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매오의 신앙 5가지

 

1987. 2. 19. 목새벽

 

본문:마가복음 10장 46절∼52절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그러면 이 소경인데 또 거지인데 그 아버지 이름을 소개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족보를 댈 이유가 없는데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여게서 그 소경이 모두 그 지방에서 다 소문이 나서 불쌍한 사람으로서는 유명하고 소경으로 비참하고 그러니까 비참한 것으로 지방에서 유명한 사람이라는 그것을 여게서 알아내야 됩니다.

이거 이걸 모르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라’ 이래 말하면 ‘그 뭣 보고 백지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소경이니까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그라는가?’ 소경도 불쌍치 않은 사람 있소. 경제적으로 말하면 부자들 있습니다.

‘숨은 보배라’ 하는 책 내가 한번 봤는데 ○○○씨라 하는 분은 소경인데 대거부요. 한푼도 없는 사람이 점쟁이 해 가지고 아주 큰 재벌이 됐어. 그런 사람이야 뭘 불쌍해? 그런데,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이렇게 한 것은 그 지방에 유명했다 말이오. 도시에서는 잘 몰라. 도시 사람 이 참 불행스러워요.

내가 어제 아레도 시골 어떤 아는 노인을 하나 만났는데 앉아서 얘기를 하니까 모든 면이 박사라. 뭐 국민학교 한번 했던가 안 했던가 모르지마는 박사라. 도시 사람은 이거 사장 만나 가지고 얘기해도 기계라.

기계라 하는 것은 시계도 보면 그뭐, 뭐라 하더라? 나사라 하더나? 그거는 만날 왔다 갔다 요 뱅뱅뱅뱅 요것만 하데, 장. 언제든지 요렇게 해. 시계 열면 장 요것만 하고 있어, 다른 것 안 하고. 그것만 잘하지 딴거는 아무것도 몰라. 그거 모양으로 도시 사람은 기계라. 저 뭐 기술 하나면 그것만 잘하지 다른 거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기 때문에 도시 사람은 도시 사람이 만들어 놓은 책 시골 사람이 만들어 놓은 책, 책을 전부 다 봐야 시골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그 사람 따라갈 수 있다 하는 겁니다, 뭐 도시면 짜다라 좋은 줄 알아도.

또 공부만 하면 뭐 좋은 줄 알아도 잔디 박사도 있고 구더기 박사도 있고 별별 게 다 있는데 그러나 그런 거는 귀한 줄 알지마는 하나님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그까짓 게 뭐 할 겁니까? 제가 주상면 있었는데 주상면 있을 때에는 그 면에서 제일 불쌍하다면 환하게 다 압니다. 소경 하면 다 아요. ‘아무 데 소경’ 소경이 그뭐 일 면에 하나거나 둘이거나 있지 그렇게 많이 있습니까? 또 무슨 누운뱅이 하면 더 유명합니다.

누운뱅이 하면 그만 그 군내에서는 거의 알다시피 하요.

여게 “소경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이란 것은 인간 중에 제일 불쌍한 인간이라 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여기 나타냈습니다. 왜?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 중에 제일 불쌍한 이 가련한 인간인데 그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이 뭣 때문에 그리 됐느냐? 그걸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하는 거라. 뭣 때문에 그래 됐습니까? 뭐 키가 작습니까, 코가 잘 못 생겼습니까, 귀가 잘 못 생겼습니까, 인물이 나빠 그렇겠습니까, 뭐입니까? 원인이 보지 못하는 그것 때문에 됐다 하는 그것을 하나의 형식으로 이런 형식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인간의 모든 비참과 가련은 그 원인이 보지 못하는 데 있다 하는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 그거요.

이런데 이 가르치면, 망할 자는 이 자리에서 들어도 ‘성경은 되나 안 되나 자꾸 이렇게 저렇게 아무나따나 주 붙이면 되는 거로구나, 그 어데 바디매오가 소경된 것뿐이지 뭐 불쌍하고 가련하고 뭐 거지고 소경이니까 불쌍하고 가련하지만.’ 거지고 소경이라도, 거지라도 다 가련합니까, 어데? 소경이라고 다 가련합니까? 이런데 거게서 지방에서 불쌍하고 가련하다고 유명한 사람이라 그말이오. 잘나 유명한 게 아니라 불쌍하고 가련해 유명한 사람이라.

이걸 여기서 기록한 것은 이렇게 비참하고 가련하게 된 그 사람의 모든 그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하는 거게 있었다 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이런 형식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여게서 우리가 하나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여게서 그냥 이래 보고 지나갈 게 아니라, 오늘 아침에 내가 이런 해석도 안 하고 그 다섯을 말할라 했는데.

그러면 자기가 자기의 그 불행하고 비참한 것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행복인데 뭐할라고 구주를 만날 게 뭐 있겠습니까? 자기의 비참하고 가련한 것을, 가련한 점을 아는 사람이 돼야 돼.

