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1980. 7. 1. 화새

 

본문 : 요한복음 14장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라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 일체이신 하나님 한 분 하나님, 이 하나님을 가르켜서  말하고 "또 나를 믿으라" 하신 것은 신인양성 일위이신 우리의 중보자가 되는  대속주 예수님을 가르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고 하니 영원 전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으로  인해서 계신 분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을 때 영원 전 홀로 계셨습니다. 홀로, 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때 영원 전 홀로 계셨습니다. 홀로, 이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이 영계를 만들어서 영계가 있게 됐고  우주를 만들어서 우주가 있게 됐습니다. 이 우주 밖에도 아무것도 없었고 영계  밖에도 아무것도 없었고 하나님만 홀로 계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당신 전부를 기울려서 당신과 같은 온전한 자를 만드시려고  작정한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다 아는 소리지만 다시 내가 말하는  것은 견고히 잡고 요동치 않고 이대로 믿는 사람이 되고 믿는 사람의 행위가  되고 믿는 일이 되는 이것이 영생입니다.

이 하나님이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당신 홀로 계시면서 혼자 모든 것을  예정했습니다. 그때도 아무것도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예정하신  예정도 당신 혼자의 생각이요. 목적도 생각 뜻이요.

그 후 예정하신 그대로 섭리, 그러면 예정대로 섭리 중에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순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 또 이 모든 자연 만물로 가르쳐 주시고  성경 말씀으로 가르쳐 주시고 또 영감으로 가르쳐 주시는 이 가르치심으로  우리를 예수님 믿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예수님 믿도록 하신 목적은 어데 있느냐? 하나님이 하나님처럼  완전한 자를 만드시려는 그 목적이 곧 우리들입니다. 교회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서 예정도 창조도 모든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존하셨지만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 같은  완전자를 만드시려고 목적으로 정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는  자십니다. 우리를 위하시는 것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시는 자십니다. 또  하나님이 예정하신 모든 예정도 모든 창조도 모든 재창조도 재창조라 말은  부모를 통해서 자녀가 나는 그것이 창조나 이미 있는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기  때문에 재창조라 그렇게 제가 표현하는 것입니다.

섭리,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움직이고 나고 죽고 하는 그런 것, 섭리 이것도 다  하나님의 목적인 곧 하나님의 교회 우리의 완성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서 이런 줄을 아느냐?' '네 믿음으로 압니다.' 믿음으로 안다  말은 하나님이 이렇다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서 압니다. 하나님이 이렇다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에 이렇게 말씀했지만 나는 인정 안된다 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데 대해서 부정하는 것이요. 또 거역하는 것이요 따른 것 아닙니다.

따른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참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따른  것입니다. 따름으로 알았다 그말이오. 믿음으로 알았다 말은 따름으로 알았다.

또 행동도 따름으로 행동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대로  고대로 시키시는 대로 따라서 행동한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행동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존재와 움직임이 하나님의 교회인, 하나님의 목적인 우리를 위해서  있는데 우리는 그러면 무엇이 어때서 우리를 위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있고 하나님을 위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예정과 창조와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존재나 모든 움직임은 우리를 향하여 집중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합니다. 그런데 우리와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고 또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우리를 위해서 있는 것이나 우리를 위하는 것이 될 수  없도록 우리에게 삐뚤어진 것이 있었습니다. 이 삐뚤어진 이것을 정리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한다 할지라도 불가능한 되지 안할 모지라는 이  모든 것이 있어 이것을 보충하고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세상에  오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데 하나님과 사람이 단합이 아니라 한 격위를  이룬 예수님 곧 중보자가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만물은 우리를 향하여 집중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는데 그 사이 중보자 예수님이 아니면 끊긴 것을 이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집중되어  본체적으로는 하나님은 본체 그대로 있고 하나님은 창조주의 본체요 우리는  피조물의 본체입니다. 본체적으로는 하나가 되지 못하지마는 본체 외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여 하나님에게로 다 귀속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한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한덩어리가 되는 것은 내것을 가지고 한덩어리가 되나 내 자체를  가지고 한덩어리가 되는 것이요. 거기에 모든 작용이라는 그 모든 작용, 그 모든  작용은 내것하고 하나님하고 둘이 합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것에게 내라는 이  자체가 완전히 귀속 되어서 완전히 거기에 감영되어서 거기에 감화되어서 거기에  피동되어서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우리들인데 하나님에게 우리가  동화됩니다. 하나님 움직임에 따라서 내가 움직이는 하나님에게 동화된 이것이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기 때문에 이 움직임이 완전이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알기 때문에 이 지식이 전지요. 그러면 움직임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완전하고 또 하나님에게 속하여 하나님으로만 감화  됐고, 동화 됐고 피동되는 우리 자체기 때문에 우리 자체는 비록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으로 인하기 때문에 완전인 것입니다. 이걸 믿어야 됩니다.

