제정된다.


(3) 그레고리의 공적

① 교회의 우선순위 중에서 로마교회를 제1위로 올려 놓았다.

② 로마교회 감독은 모든 감독 중 으뜸이 되는 대사교로서
   팰륨(Pallium:양털로 짠 흰 떡)을 띄어야 한다.

③ 정치 지도력을 확장했다.
   그레고리는 롬 바르트족과 협상하여 이탈리아는 물론 남부 프랑스와 북부 아프
   리카까지 교회령을 넓혔다. 또 영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영국을 그의 영향권
   안으로 끌어 들였다.

④ 저작으로 「욥기 해설」 「목회자의 임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애와 기적」 및 설교
   집이 있다.

⑤ 성례전 신학을 수립하였다.
   인간은 회개하고 세례받을 때 구원받고, 세례 후에 지은 죄는 회개와 함께 보상을
   치뤄야 한다. 세례 후에 지은 죄를 없애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보상과 함께 성찬
   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로써 성찬은 주님의 희생의 반복이라는 화체설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

⑥ 예배모범과 교회 음악을 개혁하는 데 공헌하였다.
   이전까지는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예배의식이 행해졌었다. 그레고리는 예배의식
   을 일반화시켰고, 성가와 시편송을 만들어 교회음악을 증진시켰다. 그레고리가
   만든 성가는 지금까지도 서방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⑦가장 큰 공헌은 그 자신이 교황 (Universal Father)이라고 하였다.

그후,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레망 황제의 대관식을 교황이 한 후로는 세상의 군주(君主)도 교황이 마음대로 세우거나 폐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하인리히 4세와 「카놋사의 굴욕」사건을 만들면서 까지 교황권이 올라감.

일단 부패와 타락의 길로 접어들면 빠른 속도로 기울게 된다.  이후 교황은 점점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우리는 교황들이 어떻게 그 권세를 주장하고 행사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이 관할하는 양떼들에 대한 모범이 아니라 주인으로 행사하였으며 세속적인 임금과 다름없는 권세를 누렸다. 교황들의 무분별한 욕심으로 인하여 교회는 어두운 범죄의 소굴이 되었다. 어떤 교황은 위험이 닥치면 재빨리 그 자리를 타인에게 넘겨 주기도 했으나 어떤 교황은 자리를 빼앗기기도 하였고 또 어떤 교황은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요한 12세( 955-963)같은 교황은 술을 너무 마셔 건강을 망쳤으며, 이방신들을 부르고 주사위를 던지면서 모든 귀신들을 불렀다고 전해 내려온다.  교황들이 이러할 때에 그 밑의 성직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

오늘날의 교황권 제도는 이렇게 하여 발전이 되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 자신은 과연 오늘날과 같은 교황권 사용의 기초 인물이 되기를 바랐을까 ? 아무리 생각해도 사도 베드로는 오늘날 카톨릭의 교황과 같은 부패와 변질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인들은 베드로와 아무 상관없는 역사를 꾸며 놓았고, 베드로가 바라지도 않는 독선적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분명 교황제도는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교회가 변천되어 오는 역사 발전의 과정 속에서 인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베드로도 이용하고 성경도 이용하고, 역사가들의 말도 이용하여 오늘의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오늘 큰 산처럼 버티고 서 있는 저 엄청난 제도적 세력 앞에서 그 누가 올바른 증언을 할 것인가 ? 역사의 흐름은 항상 진리의 편에서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제3-5장. 동서교회분리(東西敎會分離)


1. 일반적 원인

① 정치적으로 800년에 교황 레오3세가 샤를레망에게 왕관을 수여함으로 로마교회는
   동(東)로마제국에 의지하지 않고 프랑크 왕국에 의지함으로 분리의 싹이 틈.

② 국민성이 달랐다. : 서방 - 게르만족 침입으로 혈통이 혼합된 라틴인
                      동방 -  헬라인

③ 교리상의 차이 (성령론 관계)
   동방 : 성령은 성부에게서 유출
   서방 :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유출

④ 예배의식에 사용언어가 다름
   동방 : 헬라어
   서방 : 라틴어


2. 직접적 원인

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익나티우스를 동로마 황제가 파면하면서.

② 로마의 교황은 익나티우스의 대주교를 그대로 인정.

③ 이에 동방은 콘스탄틴주교 포티우스 중심으로 로마 교황을 정죄하고 부인(867년)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주교들이 합세함.

④ 그후 계속 감정이 악화되어 오던중 1054년 콘스탄틴의 대주교 케라루리어스
   (Cerularius)가 서방계통 성전을 폐쇄, 수도자 추방, 교황의 오류를 정죄하니,
   교황이 그를 파문함

⑤ 1054년 7월 16일 동, 서 교회로 완전분리

⑥ 15세기 터어키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자, 성 소피아 대주교가 러시아로 피난.
   거기서 애굽,시리아 등 14개국 교회연합체 만듬. 러시아 정교회로 불림.
오늘날 로마 카톨릭교회와 희랍정교회로 분리된 것은 두 개의 로마제국이 분리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제 동서교회의 분리과정을 살펴보자.

①  정치적으로 멀리 395년에 동서 로마제국이 분리되어 힘을 잃다가 드디어 476년에
    서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동서간의 관련성이 희박하게 되었다.
②  800년에 교황이 프랑코 왕에게 왕관을 수여함으로 교황청과 동 로마제국과는
   정치적으로 무관함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제국간의 전쟁으로 인종들의 이동이 심해 인간성의 차이들에서 오는 정치적, 문화
   적 차이가 한 요인이 되었다. 즉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는 철학적이어서
   계속하여 많은 논쟁이 쉴사이 없이 벌어졌다. 그에 반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
   교회는 실제적이어서 실제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니케아신조에 ‘성
   령이 아들로부터 나왔다’는 산출적 로고스 조항 때문에 동서교회가 계속 불만을
   갖고 있었다.

④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의 교권 쟁탈싸움 때문
   이었다.

□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익나티우스가 동로마황제 미가엘 3세의 외숙의 불륜함을 들어 교회 성찬식 참여를 금지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에 황제가 진노하여 익나티우스를 반역자로 몰아 투옥시키고 ‘포티우스’라는 호위대장을 대감독으로 앉혔다. 이러자 국민들이 반대를 하자.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지방회의를 열었는데,  로마 교황 니콜라1세는 익나티우스는 면직하고 포티우스를 인정하였다.

그러자 익나티우스는 자기의 억울함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회의가 아니라 서쪽 로마대회에서 재실할 것을 로마 교황에게 신청한다. 이에 교황 니콜라 1세는 다시 로마에서 지방대회를 열어 익나티우가 옳고 그만이 대감독이며, 포티우스가 감독으로 있는 상태에서 그를 파면하도록 가결했다.  만일 불응시는 출교하기로 결정했다. 포티우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지방대회를 소집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대등한 교회임으로 로마교회의 결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포티우스는 구 번에 걸쳐 대감독이 된다.(850-867, 878-886) 그는 재임 중 동방교회가 서방교회와의 독립을 강력히 추진한다. 그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대감독들과 함께 로마 교황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교황의 비리와 신학적 잘못들을 지적하여 교황의 면직과 출교를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동서방교회의 반목은 여러 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와서 다시 투쟁이 시작되었다. 즉,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장인 미카엘 세루라리우스(1043-1058)가 콘스탄티노플 안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 서 로마식을 따르는 라틴풍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폐쇄하고 수도사들을 축출하였다. 여기에 불가리아 대감독들도 호응하여 이탈리아 교회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라틴교회의 부정을 폭로하였다. 로마교회 교황 레오 9세는 이를 반박하였고 ‘훔벌트’라는 사람으로 사태수습 사절단을 보내지만 이 중재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이리하여 ‘훔벌트’는1054년 7월 16일 동방교회의 대표적 교회인 소피아 교회의 상제단 위에 교황의 이름으로 파문을 던지고 만다. 이에 격분한 세루라리우스 역시 로마 교황에게 파문장을 보냄으로 응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서교회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오늘까지 분열의 상태에서 서로 제 갈길을 가고 있다. 그후 1274년 리용에서 1439년 플로렌스에서 동서교회가 다시 합치려 했으나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게 함락된 이후부터는 양 교회는 아무 노력도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게 하여 동방의 희랍정교회와 서 로마 카톨릭교회는 결국 서로가 자기 권위를 세우고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인간 욕구의 결과를 생겨진 유산물이 되고 말았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서로 상대방을 섬기고 봉사하려고 하였다. 지도자들인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에게서는 전혀 이같은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을 섬기기보다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온갖 종교적 술어로 가리워진 채 오늘까지 그 모습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소위 교회 정치가들의 이같은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된다.



제 3-6 장. 이슬람교(모하멛교)

마호메트교 (자기네들은 마호메트교라는 호칭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그들은 오히려 이슬람교라는 것을 좋아한다.)는 종교가 시작되기 시작한 이래 100여년만에 과거 로마제국의 전 영토는 말할 것도 없고 북아프리카와 스페인, 그리고 프랑스 일부까지 세력을 펼쳤다. 로마제국이 기독교가 국교였는 데도 마호메트교가 이렇게 급속히 번져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국교가 어떤 상태였는가를 집작하게 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마호메트교의 세계 팽창화는 전 세계 종교 중에서 단연 1위를 차재하고 있다. 기독교의 분포가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에 집중되어 있다고 하면, 마호메트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많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석유 경제를 앞 세워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이란 무엇인가 ?
이슬람이란 아랍어로 ‘복종, 순종, 귀의’등의 뜻을 의미한다. 따라서 저들은 자기들의 신인 알라에게 절대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뜻한다. 이슬람이란 말은 SILM(‘시름’이라고 발음)과 ISLAMA라는 어원에서 왔다. 이 말의 의미는 항복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주장을 알라에게 맡긴다’ 또는 ‘자신을 신의 의사에 맡긴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이슬람교로 부르고, 모하메트교라고 불리우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왜냐면 이슬람교는 알라신을 신봉하는 종교이지, 예언자 모하메트를 신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도가 되는 절차는 간단하다. 저들은 2명 이상의 기성 이슬람 신자 앞에서 아랍어로 된 ‘가리마’라는 일종의 선서만 하면 이슬람 신자가 된다.

(1) 기원
모하메드(Mohammed)가 개교한 종교로 처음에는 아랍인의 인민종교의 혁신에 있었으나 나중에 세계를 정복하는 종교수립을 계획함. 이를 위해 검을 사용함.

(2) 모하메드 (Mohammed)
① 마호멧(Mahomet) 또는 무하마드(Muhamad)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모하메드는
   A.D 570년 아리비아의 메카(Mecca)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병약 간질병으로 고생.

② 삼촌(아부탈립)을 따라 시리아로 여행을 가서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을 만나서
    많은 인상을 받았다. 25세에 돈 많은 과부 카디야 (Kadija)의 집에 일꾼으로
    들어가 14세 연상인 카디야와 결혼을 하게 된다.
    카디야와 사이에서 2남 4녀를 낳으나 모두 일찍 죽고 딸 파티마만 남는다. 사위
    알리는 시아파 교주가 된다.  619년에 카디야가 죽자 9살된 ‘아예사’등 12명의
    아내를 거느린다.

③ 하나님의 유일성을 깊이 생각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사자(使者)라는 생각하고
   백성들에게 우상을 버리고 ꡔ알라ꡕ라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된다고 경고
   하였다.  자기의 새로운 종교를 “순종” 또는 “헌신”이라는 의미를 가진 ꡔ이슬람ꡕ
   이라고 불렀다.

그는 40세에 ‘히라’산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환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예언자로 자처하며 3년동안 포교활동을 하여 40여명의 개종자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의 포교는 강한 반대와 핍박을 받게 되어 그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메디나로 피신을 하게 된다. (622년 월 15일) 이 날이 이슬람의 원년으로 ‘히즈라’라고 한다. (영어로는 Hegira) 메디나에서 624년 열광적인 305명의 추종자를 얻게 된다. 그는 예언자로 환영을 받게 되고 추종자들을 군대로 조직하여 아랍의 이교도들을 쳐부순다. 이때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자와 가족들에게 별을 만들어 우대한다. 630년에 600여명의 무장된 부하 신자가 유대교와 기독교 정벌을 내걸고 메카로 다시 돌아온다. 메카로 돌아온 마호메트는 300여종류릐 온갖 우상들을 제거하는 전쟁을 벌인다. 여기서 승리한 그는 메카를 자기의 포교의 본거지로 삼는다. 그는 계속하여 중앙 및 서부 아랍권의 전 지역을 무력을 갖고 진출하더니 그의 말년에는 시리아와 이라크에 이르는 북동방까지 군사적 공격으로 확산시킨다. 그리하여 632년 그가 죽은 해에 모든 아랍 제국들로 하여금 그를 예언자로 추대하도록 한다.

④ 632년 63세의 일기로 아들을 남기지 못한채 파티마(Fatima)라는 외동딸을
   남기고 죽었다. 메디나에 묻힘.

(3) 교리 (敎理)
① 일신교(一神敎)로서 참 신인 “알라”외에 일체의 우상을 배격함

② “알라”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모세와 예수를 선지자로 보냈고, 자기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주장. (예수님의 동정녀탄생, 부활, 승천부인)
    20만명의 예언자를 믿음. 그중 대표적인 예언자 6명이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마호메트라고 한다.

③ 모든 일은 절대적 운명으로 예정된 것임. 선한 사람은 상 받고, 악한 사람은 벌
   받음.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은 부정.

④ 이슬람교를 위하여 싸운자는 이기든지 지든지 극락간다.

⑤ 하루에 다섯차례 메카를 향하여 기도

⑥ 누구든지 일생에 한 번은 메카로 순례할 것


(4) 도덕(道德)
① 구제에 힘쓸 것

② 금식, 돼지고기를 금함
(금식: 라마단 월, 이슬람 월력 9월은 성월이다. 이 한 달 동안은 단식해야 한다. 그것은 동틀 때에 시작되어 해질 때에 끝이 난다. 낮에는 먹고 마시고 흡연하는 것이 금지된다. 저들은 이렇게 금식함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며 베풀 수 있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또 결단력과 의지와 인내심을 길러서 유혹의 희생물이 되지 않게 해 준다고 한다.

③ 일부 다처제 허용
남자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밀회하거나 또는 이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내를 더 맞아들이는 것이 나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구약의 족장들의 경우를 예를 들어서 이 교리의 합리성을 주장한다. 코란 4:3에서 “만약 너희가 전쟁 고아들을 공평하게 돌볼 수 없다면 너희들의 선택에 따라 4명까지의 여인을 아내로 삼아 그들을 돌보게 할지어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여러 아내에게 공평하게 대할 능력이 없다면 오직 한 명의 아내만을 둘 것이다.” 저들은 아내가 불임여성일 경우, 아내가 성병이 있는 경우, 아내가 남편의 성적 욕구를 해결할 수 없을 때 가장 타당한 해결책은 이 제도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④ 노예 허락
의복과 옷차림 : 인간이 옷을 입는 이유는 신체의 특수부분을 감추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여자들의 경우 돌출부분이 드러나는 옷은 모두 금지된다.


(5) 경전(經典)
코란. 코란은 114장으로 모하메드의 언행록(言行錄)이며, 23년간 하늘에서 자기에게  들려준 계시들로 이루어졌다고 주장.  종교, 정치, 만사의 원리를 정하는 무상(無上)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코란은 모하멛의 사후, 20년이 지나, 제자인 아부베이커(Abubeker)와 서기 자이드(Zaid)가 집성하였다.

코란이라는 그들의 경전 21:107에는, 신약성경에서 보혜사가 오신다고 했는데 그 보혜사가 곧 마호메트라는 것이다. 코란이란 말은 reading(독서)라는 뜻이다. 전체 114장 6,225절로 되어있다. 코란은 마호메트가 히라 산 위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계시받은 내용들을 한 데 묶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호메트 자신은 글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편집이 되었다.


(6) 포교 (布敎)
632년 모하멛을 계승한 지도자들을 칼리프(Caliphs)라고 부르는데, 이들이 모슬렘 제국을 창설하였다. 이 제국은 인도에서 대서양까지,그 판도는 로마제국보다 넓었다.  칼리프 오마르(Omar)는 637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예루살렘의 성전 자리에 지금도 있는 오마르 사원을 세웠다. 그리고 코란 외에 다른 책들은 필요없다고 하여 유명한 도서관의 책과 초기 성경의 많은 사본등 자료들을 불 태웠다. 이들은 한 손에는 코란,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주위 나라를 정복하고 이슬람을 전하였다.

(7) 모하멛교의 분열
① 원인  - 교리투쟁과 세력다툼
② 분파 - Sunnites - 온건파, 정통파 95 % (수니파)
          Shites   - 강경파          5 % (시아파)
          sufiism  - 신비적종파, 극소수

1-3대 칼리프까는 다 비 마호메트 혈통이었다. 그래서 4대 칼리프는 마호멛의 조카요 사위인 알리로 세웠다. 그러나 알리는 수니파와의 전쟁에서 죽는다. 수니파는 이슬람의 최대 종파이다. 수니라는 뜻은 ‘많은 사람이 찾는 길’이라는 뜻이다. 주로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아파는 4대 칼리프인 알리를 교주로 한다. 알리가 어려서 마호메트가 죽자 ‘아부베커’가 1대 칼리프가 되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어서 정통성이 결여되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알리가 있는 시아파와 수니파와의 전쟁이 일어나 알리는 전사를 한다. 그후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이 아버지를 따라 수니파와 전쟁을 벌이다 역시 전사를 한다. 결과 시아파의 수니파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시아파의 현재의 신도수는 약 4천만명으로 주로 이란에 있다. 이란의 국교이다.

이슬람에 대한 비판
① 코란에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이 내용이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
   르지도 않을 뿐더러 모든 것을 정복하도록 하는 군사적 종교이다.
② 성경을 부정하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것도 부정한다.
③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한다.
④ 구속의 개념이 없고 구원에 관한 설명이 없다.
⑤ 천국을 말하나 모조리 쾌락적인 곳이다.
⑥ 기도를 하긴 하나 가슴에서 우러난 기도가 아닌, 제도적 관습적인 기도이다.
⑦ 죄가 무엇인가, 그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⑧ 일부 다처주의의 교리는 음란한 종교성을 말한다.
⑨ 기독교, 유대교를 원수 종교로 간주하여 강한 분노를 유발시킨다.
⑩ 기독교의 교리를 모방하여 자기들 멋대로 조정해서 재사용한다.
한국에도 1982년 9월에 이슬람대학이 완공되었다.

이슬람 교도를 개종시킨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슬람권의 선교사 중 하나인 Samuel M.Zwemer는 그가 얼마나 힘들었던지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눅 5:5)라는 말씀으로 그의 선교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같은 세력을 존재케 하셨을까 ? 우리가 깊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제가지 교회사를 공부해 오면서 깨달을 수 있듯이 신약교회 때 사도들은 그토록 많은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희생을 무릅쓰고 복음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바쳤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어떠했는가 ?  교회는 정치와 야합을 해서 교회의 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권력과 안일에 빠져 부패와 타락을 거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교회의 부패와 변질을 그냥 묵과해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책임져야 할 자들이 책임을 유기할 때 저들을 깨우치기 위한 방법으로 큰 채찍의 심판을 사용하신다. 마호메트, 그는 중세교회가 타락할 때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심판의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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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회사교재 : 「내 주의 나라와」 P



제 4 장. 중세교회(中世敎會)


제4-1장. 기독교의 유럽전파

1. 개관(槪觀)
기독교가 언제 남부 영국(Southern Britain)에 처음으로 전파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군인들이 A.D 60-410년 어간에 영국에 주둔하고 있은 그 때에 전도 받은 것 같다.


