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란의 목사의 딸책에 대한 논평

  선지자선교회

박윤선 목사의 딸 박혜란이 목사의 딸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썼다. 책 내용 중에서 박윤선 목사님의 가정사에 대한 것은 두고 신학사에 대한 것에 논평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박윤선 목 의 딸 박혜란은 성경과 신학에 대한 말은 거의가 무엇을 모르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책 페이지와 발췌한 글이며 그 바로 아래에 논평을 했다. 논평은 1차로 간략한 메모 정도이다.

 

P14

 

아버지의 주석에는 한글 성경이 중역을 거듭한 번역판이라는 사실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주경신학자로서 커다란 결합이 아닐 수 없다. 1950년 이후 질이 높은 사본을 발굴하거나 확인하면서 성경을 원문의 의미에 더 가깝게 번역하려는 노력이 주로 영어권 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NIV 성경이 1974년에 신약을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1978년에 구약까지 번역하여 출간되었으나 아버지는 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 1988년 돌아가실 때까지 10년의 시간이 있었는데도 아버지는 그러한 노력을 간과 하셨다.

 

논평: 한국 교회에서 정경으로 권위 있게 사용하고 있는 성경책은 개역한글판이다. 그 후 교계에서 개역개정판을 출간하였지만 개역이 아니라 개악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다 안다. 그리고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되었는데 교계에서 이단으로 규정받았다.

 

개역한글판은 번역을 할 때에 단어적 번역에 혹 오류가 있을지 몰라도 해석적 번역에서는 별로 오류가 없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개역한글판 번역 시에는 문자적 번역에만 몰두했지만 이후 개역개정판 번역 시는 교회 역사가 있고 성경을 안다고 하여 인간의 해석적 번역이 가미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가 훼손된 부분들이 있다. 그러니까 칼을 숫돌에 간다는 것이 잘못하여 오히려 칼이 무뎌진 것이다.

 

개역한글판 성경으로 신구약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이 기준에서 볼 때에 개역개정판은 개악이고, 한글 킹제임스는 이단이다. 그러므로 개역한글판 성경의 정경성의 권위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가 아무리 원본성경이 자기 앞에 있다 할지라도 번역에는 오류에 오류를 더할 뿐이다.

 

P16

 

아버지를 숭상하는 사람들도 아버지가 쓰신 주석이나 전집을 거실이나 서재에 전시하고 있지만 대부분 인간 박윤선 목사에게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한국 사회의 특징 때문에 숭상 받는 학자가 되었으나 아버지를 가까이 오래 지켜본 선교사들은 아버지를 보는 시각이 한국 교회와는 달랐다.

 

논평: 박윤선을 숭상한다고 말하는데 박윤선이 아니라 그가 정리한 주석을 성경을 깨닫는데 참고하고 있다. 우리는 박윤선의 인간성보다 신학성을 상대한다. 고려신학교를 세울 초창기부터 미국 선교사 한부선 목사와 교류를 가졌다. 한부선 선교사에게 물어볼 일이다. 그와 관련된 문서들이 있다.

 

P79-80

 

고등학교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하루는 아침에 등교하느라 집을 나사는데 부엌일을 돕는 아주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저 바같 수도에 큰 오빠가 있어얼른 가서보니 큰 오빠가 끈에 친친 동여매여 있었다. 말인즉슨 지난 밤에 큰 오빠가 아버지를 만나려고 왔는데 아버지가 신학생을 불러 큰 오빠를 포박해 두었고, 큰 오빠는 묶인 채로 밤을 지세운 것이다.

 

논평: 이 부분은 전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허순길 목사의 글로 대신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오빠 춘호를 돕지 않은 것도 원망한다. 그는 1953년에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하지만 그는 가정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늘 술을 마시고 방탕했다. 그런데 큰 문제는 종종 밤에 만취돼 아버지 집을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문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증인이다. 혜란은 그가 방탕했다고는 말했지만, 그가 부모에게 와서 저지른 행패에는 침묵하고 다만 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박대한 것으로만 말하고 있다. 그는 어떻든 그의 아버지가 새어머니가 낳은 자녀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자기들에게는 무관심하고 잔인했다는 것만을 부각하고 있다. 고약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P165

 

한국사회는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때 동아일보 기자들이 독재정권에 맞서고자 자유언론을 외치며 시위를 했는데, 이때 정부는 기업 등을 협박하여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탄압했다. 그러지 의식 있는 시민들이 동아일보에 백지광고 즉 광고 없는 광고료를 기부했다. 시만들은 그렇게 탄압받는 언론을 지지해주었고,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였다. 나는 그 무렵 아버지께 백지광고 행렬에 참여할 것을 편지로 요청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묵살하셨다. “이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다.”

