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제자

 

1986. 11. 28. 밤 (금)

 

본문:요한복음 8장 31절∼38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자유라는 말씀이 있는데 자유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자유요 자기 소원대로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것이나 소원되는 것을 하지 못할 때에는 그 사람은 자유가 꺾어진 사람이요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자유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자유요 소원대로 하는 것이 자유요 아무것에게도 자기의 소원과 하고 싶은 것이 제재를 받지 않고 자기 소원대로 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자유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유는 한 가지가 아니고 자유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유가 두 종류가 있는 것은 사람이 두 종류이기 때문에 자유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사람이 두 종류니까 소원도 그 모든 소욕도 다 둘이 됩니다.

그러면 여게 자유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이 소원하는 대로의 자유가 아니고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새사람의 자유입니다. 새사람이 소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자유라 여게 그렇게 말합니다. 이거는 중생된 기독자들의 자유입니다.

그러면 기독자들은 자유하는 것이 어떤 것이 자유하는 것이며 기독자들의 소원은 어떤 것이 소원이며 또 기독자의 본능은 어떤 것이 본능인가? 소원대로 소욕대로 본능대로 하면 그것이 자기의 자유입니다. 그것이 제 소욕 소원 본능대로 하지 못할 때에 그것이 강제를 당하는 것이며 억제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는 소원을 어떤 소원을 가졌으며 또 본능을 어떤 본능을 가졌으며 제 하고 싶은 것이 어떤 것인가?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새로 살아난 사람들의 소욕이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의 소욕은 하나도 여기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속받아서 새사람 된 사람의 소욕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없는 소욕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도 그 사람이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사람이 됐을 때는 그 소원과 본능과 저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고 또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옛사람이 될 때에는 또 그것이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기독자에게는 있어서 어떨 때는 옛사람 될 때도 있고 또 새사람 될 때도 있고, 그러니까 기독자의 소원은 어떨 때는 새사람의 소원을 가졌다가서 옛사람의 소원을 가졌다가 그렇게 됩니다.

불택자들과 아직까지 중생되지 안한 사람들의 소원도 본능도 하나뿐입니다. 우리 기독자들은 하나 안 믿는 사람들과 꼭 같이 하나뿐인 거게다가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새로 생겨진 새사람이 있는고로 안 믿을 때의 사람의 소원 소욕 자유와 대속을 받은 후의 소욕 소원 자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둘이 있습니다.

중생된 사람의 소원과 본능 그 소욕은 어떤 것인가? 그대로 하는 것이 자유인데, 그러면 소원과 소욕의 본능은 어떤 것인가? 기독자들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살아나기를 일곱 가지로 살아났습니다. 일곱 가지로 살아났기 때문에 일곱 가지가 자기의 본질이요 본성이요 본능이요 소욕이요 소원입니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속으로 살아난 일곱 가지로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새사람의 요소인데 그러면 새사람이 일곱 가지 가지고 있는 거는 뭐인가? 첫째는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해방해 가지고 자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자의 본성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공심판을 완전히 통과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만족을 이룬, 전지자가 입법해 놓은 그 모든 입법을 완전 이행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인정받은 하나님의 의를 우리들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본능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전 이행한 하나님의 의로 사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요 또 소원이요 소욕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대신 화목 제물이 되셔 가지고 화친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결합된, 하나님과 완전 결합된 이 완전 생명, 하나님과 결합이 생명이요 완전 결합은 완전 생명이요 하나님과 결합이 조금만 일부분만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은 아주 빈약한 생명입니다.

그러면 이 완전 생명과,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해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이 영생, 영생 이것이 우리의 본능이요 또 소욕이요 소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는 예수님의 대속하신 이 일곱 가지를 은혜로 받아 가진 것이 기독자입니다. 첫째는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자유하는 이 자유와, 또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과 완전 결합을 가진 이 완전 생명 이것과, 영감과 진리로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생활 곧 영생이 되는 이 두 가지가 우리 기독자의 본질이요 본성이요 본능입니다. 이것으로 기독자는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기독자들은 이 일곱 가지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의 성질이 기독자의 성질이요, 이 일곱 가지의 소원이 기독자의 소원이요, 이 일곱 가지의 실력이 기독자의 실력입니다. 그러면 이 일곱 가지는 이것은 다 인적 요소가 아니고 다 신적 요소요 완전한 것들입니다. 완전하고 영원 불변한 것들입니다.

이것이 기독자의 소원입니다.

기독자는 어떤 죄에서라도, 어떤 그 죄의 세력 앞에서도 죄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죄의 종되지 안하고 죄에 대해서 자유하는 자, 죄가 조금도 침노하지 못하고 침노받지 않는 자유하는 자, 사망에게 조금도 침노나 피해를 받지 않는 자유하는 자, 악령에게서 완전히 자유하는 자, 또 하나님의 온갖 율법을 완전 이행한 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을 가진 자, 또 현실 현실에서 어떤 피조물을 향방하지 안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영감과 진리대로 사는 이 영생하는 것 이것이 기독자의 모든 요소요 또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소원이요 소욕이요 본능인 것입니다.