2. 아일랜드, 스코들랜드, 웨일즈의 기독교 전파

(1)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전도는 아일랜드의 사도로 불리우는 패드릭(Patrick:396-403)으로 시작된다. 그는 스코틀랜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30세 부터 아일랜드 사람에게 복음 을 전하였다.  일반 민중과 귀족들의 신망이 두터웠고, 각처에 수도원을 섭립하였다.

(2) 스코틀랜드
콜롬바(Columba : 521-597) 등이 전도하였다.

(3) 웨일즈
웨일즈의 기독교 전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601년에 사망한 데이비드(David)에 의한 선교라고 본다.


3. 외래민족 - 앵글, 주트, 색슨족의 전도
외래 민족인 앵글족, 주트족, 색슨족 등이 5세기 경에 브리튼을 침입하여 그 대부분을 점령하였을 때 브리튼 사람들은 서부 웨일즈로 피신하였으나 이들은 결코 정복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앵글랜드 (Angle-land)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되어졌다. 베네딕트파 수도승인 어거스틴(성 어거스틴이 아님)과 수행원 40여명이 597년 교황 그레고리1세에 의해 파송이 되었다. 이들 40명은 에델버트(Ethelbert)가 왕으로 있던 캔트(Kent)에 처음 발을 디뎠다. 이들은 큰 환영을 받았고, 켄트베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가 되었고, 교황 그레고리는 어거스틴을 영국의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1. 프랑스 전도
(1) 전도자들
① 이레네우스가 처음으로 전도하였다.
② 말틴(Martin : 316-400)
   그는 군인임으로 군대식으로 전국을 돌며 우상의 전각을 헐고
   강제로 믿게 하였다.

(2) 공헌한 왕 (프랑크왕)
① 클로비스(Clovis) - 496년에 예수를 믿고 기독교를 장려하였다.
② 찰스 마르텔 (Charles Martel:715-741)
   클로비스의 서자(庶子)로서, 회교도들의 유럽 진격을 피레네 산맥에서 막아내고
   선교사들을 지원하였다.  그의 치하에서 대부분의 서부독일까지 기독교화가
   되었다.


2. 화란의 전도
화란의 사도로 불리우는 윌리부로드(Willibrord)로 말미암았다. 658년 영국 노덤브리아에서 태어나서, 20세에 아일랜드에 가서 대학입학하여 교육을 받고, 31세에 선교사들을 대동하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주로 네델란드, 덴마아크 지역에서 선교를 하였다.


3. 독일의 전도
「독일의 사도」로 불리우는 보니페이스(Boniface : 680-754) 역시 영국에서 태어났다.  716년에 윌리브로드와 합류하여 선교하다가 후에 독일 지역으로 가서 전도하였다.  20년에 걸쳐 10만명에게 세례를 주고 75세에 순교하였다.








제4-2장. 샤를레망 대제와 신성 로마제국

1. 샤를레망 대제(大帝)

(1) 왕위 계승과 대관식

① 모하벧 군을 격파한 찰스 마르텔의 손자로 부왕(父王)인 피핀(Pipin)에게 왕위
   (王位)를 물려받음

② 그의 영토는 오늘의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태리와
   독일의 절반이상, 그리고  스페인 동부까지 미쳤다.

② 기독교의 확장에 헌신적인 열심을 보여, 그의 치하에서 게르만 족이 개종(改宗)을
   하였다.

③ 이에 교황 레오3세가 800년 성탄절에 성 베드로 성당에서 샤를레망에게 금관을 씌
   우며 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 로마황제의 칭호를 수여
   했다.  또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로마 황제 레오5세도 그를 인정하였다.

(2) 그의 이상

① 건국정신 -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애독하여 건국정신이 됨
② 즉위 즉시 궁정학교를 세워 고전과 성경연구의 르네상스를 일으킴.
③ 프랑크푸르트 회의(A.D 794년)에서 화상(畵像)숭배 승인을 거부함


□ 참고 : 어거스틴의 「神의 都城」

어거스틴의 최대의 저작, 알라릭(Alaric)에 의해 로마가 함락된 후의 음울한 시기인 412년에 시작되어 426년경 완료된 책이다. 이는 어거스틴의 역사철학인 동시에 로마를 성장시킨 옛 신들을 무시한 것이 로마의 멸망의 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이교도들에 대하여 기독교를 변호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첫번째 반역이후 두 가지 사랑을 기초로 한 두 왕국이 형성되었는데,

① 자기사랑, 내지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에 의한 지상적(地上的) 사랑과
② 하나님에 대한 사랑 내지는 자기 모욕에 의한 하늘의 사랑이다.

이 두 사랑의 대표자는 가인과 아벨이다. 이 세상에서 그 자신이 나그네와 순례자임을 고백하는 자는 누구나 다 神의 都城에 속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영혼을 가진 땅의 도성 중 가장 뛰어난 대표적 존재는 異敎都市인 바벨론과 로마이다. 그러나 이 땅의 도시들도 비교적 선할 수는 있다. 평화와 정치적 질서가 이곳에서도 이루어진다. 비록 自己愛를 으뜸으로 하면서도 무질서를 억압하고 각자의 소유를 안전하게 지킨다.

그러나 이 땅의 도성은 신의 도성이 커짐에 따라 사라져야 한다. 신의 도성을 이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에로 선택하신 선민(選民)이다. 비록 교회 안에 있다고 하여 다 선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선민은 교회 안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 교회도 그리스도의 왕국이며 신의 도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교회가 점차로 세상을 통치하게 되어야 한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 어거스틴의 생각은 교회와 기독교 국가와 긴밀한 연관을 가져야 했다. 따라서 국가는 예배를 장려해야 하며, 교회와 이상(理想)국가 사이에 서로 의존하고, 책임지는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신정국(神政國)의 중세 이상이 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2. 신성(神聖)로마제국

(1) 대제국의 분활

① 샤를레망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루이(814-840)가 즉위를 하였으나 그는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② 루이가 죽은 후, 나라는 그의 세 아들에 의하여 분리되었다.
   이것이 독일과 프랑스를 갈라놓은 분깃점이 된다.

③ 그후, 나라는 혼란에 빠져든다. 삼형제는 연락도 끓어지고, 봉건제도는
   급격히 발달된다.


(2) 신성로마제국건설

① 옷토(Otto)1세가 동프랑크(독일)의 3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제후들을 자기에게 복속시키고,샤를레망 대제의 유업을 계승하여 기독교의
   사상을 나타내었다.

② 그후 이태리에게 관심을 가져서 이태리를 침략하였다. 962년 2월 2일 교황 요한
   12세는 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황제의 관을 씌웠다.  이 나라는 1806년
   나풀레옹에게 멸망하기까지 계속되었다.

③ 이때부터 독일 국왕은 이태리 왕을 겸하는 것이 되었다.



제4-3장. 교황과 황제(1)

1. 개관(槪觀)
교황은 교회의 머리로서 영적 권세를 대표하고, 황제는 제국의 머리로서 세상의 권세를 대표한다. 이 두 권세의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관하여서 당시의 상황은 그러질 못 하였다. 교황은 교회의 머리로서 권세를 대표하고, 황제는 제국의 머리로서 세상의 권세를 대표한다. 이 두 가지 권세의 상호 관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그중 한가지는 ① 하나님께서 황제와 교황에게 각각 상호 독립적인 사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즉 교황은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고 황제는 인간의 육신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할 수 없으며 오직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또 다른 하나의 이론은 황제가 세속적인 일에 있어서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③ 또 교황 측에서 주장하는 세 번째 이론은 두 세력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일들까지도 영적인 권위에 복종하도록 정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과 그 지지자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두 개의 빛, 곧 해와 달을 두셨듯이 땅위에서도 두 개의 권세, 즉 영적인 권세와 세속적인 권세를 두셨다고 한다. 그러나 달이 태양보다 열등하며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반사하는 것과 같이 황제는 교황보다 열등하고 교황으로부터 모든 권세를 부여받는다고 한다.


2. 당시의 교회의 모습

① 독일(프랑크) 황제는 로마가 자기 나라 안이라고 하여 로마교회의
내정(內政)을 간섭하고, 교황 및 감독의 임,면(任免)을 좌우할려 하였다.

② 독일 국내는 대 제후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교회는 영주(領主)들의
   수중(手中)에서 좌우되었다.

③ 로마 교회의 내부는 부패하여 썩을 대로 썩음

④ 이러한 때 교황권 확립과 로마 교회 구원 운동의 지도자가 나타났으니
  그가 힐데브란드(Hildebread)인데, 교황이 된 후 그레고리 7세로 불리운다.


3. 그레고리 7세

(1) 그의 생애
① 1051년 이태리의 사오나(Saona)에서 목수의 가정에서 출생
   외모는 보잘 것 없었으나 의지가 강하며 활달한 기상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진 사람으로 교회와 기독교 세계를 개조하기를 원함.  그의 목표는 교회에 대한
  교황의 절대 우위권을 확립하고 또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권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② 레오9세가 교황일 때, 비서장으로 있으면서 교회 권력을 장악

③ 1073년 교황으로 즉위, 1085년 이태리의 사레루노(Salerno)에서 사망


(2) 그의 업적
① 교직매매(敎職賣買:Simony) 제도 금지
② 교직의 임면권과 재산감독권은 교황권한에 둠
③ 교황은 국왕을 지배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
④ 신부의 독신제도를 장려


□ 참고 : Simony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돈으로 성령을 사려했던 마술사 시몬의 이름에서 비롯된 말로서 교회의 직분을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을 말한다. 당시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직분에 걸 맞는 준비가 전혀 없이 돈을 주고 그 직분을 샀기 때문이다.




제 4-4 장. 교황과 황제 (2)

1. 하인리히(Henry)4세 VS 그레고리7세 충돌

(1) 문제의 발단
독일에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헨리4세는 교황을 반대하였다.
   (교회재산감독권과 교직자 임면권을 교황이 주장함으로)

서임식이란,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할 수 있는 왕이나 통치자의 권리에 대한 문제이다. 힐데브란드는 교회의 직분자 가운데서 누구든지 평신도, 즉 교회 직분자로 임직되지 않은 사람에게서 직분을 받은 사람은 범죄한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왕과 통치자들은 교회가 막대한 재산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토지의 절반 가랑이 주교들과 수도원의 수중에 있었다. 만일 왕이 서임식을 통하여 토지에 관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세금을 거두거나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주교들이나 수도원장들이 교회의 권세 아래 있는가 아니면 왕의 권세 아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2) 전개
① 헨리4세는 교황의 반대파와 결탁
②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로마로 소환
③ 황제는 불복하고 교황 폐위를 선언 (1076년)
④ 교황은 황제를 출교, 폐위 선언.
   황제의  신하에게도 「성사수여금지령」내림

힐데브란드가 그레고리7세가 되자마자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그 결과 독일에서 자기 마음대로 성직과 그 권리를 팔아목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4세와 충돌하게 되었다. 교황은 황제에게 파문을 선고하였다. 이것은 그가 교회에서 쫒겨 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황제를 로마로 소환하였다. 황제는 격노하였다. 황제는 교황 폐위를 선언하였다. 동시에 교황은 황제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동시에 하인리히의 신복들에게도 성사수여 금지령을 내렸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예배와 의식에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교회의 영적인 무기는 날카롭고 무서웠다.

□ 참고 - 성사수여금지령
그 금령이 선포된 지역에서 파문과 같은 효력이 내림.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하고 종을 울릴 수 없으며 결혼식도 못하고, 장례식도 못함. 예배도 중지됨. 그 지역은 영적으로 죽은 지역이 된다.  교회에서 파문당한 사람은 자기 동료들과 모든 관계마져 단절당한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친절과 사랑을 베풀거나 음식이나 거처할 곳을 제공하는 사람은 교회의 진노를 사게 된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치 전염병 환자처럼 사람들이 그를 피해 다니고 죽으면 짐승처럼 묻히게 된다.

⑤ 모든 국민은 국왕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


(2) 카놋사(Canossa)의 굴욕
① 독일의 제후들이 국왕에게 교황에게 사죄하라고 압력을 가함
② 하인리히 4세는 사죄의 뜻으로 알프스의 카놋사 성에 가서
   한 겨울에  맨발로 눈오는 성의 마당에서 사죄.
③ 그후 넷째 날 교황은 그를 만나 성사수여금지령을 해제함

그러나 이러한 화해는 이 두 사람 어느 쪽에도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화해는 진실한 것도 아니었고 오래 가지고 못했다. 이 두 사람의 정신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낮아지심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소위 교황이 주장하는 대표권은 오만과 교만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뉘우치는 척했던 황제는 마음속으로 복수와 분노의 칼을 갈고 있었다.  하인리히는 7년 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쳐들어가 마침내 그레고리 7세를 나풀리 남쪽에 있는 살레르노에 유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교황은 거기서 1085년에 죽었는데 ,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죄악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유배당하여 죽는다”」


(3) 하인리히 4세의 복수
① 하인리히 4세는 세력을 키움
② 1077년 독일에서 내전발생.
   교황은 국왕의 반대자를 지원하고 국왕을 재차  파문함
③ 하인리히4세  로마로 진격하여 그레고리4세를 사레르노에 유배시킴
④ 1085년 교황 그레고리4세 죽음


2. 알렉산더 3세 VS 프레드릭 2세의 싸움

① 로마의 교황이 교회의 일 외에 국가의 정치적인 일에도 수장권(首長權)을
   행사할려고 하였다.
② 황제 반발함.
③ 그후 황제와 교황은 20년간 불화함. 황제는 5회에 걸쳐 로마로 출병하였으나
   교황은 롬발트인의 도움으로 견딤.
④ 후에 1177년 성 마가 성당에서 화해. 교황권은 전성기로 들어감.

이때는 교황권의 전성기이다. 그가 처음 로마를 방문하였을 때 교황의 등잔를 붙잡는 것 (교황에게 경의를 표하는 상징적인 행위임)을 거부했으나 교황의 황제 대관식 집례 거부에 대한 위협으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교황은 로마에서 교회의 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인 일에 있어서도 수장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프레드릭은 이런 교황의 간섭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나님의 임명으로 로마의 황제로 부르심을 받았다. 만일 로마 시에 대한 통제가 나의 손에서 벗어난다면 나는 단지 명목상의 통치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 두 사람의 화해는 베니스 총독이 중재자로 나섰다. 성 마가 성당에서 회담이 열렸다.



3. 교황 인노센트 3세 VS 영국 존왕

① 교황이 자신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왕의 왕인 까닭에 세상 왕을
   심판할 수 있다고 주장.
② 영국의 존왕은 교황이 임명한 캔트베리 대감독을 승인않음.
③ 교황은 존왕을 파문함. 영국에 「성사수여금지령」을 내리고, 프랑스 왕에게 영국을
   차지 할수 있도록 함.
④ 영국왕 굴복. 교황에게 나라를 바치고, 존왕은 신하가 되어, 교황에게 조공을 바침.



제3-6장. 십자군(十字軍)

1. 원인
①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지(聖地)로 여기는 예루살렘을 회교도가 점령하고
   (A.D 1071년) 그곳을 순례하는 기독교도에게 모하메드교도가 될 것을 강요하고
   기독교를 학대, 약탈하므로.
② 당시 황제인 우르반2세가 “십자가를 위한 전쟁”을 역설한 후, 십자군을 조직함.
③ 십자군의 싸움에 종사하는 사람은 그들의 죄가 용서된다는 약속이 주어짐.
④ 몇 주일 지나지 않아서 기독교 세계가 십자군의 열기로 들끓음. 왕, 왕자, 귀족,
   기사, 지주, 심지어 부녀자, 아이까지.


십자군 전쟁은 유럽 전 국가들이 호응하여 신흥세력인 아랍인을 저지하려고 일어난 세계적인 전쟁이다. 이 십자군 전쟁에 전 유럽이 공동으로 같은 보조를 취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정치적으로 볼 때 십자군 전쟁이 발발한 11세기 유럽 각 나라들은 봉건주의로 대표되는 몇몇 왕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형태는 나라라고 하지만 완전한 국가 형태로 조직된 것이 아니고 큰 가문의 제후였던 봉주들이 크게 부각되고 있었다. 국가가 이루어지면 사유재산은 어떻게 관리를 해야 하느냐라는 문제들이 있었다.

이같은 국가적 진로에 대한 모호함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대안이 곧 성지 순례라는 것이었다. 성지순례는 이미 4세기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주후 638년에 이슬람교의 제2대 칼리프인 ‘오마르’에게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성지가 많이 파괴되고 변형되었다. 그렇지만 성지순례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러다가 1075년 터키군이 성지를 점령하고서부터는 순례자에 대한 방해와 잔혹한 취급이 따랐다. 여기에다 동방의 비잔틴 제국은 더욱 심각한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슬람에게 1085년 시리아의 안디옥이 그들 손에 넘어갔고, 1092년에는 니케아가 역시 터키에게 점령당하였다. 여기에 비잔틴 제국의 위협을 느낀 황제 ‘알렉시우스 콤비누스’는 서방 국가들에게 원조를 청하였다.

이 무렵 서방 국가들은 다년간 흉작과 터키인의 순례 방해로 인하여 동서양의 무역이 단절됨으로 막심한 경제적 손실을 당하고 있는 터이었다. 이때 교황청에서는 동방의 형제 기독교를 도움으로 동서교회가 재 연합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성지를 재 탈활하는 하는 것은 기독교인 사회의 자체방어를 위한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으며, 전쟁을 통해 평화가 정착된다고 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해야 할 과제라고 믿게 되었다. 이같은 요인들이 작용하여 최초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교황 우르반 2세였다. 교황은 회의를 소집하였고, 동방의 기독교인들을 도우려고 나선 사람들에게 대 특사교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에게 거룩한 전쟁에 자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되니 군중들은 그리스도의 병사로 이교도에 대한 전쟁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로 간주되어 많은 호응을 하였다. 귀족들과 농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흉악범들도 전쟁에 지원한다면 모든 죄가 용서된다고 하여 자원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지 탈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이라는 美名하에 세기적으로 온갖 화제를 남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2. 경과(經過)

(1) 제1차 원정 (1096-1099년)
독일, 영국, 프랑스 등 30만명이 진격하였으나, 니케야에서 세주크  터어키(Seljuk Turks)에게 참패, 그후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점령, 약 50년간 예루살렘 왕국을 세움. 1097년 6월 19일에 ‘니케아’가 회복되었다. 1098년 6월 3일에 안디옥도 회복되었다. 1098년 8월에 예루살렘도 회복되었다. 그런데 1099년 이집트의 군대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공격해 왔으나 이를 물리쳤다. 이렇게 하여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지 3년 만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저들은 계속하여 예루살렘을 보전하기 위하여 정복된 곳의 통치를 위해서 기독교 국가를 세웠다. 대부분의 십자군들은 각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고 소수의 군사들에 의해 예루살렘은 유지되었다.  십자군 전쟁이 처음에는 성지탈환이 주 목적이었다. 그런데 성지를 탈환한 후에는 성지를 맡은 이들이 스스로 왕이 되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이에 북방의 ‘에뎃사’가 또다시 마호메트 교도들에게 장악되게 된다. 그로 인하여 또다시 제2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다.