 

논평: 교회는 세상의 정치와 세상 사회에 참여할 수 없다. 그 근거 성구는 다음과 같다.

 

(22: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 것은 세상에게, 세상 사회 것은 세상 사회에게 바치는 것이다.

 

(6: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주의 종 목회자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는 직분이다.

 

P188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전의 신앙관과 전혀 다른 신앙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아버지의 신학과 신앙의 뿌리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눈도 갖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는 한국 최고의 칼빈주의 신학자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유교적 칼빈주의자였다.

 

논평: 한국교회의 정통신학은 칼빈주의 개혁주의이다. 한국교회 초기부터 개혁주의 웨스터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런 신학자들이 박윤선 목사를 존경하는 것은 그가 칼빈주의 신학자인지 유교적 신학자인지 분별을 못해서 그런지 반문한다.

 

P189

 

나는 영어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성경과 차이점을 발견할 때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 원문과 대조해보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혔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실력은 짧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대조하며 자세히 읽는 습관을 터득했다. 덴버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서서히 변했다. 아버지의 신앙체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논평: 요사이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원어성경사전이 프로그램화되어 컴퓨터에서 단어만 입력하면 그에 대한 자료가 척척 나온다. 그런 점의 활용은 논평자가 성경사전을 정리하면서 기본적으로 해보았다. 거의 3,000 단어에 해당한다. 개역한글판 성경의 번역이 얼마나 바로 되어졌나를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좋은 성경을 읽었으면 좋은 신앙이 되어야 하는데 왜 이처럼 변했는지 묻는다.

 

P191-192

 

또 영어성경은 폭 넓은 복음의 세계를 열어준 귀중한 통로가 되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한글성경에서 알 수 없었던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하는 등 하나님은 지혜를 주셨고, 그냥 스쳐지나갔던 내용도 알게 하셨으며, 기쁨을 누리게 하셨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졌다. 구약성경은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으로 시작된다. 출애굽기부터는 모세가 친히 쓰고 경험한 것 즉 현장의 증인들 대다수가 살아있을 때 쓴 것이기에 믿을 수 있지만, 창세기는 특히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신 후에 사람을 지으셨기에 모세는 그것의 증인이 될 수 없었다.

 

유대 구약학자들에 따르면 창세기는 구전을 기록한 것이라는데, 사람의 입으로 전수된 것은 쉽게 변할 수 있어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 창세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특별히 지어주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그들과 동거할 때 직접 들려주신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창세기 5장은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의 족보를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족보에 따르면 므두셀라가 243세 때 아담이 죽었다. 므두셀라가 300세 까지 에녹이 살아있었으므로 므두셀라는 아버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므두셀라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243년 동안 지켜보았고, 그 입에서 나온 창세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던 것이다. 그의 아들 라멕이 56세 때 아담이 죽었으니, 라멕도 아담에게서 직접 창세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이 두 사람은 홍수 직전에 죽었는데 노아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서 600년 동안 창세의 이야기를 듣고 아들들에게 전수했을 것이고, 노아의 아들 셈이 100세 때에 홍수가 났으니 셈은 할아버지 라멕과 증조할아버지 므두셀라의 입에서 그리고 아버지 노아에게서 전수 받은 것이다. 노아 홍수 이후부터 사람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기에, 창세의 이야기는 현장에 있던 목격자나 다름없는 아담과 하와에게서, 더 나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말씀이기에 그렇게 믿는 것이 타당하다. 이 족보를 계산해 도표를 만들면서, 인류가 당신의 말씀을 오류 없이 전달하고 그것을 믿도록 자세한 족보를 주신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한지!

 

논평: 성경은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라(16:25-26) 하셨다. 성경 어디에 사람의 입으로 구전된 것이라는 말씀이 없다.

 

이단으로 규정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는 노아는 아브라함과 58년 동안 동시대에 살았다고 주장한다. 이 계산법은 비성경적 오류이다.

