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믿음의 능력


선지자선교회 1985년 8월 7일 수새집회 

 

본문 :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믿음이 점점 자라서 커지는 도리를 주님이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비유는  실상과 비슷한 것을 인용해서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유보다는 실상이  더 정확성이 있는 것입니다. '비유에는 이렇지만 실상은 그렇게까지  그렇겠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비유보다 실상은 더 정확하고  실상은 비유보다 더 정확하고, 비유는 아무래도 실상보다는 정확하지 못하고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뽕나무 비유로 된 이 이치를 우리가 생각하고 그  이치보다 그 실상인 우리의 믿음의 도리는 더욱 더 그러한 것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비유에는 그렇지만 우리의 믿음이라는 그 비유의 실상 비유로  비슷한 걸 가지고 가르쳐 준 실상인 그 믿음이야 이 비유의 해석과 같이  그렇게까지 되겠느냐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에 언제든지 비유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 비유의 이치보다 비유가 가르치고 있는 우리 구원  도리의 이치는 더욱 더 확고하고 세밀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유에  그러하면 우리 믿음은 더욱 그러하고, 비유로 안 된다 하면. 안 되는 것으로  비유했으면 우리 구원의 실상은 더욱 더 안 되는 것입니다. 비유에 커 나가는  것을 비유했으면 우리 실상은 비유보다 더욱 더 잘 커 나가는 것입니다.

 겨자씨를 가지고 우리 믿음을 비유했는데, 겨자씨는 씨 중에 제일 작은  씨입니다. 그 작은 씨지만 그 씨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흙이라는, 땅이라는  이 큰 땅속에 그 겨자씨를 묻었을 때에, 겨자씨 뭐 백 배 천 배 만 배 되는 것도  땅 속에 들어가면 다 썩어서 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겨자씨에게는 작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땅이 겨자씨의 생명을 삼키지 못하고 그 생명이 땅을  삼켜서 점점 겨자씨가 커져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 아무리 작고  작고 천하에 예수 믿는 사람 중에 믿음이 제일 작은 사람이라도 그가 겨자씨가  생명 있는 것처럼 이 생명있는 믿음만 가지면 그 믿음은 차차 차차 자라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생각도 못 할 만치, 씨와 비해서 크게 자라가는 것을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기까지 자라간 것은 그 겨자씨가  무엇을 통해서 그렇게 자라갔는가? 거기는 땅을 먹고 자라갔습니다. 흙을  잡아먹고 자라갔습니다. 흙을 양식으로 삼아 가지고 자라갔습니다. 흙을  양식으로 삼아서 먹고 자라갈라고 하는 그 과정에는 흙이 겨자씨를 삼킬라고  하고, 흙이 겨자씨를 삼킬라고 하고, 또 겨자씨는 흙에게 삼키지 아니하고 흙을  삼킬려고 하고 상당한 서로 투쟁이 있습니다. 서로 대립이 있습니다. 대립이  있는 이 대립에서 생명이 없는 형체는 크든지 작든지 여물든지 무르든지 다,  흙이 모조리 삼켜서 다 흙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겨자씨는 작지만 흙이  겨자씨를 삼켜서 흙을 만들지 못한 그 이유는 겨자씨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삼켜질 터인데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겨자씨로 비유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작은 믿음이라도 상관없고  시작할 때는 어떻게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점점 자라서 제일 큰 믿음도 될  수가 있다 하는 것을 비유했고, 또 그 겨자씨 속에 생명이 있는 그 생명은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낸 그 생명을 가리켜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죽었는고 하니 악령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으로 죽었습니다. 또 악령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위주  중심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자기중심 자기 위주, 또 피조물 중심 피조물 위주,  피조물 중심도 그것의 결과는 다 자기중심 자기 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죽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그 어김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은 것은 세 가지가 우리를 죽였습니다. 세 가지는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뱀에게서 나왔습니다. 마귀에게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연결의 자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지극히 큰 능력, 전지 전능, 완전자  창조주, 주권자. 주재자 이분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모든 생명의 은혜를 끓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이것이 끊겨졌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또 악령의 미혹을 받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 중심 위주로 살아야 하나님의 그  은혜를 가지고 모든 피조물을 상대할 때에 다 피조물의 도움을 받고 피조물을  이용하고 피조물이 나를 돕고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돼야 될 터인데 모든  피조물이 나를 섬기고 나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사람들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섬기면 피조물은 나를 섬기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랬는데 중심이 틀려져서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 위주로 섬기지 아니하니까 뭐  모든 피조물은 사람들을 대적하고 복종이나 섬기는 일을 하지 안 하도록 그렇게  돼서 사람들의 그 모든 행위가 다 죽게 됐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온갖 은혜가 오는 그 은혜의  줄이 끊어져 버렸고, 또 마귀의 유혹을 받아 가지고 행동하다 보니 모든  피조물들에게 섬김 받아 그 전부를 똘똘 뭉쳐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그것이  우리의 생활인데 정 반대로 하나님 섬기는 위주가 아니고 자기 섬기는 자기중심  자기 위주가 되니까 모든 피조물들도 다 우리에게 대해서 우리 반대의 그 모든  역사들이 됐습니다. 이것으로써 우리 사람들의 모든 활동이 다 죽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배반할 때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그 은혜의 보급선이 다 끊어져 버렸고,  또 우리가 유혹 받아 가지고 중심을 바꿀 때에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죽어졌습니다.

 이라고 난 다음에 이제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소원대로, 자기 욕심대로, 자기  뜻대로 하는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자기 욕심, 자기 뜻, 자기 소원, 자기 주관,  자율대로 살므로 인하여서 그 모든 것이 다 삐뚤어져서 죄가 됐습니다. 삐뚤어진  거는 죄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가로 막혔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사망을 받게 됐고, 모든 피조물외 종이 되었고, 또 모든  삐뚤어진 것만을 하는 것이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 악령 하나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들은 다 죽었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써 이 세  가지를 다 해결을 지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을 떠난 모든  삐뚤어진 범죄 행위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해결을 했습니다. 이 범죄 행위  이것을 가리켜서 악습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악습. 자기중심의 모든, 습성 하나  둘 해 보태서 한 습성 이 죄가 들어서 우리를 죽게 했는데, '죄의 값은  사망이라' 죄가 들어서 죽게 했는데, 이 죄를 멸하는 것은 다른 것으로써는 멸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으로도 이 죄는 멸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멸하는 방편은 그 죄의 댓가인 형벌을 다 받으면 그 죄는  멸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값인 그 형벌을, 그 사망의  형벌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다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해하는 죄가 다  없어졌습니다. 파괴됐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를 다 파괴하고 없앴는데 그 죄를 언제까지의 죄를 없앴는가?  우리가 나기 전 우리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범한 모든 죄를 다 그 죄가 우리에게  정죄됐는데 그 죄를 다 예수님이 형을 받아 가지고 없앴습니다. 또 우리가  앞으로 미래적으로 지을 죄가 많은지 적은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전지한  지혜로써는 우리가 뱀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범할 모든 죄를 다 합해서 예수님이  담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믿고 난 다음에도 우리가 범죄 할 수  있습니다. 믿고 난 다음에는 다시는 범죄하지 않느냐 하면 믿고 난 다음에도  범죄를 할 수가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죄의 형벌을, 우리  죄를 당신이 대신 형벌 받으셔 가지고 우리의 모든 죄를 멸해 버린 그 형벌은  어떤 죄까지라 하겠는가 하면 우리의 과거의 죄, 미래의 죄, 우리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길 그 모든 죄는 전부 다 예수님이 정죄 받아 가지고 거기 상당한  대가인 죄의 형을 받아서 우리의 죄는 완전히 도말됐습니다.

 그러면 도말되되 어디까지 도말 됐느냐? 하나님의 전지한 지혜, 지공 지성으로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공심판에 이는 죄 없는 완전한 자라 하는 그 공심판  통과까지를 우리를 다 시키신 것이 예수님의 대형의 사죄인 것입니다. 이래서,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공심판에 그 심판을 다 벗어 나왔기 때문에,  이기고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이 우리를 정죄하지를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망에서 놓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대신 형벌  받으심으로써 이 죄 문제를 해결 지웠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죄가 우리를  해하지를 못합니다.

 해하지를 못하는데 예수님이 이 죄를 다 이겨서 멸했기 때문에 죄의 권세는  없습니다. 죄의 권세는 예수님이 완전히 점령을 하셨습니다. 점령을 하시고  점령한 그 죄를 가지고 예수 믿는 우리들을 한 토막 이 세상살이 할 때에  예수님이 점령한 그 죄를 우리에게 보내 가지고 우리를 연단시킵니다. 우리를  시험하고 연단시킵니다.

 이래서 그 죄가 우리를, 와서 범죄케 할라고 이렇게 노력을 합니다. 모든 죄가  우리를 범죄케 할라고 노력을 해서 우리가 그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길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충성이 모자라서 그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지를  못하고 그 죄에게 삼켜서 범죄 할 때 있습니다. 나를 범죄케 한 그 죄는 그 죄는  누구의 것인고 하니 그 죄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일군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자유 자재로 할 수 있도록 죄는 완전히 예수님이 형을 받으셨기 때문에  죄의 권세는 완전히 멸해서 그 죄의 권세는 하나도 없습니다. 없는데 그 죄는  이제 예수님이 가지시고 예수님이 승리했기 때문에 죄의 권세는 예수님이  가지셨습니다. 가지고 훈련기간 동안 예수님이 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보내서 죄로 하여금 우리와의 관계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와 서로  투쟁할 수 있는 이런 투쟁을, 싸움을 붙였습니다. 싸움을 붙이는 것은 우리를  죄에게 삼켜지도록 하기 위해서 싸움 붙인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길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싸움을 붙였습니다.

 싸움을 붙일 때에 그 싸움은 무제한적인 싸움이 아니고 제한적인 싸움으로써  우리 정도의 우리가 힘만 쓰면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정도의 그 죄의 권세를  줘서 우리로 더불어 싸우게 하십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약한 죄가 우리로  더불어 싸워서 우리 힘만 쓰면 그 죄를 이겨서 죄는 나를 범하게 할라고 하고  나는 죄를 범하지 안할라고 하고, 해서 힘만 쓰면 그 죄를 내게 해당된 죄를  내가 이길 수 있습니다. 이기면 죄를 이겼습니다. 이기면 그것으로 다냐 하면 또  주님이 그 다음에는 그 죄를 조금 더 강하게 해 가지고 내가 죄를 이겼으면 내가  자랐으니까 죄를 이겨서 자란 그 자란 힘을 다 가지고 죄로 더불어 싸우면 그  죄를 이길 만한 그 정도의 조금 강한 죄를 우리에게 보냅니다. 그러면 강한 죄로  더불어 싸워서 우리가 또 이기면. 우리는 죄를 이기는 그 능력으로 그만치  성장됐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다음에 또 그와같이 계속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기신 그 죄. 예수님이 이기고 예수님의 종을 삼은 그 죄, 그 죄를  마음대로 이제는 자유 자재로 이용하고 명령해서 죄는 예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고 예수님은 그 죄를 자유 자재로 이제 영원히 사용하는 그 권세까지 다 가진  죄를 점령해서 당신의 하나의 소지물과 같이 그렇게 이제 삼은 그 죄를,  예수님이 대항해서 이기신 그 죄를 우리에게 싸움 붙여 가지고 예수님이 이긴 그  죄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낼 때에 우리는 그 죄를 다 이길 수 있는 데까지 그런  성장을 주님이 기대하시고 원하시고 그런 성장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오는 죄는 우리를 멸하기 위한 죄가 아니고 우리가 힘만  쓰면 다 이길 수 있는 죄입니다. 그 죄는 우리를 하나님의 공심판에 끌어넣는  그런 절대적인 권세를 가진 죄가 아니고 주님이 점령한 주님의 심부름으로  주님의 이용물로 쓰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죄는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이용되고  있는 것이지 우리 구원을 해치는 그런 일을 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써서 그 죄를 싸워서 그 죄를 이길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죄를  이길 만한 그 실력이 우리에게 자라지게 하십니다. 그러면 자라지게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연결된 그 연결과 또 영감과 진리의 능력을 가지고 그  능력을 힘입어서 이기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오는 죄는 우리를 범죄케 하는 왕권을 가진 죄는 아닙니다.

