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 아주사거리부흥운동

2015.01.0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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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아주사거리부흥운동

  선지자선교회

(서문)

 

1906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The Azusa Steet Revival)에서 시작된 소위 아주사거리 부흥이 있었다. 이 부흥운동은 성령 충만으로 말미암은 참된 교회부흥인가? 아니다. 아래의 그 역사자료를 보면 아주사 거리 부흥은 오늘의 신사도 운동과 흡사하다. 그러므로 아주사거리 부흥은 이단운동을 하는 신()사도운동의 모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쓴 세계 부흥운동사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본문)

 

아주사가 부흥의 인물은 월리엄 조셉 시무어이다. 그는 1870년 루지아나의 세터빌에서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천주교와 침례교 전통의 영향 속에 성장하였고, 그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회심해서 감리교에 합류했고, 몇 년 후 그는 오하이오 신시내티에서 다른 성결단체와 교류하였다. 그는 심한 천연두를 앓고 한쪽 눈을 실명하고 얼굴이 기형이 되었다.

 

1903년 하나님의 교회 목사로 안수 받은 시무어는 2년 후 1905년 친척들을 찾아서 텍사스 휴스톤을 여행했다. 그곳에서 그는 유명한 노예해방론자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 1918-1895)의 조카요 전 노예였던 루시 화로우(Lucy F, Farrow, 1851-)가 목회하는 흑인 성결교회를 출석했다. 화로우가 전도자 파함을 돕기 위해 캐사스 시로 떠난 후 시무어는 그 대신 휴스턴 성결교회 임시 목사가 되었다. 1905년 늦은 가을 화로우는 휴스톤으로 돌아와 방언을 수반한 성령세례를 경험했다고 간증했다.

 

화로우가 돌아온 후 시무어는 자신의 목양지로 옮기고 더욱 더 성령세례를 간절히 사모했다. 자연히 시무어는 파함이 인도하는 집회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파함이 캔사스 브라이언 홀(Bryan Hall)에서 예배를 드리고 확신, 회개, 성화, 신유, 성령의 다른 역사, 예언, 그리고 계시록을 가르칠 때에 시무어는 파함의 예배와 훈련반에 신실하게 참석했다. 그러나 시무어는 당시 인종차별법 때문에 파함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을 들으면서도 떨어져 있어야 했다. 심지어 성령세례를 갈망하면서도 성령세례를 사모하는 모임에 다른 이들과 함께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무어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배우기를 갈망했다. 훗날 파함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파함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을 하나하나 다 암기 했다.

 

시무어를 로스엔젤레스에 소개한 사람은 줄리아 허친스(Julia Hutchins)이 목회하는 LA 작은 성결교회에 출석하는 닐리 테리(Neely Terry) 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1905년 텍사스 휴스턴에 여행을 왔다 시무어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시무어의 성품과 설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당시 시무어는 방언이 수반된 성령세례를 체험하지 못했지만 그것이 성경적이며, 성령의 은사 방언을 간절히 사모하라고 교우들에게 도전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그녀가 출석하는 교회에 시무어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그들이 그를 초청해 시무어의 로스엔젤레스 방문이 성사되었다.

 

19062월 로스엔젤레스에 도착한 시무어는 나세렛 선교회를 창설한 쥴리아 헛친스가 목회하는 성결교회에서 중생, 성화, 신유, 그리고 방언이 수반되는 성령세례를 설교했다. 특별히 사도행전 24절에 근거허여 방언이 성령세례의 명확하고 가시적인 증거라고 가르쳤다.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성결교 교인들은 이 같은 시무어의 가르침에 몹시 당황했다. 허친스는 시무어의 가르침을 거부했고 그가 그곳에서 설교할 수 없도록 교회 문을 잠가버렸다. 교회 당회도 시무어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하지만 시무어는 박해 속에서도 계속해서 같은 메시지를 외쳤다. 교회에서 쫓겨난 시무어는 흑인미국 하인과 수위와 더불어 가정집 거실에서 가정기도회를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적으로 로스엔젤레스에 부으시는 비전을 가지고 214번지 노스 보니 브래 스트리트(Richard and Ruth Asdery) 가정에 계속 함께 모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을 더 강하게 체험하기를 원하는 심령이 갈급한 이들은 여러 시간을 소비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곧 백인 가정을 포함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이를 알고 참석하기 시작했다.

