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식 목사의 기독교 회복글에 대한 논평

  선지자선교회

오늘 윤성식 목사라는 분이 쓴 글을 보았다. 제목은 기독교 회복이다. 이 분을 소개한 책에서 약력을 보면 연세대학교 화학과 졸업> 교사> 미주고신 Evangelia University에서 M-Div 졸업> 현재 한국의 말씀의 교회와 미국 플로리다주 새빛장로교회 담임이다.

 

윤성식 목사가 쓴 기독교 회복을 보면 그 내용이 성경적 보다는 자의적이다. 성경 깨달음에서 자의적 해석을 말하자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이다. 위트니스 리의 글들을 보면 얼마나 자의적으로 말하는지 그 궤계가 깊다. 그래서 성경 진리를 명확히 알지 못하면 도리어 그 궤계를 오해하여 성경 깨달음이 깊은 것으로 여긴다.

 

성경은 성경이 해석하고 있다. 그렇기에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성경을 해석하면 성경적 해석이 되지만, 성경 말씀에 없는 말을 하면 그 전부는 자의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글을 보면 성경을 깊이 깨닫고 말하는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로는 성경 진리를 벗어난 인간 생각의 발상이다. 윤성식 목사가 쓴 기독교 회복을 보면 마치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글을 보는 듯 하여 그의 제자인가 싶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윤성식 목사가 쓴 기독교 회복에 대하여 1차 읽으면서 자의적 해석한 부분에 대해 밑줄을 친다. 그리고 언제 시간이 되면 그 부분을 성경적으로 반증할 것이다.

 

하나 첨부 하는 것은 밑줄을 치되 일반 부분은 제외하고 교리 부분에서 특히 문제가 보이는 부분에 밑줄을 친다는 것이다.

 

2017. 6. 30

선지자문서선교회 김반석

 

다음은 윤성식 목사의 글 기독교 회복이다.

 

 

- 기독교 회복 -

 

1. 자신의 회복

 

1. 나여도 괜찮다. I am just fine as who I am.

 

사람의 마음도 몸처럼 흙으로 지어져서 몸에 상처가 나듯이 마음에도 상처가 남습니다. 상처가 있으면 조금 아파할 것도 더 많이 아파합니다. 이것을 그대로 둔 채 용서만을 요구하는 것은 불구자에게 왜 빨리 뛰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회복된 사람은 용서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아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받아야 할 상대 중에 자기 자신도 포함됩니다. 자신을 가장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는 이가 바로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2. 완벽에의 충동 An urge to perfection

 

하나님은 택하신 자녀에게 주의 일을 하라고 은사를 주시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장점과, 함께 살아가라고 단점도 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다움인데 인생은 변하여 단점을 못견뎌하고 모든 면이 장점이 되기를 목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못 미치는 것은 다 정죄하고 있습니다. 장점은 오히려 무기가 되어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이 되고 단점은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스스로 만들어낸 견고한 벽 안에 갇혀 외로워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섬들아 내 앞에 잠잠하라. 민족들아 힘을 새롭게 하라 가까이 나아오라 그리하고 말하라 우리가 가까이 하여 서로 변론하자 이사야 41:1

 

3. 눈높이에 계신 하나님 God who is in the eye level

 

하나님은 우리의 눈높이에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높고 높은 곳에 계셔서 우리는 다가갈 수도 없는 하나님은 세상의 철학이 만들어낸 가짜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아시되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우리가 먼지로 되어 있음을 기억하사 허물로 우리를 책망하지도, 죄과를 따라 정죄하지도 않으십니다. 내가 지금 내 자신이어도 괜찮다고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0,14

 

* 성경 여기저기에 있는 성구들을 한 문장으로 연결시키는 행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경 본래의 성구는 각각 다음과 같다.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03:14)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4. 오늘을 사는 삶 Life to live today

 

과거의 자랑과 상처는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내일의 불안도 그러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입니다. 오늘에 있는 나 자신이 참 자신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와 연합한 자신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사람은 과거에 의해 현재의 자신을 정의하거나 미래에 이루어질 모습으로 자신을 삼기도 하지만 주 안에 있는 이들은 주와 연합한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3:13

 

5. 나를 부인하라.