왕권을 가졌으면 우리를 최종까지 다 삼켜야 되는 것인데 우리에게 오는 죄는  왕권 가진 죄가 아니고 예수님이 부려서 우리의 그 정도로써 충성을 다하면,  전심 전력을 기울이면, 죄는 나에게 패전을 하고 나는 죄를 승리를 해서, 죄를  승리할 수 있는 그 능력을 우리들이 가지도록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는, 이 구속받은 자들의 죄는 죄를 이기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 죄를 자유 자재로 이제 당신의 것을 만드신, 점령해서 당신의 것을  만드신 그 죄를 우리에게 보내서 우리로 더불어 서로 씨름 붙이고 투쟁을 시켜서  우리가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그 실력을 배양하기 위해서 그와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이기는 힘은 무슨 힘인고 하니 하나님과 또 영감과 진리 이 셋을  우리에게 연결시켜 놨기 때문에 그 연결을 가지고 거기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둥치에 있는 영양을 빨아 먹고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인 영감과 진리, 이 진리와 셋의 이 은혜를 우리가 흡수해 가지고 그 죄를  이기게 됩니다. 죄가 아니면 그 죄를 이길 만한 그런 힘이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 힘을 필요성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가 와 가지고  우리를 연단할 때에 죄를 안 범할라고 죄를 이길라고 함으로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가 기도하고, 또 구하고. 또 영감을 우리가 구하고,  영감의 도움을 입고, 또 진리를 우리가, 우리에게 나타난 진리는 성경입니다.

성경에 진리를 또 찾아서 힘입고 이렇게 우리 정도대로의 힘을 써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죄를 이기게 됐습니다.

 죄를 이기게 됐으면 우리의 실력은 뭘로 자라는고 하니 죄를 이기는 실력으로  자라갑니다. 죄를 이기는 실력으로 이렇게 자라가기를 주님에게 도달하기까지  죄를 이기는 힘으로 자라가도록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다 예수님이 이겨 놓으신  그 승리의 혜택을 가지고, 예수님이 점령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으로써 이렇게 해 가지고 우리를 연단시키고 연성시키고 연습시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이 연단 연성 연습에서 패전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친되고, 또 영감 되고 , 또 진리가 우리에게 온 이 은혜를  우리가 배반하고 받지 안한 것입니다. 배반하고 받지 아니하면 받지 안한 것  만치 배반한 것 만치 우리는 그 은혜에 빈약합니다. 빈약한 그것이 우리  새사람이 약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서 죄를 이기는 기능이 우리에게 자라가는 것인데 죄를 이기는  기능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기능인데 그 기능을 힘입을 수 있는 그  기회를 주셨고, 또 힘입으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그런 상대를 만들어서  이렇게까지 해 주셨는데 우리가 힘쓰지 아니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우리가 무시하고 그 은혜를 받지 아니하고 배반했기 때문에 그 죄에게  이기지 못하고 죄에게 점령을 당해 죄를 이기는 기능을 가지지 못하고 죄에게  지는 기능을 가지고 그 현실을 기회를 통과해 버립니다. 그 현실을 통과해  버리면 그 현실을 통과한 것으로써는 죄를 이기지 못하는 기능, 죄에게 진  기능입니다.

 죄에게 진 기능이면 이 죄에게 진 기능은 어떻게 하는가? 이 기능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네가 죄를 이겼느냐 졌느냐 하는 그 공심판에서 우리를 심판해  가지고 너는 죄에게 졌기 때문에 너는 죄의 것이니까. 죄의 종이 됐으니까  죄에게 속해 살아야 된다 하는 그 공심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는 것은 이것은 구속받은 사람들이 받는  사심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우리가 다 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거기는 무슨 심판인고 하니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신  그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온갖 은혜를  내가 현실에서 그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그 은혜를 부인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제한된 자유지만 자유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자유성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대속하신 그 은혜를 내가 받을 자유도 있고 대속하신 은혜를  버리고 이 세상 것 그것을 제가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죄는 우리로 더불어 싸우기 때문에 죄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죄인고  하니 모든 바른 데에서 삐뚤어진 종류 전체를 다 합해서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삐뚤어진 것이 다 총력을 기울이고, 이 우주 안에  삐뚤어진 것이 다 총력을 기울이고, 그러면 삐뚤어진 것은 거기에 악령도 있고  삐뚤어진 지식도 있고, 삐뚤어진 인간의 사상도 있고, 주의도 있고 인간의  모략도 있고, 삐뚤어진 그 주인은 악령인데 악령이 삐뚤어져 가지고 삐뚤어진  악령이 인간들을 점령해 가지고 만들어 놓은 이 악한 자 안에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에는 삐뚤어진 종류가 하나 둘, 천 만이 아니라 억억억억만도 더 됩니다. 그  모든 삐뚤어진 것은 한 덩어리요 한 편입니다.

그러기에, 삐뚤어진 그것이 내나 죄뭉텅이인데 그것을 예수님이 다 승리해서  점령했기 때문에 그 모든 뭉텅이 그것은 이제는 예수님에게는 꼼짝을 못하고  예수님께서 다 형을 맡아 가지고 예수님이 그거를 다 점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제는 자유 자재합니다. 예수님의 종이 됐습니다.

예수님이 졌으면 죄는 주인이 되고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됐을 터인데, 예수님은  이기셨고, 뭘로 이겼느냐. 형으로써 다 이겼습니다. 그 형을 다 받아도 예수님이  불만 불평 없고 그 형을 완전히 받아서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에 만족하도록 다  그 형을 받으셨기 때문에 죄는 예수님에게 패전했고 예수님은 죄를 승리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의 주인이 됐고 죄는 예수님의 종이 돼서 예수님이 사용하고  싶은 대로 사용할 수 있는 그 사용할라면 사용하고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질라면  던지고 자유 자재할 수 있는, 죄에 대한 권세를 예수님이 가졌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 정죄받음으로써 형을 맡았고, 죄의 정죄 받고, 형을 받음으로 죄를  이겨서 예수님은 죄를 점령한 죄의 왕입니다. 죄적으로 왕이 아니고 죄를 이겨서  죄를 정복한 왕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삐뚤어진 것의 주인이 됐다  그말입니다. 삐뚤어진 것의 주인이 됐다 말은 삐뚤어진 거로 주인이 아니라  삐뚤어진 그것을 예수님께서 자유 자재 다 할 수가 있게 됐다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연단 연성시키는 동안에는 이 죄를 우리를 연단시켜서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이 지를 이기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이 예수님   안에서 지금 연습을 시킵니다. 연습을 다 시키고 난 다음에는, 이 용을 다 하고  난 그때가 언제인고 하니 이용을 다하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이제 이 죄를 이제까지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다가 다 사용할 시기가 지나가 버리고 필요가 없을 때에 마지막에 이 죄를  위를 삼킨 죄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 죄를 유황불 구렁텅이에 넣어서 영원히  태워 버리시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이 현실이라는, 이 현실이라는 현실은 죄로 더불어, 나는 싸우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죄는 나를 삼킬라고 하고, 나는 죄에게 삼켜지지 아니하고  죄를 이길라고 그렇게 하고, 죄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 우리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12장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죄를 대항하되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지 안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거 세밀히 모르면, 예수님의 대속을 모르면 안 돼. 이 예수님의 대속이 지금  세밀히 여러분들에게 나올 수 있는 기회가 돼 가지고 가르치는데 예수님의  대속을 모르면 압니다. 뭐 이렇게 뭐 하는 거 보면 저 사람이 대속의 근본을  모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어.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말이오, 그거 모르고. 여기서 뿌럭지가 나와야 되지 여기서 뿌럭지가 안 나오면  안 돼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큰 소리를 할 수가 없어. 왜? 큰 소리 하면  여러분들이 그만 큰 소리에 거기 미혹 받아 가지고 이 사실을, 세밀한 것을  여러분들이 들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우리가 현실에서 죄는 우리를 죄가 점령해서 죄화시킬라고 애를 쓰고,  우리는 현실에서 죄를 범하지 안하고 죄를 이길라고 힘을 쓰고 둘이 싸움이  붙는데 그 죄가. 그러면 우리로 더불어 현실에서 싸워서 우리를 점령해 가지고  죄가 이기면 내가 죄에게 종이 됩니다. 죄에게 종이 되면 뭐이 종이 되는고 하니  내 전체는 종이 되지 안하지만 그 현실 그 기회에 거기 출전한, 그 현실과 그  기회에 출전한 내 마음의 기능, 내 몸의 기능, 다시 말하면 육체의 기능, 영의  기능은 아니고 영은 벌써 살아났고, 육체의 기능은 죄에게 졌으면 그때 출전한  기능은 죄의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사망을 당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죄에게  진 기능은 영원한 사망을 당해 버립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이라. 둘째  사망은 누가 주는고 하니 예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은 예수님이  주시는 사망입니다. 둘째 사망은 어디서 사망을 주는고 하니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사망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주는 거 아닙니다. 그  사망은 그 현실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이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말아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으라 이랬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그 현실을 살아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살아라 했는데  에베소서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하는 그 전신 갑주가 뭐인고 하니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벗지  안하면 죄는 그 사람의 기능을 죽일 수가 없고 범죄케 하지 못해. 그거는  범죄함으로 죽는 것인데 범죄케 하지 못하니까, 범죄케 하지 못하면 그  현실이라는 그 현실에 출전한 심신의 기능 모든 심신의 기능이 그 현실에 다  출전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실에 출전하는 심신의 기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수가 많은데 심신의 기능이 그것이 여러번 싸워  가지고 죽느냐? 단번에 싸워 가지고 단번에 죽고 단번에 싸워 가지고 영원히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이라는 현실에는 우리 기능이  영생을 벗지 안 하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벗지 안하면 영생으로 완성돼  버리고, 내 자체가 영생 돼 버리고, 내 기능이 그때에 그 죄로 더불어 싸워  가지고 죄에게 진 그 현실에 출전한 심신의 기능은 영원한 사망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은 영원한 생명의 영생의 기능이 되느냐 영멸의 기능이  되느냐 그것이 판정되는 것이 우리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리켜서.

영원한 판정 돼서 사망되는 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둘째 사망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사망 당한 사망이 아니고 공심판에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다 살려 놓은 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만 안하면 되는데  예수님의 대속을 벗기 때문에, 제가 들어서 예수님이 살려 놓은 것을 제가 자살  행위를 해 가지고 죽었기 때문에 그것은 둘째 사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둘째 사망인데 저는 죽을 일을 하고도 안 죽을라고 애쓰는 것이 인간인데, 죽을  일을 하고 안 죽을라고 애를 쓸 때에 그때에 너는 죽을 일 했기 때문에 죽어야  된다 하고서 죽이는 그 심판은 무슨 심판입니까? 사심판이요, 예수님이 죽이는  것이요, 예수님이 죽이는 거, 사심판.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그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음을 받는 그리스도의 심판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죄로 더불어 싸우는데 죄로 더불어 싸우되 그 죄를 전부, 한없는 죄가,  세력이 있는데 그 죄와 나와 더불어 다 싸우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제한을 해  가지고 내가 힘만 쓰면, 내게 이미 받아 가지고 있는 기본 구원이 있고 내게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내게 있는 주님의 은혜를 버리지 안하고 그 주님의  은혜를 그것을 다 이용하는, 받은 은혜를 가지고 은혜 생활을 하면 이기도록  그런 정도로써 그 죄를 우리에게 전투시키는 것입니다. 대결시킵니다.