사람이 몰라 그렇지 작고 큰 전부가 목표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목표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행하라. 믿음으로 행치  아니하는 것은 다 죄라.' 그 말은 삐뚤어졌다 그말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믿음으로 행하라 하는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하라. 하나님을 향하여 쫓아가라. 그런데 하나님을 막바로 향하여 쫓아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쫓아가라. 그러면 네가 믿음으로  행하라 그 말은 하나님을 향하여 쫓아 가는데 하나님을 향하여 쫓아가는 그  걸음, 곧 하나님에게 피동 피동, 동화 동화, 감동 감동, 감염 감염 이것으로서  하나씩 둘씩 점점 이루어져 가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활은 우리가 생활하는 데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가득차 있습니다. 이 피조물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우리가 사는 것도 섭리 중에 하나지마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모든 섭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고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모든 창조로  피조물도 우리를 둘러 싸고 있습니다. 이것들 안에 우리가 싸여 가지고 있는  우리들로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 버릴 때에 전체는 나를 사망케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잊어 버릴 때에 모든 것은 나를 사망케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리면 저는 저 혼자 가만히 있느냐 하면 가만히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잊어 버렸을 때에는 악령을 벌써 생각하고 접선되어 있는  것입니다.

'달리기를 향방 없이 달리지 말아라' 그 말은 목표 없이 달리지 말아라  그말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이것을 향하고 저것을 향하여 그렇게  내가 달음질하지 말아라. 또 믿음으로 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는 거는 다  삐뚤어진 것이다. 그 말은 믿음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이지는 그것이 아니면  다 죄다 그말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여지는데 우리 움직임에는 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객관  역사로 움직임이 하나 있고 하나는 우리가 주관 역사로 움직이는 그 하나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치 않는 것은 죄라 그 말은 우리의 주관 역사가 거기에  주체가 돼 있습니다. 주관 역사가 우리 주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으로  동하고 정하려고 그분에게 귀속하려고 그분에게 가 가지고 결합되려고 하는 이  주관이 아니면 죄라 그말입니다. 거기에 믿음이라는 이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게 아니면 죄라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힘입어서 하나님에게로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만물이 모든 섭리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이것을  돕기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이 일을 돕기 위해서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움직임든지 공산주의의 움직임이든지, 민주주의의 움직임이든지,  원수의 움직임이든지 그 멀고 가까운 모든 것의 움직임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가까이 가게 하는 이런 모든 보조물들이며 협조물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씨 알아야 합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이걸 놓으면 안  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도 그 일에서 하나님 잊어버리고 했으면 벌써 그것이 뭐이라고  했지요? 그 뭐입니까? 그것을 대구 집회에서 많이 가르쳤는데 작년에 대구  집회에서 많이 가르쳤습니다.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 잊어버리고 그것을 한 가지  생각하면 그것이 뭐입니까? 제 몇 계명, 제 이계명 그 우상 됩니다. 그  우상됩니다. 그 우상이요. 부모 형제 부부라도 자기 생명이라도 하나님  잊어버리고 생명 생각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일계명 버린 자요. 모든 것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이 일을 위해서 모든 피조물이 있고 모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것을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쫓아가는데 우리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쫓아가는데 하나님과 나와의 결합 일행 신인 결합 일행 주님은 신인  일위 일행 우리는 일위만 빠지고 일위만 못한 결합 일행은 같고 이를 위해서  향하여 쫓아가는데 모든 피조물과 모든 섭리는 이것을 위해서 있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렸을 때에 그 사람은 섭리의 종이 됩니다.

