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무오의 증거

 

1984. 3. 29. 목새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베드로가 성경을 기록할 때에 그 생각이나 소원이나 판단은 베드로의 단독의  것이 아니고, 베드로의 단독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그 마음과 소원과 그 뜻을 알릴 때에 베드로는 그 감화를 받아 가지고  성경 기록할 그때는 하나님의 뜻과 꼭 같은 뜻이 되고 하나님의 소원과 꼭 같은  소원이 되고 하나님의 판단과 꼭 같은 판단이 되어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인 베드로가 기록했지마는 성경은 다 정확무오하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어느 성경이든지 정경이요 또 원어로 된 그 성경은 획  하나도 잘못됨이 없이 다 정확하고 틀림이 없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단독 마음이나 생각이나 소원이나 비판이나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  소원, 뜻, 판단 뭐 이런 것들인데 그것을 성신의 능력으로 성경 기록하는  사람들에게 감화 감동을 시켜서 그들이 영감되었을 때에 그대로 기록한 그것이  다 정확무오하게 기록이 됐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이지마는 성경을 기록한 그 사람들을 성령님께서  감동을 시키실 때에 그렇게 정확무오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정확무오한 뭐  성경을 기록한 것은 털끝 만치도 틀림이 없는 그 정확무오한 그 성경을 기록해  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성신의 감화 감동이면 주의 공로도 바로 입도록  하고, 진리도 바로 깨닫고 또 알도록 하고, 모든 사람의 그 주관을 자의사를 다  옳게 바르게 해서 흠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 기록이 영감으로 인하여 사람의 그 의사가 정확무오한 의사로  변화되었고, 또 그 행한 기록이 정확무오하게 된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  구속받은 사람들은 영감을 받아서 바로만 된다고 하면 정확무오한 그런 사람도  행위도 될 수 있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정확무오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혹 생각하기를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하나도 틀리지 안하고 정확무오한 그런  인간이 행동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것은 성경 기록에서 우리는 다 그런  것을 부인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 미혹은 우리가 받지 안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감이 모자래서 영감됨이 미달돼서 그러하지 영감에 충만하다면은  구속받은 사람들은 정확무오의 사람과 행위가 될 수 있다 하는 이것을 성경  기록에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크게 큰 문제입니다. 이거 아주 이  면을 깨닫고 이 면을 생각하면서 인간이 어떻게 정확무오한 그 사람이나 행위가  가능하냐? 가능하다하는 것을 성경 기록에서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또 성경 기자들이 자의사를 기록했습니다. 자기의 의사를 기록했습니다. 자기  의사를 기록했는데 곧 하나님의 의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의  감화가 성경 기록하는 사람들에게 감동될 때에 하나님의 의사를 받아서 하나님의  의사화 됐다 말이오. 하나님의 의사화되고 보니 곧 성경에 발표한 대로의 발표가  하나님의 의사인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베드로후서 1장 1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렇게  베드로가 기록한 것은 베드로의 간증이요, 베드로의 그 의사에 베드로의 마음  속에 이와 같이 생각하고 마음이 이와 같이 되어 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인데, 곧  이는 베드로에게 감동시킨 하나님의 마음이 이렇기 때문에 이렇게 기록한 것이라  그렇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기록한 것은 곧 기록한 그 사람의 마음이요 생각이요, 곧 성경  기자에게 감동시키신 하나님의 마음이요 생각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이요  생각이요, 성경 기자의 마음이요 생각인데, 이렇게 기록한 것은 성경 기록한 그  사람들만을 위해서 이 성경을 기록해 준 것이 아니고 모든 택한 자들 전부를  위해서 이 성경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기록해 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성경을  봐서 하나님은 이러하신 마음을 가지고 계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고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은 성경을 성경 기자들에게 감동시키신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