 

성경은 창11:10-26에는 눅3:34-36에서 기록된 가이난과 헤버가 기록되지 않았다./ 11:10에 노아의 아들 셈이 100세 곧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창10:22에는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라고 말씀하고, 대상1:17에는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과 우스와 훌과 게델과 메섹이라고 말씀한다. 그렇기에 아르박삿은 엘람과 앗수르 다음이다./ 성경에는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고 말씀하고 그리고 또 홍수 후에 노아의 아들들이 자녀들을 낳았다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아르박삿은 홍수 후 2년에 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박윤식은 홍수 후 2년에 아르박삿을 낳은 것을 기초하여 노아의 자손의 연대를 계산해서 노아가 아브라함과 동시대에 58년을 함께 지냈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 왜곡이다.

 

P193

 

결국 14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의 마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한국의 기독교는 유교와 조상숭배 그리고 미신으로 혼합된 종교임을 깨닫게 되었다.

 

논평: 한국 교회는 일제 신사참배를 이긴 신앙이다. 그런데 유교와 조상숭배 그리고 미신으로 혼합된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2013년 한국 부산에서 WCC(세계교회협의회) 10차 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에 해당되는 말이다.

 

P208

 

우리가 CRC 교단을 떠나 옮겨간 EPC 교단은 미국의 장로교가 거의 하나의 교단(PCUSA)으로 통합될 때 그 폭이 너무 넓어지는 데 실망하여 합세하지 않았다. 성경의 문자영감설을 믿되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심각하게 고민함으로써 근본적인 몇 가지를 제외한, 특히 교리 밖의 견해 차이에 대해서는 가급적 수용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논평: 교리신조의 바탕에서 견해가 나온다. 그런데 교리 밖의 견해 차이에 대해서는 가급적 수용한다는 자세는 그것이 곧바로 진리를 양보하는 성격이다. 그것이 신신학의 길이다.

 

P240

 

아버지는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으니 이를 갚아야 마땅하므로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라고 부르짖었다. 이는 우상을 섬기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논평: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P241-242

 

사람의 몸을 성령님의 전이라 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다. 사람의 몸이 오죽 귀하면 당신이 상주하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런데 사람을 영과 육으로 이분화하고,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로 이분화하여, 영적인 일은 고상하고 육적인 일은 저속하며 악한 것이라 규정하는 것은 2-3 세기에 팽배했던 영지주의의 재현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 교회를 크게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한국 교회에 팽배한 이 이분적인 토대를 만든 그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

 

논평: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8:5-14)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P249

 

예수님은 십계명을 두 계명으로 분명하게 요약하셨다. 첫째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관계의 중심으로 모든 행위의 에너지가 된다. 노예처럼 죽기까지 봉사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사랑의 행위가 수고로 나타날 때가 많으나 수고가 곧 사랑인 것은 아니다.

 

논평: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다.

 

1. 하나님은 사랑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께만 있다.

 

2.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6:23)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원죄와 본죄(자범죄)로 영원한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람을 받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4. 그 안에서 또한 믿어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람을 받은 우리가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5.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느니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6.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된 것이다.(요일2:5)

 

P250

 

결혼 후 미국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나는 그동안 읽어왔던 한글번역판 성경책은 아예 뒷전으로 밀어버렸다. NIV 영어번역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완성하신 주석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주석에는 한글판 성경이 중역을 거듭한 번역판이라는 사실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주경신학자로서 커다란 결함일 수 밖에 없다. 나는 NIV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판 성경과 판이하게 다른 부분을 발견하면, 히브리어성경이나 헬라어성경과 대조해 보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며 성경에서 하나님의 입김마저 느낄 수 있었다. NIV 혹은 NKJV 성경을 주로 읽었지만 어떤 때는 다른 성경도 대조해서 읽었고,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유대인 랍비가 직접 번역하고 주석한 책)을 참조하기도 했다. 유대인들은 기나긴 전통을 배경으로 구약을 읽기 때문에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논평: 히브리어 구약성경(유대인 랍비가 직접 번역하고 주석한 책)을 참조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유대교는 이종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것을 무슨 자랑으로 말하는 것은 그만큼 다른 영에 사로잡혔다는 증표이다. 개역한글판 성경관에 대한 논평은 앞에 언급하였기에 생략한다.

 

P253

 

사람들은 아버지가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능했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늘 한글번역 성경을 읽었고, 거기서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때 히브리어성경이나 헬라어성경을 참조하셨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 깊숙한 곳에는 유교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한글성경은 여전히 유교적인 세계관을 벗어버리지 못한 번역이었으므로 , 아버지가 한글성경을 읽을 때 아버지의 사상체계와 맞는 부분에서는 중요한 단어를 원어와 대조해 보는 일 없이 그냥 지나쳐버린 부분이 자주 발견된다.

