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효력

 

1987. 7. 12. 주일오후

 

본문:야고보서 2장 22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비유컨대 자동차 엔진이 타이어와 함께 돌아가고 있다 하는 그런 말과 같은 말입니다. 엔진이 돌아가니까 타이어도, 발통도 돌아가고 있다, 농부가 소와 함께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 엔진이 돌아가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동차 바퀴가 돌아서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다 그렇게 볼 것이고, 그러나 자동차 전체를 보는 사람이라면 자동차 타이어가 그렇게 돌아감으로 가는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속에 엔진이 돌아가니까 그 타이어가 그 힘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렇게 볼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행동하는 것을 볼 때에 행동 그것만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이 그렇게 의로운 행위를, 착한 행위를 하고 있다 그렇게 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속에 있는 엔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타이어만 보고는 ‘타이어가 빨리 돌아가고 있다’ 하나, 그 내용을 다 아는 사람은 ‘타이어 저 혼자는 돌아갈 수 없는데 엔진이 돌아가니까 거게 피동돼서 타이어가 돌아가고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온갖 성경대로의 그 행함을 볼 때에 ‘그 사람의 행위는 의롭다. 아주 거룩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그렇게만 볼 것이고, 그래서 그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이라 그렇게 볼 것이고, 좀 더 구비하게 보는 사람은 ‘왜 그 사람이 세상이 이해 못 하는 그런 일을 하겠나? 이 과학적의 생활도 행동도 아니요 세상에 수지 계산 맞는 행위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성경대로의 그 행위를 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이 장하다.’ 그렇게 볼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그 사람이 그 행동 하는 것은 제가 수월해서 그 행동하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이 힘이 있어서 담대해서 그 행동 하는 것도 아니고, 그 행동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해 놓으신 이 말씀을 믿기 때문에 말씀을 믿고 보니 그 사람은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행위를 하게 된다. 그래서 그 행위는 믿음으로 인해서 그 행위가 생기게 됐다.’ 그렇게 볼 것입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행위나 사람에게 대한 행위나 모든 사건에 대한 행위나 물질에 대한 행위나 어떤 행위든지 성경대로 그렇게 의롭게 행해 놓은 그 행위가 가치가 있느냐, 또는 하나님이 이렇게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성경 약속을 믿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의 크심도, 하나님의 사랑도, 하나님의 전지 전능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소망도 성경에 있는 모든 그 내용을 그 사람이 믿기 때문에 그 행위를 했다. 그러면 믿기 때문에 행위를 했으면 행위에 가치를 두느냐 믿기 때문에 행한 그 믿음에 가치를 두느냐 하는 것이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성경대로 순교를 했다, 순생을 했다, 성경대로 그 사람이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그런 일을 했다, 자기의 일생을 남을 위해서 그렇게 봉사와 희생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행위 거기에다가 가치를 두느냐, 하나님이 약속으로 선포해 놓으신 이 구약과 신약 이 계약의 말씀, 하나님이 말씀해 놓으신 이 계약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게 됐으니 그 믿음에다가 가치를 두느냐 그 사람의 행위에 가치를 두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데다가 가치를 둡니까? 그렇게 의로운 행위를 했으니까 의로운 행위를 한, ‘그 사람이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셨다, 그 순교하신 일은 참 어려운 일이고 장한 일이다.’ 순교하신 그 순교에다가 가치를 두느냐 그렇지 안하면, ‘그분이 순교할 수 있기까지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을 참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계약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죽는 것도 그 사람이 피하지를 아니하고 죽게 됐다.’ 그러면 그 가치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그 믿음을 하나님이 가치로 볼 것인가 그 사람의 의로운 행위를 가치로 볼 것인가, 하나님은 어떤 것을 가치로 보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은 믿음 없이, 민족을 위해서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 정의를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죽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의인들과 큰 사람들 위해서 죽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나라를 위해서 죽은 순국자도 있고, 또 자기가 사랑을 위해서 죽은 순애자도 있고, 또 민족을 위한 순족자도 있고, 사상을 위한 순주자도 있고 이렇게 죽은 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죽음이 있으나 그 죽음은 하나님의 선포해 놓으신 이 계약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서 죽지 안한 죽음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 남을 위해서 죽는 죽음인데.