 그러면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은,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기를  원하시는가? 마음에 어떤 마음을 어떤 생각을 어떤 소원을 어떤 판단을 어떤  뜻을 우리가 가지는 것을 원하시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것과 같은 것을 가지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 하나님의 뜻과 같은 뜻, 하나님의  소원과 같은 소원 하나님의 비판과 같은 비판 그외에 많이 있지마는서도 몇  가지만 들어 말합니다. 비판 이와같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시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마음을 그렇게  가지셨지마는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딴 마음을 가지길 원하실 것인가?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차지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그 하나님은 하나님  마음대로 그렇게 하나님 마음을 가졌지마는 우리 사람은 사람의 마음 가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을 우리가 가지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실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또 판단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는 것을 당신이 원하실 것인가  이것을 우리가 판단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낼려고  당신의 마음을 성경 기자들에게 감동시켜서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꼭  같은 마음이 돼 가지고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에게 보내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을 원해서 성경 기자들에게 이렇게  감동시켜서 기록해 주셨고, 또 이 기록해 주신 것은 성경 기자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성경을 받아서 읽고 듣고 보는 자들에게까지 전해 주기 위해서 이와 같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마음가짐을 어떠한 생각가짐을  어떤 소원가짐을 어떤 판단가짐을 어떤 행동가짐을 당신이 원하실 것인가?  하나님이 성경기자에게 원하셔서 성경 기자에게 감동시켜서 그 성경 기자의  마음과 생각과 그 움직이는 쓰는 것은 다 행동이니까 행동은 어떤 것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마음과 꼭 같은 마음, 하나님의 생각과 꼭 같은 생각,  하나님의 뜻과 꼭 같은 뜻 하나님의 행동 꼭 같은 행동 이렇게 하나님과 꼭 같은  것을 우리에게 원하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판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원하면 원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가? 원하시기는 원하시는데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닮기를 백분지 일  닮는 것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이 꼭 같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도 가감없이 정확무오하게 우리가 받아 가지고 그와 같은 하나님과  같은 그런 마음과 행동자가 되어지기를 원하신다 하는 것을 성경 기록에서  우리가 바로 잘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그 성경  기자와 같은 사람 되기를 원하신다. 성경 기자는 성경 기록할 그때에 성경  기록할 때에 어떤 사람이 됐던가?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이 됐다. 그래서  하나님과 꼭 같은 사람이 돼서 기록한 그 결과인 성경 기록이 정확무오한 성경  기록이 됐다 하는 것을 우리가 미루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당신의 본질과 본성과 그 행위요, 또 당신의  것을 사람에게 당신같이 되기를 원하셔서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하신 것이요 또  성경 기자들만이 아니고 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보고 읽고 듣는 자들도 꼭  이와 같이 되기를 원하셔서 당신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그러면  하나님이 택한 모든 사람이 어떤 자 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 같은 자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과 같은 자 되기를 소원하신다고 하면 소원하시기는  하시지마는서도 그 소원하시는 바가 얼마나 이루어질 건가, 소원하시는 바가  얼마나 이루어질 건가 자, 여기에 여반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얼마나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여반에, 와 말도 안 해. 저 권찰님들 한번 대답해봐요.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권찰, 예? 뭐라고? 그 와 벙어리 모양으로 대답 안  하고 있어, 반사 ○○○. 어? 뭐라 하노? 뭐라 해? 남 반에 대답해 봐  '정확무오하게' 그만 그말 거기에 써 버려요. 다 대답은 옳은 대답을 했는데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요것을 우리가 확신해야 됩니다.

정확무오하게,  그러면, 하나님이 믿는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성경  기록에서 우리는 확정지울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것은 당신과 꼭 같은, 당신의  마음과 꼭 같은 마음 당신의 뜻과 꼭 같은 뜻, 당신의 본성과 꼭 같은 본성,  당신의 본질과 꼭 같은 본질, 당신의 의사와 꼭 같은 의사, 당신의 소원과 꼭  같은 소원, 당신의 그 비판이나 지식이나 어쨌든지 당신과 꼭 같은 자 되기를  원하신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됩니다. 당신과 꼭 같은 자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그 당신과 꼭 같은 자 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무얼 보고 알 수 가 있는가  증거를 대라. 그분이 성경 기자들에게 성경을 기록하게 할 때에 네 의사 반, 내  의사 반 그런 것이 아니고 전부 당신의 것만을 성경 기자들에게 감동시켜서  당신의 본질과 본성과 꼭 같은 자로 감동시켜 만들어 가지고 성경을 기록했는데  기록된 성경이 정확무오하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시는 것은 성경  기자들에게 당신이 모든 택자들에게 보낼 성경을 기록할 때에 기록한 그것을  봐서, 당신의 소원이 성경 기자들에게도 그와 같이 당신의 소원 그것이요, 성경  기록한 것이요, 또 모든 택자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소원도 성경에  기록한 그것이오.