피조물의 종이 됩니다. 우리는 섭리의 하나님의 하시는 섭리지만 섭리에 종될 자  아니고 섭리를 우리는 이용할 자입니다. 섭리의 주인공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공입니다. 모든 섭리를 이용할 자요 피조물을 이용할 자입니다. 이용은 내가  믿음으로 가졌을 때에 그것은 나에게 이용이 필연적으로 되고 맙니다.

결과적으로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모든 섭리와 모든 존재가 날 위해서 있다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연습하는 것이요. 아 이 복잡한 데에서 잊어버렸다. 이것 연습하는데  잊어버렸는데 아 잊어버렸다 실패했습니다. 다시 고런 현실을 만나면 내가 잊어  버리지 않겠다 하는 그것이 회개입니다. 또 어떤 것 존재 가운데에 들었을 때에  이 존재가 나 위해서 있는 것이니 이 존재를 내가 어떻게 이용하느냐? 내가  믿음으로 행할 때 이것은 반드시 나를 위하는 존재로 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것이 나 위해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공산주의가  그 열두 순교자 앞에서 할 때에 이것이 나 위해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나 위해  있는 것이라면 내 것이라면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게서 나를 위해서 이것을 지었고 섭리 하시고 움직이시고 계시는 것을  인정한다면 거기에서는 자기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것을 인정함으로서의 합당한 마음, 합당한 정신, 합당한 태도, 합당한 평강,  합당한 두려움, 합당한 두려움이 뭐이겠소? 그걸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하나니과  연결 끊어질까 하는 그 두려움이 그 순교자의 두려움이지 그것들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은 순교자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순교하지만 거기에 분석을 하면 찌끼가 얼마나 있고, 그 순교에  속한 요소가 얼마나 있는지 같이 그 자리에서 다 같이 죽었다 할지라도 죽음은  천층 만층이라고 할 만치 그렇게 차이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걸 잊어버리지 말고 모든 존재와 모든 움직임이 뭣 때문에 있느냐?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이것 때문에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려면 어째야 되겠느냐? 신구약 성경과 영감, 영감이 있습니다. 영감이 뭣  때문에 있습니까? 우리가 영감 위해 삽니까? 아니요. 우리가 진리 위해 삽니까?  아니요. 진리는 영감을 찾아 가는데 하님을 향하여 찾아 가려 하니까 만물과  모든 섭리만 가지고 안 되니까 부득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데에 진리가  필요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를 우리가 활용합니다. 또 진리만 가지고 안  되기 때문에 영감이 필요합니다. 또 영감을 활용합니다. 진리와 영감만 가지고  안 되기 때문에 중보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에게 우리는  도달해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데서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는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신인양성일위이신 우리의  중보자시요. 이러기 때문에 "아버지를 믿으며 또 나를 믿으라" 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예수님을 힘입어야 되겠는데 예수님을 힘입으라고 하니까  영감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이 걸음에 예수님을 힘입고  영감을 힘입으려고 하니까 또 신구약 성경 진리가 필요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모든 존재 모든 움직임이 내 구원을 위해서 있는 이것을 잡고  위해서 있는 이것을 붙들고 이제 성경 말씀을 힘입습니다. 이제는 모든 만물과  움직임과 성경 말씀과 나와 이 셋이 하나 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갑니다. 한 친구을 더 만납니다. 이제는 영감을 내가 만났습니다. 이제는 넷이  합해졌습니다. 영감을 만나 가지고 이제는 나를 대속하신 이제 중보자를  만났습니다. 이러면 다섯이 하나 됐습니다. 이래 가지고 아버지를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어제 경건회 때에 어떤 분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  힘입는다는 것 그것을 증거했는데 말에는 틀림이 없이 했고, 믿는 것은 말씀대로  요대로 행하는 요것이 권위요 요것이 실력이다는 고것은 자기에게 인식이 돼  가지고 있고, 고 다음에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그거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말은 바른 말, 말은 그대로 했는데 양식을 먹는 것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먹어 보지를 별로이 안한 사람입니다. 제가 들을 때에, 이러니까 고게 대한 교리와 신조는 바로 말하는데 그 양식을 먹는데 더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이래서 '너는 어디 가느냐?' '하나님을 향하여 쫓아 갑니다.'  '어, 어데 가느냐? 하나님 네 중심 뭣고? 하나님 그러면 쫓아가는 데에는 어떻게  가야 되느냐?' 중보자.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중보자는 하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라 하면 됩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요것을 구별하도록 하기 위해서 뭣 때문에 인성이라는 이  인성이 우리의 중보자로 됐느냐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구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찾아 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려고 하면  어떻게 돼야 되느냐?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려 하면 우리의 행동하는 이 행동,  우리의 언행심사의 모든 움직임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데 이 움직임이  영감과 진리의 이 중심 움직임의 중심 말입니다. 우리의 움직임의 중심은 영감과  진리의 중심.