 그럴 때에 내가 죄를, 내가 아무리 해도 못 이기는 죄가 아니고 내가 아무리  해도 못 이기는 죄가 아니고 내가 받은 바의 은혜를 배반하지 안하고 그 은혜  생활을 하면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죄이기 때문에 그 죄를 가리켜서 로마서에  뭐라고 말했는고 하니 그 죄는 우리에게 왕으로 온 죄가 아니다 그 말했어요.

왕으로 온 죄가 아니다. 왕으로 온 죄 같으면 그거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왕권을 부리겠는데 그거는 종으로 온 죄다. 왕으로 온 죄가 아니고 종으로 온  죄다. 예수님이 점령해서 예수님의 종으로 온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죄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에게 죄로 더불어서도  연단을 받아야 될 것이기 때문에 죄를 보내 가지고 우리를 연단시키는, 주님의  사랑이 그 죄를 보내서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 죄는 사랑이 아니고 죄 그놈은  우리를 삼키고 싶지만 예수님에게 벌써 패전해서 예수님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삼키는 그런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지 못하고 예수님이 조금 대항하라면 조금  대항하고, 많이 대항하라면 많이 대항하고 그때에 죄의 단체를 열 명이  달려들어라, 백 명이 달려들어라, 예를 들면 비유컨대는 천 명이 달려들어라.

예수님이 한정을 해 준 그 한정 안에서 저희들이 와 가지고 우리의 기능으로  더불어 싸우지 무제한의 능력 가지고 싸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죄로 더불어 싸우는데 죄로 더불어 싸운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죄로 더불어 싸운다는 말은 삐뚤어진 것으로 더불어 싸운다는  말입니다. 죄는 삐뚤어진 것입니다. 죄는 삐뚤어진 뭉텅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현실을 살 때 그때에 내가 죄로 더불어 싸우는 그것은 죄로  더불어 싸우는 것은 뭘로 더불어 싸우는 것이냐 하면 삐뚤어진 것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삐뚤어진 거는 언제 삐뚤어진 것이 생겼던가? 에덴 동산에 뱀이,  삐뚤어진 뱀이 들어 와 가지고 삐뚤어지게 자꾸 인간들을 가르치고 말해 가지고  인간을 정신도 삐뚤어지게 생각도 삐뚤어지게, 지식도 삐뚤어지게, 소원도  삐뚤어지게, 비판도 삐뚤어지게, 평가도 삐뚤어지게, 취미도 삐뚤어지게, 전부  삐뚤어진 거를 막 우리에게 바꿔 줘 버렸습니다. 바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악의 뭉텅이는 모든 삐뚤어진 뭉텅이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현실을 당할 때에 마귀의 일군인, 마귀의 일군인 세상  왕이 삐뚤어진 걸 가지고 나를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마귀의 일군인 세상  왕이, 삐뚤어진 왕이 나에게 와서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세상의 삐뚤어진  모든 고관 대작들이 나를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또 내 친구가 와서 나를 또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또 내 대적이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세상은 악한  자의 것이 됐습니다. 돈이 와서 나를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모든 물건들이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짐승들이 삐뚤어지게 할라 합니다.

 주일 날 돼지 먹이는 사람 돼지 나오면 그 돼지가 나와서 나오면 이웃 사람들이  막 돼지 나왔다고 야단을 지기고 욕을 하면 그거 가둬야 되지 않습니까? 돼지가  들어서 그 날 주일을 범하게 만듭니다. 제가 한번 체험했습니다. 예수 믿은지 두  주일인가 지났는데, 두 주일 지나고 나서 그 날 주일인데, 돼지를 단단히 가둬  놨는데, 그 돼지가 어떻게 그만 뛰어 넘어왔습니다. 뛰어 넘어왔는데 내가 뛰어  넘어왔을 때에 그걸 내가 척 감이 오기를 '아, 저것이 들어서  나를 주일을  범하게 만들라고 지금 저와 같이 지금 돼지를 통해서 마귀가 역사한다.' 이것  알기는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뭐 그만 내비두자' 그래 가지고. '돼지를 누가  그만 잡아먹고 그만 그래 그라면 잡아먹고 그만 그 나한테 욕하지 안하면  좋겠는데,' 그 말을 암만 '그 돼지 그거 그만 뉘든지 그만 잡아먹어 버리소.

잡아먹고' 이래. 이런 말을 내가 속으로만 했지 겉으로는 못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그란다고 해 가지고 내 돼지를 잡아먹습니까? '아, 돼지가 나왔으면  빨리 와 가지고 돼지를 후쳐서 막으로 넣어 가지고 가둘 일이지 누가 돼지를  잡아먹을라 하나? 돼지 그거 배 채우는 것으로 그 사람들이 또 죄를 짓고  아무래도 해결이 안 돼. 그라는 그 날은 주일을 범해야 돼. 어짤 도리가 없어,  안 범할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욕을 하고 이게 돌아다니면,  그래 내가 보니까 할 수 없어 내가 쫓아다니는데 평소 같으면 돼지를 쫓으면  그까짓 거 잠깐 쫓으면 이렇게 우리 안에 들일 수 있는데 내 속에는 요놈 속에  마귀가 들어와 가지고 요놈이 지금 나를 지금 요라고 있는 줄 알면서, 뒤에  따라가면서 그렇게 기도하면서 그래 합니다. 이래도 요놈이 생각 밖에 요리 가고  조리 가고 요래 가 가지고 어쩌든지 내가 주일을 왕창 범해서 주일을 완전히  범하도록 그렇게 지금 작용한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내가 그 이튿날 그 돼지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 주일 지나고 그 이튿날 그것을 없애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없애는 그것도 좋기는 좋지만 그런, 한번 더 그런 시험을 당했으면  먼저 미리 광고를 해 가지고 '나오거들랑 다 그게 내가 주일 범하기 위해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지금 잡아먹은 것이 내게 도움이 되니까 어쩌든지  나오거든 이 다음에는 잡아먹어 없애 버리이소' 이렇게 말을 했으면 좀 더  야나지게 이길 터인데 그만 그때는 미숙해서 그렇게 그만 그 이튿날 잡아  버렸어요.

 그래 우리가 현실을 닥치면 사람도 삐뚤어진 운동을 내게 와서 합니다. 또  짐승도 삐뚤어진 운동을 합니다. 물건도 삐뚤어진 운동을 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조종자는 누굽니까? 조종하는 자는 누구요? 조종자는 마귀요  마귀 위에 조종자는 누구십니까? 주님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리 돼 가지고 있어서 그러기에 내가 현실은 죄로 더불어 싸워서  어떻게 삐뚤어지게, 그러기에 죄로 더불어 싸우는 거는 삐뚤어진 것들 하고  싸운다 하는 이것을 여러분들이 명심하십시오. 삐뚤어진 것은 뭐이냐? 세상에  있는 것은 다 삐뚤어진 것입니다. 지식도 삐뚤어졌고 다 삐뚤어졌습니다.

궁극적으로 삐뚤어지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 삐뚤어진 거는 뭐인가? 안 삐뚤어진 것은 하나님이 안 삐뚤어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안 삐뚤어겼고, 또 역사하는 역사가 더 나오고  보니까 진리입니다. 진리가 안 삐뚤어졌고, 진리가 또 나오고 보니까  말씀입니다. 말씀이 안 삐뚤어졌고, 말씀이 또 나오니까 뭐입니까? 성경. 성경이  안 삐뚤어졌습니다. 그 외에는 다 삐뚤어진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안 삐뚤어진 대로 현실에 할라고 하는데 뻐뚤어지게  할라고 내 주위 환경에 사람 짐승, 물건. 사건 이런 것들이 막 합동 해 가지고  삐뚤어지게 할라고 애를 씁니다. 삐뚤어지게 할라고 애를 쓰는데 그 단체를  가리켜서 이름을 뭣이라고 합니까? 예? 나를 삐뚤어지게 하는 그 단체 이름을  뭐이라고 합니까? 나를 삐뚤어지게 할라고 이렇게 막 달라들어 가지고 이렇게 내  현실에서 달라드는 그 뭉텅이를 가리켜서 뭐이라고 합니까? 죄, 또 세상이라  해도 됩니다. 세상이라 해도 되지만 세상이라 하는 것은 칠십 점 밖에 안 될  것이고 죄라고 해야 백점이 됩니다. 죄가 뭐이냐 할 때는 삐뚤어진 세력들이라  그렇게 발하면 백점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삐뚤어진 그것은 세상인데, 세상은 마귀의 것이 됐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라고 말했습니다. 세상  임금이라 말은 세상을 점령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첫째 아담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첫째 아담이 뱀에게 졌기 때문에 뱀은 세상을 탈취했습니다.

인간은 세상을 빼앗겼습니다. 빼앗겼는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도로  찾았습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것입니다. 것인데, 이 세상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지금 사용하고 있는가? 이 세상은 예수님이 점령해서 예수님의 것이  됐는데, 이 세상을 예수님께서 그냥 묶어 두십니까 이 세상을 예수님이, 당신이  지금 이용을 하고 계십니까? 이용하고 계십니다. 어디다가 이용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구원을 연습시키고 연단시키고 연성시키는 데에 이용을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주님의 구원은 광대합니다. 가득 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태 속에 들어서 우리는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이 우리를 해할까 염려하는 것은 다 불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그러기에 죄로 더불어 싸웁니다. 이기면  그때의 기능은 받은 바의 영생으로 그대로 영생을 가지게 되고, 그때에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벗었고 영감을 벗고 진리를 벗으면 우리는 이제. 살았던 것이  다시 두 번 죽습니다. 살았던 것이 인간 그 원죄와 본죄로 죽었던 것이 아담의  범죄로 죽은 것이 원죄로 죽은 것이요, 우리 자신들이 원죄의 힘으로 인해서  범죄한 죄로 죽은 것을 가리켜서 본죄로 죽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죄와  허물로 죽었다 말은 죄는 원죄를 말하고 허물이라 하는 것은 본죄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죄로 우리가 싸워 가지고 그에게 지지 안하면 죄를 우리가  승리했기 때문에 우리는 승리한, 예수님이 대신 승리해 주심으로써 우리는 살아  있었는데 산 기능이 됐습니다. 죄를 이겨 산 기능이 됐었는데 우리가 현실에서  이 산 기능을 벗지 안하고 이 산 기능을 가지고 제가 산 기능으로 살면 산  기능이 뭐입니까? 산 기능이, 진리가 우리의 산 기능입니다. 영감이 우리의 산  기능입니다. 예수님이 대형, 대행, 대화친 이 대속이 산 기능입니다.

 이 산 기능을 벗지 안하면 이 산 기능이 그대로 현실에서 영원히 산 것으로  되고마는데 이제 현실에서 이 세 가지로 된 산 기능을 벗어버립니다. 왜  벗어버리느냐? 이 세상에게 유혹을 받아서 벗어버리든지 세상에 재미가 있어  벗어버리든지 세상을 사랑해서 벗어버리든지 세상 세력이 두려워서 벗어버리든지  두려워서 벗어버리는 것도 있고, 꼬임 받아 벗어버리는 것도 있고, 세상이  좋아서 벗어버리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거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지  안했는고로 그 현실에 지금 네가 입고 있느냐, 예수님의 대속과 내가 새생명을  취하겠느냐,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를 네가 가지겠느냐. 이거보다도  세상을 가지겠느냐? 네가 현실에 네 개적 자유성을 가지고 네가 자유하라 할 때  그때에 자기가 세상을, 위협에 눌렸든지 미혹을 받았든지 좋아서 했든지  어쨌든지 그 현실에 죄에게, 제가 죄에게 져서 죄는 나를 이겼고 나는 죄에게  패전해서 죄에게 졌으면 죄의 종이 되기 때문에 그때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의 해는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아니고  둘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살았던 것을 제가 다시 재범해서 죽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의 해라 그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은, 죄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는 기능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기능을 네가 보배로 알고 그 기능을 강직하느냐. 예수님의 대속을  네가 간직하느냐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버리느냐 하는 그 싸움인 것입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예수님의 사죄에서, 예수님의 사죄는, 사람들이  자율대로 산 죄 값입니다. 자율대로 산 그 죄 값이요, 자율대로 사는 죄 값인데  그 자율대로 살던 우리들을 자율대로 살지 안하고 타율로 살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내 맘대로 살지 안하고 내 소원대로 내 욕심대로 살지 안하고  성령으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내 욕심을 죽이고 성령의 욕심으로, 내  소원을 죽이고 성령의 소원으로, 내 취미를 죽이고 성령의 취미로 내 주장으로  사는 게 아니라 성령의 주장으로 우리가 살도록 그렇게 우리를 살려 놨습니다.