 그러면, 소원인데, 소원해 봤자 그 소원하는 것이 어데 다 되는게 아닌데,  그러면 소원을 하는데 그 소원하는 소원이 얼마나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여기 한번 대답해 봐 저 가운데 저거 뭐고 저거 뭐이지? 고 옆에  ○○○부인 옆에 예? 그래, 뭐라고 하노? 네, 대답이 요래 됐는가 모르겠다.

그래 요 두 가지,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소원하시는 것은 성경 기자에게  소원하시는 소원과 같은 소원을 가지시고. 또 모든 성도들에게 소원하시는  소원하는 것이 얼마나 이루어질 건가 고걸 내가 물었지? 그걸 얼마나 이루어질  겁니까? 얼마나 이루어지지요? 또 대답 안 하네.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지요,  정확무오하게 정확무오하게, 요걸 굳게 잡아요  이것도 큰 문제입니다. 큰 문제.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쓰고 힘을 쓴다 할지라도  어떻게 사람에게 정확무오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하는 그것이 오늘  세계신학자들의 총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정확무오할 수 없다. 어떻게  사람이 정확무오할 수가 있느냐? 이런데 성경 기록에서 택자들은 정확무오할 수  있다, 안 돼 그렇고, 모자래서 그렇지 아닌 거는 아니다. 정확무오하게 될 수가  있다.

 또 그러면 정확무오하게 될 수가 있으면 그렇게 소원은 될 수가 있는데, 성경은  봐서 정확무오하게 됐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원하시는 건 뭐이  소원하시는가? 그것은 당신이 성경 가자들에게 하신 거 보니까 우리도 꼭같은  구속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성경 기자에게 당신이 역사하신 그 역사를 또 보는  자들에게도 계속 역사해 가지고 그와 같이 하려고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 각자들에게  소원하는 그 소원이 무엇인가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복이 있나니' 그러면 이 복은  무슨 복인가? 이 복은 정확무오의 복입니다. 정확무오. 하나님과 꼭 같은 성경  기자가 하나님의 의사와 정확무오한 것처럼 이 보는 자와 하나님과 꼭 같은 자  되는 것. 그러기 때문에 하늘에 계시는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거룩하심과 같이 깨끗하심과 같은 이 일이 가능하다 그말이오. 이게 우리는  가능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소망하고 굳게 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소원이 어데 나타났는가? 성경 기자들의 성경 기록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에 다른 거 다 하지 안하고 성경  기자들에게 이런 마음을 넣어 줘 가지고서 이렇게 하신 것을 보아서 하나님이  인생에게 대해서 소원하신 것이 어떤 소원인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이  성경 기록해 가지고 그것을 이 천하에 있는 택자들에게 다 보내신 것을 보아  하나님이 모든 천하에 역사에 있는 택자들에게 소원 하시는 것이 다 이 성경  기록되어 있는 이대로의 것을 소원하신다. 그러면 소원 하시면 이루어지기는 몇  부분이나 이루어질 건가? 완전히 이루어진다.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고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생각을 우리 믿는 사람이 가질려고 하면  고 생각과 같은 그 생각을 완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성경과 꼭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성경과 꼭 같은 소원을 가질 수 있고 성경과 꼭 같은 뜻을 가질  수 있고, 성경과 꼭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 혹 천분 지 일이나 아니다. 백의  백 전부 이 백프로 완전히 할 수 있다. 왜? 그것은 성경 기자들이나 우리나 꼭  같은 사람들인데 성신의 감동이 그들을 감동시키실 때에 그와 같이 기록된 그  결과가 맺어졌다, 여기에서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 마음을  성경 기자들에게 주어 가지고서 성경 기자들이 하나님 마음과 꼭 같은 마음  되어서 그 글로 쓰기까지 정확무오하게 그 생각과 행동이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졌다, 이루어진 이것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신 것은 이것을 읽는 자들도,  읽는 자들도 그와 같은 정확무오하고 하나님을 꼭 닮는 자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감동시켜서 정확무오하게 했지마는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직접하지 않지 않느냐? 오늘은 우리들에게 직접하지  않지 않느냐? 우리가 그런 마귀의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성경 기자들에게  직접할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을 읽을 때에  자기가 믿는 대로 되리라, 성경을 읽을 때에 이 성경을 근 이천 년 전에 문서로  기록한 그 기록에서 보존해 놓은 그 문서를 우리가 들추어서 읽는 것이 아니고,  이 성경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이 성경 기록한 이 문서  안에 있는게 아니고, 문서 안에 있는게 아니고 이 말씀 안에 계십니다. 말씀  안에 계셔서, 어느 때에 택한 자들이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보든지 할 때에는  그때에 하나님이 성경 기자들에게 감동시켜서 그들을 감동시켜서 정확무오한  결과를 정확무오한 그 행위를 하도록 하신 그 영감 역사가 영감 역사가 우리에게  꼭 같이 역사 합니다.