이 세상은 모두 어떻게 배짱만 길러놨는지 저 잘난 재미로 삽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짜든지 어데서든지 만족하고 살아라. 뭐 제야 여러 수백억의 재벌이 되든지 말든지 저 재산 많았지 내게 무슨 상관있노?’ 재벌 없다고 뭐 그렇게 졸할 것 없고 ‘건강하면 제 건강 있지 뭐 내 건강이가?’ 건강 없다고 졸할 것 없고 어짜든지 위로만 자꾸 이라니까 아무 갈급없이 그저 ‘만족하고 살라, 만족하고 살라.’ 자기의 불행점을 찾지 못하는 그것이 행복인 줄 알아도 그게 자꾸 더 망할 자입니다.

왜? 불행의 그 원인이 있는데 불행인 것을 깨닫고, 자기의 불행인 것을 깨닫고 그 원인을 깨달아야 이 뭣 때문에 이리 됐는가 원인을 찾을라 할 것이고, 또 원인을 찾아 가지고 해결해야 일이 될 터인데 암만 그래도 만족하면 그놈은 그 원인을 고치지 안하니까 더 불행스러워도 또 만족하고 그러면 마지막에 뒈지고 망하고 지옥불에 가야 될 거라 그말이오. 지옥불에 가도 자꾸 ‘이것도 뭐 괜찮다’ 이라면 마지막에는 제가 고통을 당해도 괜찮겠습니까? 사람이 다 만족한다는 것도 첫째는, 내게 그 불행을 느끼지 말고 만족하라는 것은 자기가 첫째는 자기에게 뭣 때문에 다른 사람은 다 모든 것이 사람 위에 뛰어난 사람이 됐는데 나는 이렇게 이런 사람이 돼 있는가 이것을 찾는 것이 첫째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다 모든 면에 실력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인데 나는 왜 이렇게 무능하고 비참하게 됐는가?’ 불행을 불행으로 알아야지.

불행으로 알고 난 다음에, 불행의 원인은 모든 죄니까 ‘내가 죄가 뭐 있나?’ 죄를 찾아서 암만 찾아봐도 자기에게 불행의 원인인 죄를 찾을 것이 없고, 죄를 찾아 다 회개를 했고, 또 자기 모든 행동한 것은 전부 하나님의 뜻에 딱 들어맞춰서 믿음을 지켰는데 이렇게 됐으면 그때에 불행은, 내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 행했고 하나님이 전지 전능의 주권자로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인데 내가 원인의 잘못된 거 자꾸 찾고 찾고 찾아도 없고 뜻대로 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이해 못 할 나에게 행복을 주셨다. 내가 이해 못 해 그렇지 내가 그 원인 찾을대로 다 맞았고 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데 이래 된 것은 이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으로 주셨으니까 나는 여게서 불만 불평 품지 말고 만족하고 참아 기다려 보자.’ 이래야 되는 것이지 자꾸 모든 것을 초절하면 안 됩니다.

초절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밑에 돌담을 쌓는데 돌 한 개 놓고 그 위에 또 한 개 더 놓는 것은 초월입니다. 한 개 위에 또 올라갔다. 또 더 놨다.

초절은 뭐인가? 밑에 돌 한 개 놓고 또 그 위에 돌을 두번째 놓고 세번째 놓은 것은 이것은 초월에 관한 것이고, 비유컨대 초월에 관한 것이고, 초절은 한 개 놓고 그 위에 돌 놓지 안하고 세개째 되는 돌을 놓을라 합니다. 두개째 놓는 돌이 안 놓이고 비어 가지고 있는데 그 위에 세개가 올라갑니까? 세개가 올라갈라고 하는 그것이 제 마음으로만 그렇고 생각으로만 그렇고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꺼꾸로 해 가지고 일을 초월적으로 모든 일을 진행시키지 안하고 초절적으로 하는 그런 사람 있습니다, 일을.

밑에 순서적으로 밟아 올라가지 안하고 순서를 빼고 뛰어올라 가지고 초절적으로 이래 중간에는 끊어지고 그 위에 올라가 가지고 날뛰는 그자 있다 말이오. 그자는 뭐 백이면 백, 만이면 만 다 실패요. 그러기 때문에 초월 방편은 다 성공이고 초절 방편은 다 실패라 하는 이것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사람이 자기가 자기에게 불행한 그런 점이 있는데, 불행한 점이 있는데 그 불행한 점을 ‘뭐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모든 걸 나에게 유익되게 해 주시겠지.’ 하고 평안하게 마음을 먹고, 또 한 사람은 자기에게 불행이 있으니까 ‘이 불행이 뭣 때문에 내게 왔노?’ 이래 가지고 자기는 또 잘못이 있는가 해서 잘못을 찾고, 하나는 잘못을 찾지 안하고 ‘하나님이 뭐 잘해 주셨지’ 하고 만족을 하고 있고, 하나는 잘못됨이 있는가 해서 잘못됨을 모두 다 찾아서 다 회개를 하고 난 다음에 그래도 불행한 그것이 그대로 자기에 불행스러운 것이 있으니까 그 사람도 ‘내가 할 대로 회개하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해 주시는 것 보니까 이것이 아마 나에게 유익이 있는가보다’ 하고 그래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인데 두 사람 중에 자기는 불행의 원인도 찾아 회개하지도 안하고 만족하고 있는 사람 하나 있고, 하나는 자기에게 원인인 모든 불행을 다 찾아서 회개를 다 하고 회개할 것이 없다시피 그렇게 회개를 하고도 불행이 오니까 그 사람도 만족하는 사람 하나 있고 둘 다 만족합니다.