(2) 제2차 원정 (1147-1149년)
원인은 예루살렘이 회교도에게 위협을 받음으로 독일과 프랑스가 출병하였으나 다메섹에서 실패하고 돌아옴.  그뒤 살라딘(Saladin)이 1187년 10월 3일에 예루살렘을 함락시킴.

(3) 재3차 원정 (1189-1192년)
1187년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영국,독일, 프랑스가 연합하여 진격하다가 독일과 프랑스가 중도에서 귀국하고 영국만 진격하다가 엠마오에서 살라딘과 협상함. 성지순례자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으며 괴롭히지 않기로 함.

(4) 제 5차 어린이 십자가 운동 (1212-1221년)
프랑스 목동 스테팡(Stephen)과 독일 소년 니콜라스(Nicholas)가 소년 소녀 3만으로 진격. 이유는 하나님이 성지회복을 어린이들에게 맡겼다고 하여서.  많은 어린이가 알프스 산맥을 넘다가 죽음. 또 많은 수의 어린이들이 이슬람 교도들에게 종으로 팔림.

(5) 그후 6-8차 까지 2세기에 걸쳐서 진행되어 약 5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3. 십자가 운동의 실패의 원인

① 십자가 운동이 실패로 끝난 원인은, 그 운동이 전체적인 신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미신과 감상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② 십자군은 중견이 될 만한 교황에게 군사적 통솔권이 없었다.
③ 출전한 왕과 기사들 간에 서로 전쟁 목적이나 이해가 일치되지 못하였다
④ 최초의 목적인 종교열기는 식고 동방의 재물을 약탈고져 하는 불순한 동기가
   목적이 되었다.


4. 결과
유럽제국의 단결을 고취. 기독교국의 의식고취, 상공업의 발달로 봉건제도가 무너짐.

(1) 긍정적 요소
① 교황의 세력이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이미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호소와 주장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황의 호소는 나중에 교황의 명령으로
   바뀌어 각 나라는 교황의 명령에 따라 자의반 타의반으로 십자군 원정에 출정하게
    되었다.

② 교회의 재산이 증대되었다. 십자군에 출정하는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떠남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을 교회나 수도원에 저렴한 가격으로 팔거나 위탁을
   하고 떠났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군인들의 재산
   은 자연히 교회의 재산이 되었다. 이로써 교회나 수도원은 엄청난 재산 소유자가
   되었다.

③ 서방 세계의 민족과 국가들이 하나의 기독교국이라는 인식을 향상시켜 주었다.

④ 마호메트의 서방 진출을 저지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만일 십자군 전쟁이 없었다
   면 이슬람교의 서방진출이 훨씬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⑤ 오랜 가문 중심의 봉건제도가 위력을 상실하고 오히려 소시민들로 구성된 중상
   층의 다수가 더 큰 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봉건주의 시대의 몰락과
   새로운 군주 중심의 국가 형태로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2) 부정적 요소
① 십자군 전쟁 과정 중에 보여준 서방교회의 동방교회에 대한 태도는 동서교회의
   골격을 더욱 넓혀 주었다.

② 십자군 전쟁은 선교사업을 위한 도덕신학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무력으로 평화
   를 지키기 위해 전쟁이 합법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를 놓고 역사 속에
   대표적 선례로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십자군 전쟁이 성지를 회복한다는 신앙적 동기에서 출발하였으나 전쟁에 참여한
   군사들은 비신앙적 행동을 하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저들이 지나간 곳은 송충이
   가 나무들을 좀먹고 지나간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마호메트 교도들의 비웃음을
   살 정도로 무질서한 오합지졸들은 가는 곳마다 민폐를 일으켜 원성이 드높았다.

④ 십자군 전쟁은 각 나라마다 도덕적, 윤리적 부패를 가져왔다. 저 유명한 ‘정조대’
   가 이 무렵에 생겨져서 후대인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나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제4-7장. 중세기의 미신신앙


중세기에 미신이 있었는가?  여기서 말하는 미신이란 기독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을 말한다. 미신이란 전혀 황당무계한 것이 아니다. 그럴듯 하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며 어느 한 면으로는 납득이 가는 요소를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현재도 시행되고 있는 것들도 있으므로 관심있게 살펴보도록 하자.

1. 천사예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써 하나님 이외에 다른 대상을 향해서 예배가 가능한가 ?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우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세 카톨릭 교회는 천사에게 예배할 것을 전체 종교회의에서 결정하여 실시하였다. 어떻게 해서 이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 오리겐의 주석에 보면 신명기 32:8에 근거하여 모든 국가에는 그들의 수호 영이 있다고 했다. 국가뿐 아니라 각 개인도 수호 천사를 갖고 있다. 신자가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갈 때에 신자의 영은 천사에게 맡겨진다. 이때부터 그 수호 천사는 마귀의 힘으로부터 그를 보호한다. 그러나 타락하게 되면 천사의 보호는 약해지고 악한 천사의 지배아래 놓이게된다. 천사들은 신실한 기도자 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고, 그들의 진보를 기뻐하며, 그들의 잘못을 교정해주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그들을 위해 중재를 해준다. 하지만 그 천사들은 숭배를 받거나 기도를 받아서는 안 된다. 여기 분명히 천사가 예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속사도 교부들로 시작해서 5세기 중엽까지는 천사 예배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콘스탄틴 이후에 미가엘 천사장에게 교회를 봉헌하면서 천사들의 서열이나 數가 언급되기 시작한다.

① 그리하여 칼케돈 회의(451년)으로부터 800년대까지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천사숭배와 천사에게 드리는 주문(기도문)이 발전되고, 영들의 서열에 관하여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인 교리가 생겨진다. 그리하여 가장 높은 층의 천사가 하나님에게는 가장 가깝고, 아래로 내려 올수록 인간에게 가깝다는 것이다.

첫 계층 : 드로노이, 케루빔, 세라핌
둘째 계층 : 퀴리오테테스 -지배, 엑수시아이-권력, 뒤나메이스-전능
셋째 계층 : 아르카이-수장, 아르캉겔로이-수천사, 앙켈로이 - 일반천사
이런 것은 아주 주관적이고 사색적인 기묘한 주장일 뿐이다. 앞서 초기 교부들은 천사숭배는 우상숭배라고 정죄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천사장 미가엘에게 봉헌하였다. 그 까닭은 그곳에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근원이 되어 서방교회에서는 9월 29일을 성 미가엘 기념축제행사로 정하고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천사 예배에 대한 결정은 제 2차 니케아 공희회 (787년)에서 제정이 된다. 이 회의에서 천사들을 묘사하고 그들의 형상을 숭배하는 풍습을 허용했다.


② 800년부터 종교개혁까지
중세시대의 스콜라 학자들 간에는 이전의 천사들에 관한 여러 교부들의 주장과 견해를 계속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을 믿는 정도로 국한하고 그들에게 기도드리는 것이나 예배 등은 금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성공회에서는 9월 29일을 모든 천사들의 축일로 지키고 있고, 카톨릭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저들의 천사숭배의 기원을 성경이 아닌 僞 디오니시우스의 책에 언급된 구절을 갖고 그것을 믿고 따른다는 애기다. 신앙도 이쯤 되고 보면 생각해 봐야 할 점이 너무 많다.



2. 성모예배

일반적으로 천주교라 일컫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특징은 성모 마리아를 예배한다고들 알고 있다. 사실 천주교의 특징이 마리아 예배는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같은 사실에 대해 좀 더 자상하고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몇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가 있었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고도의 존경과 영예로운 이정을 받았다. 또 사람들로부터도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그 다음에는 이 마리아가 교회 역사 속에서 이상스럽게 발전되어 간다.

① 초기 3세기까지
이 시대에는 마리아에 대하여 신약성경과 똑같은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요 그분이 존경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마리아 예배에 관한 어떤 암시도 없다.

② 니케아 회의에서부터 (325년) 서로마제국 멸망기(476년) 까지
교회 내에서 마리아에 대한 예배를 직접 다룬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시릴’(376-440년)이다. 이 시릴은 콘스탄티노플 감독인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우리와 별개의 존재인 구세주일 뿐이라고 하자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시릴이 이런 말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해 있는 그 몸은 인간의 몸이 아니다. 그는 우리와 다른 몸이다. 이런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해야 한다. 마리아의 숭배는 피조물에 대한 예배가 아니다. 또 마리아의 숭배는 그녀가 중보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의 숭배사상은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하나님이시며 마리아만이 우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한 분이라는 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같은 시릴의 주장은 당시 많은 감독들이 반대를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게 된다.

③ 중세기 (1500년까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탈선은 계속해서 더 많은 변질과 탈선을 가져온다. 이같은 움직임은 동서방교회가 다 마찬가지이다. 주상 성자로 알려진 시므온은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여 기도를 받아 주소서”라고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였다.  여하튼 동방교회의 여러 교회들이 마리아에 대한 숭배로 나아간다. 이렇게 마리아에 대한 숭배는 점진적으로 발전을 거듭한다. 그래서 초기에는 마리아 경배를 엄하게 금지하고 이단으로 다스리던 것을 후대에는 마리아에 대한 예배가 공식 교리로 굳어진다. 그리하여 마리아에 대한 여러 의식들이 생겨난다.

A. 성모 마리아 동정녀 봉헌 축일 : 11월 21일
B. 성모 마리아 탄생제 : 9월 8일
C. 성모 마리아 정혼 축일 : 1월 23일 - 요셉과 결혼 기념일
D. 마리아 성심 축일 : 8월 22일 - 순결한 마음을 기념하는 일
E.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제- 9월 9일
F. 마리아의 승천설 : 마리아가 지상생활을 마친 후에 그가 죽지 않고 산 채로
                     하늘로 영광 중에 승천했다고 하는 교리.
이리하여  마리아의 숭배는 걷잡을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여 이제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 예배가 공식화되고 말았다.


3. 성자들 예배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교회에서는 다 함께 성인들을 예배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적 교리로 전래되어 오고 있다. 그러면 과연 신앙의 위대한 성인들을 공경하고 예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

① 신약성경에서의 가르침
신약성경에서는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 바울이 구약의 위대한 인물을 대하는 태도 가운데는 결코 예배의 모습이 없다. 베드로나 요한, 그리고 모든 사도들이 신앙의 위인들을 대하는 태도도 보면 결코 예배하는 것과 같은 자세가 없다.

② 교회 역사 속에서의 발전
2세기경 서머나교회 등이 순교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 뼈들을 보석보다 귀중하고 정금보다 아름다운 곳에 안치한 것을 말하였다. 여기서는 순교자들의 유해에 대한 제사와 그를 위해 해마다 추념 행사를 할 것이 암시되었다. 당시 희랍인과 로마인은 생전에 유명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기념 행사를 그들의 생일날에 실시하였었다. 그러나 기독교 순교자들에게는 그들의 순교일이 기념일이었다.
5세기에는 순교자 숭배가 급속하게 확산된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의 성골(聖骨)이나 유물들을 나누어 자기들 가까운 곳으로 이장하면서 수많은 묘당과 성인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무렵에는 성인들의 성골과 유물들을 숭배하는 관습이 차츰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성인숭배와 유물예배의 관습을 본격적으로 체계회시킨 사람이 그레고리 1세이다. 이제 성자를 위한 예배는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성자들의 유물이나 성골을 옮겨서 이전을 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효능이 있다는 전설까지 덧붙이게 되었다. (기적 -카롤 베이커 : 스페인 수녀원 ) 그래서 성자 예배는 비정상적으로 급속하게 발전되었다.


③ 현재의 동방교회
저들에게 성자들의 수효는 무려 수만명에 이르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김대건신부를 비롯한 100여명의 성자들이 있다. 카톨릭에서는 성자가 되면 성자의 이름으로 기도가 가능하다. 우리나라 100여명의 성자들도 전세계 카톨릭 교인들의 기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과연 성자들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일까 ?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자를 향한 경배와 우상숭배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이 가능할까 ? 실로 저들의 신앙 행위를 알 때 가슴이 무거워진다.


4. 성화, 성물예배
그림을 그려놓고 거기 절하고 예배를 드린다. 또 이상한 물건을 조형해 만든 성상들을 앞에 걸어놓고 거기에다 절하고 예배를 드린다. 아무리 생각해보다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동방교회에서는 성상에 대한 예배가 극에 달하고 있다. 사실 4세기 초 이전까지는 성상에 대한 숭배사상이란 생각해 볼 수 없는 이교적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림이나 조각물에 대한 예배는 계속 발전되었다. 그래서 338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성상 사용을 하지 못하도록 결정을 하였다. 그러나 성상 예배는 가속화되었다.

교회 회의에서 금지명령을 내렸는데도 어찌하여 성상 예배가 가속화 되었을까 ? 그것은 헬라인들이 예술을 사랑하고 그림을 즐겨하며 장식품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썼기 때문이다. 753년 콘스탄티누스 5세 (741-775년)는 세계적 규모의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숭배를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여기에 참석한  340명의 주교들이 성상은 금지된 우상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6세 (780-797년)는 성상 파괴 법률을 철폐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787년 여름 7차 공의회에서 300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여 로마 카톨릭과 희랍 정교회는 성상 사용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우여곡절로 반대와 찬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성상예배는 이제 하나의 완전한 현실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동서방 교회에서는 예배당 안에 각종 현란한 그림과 조각들이 설치되어 있고, 또 각 가정에서도 이같은 형태는 연결되고 있는 실정이다. 성상과 성화에 대한 예배, 이것 역시 미신 신앙의 유물이다.

5. 성례전 중 미신신앙
성례전이라 부르는 세례와 성찬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식일 뿐 그 자체가 무슨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님의 주신 뜻을 그대로 따른다면 세례와 주의 만찬이라고 해야 되고, ‘성례전’이나 ‘성만찬’이라는 용어는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  왜 우리가 성례전에 관한 문제를 이렇게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하는가 ? 그것은 성례전이 거룩한 이름 아래 수백년동안 순진한 영혼들의 고혈을 짜내는 악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성경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분부하신 의식은 세례와 주의 만찬 뿐이다. 그런데 중세교회는 각종 의식들을 자기 멋대로 제정하여 수십가지의 성례들로 온갖 돈을 각출해내는 이용물이 되었다. 이리하여 12세기에는 성례전이 무려 30여가지가 되었다. 그래서 중세기 대학운동이 일어나면서 많은 지성인들이 성례전이 순수하지 않고 미신성을 띤 것과 악용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게 되니 로마 카톨릭과 희랍 정교회에는 더 이상 많은 성례전을 유지할 수 없어 1574년 프로렌스에서 성례전을 7가지로 줄이게 된다.

세례 / 견진 / 성체 미사  / 신품 / 고백 / 결혼  / 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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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 내주의 나라와







제5장. 종교개혁 (宗敎改革)


제 5-1 장. 종교개혁 전의 선구자들

자연계에서도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것처럼, 교회의 역사에서도 종교개혁전이 가장 어두웠었다. 겉은 풍성하였으나 형식 뿐이었다.  설교는 소리나는 구리였고, 대부분의 사제들은 세상쾌락 쪽으로 기울었고, 백성은 무지와 미신에 사로 잡혀 있었다.   굶주린 영혼들에게 먹여 줄 양식은 없었다. 성경 부터 없었다. 잘못된 가르침과 성인숭배,형상숭배, 유물숭배 등의 각종 쓸데없는 의식만이 가득했다. 이런 암흑의 세계는 곧 종교개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 종교개혁을 가져오는 선구자들이 있었으니,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이라고 할 때 그 폭은 대단히 넓다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 운동으로 개혁에 공헌한 토마스 아 캠피스나 엑카르트 등이 있고, 로마교회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왈도파, 알비파들도 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로마교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개혁자는 위클리프, 후스, 그리고 사보나로라 등이 있다.

1. 존 위클립 (John Wycliffe) 1324-1384

(1) 생애
① 1324년 태어나서 옥스포드 대학 졸업. 교수가 됨
② 수도승의 나태와 사주 행위, 종교적 진리 왜곡,형상숭배,
   유물숭배 등을 비판하여 주교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음
③ 1382년 세계 최초로 영어성경 번역
④ 화체설 배격 등으로 이단자 취급받음 . 1384년 사망
⑤ 1401년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하여 무덤파고 유해를 불로 화형

                   “그가 죽은 지 오랜 후에
                    비록 뼈가 무덤에서 나와
                    산산조각으로 뜯겼지만
                    그의 외침은 나팔 소리처럼
                    모든 세대에 울려 퍼지도다.”

(2) 그의 신학
① 오직 성경만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음
② 교황의 속죄권을 부정. 면죄부 판매 부정
③ 화체설 배격    
④ 교황정치 불필요를 역설

위클리프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특대 교비 연구생으로 공부하여 모교에서 강의와 목회를 하였다. 그는 유창한 화술과 엄격한 논리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다가 1371년 교수직을 떠나 처음에는 외교가로, 후에는 논쟁가로 왕실에 봉사를 하였다. 그 당시 영국 왕실은 교황청 아비뇽의 통치 및 지배를 벗어나고자 했기 때문에 이론가요 논쟁가인 위클리프를 환영하였다. 위클리프는 이 당시 모든 합법적인 통치권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통치 성격도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긱 위해 오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만일 피지배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지배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는 일체의 통치 형태는 진정한 통치가 아니고 오히려 반역이라고 하였다.

위클리프가 개혁운동에 나선 것은, 로마교회에 대해 실제적으로 권력남용에 관한문제를 가지고 부당성을 지적하였다. 1365년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영국에 부과한 종교세가 너무 크다고 그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위클리프는 당시 사제들이 국민들의 혈세에 의해서 사치하고 향락하는 잘못을 공격하고 또 교황이 신령한 문제보다는 온갖 이권개입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비난하였다. 또 문서운동을 전개하여 교황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때 그의 두드러진 주장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었다. 위클리프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소유권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사람들이 잠시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것을 선용하게 사용할 것을 전제로 하여 허락하신 것뿐이라고 하였다.