 그들에게 역사한 것과 우리에게 역사한 것은 그 영감 역사는 꼭 같은데 다만  다른 것은 뭐 하나 다르냐 하면, 영감 역사는 꼭 같은데 요렇게 되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꼭 같은데. 성경은 한번 기록했기 때문에 기록해 줬으면 되는  것이지 두번 기록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이제 기록 영감만 기록 영감만  중복이 없지. 기록 영감만 중복이 없지 고때 그들의 의사를 감동시킨 그 감화  내재적 영감은 꼭 같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내재적 영감은 그때 성경 기록 할  때의 그들에게 영감과 같은 꼭 영감이 우리에게 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고전 문서, 성경을 읽을 때에 고문서 옛날 문서를 읽는 것으로 그렇게  마귀란 놈은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다른 문서는 기록해서  연조가 깊어 가면 깊어 가는 대로 기록된 그거 문서뿐이지마는서도, 이 성경  말씀은 이 글로 기록된 이 문서 속에 항상 계시는 하나님이 이 안에 내재해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에는 성경 기록한 그 자들에게 감동시킨  거와, 같은 감동과 같은 꼭 감동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기자들의 자의사가 기록하게 하는 하나님의 의사와 꼭 같이  정확무오하게 꼭 같이 된 거와 같은 그 감화 역사가 성경을 읽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꼭 같은 감화 역사가 있어 가지고서, 하나님의 의사와 꼭 같은  정확무오한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과 꼭 같은 동일한 그런 마음이 될 수  있고. 생각이 될 수 있고, 그 뜻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볼 때에 하나의 글로 써져 이  책 안에 있는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 책 속에 들어 있지 않소. 책 속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당신이 당신의 뜻을 영감으로  나타내신 그 영감이 베드로에게 그와 같이 영감하신 그 영감이 우리에게  영감하실려고 영감하시는 그 껍데기, 영감하시는 껍데기, 제일 우리가  접촉하기에 쉽도록 그 영감을 접촉하기 쉽도록 하는 그 쉽게 하는 껍데기가  신구약 성경이지 이 신구약 성경 글이요, 또 글 안에 있는 알맹이가 뭐인고 하니  여기에 기록한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요, 그 진리 안에는 영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접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문서로 기록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이지 이 문서 뿐 아니라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문서는 곧 진리요  이 진리는 곧 영감이라.