 살려 놨으면 우리 현실은 무슨 싸움이 있는고 하니, 무슨 싸움이 있는고 하니  이 현실에는 영감으로 사는 진리와 영감과 피로 중생 된 새사람 내가 새사람으로  현실을 지금 내가 사는데, 새사람으로 내가 사는데 새사람하고 그때 싸우는  상대방이 있습니다. 새사람으로 더불어 싸우는 상대방이 있으니 그 상대방은  어떤 것인가? 그놈은 날 늘 꼬우고 있던 옛사람입니다.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그 사람입니다.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그 사람입니다. 악습으로  된 사람이라 말은 이제까지 내가 하나님을 어겨서, 하나님을 어겨서 언행심사를  해 놓은 그것이 한번 하면 한번 했고 두 번 했다면 또 연습을 했고, 세 번  했으면 세 번 연습했고, 열 번 했으면 열 번 연습했고 연습을 할수록 이게  숙달이 돼지고 그게 장성해집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악습이라. 자기중심으로  이제 한번 두 번 해서 모은 악습이라. 연습한 것이라. 그것을 가리켜서  구습이라. 또 그것을 가리켜서 버릇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들어서 나하고 싸웁니다.

 이제 과거에는 우리가 이 옛사람이 내인 줄 알고 내 마음과 몸은 옛사람에게  점령되어서 옛사람을 그것을 주인으로 삼아 가지고 마음도 옛사람을 위하고,  몸도 옛사람을 위하고, 또 마음과 몸은 옛사람 그것이 시키는 대로 그와 같이  했던 것입니다. 했는데 이제는 옛사람을 그걸 예수님이 완전히 점령해서 완전히  죽였습니다. 완전히 점령해서 죽였는데, 죽였다 말은 기능적으로 죽였다 말이오  권리로 죽였다 말이오. 죽여 권리를 예수님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은 지금 누구의 것이 돼  가지고 있느냐? 예수님의 소유물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용물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점령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것을 지금 이  세상에 두고 우리 개인 개인을 그 개인 개인을 개인 개인의 옛사람으로 더불어  싸움을 붙입니다. 이래서 옛사람으로 더불어 싸움 붙이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칭의에 속한 것입니다.

 칭의에 속해서 싸움을 붙이는데, 그러면 우리가 현실을 당했을 때에 내가  중생된 성령의 욕심으로 할라고 하는데, 성령의 욕심으로 할라고 하는데  옛사람의 욕심 육체의 소욕, 육체의 소욕이라 말은 고깃덩어리와 마음이 주장이  돼 가지고 있는 그 존재가 육체인데 그것이 새사람된 것은 고깃덩어리와 마음이  하나님에게 점령되어 가지고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이 새사람인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서 옛사람과 이 새사람이 둘이 싸우도록 새사람은 참  내요, 새사람은 누군가? 중생된 영입니아. 중생된 영은 그 영이 중생했는데,  중생한 영은 그의 사상이 무엇인가? 그의 사상은 영감입니다. 그의 법칙은  뭐인가? 진리입니다. 그러면 그는 어디 속해 있는가? 하나님에게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면 그 중생된 영은 무엇에게 피동되어 있는가?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있고, 중생된 영은, 그러면 그것은 어떤 움직임을 하고 있는가? 그거는  성령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떤 법칙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하나님의 법칙인  진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나는 진리의 법칙으로 할라 했는데 이  옛사람 이것은 인간 법칙 인간 법칙, 옛사람, 옛날 예수 믿기 전에 내 법칙, 내  주관,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 예수 믿기 전에 내 주관하고 나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 내 자율, 내 주장이라는, 내 자율이라는 내 생각. 내 뜻  내 의견 그거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또 나는 과거에, 악령에게 속한 줄 몰랐는데 자기중심, 악령이란 것이  자기중심인데 자기중심하고 싸웁니다. 자기중심하고 싸우는 이것이 뭐이냐 하면  나는 하나님 중심하고 자기중심하고 둘이 싸워서, 나는 하나님 중심으로 중생된  자인데 내가 현실 닥칠 때는 반드시 세 싸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냐  자기중심이냐? 자기중심 그거는 내가 아닌 나를 죽인 나 아닌 원수인 나, 나  아닌 나, 나를 죽인 나, 나 아닌 나 그놈은 자기중심으로 이와 같이, 자기  위주로 이와같이 사는데 나는 이제는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은 이렇게 살라고 합니다. 영은  변동이 없습니다. 영은 이제 하나님, 하나님 위주로 또 성신의 감동으로 또  하나님의 이 진리의 법칙으로 이렇게 이게 저희의 힘이요. 저희 자체의 힘이요,  영은 첫째 아담에게 받았지만 첫째 아담에게 받은 것이지만 그 죽었던 것을 이  세 가지 능력이 살렸습니다. 하나님 중심인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과 화친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 중심 위주로 살아났고, 또 성신의 감화 감동으로 살아났고 또  진리로 살아났습니다. 살아났는데, 이 살아난 내가 이 사람으로 살라고 하는데  저기서 와 가지고 진리로 살라고 하는 나를 인간의 지혜 지식대로 살라고 자꾸  꼬우고 협박도 하고 그랍니다. 협박을 해도 주님이 나에게 내가 이길 수 있는  정도의 협박으로 했고, 그 협박을 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나에게 씨름  붙였기 때문에 이걸 아는 사람이야 염려하고 걱정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님이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율하고 내가 진리하고 둘이 서로, 나는 진리대로 살라 하고 또  자율대로 살라 하는데 사람들이 자율대로 살라고 인간 뜻대로 살라 하는 그것이  지금도 그 옛사람이 내 몸 안에 현실에는 들어와 가지고 나를 미혹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율로 하는 것이 나같이 돼 가지고 옛날 나를 점령할 때 꼭  그와같이 해 가지고 점령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분명히 똑똑히 아는 사람은,  아예 그 옛사람을 구별하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데, 여기 인간의 뜻대로 인간의 뜻대로 살라 하는 이거는 원수다 이거는 나  아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이놈아 너는 죽어야 된다.' 하고 십자가의 공로로  이것을 죽여야 됩니다. 그 원수라는 것을 알면 그놈이 와 가지고 물러가 버리고  맙니다. 이래 가지고 자율을 나는 죽여야 되겠고, 자율 그거는 나 아닌 순전히  뱀이 와 가지고 내게 만들어 놓은 공작인 것입니다. 뱀이 와서 만들어 놓은 그  모든 건축들이요 건물들인 것입니다.

 자율로 더불어 싸우고 그 다음에는 이제 내가 내 주관, 내가 주인이 돼 가지고  내 주관으로 사는 내 주관으로 나는 살지 안하고 이제는 성령이 나를 주관하는  성령이 나를 주관하는 것으로써 성령의 주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내가 살라고  하는데 자기 주관으로 살도록 할라고 애를 써 자기 주관 그놈이 옛날 나같이  나를 내치 오래 동안 점령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같이 나와 가지고 옆에  사람이 말하기를 '야, 내 주관을 자꾸, 옛날 내 주관은 내 주관이 아니고 마귀의  주관이요 사탄의 주관인데, 그 주관대로 하게 할라고 그래 애쓰며-이게 너  아니가. 이게 너 아니가? 이렇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 자꾸 그렇게 할 때에  그게 제인 줄 알고 옛사람이라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그걸 제인 줄 알면 그  착각에서 쾅 넘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거는 내가 아니라 이거  원수라. 이거는 분석을 하면 악령 악성 악습으로 말미암아 뭉쳐져 있는 악습  뭉텅이요, 악령 뭉텅이요, 악성 뭉텅이라.' 악성 뭉텅이라는 것은 인간의  요소요, 악습 뭉텅이라는 것은 행동의 요소요, 악령 뭉텅이라는 것은 타락한  천사의 뭉텅이인 것입니다. 이것으로 되어 있는 이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제  그것으로 더불어 싸웁니다.

 싸워서 그것을 현실에서 이긴 그 기능은, 주님에게 받은 그 기능을 배반치  안하면 그 기능이 이깁니다. 딴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이 이깁니다. 그 기능이  우리 기능입니다. 우리 기능은 진리가 우리 기능입니다. 진리의 힘이 우리  기능입니다. 영감의 힘이 우리 기능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중심돼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하나된 그 하나님 위주 중심인.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힘인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영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리가 우리 된다는 말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보다 무한히 탁월해  있습니다. 탁월해 있기 때문에 진리의 역사하는 그 힘이 내 힘입니다. 진리의 그  힘이 내 생명의 힘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내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성령의 그  힘이 내 힘이 됩니다. 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 된다 말  아니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그 무한하심이, 무한하심의 그 능력이 내 것이  되고 내 힘이 되고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신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본체 외에는 전부다 우리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본체 외에는 다 우리 것이 됐는데 우리 것이 된 것은 제가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된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으로  된다 그말이오. 뭐 받는 무슨 딴 방법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정 안하고  부인하면 안 됩니다. 또 그것으로 살지 안하면 안 됩니다. 인정하고 살면 그만,  하나님의 본체 외의 것은 전부가 다 내것되기 때문에 인정만 하고 내가 그대로  살면 되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래서 세 가지 싸움, 마지막 싸움은 하나님 중심이냐 위주냐 그 싸움은 이제  악령으로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악령이 천사로 있을 때에 자기중심이라는 그  중심의 움싹이 하늘나라에서 텄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타락한 천사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타락한 천사는 흑암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는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언제든지 흑암 가지고 우리를 항상 미혹시키고 다스리고  흑암 가지고 점령합니다.

 흑암 가지고 점령한다 말은 삐뚤어진 거 가지고 점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삐뚤어진 것뿐이지 삐뚤어지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빛을  보지 못 하게 했기 때문에 그에게, 빛은 옳고 바른 것을 말한 것인데 옳고 바른  것은 마귀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다 이  악령에게 점령됐기 때문에 온 세상은 빛이 없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온 세상은  빛이 없는데, 빛이 왔으니 그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 흑암 가운데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다 삐뚤어졌다는  말입니다. 삐뚤어졌다는 것인데 사람이 부분적으로 소범위를 가지고 보면  삐뚤어지지 안한 것 같지만 그 전체를 보면 삐뚤어졌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비유컨대는 잣대를 가지고 이 한 치 되는 걸 가지고, 한 치 되는 그것을 가지고  보면 쪽 곧다 보이지만 그 한 치. 예를 들면 수천 메타로, 원형. 수천 메타의  원형으로 되어 있는 그걸 만일 수만 동가리를 끊어 놓으면 그 동가리는 다  전부가 다 쪽 쪽 곧은 거 같지만 한테 맞추면 다 합해지면 동그래지는 것이고  곧은 것은 하나도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람이 좁은 범위로 보고 인간에게 옳은 것이 있다.