그다음에 교회론에 관한 논문은 더욱 극단적이다. 그 당시 교황은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황의 지도를 받는 유형적 카톨릭 교회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하였었다. 여기에 대해 위클리프는 어거스틴의 예정론적 교회관을 주장하였다. 참 교회란 하나님의 예정을 입은 자들인에, 이는 누가 예정되었는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고 가가자의 신앙생활에서 맺어지는 열매들을 통하여서 이를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기에 교황이라 할지라도 누가 예정된 자인가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직분을 이용하여 교인들을 마음대로 축출한다는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황 자신도 예정함을 입지 못한 자로 구원을 얻지 못한 자 중에 포함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성경에 관한 주장도 독특하였다. 성경은 예정함을 입은 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될 수 있도록 그들의 손에 들어가야 한다. 이같은 확신에 의하여 최초로 위클리프는 라틴어 전용 성경을 영어성경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시편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경을 정열적으로 번역한다. 물론 그의 생전에 성경 전체를 다 번역하지 못하고 그의 추종자들이 완결한다. 그리고 이들은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고 전도하기 위하여 전도자들을 모았다. 여기 모여진 전도자들은 당시 호사한 신부들과는 너무 대조적인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난한 신부들’ 혹은 ‘순행 설교자’라고 하였다. 이들은 당시 신부들이 성자들의 이야기나 이적담이나 의식에 호소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을 설명해부며 말씀의 참 뜻을 전파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들은 두 벌 옷도 없이 순전히 나그네처럼 전도여행을 다녔는데 주로 가난한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위클리프의 전도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을 ‘롤라드’(Lollards)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직접 죄를 고백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하였으며, 성자숭배나 유물숭배 등을 미신행위라고 배격하였고, 특히 화체설을 부인하였다. 카톨릭에서는 사제의 축복 후 떡이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고 하였지만 그 주장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면죄부 판매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을 비난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이론들은 당시 교회의 공식적 교리에 어긋남으로 세속 당국들로부터 경원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다.

이리하여 1384년 위클리프가 뇌일혈로 사망할 무렵 그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406년에는 위클리프 운동을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고, 1409년에는 위클리프의 교리를 정죄하고 1415년 콘스탄스 회의에서 위클리프를 260개의 종목의 죄목을 지목하고 그를 정죄한 후 모든 저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1428년 교황의 명령으로 위클리프의 유해를 파내어 불 태워 가지고 그 재를 강에다 뿌렸다. 위클리프 운동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한 세기 전의 종교개혁의 선구자적인 운동이었다.



2. 요한 후스 (John Huss) 1369-1415

① 보헤미아 사람으로 위클립의 강한 영향을 받아 교회를 정화시키고
   신약 성경의 교훈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열정을 가짐.
② 34세에 프라하 대학의 총장이 됨
③ 프라하의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미신 숭배와 성직자의 죄를 폭로
④ 교황은 후스를 파문함. 프라하시에 「성사수여금지령」을 선포함
⑤ 1414년 체포되어 지하감옥에 갇힘. 신성모독죄를 걸어서 화형시킴.

                   “나는 복음과 말씀전파를 위하여
                    이처럼 무섭고 수치스럽고 잔인한
                    죽음을 달게 받겠다.”


후스는 오늘날의 체코슬로바키아 지방인 보헤미아 지방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갔던 유학생들이 돌아오면서 위클리프의 저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로써 보헤미아 지방의 ‘프라하 대학교’에서는 위클리프의 작품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이 당시 후스는 프라하대학 철학교수로 있으면서 ‘베들레헴’성당의 설교자로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1402년 총장 자리까지 오른다. 이때 그는 마치 온 세계를 정복한 듯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가 그의 학문적 명성에 만족하는 것에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주님만이 아시는 죄 때문에 끊임없이 스스로 겸손하였다.

그는 죤 위클리프의 저서를 읽는 중 두 가지의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중의 하나는 주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교황은 금 면류관과 값비싼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그림이었다. 두 번째의 그림은 예수께서 여인에게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뒷편에는 교황이 백성들에게 면죄부를 파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그림들이 보여 주는 진리는 후스의 눈을 열어 교회의 비참한 상태를 밝히 보게 하였다.

후스는 프라하에 있는 베들레헴 교회의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이 교회에서 놀랍게도 라틴어가 아니라 모국어로 설교를 하였고, 또 놀랍도록 진지하게  미신숭배와 성직자들의 죄를 폭로하고 굶주린 자들에게 생명의 떡을 먹였다. 이 깡마르고 진지한 표정의 후스를 본 사람들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사자로 생각하였다. 이 당시 프라하의 대 주교는 교황의 명령을 받아서 위클리프의 저술을 금지하고 그의 작품을 읽지 말도록 하는 교황 칙령을 받아내고 아울러 설교는 성당과 교회, 그리고 수도원 내에서만 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후스는 오랜 숙고 끝에 그같은 교황의 칙령에 순종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교황의 명령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기만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순될 경우에는 내 몸을 불태운다 해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자유롭게 학교에서, 강의실에서도 설교를 하였다. 그러자 교황은 1410년 후스가 교황의 명령에 불복종한다고 로마로 소환 명령을 내렸다. 후스는 교황의 소환에 응하지 않자 교황은 1411년에 파문을 선포하고 프라하에 성사수여금지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보헤미아 국왕과 국민들이 후스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함으로 교황의 파문은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때부터 후스는 교황과 본격적인 대결을 해 간다.

그가 첫번째 한 일은, 자격이 없는 교황에게는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아무리 교황이 회의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교황이 되었다 할지라도 교황이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고 자기의 사익을 위해 행동한다면 그는 교황으로서 권위를 지킬 수 있겠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성경이야 말로 교황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궁극적 귄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러기에 성경에 순종하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황 요한 23게가 전쟁 비용에 쓸 목적으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행위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인데 그 같은 면죄에 관한 신성한 것을 매매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후스의 반대 주장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교황청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공개시위를 벌였다.

이 무렵 콘스탄스 회의가 소집된다. 이 회의는 독일황제 지기스문트와 교황 요한 23세의 합의에 의하여 열렸는데, 황제는 후스의 신변보호를 보장할테니 참석하라고 하였다. 이에 후스가 콘스탄스에 도착하자마자 요한 23세는 회의와 상관없이 후스를 잡아서 처소에서 이단사상을 철회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회의 앞에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서 있으면서 자기가 이단 사상을 철회한다고 하면 자기가 과거 이단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결과가 됨으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회의주의자들 앞에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길이 없음을 알고 후스는 담담하게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는 전능하실 뿐 아니라 완전히 공의로우시며 유일한 심판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항소하리라. 나는 그분의 손에 처분을 맡긴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증인들이나 오류에 가득 찬 회의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와 공의 위에서 모든 개인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이리하여 그는 몸에 사제복을 입혔다가 관리들이 사정없이 찢어놓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는 삭발시키고 그 머리에다 악마의 그림을 그린 종이관을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는 “이 사람은 이단의 괴수이다”라는 글자가 씌여졌다.  그는 사형장으로 끌려 가는 도중에 자기 저작들이 불에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시편을 낭송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주 예수님 바로 당신을 위하여 이처럼 잔인한 죽음을 아무런 불평없이 감당합니다. 부디 나의 적들에게 자비를 내려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후스는 1515년 소위 콘스탄스 종교회의 운동자들에 의해 장작더미 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형집행관들은 그의 재를 모아 호수에 뿌려버림으로서 그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운동은 전 보헤미아 국민들을 똘똘 뭉치게 하여 커다란 개혁열기를 일으켰다.  이 열풍이 종교개혁과 모라비안 형제단으로 계승한다.


3.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사보나롤라는 1452년에 이탈리아의 ‘펠라라’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청년시절에 귀족의 딸과 연애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세상의 허무를 깨닫고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간다. 여기서 그는 세상 생각을 잊고 성경과 어거스틴 연구로 그의 사상적 기초를 연마한다. 사보나롤라는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학문연구와 명상에 바친다. 1482년 ‘플로렌스’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그의 대중활동은 시작한다.

그 당시 플로렌스 시민들은 사치와 허영에 심취하여 있었으므로 사보나롤라의 준엄한 설교는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대중들의 불호응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예언자같은 심정으로 열성을 다해 설교 하였다. 그러니까 플로렌스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차츰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경청하였다. 사보나롤라는 계속적으로 도시에 만연되어있는 폐풍들을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사보나롤라는 설교를 통해 당시 사회악에 대한 비판, 그리고 기독인으로서의 향락에 찬 사치생활 등을 비판하였다. 이것이 곧 시의 유력자들에게 비위를 거슬리게 되었다.

사보나롤라는 마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자, 수도원의 재산 대부분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또 수도원 내의 생활을 대대적으로 개혁하여 시민들이 볼 때 수도사들의 경건한 봉사의 모습을 봄으로 수도원에 대한 이미지를 쇄신시켰다. 그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부유한 자들이 추구하는 사치와 향락은 허영임은 물론이고 물질을 탐하는 탐욕은 모든 죄악의 근원이라고 부르짖었다. 그래서 사보나롤라는 ‘허영의 화형식’이라는 화형식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다.  

이 허영의 화형식은 시 중앙 광장에다 나무로 만든 피라미드가 지어지고 그 아래에는 화약이 섞인 짚단과 장작이 쌓여진다. 그리고 시민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던 사치스러운 의복, 보석, 가발, 그리고 고가의 가구 등을 피라미드 계단 위에다 갖다 버린다. 그 후에 찬양하며 주변을 행진한다. 이 때 그 물건들을 불태우며 허영을 저주하고 소리를 외친다. 이렇게 하여 카니발 대신에 불꽃놀이를 함으로 탐욕을 화형시켜 버린다고 하였다. 이같은 행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여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탐욕 갖는 것을 예방하도록 하였다.

이러다 보니 부유층에 있는 사람들은 사보나롤라로 인한 각종 불이익 때문에 반대가 일었고, 다른 한편으로 서민층에서는 사보나롤라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예언자요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자라고 하며 그에게 이적과 예언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가 그들의 요구에 만족을 주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폭도들이 마가 수도원에 침입하였다. 이때 사보나롤라는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에게 자기 보호를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폭도들에게 결박을 당하고 폭행을 당한 후 세속 당국자들에게로 인도되었다. 며칠간의 참혹한 고문 끝에 만들어 낸 죄목은 그에게 미래를 예언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이요 분파주의자들’이라는 막연한 죄목을 뒤집어 씌웠다. 그리하여 1498년 5월 23일에 화형당하였으며, 그 재를 아르노 강물에 뿌렸다.

이렇게 하여 의롭게 살아갔던 깨끗한 수도사 사보나롤라도 한 시대의 정치와 교황권의 독선에 의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갖가지 면에서의 한계점을 보게 되었다. 교황청의 지나친 권위주의에 식상하여 개혁의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교황의 횡포에 대하여 자기 몸이 불태워 죽고 자기 저작들이 이단서적으로 참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죽음으로 개혁을 주장하며 맞서 싸운 사람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모든 양상은 곧 성경에 의하지 않는 로마 카톨릭의 독재와 독선과 독주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는 개혁에 관한 열망이었다.  이와 같은 개혁의 열망이 드디어 루터로 말미암아 가시화되게 되고 그는 전 유럽의 열망을 한 데 묶어 종교개혁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4. 왈도파

(1) 유래
① 12세기 초 프랑스 론 골짜기(Rhone Valley)의 도시 리용(Lyons)에
   피터 왈도(Peter Waldo)라는 상인으로 부터 시작됨.
② 사제나 주교, 교황일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되지 못하고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고 깨달음.
③ 중보자도 오직 예수 한 분 뿐이며, 성인은 경배의 대상이 못됨을 깨달음
④ 바른 진리를 전파하기 위하여 1177년 남녀회원으로 단체를
   조직하니 이를 왈도파(Waldeness)라고 한다.
(2) 활동
① 둘 씩 짝을 지어서 다님. 행상처럼 가장하여  장식구를
   팔면서 반드시 “값비싼 진주” 즉 복음을 소개하였다.
② 잘 못된 가르침을 공공연히 비판,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과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였다.
③ 교회에서는 처음에는 관대하였으나 나중에는 혹독한 핍박을 함
   종교재판과 고문, 수 천명을 죽임


(1) 왈도파의 기원
왈도파로 불리우는 이 파의 기원은 1160년경 프랑스이 리용 사람인 피터 왈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왈도는 상업으로 성공하여 큰 자본가로 성공하였다. 그는 어느날 자기 집에서 베푼 연회장에서 손님으로 온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것을 보고 구원에 관한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왈도는 성경에 관심이 높아 1170년경 사복음서와 성경의 일부 책들을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한 사제를 고용하였다. 그는 또 자기 재산을 다 정리하여 마태복은 19:21의 “네가 완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한다.  왈도는 재산의 일부를 그 아내에게 주고 나머지는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173년) 그리고 성경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전도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1180년) 그러자 이 왈도를 가리켜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소문이 나게 된다.

왈도는 오직 성경만이 믿음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사제나 주교 또는 교황의 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말은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또 한 분 중보자가 계실 뿐이며, 성인들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또 성례에는 오직 두 가지 세례와 성찬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왈도는 이러한 진리와 이밖에 여러 가지 진리들을 받아 이를 전파하고자 하는 회원들을 모아서 단체를 만들었다. (1177년) 이 단체의 회원들을 흔히들 ‘왈도파’라고 한다.

그들은 둘씩 짝을 지어 각 동네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왈도파 사람들은 행상처럼 가장하여 각 지방을 다니면서 자질구레한 장신구들을 팔았다. 그러나 방문하는 집집마다 반드시 “값비싼 진주”(복음)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교회의 전통과 사제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공공연하게 공격하였다. 그리고 열린 귀를 만날 때 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였다. 처음에 교회 당국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관대하였으나 그 운동이 자기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왈도파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1229년 발렌시아 회의에서는 사제가 아닌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성경 그 자체가 금서(禁書)가 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왈도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다. 온갖 박해가 따랐다. 1184년 교황은 왈도파에 대해서 어떤 억압이든 해도 좋다는 권한을 정부에게 부여하고, 1194년에는 왈도파에게 사형과 신체절단의 형벌 외에는 어떤 형벌이라도 내릴 수 있다고 하였다. 1197년에는 왈도파에게 화형을 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은 칙령에 의하여 수 천명의 사람이 불에 타 순교를 하였다. 수천 명이 죽임을 당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다. 심지어 임산부를 돌에 깔아 죽이기도 하였다. 왈도파가 숨어있는 동굴 안에 불을 질러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태리로, 또 스페인 등지로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잔인한 원수들도 왈도파 사람들의 순결한 도덕과 그들의 확신의 진실성을 부인할 수 없었다. 세상은 그들을 감당치 못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육신의 생명을 도모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겼다. 우리는 환난의 시대에도 진리의 증거를 굳게 잡은 이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로마의 카톨릭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불에 타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차원으로 온갖 살육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핍박은 1848년까지 계속되었다.


(2) 현재의 왈도파
프랑스 피에몽 계곡은 왈도파의 본거지이다. 여기에는 왈도파 자녀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있고 대학도 있다. 종합병원과 고아원, 양로원 등도 있다. 여기에는 수 십명의 목사들, 그리고 수 천명의 교인들이 있다.


(3) 왈도파의 주장과 사상
왈도파는 철저한 성경중심의 신앙과 엄격한 도덕주의 생활을 두드러지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학적인 체계는 약하였다.

① 이들은 로마 카톨릭이 인위적 힘으로 제정한 모든 요소들을 거부하였다. 성경에도 없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황제도, 교회 성직자들이 세상 권력으로부터 특혜조치를 받는 특권과 특전, 교황 이하 성경에 없는 각종 사제들의 계급과 직제, 교회 및 수도원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소유, 공의회라는 이름 아래 다수에 의해 제정된 각종 탈 성경적 결정, 성직자의 독신생활 의무화, 카톨릭의 미신적 성례전 등의 모든 요소들을 다 거부하였다. 그래서 1240년부터는 카톨릭이야말로 계시록 13:11-15에 나오는 적그리스도라고 하였다.

② 14세기부터 카톨릭이 실시하는 종교 교육제도, 성경에 대한 신비적 해석, 그리고 카톨릭의 각종 의식들을 반대하였다. 부활절, 성탄절, 승천축일, 성령강림절, 사도들의 축일, 금식일 등을 반대하였으며, 예배시 양초를 사용하는 것과 라틴어로 사용하는 예배문, 마리아 상 숭배, 성자들의 성골 및 유물숭배등을 전부 배격하였다.

③ 카톨릭의 교리적인 것도 반대하였다. 유아세례, 견진성사, 종부성사, 연옥의 교리,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 등을 배격하였다.

④ 왈도파의 특징은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가난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왈도파 회원이 되려면 세상을 포기하고 사도처럼 가난하게 살면서 사도적 소명을 다 하겠다는 공식 서원을 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와 같은 외적 상징으로 사도복 이라는 특수한 옷을 입어야 했는데, 남녀가 다 같이 입어야 했다.

⑤ 회원이 된 자의 생활 처우문제
눅 10:1의 말씀대로 항상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방랑하는 설교가들로 도시에서 도시로 다닌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위한 생계비를 버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생활은 친구나 또는 설교 후 감독자들이 제공하는 음식과 생활품을 공급받았다.

⑥ 금식을 장려하였다.
이들은 금욕으로 정죄의 요소를 막기 위하여 금식을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일주일에 월, 수, 금 삼일을 금식하도록 권장하였다.

⑦ 경건생활을 권장하였다.
경건생활을 소중히 여겨 하루에 기도를 7회씩 하도록 의무화하였다.

⑧ 평화를 원하였다.
모든 형태의 맹세를 거부하고 거짓말을 죽음처럼 싫어하고, 피흘리는 전쟁, 또는 사형 등 모든 것을 반대하였다. 그리고 신앙문제에 있어서 무력을 사용하거나 그들을 대결하기 위해 사회법적으로 대처하는 것 등도 반대하였다. 이들은 부당하게 얻은 이득도 원치 않았고,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게 살기 위해 기도와 자선의 삶을 살도록 하였다.

⑨ 설교하는 것을 대표적 의무로 삼았다.
왈도파는 남녀 모두가 설교를 하였다. 평신도가 설교해야 되는 의무사항으로 약4:17, 계22:17, 막9:38-39, 빌1:15, 민11:29 등을 인용하였으며, 이들의 설교내용은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하였다.


(4) 왈도파의 영향
이들 왈도파의 신앙은 재세례교도, 모라비안, 유그노 등은 물론이고 최초로 종교개혁에 앞장선 루터 역시 왈도파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종교적, 신앙적 영향은 물론이고 피에몽 계곡에서 오랜 세월 격리생활을 하는 중에 자생적으로 발달된 가내수공업의 원시 형태의 산업혁명의 기초가 되는 공헌을 하였다.




제5-2장.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1. 그의 생애 (1483-1546)

① 1483년 11월 10일 북부독일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

② 18세에 에풀트(Erfurt)대학에서 스콜라철학과 라틴어를 공부

③ 수도원에 들어가면 영혼이 구원을 얻는다 하여 수도원에 들어감. 수도원의 온갖
   규칙을 다 지켰으나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함. 후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깨달음(롬 1:17)

④ 위텐베르그 대학의 논리학, 물리학 교수를 거쳐서 신학교수가 됨
⑤ 1511년 로마로 여행하며 카톨릭의 온갖 허위와 더러운 부패를 알게 됨
⑥ 부패한 종교개혁을 위하여 선봉적 역활을 감당함


마르틴 루터는 독일의 삭소니에 있는 농사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루터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단순하지만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마르틴이 개암열매를 훔쳤다는 이류로 피가 나도록 때였다. 18세가 되던 해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학문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에르푸르트에 공부하고 있던 어느 날 루터는 성경 한 권을 얻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성경을 본 일이 없었으나 성경을 읽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한나와 사무엘의 기사, 특히 사무엘이 소명받는 대목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22세가 되던 해에 루터는 대학의 전과정을 수료하고 오래지 않아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 학생들끼리의 싸움으로 죽었다. 루터는 “만일 내 친구 대신에 내가 죽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또 다른 경우에 있어서 무서운 벼락이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땅바닥에 엎드러져서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승이 되겠나이다”라고 소리쳤다.