그러면 그런 죽음을 백 명이 죽었든지, 천 명이 죽었든지, 만 명이 죽었든지 남을 위해서 죽은 그 죽음을 그것을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가치로 여길 것인가 혹은 하나도 가치로 여기지 아니하실 것인가? 거게 대해서 어떻습니까? 그렇게 죽은 그 죽음을 하나님이 다소라도 가치로 여기시겠습니까 전혀 가치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다소라도 가치로 하나님이 보신다고 그렇게 생각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런 죽음은 무궁한 하늘나라에 그리스도의 심판에서 털끝만한 가치로도 삼지 아니하시는 것으로 아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예, 이것입니다.

그러면 행함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과 그분이 선포해 놓으신 이 계약을 믿기 때문에 행한 그 믿음 그것이 가치가 있습니다. 거게다가 전적 가치를 두고 딴 데는 가치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행함은 죽기까지 행할 수 있는, 생명까지 바칠 수 있는 그 믿음에 가치가 있다. 자기가 여러가지 손해나, 희생이나, 수고나, 봉사나 한 그게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기까지 하나님과 하나님이 계약하신 그 말씀을 믿는 거기다가 하나님이 가치를 두시는 것입니다.

또 이 성경에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나 그런 사람들이 참 인간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불 속에 들어가 가지고서 안 죽는 것도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거고, 또 불 냄새도 나지 않는 것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사자굴에 들어가 가지고서 상하지 안하는 그것도 인간들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죽은 자를 다시 살려낸, 냄새 나는 송장 나사로를 살려낸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면 이런 위대한 일이 그 사람의 담력으로 말미암아 생겨졌는가, 변치 않는 심주로, 의지로 생겨졌는가, 그 사람의 굳센 마음으로 생겨졌는가? 이것은 무엇으로 그런 인간이 할 수 없는 초인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의심 없이 믿는 그 믿음의 힘으로 됐습니다.

믿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계약을 믿으면 믿음의 양만치 계약 선포해 놓으신 하나님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선포해 놓은 계약을 믿는데 하나님이 만일 책임을 지지 안하면 하나님이 그 계약을 위약하는 위약자가 되는데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안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행함에 가치 있는 게 아니고 행할 수 있는 그 믿음 가진 그 믿음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 믿음도 수많은 믿음이 있는데 믿음에 또 가치 있는 것 아닙니다.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 불변하신 하나님, 대주재이신 하나님, 모든 것에 원인이 되신 이 하나님, 우리를 십자가에서 독생자로 대속해 주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믿는, 이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에다가 가치를 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됩니다. 그때는 우주와 영계가 통일됩니다. 통일될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통치하며 무엇을 가지고 일을 하시며 무엇으로써 당신을 대우했다고 또 당신이 실력 있는 자라고 그렇게 평가하느냐?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이 모든 계약 역사를 믿는 것 그 외에는 하나님을 대우한 것이 없습니다. 믿는 것 외에는 하나님이 대접으로 받지를 않습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대우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그 크심과 신실하심과 그 사랑과 변치 아니함을 믿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대우로 삼으십니다. 대접받으신 것으로 삼으십니다.