기독자는 소원이 뭐인가? 이 일곱 가지로 살고 싶은 것이 소원입니다. 또 기독자의 본능은 뭐인가? 이 일곱 가지로 사는 것이 본능입니다. 참된 그 기독자가 됐을 때는 이 일곱 가지로 사는 것은 본질이요 본성이요 본능이요 또 소원이요 소욕이요 제가 하고자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람들도 고통이 어데 있는고 하니 자기 본능에 거슬려지는 데에 고통이 있고, 자기 소원에 거슬려지는 데에 고통이 있고, 소욕에 거슬려지는 데에 고통이 있고,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데에 거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사람은, 중생되지 안한 그 사람은 죄, 마귀, 사망, 불의, 하나님과 원수, 마귀하고 합작된 것 이것이 저희의 요소요 본질이요 본성이요 본능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으로 중생되지 안한 사람은 죄짓고 싶은 것이 저희의 본능입니다. 또 사망하는 것이 저희의 소원입니다.

사람들이 ‘누가 죽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이렇게 말하지마는 실은 안 믿는 사람들의 그 생활은 전부가 다 죽고 싶은 것이 저희의 소원이요 본능입니다. 죽고 싶은 것이 소원이요 본능이라니? 죽는 거는 어떤 게 죽는 건고 하니 하나님과 멀어지는 거 끊어지는 거 그게 죽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이후는 아담도 하와도 자꾸 하나님을 피하고 싶고 하나님과 멀어지고 싶습니다.

시간이 없지마는, 기독자는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으로 살아났습니다.

일곱 가지 대속이 저희에게 없었었는데 주님이 대신 일곱 가지 대속을 해 가지고 주셨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 대속으로 우리의 모든 속성도 살아났고 또 우리의 마음도 몸도 우리의 영도 다 살아났습니다.

살아났는데, 일곱 가지로 살아난 것이 새사람으로 살 때에는 이 일곱 가지가 제 본능이요 제 소원이요 소욕이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로 사는 것이 소원이고 수월하고 기쁘고 즐겁고 이 일곱 가지를 거슬리는 것이 우리가 마치 불에 들어가서 타 죽는 거와 같이 그렇게 마음에 거슬리고 힘들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자들이 이 일곱 가지로 살아난 이 완전한 거 새것 이거 가지고 살 때도 있지마는 이 마귀의 유혹을 인해 가지고서 이 일곱 가지를 버리고 옛날 것으로 돌아가 가지고 살기 때문에 기독자에게는 소원이 둘이라, 소욕도 둘이라, 본능도 둘이라.

그러기에 옛사람으로 될 때에는 안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쉽고 기쁘고 즐겁고, 새사람으로 살 때에는 일곱 가지로 사는 것이 기쁘고 쉽고 즐겁고, 정반대로 안 믿는 사람의 그 생활 그것은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기독자는 이 옛사람 새사람 두 사람이 있는 동시에 그 모든 소원도 소욕도 본능도 취미도 정반대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떨 때는 옛사람 돼 생각할 때는 새사람의 것이 아주 이해 못 하고, 새사람이 돼 살 때는 옛사람의 것 이해 못 해서 이 둘이 서로 대적해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자가 자유하는 것은, 기독자가 자유하는 것은 어떤 것이 자유하는 것이냐? 기독자의 자유는 새사람의 자유인데 이 기독자의 자유, 자유는 소원대로 사는 생활인데, 기독자의 소원대로 사는 이 자유 생활이 어떨 때는 자유 생활 소원대로 사는 생활 본능대로 사는 생활이 자기에게 제일 하기 싫은 생활이 됩니다. 심신이 제일 하기 싫은 생활이 뭐이냐? 심신이 제일 하기 싫은 생활이 뭐이냐? 새사람으로 됐을 때에는 세상 사람의 생활이 제일 하기 싫고 하기 힘들고 참 죽는 것으로 하기 싫고 또 옛사람으로 돼 있으면 새사람의 생활이 그렇게 하기 싫고 힘들고 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자들이 서로 같은 자리에서 살면서도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거 자기가 제일 싫어하고 참 그것은 죽는 거와 같이 그렇게 싫어하고, 마치 불에 들어가서 타는 거와 마찬가지로 싫어하고, 죽음에 들어가 물에 빠져서 죽는 거와 같이 싫어하고, 그렇게 죽는 거와 같이 이렇게 싫어하는 그 모든 언행심사를, 싫어하는 언행심사를, 다 같은 직장에 있으면서 어떤 사람은 그 생활이 원하고 원해서 감옥에 가도 그 생활 하고 직장이 떨어져도 그 생활 하고, 그 생활, 이 사람이 싫어하는 그 생활을 저 사람은 그 생활이 좋아서 그 생활 못 하게 하면 직장을 뺏겼으면 뺏겼지 그 생활 안 하고는 못 견디고, 밥을 굶고 감옥에 갇혔으면 갇혔지 그 생활 안 하고는 못 견디고, 죽었으면 죽었지 그 생활 안 하고는 못 견디고 그렇게 좋아하는 생활을 이 사람은 볼 때에 ‘저 어떻게 저런 생활 저런 생활 할까? 어떻게 자기 망하는 생활 할까?’ 참 이상하게도 보일 뿐 아니라 미련하게도 보여지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새사람으로 사는 사람은 옛사람의 생활이 또 그렇게 보여지고 평가돼지고 비판돼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새사람이 돼 가지고는 옛사람 생활을 절대 못 하는 것이고 옛사람이 돼 가지고는 새사람 생활을 절대 못 하는 것입니다. 왜? 새사람 생활은 옛사람이 죽는 생활이고 옛사람 생활은 새사람이 죽는 생활이기 때문에 새사람 된 사람은 옛사람 생활을 할 수 없고 그 하는 것이 이해 안 되고 옛사람은 새사람 생활 하는 것이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자유라는 말은, 자유가 둘이 있기 때문에 옛사람의 자유도 있고 새사람의 자유도 있기 때문에 이 자유를 혼돈하면 안 됩니다. 여게 “자유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이 자유케 하면 자유하리라” 이랬는데 이 자유는 사람들이 다 자유야 원하지 자유 원하지 안하는 사람이 어데 있습니까? 자유는 원하지마는 이 자유에 대해서 바로 자유에 대한 정의를 바로 알지 못하면 이 자유에 대해서는 이해도 못 할 뿐만 아니라 또 가치로 여기지도 안하고, 여게 말한 자유, 여게 말한 자유는 어떤 자유냐? 여게 말하는 자유는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죽는 자유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다 바싹 부숴서 죽는 자유요.