 

자신을 위하고 자신을 위주로 하는 것이 악의 근본이라고 알고 있기에 자아는 온전히 부인해야 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연합하는 것도 자신이고 주 안에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었을 때 역시 주 안에 충만해진 나 자신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시고 각 사람마다 자신다움을 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회복된 자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대상입니다. 나 아닌 그 어떤 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잠언 8:31

 

2. 하나님의 회복

 

6. 죄 있는 곳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만일 하나님께서 죄 있는 곳에 함께 하실 수 없다면 세상에 하나님 계실 곳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기에 죄 있는 자들에게도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와 하나 되신 것이 아니라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에게 오시고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본질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시지 높은 보좌를 버리고 낮게 오신 희생의 모습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7. 창조의 목적

 

외로운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상대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력이 많으시더라도 외로워 상대를 원하신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면 창조물과 인생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집착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영광이라 하더라도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야 하는 식의 관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지으신 것은 스스로 충만하신 것처럼 지으신 창조물들도 충만케 하려 하심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13

 

8. 삼위일체의 충만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고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삼위의 다양성은 서로 교통하시며 조화를 이루시기에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면서 충만하십니다. 작정하심과 창조, 역사를 통한 섭리와 구속, 그리고 충만함에 이르게 하시는 모든 과정에 삼위일체로서 함께 역사하십니다. 존재하심과 작정, 창조에서만 그러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오셨을 때와 죽으심, 부활과 오늘 우리에게 연합하심 역시 부활하신 주님만이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4:23

 

9.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더러운 것에서 멀리 떠나 계시는 거룩하심이 아니라 오히려 더러움을 더럽다 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심으로 거룩하심을 나타내십니다. 시내 산이 거룩하여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 하시매 먼지까지도 다 거룩하여진 것처럼 거룩함은 특별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고 인정하여 받아들일 때 얻어집니다. 행위는 그 반영이고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10

 

10. 삼위일체의 역사하심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분이시시고 모든 능력과 권위에 동등하시지만 삼위의 하시는 사역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부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관하사 섭리하시고 여기에는 세상의 권위자들도 그 주권 아래서 오르고 내림을 믿습니다. 성자예수님은 만물 안에 계시면서 만물을 그 본래대로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시고 성령하나님은 연합한 자의 영이 영혼과 육체의 구원을 이루도록 지혜의 흐름으로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에베소서 1:23

 

3. 에덴의 회복

 

11. 원죄는 과연 아담의 잘못인가

 

세 살 난 아이에게 집을 맡기고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부모가 집에 도둑 든 것을 발견하고 아이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이는 정신 나간 부모일 것입니다. 아직 악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 같은 아담과 하와에게 원죄의 책임을 물어 에덴에서 추방하고 이로써 이후 온 인류에게까지 사망이 왕 노릇하도록 하였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을 정신 나간 부모같이 만드는 이론입니다.

 

1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러므로 인생의 영의 죽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자유로 인한 결과이지 현실 세계에서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뱀과의 대화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서 먹고 영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영이 죽은 결과가 아담과 하와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2장과 3장은 이 두 상태를 비교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지혜의 회복

 

13. 자유

 

하나님은 그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니 여기에는 자유를 부여하셔야 했고 그 자유에는 하나님과의 분리되는 것까지 허용한 자유였기에 이미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인생은 그 영이 죽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죽은 영들에게로 가셔서도 죽지 아니하고 오히려 저들을 살려주는 영으로서 계시기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영의 소생과 구원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14. 지혜

 

창세기의 뱀은 간교하다고 표현되지만 주께서 말씀하신 뱀 같이 지혜롭다.”의 표현과 같은 단어입니다. 상황을 잘 판단하여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도 한 가지였고 인생의 삶에 유용한 한 부분으로 지어졌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입니다. 본디 이성과 믿음으로 온전한 지혜를 얻게 하신 것인데 영이 죽은 인생은 이성이 주관하는 인식의 방법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태복음 10:16

 

15. 타락

 