 그러면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하신 그 영감과 진리가 내게 이 시간 내가 성경을  읽으면 이 시간 내게 지금 영감하고 계십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내가  읽고 싶으면 읽고, 말고 싶으면 안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 읽는 것이 성경 한  절을 읽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날 때에 나타나는 마음을 말하기를  '영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감이 나타 날 때에 나타난 영감을 가리켜서  진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 진리가 우리에게 직접 안 옵니다. 진리가 우리의  영을 통해서 우리의 이 마음에 옵니다. 우리의 마음에 온 하나님의 그 당신의  마음, 당신의 소원, 당신의 뜻이 우리 마음에까지 왔고, 우리 마음에 온 당신의  본체는 아니고 당신의 그 영감이 우리 마음에 와 가지고 우리 마음에 온 영감이  우리 마음을 통해 가지고 우리의 몸에 옵니다. 우리 몸에 옵니다. 우리 몸에 온  그 영감이 우리가 접촉하는 이 사물들에게까지 가 가지고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타나기를 뭘로 나타나, 하나님이 뭘로 나타납니까?  자 말해요. 하나님이 뭘로 나타납니까? 하나님이 영감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본체는 우리가 접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본체가 영감으로  나타났습니다. 또 영감이 뮐로 우리에게 가까이 왔습니까? 진리가 돼 가지고  우리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또 우리에게 올 때에 뭘로 왔습니까?  예? 뭘로 왔습니까? 말씀, 문서 이 문서로 왔습니다. 문서로 왔습니다. 또  문서가 우리에게 왔는데 그 문서가 왔을 때에 그 문서를 우리 마음에게 전할  때에 그 문서를 우리 마음에게 전 할 때에 누가 전합니까? 우리의 중생된 영이  전합니다. 영이. 성령의 감화가 여기까지 왔지요, 와 가지고서 우리의 영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한다.

그러면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란 말은 영과 함께란 말입니다. 영과 함께  영을 통해서 우리의 중생된 영을 통해서 어데다가 증거합니까? 네, 우리  마음에게 증거합니다. 우리 마음에 증거할 때에 우리 마음에 증거했는데 그러면  영이 우리 몸에 직접 전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영이 우리 마음에 전한 우리  마음을 통해 가지고서 우리 몸에 전합니다. 그러면 우리 몸에 전하면 우리 몸에  전달된 그 전달돼 온 뭣이 전달돼요, 뭣이 전달됐습니까? 몇 가지가  전달됐습니까? 우리 마음에는 몇이 왔지요? 한번 헤아려 봅시다. 우리 마음에는  몇이 왔습니까? 마음에는, 중생된 영, 또 말씀, 내나 말씀 이 진리입니다.

말씀은 나타내기 위함이라. 말씀 곧 진리, 또 그 다음에는 영감, 그 안에는  하나님의 본체 이랬는데 하나님의 본체가 우리에게 직접 못 오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체는 본체가 영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체에서 역사하서는 역사가 나왔을 때에 바로 나온 대목이 영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본체, 또 그 다음에는 영감, 또 그 다음에는 진리, 또 그  다음에는 중생된 영, 곧 이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영, 그러면 이  네 가지가 합해 가지고 지금 어데 갑니까? 우리 마음에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왔으면 몇 가지가 지금 합해 가지고 있습니까? 응? 다섯 가지가 합해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가 그러면 어데로 갑니까? 우리 몸으로 갑니다.

몸으로 갑니다. 몸으로 가면은 그라면 몇 가지가 됐습니까? 여섯 가지 됐습니다.