또 하늘나라에서 무슨 힘 가지고 일하느냐? 하늘나라에는 과학의 힘이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하늘나라에는 이 피조물들의 힘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영생하는 무궁세계에서는 무슨 힘으로 일하느냐?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그 피동 그 힘 가지고 순전히 일합니다. 딴 힘 가지고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는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인가? 하나님에게 피동의 양이 많은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요 온 세상을 움직인 그런 힘은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힘이 없으면 하늘나라에서는 털끝만한 힘도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순전히 하나님을 참되다 믿는 그것이 하나님의 대우요, 또 능력은 하나님을 참되다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생겨지는, 믿음으로 생겨지는 그게 전부 실력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다 이렇게 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같이 됩니까? 어떻게 피조물이 하나님같이 됩니까? 될 수 없지마는 우리는 하나님의 전지를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을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뭐인가? 그것은 우리의 것은 하나도 아닙니다. 다만 그분과 연결이 됨으로 되어지는 것이요, 이 종이 지금 흔드는 것 제 힘으로 흔드는 것 아니고 내 손의 힘과 연결이 됐으니까 이거 움직여집니다. 내 손에 따라서 이 종이 움직이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에게 믿음으로 피동되는 그것이 우리의 모든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피동됨으로 우리는 그분과 같이 됩니다. 내가 이 종을 가지고 이렇게 두르니까 내게 붙들린 종은 내 손을 이래 한 바퀴 돌리니까 저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내가 이래이래 하니까, 내 손이 이라니까 이 종도 이리이리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에게 믿음으로 속하고 믿음으로 그분에게 피동될 때에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를 통해서 다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효력이 뭐인가? 하나님이 지극히 크다. 하나님이 지극히 크심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이 지극히 크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크지 않고 나라가 크다, 사회가 크다, 인간이 크다, 과학이 크다, 어떤 사람이 크다.’ 이렇게 하면서 그들이 말하는 이 큰 것을 ‘이 큰 것에 네가 순종하지 안하면 너는 죽인다’ 해도, 그러면 과학이 힘있다, 어떤 정권자가 힘있다, 어떤 재벌가가 힘있다 하여서 그가, 우리가 하나님 크심을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분 시키시는 대로 살라고 할 때에 그 모든 온갖 큰 것들이 우리를 살지 못하게 합니다.

살지 못하게 할 때에 자기의 실력에 백배 천배 큰 것이 살지 못하게 하는데, 자기보다 천배 만배 큰 것이 살지 못하게 할 때에 그 사람이 거게 꺾어지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하나님의 크심에 속해서 살 수 있는 것은 무슨 힘으로 살 수 있느냐? 하나님이 그것보다 크다는 것을 믿는 고 믿음 하나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믿음 하나 고거 있으면은 삽니다. 거게 꺾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크심을 암만 믿는다고 해도 피조물 가운데 모든 그 큰 것, 피조물 가운데 모든 큰 것이 우리를 하나님 크심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할 때에 어떤 힘이 믿지 못하게 방해하든지 방해하는 그 힘이 있어도 내가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안할 때에는 나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크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자기가 아무리 말로 믿고 이렇게 한다고 해도 세상에 큰 것이 나타날 때에 조그만한 큰 것이 나오니까 그래도 하나님 믿는 걸 배반치 안하다가 ‘하나님보다 이거는 더 크다’ 하는 것이 자기에게 인정이 되고 그것보다 하나님이 크다고 인정이 안 될 때에는 제일 큰 것에게 자기는 소속하고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이 시험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믿으면 무엇만치 믿노?’ 이래서, 땅위에 온갖 피조물이 다 하나님 크심을 믿을 때에 ‘내가 이렇게 큰데’ 하고서 위협을 줄 때에 어떤 그 큰 것에게라도 하나님이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다 달라들어와도 하나님 크심을 부인하고 하나님 배반하고 그리 따라갈 리는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이 세상에 사랑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제일 크시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고 믿으면 하나님 사랑보다 작은 사랑은 와 가지고서 암만 해도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데 어느 정도 믿나, 땅위의 어떤 사랑만치 믿나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에 하나님 사랑을 버리고 땅위에 어떤 사랑을 따라갈 수 없는 사람이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일 크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은 친구의 사랑보다는 크기 때문에 친구 사랑은 버려도 하나님 사랑은 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과 대립이 될 때에 이거는 천상 하나님의 사랑을 버려도 부모의 사랑은 버릴 수가 없다 하면은 그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크게 여긴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은 믿어도 부모 사랑보다는 작게 믿고 그만침은 믿지 못한, 믿음이 거게 환하게 중량이 나타났습니다.