만족하는데, 처음에 만족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무슨 주의입니까? 그 사람은 무슨 주의요? 어느 사람이 초절주의고 어느 사람이 초월주의입니까? 일호가 초절주의요 이호가 초절주의요? 일호가 초절주의. 그거는 망하겠습니까 안 망하겠습니까? 망합니다.

이호는 그 사람은 초절주의입니까 초월주의입니까? 초월주의. 그 사람은 성공하요. 이 사람들이 자꾸 순서를 따지지 안하고 자꾸 이렇게 엉뚱이같이 하기 때문에 헛일이라 그말이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제 아침에는 반신불수 거게 대해서 말씀했고, 오늘은 또 오늘 아침에는 이 소경 말하고 이러니까 그날 아침에는 반신불수를 말했으니까 거게 대해서 내가 내 복음의 도리로 받아 가지고 ‘이 성경이 이 반신불수로 우리에게 오늘 아침에 말씀해 주신 이 도리에 대해서 내가 배울 것이 없나, 고칠 것이 없나, 이 면에 대해서 어찌 되노?’ 그 면을 찾아 가지고 그날 아침에는 기도도 하고, 그 면에 대해서 자기가 찾아 가지고 고쳐서 모두 다 고칠 걸 고치고 정리할 걸 정리하고 요렇게 하지 안하고 항상 또 딴거 합니다. 그전에 늘 하던 그거 하요. 그날 아침 그거 뽑아 버렸어.

또 오늘 아침에도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함에 있다’ 이것을 지난밤에도 말하고 오늘 아침에 말하는데 또 말해도 그것은 다 없어버리고 또 항상 말하는 그거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다 그거고 항상 또 자기가 기도하는 것도 그거고 원하는 것도 그거고 항상 그전에 뭐 어떤 거 하나 하면은 자기 소원대로 그것만 합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구비치 못하고 줄맞은 신앙이 아니라. 다림줄 신앙이 아닙니다, 다림줄.

다림줄 신앙은 돌을 쌓아 담을 쌓아 놓고 다림줄을 띄우고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랬는데 그 하나라도 툭 불거지면 그거는 헛일이라, 그만. 빠져도 안 되고 채워져도 안 돼요.

이러니까, 뭣이든지 꼭 초절이 안 되고 초월을 해야 되고 또 무엇이든지 구비해야 됩니다. 구비해야 되니까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을 이 성구를 보면서도, 이 성구를 보면은 이 성구에 대해서 내가 고칠 걸 고치고, 준비할 걸 준비하고, 깨달을 걸 깨달야 할 건데 이 성구를 읽으면서도 항상 성경 어데 있는 거, 계시록 어데 있으면 계시록에 있는 그것만, 이 성구를 읽어도 계시록에 있는 거 그거, 또 이 성경을 읽어도 그거, 항상 밤낮으로 그것뿐이면 그 사람의 신앙은 그게 하나의 주문신앙이요 마지막에 그리 되면은 미치괭이가 되고 만다 말이요. 이상자가 되는 거라. 나중에 가서는 정신 이상자가 자기가 안 될라 해도 이상자가 되고 말아요, 마귀란 놈이 벌써 들려 가지고 자꾸 그래 하는 것이니까.

지금 대개 사람들이 보면 그래 가지고 실수하는데 그런 것이 우리 교회도 좀 있습니다. ○○○집사님은 그 좀 주의해야 됩니다. 언제든지 무슨 설교 해도 그 설교 ‘아, 요 설교에 대해서.’ 그날 아침에는 그 설교에 대해서만 자기가 파고 이래 하면은 고칠 게 얼마든지 있는데 고거 하지 안하고 그만 설교해도 처음에는 그말 하다가도 마지막에는 그만 딴데로 돌아가 버려.

딴데로 돌아가 가지고 내나 하던 거 그거 뭐 산곡의 백합화나 복음 성가나 자기가 이러며 그거 하며 장 익었으니까, 익었으니까 그만 그 노래나 부르고 그만 그래. 그게 내나 말하자면 그리 되면은 오래 가면은 정신 이상자 됩니다.

여기 ○○○권사님 없어요? 양산동 갔어? 양산동? 그런데 내가 좀 말하라 했는데 내가 시간 없어 말하는데 ○○○집사님 고거 꼭 주의해야 됩니다. 가만히 들어 봐요. 그러니까 그게 나중에 외식되고 말아요.