그러면 우리의 소망의 중심은 무엇이냐? 하나님 소망의 중심을 향하여 찾아 가는  우리의 움직임의 중심은 영감과 진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움직임은 이  영감적이냐? 이거 진리적이냐? 어떻게 되느냐? 이거는 움직임의 중심이요.

그러면 움직임은 이 움직임만 하면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중심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탈선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지만 모든 것 중에 피조물로서는 모든 것 중에  예수님의 인성 외에는 자기 목숨이 제일 중요합니다. 자기 목숨이 이 세상에서는  말이요 세상 있는 것으로서는 자기의 생명이 중하지만 이 생명도 하나님을  소망하는 이 소망을 잊어버리고 내 움직임의 중심인 영감과 진리를 잊어버리면  잊어버리고 내 목숨을 생각하면 그 목숨이 뭐입니까? 그거 우상이요. 그거  우상입니다.

이러기에 사람은 모든 그 생활이 하나님을 중보자와 영감과 진리와 나와 모든  피조물과 섭리와 이렇게 결합이 연결이 없으면 사망입니다. 연결이 없으면  사망이요. 연결 있는 게 생명이지 연결 없으면 사망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연결을 놓지 안 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떤 사람은 학교에 가면 그만 이 연결을  하루 잊어버리는 사람, 일 년 잊어버리는 사람, 중학교 가면 주일날 말해도  그거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사 년 잊어버리는 사람, 팔 년 잊어버리는 사람,  십이 년 잊어버리는 사람, 어떤 자는 일생동안 이 연결 없이 다른 것을 향하여  가면서 가끔 하나님이라는 말만 꺼떡 꺼떡 씁니다. 이러니까 기본구원이야  있지만 기본구원 외에 건설구원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약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한 것, 하나님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 하나님을 향하여 달리는 이 향방을 잊어버리게 하는 그  모든 세상 것, 자기 움직일 때에 영감과 진리를 잊어버리게 하는 그 모든 것  이것은 자기를 망치는 소유라 말입니다.

왜? 자기가 세상에 하루 살면 모든 피조물을 그만큼 소유 했고, 백 년 살면  그만큼 많이 소유 했고, 움직임도 섭리도 오래 살면 많이 그만큼 소유 했는데 왜  그거 손해겠습니까? 많이 가질수록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을 소망하는 소망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움직임의 중심을, 영감과 진리로 이 모든 피조물을 모든  하나님의 섭리의 움직임을 이것을 이 연결을 시켜 가지고 가졌다면 하루 산  것보다 이틀 산 것이 낫고, 이틀 산 것보다 사흘 산 것이 낫지. 십 년 산 것보다  백 년 산 게 낫고, 작은 권세를 가진 것보다 많은 권 가진 게 낫고. 물질도 작은  것보다 많이 가진 게 낫고.

왜? 그 활용의 범위가 넓기 때문에 그러니까 부자가 좋은데 왜 부자가 나쁘겠소.