루터는 자기의 서원을 지켰다. 그는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문하기를 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루터가 법조계에서 높은 지위를 얻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매우 화를 내었다.  루터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원하고 그것을 갈망하였다. 그는 이 세상은 자기 마음의 소원을 충족시켜 줄 수 없음을 깨닫고 수도원에서 평안을 찾고자 하였다. 루터는 참으로 그것을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그는 수도원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으며 노동 봉사에도 충실하였고 수도원을 위한 시주에도 열심을 내었다. 그는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했던 성실한 수도승이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감내하였다. 기도와 금식, 참회 등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도 충실하였다.

그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문자 그대로 자기의 몸을 학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에 대하여 거의 낙심하게 되었고 육체의 힘도 쇠약해졌다. 그의 동료들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도 영적인 소경이어서 루터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무려 21명의 성인들에게 기도하였다. 한 번은 꼬박 보름 동안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평안을 얻지 못했다.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 루터에게 도움과 위로를 준 한 사람이 있었는데, 독일의 어거스틴 수도원 지도자인 스타우피츠였다. 그는 루터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사실을 잊지 말게나”라고 하였다. 다른 때는 그리스도를 생각만 하여도 루터는 두려웠다. 왜냐면 주님은 무엇보다도 죄를 심판하고 벌을 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타피우츠는 루터에게 말하기를 “자네의 생각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네. 그리스도는 우리를 무섭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위로하시는 분이라네. 그리스도의 상처를 보게나. 거기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네.”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은 루터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점점 루터의 마음속에 진리의 빛이 밝아 왔다. 루터는 그가 구원을 받는 것은 인간의 선한 행위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진리의 빛이 밝게 비추었으며 그의 심령 속에 이러한 구원이 찾아 왔다.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바울의 말이 낙원의 문을 여는 것처럼 느껴졌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 위대한 진리는 종교개혁의 기초적인 진리가 되었다.

루터는 이제 자기를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인도할 구원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널리 전파하고 싶었다. 그는 점차로 자기 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사명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난제가 산적해 있었으나 사도 바울 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앞 날이 어두웠지만 또한 동시에 밝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2. 실제 투쟁

①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반대하여 설교로 공격함

② 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항의서를 붙임
   ( 1517년 10월 31일 : 종교개혁기념일)

③ 2주 만에 전 유럽으로 파급됨

④ 지지자 - 멜랑톤

⑤ 1521년 삭소니아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 산성에서 은거하며 신약성경번역

이제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그때까지 수도원에서 살고 있었다. 1510년에 어거스틴파 수도회의 일로 그는 로마에 가게 되었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참된 교회이며 교황은 땅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대리자이고 ‘영원한 도성’인 로마는 거룩한 보좌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거룩한 도성에 가까와질수록 그 도시 사방에 널려 있는 죄악들을 목도하게 되었다. 로마에 있는 동안 그는 교황의 비행과 그 밖의 다른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상에 대하고 보고 듣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루터는 여러 수도원을 다니면서 사제들이 너무나 무식하고 터무니없는 미신에 빠져 있으며 심지어 그 중의 일부는 불신자들이며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들까지 끼어 있음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로마에 4주간을 있었다. 루터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받기 위하여 끌려 나오실 때 빌라도가 서 있었다는 빌라도의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옮겨져 왔으며 누구든지 맨무릎으로 그 계단을 오르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주장하여 루터도 자기의 할아버지를 연옥에서 건져내려고 한 계단을 오를 때 마다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빌라도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꼭대기에 올라갔을 때 ‘그것이 정말일까?’하는 생각이 떠 올랐다. 로마 방문은 루터에게 있어서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로마에 대하여 다른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지옥이 있다면 바로 로마가 그 위에 세워져 있다”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비텐베르크에 돌아온 루터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515년 교회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하던 사제들과는 다른 설교를 하였다. 기독교의 진리를 분명히 설명해 주었다.

이런 가운데 교황은 로마에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기로 하였다. 그 막대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각 지역에서  들어온 기부금과 특별한 면죄부를 판매하여 그 수익금을 성당 건축에 쓴다는 계획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독일인들은 비록 그 당시에는 죄를 범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연옥에서 보낼 기간을 탕감받기 위하여 면죄부를 사기도 하였고, 이미 죽은 사랑하는 자들의 영혼을 연옥의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사야 한다고 믿었다. 신부들은 “돈이 헌금함 속에 ‘땡그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하였다. 또 직분을 팔아서 기름을 마련하였다. 이에 루터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면죄부를 맹렬하게 공격하면서 면죄부의 죄악상을 간결하게 열거한 95 개조의 항의문을  1517년 10월 31일 정오에 비텐베르크에 있는 「성곽교회」의 문에다 붙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루터의 항의문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읽고 복사해서 온 독일에 퍼뜨렸으며 얼마 되지 않아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용기를 찬양하였으며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였다. 처음에 교황은 이런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였으나 그것이 자기의 권위와 교회의 교리를 심각하게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루터에게 항의문을 취소할 것을 요구하고 로마로 소환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자기가 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라고 대답하였고, 또 자기의 교리적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고 분명히 하였다. 이리하여 교황은 루터를 파문시켰다.  1520년 6월 15일자로 루터를 정죄하고 그의 저술들을 불태우라는 로마의 교서가 발송되었다.

루터는 많은 군중들과 학생들과 교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의 교서를 불태움으로써 교황권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그는 교서를 불태우면서 “당신(교황)이 여호와의 거룩한 자(그리스도)를 괴롭힌 것처럼 영원한 불이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이어서 루터는 자기의 글을 통하여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였다. 이리하여 종교개혁은 본 궤도도 진입하게 되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고 있을 때, 다윗에게 큰 도움을 준 진정한 친구 요나단이 있었다. 이와 같이 루터가 투쟁과 박해의 시대에 루터의 친구인 필립 멜랑톤은 루터의 귀한 도움이 되어 주었다. 멜랑톤은 매우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루터처럼 용기나 담대함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뛰어난 학식과 논리를 통하여 루터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놀라운 재능, 해박한 지식, 높은 학문성, 풍부한 교양 때문에 멜랑톤은 「독일의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멜랑톤은 루터의 열심과 정열이 한도를 넘어 과격해지지 않고 지혜롭고 온건하게 발휘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이제 교황의 서신을 불에 태워버린 루터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들어섰다. 승리가 아니면 패배뿐이었다.

당시 최대의 군주 카알 5세는 19세의 나이로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는 로마 카톨릭의 충실한 신자였으므로 루터에게 보름서 회의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터의 친구들은 한 세기 전에 요한 후스에게 약속되었던 안전이 지켜지지 않아서 후스가 화형 당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가지 말라고 만류하였으나, 루터는 “보름스에 있는 집들의 지붕 위에 있는 기와장 만큼 많은 수의 마귀가 있다할 지라도 나는 가겠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보름스로 가면서 그 유명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짓는다.

1521년  4월 16일 루터는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마귀의 화신으로 생각되었던 루터의 모습을 구경하려고 하였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던만큼 창문과 지붕까지도 구경꾼들로 가득찼다.

루터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 앞에는 황제와 귀족들 또 제국의 제후들 등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이 서 있었으며 30명의 대주교들, 주교들과 수도원장들, 교황 대사들, 그리고 자유시 대표자들 등 206명이 있었다. 사회자인 엑크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루터의 저서가 루터의 것인지 물었으며, 또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책들 속에 포함된 그의 교리들을 취소할 용의는 없는지 물었다. 이에 루터는 그 책들은 자기가 쓴 책이며, 그리고 교리의 문제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회의는 하루 연기되었고 루터는 밤새 기도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고 그의 친구가 내용을 전한다.

“오 ! 나의 하나님이여, 나와 함께 하시며 세상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나를 지켜 주소서. 오직 주님만이 나를 보호하실 수 있나이다. 나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이번 일은 나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나는 헛된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옵소서. 주님께서 나를 부르셨으므로 이제 나의 곁에 오소서.  나의 보호자시요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구 합니다.”

다음 날 루터는 온 세상을 흔들 만한 연설을 하였다. 처음에는 라틴어로 다음에는 독일어로 했으며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정죄 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것은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들의 주장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 되었고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 양심을 거스리며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불안하고 위험스러운 일이다. 나는 여기에 선다. 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이처럼 비타협적인 자세로 말미암아 회의는 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고 사회자 엑크 박사는 루터에게 경고하기를 교회 회의가 개인 양심보다 더 안전하게 진리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황제도 용납 못하였고, 신하들에게 “어떻게 일개 수도승이 옳고 천년 동안 내려온 기독교의 증거가 잘못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황제가 신변보장을 해 주었으므로 루터는 호위를 받는 가운데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 나중에 루터는 보름스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향하였다.

그후 루터는 제국의 파문령을 받았다. 그는 범법자로 선고되었으므로 누구든지 루터에게 숙소를 제공하거나 음식을 주는 사람은 황제에 대하여 반역을 시도하는 혐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보름스를 떠난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가는 길에서 중무장한 군인들에게 납치를 당한다. 그리하여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가게 되는데, 이 일은 루터의 친구들과 선제후 프레테릭이 도모한 일이었다. 그들은 루터를 소란스럽고 대적들이 많은 세상으로부터 잠시 데려와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것이다.

루터는 여기서 약 1년 동안 은신하여 있으면서 주로 성경을 연구하면서 보냈다. 특히 그는 여기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주력하였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루터는 11주만에 독일어 신약성경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1522 년부터는 독일 서점에서 목수나 노동자들의 일 주일 품삯 정도의 가격으로 루터의 성경이 날개돋힌 듯이 팔리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는 구약성경이 1534년에 완성이 되었다. 루터는 죽는 날까지 바쁘게 지냈다. 그는 약 25년 동안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오늘날 번역으로 우리가 구입할 수 있는 것만도 약 55권이 된다. 루터는 1546년 그가 태어났던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그곳은 29 년 전에 그 교회의 문에다 유명한 95 개조의 항의문을 붙였던 곳이다.


3. 개혁원리
① 이신득의(以神得義)-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선행이 아니다.

② 만민제사장(萬民祭司長)- 신자는 누구나 바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다.

③ 오직 성경으로 - 전통과 교황교서를 배격





제5-3장. 존 칼빈의 종교개혁


1. 그의 생애 (1509-1564)

① 1507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욘에서 출생
② 부친은 법율가며 감독서기, 모친은 경건한 신앙인
③ 교육 - 14세 때 프랑스로 유학 신학과 법학공부
④ 올네안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헬라성경과 독일 개혁저서를 연구함
⑤ 1533년 복음주의 연설을 기초하다 박해를 받아, 스위스의 바젤로 피난함
   여기서 「기독교강요」을 저술
⑥ 제네바에서 개혁을 하면서 종생을 바침 (1564년 5월 24일 55세 일기)
파리에서 칼빈은 고대 로마 시대의 저술가인 세네카가 쓴 책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여 최초의 작품을 저술하였다. 이 때에 칼빈은 독일 개혁자들의 교리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고, 그들은 칼빈의 마음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칼빈은 빛나는 눈을 가진 창백한 얼굴의 젊은이였다. 그는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진지한 성품을 가졌다. 칼빈은 책을 읽을 때 가장 즐거웠다. 그의 판단은 거의 정확했으며 결코 흥분이나 과장된 기분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감정보다는 지성에 순종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개혁자들 중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칼빈 처럼 그렇게 큰 유익을 끼친 사람이 없었다. 또 아무도 칼빈 처럼 기도를 통하여 성경을 그렇게 깊이 파헤쳐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진리의 금광을 캐낸 사람은 없었다. 오를레안 교수로 있으면서 국가적으로 멸시받고 박해받는 파리의 개신교도들 편에 섰다. 칼빈은 그들을 방문하여 위로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칼빈은 그를 도와서 총장 취임 연설 때 로마 카톨릭을 공격하고 개혁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국왕 프란시스1세는 그들을 체포하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칼빈은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을 하게 된다. 당시에 칼빈은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먼저 그는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로버트라는 사람을 돕는 일과 하나는 나중에 ꡔ기독교 강요ꡕ라고 불리우진 책을 저술하고 있었다. 그 책은 1535년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그 책은 시간이 갈수록 증보되어 출판되었으며 마침내 성경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신앙에 관해 인쇄된 책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이 되었다.




2. 제네바에서 그의 활동

① 파렐(Farel)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가서 개혁에 종사함
② 그의 지위는 제네바의 평의회의 목사의원이자 성경해석자로
   특별지위를 가짐
③ 파렐과 함께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이상도시 건설을 주장하여
   풍속개량 및 규율엄정에 힘씀
④ 시민들이 견디지를 못하여 반항이 일어나 칼빈과 파렐은 국외로 추방됨
⑤ 스트라스버그에 피난하여 3년간 칼빈주석을 작성
⑥ 1541년 다시 제네바의 초청으로 23년간 개혁에 성공함
⑦ 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이 됨

바젤에서 1 년 남짓 보낸 후 피신을 가는 도중 제네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하였다. 당시 제네바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던 프랑스의 개혁자 파렐은 칼빈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27세의 칼빈에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거절하였으나 파렝은 불같이 칼빈을 설득하였다. 사실 칼빈은 내성적이었고 수줍어하는 성격이었으며 어떤 특별한 직무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였으나 파렐이 심지어 자기의 부탁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칼빈의 앞 길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하는 바람에 결국 칼빈은 여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파렐과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강력한 전파자 들이었으므로 청중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청중들이 단지 듣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치 않고 그들이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였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들은 엄격한 권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이런 권징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결국 이들에 의하여 이 두 사람은 제네바에 쫒겨나게 되었다. 이제 종교개혁이 비참한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와서 약 3 년 동안 살았다. 그 동안에 로마 교회는 제네바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칼빈의 친구들이 제네바 의회의 주도권을 잡아 다시 칼빈을 제네바로 초청하였다. 칼빈은 망설였다. 자존심 문제 때문이 아니라, 과여 자신이 제네바에서 요구하는 사역에 합당한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1541 년 그는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는 대단한 환영을 받았으며 제네바 시민들의 사회 생활과 종교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대로 지도하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인구 13,000명의 인구가 사는 도시에서 일주일에 17 번의 설교가 행하여졌다. 칼빈은 주일에 두 번씩 설교를 하였고, 거의 매일 설교를 하였다.

그러나 모든 시민들이 세상적인 정욕을 버리고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주님의 길로 인도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젊은이들을 교육하는데 큰 힘을 쏟았다. 젊은이들의 교육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고려한 철저한 계획을 세웠다. 나이가 어린 학생들에게는 요리문답을 가르치고 교회에서는 공과를 가르쳤다. 그 다음에는 학교로 진학시켜 읽기, 쓰기, 셈하기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헬라어와 수사학과 논리학도 배우게 하였다. 물론 규칙적으로 성경을 가르쳤다. 이리하여 칼빈 당시와 그 후 수 년 동안에 제네바에서 뛰어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수십 명 나왔다.

제네바에서 칼빈이 활동할 때, 1546년 루터가 죽은 후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깨달은 많은 사람들이 칼빈을 찾아와 가르침과 지도를 받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제네바는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제네바는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피난처로 문호를 개방하였기에 박해를 피해 피난하는 자들의 집결처처럼 되었다. 피신한 사람들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도 있었다.

3. 유럽에서의 칼빈의 세력
① 프랑스 - 휴거노파
② 영 국  - 청교도
③ 스코틀란드 - 죤 낙스
⑤ 네델란드, 독일의 프리드리히 3세 등


4. 칼빈주의 발전이유
① 신학이 통일적이기에
② 교회기치가 선명하여 세계 각국에 적용되기 쉬움
③ 기독교 생활훈련에 중점을 둠
④ 훌륭한 후계자 「베자」가 있었음


5. 칼빈의 신학
① 하나님의 주권, 섭리 주장
② 예정설
③ 속죄설 - 죄의 벌할 필요를 인정, 형벌대수설
④ 성찬 - 기념설을 주장. 영적은혜에 치중
⑤ 칼빈주의 5대강령
   a. 인간의 전적타락
   b. 무조건 선택
   c. 제한속죄
   d. 불가항력적인 은혜
   e. 성도의 절대보호

칼빈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인 예정론을 바르게 가르쳤으며,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믿고, 또 선포하였다.  그는 사도시대 이래로 가장 위대한 기독교 교사였다. 그는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잦은 금식과 수많은 연구와 설교, 주석집필, 그리고 그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유럽의 수많은 신교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 등으로 얼마 살지를 못하였다.  그는 54세로 죽을 때도 그의 추종자들이 새로운 종파를 만들까 염려하여 자기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못하도록 공동묘지에 안장하도록 하였다. 그의 논문과 수많은 설교와 주석, 그리고 빛나는 기독교강요는 그의 영원한 기념비이고, 세상에 전투적인 교회가 존재하고, 성경의 영원한 진리를 붙잡으려는 사람이 있는 한, 칼빈의 개혁되어질 것이다.

칼빈은 아주 병약했는데, 금식과 연구 때문에 몸이 약하여졌다. 칼빈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낮에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칼빈의 업적은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힘겨운 것이었다. 특히 자주 앓아 눕고 몸이 약했던 칼빈에게는 더 벅찼다. 그러나 칼빈은 자기 앞에 놓인 수많은 과업 앞에서 머뭇거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설교하지 않을 때는 주석을 쓰고 주석을 쓰지 않을 때는 많은 사람들의 상담에 답하며 용기를 주는 편지를 썼다.

종교개혁의 시발이 휘클리프, 후스, 사보나롤라 등이라면 루터는 튼튼한 기초를 세웠고, 칼빈은 이 거대한 사역을 완성시킨 사람이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칼빈을 비난하면서 칼빈이 가르친 교리가 예정론 이외에 무엇이 있느냐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칼빈을 도무지 모르는 사람이다. 더욱 서구 문명사에서 칼빈을 제외한다는 것은 “마치 한쪽 눈을 감고 역사를 읽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은 참으로 합당한 지적이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전개되어 갈수록 이 표현의 진리는 계속되어 질 것이다.


♠ 참고 -  칼빈의 설교
기독교는 처음부터 설교를 중시(重視)하는 종교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 그리고 초대 교부들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카톨릭의 부패와 함께 없어져 버렸으나,  종교개혁을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설교는 언제나 성경이 기초가 되었다.  세상윤리, 사회개혁, 문자적 비평 등의 설교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 지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주지 못하고 영혼의 갈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설교자로서 칼빈의 활동은 스트라스버그(Strasburg)에서의 3년간(1538-1541년)과 다시 제네바(Geneva)에서 약 20년간이었다.  칼빈의 설교는 속기사인 프랑스 사람 Denis Raguenier이 속기한 1549-1560년 11월 3일 까지의 설교가 남아있다.  더러는 빠진 것도 있지만 약 2,000편의 설교가 문서화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칼빈은 주일에 두 번 설교를 하였다.  평일에도 월,수,금요일에 설교를 하였다.  설교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였다. 말은 비교적 빠른 편이었고,연속적 성경강해인데, 깊은 명상과 기도로 준비하고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설교를 하였다.  그는 자기가 생각했던 것을 노트하지 않고 놀라운 암기력을 발휘해서 의도했던 내용을 전하곤 하였다.