이것은 옳지 안하냐?' 이렇게 범벅타령을 하지만 그거는 소범위에서 제가 미혹을  받아 그런 것이지 그 전체를 다 보면, 대범위로 보면 그것이 다 절대자 자존자,  창조주, 완전자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게 존재했는데. 보존되어 있는데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다 생겼고, 보존되어 있고, 먹고사는 것인데 그분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삐뚤어진 것입니다. 모두 그거는 하나님  중심이 아니고 피조물 중심이요 피조물 위주가 됐기 때문에 그 근본적으로 큰  둘레로 보면 그게 다 곧은 것이 아니고 동그란 동그라미인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현재에는 세 가지로 더불어 싸우는데, 나는 누구며  나로 더불어 바로 마주 싸우는 제일 모든 죄악의 뭉텅이가 내게다가 딱 가깝게  붙여 놓고, 가깝게 붙여 놓고, 마치 삼손을 블레셋 나라가 들릴라를 통해 가지고  삼손을 요리하고 작용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은 이 죄악의 뭉텅이인데,  그 죄악의 뭉텅이가 내게다가 딱 가깝게 붙여 놓고 나를 지금 미혹시키고  위협하고 이와 같이 하고 있는 내게 속한 들릴라는 누굽니까? 블레셋에서 보내는  들릴라와 같이 온 세상은 나에게 보낸 그 들릴라는 누굽니까?  옛사람, 나 아닌 나. 나를 속이고 감쪽같이 나는 죽였고 그놈이 가장해 가지고  내라고 했기 때문에 이 마음도 몸도 어리석어서 그게 낸 줄 알고 그놈에게 딱  들어붙어 가지고, 내 중의 내라 이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해하면 저를 해하는  것인 줄 알고, 그래서 뭐 옛사람 그걸 욕을 하면 막 달라 들고, 옛사람 그걸  책망을 하면 달라 들고, 옛사람을 그걸 칭찬하면 막 좋아합니다. 옛사람  칭찬해서 좋아하지 않는 목사가 별로 없고. 옛사람 칭찬해서 좋아하지 않는  장로가 별로 없고 옛사람 칭찬해서 좋아하지 않는 조사가 별로 없고, 옛사람  칭찬해서 좋아하지 않는 권사, 권찰 뭐 집사 좋아 하지 않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아, 이 사람이 지금 나를 지금 칭찬하는 것은 이거 나를 착각하고 있구먼.

나를 유혹시키고 있구먼. 내 원수인 옛사람을 슬슬 치켜올리면서 그놈이 낸 줄로  착각하라고 하는 것이구먼. 여보, 그 칭찬하는 것은 나 칭찬하는 거 아니요.

그거는 나 아니요. 그거한테 가 하십시오. 왜 나한테 그런 말하시오.' 말을 안  해도, 박하게 말 안 해도 딱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날 칭찬할 때에  '이 사람이 나를 옛사람을 만들라고 하네. 그 칭찬은 내가 받을 것 아닙니다.

그거는 옛사람에게 하십시오. 나는 옛사람 사람 아닙니다. 새사람입니다. 똑똑히  '이게 내입니다' 하면 그때에 그 사람도 살리고 나도 다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에서 이 셋으로 더불어 싸우는 그 싸움을 싸우는 것이  그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이 셋  싸움을 내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이지 이  세 가지 싸움에 패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암만 입으로, 불러  쌓아도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크게 말하면 십자가의 보배 피. 이래서 피를 말했습니다. 그  피는 무엇입니까? 피는 그것은 곧 세 가지를 내 대신해서 완전히 멸할 걸 멸해  버렸고, 다 정복할 걸 정복했고, 승리할 걸 승리했고 했는데 그 세 가지는  뭐이냐 하면 진리와 성령과 이제 하나님의 본체, 이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를  본체와 우리를 결합을 시켰고, 또 영감과 우리를 결합을 시켰고, 진리와 우리를  결합을 시킨 것이 이것이 중생인데, 그 셋을 합해서 예수님의 피라 이렇게  말하고, 또 영감과 진리라고 또 새로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안에는 영감과 진리와 하나님 자체와 이 셋이 합해 가지고  완성을 이룬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인데, 이 완성을 이룬 것이 대속의  공로인데 이 대속의 공로를 이루어 놓고 이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이 대속의  공로를 입고 대속의 공로를 효력 있게 역사를 하도록, 효력 있게 활동을 하도록,  효력 있게 우리에게 역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효력  있게 역사하기 위해서 이 역사의 책임을 지고 우리에게 나타난 존재가 있는데.

이 책임을 지고 인쳤다. 인쳤다 말은 책임졌다 말입니다. 성령으로 인쳤다는  말이 있지요? 성령으로 인쳤다는 성경에 아십니까? 예? 성령으로 이치셨다. 그  성구가 어데 있지요? 예? 한 번 읽어 봐요.

에베소 1장에 약속의 성령이라 그말은. 인쳤다 말은, 인을 쳤으면 어느 계약서에  인을 떡 쳤으면 그 인 주인이 어쨌다는 말이오? 책임졌다는 말 아니요? 그말은  인쳤다 말은 성령이 책임졌다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하면 하나님 본체와  하나님의 역사인 영감과 또 그 영감이 나타난 이 법칙인 진리와 이 셋이 합해  가지고 승리를 했는데. 이 셋이 합해 가지고 승리했는데 예수님의 신성이 승리  했으면 우리와의 그 연경이 안 되지만 예수님의 신성이 부득이 해서 인성을 입고  와 가지고 인성으로 우리를 대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대속이 우리의 대속이  완전히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 속에는 이 셋이 있는데 이 셋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가지고 실제화시키도록 이 현실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을 완전히 입었다.

부인이냐, 예수님의 대속을 부인이냐 인정이냐. 부인이냐 인정이냐 그것이  결정되어지는 그 시기가 있으니까 그 결정되어지는 그 시기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집어 던지느냐 그것을 이제 시험하는 그것이 언제입니까?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주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을 네가 입기는 입고 네것 됐는데 이제  네것으로 네가 강직하느냐 네가 싫어서 그 세상이 그것보다 좋아서 벗어 던져  버리느냐 하는 그것을 이제 시험하는 그것이 현실이니 현실에서 영원히 벗을 수  있고 현실에 영원히 입는 것으로 되는 것이 되고 이 둘이 됩니다. 이것 은 단번  시험입니다. 두 번 없는 것입니다. 단번에 영생이요 단번에 영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 아닌 나, 나 아닌 나 그놈, 악령 뭉텅이, 악령이란 말은  자기중심으로 움직이는 그 영이라는 말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악령이라. 그  악이라는 것은 자기중심 자기 위주 그걸 가리켜서 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령 뭉텅이. 악성 뭉텅이는 우리 인간의 이 본성을 자기중심의 본성을 삼았기  때문에 악성이 됐다 말이오. 또 악습은 자기중심으로 한 행동 한 행동 한 것을  모아서 악습이라고 말하는데, 이제 이 악령 악성 악습의 것이 된 내 심신을,  것이 된 내 심신을 예수님께서 대속으로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공심판에서  이것을 예수님께서 다 구출해 가지고, 구출해서 악령 악성 악습에 물이 든 것을  악령 악성 악습을 입고 있는 것을 이것을 예수님께서 홀딱 벗겨 버렸습니다.

완전히 탈색을 해 버렸어.

 탈색을 해서 우리는 이제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게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과  성령과 진리의 이 꺼풀을 입었습니다. 우리 자체가, 우리 자체가 성령 된 것도  아니요, 우리 자체가 진리 된 것도 아니요. 우리 자체가 하나님 된 것도 아닌데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그 본체의 역사 또 영감 역사 진리 역사. 진리는 없는  가운데서 모든 존재를 창조한 이 창조의 아주 탁월한 고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이  진리는 사람을 만들어 내고 우주 존재를 만들어 놓은 진리기 때문에 내가  진리되는 거 아닙니다. 그 만들어 놓은 그 진리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됐습니다.

진리의 역사가 내 역사가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진리는 아니나 진리의  능력은 다 내것이 됐습니다.

 이랬는데, 그 현실에서 네가 이 새사람으로. 이 세 가지로 된 새사람 이 기능을  가지고 네가 사느냐, 다시 또 창기와 마찬가지로 이제 이것을 벗고 악령, 악성,  악습 그놈은 원수인데 그놈에게로 네가 가느냐 한번 시험하는 것이오. 이것이  최고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큰 대속을 이루어 놓고 네가 그렇게  지금 이 창기 너를 이렇게 더럽다 하지 안하고, 피투성이 너를 이렇게 구속해  냈는데 네가 또 지금도 그걸 좋아하느냐, 지금은 네가 그것을 배반하고 나를  좋아하느냐? 이거 시험하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보면  그것을 똑똑히 가리켜서 말씀해 놨습니다.

 이랬는데 현실을 닥칠 때에, 현실을 닥칠 때에 이제 주님으로 말미암은 대속의  공로와 또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로 되어 있는, 이 세 가지 힘으로 세 가지  법칙으로, 세 가지 대속으로 말미암아 되어 있는 내가 이래 현실을 척 닥치니까  옛날 간부 그놈이 옵니다. 간부 그놈이 오는데 간부 그놈의 이름이 세상인데  그거는 그 옷 입는 거같이 뚜렷한 그런 것인데 세상인데 속에, 세상 이 간부인데  그 속에 알맹이 간부는 옛사람입니다. 옛사람 그놈하고 나하고 내 마음도 내  고깃덩어리도 그놈하고 친해 가지고 그놈이 제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성령으로 알게 해 주시고 자꾸 알게 하시는데 이 간부하고 매력이  있다 말이오. 옛사람 자기 아닌, 자기를 죽였는데 매력이 있다 그말이오.

 이래서, 그것이 간부인데, 그러면, 그것을 자꾸,  간부니까 네가 그것을  배반하느냐 지금도 그 미련을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이 한번 시험하신다 말이오.

시험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현실에서 이 간부를 착 버리른 것이 본 남편  하나님을 점령하는 것이오. 하나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로 사는 것이  내가 당신의 뜻에 내가 속하는 것이요 영감으로 사는 것이 당신의 역사에  참가하고 속하는 것이요 이제 하나님의 본체에 내가 소망을 두고 중심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럴 때에 착 배반하고 이제 '물러가라. 너는 나를 꼬인 너는 유혹자다. 너는  내 남편이 아니라 너는 간부요 나의 원수다. 물러가라.' 이 인간의 자율을, 자기  자율을 물리치고, 자기의 주관을 물리치고, 자기의 중심으로 사는 그놈을 쏵  죽여서 물리치고, 이제 그때에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하나님의  진리로 그대로의 내가 살고 입을 때에 그때에 하나님이 주셨던 영생은 완전  영원, 영생으로 도장을 꼭 찍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생이 돼 버렸습니다.

그 기능은 다시는 변동 못 합니다.

 그럴 때 배반할 때에 주님이 섭섭해서 네가 그것을 좋아하니까 이제 좋아하면서  그 현실에서 그것을 취했으니까 아무리 그걸 예수님이 점령했지만 제가 좋아해  취했었는데 이제 취한 그걸 하나님께서 '취했지만 너는 살려 준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이 어겨지기 때문에 마귀도 있다가서 '아, 나도 잘못했지만 내가  지금 잘못 한 줄 알면 나를 살려야 되지 않습니까?' 마귀도 다 살리고 전체가 다  그만 엉망진창이 돼 버리기 때문에 안 된다 그거요. 둘째 사망을 시켜야지. 이게  공평이라.