 

논평: 아버지는 늘 한글번역 성경을 읽었고, 거기서 문제점이 발견되었을 때 히브리어성경이나 헬라어성경을 참조하셨다고 한다. 이것은 박윤선 목사님의 개역한글판 성경관이 아주 격조 있다는 말이 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성경사전을 집필하가나 성경주석을 정리해보면 개역한글판 성경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충족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구약은 신약, 신약은 구약, 그리고 각 성구에 해당되는 관주적 성구로 충족하다. 성경을 연구할수록 개역한글판 성경은 진리를 아는데 충족한 성경이라는 것으 알 수 있다.

 

P254

 

아버지는 성역 50주년 행사를 마친 뒤 아버지가 쓰신 주석을 영어로 번역해 출판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가 쓴 주석은 한국 교회 초창기에 참고할만한 서적이 전혀 없을 때 귀히 쓰였으나,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들어오는 학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상황에 좋은 서적을 번역하여 출판할 필요는 있어도, 아버지의 주석을 영어권 교회에 출찬 판매하는 일은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논평: 지금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들어오는 학자들이 점점 많아지는 상황은 맞는지 모른다. 그러나 박윤선 목사님이 유학 갈 시기는 한국교회가 일제 신사참배의 환란을 이기고 순생 순교로 연단이 있은 신앙의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신앙이 없는 때이다. 그러므로 성경연구 서적은 신앙에 있는 것이지 유학의 숫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증표가 오늘날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 같은 권위 있는 책이 있는지 보라.

 

P255

 

한국 교회는 우선 한글판 성경이 과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을 글자 그대로 잘 반영하고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이른바 축자영감설을 믿는 복음주의 교단들 안에 훌륭한 히브리어 및 헬라어 학자들이 많다. 이들이 교파를 초월해 힘을 모아 서둘러 이 작업을 해야 한다.

 

논평: 개역한글판 성경의 번역은 원본성경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 증표는 개역한글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충족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그렇게 아는 것은 성경 진리를 아는 것 만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개역한글판 성경 이후 여러 번역 성경이 출간되었다. 결과를 보면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번역이 잘 되었다고 할지 모르나 원본성경의 진리가 손상된 면이 많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및 헬라어 학자들이 교파를 초월해 힘을 모아 서둘러 번역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말은 성경 진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자의 소리이다.

 

P265

 

아버지는 성경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목청이 터지게 외쳤다. 믿기만 하면 의인으로 간주되어 구원을 받는데, 이 은혜 때문에 죽기내기로 기도하고, ‘죽기내기로 자신의 성결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버지는 당신의 개인적인 성결을 위해, 당신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지사충성으로 이루기 위해 거의 강압적으로 외쳤다.

 

논평: ‘죽기내기로 기도하고 성결을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주의 종이 할 일이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알고 인간의 강압을 분별할 줄 안다.

 

P267

 

생전의 아버지는 돈과 권력이 사람을 썩게 한다고 무수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당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죽기내기로 이루기 위해 배우자나 아이들을 오히려 짐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졸지에 조강지처를 잃었을 때 재혼한 아내를 지극히 존중하는 태도로 돌변했고, 재혼한 아내의 사고방식이 아버지와 일치해 그때까지 당신이 달려온 길을 더욱 전념하여 달리셨던 것 같다.

 

논평: 아버지가 조강지처를 어느 날 갑자기 잃었다. 그 아픈 심정을 칠순이 다 되어 가는 딸이 조금도 알지 못한다. 새어머니는 자식 셋 딸린 가정에 시집을 왔다. 여자이며 딸이 있는 여인이 그 심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다. 박윤선 목사님의 딸의 나이가 십대 미성년자로서 하는 말이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인생을 다 살은 나이인데 아직도 십대 철없는 말은 하고 있으니 그저 안쓰럽다.

 

P279

 

꽤 오랜 시간 공부를 이어가면서 나는 다시 깨지고 변화되었다. 학위 논문을 끝내고 20094월 한국에 나왔을 때, 김상복 목사님의 권유로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협의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 나이 예순아홉이었다.