나쁜 것은 소망의 중심을 잊어버렸고, 활동의 중심을 잊어버렸고, 자기가 땅  위에 뭐 하려고 있느냐 하는 이 재세의 목적을 이 중심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헛일이라 그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믿음의 시험이라, 믿음을  사용한다, 믿음을 만든다 하는 것이 내나 이 말입니다. 믿음을 시험하다니 무슨  시험이라. 첫째가 '네가 보자 하나님을 향하여 달리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이것을  하라 했는데 해야 될 줄 인정하느냐?' 하고 있느냐? 인정 하느냐? 행동 하느냐?  이게 첫째입니다. 그게 시험이요. 시험에 첫째요.

그러면 믿음을 사용한다 이것을 자기가 이미 인정한 것 만큼 자기가 효력을  봅니다. 확고하게 인정한다면 피조물의 움직임은 자기를 위해서 메고 가고, 업고  가고, 들고 가니까 좋고 영광스럽고 존귀하지. 왜? 피조물에게 두려워하거나  피조물에게 그를 위해서 굴한 게 있어야지. 뭣 때문에 그것을 저보다 높입니까?  그러나 그를 얻기 위해서 그 방편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모든 모양을 취하지.

이러니까 안 믿었기 때문에 그걸 주님이 하시는 걸 믿지 안했기 때문에 놀랬소.

내가 그때 선교사 칼 가지고 자기 부인에게 칼 내고 찌를라 하는 것  만찬가지인데, 자 그 남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칼 대고 찔러 보이소. 아마  기절해 자빠질 것입니다. 안 그렇겠소. 모르는 사람이 와 가지고 죽이려고 칼을  들고 이래 보이소. 사람들이 보고 기절해서 다 돕느냐? 안 주면 죽는데. 왜?  그렇게 무서울 그 칼을 보고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그것은 남편을 믿기 때문에, 남편을 알기 때문에 아 공산주의가 하는 그 모든  것도 사랑하는 주님이 지금 칼질, 남편이 칼질하는 것처럼 주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알았으면 웃을 것이요 기쁠 것이요 그럴 때에 의심치 않고 즐거울  것인데 왜 그게 안 되느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써 먹지 못하니까 그런 화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대대학을 공부해도 하나님  잊어버리고 그것만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감과 진리를 언제든지 그것과  연결시켜서 그것을 하나 더 들음으로 더 배워 더 앎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가까와지고, 진리와 영감과 가까와지고 이것 때문에 하는 것이지 그것 아닐진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 진리와 영감과 나와의 행동이  멀어지게 한다면 그거 나의 원수인데 무슨 필요 있소. 천하 학문을 다 가져도  저는 죽었습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내가 어제 가서 말한 것을 뼈저리 듣지  아니하고 그것을 만일 섭섭하게 반동 (여 한?) 것처럼 한다면 틀렸소. 이거는  자기 생명보다 귀합니다. 여러분들의 생명보다 귀하요. 이거 아니면 다  사망이오.

이러기 때문에 과수원에 있는 과목을 강도가 도적이 원수가 와서 베어 버려서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눈에 안 보이는 버러지 제일 무서운 버러지는 공팜  버러지, 바이러스 버러지 그거는 그거 보이지도 안하는데 그놈이 들어 가지고  과실 나무 살아 있으나 완전히 잎파리 하나도 없애 버리고 그것이 가만히 살아  있으나 고대로 구멍 하나 뚫지도 않고 고대로 바싹 썩어서 과실 나무가 없어지고  그만 변해 버리지 않소.