 이러니까, 우리가 둘째 사망이냐 영생이냐 하는 것이 자꾸 현실에 이루어 가기  때문에 현실은 시간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현실이라 그거요. 그러기에 현실을  우리가 그렇게 아주 보배로운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내가 현실에서  예수님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은 이제 말한 것이 이 세 가지 싸움을 가리켜서 이  세 가지의 싸움을 이기는 것이 예수님의 공로를 입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뭐이냐 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나에게 입혀 줄라고 온 성령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성령이 누구로 말미암아 왔느냐? 예수님의  피공로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어떻게 왔느냐? 진리가 예수님의  피공로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그러면 성령과 진리는 뭐 하러 왔느냐? 예수님이  '내것을 가지고 증거한다.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증거하리라.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신이 오겠는데 그 성신은 내것 가지고 말할 것이고 내것을 다  증거하리라' 내것을 증거한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에게 똑똑히 알리고,  대속을 입었기 때문에 대속을 벗지 말라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대속을 내가 현실에서 벗지 안하고 대속을 위해서 이기도록  승리케 하시는 조작과 모든 공작을 하고 우리 일을 도와 주시는 그 영감의  인도와 진리의 법칙 그 법칙을 내가 현실에서 나는 지킬라 하고 지키지 못하게  할라 하고. 하는 이 싸움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것이 이 현실은 땅과 같은 것인데 현실을 주님이 나에게 만들어  주셔 가지고, 만들어 주신 이 현실은 주님이 만들어 주신 현실이라. 나를 예수  믿는다고 불에 태워서 죽이는 그 현실도 주님이 만들어 주신 현실이라. 나를  예수 믿는다고 소련으로 잡아가 가지고 저 소비에트 그 지하실 모든 탄광  실에다가 갖다 넣어 놓고 어떤 고문과 고형을 하고 나를 예수 믿는다고 자꾸  찢고 불로 태우고 가죽을 벗기고 오만 거 어떻게 하든지 그 현실은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만들어 주신 현실이라!  그것이 겨자씨가 땅 속에 들어갔을 때에 땅이 겨자씨를 썩힐라고 하는데  겨자씨는 썩지 않는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썩지 안하고 결국은 그 생명이  없어지지 안하면 생명은 그것을 삼키고 자라고야 만다. 그 생명이 무엇이냐?  주님의 세 가지 대속이요 세 가지 대속을 위해서 온 영감과 진리니 세 가지  대속을 벗지 안하고 대속을 입고 있고 또 진리와 영감을 배반치 안하고 진리와  영감대로 하는 이 믿음을 가지면 주님이 날 대속하신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믿음이요 내가 나를 돕는 내 힘이요 생명인 영감을 내가 믿고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믿음입니다.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진리는 나의 힘이라 진리는 나를 살린, 나에게 생명이요 능력이라. 진리는  우리에게 생명을 줬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생명의 힘입니다. 영감은 우리를 살린  능력이요, 힘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우리를 살린 능력이요 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이 세 가지 은혜를 내가 입은 자이니 세 가지 은혜를 내가 인정하고  세 가지 은혜를 입고 살면 그 현실에 생명이 그 땅에 묻혀 가지고 죽지 안하니까  그 결과로는 땅을 삼키고야 만다. 이게 죽지 안하고 보니까 땅의 썩히는 힘이  약한 그 박토보다도 아주 썩히는 힘이 강한 옥토가 더 좋다. 이 세 가지를 벗지  안하고 있으면 그 현실에는 이 세 가지를 벗게 하는 강도가 약한 거보다도  강도가 강해서, 불에 태우기도 하고, 지지기도 하고, 고문과 고형도 하고, 오만  일을 다 하는 그것은 참 옥토 중에 옥토라.

 그럴 때에 내 이 세 가지 생명이 요동치 안하고 이 세 가지 생명으로 살면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뭐이냐, 그것이 뭐입니까? 그러다가 완전히 내게 있는 세  가지 생명 이 그 어렵게 하는 그놈을 완전히 콱 잡아먹어 버리고, 완전히  잡아먹고 배가 불룩해 가지고 이래 강건하게 자랐습니다. 그것을 콱  잡아먹었으니 그것이 뭐입니까? 순교, 순교, 그것을 가리켜서 순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사는 것이 반이요 죽는 것이 반인데. 사람이 순생하는  것이 반이요 순교가 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생을 그 사람이 하나도 못 했다  할지라도 마지막에 순교만 하면 반은 성공한 사람이라. 일생 동안 죽도록  충성하고, 충성하고 순교 못 하고 산 사람이나 일생 동안 불충성하고 마지막에  이제 이 세 가지 능력으로 환난 올 때 이겨서 그것을 잡아먹고 이겨 순교한  사람이나 비중이 같습니다. 그러면 제일 높은 사람은 뭐냐? 순생과 순교를 겸한  사람이 제일 높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이런 비밀 세계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이 현실에서, 이 겨자씨 비유에서, 여기서 자꾸. 우리 생명이  생명이 이 세상으로 더불어 자기 현실에서 이 세상하고 싸웁니다. 이 세상하고  싸울 때 그것을 싸워서 이기는 것은 뭐이냐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뭐이냐? 세 가지 이 대속을 자기가 입고 있는 것인 것을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 이 세 가지 대속을 돕기 위해서 온 성령과 진리의 도움을 인정하고 자기가  이 도움을 입고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대로 사는  것이 생명이 죽지 안하고 생명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살면 그 지기는  빨아먹기 마련이요 지기를 빨아 먹고 자라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데 그것을 닥치는 것만 먹고 자라는 게 있고 그 모든 것을 다 먹고 온  세상을 다 한꺼번에 온 우주와 영계의 악령과 악성과 악습의 모든 죄와 사망과  모든 그것들이 점령하고 있는 우주와 영계를 다 점령하고 이제 그것을 다 삼키는  단번에 그 모든 것을 삼켜서 모든 것을 점령하는 단번 점령, 단번 승리.

 (저 조사님 왜 조울라? 뭐 따라오다 못 따라왔어? 못 따라와 졸음이 와? 모르면  헛일이라. 잔소리가 아니야. 우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우주보다 영계보다 큰  말씀이야. 우주와 영계의 주인공이 되는 말씀이야. 왜 적어서 잠이 와? 이거  모르면 헛일이라.)  여기 붙여 사는 자에게는 욕 얻어먹으면 더 좋아. 이단이라고 하면 자꾸  좋아져. 이단이라고 하면 마음 아픈 거 하나 있는 건 이렇게 살 때에 이단이라고  하면 그 사람이 마귀에게 점령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귀 그놈이 괘씸해서 그를  거기서 해방시켜 달라고 주님에게 간구만 하지 자기에게 손해 갈까 싶어서  거석하는 것은 털끝만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기 위해서 언행심사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다른 사람 살리기 위해 하는 것이지 자기는 거기 암말도 안 하고  가만있으면 좋지만 주님이 보실 때 '저놈의 새끼 저만 유익 되도록 엉큼하게,  저만 복되다고 엉큼하게 앉았는가?' 이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알아듣겠습니까?  자기에게는 손해 갈 거 없어. 악한 거짓 걸로 핍박하면 속으로 비쭉비쭉 웃고  이래 있으면 주님이 좋아할 줄 알아 도 그때 발발 떨어서 막 대항해서 싸울라고  하는 그것보다는 좋지만 그걸 저러니까 '내게는 복이다. 욕을 자꾸 해라.

괜찮다. 내게 복 있다.' 이렇게 하면 주님이 섭섭해합니다.

 나 처음에 예수 믿을 때는 나 그래 믿었습니다. 온 그 골짝에서 예수 믿으면  망한다고 막 내가 그때 거기서 술도가 했으니까 그 골짝에서는 좀 유명했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마구 욕을 하고 앉아서 전부 숙덕숙덕 합니다. 숙덕숙덕하면 내  속으로는 뭐이냐 하면, 그때 내가 그걸 발견했어. '저 사람들이 나 욕하는 것은  축복 아닌 거 같은 축복이다. 정말 축복이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게 이제  방해하는 거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마꾸 끌어다 붙이는 것이다.'  그러면 자꾸 욕하는 것을 좋아했다 말이오. 자꾸 욕하는 걸 좋아했어. 좋아해서  자꾸 욕하는 것이 주님을 자꾸 약을 올리거든. 욕을 하는 것이 주님을 약을  올린다 그말이오. 무슨 약을 올려? 자꾸 망한다 망한다 이라니까 '망해? 망해?'  자꾸 하니까 '망해?' 당신이 약이 올라 가지고 '오냐 이놈들 보자, 망하는가  보자.' 이렇게 할 거라 말이오. 그러니까 그 조리 들으면 좋다 그말이오.

처음에는 그런 어린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럴 때 그것도 주님은 보고 좋아하시지만 지금 만일 그런 신앙을 가졌으면 '야  이놈아 너만 복되다고 비쭉거리고 좋고 다른 사람은 어찌 됐든지 그거 네가 무슨  행위고?' 주님이 섭섭해하신다 말이오. 지금은 그렇게 욕을 할 때에, 욕  얻어먹기 싫어서 하는 게 아니고 그게 손해 가서 하는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거기 대해서 자꾸 이런 거 변명을 하고 자꾸 이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다문 얼마라도 건질 수 있도록 그래 가지고 말을 할 수 있는 데는 말을  하고, 말을 해도 되려 튀어 가지고 안 될 데는 말은 하지 못하고 주님에게 '주여  저것들이 알지 못해서 저와 같이 하는 것이니까 이제 저것들을 구출해  주십시오.' '아, 그럴수록 네게는 복 있지 않느냐?' '아이구 내가 그 복도 나는  싫습니다. 저 사람도 같이 망해도 같이 망하고 흥해도 같이 흥하고 같이 복 받게  해 주옵소서.' 이럴 때에 주님이 좋아하시고 출애굽기 32장에,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는 다 전멸하고 너를 세워서 이제 큰 민족 이루겠다' 할  때에 '아니 나는 죽어도 나는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랍니다' 할 때에 주님이  '그래?' 슬그머니 그 기도를 들으시고 전멸시킨다 하신 것을 돌이켰습니다.

'그래 믿는 사람들이 자기 위해서는 할 일 없다 그거요. 전부 이웃을 위해서 할  일이지.

 이래서, 현실에서 이 겨자씨가 생명 죽지 안하면 삼키는 거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 가지 은혜를 입었으니 이 세 가지 은혜를 배반치만 안하면 세상은 나에게  짐령당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 생명만 버리지 안하면 온 땅은, 삼키는 것이  필연한 일인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 가지 은혜만 벗어버리지 안하고 이  세 가지 은혜를 내가 입고 이 세 가지 은혜로 살기만 살면 이 세 가지 은혜가  내게 와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은혜를 벗지만 안하면 됩니다.

 세 가지 은혜를 벗지만 안하고 이 세 가지 은혜를 가지고 내가 보존하고 세  가지 은혜로 있기만 있으면 있기만 있으면 나라도 내가 먹는 내 밥이 되고,  정부도 밥이 되고, 단체도 밥이 되고, 이종교 단체도 밥이 되고 내 밥이 되고  모든 이 세상의 과학도 밥이 되고, 마귀도 밥이 되고 전체는 다 나를 키워 주는  내 밥이 됩니다. 이래서 세상을 밥이라, 믿음의 사람들의 밥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고, 그때에 뭐이냐? 믿으면 이 믿음 은 무슨  믿음이냐? 이 세 가지를 내가 알고, 그 다음에는 인정하고, 그 다음에는 내가  은혜를 입었으니 벗지 말고 그대로 이 은혜대로 사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래서 기도 제목에 첫째가 '기본 구원을 벗지 말아라. 기본 구원을 입고  살아라,' 하는 것이 이런 것을 다 포함해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러면, 겨자씨가 차차 차차 자라서 뭣 먹고 자랍니까? 현실 먹고  자랍니다. 대적을 먹고 자랍니다. 세상을 먹고 자랍니다. 그러기에 내가 생명이  있으면, 세 가지 은혜를 가지고 있으면 세상은 내 밥이 되고 내가 이 세 가지  은혜를 배반해 버리면 나는 세상의 밥이 됩니다. 세상이 나 하나를 점령함으로.

내 기능을 현실에서 점령하므로 세상은 더 커졌습니다. 그만치 커졌습니다.

세상은 커지고 나는 작아졌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 뭐이냐 하면 그 겨자씨가 조그만한 것이 커서  나중에는 나무 같이 됩니다. 우리가 제일 믿음이 아주 어리고 적습니다. 무슨  믿음이 어리고 적어요?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믿음이 어리고 적어요. 예수님에게  사죄 받은 것이 아슴 아슴 하고 알쏭알쏭하고 사죄 받은 것을, 알쏭알쏭하고.

칭의 받은 것도 알쏭알쏭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서 화친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알쏭알쏭하고 영감으로 중생됐지만 아직까지도 어리기 때문에  이제 영감도 어째보면 영감이 나를 주관하는 것 같고 또 어째 보면 진리가 있는  것같고 진리를 아는 것같고 아주 미약한 이치, 아주 어린 신앙이라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런 신조와 교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세상이 모릅니다.