 

논평: 김상복 목사에게 안수를 받았고 또 김상복 목사가 책에 추천사를 썼다. 이런 책에 추천서를 쓴 김상복 목사는 어떤 신앙사상인지 나름 짐작이 간다.

 

다음은 전 고려신학대원 원장 허순길 목사의 글이다. 참고 하시기 바란다.

 

박혜란의 목사의 딸에 대한 유감

 

필자는 최근 박혜란이 쓴 목사의 딸이라는 책을 읽고 놀랐다. 딸로서 보여준 그의 오만한 품격과 내용 대부분의 허구성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글이 주님의 교회에 무서운 해악을 끼치고 있으므로 잠잠히 있을 수가 없어 이 글을 쓴다.

 

필자는 1950년대 박윤선 목사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할 당시 그의 가족과 비교적 가까이 지냈다. 대학부 4학년 때 그의 딸 은란의 과외교사로 한 학기 동안 그의 집에서 지냈고, 이어 신학본과에 들어가면서부터 졸업할 때(1959)까지 3년 동안 그의 풀타임 조교로 그의 원고를 정리하고 교장실에서 함께 지냈다. 이때 박혜란은 경남여고를 다녔고, 이어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래서 박윤선 목사의 가정을 조금 아는 편이다.

 

박윤선 목사는 평생을 개혁주의교회 건설에 헌신한 귀한 종이었다. 하지만 혜란은 그의 아버지의 신학을 폄하하고, 한국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아온데 대해 불만을 토했다. 혜란의 말 가운데 어떤 것은 사실일 수 있다. 신학자 박윤선이라고 무흠할 수 없다. “이 생애에서 우리의 최상의 선행조차도 매우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돼 있음을 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 박윤선을 단순히 변호하려는데 있지 않다. 혜란은 아버지가 전처 자식들에게 무관심하고, 새어머니가 그들을 학대했다는 데 대한 증오감을 갖고 너무도 허황한 화상을 그려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그는 사랑을 말하나 용서 없는 위선자임을 보이고 있다. 어머니를 잃고 계모를 맞는다는 것은 한 가정의 큰 불행이다. 계모가 아무리 전처 자녀들에게 잘해도 칭찬 듣기란 어렵다. 내가 아는 이화주 사모는 체격이 크고 외모가 남성스럽게 보이는 분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온화함을 느끼게 하는 데는 결핍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혜란이 말한 대로 늘 그들에게 배은망덕한 전처 자식들이라고 쏘며 박해를 가할 분은 전혀 아니다. 그런 분이라면 전처의 딸 은란이의 과외 교사를 두고, 서울대학에 간 혜란의 등록금을 어떻게 댈 수 있었겠는가? 박윤선은 정말 돈도 살림도 모르는 분이었다.

 

새어머니가 크게 자기들을 홀대하고 마음에 상처를 줬다고 하자. 혜란도 새어머니에게 혹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것은 틀림없다. 아무튼, 오랜 세월 후 미국에 살면서 서로 용서를 빌고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 혜란은 LA 새어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의 행복을 이렇게 적었다. “처음 한 방에 같이 자면서 지나온 삶을 자유롭게 말씀드릴 수 있었다. 새어머니는 당신의 침대를 내게 주시고 당신은 방바닥에서 주무셨는데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라고 했다(p.161). 모녀가 서로 용서를 하면서 지난날을 다 청산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혜란은 새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기억해 내어 글로 옮겨놓았다. 그의 새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2014년 초), 바로 그것을 책으로 세상에 펴냈다. 혜란은 새어머니를 용서하지 않았다.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위선자이다.

 

둘째로 혜란은 박윤선의 자녀 된 특권을 전혀 감사할 줄 모른다. 혜란의 언니 춘자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1953년에 도미 유학, 다음 해 요한은 양자의 길을 통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1950년대에 우리 같은 평범한 가정의 자녀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저들은 박윤선의 자녀들이기에 가능했다. 당시 미국에 가면 누구나 장학금을 받아도 고학을 하며 생활해야 했다. 한국에는 외화가 없었고, 보내줄 길도 없었다. 그러나 혜란은 미국에 간 춘자, 요한을 돕지 않았다고 그의 아버지를 원망했다. 또 오빠 춘호를 돕지 않은 것도 원망한다. 그는 1953년에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하지만 그는 가정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늘 술을 마시고 방탕했다. 그런데 큰 문제는 종종 밤에 만취돼 아버지 집을 찾아와 돈을 요구하고 문을 부수는 등 행패를 부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증인이다. 혜란은 그가 방탕했다고는 말했지만, 그가 부모에게 와서 저지른 행패에는 침묵하고 다만 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박대한 것으로만 말하고 있다. 그는 어떻든 그의 아버지가 새어머니가 낳은 자녀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자기들에게는 무관심하고 잔인했다는 것만을 부각하고 있다. 고약하고 정직하지 못하다.