이러기 때문에 내가 안 믿는 사람이 되면은 여게 말하는 자유라 하는 것은 절대 못 하고 또 하기도 싫어하고 안 합니다.

그들은 좋아하는 자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그 자유는 새사람은 그 자유를 죽는 것이기 때문에 하기 싫어하고 또 옛사람은 새사람의 자유를 죽는 것이기 때문에 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자유라는 것을 똑똑히 구별해야 되지 이 자유가 뭣을 말한 것인지 그걸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이 예수를 암만 믿어도 이 자유를 구별하지 못하면 자살하는 행위를 하면서 항상 제 좋은 대로 제 마음대로 했다고 하루 종일 소원 성취를 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하루 종일 자살 행위만 한 그런 사람 많이 있습니다. 이 자유에 대한 정의를 바로 가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여게 자유는 기독자의 자유 새사람의 자유를 말합니다. 새사람의 자유는 이제 말한 일곱 가지, 그 일곱 가지가 새사람의 본질이요 본성이요 본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로 사는 것이 새사람의 소원이요 또 본능이요 저하고 싶은 것이요 이 일곱 가지는 옛사람은 모조리 박살이 나는 그 생활입니다.

이러니까, 기독자가 옛사람이 될 때에는 이 새사람의 자유를 자멸하는 일로 보기 때문에 그는 이 자유를 피해서 도망을 칩니다. 또 새사람이 되면은 옛사람이 자유하는 그 자유를 피해서 도망을 칩니다.

이러니까 우리 기독자들이 자유가 두 종류 있는데 기독자의 자유는 어떤 게 기독자의 자유인가? 기독자에게는 새사람도 있고 옛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옛사람뿐이지 새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자에게는 옛사람도 새사람도 있으니까 내가 옛사람이냐 새사람이냐 이것부터 바로 구별해 가지고 해야 되지 이거 구별하지 안하면 그다음에 생활이라 하는 것은 절대 구별하지를 못합니다. 왜? 자기가 옛사람이 되면 새사람의 생활, 새사람의 이 자유하는 거 이거는 원수가 되고 새사람이 되면 옛사람의 소원하는 이 생활은 원수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지금 새사람으로 살고 있느냐 옛사람으로 살고 있느냐 그것을 구별하지 안하고 그저 제 원하는 대로 소원대로 지금 소원대로 소욕대로 해서 ‘오늘은 내 소욕이 달성됐다. 내 소원이 달성됐다. 기쁘고 즐겁다.’ 하는 그것이 기독자로서 자살 행위를 하고 하는 것인지 자기를 구원하는 행위를 하고 하는지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판단해 봐야만 합니다.

이래서 기독자의 자유는, 자유는 소원 성취하는 것이 자유인데,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자유인데, 제 본능대로 하는 게 자유인데 그러면 기독자의 본능이 무엇이며 본질이 무엇이며 본성이 무엇인가? 이 본질 본성 본능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인 일곱 가지 이것이기 때문에 기독자의 소원은 뭐이 소원인가? 기독자의 소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 이것이 제 소원입니다. 또 이것이 제 본능입니다. 이것이 제 본질입니다. 이것이 저희의 지능입니다. 이것이 곧 저희의 생명입니다.

“너희가 자유하리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진리가 자유케 한다 말은 진리가 어떻게 한다 말입니까?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하는 것은 이 진리가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이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가 누구의 소원대로 하게 한다 말입니까? 이 진리가 몇 가지의 소원대로 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몇 가지 소원대로 하게 한다 말입니까? 녜, 일곱 가지의 소원대로 하게 하는 것이 이게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도 자유케 하고 아들 예수님도 자유케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유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이제 좀 알았습니다. 자유에 대해서는 요 자유가 뭐이 자유인가? 요것이 자유라는 것을 배웠으면 똑똑히 배웠고 정확히 배웠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이 다 달라들어도 요것이 자유를 꼭 바로 배운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믿은 유대인들이라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말합니다. 믿을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믿은 유대인들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믿은 유대인들은 그들은 구약에 속한 사람으로서 유대교를 믿는 육체의 이스라엘에게 속한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구주로 오신 이 메시야를 모두 유대교 육체의 이스라엘들은 제사장도 서기관도 바리새 교인들도 다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이려고 하는데 그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도 잘 아는 사람들이요 또 아주 신앙이 독실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 흐지부지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은 유대인들은 모두 다 칠십 문도, 거게서 생명을 내대고 모두 다 예수님을 믿을라 하면 다 죽일라 하고 이라는데 거게서 생명을 내놓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믿은 유대인들” 믿을라는 게 아니라 “믿은” 하는 거는 과거사입니다. 이미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것은 예수님이 교훈하신 그 교훈 안에 살면 그말이오, 예수님의 교훈 안에 살면. “교훈 안에 살면” 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실행해 살면 그말입니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말씀하신 그대로 실행하는 생활을 하면, “내 말에 거하면” 요건 예수님의 교훈인데,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교훈이니까 곧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요 말씀은 뭣 하게 하는 말씀이냐? 요 말씀을 듣고 배우고 한 사람들은 요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살도록 하는 말씀. 이 말씀이 뭐 자유케 하는 진리 아니오. 요걸 잘 구별해야 됩니다.