믿는 사람 가운데도 몰라요. 그 이해를 못 해요. '저 사람은 왜 저래 하는고?'  말하는 것도 모르고 행동하는 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몰라서 말하는 것이니까.

거기 대해서 대항할 것 없어. 아, 예수님도 바알세불이라 했는데 예수님도 귀신  들렸다 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세상이 모르고 말하는 데 대해서, 그것도 밥이라. 그것도 먹어야 돼.

그것도 먹으면, 이 세 가지만 안 벗으면 욕 그것도 먹으면 살이 쪄요. 그러면  자라요. 욕도 먹고. 핍박도 먹고 불로 찌지는 것도 먹고 꺼꾸로 다는 것도 먹고.

이단이라고 욕하는 것도 먹고 자꾸 먹어요. 뭐이든지 먹으면 자꾸 자라요.

그런데 먹는 데 좀 먹기가 좀 힘드는 것은 영양이 속에 많이 들었습니다. 물컹한  죽 그거는 속에 영양이 적어요. 이렇기 때문에 딱딱한 세상이 좋다 그거요.

 이런데, 조그만한 겨자씨가 자꾸 자랐다. 이와같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자꾸  자라간다. 자라가는 것은 자라가는 것은 자체가 자꾸 그것이 자체, 이런 나무  종자 모양으로 자체 하나 있는 것이 그저 자꾸 자라서 자라서 세상을 먹고 자라  자라서 자라서 가는 게 아니라, 자라가는데 그 모든 것이 위로부터 새로  내리시는 은혜가 와 가지고 새 은혜를 보태서 자라간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십시오. 자라가는데 이제 자체가 자라가는 게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의 것.

영감의 것. 진리의 것이 자꾸 새것이 와 가지고 하나에다가 하나 보태니까 둘  되고, 둘에 하나 보태니까 셋 되고 이제 조그만한 이 장기짝 같은 것을 이래  놓으니까 장기짝 그걸 이래 놓으니까 장기짝이 한 길되게 키가 높아진다 말이오.

 장기짝 여러분들이 알아요? 요만하지 않아요? 나무로 만든 거. 장기짝 요런  것이 아주 한 길 되게 높아졌습니다.  높아졌으면 장기짝 그것이 한 개가 자라서  그렇게 높아졌습니까? 자꾸 딴것을 포개서 높아졌습니까? 포개서 높아졌지요.

그러면 우리 신앙이 이제 장기짝이 높아진 거와 같이 되는 신앙인지, 여기  소나무 씨를 조그만한 걸 하나 심어 놓았더니만 나중에 낙락장송이 됐습니다.

낙락장송 이 된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해서 자라는 것인가, 소나무 자라는 거  같이 우리 믿음이 자라가는 것인가, 장기짝 높아지는 것같이 그렇게 자라가는  것인가. 장기짝같이 높아져 가.

541쪽

 여러분들, 이것도 세계에 조직 신학자들이 교리로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판정이 안 났어, 아직까지 판정이 안 났어. 이런 말하는 이게  목회 설교록에 나갈 터이니까 이게 나가는데 목사님들이 골치를 앓을 것이라.

알고 이제 깨달으면 툭 터져.

 하나님의 새로운 영감이 오고 한 진리를 또 지키므로 자라가고 한 진리 한  진리로써 장기짝같이 커서 이래 커지는 것이지 한 진리가 자꾸자꾸 커지는 거  아닙니다. 내가 하나 깨닫고 지키므로써 그만치 자랐고 둘 깨닫고 지키므로  그만치 자랐고, 셋 깨달아 지키므로 그만치 자랐고 이래서 진리의 그 무한함이  다 내것이 돼서 이렇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영감이 또 한 영감 가지고 다 되는  게 아니라 한 영감에서 또 새 영감 오고 새 영감 오고, 새 영감 와서 그  무한하신 그분과 나와 자꾸 결합이 되는 것이라 말이오.

 이래서, 주님과 나와의 조그만한 노끈만한 끄내끼로 이와같이 이래 연결이  됐다가 또 그 끄내끼가 자꾸 커지는 게 아니라, 연결이 됐다가 또 한 끄내끼가  와 가지고 또 커지고 또 한 끄내끼가 와 가지고 커지고, 한 끄내끼가 와 가지고  커지고 나중에는 자꾸 조그만한 노끈 같은 것을 모아 놓으니까 그 밧줄이  이만합니다. 이만하면 이만치 묶여 놓으면 떨어지겠소 안 떨어지겠소? 안  떨어져.

 이래 묶으는 걸 언제 묶으느냐? 한 끈 한 끈 묶으기를 언제 묶습니까? 현실에서  묶어. 그러면 장기짝같이 커 나가야 돼.

542 이런데 세상을 먹고 자라가요 세상을 먹는다 말은 그때에 새은혜가 하나  왔었는데 그 때에 당한 세상을 딱 점령해서 먹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자라가게  된다 그거요.

 어쩌든지 여러분들은 알고 놓지 말아요.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고 믿으면 좋은데  이해를 못 하면 무조건 믿으십시오. 이해를 하고 믿으면 더 견고해서 요동치를  않습니다. 이해할라 하면 좀 힘들 것이라, 이러니까 줄줄 따라오다가 나중에  삐뚤어져 버리고 말지. 저 좋은 대로 하지. 다 옛사람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오.

자기를 부인하기 싫기 때문에 그런 것이오. 자기를 애착하는 옛사람을 애착해  그런 것입니다. 옛사람이냐. 새사람이냐 그 둘에서 이제 생겨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옛사람 새사람을 강단에서 잘 말하지를 안해요. 인본  신본을 잘 말하지 안해요. 세상주의 천국주의를 잘 말하지 안해요.

 이래서, 실은 저 사람이 아직까지 땅에 속해서 땅의 소망을 가지고 땅의 것을  노리고 있나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하늘의 것을 노리고 있나, 하늘의 소망은  땅의 것을 투자해야 하늘의 소망이 되어지는 것이니까 땅의 소망이 자꾸  죽어지는 것이라. 죽어지는데 자꾸 그게 심어지는 거라. 심어지니까 땅의 것  자꾸 투자해서, 땅의 것 희생해서, 땅의 것을 투자해 가지고 하늘의 소망을  만들면 땅의 것을 투자하니까 땅의 것이 없어집니까? 네, 없어집니다.

 그러면 땅의 것이 없어졌으면 아무것도 없을세? 없어지는데 자꾸 투자하니까  자꾸 땅의 것도 커집니다. 땅의 것도 커지면 있는 그것이 커지는 것입니까  장기짝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자꾸 줘서 커지는 것입니까? 장기짝같이 그와 같이  해서 나는 다 투자해 버렸는데 또 하나님이, 하나 투자하니까 둘 주니까 그래 또  둘 됐고 또 둘 다 투자하니까 또 서이 주고, 서이로 커졌고, 또 서이  투자했으니까 또 열을 주니까 열로 커졌고 자꾸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어서 자꾸  씨와 양식을 주는데, 양식을 먹고 씨를 딱 심어 버리고 나니 또 새 씨와 새  양식을 또 주니까 커지고 자꾸 이렇게 돼져 가지고 커져 가는 것이지 그게  귀신법은 그런 게 아니라. '이거 너 투자하면 헛일이다.' 이래 가지 그 인본주의  쓰는 사람은 투자를 안해요. 그거 투자하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투자 안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큰 거 바꿔 주는 것을 받아 보지를 못해요.

 이것도 세상주의 천국 소망주의가 다르다는 거 이런 것도 여러분들이 이제 확확  깨야 돼. 이라면 다음에 아멘하고 대번에 얼굴에 얼굴 색이 확확 변해지고  굉장해져야 될 터인데. 다 이렇게 하나하나를 깨달은 사람들은 다, 하나하나  깨달을 때에 막 뛰고 굴리고 이제 그만 세상이 보이지 안할 만치 그렇게  좋아하고 그렇게 깨달은 것을 다 말하는 것인데 예사로 들으니까 아직까지 그  사람의 도가 안 돼 그렇다 그말이오.

 이래 받아 가지고 나중에 가서, 받아 가지고 지금 다 깨닫는 게 아니라 받아  가지고 자기가 가 가지고 기도하고 하는 가운데서 피와 성령과 진리의 능력이 와  가지고 자기에게 역사할 때 자기가 인제 깨달으면, 깨달으면 이제 확 트이고  깜짝 놀라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언제 ○○○교회에 ○○○목사님이 사경회를 갔는데 그 사경회 갈 때에 다른  사람은 다 ○○○목사님을 사경회 보내지 안하고 저 까짓 거야 뭐 저거 한  찌끄러기 저것 뭐 저거 사경회 보낼 수 있겠나 모두 사경회 보내는 사람만  보내고 안 보낸다 그거요. 그래서 내가 추천했습니다. '강사를 ○○○목사를  사경회 강사로 모셔라.' 이라니까 ○○○교회 목사는 잘 순종을 해요. '아, 네,  목사님 말씀하시니 예 좋습니다. 모시겠습니다.' 이거 다른 목사 같으면 '그런  강사를 보내 준다' 자꾸 궁청궁청 해. 말을 해도 안 들어. 말을 해도 '예!'  소리까지도 안해요. '예' 이라고 그렇게 듣지 안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 어겨  빠지는 게 있다 말이오. 그건 저만 골탕 먹어요. 언제 골탕 먹어도 골탕 먹어서  골이 빠져서 완전히 죽어 버려야 이제 하나님이 와 역사하지 죽기 전에는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래 보냈더니만 와 가지고 말하기를 아, 그때 사경회하고 난 다음에  ○○○목사님이 아주 힘을 얻어서 굉장히 한 번 설교를 시켰더만 굉장해. 아주  그날 은혜 나도 많이 받았습니다. 굉장해. 이랬는데 떡 말하기를 뭘 말하느냐  하면 ○○○목사님이 그 주일 공과. 내나 한번 사경회 내내 주일 공과 그것만  가르쳤대요. 그것만 가르쳤는데. 마지막에 두 시간인가 남았는데 그때 내나 주일  공과 하나 가르친 거 그 몇 공과라 하더라? 몇 공과 가르쳤어? 몇 공과야, 그게?  4공과. 가르쳐 놓고도 또 몰랐네. 가르쳐 놓고 다 잊어 버렸구만. 그렇기 때문에  헛일이라. 도구로 이용만 당했지 헛일이라.

그래 인제 4공과를 가르치다가 마지막에 두 시간에는 딴걸 말하기 때문에 온  교인들이 마구 아이구 가르치던 그거 다 가르쳐 달라고 딴거 하지말고 가르치던  거 더 가르쳐 달라고 모두 다 말했다고. 말했는데 '예' 하고 했는데 나중에  가르치고 보니까 내나 공과는 공과인데 내나 끝에 보니까 하나 더래요. 도는  하나입니다. 진리는 하나라. 이리 들어가나 저리 들어가나 마지막에는 하나라.

예 그래 가지고 큰 은혜를 받았다고. 이래 가지고 그때 ○○○목사님이 아,  공과를 만든 내게 대해서 아주 찬성을 많이 하는 걸 봤습니다. 아, 공과에 이  순위도 그렇고 모두가 다 이렇츰 철저한 줄을 몰랐다고, 이라면서 아주 그때는  공과를 많이 새겨 가지고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을 내가 봤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는 무한이오. 이러기 때문에 성경 한 성구를 파고  들어가면 모든 성경이 다 거기 있습니다. 마지막에 보면 다 하나입니다. 하나를  깨달으면 모든 것을 다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껍데기로  자꾸 이렇게, 사경회 하면 사람을 자꾸 말씀 구경만 시켜서 자꾸 길가 바닥만  만든다 말이오. 이 말씀을 구경하시고 저 말씀을 구경시키고 많이 시켜 놓으니까  그 사람들의 마음이, 이 지식에 마음이 다져져 가지고 지식을 멸시한다 그말이오  멸시해 가지고 암만 설교해도. 그러니까 항상 새말이라야 듣지 옛말은 듣지  안해.