타락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영이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흔히 사람은 잘 안 바뀐다고 하는 것은 행위나 의지, 기분에 의해 그 사람에게 각인된 지식의 체계, 즉 개념이나 이미지가 변동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격은 여러 층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외부가 변하지 그 반대의 흐름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격의 가장 내면의 영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주관되고 나머지 인격의 부분은 영의 움직임을 따라 영향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린도후서 4:16

 

16. 권력의 발생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영이 죽은 인격은 죽은 영의 두려움을 피하려는 요구로 세 가지의 행태를 갖게 됩니다. 먼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하여 수치를 가립니다. 이는 영속할 것으로 생각되는 소유를 자신으로 여기게 되고 다음 나무 뒤에 숨습니다. 이는 숫자로 권력을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습니다. 이는 각자 자신마다의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의 법을 만들고 서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17. 악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선이시니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이 존재합니다. 분명 하나님은 악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루시퍼는 성경번역의 오류이고 사단은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천사에게는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를 허락지 않으셨기에 그들이 타락한 것도 아닙니다. 악은 인생의 영이 죽고 모든 것이 변질되어 제자리를 떠나고 지나쳐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복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주 안에 있는 자신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18. 무저갱

 

사단과 마귀가 들어가는 무저갱은 밑이 없는 구덩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공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어떤 다른 차원을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래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 인생의 변질을 통하여 발생하고 권력을 얻은 것이니 인생이 본래대로 회복되면 그 권력의 원천 역시 소멸될 것이고 사단 혹은 마귀라는 존재도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러한 회복에 의한 소멸성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5. 예수님의 회복

 

19. 약속으로의 십자가

 

약속은 실상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모든 짐승의 제사로 약속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새로운 약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구약의 제사로부터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이나 고통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이 인생에게 주어지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도 역시 약속이니 실상이 남아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약속은 주님의 죽으심까지로 완결되어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20. 영의 소생

 

영은 영으로라야 살아납니다. 인생의 죽은 영은 주께서 육체로는 무덤에 계실 때 영으로 옥에 갇힌 영들에게 전파하심으로 소생하였습니다. 역사 세계에서는 2000년 전 죽으심과 부활 사이의 시기였지만 영원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창세전과 2000년 전이 다르지 아니하고 마치 영원의 미래와도 동일한 세계입니다. 이후 우리 영은 주의 영과 연합하여 살려주는 영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21. 영혼의 구원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주 안에 있는 나 자신, 즉 영원의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그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무한한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이 땅에서도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 할 성취된 구원을 받아 믿음으로 화답합니다.

 

22. 몸의 대속

 

몸은 구원의 풍성함을 드러내는 가장 유용한 기관인데 영이 죽은 이유로 변질되어 마치 상전처럼 섬기고 실체처럼 인정되는 형편입니다. 예수 죽으심으로 보이신 바처럼 주와의 연합과 회복을 위하여 죽고자 하면 몸은 제 자리로 돌아가 본래와 같이 구원의 풍성함을 나타낼 기관으로 역할하게 됩니다. 죽음 후에도 영화된 영혼은 영원의 세계에 존재하고 신령한 몸도 역시 소멸되지 아니합니다.

 

23. 희생인가 은혜인가

 

십자가를 희생으로 보면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가 되지만 주와의 연합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인생에게 임하게 될 것을 보이는 예표로 보면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가 됩니다. 예수께서 사람되신 것은 높은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본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속성 때문입니다. 이는 사랑이시기 때문이지 희생하신 것은 아닙니다. 희생은 그 근본이 자의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의 표현입니다.

 

24. 승천

 

예수께서는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승천은 공간의 이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보좌가 놓인 위치도 역시 장소가 아닙니다. 승천을 공간의 이동이라고 이해하면 또 다시 공간을 이동하여 오시기를 기다려야 할 터이나 이제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으로서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전권을 가지신 것으로 이해하면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심이 이미 성취된 것을 알게 됩니다.