이라다가 그만 그렇게 파고 들어갈라고 하면 자꾸 하나로 하지 말고, 때를 따라서 자꾸 주시는데, 주시면 주시는 거게 대해서 내가 회개도 해야 되고, 기도도 해야 되고, 또 살피기도 해야 되고, 준비도 되고 이래야 되는데 그만 전부 언제든지 익숙한 그것뿐이라.

그러니까 천주교가 주문만 읽는 그 주문 신앙이 된 그걸 가지고 천주교를 다 망치고 말지 안했습니까? 신비주의자들이 다 그렇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 줄맞은 신앙을 하지 안하고 언제든지 제목 신앙으로, 가지 제목뿐이라. 장 그것뿐이라.

그것만 가지고 구원이 되어지는가? 그러고 저 먼저 일주일 동안 여기 금식하고서 어느 기도원에 있던 목사 하나 왔지요? 그런데 그분 벌써 그래 돌아다니면 저게 외식이라 하는 걸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말하면 그이 보면 기도하는 목소리 들으면 알아. 저 사람 어데 기도원에서 왔는가보다. 기도원에 바른 사람들이 거게 있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바로 가르치는 사람이 별로이 없기 때문에 거기 있는 사람이 모두 탈선됩니다.

거기 갔다 온 사람은 그래요. 이 뭘 다른 사람에게 들어봐라 하는 전부 기도하니까 그거 다 헛기도인데 그걸 고치라 해도 고치지 안하고 자기도 모르게 기도하다 보면은 나중에 설교가 돼 버리고 기도도 안 되고 마는 그런 일이 있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듣게 할라 하니까, 뭣이 자기 고함 소리 가지고 온 전체를 막 잡아 가지고 그만 그 고함 소리로 다 통일시킬라는 이런 생각도 가지고, 또 자기를 뭘 나타낼라 하니까 이라니까 소리를 ‘으’ 이라다 보니까 소리가 가치가 없거든. ‘어어’ 이라다가 나중에 가서는 `허어어어' 이랍니다.

`허허, 주여러러러러어어어’ 자꾸 이래 놓으니까 그만 그 목소리가 된다 말이오.

여기 먼저 어떤 청년 하나 그 사람은 또 ‘어러러러러 억억 어 주여 허 허 허 허억 허억’ 이라니까 또 그게 또 ○○○집사는 부러워서 한참 또 그래. ‘억 억’ 이래 보니까. 보다 보니까 이거 또 그게 좀 열적고 그러니까 또 고치더라 말이오. 이런데 또 그래 할라고, 가다 보면 자꾸 그렇게 할라 하는, 그게 나중에 보면 자꾸 외식으로 나가는 것이라 그거요. 안 돼요.

언제든지, 지난밤에 요 바디매오에 대한 설교했으면 그 설교를 주신 것이니까 고 설교에 대해서 남김 없이 충분한 심사도 하고, 충분한 회개도 하고, 충분한 기도도 하고, 거게 대해서 충분한 모든 자기에 대한 것을 과거 현재에 대해서 반성하고 미래에 대한 것도 이 말씀 가지고 수정을 막 해야 됩니다.

수정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 또 반신불수에 대해서 말한 말씀이 나오면 그 말씀에 대해 또 수정을 해야 됩니다.

설교로 말하면 그러하고, 또 설교 아니고 인제 성경을 보면은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세기 1장을 보면서 거게 대해서 자기가 또 수정을 해야 됩니다. 또 출애굽기 보면 출애굽기에서.

자기 현제 보는 그 성구와 자기와의 대조해 가지고 잘못된 그것을 찾아서 고쳐서 이래야 되는 것이지 암만 출애굽기 보면서도 항상 창세기 자기 알고 있는 그거뿐입니다. 이 성구야 암만 성경을 읽어도 성경 읽는 거는 다 지내보내 버리고 자기는 그것만 가지고 항상 고조하고 강조하고 거게만 자꾸 생각하니까 익숙했지, 말은 익숙해지지마는 벌써 자기 생활과 대조해 가지고 고쳐지는 것은 벌써 천리 만리 거리가 자꾸 멉니다.

요것 말하는데 또 한번 요 말씀 가지고 자기를 수정하지 안하고 내나 그거 가지고 말했습니다. 또 요 말, 또 새 말씀이 나왔는데 또 그랬어. 그러면 두 번 안 했습니까? 또 한 번 더 자기가 읽으면서 고거 가지고 고치지 안하고 또 내나 먼저 알던 그거 가지고 했습니다. 세 번 아니요? 그러면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면 차차 멀어집니까 가까워집니까? 자꾸 멀어진다 그말이오.