그러니까 한 말씀이라도 교역자들이 한 말씀이라도 실행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러면 실행은 제가 실행하지 안하고 실행하라 하면 영들이 압니다. 밑에  교인들이 아요. 제가 실행 안 하고 자꾸 이렇게 말로만 이래 하면 교인들이 그  실행의 능력을 받지 못해요. 실행의 영감을 받지 못해요. 말뿐인데 속에, 자꾸  그런 말만 하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자꾸 말하니까 사람이 듣습니까? 자기가  실행하고 새로 깨달아지면 한 설교를 일 년 내내 해도 또 더 좋고 더 좋고 그거  한 말씀만 다 배워 놨으니까 다른 거 다 알아. 몰라도 다른 거 성경 말씀 다  그만 말하면 다 보면 다 알아.

 이러기 때문에, 이 겨자씨로 주님이 이렇게 비유한 것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네가 겨자씨와 같이 어디까지 믿음이 어릴지라도 믿음이 어리다는 말은 무슨  말이오? 예수님의 세 가지 사죄를 아는 지식이 어리다 말이요, 영감 받는 게  어리다 말이요, 진리 받는 게 어리다 말이요. 영감과 진리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에 대한 지식이 어리다 말이요, 아는 것이 없어 조그매 밖에 몰라. 지식이  어리다 말이요 또 인정하는 것이 어리다 말이요, 또 그대로 소망하는 것이  어리고, 그대로 행동하고 사는 것이 어리다 말이요, 예수 믿는 냄새도 잘 안  난다 그말이오. 예수님 믿는 냄새도 잘 안 나. 그래도 낙심하지 말아요.

거기서부터 키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겨자씨로  가지고 비유를 했어.

 씨 중에 큰 씨가 무슨 씨라요? 무슨 씨가 크지? 예? 복숭씨가 크지 그렇지  안해요? 복숭씨로 말을 했더라면 우리 같은 사람은 절단나는데 겨자씨로 말한  것은 네가 겨자씨만한 그렇게 네가 믿음이 어려도, 믿음이 어려도, 생명이  어려도 믿음이 어린것은 이 세 가지를 알고 인정하고 또 그대로 소망하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그걸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우리 믿음이 자라서  세상에 제일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아주 장성한 믿음의 사람이 돼서, 세상에서  제일 믿음 제일 장성한 사람이 됐습니다.

 장성한 사람이 됐으면 그 사람은 뭣이 제일 장성한 사람입니까? 세 가지가 제일  장성한 사람. 항상 시작도 세 가지. 중간도 세 가지, 끝도 세 가지, 마지막도 세  가지 이 세 가지로 여러분들이 자꾸 세 가지로 자꾸 그라면, 세 가지로 거석  하면 이 우주가 세 가지의 소유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주 속에 들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우주의 주인공입니다. 영계의 주인공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주와  영계를 지었고 우주와 영계를 살립니다. 우주와 영계를 보존합니다. 키웁니다.

 이래 가지고 뭐, 자라면 뭐 엉뚱한 거 자랄라고. 이거 사람들 여러분들 박사  그거 지금 참 조심해야 돼. 나도 말이요, 나도 박사 줄라 하는 거 내가 안 한다  했어. 나 박사 줄라 하는 거 지금도 내가 박사 받을라 하면 얼른 줘 버려요. 안  받았어. 왜? 내가 박사 학위를 말할 때 그랬어. '나 이거 학위를 받아야 됩니까  안 받아야 됩니까?' '받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다만 네게는 위험하다' 왜?  위험한 것은 박사니까 다른 사람이 그렇게 알아주기 때문에 저도 우쭐해 가지고  그라고, 박사 이거 가지고 뭐 일할라 합니다. 박사 가지고 일할라 해. 저거는  조사가 왔고 저는 박사니까 조사 그까짓 거야 내가 박사 가지고 박 때려  캐버리고 바싹 깨버리지, 이럴 것이니 그러니까 박사 가지고 할라 하니까 속에  저 알맹이 하나님은 네가 박사 가지고 하고 나 가지고 하지 안할라 하니까 이제  섭섭하다 그말이오.

 저 조사 저거는 '아이구 박사라하고 다니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옆에  교회는 박사가 있고 나는 아무 이름 없는 조사인데' '주여 나는 박사도  없습니다. 지식도 없습니다. 명예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도 안 합니다.

간판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밖에 없사오니 주여 나에게 함께 해  주옵소서' 이라니까 주님이 좋아서 '그래' 또 저쪽에 박사는 있다가 '그거 뭐,  아무것도 없는 저 무식.' 그래 교인들이 '아 옆에 교회가 하나 생겼습디다.'  아이고 생겨 봤자 그까짓 거 국민학교 졸업도 안한 거 순 무식한 조사 그까짓  거, 나는 지금 박사인데, 나는 신학을 얼마나 하고 지금 내가 어떻게 신학  교수인데, 박사인데 그까짓 거 내가 문제가 없다고. 이라니까 하나님이 옆에  있다가서 탄식을 하신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제 그걸 저도 없는 걸 자랑합니다. '너는, 너는 무식이고 나는  박사야. 너는 신학교 문지방도 모르지만 나는 신학교를 몇이나 졸업한  사람이야.' 이거 가지고 막 눌러대고 이거 가지고 지금 자꾸 선전하고 합니다.

선전하고 하니까 자, 이게 이거 가지고 선전하니 주님이 좋아하겠소 싫어하겠소?  이것이 알맹이요 껍데기요? 이게 생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끌어다 붙이요 하나님과 자꾸 멀어지게 만드요? 이게 하나님을 높이요 자기를  높이요? 이거 통통히 이거 헛일인데 이걸 사람들은 그래 알고 있다 그말이오.

 이런데, 그것이 필요가 있고 좋습니다. 좋은 것은 그것이 좋은 이유 있어 그게  참 좋은데, 없는 거보다 있는 게 좋은데 좋구로 할라면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이용하는고? 네, 그걸 잡아먹어 버려야 돼. 그걸 부인해 버려야  돼. 그것이 꿈에도 생시에도 나는 박사라는 것이 하나도 안 나와야 된다 말이오.

완전히 잡아먹어 버려야 돼. 잡아먹었으면 있습니까? 없다 말이오. 내가  잡아먹으니 내게는 없는데 다른 사람이 그래 말하고 있지. 나는 잡아먹었으니  아무것도 없어, 그것이 하나도 없이 그것을 완전히 부인하면 자 그 박사 안  잡아먹은 사람과 박사 잡아먹은 사람과 이제 영양이 누가 높아요? 박사 잡아먹은  사람이 높아요. 그거는 잡아먹기 위해서 있다는 거, 부인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

 그러기 때문에, ○○○목사님이, 나는 직접은 안 들었는데 그런 말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철학을 믿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철학을 부인하기  위해서 공부하고, 철학을 우리 속에서 뽑아 버리기 위해서 공부한다.' 하는 그런  말했다는데 아주 명언을 했습니다. 올바른 깨달음의 말을 한 것입니다.

 이래서, 그거 부인하기가 어려워요? 부인하기가 어려워요? 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했는데, 그러면  부자가 나쁩니까 좋습니까? 부자는 천국 못 들어간다 했는데? 부자를 어떻게  하면 부자가 좋습니까? 잡아먹어야 돼. 잡아먹다니, 어떻게? 예? 잡아먹다니?  부자 잡아먹은 것을 한번 말 해 봐요. 부자 잡아먹은 거는 부자를 없애는 거라.

 내게는 아무 것도 없어. 억만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푼도 없는 거지라.

억만금은 어쩌고? 그거는 주님이 나에게 보관시켜 놓은 것이지. 그러면 주인은  누군고? 주님이 주인이지. 그러면 그거 억만금 재벌은 어떻게 해? 보관주가 뭐  보관해 가지고 있으라면 보관해 가지고 있고, 다 내어 놓으라 하면 다 내어 놓고  쓰라 하면 쓰고 보관자 주인 시키는 대로 하지.

 자, 그것이, 부자 잡아먹은 겁니다. 그것이 박사 잡아먹은 것이고, 그게 세상  지식 잡아먹은 것이고 세상 잡아먹은 것입니다. 그러면 자. 돈 많은 그것이  복이요 복 아니요? 잡아먹으면 복이라. 자 부자가 복입니까 화입니까? 복은 무슨  복이라 부자가 복이라?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했는데 따라합시다. 세상!  각종의! 모든 부자는! 가지고 있는 자는 다 죽고! 그것을 다 잡아먹어! 그것을  다! 주님의 것으로! 주님이 내게 보관시켜 놓은 것으로! 그것에 대해서는!  권리는 털끝만치도 없고! 주인이! 시키시는 대로만! 청지기로 관리하는 것이!  잡아먹은 것이라! 잡아먹은 자는! 영양이 높아서 크게 자랐다!  자, 그러면 부자가 복입니까 화입니까? 화도 되고 복도 되지. 화도 되고 복도  되는 데 잡아먹으면 배가 불룩하게 자라서 복이 되고 그것을 잡아먹지 못하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 새김질하고, 저게 있는 저 여인이 아마 좀 귀신  들린 여인 같은데 그 여인을 위해서 기도를 하십시오. 저 뒤에 떠드는 여인,  귀신 들린 그 여인인데 기도를 하고, 또 그러고 예배 보는 데에 방해를 하기  때문에 저 밑에 어데 말씀 들리는 데 없습니까? 사람 없고 말씀 들리는 데,  스피커가 가 있는 데 없어요? 사람 없는 데 스피커 들리는 데 없습니까? 요  스피커 장치를 해서 사람 없는 데 스피커 들리는 데 없습니까? 요 스피커  장치해서 사람 없는 저 어느 한 군데 거기에다 두고 사람이, 보호자가 같이  데리고 있으면서 스피커를 달아서 거기서 말씀 듣도록 그래 하십시오, 그래  해요. 그렇게 해야, 왜? 그 부근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은혜를 못 받아요. 자꾸  저라면 자꾸 그 소리에 침노를 받는 다 그말이요. 침노를 받기 때문에 은혜가  있을라고 하면 저렇게 해요. 이러니까 그 속에 미혹을 받으니까 옆에 사람  은혜를 못 받도록 하는 그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옮기고, 또 그  사람은 이 말씀의 역사로써 은혜 받을 사람이면 은혜 받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  들려지는 데 가 가지고 보호자가 데리고 있으면서 같이 은혜를 받도록 하고  이렇기 때문에 양득을 다 해야 돼, 양득, 두 가지 다 얻어야 된다 말이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제 고요히 생각해요 여기서 회개할 것을 회개를 해야 됩니다. 회개해야 되지  그냥 이 말씀을 그저 듣고 하나의 지식으로만 가지고 이거 가지고 교회 가서  교인들에게 내가 이렇게 좀 앵무새 모양으로 흉내를 한번 내야겠다 하는 그거는  벌써 정신이 틀린 정신이다. 죽었어. 살아야 돼. 내가 새벽집회 지식에 가치도  두지 말고 열심에 가치도 두지 말고, 간절에 가치도 두지 말고 내가 이 사람으로  변화되는 거기에만 가치를 두고 이 사람으로 변화가 돼야 됩니다. 변화 안 되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변화 안 되면 허탕 쳤습니다. 이번에 꼭 변화가 돼 가지고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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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2 겨자씨 믿음의 능력(생명있는 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50806화후집회 선지자 2015.10.23
5301 겨자씨 비유/ 마태복음 13장 31절-32절/ 820222월새 선지자 2015.10.23
5300 겨자씨 비유/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850721주후 선지자 2015.10.23
5299 겨자씨-능동믿음-죽은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51212목새 선지자 2015.10.23
5298 겨자씨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06월새 선지자 2015.10.23
5297 겨자씨믿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60107화새 선지자 2015.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