 

북 보니 브래가 한 작은 거실과 현관에서 시작한 기도회는 190649일 오순절 성령을 경험하면서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시무어가 사도행전 24절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후 참석자들은 찬양하고 기도하고 간증을 했다. 이 날 에드워드 리(Edward Lee)가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성령이 참석한 이들의 심령을 감동시켜주셔서 다른 여섯 명도 그날 밤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월리엄 시무어와 후에 겨론한 제니 무어(Jennie Moore)도 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녀는 성령세례를 받은 로스엔젤레스의 첫 번째 여성이었다. 그녀는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고 전에 전혀 피아노를 친 적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권능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며칠 후 412일 월리엄 시무어는 철야기도를 드리고 새벽 4시에 드디어 성령세례를 받았다. 한 증언자 엠마 코튼(Emma Cotton, 1877-1952)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3일 밤낮을 부르짖었다. 사람들은 사방에서 왔다.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그들은 권능으로 꼬꾸라졌고, 전 도시가 진동했다. 그들은 그 집의 기초가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부르짖었지만 아무도 해를 입지는 않았다. 3일 동안 많은 사람들,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지 보러 온 사람들조차 성령을 받았다.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고, 죄인들이 집회 현장에 들어오면서 구원을 받았다.

 

19069월 사도적 신앙(The Apostolic Faith) 첫 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오순절을 위해 기도했고, 그리고 실제로 오순절이 도래했다. 부활절 기간 사람들은 사도행전적 오순절을 간절히 사모하며 삼일 동안 밤낮으로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전 도시가 요동할 정도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무리들 가운데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갈구했고 실제로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그들 가운데 임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젊은이든 또 장년이든 늙은이든 사람들은 40×60 피트의 버려진 창고 안에 들어오면 종종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을 체험했다.

하나님은 그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응답하셨다. 등받이 없는 두 개의 나무상자로 만든 초라한 강단 의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창고형 교회당, 자신들의 영적권위를 앞세우려는 화려한 광고판 하나없는 평범한 곳에서 아주사 부흥은 일어났고, 계속되었고, 놀랍게 확산되었다. 성령은 구유에서 나신 그 옛날의 천한 방식으로 낮고 천한 이들 가운데 임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아주사거리(The Azusa Steet Revival)은 시작되었다.

 

무명의 한 흑인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시작된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로스엔젤레스 아주사가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다. “죄 용서, 성화, 성령세례, 그리고 신유를 갈구하는 구도자들을 위해 강단이 열리자마자 곧 사람들이 일어나 단으로 몰려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히 선포되었고, 성령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여 사람들이 고꾸라졌다.

 

한 목격자의 증언대로 전 도시가 요동했다.

 

아주사 부흥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오순절운동은 오늘날처럼 수많은 나라로 확산되어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발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뉴잉글랜드가 1,2차 대각성운동의 무대였고, 시카코가 무디 부흥운동의 무대였다면, 캘리포니아는 아주사가 부흥의 진원지였다. 주께서 다민족이 모여사는 캘리포니아에 성령을 놀랍게 부으신 것이다.

 

로스엔젤레스의 성령의 부으심 이후 시무어거 인도하는 기도회에 대한 관심에 급증했다. 예배처소인 노스 보니 브래가 애즈베리 집에 너므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정원에서 모임을 가져야 했고, 다시 312번지 아주사가에 있는 한 때 감리교회로 사용하던 창고로 옮겨야 할만큼 모임의 규모가 커졌다. 이 건물은 본래 아프리카 미국인 감리교회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건물이 워낙 낙후 되어 수리가 힘들어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건물을 확보하고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청소했다.

 

며칠 후 로스엔젤레스 신문이 아주사가 선교회에서 수행하는 부흥회를 알고 이를 보도하면서 아주사가 부흥은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 알려졌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아주사가 부흥운동 소식을 접했고 모임에 참석하기를 원했다. 남녀, 어린이, 흑인과 백인, 히스페닉, 아시아인,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 모두가 함께 와서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회의와 영적 굶주림 속에 로스엔젤레스에 모여들었다. 19069월 로스엔젤레스 한 지역신문 기자는 아주사가 선교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아주사가 선교회 회중은 인종들이 수치스럽게 혼합해 있다. 그들은 온종일 밤이 맞도록 부르짖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달리고 뛰고 흔들고 목청껏 소리치고 빙빙 돌고, 마루바닥에 쓰러지고 바닥을 차고 굴렀다. 그들 중 몇 사람은 의식을 잃고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여러 시간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들 사람들은 미쳤거나 정신적으로 실성하거나 주문에 묶여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나무로 된 우유통 사이에서 자신의 머리를 무릎 속에 집어넣고 상당한 시간을 기도하며 보내는 외눈의 무식한 흑인을 설교자로 모시고 있었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종종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소리가 들렸으며, 그는 회개를 촉구하는 일을 앞에서도 죽 해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반복해서 같은 찬송 성령이 오셨네를 불렀다.