그는 청중들에게 퍽 엄격한 편이었다.  그는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주위를 산만하게 한다고 책망하였으며,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이나 설교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은 엄히 책망을 하였다.  칼빈은 주장하기를 설교자가 성경의 해석만을 하고 청중의 감화를 치중하지 않는 다면 그런 설교는 죽은 설교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설교를 하면서  청중들의 의지에 많은 호소를 하였다.  자기가 전하는 설교가 단순한 성경 지식만을 전하는 것이라면 하나의 냉담한 이론 밖에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설교가 꼭 청중들에게 환영만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공개적으로 그의 설교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설교의 결과가 자기가 바라는 대로 잘 되어지질 않을 때, 그는 낙심을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설교에 대한 감격이 점차 적어지자 그는 하나님이 허락만 한다면 죽고 싶다고 탄식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낙심을 않고 기침과 몸의 고통을 당해가면서 끝까지 설교에 진력(盡力)을 다 하였다. 그는 자신을 “말씀의 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교인들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다고 생각되는 것, 즉 복음을 증거하였지 회중의 변덕스런 기분에 맞추기 위해서 설교하지는 아니 하였다.  또 자신을 교인의 우두머리로 생각지도 아니했다. 이것이 칼빈의 설교자로서의 자세였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우리는 단순히 알지 못하는 무엇을 듣기 위하여 설교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할 것을 자극받기 위하여 오는 것이다”하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찾아오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청중들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다.   그래서 그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설교할 자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고, 자신을 통하여 교회에 전파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엇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성경 구절에 대하여서는 솔직히 모른다고 하였고, 또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을 것과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알아보도록 권면하였다.

칼빈의 설교의 최대의 특징은 회개에 강조를 두었다.  그는 성경적 설교의 목적은 단순한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회개에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확신 아래서 그는 해박한 지식을 과시하거나 설교에 기교를 부리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고 (Soli Deo Gloria) 인간의 가치에 대하여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오직 인간은 성령님의 도구임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설교자의 임무가 인간의 어떤 기호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증거하고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칼빈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앞에 계시는 것처럼 설교를 하였으며, 서기가 임금 앞에서 말하듯 하며, 천지의 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도구로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입장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과격한 말을 가끔 사용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언어가 소박하고 강직한 때문도 있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에 퍼부은 악담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살았고, 또 그렇게 설교를 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친구였으며 그에게 말씀의 깨달음과 행동을 주셨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역사하셨다.  칼빈의 설교 가운데는 성경의 어느 부분을 해석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이 또 다른 최대의 특징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제5-4장. 칼빈주의 VS 알미니안주의


칼빈주의의 엄격한 경건에 대한 반동(反動)은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전통이 소멸되지 않은 네델란드에서 일어났다.  야곱 헤르만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자와 불택자를 정하신 후, 그 뜻을 수행시키는 수단으로 타락을 허락하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반론(反論)을 제기하였다.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베풀어 주실 때 죄인에게 그 구원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자유의지도 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가 헛되이 죽으신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1. 알미니안 (Arminius)
① 알미니우스라고 불리우는 야곱 헤르만은 1560년 암스테르담에서 출생함
② 제네바에 유학하고 1588년 암스테르담 목사가 됨
③ 학식과 웅변이 뛰어나고 성품이 온화함
④ 1603년 라이덴 대학의 신학교수가 됨.  1609년 사망
⑤ 인간의 행위에 의한 구원을 설파함.
⑥ 그는 1609년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추종자들로 인하여 네델란드의
   신교에서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간에 큰 충돌이 일어났다.






2.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다른점
구분
알미니안 주의
칼빈주의
예정(豫定)
예지예정(豫知豫定)
예지없는 예정
속죄(贖罪)
그리스도의 구원은 만민을 위해
택자를 위해(制限贖罪)
은총(恩寵)
神恩에 대하여 항거할 수 있음
항거할 수 없음
사람의성질
반선반악하여 자유의지가 잔존
전적으로 타락하였음



3. 돌트(Dort)회의

① 1618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상이점(相異點)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종교회의를 돌트에서 개최함.
② 1618년 11월 13일 - 1619년 5월 9일의 9개월에 걸쳐서
   145회의 회의를 함
③ 회의 도중 알미니안 파가 회의 결정을 불복결의하여 축출함
④ 문서로 토론함
⑤ 5월 6일 칼빈주의 신조공포.
   결의 : 하나님의 선택은 멸망할 자 중에 구원얻을 자를 선택함
⑥ 300여명의 알미니안주의 자들이 공직 박탈의 처분을 받고 국외로
  추방을 당했다.
그러나 가슴을 뜨겁게하는 그의 경건은 영국에 큰 영향을 미쳐서 후에 존 훼슬리(John Wesley)의 감리교로 이어졌다.



제5-5장. 영국의 개혁(改革)


1. 헨리(Henry)8세  1509-1547
① 죽을 때까지 개혁신앙의 원수로 지냈다.
   교황 레오10세(LeoX)로 부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② 그의 이혼사건으로 인하여 교황과 사이가 벌어짐.

♠ 참고 : 이혼사건
헨리8세는 죽은 동생 아더(Ather)의  부인인 카타리나(Catherine)와 결혼 을 을 억지를 부려 교황의 승락을 받아 하였으나, 15년 후에 아들이 없다고 트집을 부려, 이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해 달라고 교황에게 요청하였으나 당시의 교황인 클레멘트 7세는 거절함.

② 후에 궁녀 앤 보렌(An Boleyn)과 결혼(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生母)
   교황은 이것을 반대함
③ 교황과 단절, 신교도인 캔트베리 대주교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
  의 승인을 받아 결혼함.영국국교 창설.교회수장령(敎會首長令)발포함 (1535년)


2. 에드와드6세
① 헨리8세 셋째 왕후 쟌 스모울(Jane Seymour)의 출생으로
   9세에 즉위하여 7년간 재위함. 개신교도인 크램머가 섭정함.
② 대륙으로부터 개혁파들을 받아들임.  칼빈과 자주 연락함
③ 교회 내의 우상제거


3. 메리여왕 즉위
① 모후인 앤 보렌의 결혼이 불법화된 후 사생아 취급받아 20년 규중생활을
   하다  1553년 37세의 나이로 즉위
② 즉위 즉시 로마교에 복귀함
③ 수많은 신교도를 죽임. 300여명 화형시킴. 크램머도 화형으로 순교
   개신교도들은 유럽으로 피신함.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서 결코 꺼지지 않는
                양초가 되어 불타게 될 것입니다.”

④ 민심을 잃은 후, 1558년 실의의 일생을 마침


4. 엘리자베스 여왕
① 1558년 26세로 즉위하여 46년간 재위, 결혼않음.
② 정치를 잘 하였으나, 신구교 양교도를 철저히 탄압하고, 영국 국교회에의
   복종을 강요함.
③ 교회수장령을 국회에서 통과시킴 (1559년)
④ 이때에 청교도 운동이 일어남
5. 죤 낙스(John Knox)의 스코틀랜드의 개혁

스코틀랜드의 개혁의 기수는 누구보다 담대하였던 죤 낙스를 통하여 되어졌다.  그는 스코틀랜드에 개신교 교리의 체계를 세워주고 예배 방식을 확립하였다.  메리 여왕의 박해시 그는 독일과 프랑스로 피신을 하였다.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서 4년간 머물면서 “사도 시대 이후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부러워하였다.

존 낙스의 영향력으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의 정치체계가 들어왔다. 1559년 스코틀랜드에 귀국하여 우상 숭배를 강력하게 배척하고 담대히 진리를 선포하였다.  “나는 검은 것은 검다 흰 것은 희다는 식으로 악에 대하여 담대하게 지적하기를 배웠다”고 말하며 진리에 대하여서는 조금의 양보도 하질 않았다. “나에게 만 명의 무장한 적군이 우리 영토에 침략해 들어오는 것보다 한 번의 미사가 더 두렵다”고 역설하였다.  이런 낙스에게 메리 여왕은 큰 대적이 되었다.  1572년 낙스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에는 「여기 결코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 하지 않은 이가 잠들어 있노라」라고 적혀있다.




제5-6장. 프랑스와 네델란드의 종교개혁

1. 프랑스의 위그노

(1) 프랑스의 환경
종교개혁의 가르침이 전파될 당시의 프랑스 왕은 프란시스1세 였다. 그는 개신교도들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1545년까지 수천 명이 그의 치하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였다. 1547년 프란시스1세의 사망으로 그의 아들 앙리2세 (Henry II)는 더 혹독하게 핍박을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제네바로 피신을 하였다.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위그노(Huguenots)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하위귀족, 상인, 전문직업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2) 바돌로매 대학살과 낭트칙령
① 당시 프랑스왕 샤를르 9세의 누이이며 카톨릭 교도인 마가렛 (Margaret)과
   개신교도인 나르바 왕국(스페인 국경 근처의 소왕국)의 왕인 앙리(Henry)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② 이 날은 1572년 8월 24일로 「聖 바돌로매의 날」이었는데, 이 날 밤에 “사악한
   이세벨”인 샤를르9세의 모친인 카트린느(Catherine) 은 자기 아들인 왕에게
   찾아가서 “위그노들이 왕족과 카톨릭 지도자들을 살할려고 한다”고 말하며 모든
   개신교도들을 죽일 것을 서명 요구하였다.

③ 8월 24일 자정을 기하여 모든 개신교도들을 대학살하기 시작함. 개신교도 지도자
   인  꼴리니 제독의 목을 자르고, 손과 몸뚱이를 3일간 파리 시내에 끌고 다닌후
   교황에게 보냄. 무서운 대학살은 3일간 계속되고 수만명이 죽음.

④ 교황은 축포를 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함.

⑤ 후에 샤를르 9세는 발작증세를 일으켜 24세의 나이로 죽음.

⑥ 후에 프랑스의 왕이 된 바르바의 앙리4세가 ꡔ낭트칙령ꡕ
   (Edict of Nantes)을 반포하여 위그노의 권리보장과 예배자유를 선포함.


2. 네델란드의 종교개혁

네델란드에도 개신교의 신앙이 독일로부터 먼저 들어왔다.  그후 칼빈의 명쾌한 교리의 영향이 나타나면서 칼빈에게로 많이 기울어졌다.  당시 황제인 칼 5세 (Charles V)는 개신교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1523-1555년까지 종교재판을 통하여 5,000명 이상의 사람이 고문을 당하고, 화형과 교수형, 그리고 생매장을 당하며 순교를 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그후 그의 아들인 필립 2세(영국의 메리여왕의 남편)는 더 심하게 박해를 하였다.  이 박해에 반기를 든 사람은 오렌지의 윌리엄공 (William of Orange)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루터 교도가 되었다가 나중에 칼빈주의자가 되었다.  화란의 공화국 창시자로서도 유명하다. 1609년 마침내 네델란드는 스페인과 교황의 멍에로 부터 벗어나서 종교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제5-7장. 재세례파와 예수회


1. 재세례파

(1) 기원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쯔윙글리의 성경관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레벨, 만즈,후프마이어등이 결성하여서 1525년 부터 행동을 취하였다.


(2) 조직
주요 비평은 유아세례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
이리하여 「재세례교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3)결과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이단으로 취급을 받았다.  그리하여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죽었다.   그러나 모라비아, 독일, 스위스, 화란 등지의 서민층 들에게 급속하게 번져 나갔다.


(4) 그들의 신앙
① 초대 교회 신앙과 생활과 행위 모방에 힘씀
② 유아세례 반대
③ 예정론을 반대하여 자력을 중히 여김


2. 예수회

(1) 개관

① 1534년 스페인 사람 익나티우스 로욜라 (Ignatius Loyola)가 창설한
  카톨릭 단체이다.
② 주된 목적은 개신교를 완전히 박멸하는데 있었다.
③ 오직 교황에 대하여서만 책임을 지고 다른 모든 법들에 대하여서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④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통하여 침투한 그들의 영향력은 거대한 것이었다.
⑤ 예수회의 가장 악명높은 원리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카톨릭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살인도 서슴치 않았다. 개신교를 위하여 낭트칙령을
   반포한 앙리4세가 이들의 손에 의하여 암살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2) 예수회의 금지와 부활
① 예수회의 타락
㉠ 유명한 지도자가 나오질 않았으며
㉡ 부(富)을 탐내어 안일을 구하였으며
㉢ 각종 음모들이 드러나 약점이 노출되었으며
㉣ 중국에서 돌아온 선교사들이  중국 풍속 습관에 영합하여 기독교
   본질을 망각하는 행동이 나타남

② 로마교 제국에서 추방됨
㉠ 파라과이에서 토인을 훈련시켜 스페인과 포루투갈에게 저항한 사건이
   일어났음
㉡ 포루투갈 국왕 요셉 1세를 암살할려는 음모가 예수회의 계획으로 몰림
㉢ 1759년 포르투갈과 그 영지에서 추방되고 재산은 몰수됨
㉣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타남
㉤ 1773년 교황 클레멘트 14세는 예수수회의 금지를 명함

③ 1814년 교황 비오7세가 다시 예수회의 재건을 허락함.
   지금은 무서운 세력으로 자라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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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 내주의 나라와
제6장. 근대의 기독교


제6-1장. 청교도운동, 웨스트민스트회의

1.청교도 운동

(1)청교도의 생성
엘리자벳 영왕이 즉위하니 대륙으로 피난갔던 개혁교도 800여명이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제네바풍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서 로마교 개혁하려 하기 때문에 이들을 청교도라고 하였다. 엘리자벳 여왕은 종교통일령으로 이들을 핍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하였으며 성경으로 증명할 수 없는 복장과 의식에 대하여도 반대하였다.


(2)지도자와 학자들
● 토마스 카트라잇 (Thomas Cartright) 1535-1603
신학교수로 박학 웅변에 능하였으며 성경에 합한 정치는 장로정치라고 주장하였다.

● 존 번연 (Bunyan John) 1628-1688

● 밀턴 (Milton John) 1608-1674


□ 엘리자베드 치세하의 영국 청교도
17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으로 시작된 것은 엘리자베드 여왕의 치세 때이다. 청교도 신앙은 영국 국교회 안에서 급속히 대단히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엘리자베드의 교회 정책은 두 개의 의회 법령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여왕을 영국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로 선언하는 「수장령」(Act of Supremacy)과 「통일령」(Act of Uniformity)이다.  이 통일령에 의하여 다른 기도서를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고, 주일이나 성일(聖日)에 교회 의식에 한 번 불참하면 1실링씩의 벌금을 물게 하였는데, 이는 노동자의 일주일 임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영국은 전반적으로 이러한 것을 받아들였으나 「청교도」(Puritan)들은 한층 더 과감한 변화를 요구하였다. 청교도들이 처음으로 개입하게 된 분쟁은 예복에 대한 것이었다. 예복이란 성직자들이 입도록 교회에서 제정한 것을 말한다. 일부 청교도들에게는 성직자의 예복이 “적그리스도의 옷”이었으며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과 같이 간주되었다. 여왕은 자기의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여왕은 청교도들을 뿌리 뽑을 뿐만 아니라 그 옹호자들까지도 제거하려고 하였다.

1603년 엘리자베드 여왕이 죽고 스코들랜드의 메리 여왕과 그녀의 두번째 남편 단리(Darnley)경 사이에 낳은 아들 제임스 1세(James I)가 왕위에 오르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제임스 1세는 장로교인으로 교육을 받았으나 영국으로 오자 영국 국교회의 원리들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청교도 목사들은 국왕에게 「교황의 누더기」로 불리우는 요소들을 제거하기를 요구하였다.

「교황의 누더기」란 종교개혁 이후에도 계속 남아있던 로마 교회의 의식들을 말한다. 왕은 그 청원서를 별로 달갑게 생각 않았지만 1604년 햄프턴 궁에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지만, 한 가지 좋은 결과는 왕이 성경의 새로운 번역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611년 ꡔ흠정역ꡕ(the Authorized Version)이 출판되었다. 흠정역은 일반적인 평가에 있어서 영어로 나온 역본 중에 가장 휼륭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 똑같이 즐겨 읽었으며 많은 관용구와 표현들을 만들어 내어 영어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2.웨스트민스트 회의 (1643. 7. 1)
(1) 회의 동기
● 찰스 1세가 즉위하여 왕권신수설을 강조하고 알미니안파를 우대하며 칼빈파에
   동정적인 국회를 탄압하여 국회를 소집치 않음.

● 세금과 종교적인 문제로 반항하는 스코틀랜드와 전쟁하기 위하여 1640년
   국회를 소집하니 칼빈파에 동정적인 하원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옴.

● 의회는 감독정치를 폐지하고 웨스트민스트 신학 시회의를 소집하여 영국의
   교리와 신조와 정치, 의식을 새로 제정코자 함.
● 회원 :  목사 121명  귀족 18명  하원의원 20명
● 결의 :  신앙고백서 (1648년 통과)  대,소요리문답 (1647년 통과)  예배 모범서

□ 초기 스튜어트 왕조하의 청교도 신앙
17세기 초반에는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꾸준하고도 급속한 진전을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많은 수는 아닐지라도 하원(下院)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캠브리지 시에서는 청교도들이 크게 번성하였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찰스1세(Charles I)가 즉위하였다. 찰스는 카톨릭 교도인 프랑스의 앙리에타 마리아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개신교 세력이 주도적인 의회의 강한 불만을 사게 되었다.

찰스는 즉위 초 5년 동안 정치적인 문제 외에도 항상 의회와 충돌하였다. 이리하여 1629년 왕은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통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1년 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후 왕은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치루기 위하여 군대를 양성코져 하였으나 재정난에 부딪쳐 군대를 양성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의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의회가 열리자 의회는 왕에게 독재혐의를 들어 기소하였으며 의회의 뜻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리하여 1642년에 이르러 왕과 의회 사이의 반목은 아주 깊어져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렸다.

두 번에 걸친 내란(1642-1648년)에서 의회의 군대가 승리하였으며 1649년 찰스 1세는 처형되고 말았다. 의회와 왕 사이에는 1642년 전쟁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의회 지도자요 청교도였던 죤 핌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 스코틀랜드의 군대가 참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643년 동맹과 맹약이 성립되어 스코틀랜드의 군대가 참전하였다. 이 조약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교리, 예배 의식, 치리, 그리고 교회 정치 등을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교회의 가장 모범에 따라 스스로 개혁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리하여 영국과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교회에서는 가능한 신앙의 일치를 이루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였다. (여기는 신앙고백과 교회의 정치형태, 예배 모범, 요리문답 등이 포합되어 있다.)