또, 하나님 사랑을 믿는다 해도 자기 부부가 있을 때에 부부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꼭 대립을 시킵니다. 여러분들 고거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듭니다. 네가 부부의 사랑을 취할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버려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네가 가질라면은 부부 사랑을 버려야 되고 요 둘이 꼭 같이 저울질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만드는 그때에 부부 사랑이 그거야 얼마든지 좋으니까 버릴 수 없지, 하지마는 그 사랑 안 버리면 하나님 사랑 버려야 되고 하나님 사랑 안 버릴라면 그 사랑 버려야 되고 이는 둘 중에 하나밖에는 취하지 못하게 될 때에는 울면서 하나님의 사랑 버리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부부 사랑보다 하나님 사랑을 작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또 울면서 부부 사랑을 버려도 하나님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부부 사랑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여게서 사랑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믿기는 다 믿는다 하지마는 하나님의 크심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도 네가 어느 정도 믿느냐 하는 믿음의 중량을 다 결정을 지웁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에 여러가지 시험이 오는 것을 공연히 온다고 하지 말고 모든 시험은 하나님이냐 땅위에 피조물 어떤 것이냐 요 둘 중에 어느 것이냐, 또 네가 하나님을 믿고 높이고 섬기면 어느 정도 무엇만치 섬기느냐? 그 실력을 하나님이 달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할라고 하는 게 아니고 달아 가지고 그다음에는 ‘네가 이번에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느 정도 믿는다고 네가 인정하느냐? 하나님의 크심을 어느 정도 믿는다고 인정하느냐?’ 이렇게 모든 것을 시험해서 자기가 모르는 자기를 알게 되고, 다른 사람도 나를 모르던 사람이 알게 되고, 있고 없는 걸 알게 해서 이것으로써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점점 고쳐 가지고서 온전함에 나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드시기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소망이 있고 땅에 있는 소망이 있는데 소망과 소망을 저울질합니다. 하늘에 소망을 믿지마는 뭣만치 믿느냐? 뭣보다는 적게 믿는다. 하늘의 소망을 믿지마는 네가 학문만침은 소망을 안 가진다. 학문보다 하나님께 소망을 더 가진다. 이런 것도 전부 다 우리에게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또 약속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땅위에 모든 약속이 있는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만치 땅위에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유혹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어느 정도 믿느냐? 믿는 그 이하의 유혹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유혹 안 당합니다. 그러나 그 믿는 이상의 유혹이 오면은 그 사람은 당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거 좀 많은데 그만 내비두고, 오늘 지금 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은, 믿는 것은 그 믿음의 가치가 어데 있느냐? 믿음은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면 그 믿음은 다 죽은 믿음입니다. 행할 수 있는 것만치 그 믿음은 살아 있습니다.

믿음으로 주먹만한 것을 행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주먹만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그 믿음 가졌습니다. 그 사람은 태산만한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으면 태산만한 그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믿음으로 필연적으로 행동이 나올 때에 그것이 믿음이지 행동 안 나오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여행을 갈 때에 호주머니에 돈이 있는데 돈이 이거 만 원짜리가 많이 있습니다. 있는데 배가 고픕니다. 음식점이 있는데, 음식점에 와서 만 원짜리 주면 음식을 많이 줄 수 있을 터인데 ‘네 그 돈 가지고 가서 음식을 사먹으면 되지 않느냐?’ ‘이것 가지고 누가 음식을 준다 하더냐? 이 종이쪼가리 이까짓 거 보고 누가 음식을 준다 하더냐?’ 그러면 그 사람이 호주머니에다가 지화를 많이 가지고 있지마는 그 지화 가지고 배는 고파도 밥 사먹으러 가지를 못합니다, 밥을 안 줄 것이라고. ‘이 종이쪼가리 보고 누가 밥 주겠느냐?’ 그러면 그 사람은 그 화폐의 가치를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까?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까? 안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믿으면, 믿으면 필연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면 소용이 없다. 행할 수 없는 믿음은 믿는다는 게 거짓부리다. 입으로는 믿는다 하지마는 행하라 하니까 행하지는 못합니다. 그건 실상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면 그 믿음은 소용이 없는 믿음입니다.