그들이 듣고 배운 이 말씀의 이 의무는 어데 있으며 목적은 어데 있는가? 이 말씀은 들은 사람들이 이 말씀대로 생활하도록 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이 교훈을 떠나지 안하고 이 교훈 안에서 이 말씀 안에서 살게 하는 이 말씀입니다.

말씀인데, “내 말에 거하면” 거하면 뭐이 되느냐? 이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요 말씀대로 행하면 뭣이 되는고 하니 “참 내 제자가” 되고 했습니다.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러면 이 들은 말씀을 행하는 데에서, 이 말씀 들은 대로 행하는 데에서 뭣이 조성되는가? 이 말씀을 들은 대로 행하는 데에서 뭣이 만들어지는가? 예수님의 참 제자가 만들어집니다.

이 말씀을 들은 데서 예수님의 제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외우는 데서 제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는 데서 제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이 말씀대로 행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만들어진다. “참 내 제자가 되고” 참 내 제자가 되고 하는 것은 제자의 실상이 만들어진다 그말이오. 제자의 실상이 만들어진다.

제자는 말로 하는 제자도 있고, 이름 제자도 있고, 따라 다니는 제자도 있고 하는데 그런 게 아니고 참 제자가 된다 말은 제자의 실상이 된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은 어떤 게 제자되는 것인가? 제자되는 것은 예수님을 첫째 닮은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을 배워서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과 같이 되는 거.

같이 되는데, 자체도 같이 되고, 자체도 같이 되고, 예수님과 같이 되고 또 그 모든 언행심사도 같이 되고, 소원도 같이 되고, 본능도 같이 되고, 지식도 같이 되고, 같이 되는 걸 가리켜서 “내 제자가 되고” 이랬습니다.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러면 같이 되는 거는 뭐인가?  예수님은 원형이요 주님이 말씀하신 말씀대로 살면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알기 쉽게 발표할라면은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원형이요 말씀대로 사는 그 행동이 들어서, 말씀대로 사는 그 행동이 들어서 예수님의 모형적 예수가 된다. 예수님의 모형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킴인가? 예수님이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베푸셨는데 예수님이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하신 이 대속은 원형이요 이 대속을 자기가 믿음으로 다, 자기 위해서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자기 것으로 자기가 입고 있기를 예수님이 대속, 사활 대속하심과 같이 꼭 그와 같이 지금, 그와 꼭 같도록, 꼭 같도록 사활의 대속을 입는 그것이 참 예수님의 그 자체의 제자된 것이요, 자체의 모형이요, 예수님이 이렇게 사활의 대속을 한 그 생애, 그 생애를 또 자기가 모형적으로 닮아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하신 그 생애를 자기도 꼭 그와 꼭 같은 대속의 생애를 할 수 있는 자가 된다 하는 말입니다. “참 내 제자가 되고”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성경 말씀 이게 복음인데, 이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인데 이 복음을 자기가 듣고 알고 하는 그거 가지고는 우리의 원형인 예수님과 같은 그 모형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우리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그 본체같이는 안 되지마는 그와 꼭 같은, 모형이라는 건 꼭 같은 것입니다. 꼭 같으나 그 본체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속은 아니고 예수님의 대속과 꼭 같은 그 대속을 가진 자 되고 또 이 대속의 본체가 사활로 타를 위하여서 대속 행위를 한 그 행위도 모형적으로 꼭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참 내 제자가 되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 내 제자가 되고”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지식으로는 안 됩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은 이 말씀이 뭣 하는 말씀이냐?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자기 것을 삼게 하려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계시의 말씀의 목적입니다.

이 사활의 대속을 실상으로 자기 것을 삼게 하려는 것이 이 모든 신구약 성경 말씀의 전 노력의 목적이요 또 예수님이 사활한 대속을 입고, 입은 다음에는 사활의 대속을 가진 자의 그 행동,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행위를 자기도 그와 꼭 같은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참 제자, 참 제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 말씀대로 행하게 되면은 이 행하는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모형적 사람이 됩니다.

“참 제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사람이 되고 또 이 사활의 대속을 자기 생활로 삼아 가지고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예수님이 하셨는데 우리도 이 대속의 생활을 세상에서만 할 게 아니라 영원 무궁세계에서도, 영원 무궁세계의 생애는 무슨 생애냐? 한 말로 말하면 봉사의 생애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활의 대속한 그 생애를 우리가 무궁세계 가 가지고 우리 생활로 가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사활의 대속 생활 함으로써 자본이 떨어졌느냐? 자본이 떨어지지 안하고 그는 가장 충만하고 부강한 이가 되셨습니다.

이래서,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그러면 “진리를 알지니” 이 진리는 무슨 진리입니까? 여게 있는 진리는 뭐입니까? 여게 있는 진리는 곧 절대자요 유일하신 주권자이신, 대주재자요 주권자이신 그분의 뜻을 가리켜서 여게 진리라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에 “네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네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요 말과 “진리를 알지니” 하는 이 진리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다릅니다.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 말씀의 계시 목적은, 그 말씀이 나타나신 계시 목적은 목적이 뭐이냐? 예수님의 참 제자되게 하려는 것이 그 계시의 목적입니다. 제자가 되고 난 다음에 진리를 알지니 하는 그 진리는 이것은 주권자의 그분의 유일하신 그분의 뜻을 알지니 하는 말입니다.