이리하여 이 작업을 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는데, 그 장소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에 있는 큰 방이었다. 그러므로 이 모임이 「웨스트민스터 회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대.소요리문답과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와 장로교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교파의 신도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미국의 신앙고백서들도 이 웨스트민스터 희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교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우리 나라의 모든 장로교회도 다 이것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토마스 카알라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될수록 어렸을 때 배웠던 소요리문답의 첫번째 질문이 한층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마음에 다가온다. 그 질문은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였으며 그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기는 것」이었다. 전쟁후 영국은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 후기 스튜어트 왕조하의 영국의 청교도 신앙
스튜어트 왕조의 회복은 1660년에 이루어졌다. 찰스2세는 모든 신민(臣民)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약속하엿지만, 얼마 안 가 청교도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박해를 합법화하기 위하여 법률을 제정하였는데, 그중 한 가지가 1662년에 제정된 「통일령」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모든 성직자들로 하여금 공중 기도서에 있는 모든 내용에 전폭적으로 동의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양심상 이렇게 할 수 없었던 근 이천 명의 성직자들이 「비국교도」라는 이름으로 생계와 생활의 터전을 빼았겼다. 또 1665년에는 「5 마일 법」 (The Five Miles Act)라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비국교도 성직자들이 도시나 자치 마을의 5마일 이내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였다. 이 5 마일법은 비국교도 성직자들의 생계 유지를 봉쇄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 졌다.

찰스 2세의 치하에서 신앙양심의 문제로 고통을 당했던 많은 사람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존 번연(John Buyyan)이다.  그는 영국교회의 성직자는 아니었으나 하나님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서 부르신 「베드포드의 땜장이」였다. 그가 설교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고 지방 행정장관이 위협하였으나 번연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지 못하기 보다는 눈꺼풀에 이끼가 끼도록 감옥에 남아 있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신은 아내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라고 물었을 때, 번연은 “나는 참으로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하여 그는 12 년 동안을 감옥 속에서 지냈으며 가죽 장화의 끈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시켜 나갔다.

번연은 비록 정식 교육의 거의 받지 못하였으나 뛰어난 창작력과 통찰력을 통하여 모두 68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ss)이다. 거기에는 「장망성」 (the City of Destruction)에 살던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늘의 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가 되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천로역정은 모든 기독교 서적 가운데 성경을 제외하고는 가장 유명한 책일 것이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자 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위를 물려 받았다. 제임스 2세는 자기가 로마 카톨릭 교도인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며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카톨릭을 회복시키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그는 자기형 찰스 2세처럼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동맹을 맺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위그노를 박해한 장본인이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정치가들은 오렌지의 윌리엄과 접촉하였다. 그는 영국 왕실과 관계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찰스 1세의 딸이요, 아내는 제임스 2세의 맏 딸이었다. 윌리엄(후에 윌리엄 3세)은 자기를 영국왕으로 추대하지 응하였다. 이리하여 1688년 화란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하지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로마 카톨릭으로 복귀되지 않았다.

1689년의 법은 모든 개신교도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풀었으며 영국의 왕은 개신교여야 할 것을 규정하였다. 교회와 국가 양쪽의 보장을 얻기 위하여 1689년의 「권리장전」이 선포되고 교황주의자는 영원히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규정하였다. 청교도 지도자인 리차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도 시대 이래 돌트 회의와 웨스트민스터 회의보다 더 거룩한 회의는 없었다.”


(2) 국왕과 전쟁
국회와 국왕이 개전하자 크롬웰이 국회를 도움. 국왕은 패전하고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공화정을 선포함.




제 6-2 장 . 기독교의 미국전파

1. 청교도의 피난과 식민지 건설

● 종교의 핍박을 피하여 시작됨.
● 1620년 180톤 범선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120여명의 청교도들이
   뉴 잉글랜드에 도착함. 지도자 - 존 로빈슨 등
● 1630년 살렘(Salem)에 900여명의 청교도들이 찰스 1세의 국교신봉정책이  더 강경
   해 짐으로 청교도들의 정치적, 종교적 픽박을 피해 옴.
● 1640년까지 약 2만 여명의 청교도들이 이민 옴.


1619년 필그림(순례자)들이 대서양을 건너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들은 새로운 고향으로 실어갈 두 척의 배를 전세 내였다. 1620년 8월 그들은 사우댐프턴 항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두 척의 배 가운데 작은 배 스피드 웰 (Speedwell)에서 물이 새어 들어 30명 가운데 18명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12 명이 종원이 초과된 메이플라워호(Mayflower)호를 타고 이주하였다.

이 배에는 남자들과 여인들과 아이들을 포함하여 90명의 필그림들이 승선해 있었다. 갑판 아래의 환기 장치는 날씨가 좋았을 때에도 형편없었다. 그들은 비참한 여건 속에서 오직 누워서 신음으로 기도할 뿐이었다. 두 달에 걸친 향해 끝에 「뉴 잉글랜드」에 왔었다. 때는 11월 중순이었고 겨울이 닥쳐오고 있었다. 필그림들이 사용할 수 있는 물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었다. 6개월 동안 절반 이상의 사람이 죽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존자들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자 도합 이만 명이 넘는 청교도들이 그들과 합류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찾아 이처럼 멀리 왔던가? 광산의 빛나는 보석이었던가 ? 바다의 보물, 아니면 전리품이었던가? 그들은 순수한 믿음의 제단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렇다. 이곳을 거룩한 땅이라 부르자. 그들이 찾은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 자유였다.”                - 펠리시아 헤만스 -

“오늘날에는 종교적 항의의 행위로 이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쾌락을 좋아하고 진지한 사고를 싫어하며 고생을 피하려는 이 세대는 뉴 잉글랜드에 처음으로 정착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가졌던 용기와 인내, 겪어야 했던 시련과 난관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삶의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즉 마귀를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감수하고 문명의 사슬에 결박당하고자 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은 자신의 번영을 생각하지 않는 단호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
                                - 존 마세필드 -


2. 대학건설

1636년 Harbard
1700년 Yale
1746년 Prinston, Columbia
1754년 Brawn

1636년 매사추세츠의 캠브리지에 하바드 대학이 세워지면서 매우 중대한 발전이 있었다. 하바드 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육기관으로 그 이름은 영국인 죤 하바드 (Havard :1607-1638)의 이름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하바드는 1638년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슬하에 자녀가 없었으므로 재산의 절반과 장서 320권을 자기의 이름으로 세워지는 대학에 기증하였다.


3. 초기 기독교 지도자

● 요나단 에드워드 (Johnatan Edward)
칼빈신학의 교조 - 예일대학 교수, 프린스턴대 총장

● 죠지 훳필드 (George Whitefield)
영국의 부흥사, 1740년 미국에 이주 활동

* 감리교의 큰 별들을 참고하라.


제 6-3 장. 경건파와 모라비아 교도


1. 경건주의

(1)경건주의 (Pietism)
독일에서 부흥한 루터교는 스콜라적 엄격한 교리적 해석을 전헤로 하여 누구나가 다 여기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성례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면서 이것이 마치 기독교 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기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은 평신도의 소임이 수동적인데 끝나도록 만들고 있었다.  경건주의는 이러한 스콜라적 경향에서 나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험과 감정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평신도들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건설해 나가는데 적극적인 관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한 곳에서 20년 또는 길어야 40년 이상 그 순수성을 유지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타성에 젖어버린 사람들이 사랑이 식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무관심하게 다루게 된다.” 많은 지역에서 영적인 생활이 아주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아직도 겉모양이나마 신앙을 지키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의 유혹과 세상 친구들의 행동이 너무나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축복의 시기가 지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좁은 길을 떠나 넓은 길로 합류하여 하나님을 등지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와 같은 종들을 보내셔서 타락한 성도들에게 경고하시고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촉구하신다. 이러한 종들 중에 한 사람이 필립 야곱 스페너이다.


(2)중심적인 인물

● 쉬패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1666년 프랑크푸르트 교회의 목사가 된 그는 당시 교회의 고갈된 심령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개혁을 기도하였으나 교권을 잡은 사람들의 압력때문에 할 수 없이 같은 마음을 품은 몇 사람과 그의 집에 모여 성경과 기도, 설교를 위한 소집단의 종교모임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경건주의의 시작이다.

스페너는 교회의 피폐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성경의 교훈들이 무시되는 것을 보고 매우 슬퍼하였다. 그는 자기의 주변에 젊은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그 젊은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성경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가르쳤다 .

당시 악과 형식주의 보람없는 성직자들의 생활, 평신도들의 타락을 벗어나기 위하여 교회에도 소집단을 두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피차의 신앙을 시찰하여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더우기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지적인 지식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까닭에 참 삶의 경건성과 훈련을 형성시켜 줄 수 있는 설교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모든 경건주의자들이 스페너와 같은 열심과 소박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신약의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교만과 경건에 대한 자랑이 그들 가운데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의를 강조하여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좁은 길보다 “더 좁은 길”을 강조하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산책이나 웃음 마져도 금하였다.

●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1687년 라이프지히 대학 강사때 학생들과 성경 연구때 성령의 신비로운 경험을 함. 쉬패너와 몇 달 지내는 동안 경건주의 신앙을 받아들임. 할레 대학의 교수로 지내며 목회까지 함. 고아원 빈고아동을 위한 위탁학교등을 세움. 모든 일을 무일푼으로 시작하여 다만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도로써 간구하여 이룩함. 뛰어난 인품으로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 신앙의 한 표본이 됨.

프랑케는 아주 부지런한 목사로서 믿음이 충만하고 선한 사업에 열심이었다. 그는 자기의 문 앞에서 가난한 자들을 만날 때마다 결코 빈 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프랑케는 그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일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자기 집으로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프랑케의 가장 큰 사역은 고아원을 세워 운영한 것이다. 죤 웨슬레나 죠지 휫필드등이 프랑케의 모범을 보고 고아를 돌보는 사업을 시작했다.

♠ 참고 : 경건주의의 본거지 - 할레 대학
유명한 점은 독특한 선교열에 있다. 프로테스탄트가 아직 선교사명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때 이 사명을 경건주의가 감당하였다. 18세기에 60여명의 외국 선교사들이 할레대학 출신자들이었다.

♠ 경건주의의 영향
독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까지 파급되었다. 대중들의 종교적 기상을 순수와 경건으로 일깨워 청순한 국민생활의 진흥에 큰 공헌을 남겼다. 선교의 질적인 향상, 목회자의 영적능력 향상, 청년들에 대한 기독교 훈련의 실천, 평신도의 교회 생활 참여 등 경건주의가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2. 모라비아 교도

경건주의가 불러 일으킨 결과로 진젠드로프 백작의 모라비아 형제단
(Moravian Brethren)을 말한다.

1) 진젠돌프 백작(1700-1760)
1700년 출생하였다. 쉬패너와 막연한 친구로서 어릴 때 경건한 할머니 캐더린에게 양육을 받았다. 할레에 있는 경건주의의 거두 프랑케가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0-17세) 그의 신앙은 경건주의의 신앙이 됨. 보헤미아(Bohemia)의 후스(Huss)교회가 30년 전쟁이후 박해와 피해를 받아 모라비아에서 숨어 살다가 1722년경 독일의 작센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진젠돌프는 이들에게 촌락을 만들어 안주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그의 신앙이상에 따라 엄격한 훈련으로 지도하여 모라비아 형제단을 1727년에 결성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훈련받은 사람이야 말로 국내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온 몸을 바칠 수 있는 선택된 무리라고 생각하였다.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 가겠노라고 하는 모라비아 교인들의 열심은 선교로 연결되었다. 프로테스탄트교 치고 이들만큼 선교에 대한 사명감으로 불탄 교회가 없었다. 미국, 서인도, 그린랜드, 실론, 알제리, 아시아, 수리남, 기아나(Guiana), 이집트, 남아프리카, 바브라도 등 온 세계를 향하였다.




제 6-4 장. 감리교의 큰 별들 (1)

1. 당시의 영국모습

17세기 말부터 영국 교회나 분리주의자들의 교회에 참식하기 시작한 영적 고갈은 심각하였다. 합리주의가 모든 종교 사상가들을 좌우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라야 기껏 하나님의 재가를 받은 도덕 체계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18세기 초반의 영국은 “청교도 정신은 죽었다.”라는 말에 합당하였다. 대부분의 설교는 도덕적 미덕의 산문만 넘치고 있었고, 목사들의 주된 관심은 스포츠, 정치,그리고 오락이었다.  전도는 아예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폐하였고 오락은 갈 데까지 간 인상이었으며 음주량은 영국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영국의 교회생활에 커다란 전환기가 왔다. 복음주의의 부흥이 그것이다. 이것은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의 형제와 화이트필드 이 세사람으로 이루어졌다.
2. 웨슬레 형제의 Holy Club

●웨슬레 형제의 아버지는 성공회의 신부였고 어머니 수산나는 기도의 사람으로 경건한 사람이었다. 존은 19명의 자녀중 열 다섯째, 찰스는 열 여덟째였다. 존은 1703년, 찰스는 1707년 태어났다. 존은 1728년 성공회의 신부로 안수 받아 옥스포드를 떠난 사이에 찰스는 그곳에 남아 동료 학생들과 함께 성경 연구와 기도생활에 힘쓰는 한 작은  클럽을 조직하였다. 이 클럽은 “Holy Club” 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성경벌레」라고 불렀다.   나중에 “Methodists”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서 「감리교도」 직역하면 ‘규율주의자’즉 “짜여진 계획에 따라 생활해 나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신성회합」의 회합의 회원들은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원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꾸준한 노력과 거룩한 생활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공헌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단독 사역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3.죠지 휫필드 (Whitedfield) 1714-1770

●이 클럽에 장차 이 운동을 빛나게 할 한 인물이 들어왔는데 그가 화이트필드이다. 그는 존 보다 열 한 살이나 아래였으나 타고난 웅변술과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명 설교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설교는 소박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과 부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의 평화, 거기서 비롯되는 즐거운 생활과 봉사, 그것이 전부였다.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압도적인 감화를 받았다. 그의 설교는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더 많이 울려 퍼졌다. 미국의 교회는 교파를 떠나서 그의 음성을 듣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휫필드는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설교를 하다 미국으로 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거칠고 무지한 깅스우드의 광부들에게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교회 강단이 나를 몰아내고 있었고 나는 가련한 광부들이 무지로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200여명이 설교를 듣다가 나중에 만 여명 까지 모여들었다. 광부들 설교를 들은 후 갱 밖으로 나올 때 탄가루로 검어진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려 눈과 양 볼에 눈물자국이 허였게 드러났다.

●가장 큰 부흥은 스코틀랜드에 휠필드의 설교로 일어났다. 휫필드는 놀라운 재능과 겸손을 가졌었고, 또한 넓은 마음을 가졌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포용하였다. 그가 웨슬레와 다르다면 휫필드의 신학은 칼빈주의적인데 비해 웨슬레는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으므로 결국 이 두 사람은 갈라지고 만다. 웨슬리와 휘필드는 그 신조에 있어서 일찌기 서로 달랐는데 휘필드는 예정교리에 있어서 칼빈주의적 관점을 견지한 반면, 웨슬리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1741년 휘필드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그는 “보편구원론”을 공공연히 반박하면서 예정론을 설교했다. 영국에 있는 감리교 단체들은 웨슬리파였으나 웨일즈에 있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자였다. 그러나 이런한 견해차가 웨슬리와 휘필드의 개인적인 친분을 해치지는 못했으며, 보다 중요한 것은 죄인들의 회심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복음이 양쪽에서 모두 능력있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설교의 스타일 역시 두 인물이 전적으로 달랐지만 같은 진리를 선포했고,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휘필드의 설교는 웅장하고 정열에 넘쳤는데, 매우 극적이었으며, 때때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깊이 굶주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에 반해 웨슬리는 분명하고 논리적이었다. 그의 설교는 대부분이 강해식이었지만 거칠고 투박한 청중들을 사로 잡았다.

●1770년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화이트필드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이렇게 말하였다. “주 예수여 나는 피곤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역에 싫증이 난 것은 아닙니다. 만일 나의 갈 길을 아직 끝마치니 않았다면 한 번 더 밖에 나가 주님을 위하여 외치게 하옵소서. 그리고 와서 숨지게 하소서.” 그후 그는 밖으로 나가 2시간 설교를 하였는데,

●그 설교는 “좋다. 일을 하라. 행위(일)를 통하여 하늘나라에 가려는 자여, 그것은 모래로 새끼를 꼬아 그 줄을 타고 달에 가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내가 살아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얼마나 원했든가 ? 그러나 그 분과 함께 있기 워하여 죽는 것이다.”라고 설교 한 후 돌아와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하늘의 자유를 얻었다. 이렇게 하여 근대의 가장 위대한 전도자가 세상을 떠났다.



제 6-5 장. 감리교의 큰 별들 (2)

4. 웨슬레 형제의 회심

●웨슬레 형제는 선교사로 임명받아 1735년 미국의 조지아로 떠나게 되었다. 향해 도중에 니취만이 이끄는 26명의 모라비아 교인들이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에 크게 감화를 받아 스스로에게 그런 용기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사바나에 닿아서 쉬팡켄베르크를 만났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당황해서 “그 분이 세상의 구주임을 알고 있다.”고 대답한 일이 있었다. 이에 다시 “그러나 그 분이 당신을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소?”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미국에서 웨슬레 형제는 뼈가 휘도록 애를 썼으나 동생은 병 때문에 귀국하였고 형 역시 홉키라는 여인때문에 실의에 차 1738년 귀향을 하였다. 그후 런던에서 모라비아 교인인 뷜러(Peter Bohler)를 만나 완전 굴복의 신앙과 참 회심을 배울 수 있었다. 이들 형제에게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찾아 온 것은 동생은 1738년 5월 21일, 형은 5월 24일이었다.  웨슬리 형제는 런던 주변에서 기회 있는 대로 설교를 하였다. 그의 설교는 화이트 필드만큼의 박력은 없었으나 성실과 그 실제적 신앙에 대한 호소때문에 커다란 감화를 줄 수 있었다.

5. 감리교회의 성립과정
존 웨슬리는 1739년 브리스톨에 감리교 “회단”(Society)창설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12일에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처음에 웨슬리는 영국교회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래서 교회를 따라 섭립하지 않았으나 주교들이나 성직자들로부터 아주 냉혹하고 적대적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감리교는 점점 부흥하여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 1795년에 결국 성공회로 부터 독립하고 말았다.


6. 감리교의 특징
● 웨슬리는 “Society Tickets”란 것을 창안해 냈다. 이것은 성도들의 신앙의 진실성을 보증한다는 의미와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을 걸너내는 방안으로 고안된 제도였으나 오래 적용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실효를 보았다.

● “속”(Class)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도들은 12명 단위로 묶어 그 “속장”(Class-Leader)이 매주 다다 한 교인에게 1페니씩 갹출하여 교회 건축 때 진 빚을 갚고자 하였는데 후에 이것이 영적 발전에 도움이 된 “속”- 구역-제도가 되었다.  이 집단의 직원으로서 웨슬리는 평신도 설교자, 권사, 유사를 두었다.

● 존 웨슬레의 사역은 끝이 없었다. 그는 세계를 자기의  교구로 삼아 무려 40만 KM를 복음을 전하는 전도여행을 하였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강단을 맡겨주지 않았기에 수년 동안 그는 옥외에서  설교를 하였다. 그는 통상 40,000여회의 설교를 하였다. 그는 수많은 박해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반대자들을 이겨 나갔다.