자기 실상과, 자기와 이 복음과 일치시키는 데는 자꾸 멀어지기 때문에 이거는 자꾸 외식이 자꾸 돼지고 나중에 가서는 그 습성이 돼 놓으면 고치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까끌까끌 하나님이라’ 그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은, 하나님에 대해서 ‘다각형이라, 하나님은 모가 많다, 밤송이 같다.’ 하는 그말은 뭐이냐 하면 하나님은 요 면으로, 요 면이 있고 조 면이 있고 모든 면면마다 다 살펴서 이라다 보니까 그 한 면도 남궈 놓으면 절단나요. 그 한 면만 남궈 고 준비 안 해도 절단날 터이니까 똑 찌르는 밤송이 같다 말이오. 그 한 면만 냅둬도 꼭 찔러서 못 견디겠다 그말이오. 이거 인제 이런 걸 비유로 들어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귀란 놈은 이 설교를 어떤 사람이 성경을 바로 해석해서 설교하면은 거게 대해서 사이비한 걸 가지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믿는 믿음을 견고치 못하도록 의심을 줍니다.

‘바디매오 그는 뭐 불쌍한 사람이라, 유명한 사람인데 행복돼 유명이 아니라 비참해서 유명한 사람이라.’ ‘이 봐라, 어데 그게 있노? 이거 이 꾸며대 가지고 자꾸 주 말로 꾸며대 가지고 이래 한 것 아닌가?’ 그러면 그 사람이 거기 넘어가 가지고 ‘참 그뭐 그렇게 어데 불쌍하다 가련하다 하는 그런 말이 여기 어데 있는고? 없는데 그러니까 아무나따나 자꾸 성경은 그러니까 자꾸 뭐라고든지 꾸며대서 해석만 붙이면 되는 것이로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그 사람 그거 하나 가지고 망해 버리고 맙니다.

목회자가 됐으면 그거 하나 가지고 망하고 또 교인이 돼서 설교를 듣는 사람도 그거 하나만 하면 다 망하는 거라. 목사가 설교한 게 다 그런 격으로 이와같이 한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이 아무나따나 꾸며댄 그놈을 보고 꾸며댄 그까짓 놈의 말 듣고서 자기 생명을 바쳐서 살 이유가 뭐 있습니까? 이 말씀은 생명을 바쳐서 살아야 되는 일인데 그렇게 되는 거, 이 마귀란 놈이 그렇게 때문에 오만 수단이 다 있는데 인간들이 그것을 모르고 자꾸 그러기 때문에 참 그 사람에게 대해서 직접 말하고 싶어도, 이거 내가 ○○○집사님한테도 오늘 아침 말하는 것은 그분이 신앙에 좀 장성해졌기 때문에 말하지, 그거 내가 우리 교회서는 지금 장로 한 분만 세워야 되겠는데 이 ○○○씨를 장로님을 세워야 되겠다 그때 그렇게 말했었는데 왜 지금은 안 하고 있느냐? 차차 차차 보니까 자꾸 지금 삐끄러져 나간다 말이오, 탈선돼 나가.

이게 뭐이냐 하면 자꾸 자기 하는 거 몇 가지 그것만 하지 자꾸 구비해 나갈라고 애를 쓰지 안하고, 성경은 다림줄인데 요 다림줄 이 다림줄이라 하는 것이 그 한 군데라도 끊어지면 다림줄 씁니까 못 씁니까? 다림줄이 한 군데 동가리가 났으면 쓰요 못 쓰요? 저 건축가 뭐꼬? ○집사, 그 다림줄 말이요, 다림줄에 한 치라도 그게 빠졌으면, 한 치라도 떨어졌으면 다림줄 써요 못 써요? 한 치만 떨어져도 못 써. 한 치일랑 냅두고 그러면, 한 치일랑 냅두고 끊어지기만 끊어지면 씁니까? 못 써. 그 다림줄이라 말은 하나도 빠지면 안 된다 그말이요, 빠지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라도 뽑고 그와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을 것이요” 그러면 택자니까 구원은 얻지마는 하늘나라 가면 영광 구원은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어떤 사람들은 보면 뭐 신고함에 써넣는 거 이런 거 보면 그 사람은 어짜든지 바로 해서 고쳐 볼라고 애를 쓰지 않고 ‘보자, 여게서 뭣을 티뜯을까?’ 티뜯을 게 하나도 없고 티뜯은 거 다 잘못 뜯었어. 사람이니까 티뜯을 게 있기는 있겠는데 옳은 걸 뜯으면 그거 그래도 하나님이 좋아할 건데 그것도 아니고 전부 그 선입적 잘못된 관념, 속에 자기 속에 자기 중심 그게 있어 가지고 자꾸 이와같이 하는 그것은 그걸 뽑아버리기 전에는 헛일입니다.

이 세상에 물질 이치도, 물리의 과학인데 물리 그 과학도 하나라도 삐뚤어지면 안 되는데 하물며 사람을 하나님과 같은 사람을 만들어 가는데 삐뚤어져 가지고 일이 되겠습니까, 되기를? 이거 너무 쉽게 본다 그거요.