요 진리는, 요 진리는 과거의 진리가 아닙니다. 요거 잘못 들으면 나중에 혼돈됩니다. 요거는 과거 진리가 아닙니다. 미래를 위한 현재 진리입니다, 현재 진리. 현재에 하나님의 뜻 곧 자기에 영생이 될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것을 가리켜서 여게 “진리” 말한 건데, “진리를 알지니” 진리를 안다, 그러면 “진리를 알지니” 그 진리를 누가 압니까? 진리를 누가 압니까? 진리를 예수님의 참 제자된 자가 요 진리를 압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된 자가 요 진리를 압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된 자, 제자된 자라니? 이 세 가지에게서 해방되어 자유를 받아, 해방과 자유를 받아 예수님의 것 된 그자,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완전 화친된, 이 화친된 이 대속을 받아 가져 예수님의 것이 된 자, 예수님의 부활로 하나님을 향한 완전 영생을 예수님이 대생하셔서 주신 이 부활의 대속을 가져 예수님의 것이 된 자 이 자가 진리를 압니다. 이 자가 진리를 압니다. 요 일곱 가지를 가진 일곱 가지로 된 자가 진리를 압니다.

일곱 가지로 된 예수님의 것 된 자가 진리를 압니다.

그러면 이 진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된 그자와 이 진리는 어찌 됩니까? 그 관계가 어찌 됩니까? 이 진리와 예수님의 참 제자된 그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그 관계가? 그 관계가 어찌 되지요? 그러면 그 관계 “진리를 알지니” 하는 이 진리는, 이 진리는 예수님의 참 제자된 그자가 이 진리에 순종하여서 행해, 이 순종해서 순종해야 될 이 진리입니까 이 진리는 자기의 본능에 자율이 되는 진리입니까? 예수님의 참 제자된 이자의 “진리를 알지니” 하는 이 진리는 자율입니까 타율입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는 자율입니까 타율입니까? 저 뒤에는, 이 진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된 그자의 자율입니까 타율입니까? 뭐입니까? 이 진리는 자기의 본능이겠습니까 이거는 자기가 지키고 순종해야 될 것입니까? 본능입니다.

자율입니다. 자기의 주관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이 진리는 누구의 뜻입니까? 참 제자된 그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참 제자된 그에게는 뭐입니까? 남의 뜻입니까 제 뜻입니까? 남의 뜻입니까 제 뜻입니까? 제 뜻입니다, 제 뜻. 근원은 하나님에게서 발원했는데 곧 제 뜻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그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참 제자된 이 자의 본능 행위요, 소원 행위요, 소욕 행위요, 제 좋아하는 대로 하는 자기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말은 진리가 너에게 거슬리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이 너희에게 거슬리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이 네 비위와 소원에 들어맞게 된다, 하나가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참 내 제자가 되고” 하는 이 제자는 모든 본질 본성 본능 지능 소원 소욕 모든 의사 이것이 이 대주재이신 하나님과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다. 하나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세 가지에서 해방 자유를 주셨고 또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 의와 화친의 완전 생명을 줬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 하나님과 완전한 화친도 피조물과 창조주는 언제든지 구별돼 있지마는 창조주와 피조물이 창조주 피조물만 다르지 모든 행동과 계획과 건설과 누리는 모든 기업은 다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입니다.

또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당신의 뜻으로 나타났어.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요. 무형의 존재인데 당신의, 무형의 존재가 무한한 뜻이 나타났는데 그 뜻과, 하나님의 의를 행한 자는 그 뜻과 하나기 때문에 하나님과 세밀히,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백 가지 요소를 가졌다면 백 가지가 하나고 만 가지 요소를 가졌다면 만 가지가 하나고 억만 부분을 가졌다면 억만 부분이 하나고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은 당신의 의사 전부입니다. 그 전부 전지의 입법의 요구에 만족을 해서 하나된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또 예수님이 형으로 죽으심으로, 순종으로 죽으심이 있고 형으로 죽으심이 있으니 순종으로 죽으심은 하나님의와 완전 생명을, 화친의 완전 생명을 이루셨고, 형으로 죽으심은 세 가지를 멸하고 세 가지에게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이 세 가지에 대한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자유를 주신 이 자유도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자유도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죄에 대해서 완전 자유, 사망에 대해서 완전 자유, 마귀에 대해서 완전 자유 이 자는 하나님하고 하나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자요 하나님은 그 안에 내주해 있는 자요, 하나입니다.

또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상대한다 말입니다. 하나님만을 상대로 해 가지고서 영감과 진리대로, 그분의 과거 뜻 현재 뜻 그분의 움직임의 전부와 하나가 되는 이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이러니까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이 진리는 수많이 성경에 기록돼 있는 수많은 하나님의, 과거 현재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많은데 그 뜻을 말합니까 현재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까? 현재 나타난 하나님 뜻을 말합니다.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암만 하나님 안에 있고 서로 내주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자라고 소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다 이루어 준다면 거기는 불의가 있을 터이니까 되겠습니까? “네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네 안에 있으면 원하는 대로 구하라 다 이루리라” 그말은 원하는 그것이 막바로 하나님의 원함이요 소원이 하나님과 일치된다 말이요, 단일이라 말입니다, 단일. 하나된다 말입니다.