 

아주사가 부흥은 객관적인 말씀보다 신유와 방언 등 특정 은사가 더 중요시 되면서 오순절운동은 체험을 강조하는 20세기 새로운 은사운동에 초점을 둔 부흥운동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말씀을 통한 성령의 강력한 특징으로 하는 이전의 부흥이 은사체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부흥으로 변화를 맞기 시작했다. 심지어 오순절 운동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 특별계시 차원의 직접계시가 지금도 현존한다고 믿고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해서 은사와 체험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부흥이 역사에 등장했다. 맥도와 리드는 비교적 자세하게 오순절부흥운동의 공과를 평가했다.

 

오순절운동은 국제적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확산되었다. 오순절운동은 더 큰 각성운동과 과거 부흥운동과 더불어 몇 가지 특징을 공유했다. 그 운동은 초교파적으로 대중들에게 다가갔으며, 복음전도와 선교를 강조했다. 몇 가지 다른 운동들처럼 오순절운동은 자주 감정적인 극단으로 치우쳤으며 방언과 신유를 강조했다.

 

20세게를 통해 오순절운동은 복음주의 교회로 하여금 성령의 역할을 재점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더 나아가 오순절운동은 급속한 세계적인 확산을 통해 선교적 열정의 모델을 현시했다. 그러면서도 또한 오순절운동은 성령의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신앙운동의 본보기였다. 방언현상과 신유에 대한 강조는 20세기 기독교에서 논쟁과 분열의 원천이었다.

 

오순절운동은 매우 자주 신학을 무시할 정도로 경험을 강조했다. 오순절 부흥운동은 영적각성의 역동적인 특징을 예시했다. 역사를 통해 참된 부흥운동은 항상 어느 정도의 현상을 동반해 왔다. 이 그룹에서 위험은 부흥을 너무 좁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영이 그가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실 자유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들의 예배, 정치, 교리적 틀과 일치한다면(conforms) 부흥은 환영이다. 그리하여 이들 신실한 신자들은 너무 야생불(widfire)을 두려워 한 나머지 부흥의 진짜 불을 놓칠지 모른다는 점이다.

 

오순절운동의 또 다른 측면은 체험에 대한 지나친 강조이다. 얼마나 쉽게 인간의 본성이 우리를 이 측면으로 인도하는가! 경건주의와 2차대각성운동의 켐프집회는 일례들이다. 이들은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운동이었지만 종종 그들의 체험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잃게 했다. 오순절부흥운동은 이같은 위험의 또 다른 실례이다. 오순절 그리고 후에 은사주의운동에 접한 수많은 사람들이 신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듣기로는 이들 운동이 너무 자주 성경계시보다 현상을 강조했다. 현상은 분명 무시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표준적이라기보다는 이따금씩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따금씩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적인 기록에 의해 측정되어져야 한다. 이것을 나 개인의 과거 경험에 비추오 개인적으로 적용해 보자. 비록 들을 수 있게는 아니지만 내 생애에서 주님이 내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던 때가 있었다. 나는 또한 단지 주권적인 하나님의 비상하신 역사라고 기술할 수 있는 일들을 주님이 행하시는 것을 이따금씩 목도하여 왔다. 아직도 나는 이따금씩 이러한 것을 즐기고 있지만 나는 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매일 정규적으로 계속해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따금씩(occasionnally) 말씀하시지만 그는 표준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normally and consistently)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오순절부흥운동은 체험주의로 채색된 부흥 노선에 있는 하나님의 운동의 또 다른 사례이다. 허멜(Hummel)의 멘트는 적절하고 결론적인 유추를 제공해준다. 교회사에서 나타난 다른 강력한 운동들처럼 은사주의 갱신(그리고 전반적인 오순절)은 특유의 위험들을 지니고 있다. 급류 물줄기는 시골지역을 적셔줄 뿐만 아니라 또한 강둑에 파편더미들을 쓸어다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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