이 소경이 예수님이 이래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하니까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그러면 또 다윗의 자손은 어째 알았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하니까 “다윗의 자손” 이란 여게서 그 소경이 예수님을 만날라 해도 그때 만나지도 못하지 이리저리 소문을 들어서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보다도 다윗의 자손 예수라 하는 그게 더 바른 이름이고, 또 존경하는 이름이고, 나사렛 예수보다 다윗의 자손이면 다윗은 대왕이거든요. 대왕이니까 그게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라 하는 것을 그가 벌써 소문을 들어서 알아 가지고 예수님께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 그거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둥이가 주님이 와도 못 만납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때 모두 예수님을 다 선지자라고는 그들이 선지자와 랍비, 큰 선생님이라 이래는 알았다 말이오. 처음에는 다 선생님으로 알고 있었어.

또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이 뭐 수천 명, 그때 사람 수천 명이라면 요새로 말하면 수천만 명과 같습니다. 그때는 옛날이기 때문에 사람 모이는 게 그렇게 잘 모이지를 못해요. 요새 엔간하면 뭐 몇십만 명 모이지 않습니까? 그때와 지금과 다를 때라 말이오.

그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는데 만일 문둥이가 그 선생님 앞에 갔으면 당장 돌로 쳐 죽여 버립니다. ‘이놈 어데 선생님 앞에’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피해서 가야 됩니다. 사람을 피해야지 많은 사람 있을 때는 못 와요. 또, 소경도 온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소경 그만 오면 못 오게 하요. 아이들도 올 때 아이들 데리고 오니까 아이들 데리고 온다고 나무랬거든. ‘아이를 어데 데리고 오느냐?’ 하면서.

그때와 지금과 시대도 다르고 지방 풍속도 연구해야 돼. 그 풍속이 그때 어땠다 하는 그 풍속 분위기를 알아야 되지 그리 안 하면 또 잘 모른다 그거요.

이런데, 이 소경이 만나고 싶어도 다른 사람이 만나게 해 줘야지? 그러니 그때도, 그러니까 만나지 못하니까 행여나 만날까 싶어서 길가 앉아 가지고 그와같이 기다리니까 거기 길가 앉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면서야 거기 앉은 놈을 ‘이놈아 지금 이 선생님이 지나가니까 저리 비껴라’ 하고 치우지는 못할 거라 말이오, 앉았으니까.

앉았으니까 거기 지나가니까 그만 고함을, 소리를 질러서 고함을 지르고 이라니까 옆에서 보십시오. 꾸짖으며 ‘잠잠하라, 어데 이 말하느냐?’고. 이랬으니까 그것이 벌써 만나기는 그때 만난 게 아니라 사모는 오랫동안 사모하고 ‘내가 지금 이거 눈먼 이거 때문에 보지 못해서 내가 불행하다, 보기만 보면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은 행복을 가질 수 있는데 내가 보지 못해 불행을 가지고 있다.’ 하는 그게 그 마음에 자꾸 채이고 채이고 뼈져리 채인 사람이라. 뼈가 아프게 그게 쌓인 사람이오.

쌓인 사람이고, 아무데도 여게도 가 봐야 아무 고침 받지 못하고 저게도 고침 받지 못하고 그 소문 들으니까 예수님은 고쳐 주실 수 있다 하는데 이분만이 고칠 수 있다 하고서 지금 만날라고 애를 썼다 말이오. 요걸 자기 신앙으로 요게 자기라. 요게 내라는 것을 여기, 바디매오가 자기라는 걸 생각하고 요게서 좀 찾아나가야 되는데, 이걸 뭐 하나 소경 눈 띄운 그런 역사의 하나 소개한 것이라 이렇게 보기 때문에 일이 안 된다 그거야.

그러니까, 옆에서 고함을 지르니까 뭐 야단치고 꾸중하면서 잠잠하라고 야단을 치니까 이거 자꾸 더, 야단치니까 ‘아이구, 참 이라다가는 뚜드려 맞을라? 이라다가는 그거 그만 이래 야단을 치면 뚜드려 맞을 거고 저 밀어서 저 던져 버리든지 그럴 거다.’ 던져 버려요, 야단치면. 그럴 거 아니겠소? 예수님이 말 안 했으면 자꾸 그래 하면 그거 마라 하면 거기서 별 사람 다 있을 거라 말이지. 발길로 차든지 ‘이놈’ 그때 모든 사람들은 그랬거든. 눈이 멀었으면 죄지은 값이라 다 그랬어, 그 사람 유대인들은. ‘그 눈먼 것은 제 선조의 죄입니까, 제 부모의 죄입니까, 제 죄입니까, 무슨 죄입니까?’ 그래 묻지 안했어요, 요한복음 9장에? 이러니까 이제 ‘이놈 죄 많은 놈이 눈먼 것도 거석할 건데 눈이 멀어 가지고 어데 또 이렇게 화를 받을라고 이래 하고 있느냐?’ 그 쫓아낼 거라 말이지.