제가 오후에 설교하는 것은 오전에 메어(W. Harold are) 목사님 설교와 비슷합니다. 오늘 제가 돌아가니까 교인들이 나를 만나 가지고 말하기를 꼭 백 목사님과 꼭 같은 목사님이 어데 한 분 왔는데 그런 목사님이 왔느냐고 이렇게 말해. 그거 내가 있다가 시침을 뚝 떼고 ‘뭐이 같은데요?’ `목사님이 증거해서 목사님한테 우리가 배운 것과 꼭 같은 것을 가르칩디다’ 이렇게 말해요.

저도 거게서 오늘 참 아주 의문을 풀고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 카브넌트 신학에 제가 모든 사람들을 보내지마는, ○○○목사님 어데 있소? 그때 그 카브넌트 신학교에서 구약 그 교수, ○○신학교 온 그분 이름이 뭐이지? 헤리스(Dr. Hariss) 목사님. 그분이 그때 설교하는데 구약 설교를 해서 내가 그거 보고서 제자들을 그리 보낸 것은 ‘이 목사님은 보수파고 이 세상에 속화되지 안했다’ 해서 제자들을 그리 보냈습니다.

보내나 늘 생각하는 것이 ‘구약적이고 신약적인 이 신앙을 가졌나 안 가졌나?’ 항상 염려를 했는데 요새 제가 아무 데 가도 다른 데 잘 들어볼 수 없는 것, 참 성경에 있지마는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은 죽이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사람으로 사는 요 간단하지마는 요것을 들어 가지고 지금 강조하는 이런 학교가 별로이 없고 이런 교회가 별로이 없습니다. 이래서, 나는 요 하나로서 지금 요번에 만족하고 이제는 안심하고 학생들을 보낼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 봐서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아무래도 오늘 이 목사님 말씀같이 우리는 안 믿을 때의 사람, 첫째 아담에게 속한 안 믿을 때 속한 안 믿을 때 사람 그 사람 완전히 죽어야 됩니다.

완전히 죽어야, 산 것만치, 고게 남아 있는 것만치 새사람은 병들었습니다. 그게 완전히 죽으면 새사람으로 완전해졌습니다. 그 생활을 완전히 죽이면 새사람으로 완전히 삽니다. 그것 반, 새사람 반 이런 것은 항상 미결 중에 있지, 참은 아닙니다.

이래서 나도 오늘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옛사람은 완전히 죽이고 완전히 죽여 새사람으로만 살면서 옛사람이 하나도 섞이지 아니한, 옛사람이 섞여 있지 않는 순전히 새사람으로만 사는 요 생활을 해야 된다 하는 것을 강조하는 그 말씀에 아주 극히 아멘이 됐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이렇게 말로 믿는 게 믿는 게 아니고 마음으로 믿는 게 믿는 게 아닙니다. 말로 믿는 것보다는 마음까지 믿으면 좋고 마음까지 암만 믿어야 소용 없습니다. 마음까지 암만 믿어도 소용 없소.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니면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는다, 하나님이 주권으로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주권으로 섭리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암만 믿어도 공산주의가 독침을 가지고 우리를 쿡 찌를라 할 때에 그 독침이 주권 개별 섭리를 가지신 주님이 그 독침을 거머쥐고 나를 찌를라고 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믿음이 소용 없습니다.

찌를 때도 ‘사랑하는 주님이 나에게 독침으로 찌르니까 반드시 이것이 영원한 세계에 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독침으로 찌른다’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감사함으로 받을 수 없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는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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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0 믿음이 무엇이뇨/ 히브리서 11장 1절-3절/ 1987년 14 공과 선지자 2015.10.31
3879 믿음이 무엇이뇨/ 히브리서 11장 1절-3절/ 1987. 12. 2. 공과 선지자 2015.10.31
3878 믿음이 무엇이뇨/ 히브리서 11장 1절-3절/ 871202수야 선지자 2015.10.31
3877 믿음이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 1절-3절/ 871213주새 선지자 2015.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