지극히 작은 것을 볼 때에 그것이 많이 단합 되면 제일 무섭다는 것, 그러기에  병균 중에는 그 바이러스라 하는 그 균이 제일 작은 것인데 제일 무서운  박테리아균 그런 균은 무섭지 안해. 그러기 때문에 균이 작아서 발견을 못하는  그 균이 지금 치료도 못하고 제일 무섭습니다. 난치병이라 하는 것은 그 균을  발견을 못해서 보지를 못하고 무슨 균인지 모르고 그 균을 죽일 수 없고 원층  많아서 번식율이 많아서 그걸 어떻게 제재할 수 없으면 그것은 지금 치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것이 죽이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 보여 주요? 그것을 볼 때에  '아 그 균이 거석하는가 보다.' 제가 종종 앉으면 '아 그놈 작은 것이 참 힘이  있어. 작은 것이 무서워. 작은 것이 무서워.' 암만 말해야 듣는 사람들은 그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고 듣고 있어. 작은 것이 해하는 것을  볼 때에 그 뭐이요. 우리가 지극히 작은 생각, 작은 실수, 작은 무관심, 작은  배신, 작은 실신, 하나님 잊어버리는 것, 실신 이것이 우리 죽입니다.

어제 말한 것을 자기 목숨보다 가치를 크게 여기야 될 것입니다. 자기 명예니  지위니 인정이니 그까짓 거야 그런 것 억억억억억이라 해도 그 부스러기도 못  당합니다. 이것을 알아서 겸손히 간직하면 극히 보배롭고 복 있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달게 받지 안해. 내가 보니까 달게 받지를 안해. 보배로  받지를 안해. 생명으로 받지를 안해. 우주보다 귀한데 돈만큼도 반가이 안 받아.

명예만큼도 반가히 안 받아. 지위 권세만큼도 반가이 안 받아.

그러기에 피조물을 크게 여기는 사람은 창조주를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땅에  것을 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하늘의 걸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위와, 권세와,  돈과 인간이 필요하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감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왜 같은 사람으로서 뭣 때문에 속화되지 아니하고, 뭣 때문에 어두움이 없고,  모든 것을 바로 보고, 바로 비판하고, 바로 평가하게 되겠는가? 뭐이 달라  그런가? 사람이 바른 지능이 역사하는 것은 요게서 있습니다. 하나님 잊어버리지  않고 영감과 진리 잊어버리지 안하면 아무리 약자라도 천하에 제일 강한 자  됩니다. 아무리 어리석은 자도 천하에 제일 지혜 있는 자 됩니다. 이렇게  보배로운 분이시요.

이분과 이 진리와 영감은 피조물로서 인간 중에 제일 구비하고 높은 인간, 제일  못난 인간 그것에 대해서 제재를 받는 그런 작은 분이 아닙니다. 제일 작은 자나  큰 자나 꼭 같소. 당신과의 관계만 바로 되면 상관 없어. 제일 작은 자가 제일  큰 자보다도 뭐 제일 작은 자 가지고 제일 큰 자 만드는 것이나, 제일 큰 자  가지고 제일 큰 자 만드는 것이나 아무 어려움이 꼭 같애.

아 사람도 힘이 장사라 장사라면 거기에 팔이 발 하나 먼지나마나 짊어지고  가는데 팔이 발 하나 얹으니까 '저 사람 짜그라 앉을끼다.' 아 얹었는데 얹은지  안 얹은지 몰라. 열 그 팔이 발 열 개를 띠언져도 얹은지 안 얹은지 몰라. 힘이  세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의 잘나고 못나고 거 대해서 일거리가 크다 작다  아니요. 당신에게 귀속만 되면 당신에게 연결만 되면 거기 가 가지고 무한히  커질 수가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우리가 소망으로서는 하나님을 중심하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움직임으로서는 영감과 진리를 중심하는 이것을 잊어  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연구 하는 것 그런 것  모두 다 우리의 행동에 속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감과 진리를 중심해서  언제든지 거기에 기준하지 않으면 안 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얻은 권세를 자기 배경을 환경을 다 생각하는 것보다 성경 진리 생각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성경 진리 생각함으로 이것을 통해서 영감을 생각하는 것이 진리를  다 생각하는 것보다 수입이 더 많습니다. 네 영감을 생각하는 그 전부 보다  우리의 중보자 신인양성일위의 구속을 생각하는 것이 더 수입이 큽니다. 내나  구속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구속을 힘입어서 아버지를 믿으미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향하는 그것이라야 그것이 미로소  온전해지고 바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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