야단을 치고 꾸중하고 이럴 때에 뭐, 잠잠하라고 꾸중하고 이랄 때에 거기서 더 말을 하면 자꾸 큰 소리 지르면 뚜드려 맞든지, 그만 쫓아내든지, 저 들어내든지 그걸 줄 안다 말이오. 그럴 줄 알면서 왜 자꾸 고함 지르겠소? 그럴 줄 알고 자꾸 고함 지른 그것이 뭣 때문에 그렇겠느냐 말이요? 그렇게 나무래고 야단맞을 줄 알고 그라고도 중단하지 안하고 그랄수록이 자꾸, 말을 못 하게 할수록이 이거 예수님을 불러 가지고 예수님에게 좀 들리도록, 그 수천 명이 같이 가니까 예수님의 귀에 들리도록 할라 하니까 고함을 지르는데 못 지르고 고함을 지르고 하니까 그때 그만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라 말이오.

지나가 버리면 그만이니까 이 소경 바디매오에게는 지금 그때 신경이 어떻게 돼 가지고 있겠소? 자기 지금 관념으로서 자기 생각에는 지금 어떤 문제가 놓여 있습니까? 일생동안 비참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났는데 해결하지 못하게 옆에서 방해하니까 그 사람은 해결 그거 못 하면 사는 것이나 그거 해결하는 거와, 해결해야 되지 해결 안 하면 뭐 사는 것이 죽는 것이나 필요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자기는 생명 내대고 고함을 질렀다 말이오.

못 낫고 뚜드려 맞아 죽는 거나 뭐, 못 낫고, 예수 못 만나서 못 낫고 뚜드려 맞아 죽는 것이나 못 낫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한가지라. 못 낫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한가지인데, 못 낫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불행인데 예수님 만나면 나을 것이고 못 만나면 못 나을 것이니까 그 사람에게 뚜드려 맞는 그 문제가 커집니까 못 만나서 낫지 못한 문제가 큰 문제입니까? 그 소경에게 무슨 문제가 큰 문제 됐겠소? 저 뒤에, 무슨 문제가 큰 문제 됐겠소? 저 뒤에? 뚜드려 맞는 문제보다도 못 낫는 문제가 큰 문제이니까 그 사람이 못 낫게 하니까 나을라고 고함 지르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되겠소 안 되겠소? 요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된다 그거요, 요 믿음! 우리가 예수님 믿을라 할 때에 우리에게 여러가지 어려움이 닥쳐오는데 그 어려움을 못 이겨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해결지울 그것이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짓는 그거 해결지울 것을 해결 못 짓고,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이나 땅위에서 감옥에 갇혀서 죽일라 하는 것이나 죽는 것과 은혜 못 받는 것과 둘 중 하나니까 이제 이 죽어도, 생명을 내놓고 받을라 하면 은혜 받을 수 있고 그리 안 하면 은혜 못 받고 하면은 못 하도록 하니까 생명보다 은혜 받는 게 크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결사적으로 이렇게 한다 말이오.

그러면 이 바디매오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는 그 주님이 칭찬한 다섯 가지가 있었으니까 다섯 가지 믿음이 뭐이냐 그걸 가지고 자꾸 자기를 반성해서 대조해 보라 그말이오.

이 바디매오가 자신이 돼야 됩니다, 자신. 자신이, ‘너거가 이런 바디매오와 같은 자다’ 해 가지고 바디매오를 이 도리를 가르쳐 주시는 기관으로 삼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하신 그 믿음이 무엇입니까? 자, 한번 그것만 재독 한번 합시다. 첫째 뭐이요? 첫째가 뭐입니까? 자기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보지 못함이다 하는 것을 인정해 찾았는데 그거 맞습니까? 요 말이 맞소?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렇게 칭찬했는데 바디매오 그 소경의 믿음의 일호가 자기의 모든 불행이 이 보지 못하는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있다 하는 고거 안 그것이 바로 맞습니까? 또 둘째는 뭐입니까? 이 문제에서 해결해 주실 이는 예수님밖에 없다 이라니까 죽자 살자 하고 달라들었습니다. 그것도 맞습니까? 그 사람이 돼야 돼.

또 셋째는 뭐입니까? 셋째는 뭐이요? 옆에 사람들이 이놈 잠잠하라고 야단을 치니까 박해가 있고 방해가 있고 환경의 주위의 방해 박해가 있었지마는 박해가 있을수록 더 달라붙었습니다. 셋째로 맞습니까? 또, 넷째는 뭐이요? ‘너를 오라 하신다’ 그러면 그때 예수님께서 떡 그만 그라니까 척 머물러 서시더니마는 ‘오라 하라’ 하니까 예수님 따라다니던 그 사람들의 그 분위가가 달라졌겠소 안 달라졌겠소? 이 소경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 인심이 달라졌겠소 안 달라졌겠소? 자, 달라졌겠다 싶은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달라졌지. 이렇게 성경을 깊이 파고 깨달아야 된다 말이오. 달라졌지.

그러니까, 우리가 그 경험에서 해요. 우리가 뭐 그 박해가 많이 있고 이래도 꼭 신앙으로 나갈 때는 주님이 우리를 돌보시면 그게 뭐 백팔십도로 모든 환경 주위가 막 달라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면, 축복하시면 이상하게도 축복이 오나 안 오나 알 수 있다 말이오. 축복하시면 공연히 봄이 돌아오면은 모든 산천에 있는 초목들에게 새움이 피듯이 이제 주님이 척 돌보시면 공연히 상관없는 사람도 처음 보는 사람도 뭐 전체가 협조고 전부가 축복이요 전부가 도움입니다.