이제 여섯 가지가 몸하고 합작하면 여섯 가지입니다. 몸하고 합하면 여섯이 합해  가지고서 어데로 갑니까? 사물로 갑니다. 사물로. 그라면 몇 개입니까? 일곱,  이제 이래 가지고서 그러면, 우리가 일하든지 물건을 하든지 접촉할 때에 거기에  이 여섯 가지가 한목 갔을 때에는 일을 하든지 물건을 접촉했을 때에 그 물건과  몇이 합해 가지고 있습니까? 일곱이 합해 가지고 있습니다. 일곱이 합해 가지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신성이신데 '그는 만물을 보아  알지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만물에게 나타났느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자기가 직접 받고도 모르기를  마치 비유컨대. 아이를 갓 낳아 놓으면 그 갓난 아기가 그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지마는 뭘 빨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 품 안에 있지마는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그는 찍해야 발표하는 것이 오데 갔다가 뜨거워도 에! 우는 것  뿐이요, 뜨거워도 에! 또 배고파도 에! 목말라도 에! 추워도 에! 에에 하면 우는  것뿐이라. 그런데 어찌 추운지 모르지요. 어째 추운지도 모르고 어째 더운지도  모르고 어째 목이 마른지도 모르고 어쨌든지 제게 좀 안 됐다 그말이오. 안  됐으면 에! 웁니다. 울면 부모가 젖을 줘서 만족할 때도 있고, 또 기저귀를 갈아  줄 때에 만족할 때도 있고 따뜻하게 해 줄 때에 만족 할 때도 있고, 좀 선선하게  할 때에 그만 술술 잘자고 만족할 때도 있고 이제 저는 뭐이 필요한지  모르지마는서도 갈급을 느낀다 그말이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갈급을 느끼는  것이 이 어린 아이와 같이 갈급을 느끼는 것이오. 그러나 그 어린 아이가 차차  차차 자라면은 이제는 어머니도 알고 뭣도 알아 가지고서 밥먹고 싶어 이제는  밥이 없어 불안하다, 물이 없어 불안하다, 옷이 없어 불안하다, 더워서 불안하다  그런 불안을 제법 안다 말이오. 그걸 알아 가지고 그 조목을 말하고 이제는 차차  차차 더 아는 지식이 있어서 부모와 자기와 어면 관련이 있는 그런 것도 차차  알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이 어릴 때는 이것을 모릅니다. 모르나 몰라도  그렇게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자라고 있는데, 우리가 오늘 아침에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뭐이냐, 택한자에게 대해서 원하시는게 뭐인가? 성경 기자들에게 당신의 소원을  나타내어서 성경 기록을 보면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기록은 우리 전부에게 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하시는 것이 믿는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가 있느냐 어느 정도 이루어질 수가 있느냐? 저 ○집사님,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 정확무오하게, 요걸 굳게 잡아야 돼요.

정확무오하게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루어지면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싶어서 본다고 고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성경을 척 읽는 데에는 그 안에 순서가 몇 순서가 들었지요? 또  한번 헤아려 봐요. 성경을 내가 지금 성경을 펴서 베드로후서 1장 1절 읽을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 베드로 이래 읽을 때에는 읽을 때에는 그러면  성경을 내가 읽을 때에 그 안에 몇 가지, 역사가 있습니까? 자, 우리 한번 쳐  봅시다. 자, 첫째 하나님의 본체, 둘째 영감, 또 셋째 진리, 또 넷째 내나  성경말씀이지, 넷째 중생된 영, 또 다섯째? 그러면 우리 마음에 오는 데까지에  몇 순서를 거쳐 가지고 우리 마음에 왔습니까? 예? 몇 가지 순서를 거쳐 가지고?  네 가지 순서를 거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 역사가 역사해 가지고  비로소 내가 성경을 척 읽는 것이지 내가 그리 읽고 싶다고 그래 읽는 것  아닙니다. 이 네 가지 역사가 역사해 가지고서 우리가 성경 한 절 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한 절 읽으도록 하는 데에 한마디 듣게 하는 데에 또 이  설교를 해서 듣게 하는 데에 여기에 그 무한하다고 하는 무한하신 분이 역사해  가지고 애써 가지고서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이 우리를 성경 기자들과 같이 우리의 언행 심사가  정확무오하게 할 이 능력을 가지고서 정확무오하게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원하시는데, 이 일은 뭘로 되느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 믿음으로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알고 인정하고, 또 뭐 한다 했습니까? 소망하고, 그 다음에 뭐  한다 했습니까? 실행, 그라면 몇 가지면 완성이지요? 손가락으로 가르쳐 봐요,  몇 가지 완성입니까? 저 뒤에 네 가지, 네 가지만 완성. 자 그러면 처음에  뭐입니까? 알고, 또 둘째 인정하고. 또 셋째 소망하고. 또 넷째 실행하고.

할렐루야 완성이라.

 이런데, 우리가 아는 것을 알게 하시는데 아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아는 것도 또  읽기만 읽지 인정 안하지. 그러니까 이 현실은 뭣 하는 것입니까? 현실은  하나님이 살아 있는 동안은 뭐하라고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지난밤에도 보니까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는 그 설교하는 걸 제가 들었습니다.