● 신학은 알미니안의 입장에 서서 칼빈주의를 적대하였다. 예정론에서는 도덕이 마비된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지인 화이트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이에 서로 헤어지게 되었고 결국 웨슬리의 감리교에는 알미니안주의가 정통 신학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 존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런던에서 마지막까지 복음의 기사로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영국의 중류나 하류의 종교적 조건을 혁신시킨 공헌과 미국에 끼친 영향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 영국 국교회에 찬송가를 도입한 것이다. 종교개혁 시기부터 18세기 까지는 운문으로 번역한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이것은 청교도의 전통이며 칼빈으로 유래된 습관이었다. 그러나 아이작 와츠(Isaac Watts)는 시편위주의 찬송가는 신약의 부분이 결여되었다고 보완을 주장하며 수 많은 찬송가를 지었고 찰스 웨슬레 역시 많은 찬송가를 지어 현대적인  찬송가를 보급하였다.




제 6-6 장 19세기의 미국의 기독교

1. 19세기의 부흥
전쟁은 하나님의 교회에 좋은 결과를 가져 오지 않는다. 전쟁은 공중도덕을 훼손하며 주일을 무시하게 만든다. 미국의 독립전쟁도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미국 교회의 영적생활이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많이 쇠퇴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지 않고 현실의 유익을 추구하였다.  1782년 프린스턴 대학에 오직 두 사람만이 크리스챤임을 스스로 고백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780년 후반 힘프든 시드니 대학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난 부흥운동이 캔터키주로, 뉴잉글랜드로 연결되어 19세기 초에는 이런 각성운동이 계속되었다. 특히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는 1795년부터 1817년 세상 떠날 때 까지 Yale대 총장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단에서 증거하며 불신앙의 학생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고, 이 강의가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은 충격적이었다.  그가 지은 찬송가 「내 主의 나라와」는 19세기에 가장 사랑 받는 찬송가가 되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내 주의 교회는 천성과 같아서
                   눈동자같이 아끼사 늘 보호하시네.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 까지 늘 봉사합니다.”
2. 다양한 이단발생
● 1792년 스웨텐의 이단 임마누엘 스웨덴보그 (Emanuel Swedenborg)의 추종자들이 「새예루살렘 교회」를 세움. 삼위일체부인, 속죄, 복음의 전반적 메세지 부인.

● 몰몬교 발생 - 1820년 죠셉 스미스 (Joseph Smith)
● 안식교 - 1830년 윌리엄 밀러 (William Miller)라는 농부로부터 시작.
            1843년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멸망을 예언.
            그후 엘렌 화이트여사가 창시.
● 크리스챤 사이언스 (Christian Scientists)
● 여호와의 증인


3. 주일학교의 큰 부흥
주일학교는 지역 교회의 필수적인 하나의 기관이 됨.


4. 19세기 위대한 신학자와 전도자 배출
● 신학자 : 찰스 핫지 (Charles Hodge)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핫지(A.A.Hodge)가 조직신학의 기초를 세움.

● 전도자 : 드와이트 무디 (Dwight Moody)
            보스턴과 시카고에서 점원 출신. 중년부터 생키(Sankey)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여 대 부흥을 일으킴. Gospel Song 도입.


5. 세계각지로 선교
1890년 미국인구 62,622,000명중 57,000.000명이 그리스도인이었고, 복음 사역자는 111,000명이었으며 143개 교파와 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세기를 마감하면서 미국의 교회는 많은 일꾼들을 세계로 보내었다. 열심 있고 활동력 있는 남녀가 동원되었다. 부강해진 나라의 성도로서 세계적인 선교기관에 많은 액수의 돈을 지원하였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24:14)


제7장. 한국교회사


제 7-1 장. 초기의 선교

1. 초기의 선교

(1) 토마스 목사의 전도와 순교
① 1840년 영국 웨일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3년 목사되어 중국에 선교사로 옴.
② 상해에서 천주교도 金子平을 만나 조선의 사정을 듣고 전도결심.
③ 1865년 9월 중국인 어선을 타고 옹진방면 순회, 백령도에서 두 달 전도
④ 샤만호 내한 때 전도차 편승하여 목 잘림의 순교당함 (1866.9.2 27세)



(2) 로쓰목사의 고려문 전도
① 스코틀랜드의 목사로서 친구인 토마스목사의 순교지인 한국과 가까운
   우장에서 활동. 고구려 古都인 즙안현에서 전도.
② 돌아오는 길에 조선인이 많이 사는 고려문에서 전도.
③ 네 명의 청년 믿음 - 백홍준, 이성하, 이응찬, 김진기
④ 백홍준 - 최초로 세례를 받음(언더우드에게) 초대조사, 후일 장로.


(3) 최초의 교회 - 소래교회
① 서경조, 서상륜 형제가 우장에서 백홍준 통해 예수 믿은 후
② 의주에 와서 10명이 예배 드림.
③ 황해도 소래에 교회를 세움.


2.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

(1) 알렌의 내한
①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출생의 의사. 선교사로 중국에 옴.
② 1884년 상해에서 조선으로 옴.
③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근위대장 민영익의 중상을 3개월만에 완치시킴.
④ 국왕의 시의가 되고 참판벼슬을 받음.
⑤ 1885년 2월 광혜원 개설
⑥ 1901년 주한 미국 대사가 됨


(2)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장로교)와 아펜셀러(감리교)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에 도착함.

● 언더우드
1859년 영국 런던태생, 1884년 미국에서 신학졸업 후 1885년 인천에 옴.
알렌의 병원에서 병자구호. 1887년 새문안교회 설립. 1901년 경신학교세움.
Y.M.C.A를 통하여 고등교육 (연세대전신) 1916년 별세. 그의 아들, 손자에 걸쳐 계속하여 한국에서 선교하고 있음.

● 아펜셀러
1858년 미국 루터교 가정에서 출생. 1902년 목포에서 성경번역위원회 참석차 배 편으로 가다 사고로 소천. 딸이 이화대학, 배재학당 등 세우며 전도.



3. 교회의 부흥

(1) 선교의 견인차 - 네비어스 선교정책
네비어스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였는데, 한국에 초정되어 와서 그의 선교정책을 강의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선교의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1893년)

① 선교사 각자의 광범위한 순회전도
② 자립전도 - 한 사람을 전도하였으면 그 사람을 성경교사가 되게 한다
③ 자립운영 - 모든 신자들을 선교사를 의지하게 말고 교회의 운영과 기구조직을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감당케 하여 자립하는 교회가 되도록 한다
④ 자립전도 - 모든 교회건축시 조선인 그들 자신의 힘으로 건축하도록 한다
⑤ 체계적인 성경연구
⑥ 성경교훈에 따라 엄격한 생활적용과 권징
⑦ 성경번역 진행과 보급에 노력 (유료판매)

(2) 초기 전도의 삼대 방법
① 문서 전도
② 의료전도 - 광혜원, 세브란스병원, 나병원 등 수 십개의 교회세움
③ 교육전도 - 배재, 경신, 이화, 정신, 숭실, 계성 등 수 십개 학교세움


(3) 조선 독노회 창설
①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최초의 목사 7명 - 서경조, 길선주, 이기풍, 양전백,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제주도 선교사 파송




제 7-2 장.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1. 평양 부흥회

① 1907년  1월 6일 장대현교회에서 10일간 계속
② 낮에는 성경공부, 밤에는 부흥회
③ 1.14 방위량목사, 이길함목사 인도시 성령이 강하게 임함
   회개와 통성기도소리가 폭포수소리 같음. 새벽 2시까지 계속
④ 이 성령의 불길이 전국 각처로 퍼짐.


2. 한국인 부흥사의 활동

(1) 김익두 목사
황해도 신천출생. 청년시 불량배. 일자 무식군.
목사가 된후 전국 각지에 다니며 부흥회 인도. 신유로 부흥일으킴.
교향에서 새벽기도 드리다 공산군 총에 맞아 순교.


(2) 길선주 목사
① 1869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
② 29세 때 예수믿고 1901년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됨. 1907년 목사
③ 1927년 순회전도로 나섬.
④ 구약 300독, 신약 1,000독,  계시록 10,000 讀을 한 성경박사
   신학은 보수적, 계시록 강해는 탁월함.
⑤ 40년 목회생활 중 설교 10,070회, 설교들은 사람 약 500만명
   60여개의 교회를 세움.


3. 불건전한 신비주의

(1)황국주
황해도 출신으로 백일기도를 통하여 특별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함. 자신의 목은 잘리우고 예수의 목이 붙었으며 머리도 피도 마음도 다 예수化 되었기에 자기를 예수라고 하였다. 소문듣고 예수의 化身을 볼려고 수많은 인파가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피가름실시, 남여혼숙을 하였다.


(2)이용도
① 1901년 황해도 금천군 출생. 몸은 허약하였으나 성격은 다정다감함.
② 삼일운동에 가담. 1933년 33세 때 폐병으로 세상을 떠남.
③ 신앙은 온 몸을 바쳐 주님위해 헌신한 사람임. 주님께 미친 사람이라하여
   “聖狂”이라는 는 별명을 얻음.
④ 기도를 하면 침식을 전폐하고 몇 날이 가는지도 모르고 기도함.
⑤ 설교는 2-6시간 정도하며 격식에 매이지 않음.
   설교의 내용은 사랑, 위로도 있으나 부정, 불의, 미지근한 신앙,
   세속화된 교역자들에게는 맹렬히 공격함.

⑥ 잘못
그가 예수를 사랑하고 온 몸 던져 헌신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지만 그 자신을 고난당한 예수님과 동일시 한 것이라든지, 예수와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혈연적 결연(피가름)을 한다고 믿은 것 등은 잘못된 것이었다.

⑦ 1933년 장로교에서 이단으로 단죄함.


제 6-3장. 한국교회의 수난


1.신사참배(神社參拜)

(1)신사참배 가결
① 일본은 신도(神道)를 통하여 국민정신 통일과 군력증진을 꾀함.
②  1계명에 위배되기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반대함.
③  1937년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 당함. 선교사들이 쫒겨가고,
    1941년 선교사 42명이 투옥됨.
④ 1938년 조선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는 죄가 아님을 결의
   회장 - 홍택기 목사   부회장 - 김길창 목사
⑤ 방위량, 한부선 선교사 발언못하고 축출당함.
⑥ 교회 지도자 70여명 구속. 20여명이 6-7년의 감옥생활 후 해방으로 출옥
   이들을 출옥성도라 한다. -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기선, 이인재목사 등


(2)신사참배에 반대한 지도자들

●주기철 목사
1897년 경남 창원출생. 1926년 평양신학교 졸업.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평양산정현교회 시무. 목회는 설교중심의 목회, 잘못이 있으면 가차없이 책망하였으며 불의를 보고 못참는 성격. 1938년 구속 7년 옥고후 평양감옥에서 순교.

●최봉석(최권능) 목사
1869년 평양출생. 1913년 평양신학교 5회 졸업.  밤에는 기도 낮에는 “예수천당”을 외치며 전도. 전도않는 목사는 벙어리 목사라고 함. 1939년  신사참배거부로 투옥. 6년 동안 감옥생활. 1944. 3. 1 - 4. 10까지 40일 금식기도후 병원에서 별세. 75세.

●손양원 목사
1902년 경남 함안 출생. 1938년 평양신학교 졸업. 나환자교회인 여수 애양원교회 시무. 언행일치의 목사. 1940년 구속후 5년간 옥고를 치루고 해방으로 석방. 여순반란 사건 때 두 아들이 순교. 1950. 9. 28 공산군에서 순교당함.

●박관준 장로
1875년 평북 영변에서 출생. 30세에 예수를 믿고 의학공부하여 의사가 되어 구제와 전도에 힘씀. 총독에게 신사참배의 부당성 경고. 일본 국회에 진정서를 투척. 1941년 평양 감옥에 구속. 1945년 1월 1일 부터 70일간 금식 기도후 별세.

●주남선 목사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부름. 1888년 경남 거창출생. 1919년 거창교회 장로. 1930년 평양신학교 졸업. 거창읍 교회에서 목사로 22년간 시무. 신사참배로 7년간 옥고를 치룸. 1946년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1951년 64세로 별세.

●한상동 목사
부산태생. 1937년 평양신학교 졸업. 초량교회, 마산문창교회, 평양산정현 교회, 부산삼일교회 시무. 신사참배반대로 1940년 구속. 해방후 출옥. 주님선 목사와 고려신학교(現 고신대학)설립. 고려파 설립.


♠ 참고 : 신도(神道)
일본국민과 황족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직계자손이며 특히 천황은 현인신(顯人神)이어서 일본 천황은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 신사(神社)를 세우고 온 국민으로 하여금 경배를 강요하였다. 역대 천황과 왕후의 혼령과 무사들의 영혼을 섬기도록 함.



2. 해방후 북한 교회

① 38선 이북에 소련과 북한 공산정부는 종교말살정책을 펼침.
   헌법에 「종교자유」가 있음과 동시에 “반대할 자유”도 있다고 함.
② 1946. 11. 3 총선을 주일에 실시.
③ 김일성 외숙 강양욱 목사를 통하여 기독교연맹 결성 (어용단체)
④ 목사, 장로에게 2-3명의 노동당원을 배치하여 위협과 설득.
⑤ 6.25 직전 예비검속과 학살.
⑥ 9.28 수복시 대량학살.







제 6-4 장. 장로교의 분리

1. 고려파의 분리

(1)분리
①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룬 옥중성도들이 교회의 정화(淨化)를 건의
   신사참배에 가담한 목사, 장로는 2개월간 자숙후 시무투표를 통하여 진퇴
   결정토록.
② 이 제안이 노회와 총회에서거부됨.
③ 1946. 9. 20 고려신학교 설립(現 고신대학).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 등 주축. 교장 - 박형룡 박사
④ 1948년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에 학생추천을 않을 것을 결의.
   한상동 목사 노회 탈퇴선언. 68개 교회가 동조. 노회가 사과.
⑤ 1948년 경남노회가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
   1949년 35차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거부.
   고려신학교측 인사 총회참석못하게 함.
⑥ 이에 고려신학교 측 옥중성도를 중심으로 총노회(경남법통노회)조직.
   고려파 출발.-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인재, 오종덕 목사등  주축.


♠ 참고 : 경남법통노회의 선포문

1.선포문
① 우리는 총회를 사랑한다.
   우리는 총회를 향하여 충고, 경고, 항의로 반성과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는 총회가 싫다든지 미워서가 아니라 장중의 보옥과 같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② 총회의 강경한 태도
   반성과 시정요구에 격분과 증오감으로 반답하고, 주종의 순서를 모르고
   옥석의 분간을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이교파적이라고 하여 분리단안을
   내림.

③ 여호와의 지시를 기다려 행동함.
   우리는 앞날의 서광을 전망하고 은인자중 하였다.
   신학사상과 신학노선에 따라 교회 행정이 갈라지게 되었음.

2. 조직취지
   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름으
   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를 계승키 위하여 총노회를 조직한다.


3. 조직
① 총회장 - 이약신 목사
② 부회장 - 한상동 목사
③ 서 기  - 홍순학 목사
④ 회록서기 - 오병세


2. 기독교 장로회의 분리
① 자유주의 신학의 기수인 김재준목사가 조선신학교 설립(現 한신대학)하여
   성경유오설과 신신학을 가르침. 축자영감설부인, 모세오경저작 부인 등
② 이에 1952년 4월 37회 총회에서 김재준교수를 면직시킴.
③ 여기에 경기노회는 총회에 시정을 요구
④ 1953년 6월 10일 한신대 강당에서 분리 총회


3. 합동과 통합의 분리

(1)원인
① W.C.C.문제
   박형룡박사는 W.C.C가 용공(容共)이며 신신학(新神學)이며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비난하고 탈퇴를 주장.
② 경기노회의 총대 문제

(2)분리
① 44회 총회가 1959. 9. 24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림.
   4일간 공전(空轉)하며 개회도 못하고 깨짐.
② 연동총회 (統合) 9. 29 연동에서 속개. W.C.C와 관계 현상유지
③ 승동총회 (合同) W.C.C 탈퇴. 에큐메니칼 반대



제 6-5 장. 신흥종교의 난립


1.원인
사회적 혼란과 전몰장병유족, 전쟁후 미망인, 고아, 이산가족, 실업자 증가, 경제적 불안, 정치적 혼란 가중에다 교회 분열 까지 겹쳐서 신자들에게 ‘말세가 되었으니 잘 믿어야 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교회가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으니 금욕생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2. 신흥종교의 주장
① 현실교회 비판 - 기성교회는 썩었고 타락했기에 은혜받을 수 없다
② 독선주의 - 전도관은 “신앙촌에 입주하는 144,000명만 구원받을 수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다투어 입주함.
③ 교주숭배 - 통일교의 문선명은 재림주로 무죄성을 주장.
              전도관의 박태선은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 영모(靈母)로 불리움.
④ 신비체험을 지나치게 주장
⑤ 샤마니즘 - 신흥종교는 샤마니즘을 핵으로 한 온갖 민간신앙과 혼합된 교리를
              가지고 있다.
⑥ 재림사상 - 재림이 임박했다고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
⑦ 선민사상 - 한국에 재림예수가 온다. 한국은 새이스라엘이다
⑧ 기 타


3. 신흥종교의 종류요약

(1)용문산 기도원
① 설립자 : 나운몽
   1914년 평북출생, 일본 와세다대 전문부 중퇴. 1947년 용문산에 와 「애향숙」
  을 재건. 6.25 당시 신비체험을 하였다고 함. 기도원 설립후 전국 각지에 집회

② 주장 - “공자, 석가도 神이 보내신 동방의 선지자이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
          사람은 유교나 불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받았다. 진리는 形에 있지
          않고 質에 있으니 진리이면 유교나 불교나 기독교나 하나가 된다.”
③기도단 조직 - 1960년. 한 사람이 두 사람 위해 기도하고 그 두 사람이
       또 각각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제도, 기하급수적으로 확대가 됨.
④ 교회는 이단으로 정죄. 41회 장로회 총회시 박태선, 나운몽, 노광공 등

(2)통일교
① 창설자 : 문선명
② 1920년 평북 정주출생, 와세다대학 전기부 중퇴. 1946년 신비주의 운동을 함.
   1949년 간음혐의로 수감. 3번 결혼.
③ 1954년 유효원의 도움으로 통일교 창설
④ 기본교리 - 원리강론
   포교대상 - 기성 교회에 불만가진 지식층 젊은 사람들


(3)전도관
① 창설자 : 박태선
② 1915년 평북 영변출생. 동경공업학교졸업. 남대문교회 장로 역임.
③ 부흥운동 - 1955. 3. 26 부터 10일간 남산 천막집회시 헌금으로 금반지 만석
              되가 나옴. 헌금은 부지기수. 목사 100여명이 안수기도 받음.
              전국을 누비며 대중집회를 가짐.
④ 칼빈의 예정설 부인, 살인자라고 욕함.
   기성교회는 마귀의 전당이니 구원이 없다고 함.
⑤ 천년왕국으로 신앙촌 세움
   제 1 신앙촌 - 1957년 소사 (100만평 규모)
   제 2 신앙촌 - 1962년 덕소 (50만평 규모)
   제 3 신앙촌 - 경남 기장 (100만평 규모)
⑥ 주장 - 자신이 감람나무, 동방의인, 생명수, 피가름 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