넷째로는 주님이 오라 하는 주님이 오라 하신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소. 주님의 뜻을 깨닫고 난 다음에는 그만 겉옷은 자기 재산의 전부인데, 겉옷이라 하는 것은, 여게는 거지를 잘 몰라요. 저는 문둥이 친구를 오랫동안 했어요.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문둥이들은 그 재산이 전부 보따리에 짊어지고 다니는 겉옷이오.

그거 겉옷, 추우면 겉옷도 되고, 요새 뭐 외투같이 이래 가지고 커다라이 솜을 놔 가지고 이래 만들어 가지고 이래 다니는데, 그뭐 그것도 버려두고가 아니고 ‘버리고’ 버리고 하는 거는 `버려두고' 하는 거와 `버리고' 하는 거와 달라요.

‘버리고’ 뒤를 생각지 안하고 버려버렸다 말이오. 버려버리고 달라붙소. 이것이 주님이 보실 때에 은혜를 베풀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신앙이라 말이오.

그라고 난 다음에 다섯째는 뭐입니까? 다섯째는 뭐이요? 만나니까 ‘네가 나한테 뭘 소원하느냐?’ 그 소문 듣기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덩이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오천 명도 먹이고 죽은 사람 살리기도 하고 오만 거 다 있지 안해요? 있으니까 이제 별별 다 소원이 있을 건데,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당신의 영감을 원한 것처럼 ‘내가 네게 뭣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이라니까 ‘보기를 원하나이다' 요게 됐다 말이오. 그러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가라.’ 그러니까 가라 하니까 그만 그 구원 받고 난 다음에는 그시로부터 주님을 길에서 좇았습니다. 따라 그만 예수님을 떠나지 안해. 예수님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돼 버렸어요.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자꾸 더 지내 보내지 말고 이 바디매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으니 그 바디매오가 가진 그 믿음 이 다섯 가지가 내게 있는지 없는지 그걸 찾아서 그것이 있도록 만들어야 돼요. 딴거 말고. 있도록 만들어요.

그것만 말하고 말라 했는데 시간이 많이 갔어. 가도 그만 지금 뭐 이 자리서 기도를 못 해도 집에 가서 오늘 종일 ‘바디매오에 대해 다섯 가지 주님이 칭찬한 신앙’ 그 신앙이 내게 있는가 찾아봐요.

일호가 없습니다. 일호가 여러분들에게 없소. 여기 일호를 가진 사람이 이 가운데에 이렇게 많이 모였지마는 몇십 명 안 돼요, 일호를 가진 사람이. ‘일호 그까짓 거야 내가 소원하는 대로만 잡아 닥치면 되지.’ 그 미련, 어리석어.

일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다야. 망하는 사람은 전부 일호 믿음 가지지 못해서 망하는 것입니다. 일호 믿음, 이호 믿음, 삼호 믿음, 사호 믿음, 오호 믿음 이것만 가지면 지금도 주님이, 우리의 마음의 눈, 심령의 눈, 지혜의 눈, 모든 거 눈은 자기 망할 것 보고 자기 흥할 것 보고 두 가지만 보면 다 성공 다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거 보면 뭐, 세상이 뭐냐? 그것만 있는 사람 있으면은 세상은 천국이라, 그만.

다시 이거, 모르는 것들이 날뛰는 통에 저 망하고 남 망해 탈이지.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십분 기도 후에 결혼 상담으로 모입니다. 결혼상담에서 ‘학력이 어떠냐?’ 이라니까 모두 다 ‘아마도 결혼 상담에도 보니까 공부하는 거 쳐서 공부를 말하더라.’ 그거는 제 동무 만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공부하는 게 잘됐다 하는 게 아닌데 꺼꾸로 그것도 꺼꾸로라.

왜 공부하는 거 중학생은 중학생을 만날라 하느냐 하면은 그거 그거는 부득이 저와 같은 걸 만나줘야 되기 때문에 제 동무하기 때문에 그렇지 그게 중학이 행복이고 대학이 더 행복이고 그런 것 아니오. 행복은 따로 있어.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학교가 행복 주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돼요. 그게 우상이라, 모두 다.

탐심은 우상이라, 뭐. 공부 탐심도, 공부 가지고 행복 되는가? 안 돼. 행복은 주님에게 있어요. 주님에게 있는데 ‘학교를 일류에 들어가야 되지. 이류에 들어가야 되지.’ 중간반 졸업 때 졸업 설교 하고 나서 학생들에게 그때 아마 천 몇백 명 모였어. 모였는데, 중학생들, 주일학교 졸업생들. 그 설교해 놓고서 물으니까 전부 다 바로 알아. 손 들라 하니 전부 바로 손 다 들어. 자꾸, 이 사람들이 몰라 망합니다. 알면 안 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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