들었는데, 옳은 말씀이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현실 만나는 것은 뭣하고 있는고  하니, 첫째는 지식하고 있어요, 자꾸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배우고 있는 것.

배우고 있는 것. 그라면 아는 아는 것 아는 연습하는 거, 아는 연습하는 거, 또  아는 또 연단하는 거, 아는 연성하는 거. 이제 지식 연습. 연단, 연성, 또 그  다음에 둘째 뭐입니까 인정 인정 또 몇 가지지요? 세 가지. 첫째, 연습. 인정  연습, 인정 연단, 또 인정 연성, 뭐 말인지 알겠습니까?  또 그 다음에는 뭐입니까? 지식 뭐이지요? 지식 연단 지식, 연단 지식 연성.

 또, 그 다음에는 그 다음에 둘째. 인정, 인정 또 뭐합니까? 인정 연습. 또 인정  연단, 또 인정 연성, 연성은 완전히 되는 것이고 연단은 그 잡탱이 태우는게  연단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셋째, 소망 또 뭐입니까? 소망 연습 네가 소망 하나 안하나  보자. 이 현실을 가지고 소망하나 안 하나 이제 자기가 보니까 꼭 하나님의  전능의 보호를 소망하는 줄 알았는데 인정하는 줄 알았는데 현실 당해 보니까  틀렸어. 또 그 소망도 자기가 소망 연습해 소망한다, 내가 꼭 요번에는  소망합니다. 그만 넘어갔다 말이오. 두번 째도 현실 닥치니 내가 요번에는 꼭  소망합니다. 자꾸 소망 연습하고 소망을 연습합니다. 소망을 하는 줄 알았는데  어떤 현실을 당하니 소망 하나도 안했습니다. 소망 연단 하라 하는 소망에  잡탱이 있는 거 소망에 잡탱이 있는 것을 다 발견한다 그말이오. 연단은 금을  연단하면 잡철은 다 타 버리고 금만 남지 않습니까? 이라니까 이 소망한다는게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하고 천국 소망을 합니다. 영생을 소망합니다.

하지마는서도 어떤 현실을 닥쳐 보니까 소망하나도 다 타버리고 다 날라가  버리고 남는 소망 하나도 없습니다. 소망 연단 또 소망 연성은 이제는, 소망이  이제는 완전해서 하나님께 대한 온갖 소망에 대해서 확고부동합니다.

 고 다음에는 행동. 연성하면 다 됐는데 그 다음에는 행동. 이제는 행동 이지요.

행동을 연습합니다. 행동을 한번 연습해 보고 행동을 한번 연습 해 보고 행동을  이래 연성돼 버리면 다 돼 버렸어요.

 이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자꾸. 기독자의 구원이라는 것은 부지런해야  이루어지고 그저 번개같이 움직여야 이루어지지, 그냥 묵! 이래 가지고 이루는  거 아닙니다. 불교는 불교는 아무것도 안하고 이래 음, 생각 안하고 무아주의로  생각 음 이러기 때문에 중은 얼굴보면 얼굴보면 표가 납니다. 중은 애매하이 음  그저 꼭 부처모양으로 음, 이렇고, 기독자들은 속에 보면 칼날 같습니다. 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칼날 같애, 요모조모 밤송이 같애. 어떻게 이모저모, 그렇기  때문에 에스겔 1장 에스겔 1장에 보면 번개같이, 그 생명이 번개같이 움직이는데  따라서 번개같이 움직인다 했어 번개같이, 그러나 곧은 길로만 움직여 달아나요.

그러니까, 우리 생각이 쉬면 안 됩니다.