 

셋째로 아버지의 딸, 한 남편의 아내로서 혜란의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태를 본다. 혜란은 4반세기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가능한 한 표현을 동원해 매장하려고 한다. 의처증을 가진 분, 그의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손찌검한 적이 많다고 한다. 마침내 강도를 높여 상습적으로 구타했다라고 한다. 아무리 잉꼬부부라도 서로의 개성이 다르므로 다툴 수 있다. 박윤선의 부부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혜란은 그의 아버지를 상습적인 구타자로 모는 것은 흠집을 깊게 내려는 악의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혜란이 그의 남편에 대한 회상은 참으로 가관이다. 아버지의 강압으로 원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게 됐다면서, 아버지가 자기의 명예를 위해 딸을 판 것이라고 탓한다. 일찍부터 자만하게까지 보인 그의 자존심이 누구의 강압 때문에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과 결혼했을 리는 없다. 아무튼 그는 결혼해 4남매를 두고 여러 손자와 손녀까지 뒀다고 한다. 그런데 칠순을 넘은 할머니가 된 그가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세상에 드러내고, 남편이 가진 결점을 다 나열하고, 이혼을 생각했다고도 한다. 현재 살아 있는 남편의 흠을 이렇게 낱낱이 파헤쳐 온 세상에 알리는 그가 이미 고인이 된 분들에게 대해서는 얼마나 자유롭게 허구한 소설을 써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가족윤리의 기본도 갖추지 못한 분이 목사가 돼 무엇을 가르치고 설교하는지 궁금하다.

 

넷째로, 아버지의 빠른 재혼이 자기들을 위한 일이었는데도 이를 이해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혜란은 아버지가 상처한 지 6개월 후에 의논 없이 재혼한 것에 크게 불만스러워한다. 어떤 면으로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자기들을 위한 주변 어른들의 배려였다. 1954년 초 김알렌 사모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요한은 곧 도미하고 겨우 열세 살인 혜란과 그 아래 은란, 단열 셋만 남게 됐다. 그의 아버지가 화란 유학생활에서 급거 귀국했으나 그는 돈도 모르고 살림도 전혀 모르는 분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신학교 이사들과 교계 지도자들은 그 가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빨리 그의 재혼을 주선해 주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지 않은 일임에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봉사를 하던 이화주 전도사와의 재혼을 10월에 성사시켰다. 이는 어린 그들을 위한 어른들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어릴 때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할지라도, 장성해서는 이를 이해하고 오히려 감사해야 했다.

 

끝으로, 혜란의 편향된 신학이 그를 더욱 불효녀로 만들었다 본다. 혜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들에게서 사랑이 지배하는 가장 좋은 신학을 했다고 행복해 하지만 그 신학이 이런 책을 쓰게 했다면, 그 신학은 분명 좋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이 하나님의 사랑에 편중될 때 죄와 회개를 경시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죄인이라고 회개하며 기도하는 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며 정죄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면서도 아직 사망의 몸을 벗어나지 못한 죄인이다.(7:24) 그러기에 우리는 거듭 죄를 범하고 회개한다.

 

그는 아버지를 유교적 칼빈주의자, 이원론자라고 하며, 자기 아버지의 주석이 참고할 만한 것이 없고 빈곤하다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큰 죄인으로 그려 놓고, “한국교회가 이렇게 큰 결함이 있는 분을 칼빈주의 대학자로 숭상하는 것이 안타깝다라고 한숨을 내쉰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남기고 간 모든 것을 묻어버리기를 원하고, 그 이름이 지워지기를 원한다. 자만과 악의에 찬 심술이다. 빗나간 딸 혜란이 원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도 없고, 되지도 않을 것이다.

 

박혜란은 이 책을 성령의 인도로 쓴 것이 아니고, ‘다른 영의 지배를 받아 쓴 것이 분명하다. 주의 교회에 백해무익한 이 책을 목회자들, 신학생들, 교회지도자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라고 책머리에 추천한 분들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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