이런데 “진리를 알지니” 네가 움직일 걸 네가 안다. 하나님의 뜻이요 네 뜻이요, 하나님의 소원이요 네 소원이요, 하나님의 본능이요 네 본능이라. 너도 그대로 하는 것이 네 본능이요 그대로 못 하는 거는 본능에 거슬리면 다 죽는 거 아닙니까? 너도 그대로 못 하는 것은 네 본능에 위반되기 때문에 네가 그게 죽는 것, 죽기보다 더 힘들 것이고 하나님도 그건 당신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건 어기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것은 진리가 들어서 자유케 하기도 하고 또 그 자체가 그렇게 되는 것이 제 자유가 됩니다. 그러면 그 뜻이 요 예수님의 참 제자된 그자의 자유 행동이요 소원 행동이 된다 그말입니다.

이라니까 그들이 ‘우리가 종 된 적이 없는데 뭐 자유한다고 하는 소리를 하느냐?’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여게 자유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에게, 하나님 한 분의 뜻과, 하나님 한 분의 뜻은 그분 소원이 내 소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한 분의 뜻은 나와, 내 뜻, 하나님의 뜻이요 내 뜻이라. 내 뜻이요 하나님의 뜻이라. 하나님의 소원이요 내 소원이라.

그러기에 하나님의 소원 아닌, 하나님의 뜻이 아닌 어떤 것에게도 피동되지 않는다, 종되지 않는다, 피동되지 않는다. 네가 어떤 것에게든지 그에게 피동되면 그에게 종이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피동은 하나님에게 종인데 네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게 아니고 곧 하나님의 의사가 네 의사가 돼 가지고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우리를 이렇게 성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와는 거리 멀리 해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피동으로 사는 이 생활에 있지 안하고 하나님의 의사와 내 의사가 일치된다. 참 하나님은 머리요 우리는 몸이 되고서 모든 희로애락이 일치가 된다. 그 하나님의 뜻이 타율이 아니고 자율이 된다. 여게까지 하나님과 하나가 돼 가지고 하나님은 머리 우리는 몸이 된다.

그런데, “너희들 속에 내 말이 거할 곳이 없는고로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너희 속에 내 말이 거할 곳이 없는고로” 내 말이라는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그 위에 여러가지 말했었는데, “내 말에” 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러면 여게 있는 “내 말이 네 속에 거할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일라 한다” “내 말” 하는 이 말씀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말입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하는 진리도 하나님 말씀이니까 그 진리입니까 뭐입니까? “내 말이 네 안에 거할 곳이 없으므로” 하는 이 말은 진리를 말합니까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말과 같은 그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까 뭘 말합니까? 진리를 말합니까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까? 진리를 말합니까?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한다” 하는 것은 내 말이라고 예수님 말씀인데 이 말씀은 뭘 말합니까? 위에 뭣과 같은 말입니까? “진리를 알지니” 하는 그 진리와 다릅니다, 아닙니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 말과 같은 말입니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그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할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한다” 그러면, 거할 곳이 없다. 왜 그들 속에 왜 예수님의 말씀이 왜 거할 곳이 없습니까? 그들 속에 예수님의 말씀이 왜 그 속에 거할 곳이 없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 속에 거하지를 못하고 있지를 못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라고 하니까 그들 속에는 뭐이 들었습니까? 그들 속에는 뭐이 들어 있습니까? 옛사람이라 했으면 대답을 잘했는데, 그 속에 뭐이 들었습니까? 녜, 그 속에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멸하려고 하는,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박살을 내서 이 사활의 대속을 우리로 하여금 가지지 못하도록 이 사활의 대속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만 마음 속에 꽉 찼습니다.

사활의 대속을 믿지 못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이 사활의 대속을 예수님이 주시는데, 공으로 주시는데 가지지 못하게, 알지 못하게, 믿지 못하게, 가지지 못하게 하는 그것만 그 속에 가득 찼으니까 예수님을 죽일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 속에는, 자, 안 믿는 사람들 속에는 뭐이 있습니까? 이 일곱 가지의 정반대만 가득 차 있습니다. 또 믿는 사람들 마음 가운데는, 믿는 사람들 마음 가운데는 뭐이 들어 있습니까? 두 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뭣뭐 두 가지 들어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속에는 일곱 가지가 들어 있든지 일곱 가지의 반대가 들어 있든지, 유대인들에게는 그 마음 속에 뭐이 들어 있었습니까? 일곱 가지의 반대가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속에 일곱 가지의 반대가 들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죽입니다. 알겠습니까? 일곱 가지의 반대가 그 속에 있으면 제가 뭐 암만 유명한 목사고 유명한 부흥사고 유명한 신학자고 어떻게 결심한다 해도 이 일곱 가지가 그 속에 들어 있지 안하면 일곱 가지의 반대되는 자가, 영생을 반대해, 자유를 반대해, 하나님의 의를 반대해, 완전 생명을 반대해, 이렇게 반대하는 자가 그 속에 들어 있으면 이 반대하는 자는 어떻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 속에는 이 일곱 가지를 반대하는 것 외에 딴것이 들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도 딴거는 없습니다. 이 일곱 가지를 반대하는 것만 들어 있습니다.