 오늘 아침에도 그 말씀을 늘 하다가 지금 말씀할라 했는데 지금 도달 못 했어.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는 조금 늘 말한 말이지만 예수를 자꾸 생각해라. 예수  예수를 생각하란 말은 어데까지를 예수를 생각하려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까지의 이 토막의 전부를 자꾸 그 안에 있는 순서를 자꾸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오. 예수님을 생각하는,  또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은 이 공로를 공로를 힘입어서 이 공로를 말미암아  그리스도, 그리스도란 제사장. 선지자. 왕 이 공로로 그리스도는 이 삼직으로  우리를 승격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제사장은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요,  예수님이 선지자요, 예수님이 왕이오. 그러면 우리는 선지직에서, 모든 선지인  성도들도 이렇게 보면, 선지자가 죽음 앞에서도 꼭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라  하면 증거했다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지자 완성, 제사장 완성,  어데가서든지 하나님이 통치하는 그 단일 통치밖에는 안 합니다. 그것이  왕노릇하는 거라. 상관이, 천하가 어떻게 말해도 그것들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단일 하나님의 통치 그대로 나는 통치해, 옳다 아니다. 이렇게 딱딱했어,  그러니까 다리오 왕이 아무래도 다니엘에게 저래라 이렇게 말해도 단일 통치  하나님에게 통치받는 그 통치를 그대로 다리오 왕에게 말해 줍니다. '나는  이래같이 기도 안 할 수 없는 기도해야 됩니다. 이랬는데 다리오왕이 반대를 해  가지고서, 있으면서, 할 수 없이 사자 구더기에 집어 넣었지마는서도 결국은  다니엘 단일 통치가 이루어지고 말았다. 다니엘 단일 통치가 이루어지니까  다니엘이 파사 나라를 전 통치해 버렸어. 전 통일. 다리오 왕도 그만 거기에  통치를 당했다 말이오. 당하고,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가 다니엘이 양보하지  안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양보하지 안하고 고 통치 그대로 자기 현실에게  통치하는 것이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일이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은 통치를 당했습니다. 그 시에는 당하지 안하고서 반대를 해서 다니엘을  사자 구더기에 집어 넣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통치를 당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계시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금 기도록에 기록한 것은 이제는 오천이 넘었습니다. 기도록에 기록한 우리  기록한 교인 수가 오천 삼 명이 기도록에 기도하고서 지금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기록하고 또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기록한 사람들 잊어버리지 말고 매일 삼십 분  앞으로 미래의 환난을 위해서 삼십 분 기도하고. 또 기록하지 안한 사람들도  기록하고 기도하고, 이렇게 기도하도록, 기도하면 다른 사람이 평안하고 좋다고  돈 꿈꾸고 세상 꿈꾸는데 우리는 환난 때문에 환난으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앞으로 지금은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저것들은 말이지, 지금 평안한데  말로 씹어 가지고 환난, 환난 이렇게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 환난 말하고,  환난 기도 하면 비웃지마는 그들이 비웃고 무시할 때에 우리는 환난 준비하고,  환난이 오면 그때는 웃음으로 찬송하면서 갑니다.

 이러기 때문에, 왜정 말년에도 이렇게 준비한 사람들은 신사 참배 하나도  안하고 그들의 기쁘고 즐거움으로, 감옥에 가도 고통스러워 견딘 사람이 있는  사람 있고, 감옥에 가도 기쁘고 즐거움으로 간사람 있고. 또 감옥에 안 간  사람들도 있었어. 감옥에 안 가고 암만 증거해도 감옥에 가지도 안하고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이래 돌아 다녀도 뭐 반대해도 아무도 잡아 가지도 못하고  또 그래 지내는 사람 있었다 말이오. 기쁘고 즐거움으로 6·25때도 기쁘고  즐거움으로, 도망친 사람은 도망치고, 쥐구멍에 파 묻혀 죽을 사람은 죽었고,  그때에 인민군 점령지 안에서 그저 하루 매일 세 번씩 집회하고 이와 같이 뭐  부흥회하고 사경회하고 매일 잡아 죽인다고 와도 상관없이 기쁘고 즐거워하고 할  수 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미리 환난이 와 평안에서 환난 준비하고. 이 지금 평안에서 환난  준비하고 평안에서 환난 준비하고 환난이 오면 그때는 또 후루루루 환난은  기쁨으로 즐거움으로서 평안하게 지내고, 그러니까 평안할 때는 환난 준비하고.

환난에서는 평안하고, 또 평안에서는 환난 준비하고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앞서 가고 있다 그거야.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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