 

6. 성령의 회복

 

25. 어린양의 보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오른편과 왼편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놓인 어린양의 보좌는 공간적 위치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전권을 부여받으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본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곧 어린양의 보좌가 놓인 곳은 택하신 자들의 인격의 가장 깊은 내면 즉 영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거기로서 하나님의 모든 능력으로 인생의 회복과 충만의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26. 생수의 강물

 

에덴에서 흐르던 생수의 강은 이제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게 됩니다. 그곳은 택하신 자들의 인격의 가장 깊은 내면에 주와 연합하여 소생한 영이 있는 자리입니다. 영은 영원에 존재하지만 현실의 우리 인격의 일부를 이루고 영혼으로서 존재합니다. 영혼의 구원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연합이 택하신 자들의 전인격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몸의 대속을 거쳐 온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과정을 생수의 강물이라 합니다.

 

27. 바람

 

성령을 가리키는 단어는 바람이라는 단어와 헬라어 발음이 같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 뿐 아니라 바람이 보이지 않아도 흔들림으로 알 수 있듯이 성령으로 난 자는 그 삶의 변화로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이 공기의 권세를 잡은 자가 복음으로 그 권세를 잃고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생기로 불어넣어 살게 하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의 모든 생각과 인격의 흐름 안에서 역사합니다.

 

28. 생명나무

 

소생한 영과 영혼의 구원, 그리고 몸의 대속을 이루어가는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서 이를 두고 생수의 강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매 천지가 창조되듯이 생수의 강은 우리의 인격의 움직임으로 나타나 거기에는 살리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이를 두고 생명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영은 살려주는 영으로 역사하고 입의 말씀은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는 회복하고 충만하게 합니다.

 

7. 죽음의 회복

 

29. 영원

 

하나님은 영존하셔서 영원의 세계와 시공의 세계를 모두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 듯이 또한 영원의 세계에 살도록 지어졌습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고 몸을 대속하는 믿음의 과정인데 그 결국은 영생입니다. 이는 무한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초월한 세계를 말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본질이 있고 그것은 영원의 세계에서는 이미 성취된 구원입니다.

 

30. 신령한 몸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를 산 영혼, 혹은 산 자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바는 흙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몸은 비단 부활할 때 변화될 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령한 것을 뿌려 신령한 것을 거두는 것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주와 연합한 자들에게는 신령한 몸의 씨가 떨어져 자라고 있습니다.

 

31. 영화된 영혼

 

영은 영원의 세계에 속하였고 인생의 혼은 몸처럼 이 땅에 속한 것으로 우리가 알지만 성경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죽음 후에도 존재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영이 혼과 연합된 것입니다. 이로써 영혼은 인격이지만 영원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모두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남아 영원에 존재하는 영혼을 거두어가는 과정입니다.

 

32. 무엇이 남는가?

 

죽음은 분리와 소멸이 아니라 일종의 수확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과정이 시공의 세계에서 무한의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인데 그 영원한 세계의 씨가 심기고 자라 거두어지는 것은 이 시공의 세계를 살아가는 동안 이루어집니다. 죽음은 흙의 속성, 즉 소멸성을 띈 것들을 소멸하고 영원의 세계에 합한 것은 영존케 하는 과정입니다. 신령화 된 영혼과 신령한 몸은 죽음 이후에도 소멸치 않고 영원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33. 구원의 결국

 

소멸될 것은 결국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영원의 세계에 있습니다. 거기에 합한 소생한 영은 이제 살려주는 영으로 있고 영화 된 영혼과 신령한 몸이 주와 함께 영원의 세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열매는 소멸될 세상에 사는 동안 믿음으로 거둘 것이며 죽음과 더불어 소멸되지 아니하고 영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구원은 영원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미 성취된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34. 음부

 

음부의 권세는 죽은 영의 영향력입니다. 죽었으나 소멸되지 않는 영은 인격의 각 부분에 죽음의 두려움을 끼칩니다. 인격은 이로써 보이는 소유로 실체를 삼고 숫자의 권력 아래 숨고 선과 악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어 정죄의 삶을 살아갑니다. 영이 소생하여도 가르침이 왜곡되면 나머지 인격은 여전히 이 음부의 권세 아래 놓여 있다가 부끄러운 구원을 얻습니다. 죽음이 오면 시간이 멈춘 채 소멸의 괴로움 속에 존재하는 것이 불신자의 결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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