일곱 가지가, 일곱 가지 반대되는 것, 하나님을 향하지 안하고 피조물을 향하는 것, 영감과 진리대로가 아니고 제 마음과 제 뜻대로 하는 것, 또 죄하고 한덩어리 되는 것, 사망하고 한덩어리 돼 가지고 있는 것, 마귀하고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있는 것, 하나님의 지공법을 반대하고 있는 것,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는 것 그것만 들어 가지고 있어, 우리 속에는. 그것만 들어 가지고 있어. 그러면 이것만 들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죽이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이지 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팔지 안할 수 없습니다. 대적하지 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두 가지인데, 기독자는 두 가지인데 예수님을 죽일라고 하든지 그러면 자유를 하든지, 예수님을 죽일라고 하든지 자유하든지, 예수님을 죽일라고 하는 것은 또 뭐입니까, 그거는? 예수님을 죽일라고 하는 거는 뭐이지요? 그것은 뭐입니까? 예수님을 죽일라 하는 그것도 자유입니다. 저거 자유요, 저거 자유.

예수님을 죽일라는 것도 저거 자유요. 또 일곱 가지가 속에 있는 사람도 자유하는 것도 또 저거 자유입니다. 새사람 자유, 옛사람 자유.

이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하고 작정을 하고 입술로 뭐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말을 하고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팔고 안 파는 것, 어데서든지 이 일곱 가지대로 생활하는 자유 생활하는 것 일곱 가지를 팔고 반대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우리 걸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 속에 예수님의 참 제자, 예수님의 참 형상, 그리스도의 참 형상, 예수님의 모형, 예수님은 원형이요 우리는 모형인데 예수님의 모형이 자기 속에 이루어지면 그 진리가 자율이 되고 자유하게 되고 예수님의 모형이 자기 속에 이루어지지 안하면 예수님을 팔게 됩니다.

그러면 그 속에 예수님의 대속 일곱 가지가 자기 마음 속에 내주해 있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대로 행해서 자유 생활하고 요 일곱 가지가 자기 속에 없으면 일곱 가지와 원수되는 그 일곱 가지가 자기 속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팔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팔고 안 파는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대적 안 하는 것, 영생하는 것이라면 다인데. 기독자들이 이 세상에서 시간 시간마다 영생하는 그 생명 생활 또 예수님을 대적하는 파는 생활 그 생활은 어데서 그 모든 것이 원인이 됩니까? 그 원인은 어데서입니까? 그 원인이 어데서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해서 영생 생활하고 또 예수님을 언제간가 대적하고 팔고, 예수님을 암만 제가 구주라고 해도 마지막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마는 것.

왜정 말년에서 기독자들이 다 부인했고, 과거에 노아 때도 여덟 사람 외에는 다 부인이 돼 버렸고, 육체의 이스라엘도 얼마 동안만 구원 얻었지 그 안식에 들어갔지 나머지기 사람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도 그때와 같이 이 구원에 들어갈 사람, 뭐 기본구원 영구원으로서 하늘나라 가는 건 가지마는 건설구원 심신의 구원 이 구원 얻을 사람은 수가 많지를 못하다 이랬는데, 그러면, 우리 신앙 생활은 멸망이냐 구원이냐 이 둘 중 하나인데 우리의 신앙 생활이 멸망은 어데서부터 시작되며 구원은 어데서부터 시작됩니까? 어데서부터 시작됩니까? 우리 구원의 멸망이 어데 시작되며 구원이 어데서 시작됩니까? 요것은 “네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요게서 시발되는 것입니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내 말에 거하면” 여게서 뭣 됩니까? 자, 우리가 진리를 어떻게 지켜서 진리 자유하고 진리를 가지고서 이 사망 앞에 자유하고 마귀 앞에 자유하고 죄 앞에 자유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의에서 하나님의 의에 있고 완전한 생명으로 살고 있는 이것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이 모형이 이루어지지 안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꼭 같은 이 참 제자 이것이 이루어지지 안하면 안 되는데 이 이루어지는 거는 어데 이루어지느냐?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이루어집니다.

여게서 이루지 못하고 그다음에 가 가지고는 암만 뭐 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안 됩니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하는 여게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말씀 안에서 산다 말인데 말씀 안에서 살면 뭣이 이루어집니까? 말씀대로, 주님의 말씀 안에서 “내 말에 거하면” 주님 말씀 안에서 살았는지 안 살았는지 그 표가 뭐입니까? 표시가 뭐입니까? 참 제자 되는 것이 그것이 표적입니다. 그것이 표시요 표적이오.

참 제자되다니? 참 제자는 뭐인데?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원형은 뭐요? 예수님의 일곱 가지,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 준 것이 원형인데 일곱 가지 대속이 내 안에서 내것이 되어지는 것이, 내것이 되어지는 이것이 참 제자 되는 것이요 이것이 내것 되니까 이것이 내것 되니 나는 예수님의 것 돼서, 나는 예수님의 것 돼서 예수님이 어떻게 사심같이 나도 그렇게 사는 것,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되니 나는 주님의 것 되어, 주님의 것 되면은 주님의 것 된 거는 뭐 하는고? 주님의 것 된 것은 내나 예수님의 생애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하는 것. 그것이 땅에서 연습돼 가지고서 무궁세계에서도 그 생활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요게 시발점이요 요게 입문입니다. 요 문을 통과하지 안하면 기독자의 구원은 다 그거는 기본구원은 있지만 건설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이거는 뭐 말뿐이지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말씀대로 행해 보면, 말씀대로 행하면, 말씀대로 살면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져.

이루어져야 아직 이루어지는 거는 암만, 이루어진다 이것뿐이지 이루어진다는 걸 뭘로 보일 수가 없어. 말씀대로 살면 자기 속에 증거가 뭐인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증거라. 형상이 몇 가지인데? 형상이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십시오. 일곱 가지. 이것이 자기 속에 이루어져.

이루어지면 이루어지는 것만치 모든 하나님의 현실 현실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타율이 아니요 객관성이 아니요 자율이요 그것이 주관성이요 자기 본능성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어기는 것은 자기가 죽자 사자 못 하고 행하는 것은 본능으로 행하고 행하고 싶고, 마치 사람이 불에 들어가면 타 죽는다는 걸 알면은 안 타 죽을라고 애를 쓰는 것은 본능이요 타 죽는 것은 본능에 거슬리기 때문에 그거는 자기 힘을 두고는 안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내가 예수님화되면, 그 형상이 내 속에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이 뜻인 영생인 이 진리는 내 뜻이요 내 주관이요, 내 소원이요, 내 본능이요, 내 자율이요, 내 주관이기 때문에 이것은, 자, 그러면 자기 본능은 하기가 쉽습니까 안 하기가 쉽습니까? 자기 본능은 자기에게 힘 있는 대로는 자기 본능을 할라 합니까 안 할라 합니까? 할라 합니다. 자기 본능대로 하면 기쁩니까 즐겁습니까 고통입니까? 기쁩니다.

우리가 요 비밀의 단계에서 들어가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 사랑 안에 거함같이 너희가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말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기쁨과 우리 기쁨이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기쁨을 큰 고통으로 해석할 것이고 예수님의 기쁨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기뻐한다 하는 그 기쁨은 한없는 고통이요 슬픔이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그 행위 하는 것이 그렇츰 즐겁고 그는 기쁘고 즐거웠는데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의 생애가 이렇츰 기쁘고 즐겁고 만족할 수 있는 이 생애를 내 생애로 삼을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변화되지 안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로 예수님의 모형으로 변화되지 안해 그렇습니다.

변화되면 하나님과 우리와 하나되어서 희로애락이 하나님과 하나되고 본질과 본성이 하나되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 하나이니까 하나님이 좋아하는 건 나 좋아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건 내가 원하고, 하나님의 기쁜 건 나 기쁘고, 하나님의 취미는 내 취미되고, 하나님의 재미는 내 재미있고, 이제 이 모든 십자가의 생활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생활이 당신은 본능 생활인데 우리는 이 십자가의 생활이 본능 생활이 아니기 때문에 정반대의 생활인고로 우리에게는 역행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지극히 큰 비밀이 돈이 드는 것도 아니오. 이거는 뭐 수고가 많이 드는 것도 아니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된다” 그러기에 우리가 들은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내가 들은, 듣고 배운 요 말씀대로 행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본질과 본성이 꼭 같이 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에 대해서 같이 됩니까? 일곱 가지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 율법, 이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과 나와 같이 돼. 하나님 당신이 입법해서 당신의 법인데 나도 그 법이 하나님이 입법했지만 내 법이 돼 버렸어, 내 법이 됐어. 그 법을 어기고는 내가 못 살아. 그 법을 어기는 것은 내 본능적으로, 그 법이 내 본능 생애라. 내 자율이라.

이렇게, 사람이 생명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제일 생명 뺏기기가 제일 싫고 생명이 제일 좋고 생명은 뺏기기 싫어, 있는 힘을 다해 가지고 생명 뺏기지 안할라고 애를 써. 하나님과 나와 떨어지는 것이 자기 육체의 생명 떨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떨어지기 싫고 이렇게 하나되면 좋고 이게 우리인데, 이 일이 이루어지는데, 천하 죄가 다 달라들어도 오거나 말거나 그까짓 거 상관없고 예수님께서 죄에 자유했어, 마귀에 자유했어, 사망에 자유했어. “그가 와 가지고 나한테 무슨 일 하든지 말든지 나는 상관 할 것 없다. 저는 저 할 일 할 것이고 내게는 상관할 것 없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며 계명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는 것을 그들에게 보일 것뿐이지 그외 딴거는 나 할일이 없다.” 이렇게 예수 믿기 쉽고 영원히 살기 싶고 평안하게 살고 이렇게 가치 있는 좋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길을 열어 놨는데, 내 말에 거하면 되는데, 내 말에 거하면 되는데, 자, 주님의 교훈에 거하면 우리가 뭣 됩니까? 뭐와 같이 되는 것입니까? 뭐와 같이 돼요? 하나님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같이 되는 거.

“참 내 제자가 되고” 예수님의 모형이 되고, 예수님의 모형이라니? 예수님이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한 그것은 원 덩어리인데, 원형인데, 대속을 내가 가졌으니까 그분 한 것은 원형이고 나는 모형으로 내가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러면 그분은 선생이요 나는 제자라. 그분은 원형이요 나는 모형이라.

“진리를 알지니” 현재에 대한 하나님의 뜻, 그것이 곧 자기 뜻이요 하나님의 뜻이오. 이러니까 그게 영생이라.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 뜻이 자유케 하리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하나님의 그 뜻이 누구 소원입니까? “자유케 하리라” 하나님의 그 뜻이 누구 소원입니까? 네 자유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네 자유라 그말이요, 하나님의 뜻이 네 자유라. 하나님의 뜻이 네 자유라.

이렇게 우리가 이거 이 생애의 구원이 이렇게 지극히 큰데 아는 자마다 이 구원에 서서 있는 거 다 팔아 가지고 이 구원을 샀는데 이걸 모르기 때문에 오늘 예수님이 오셔도 죽어도 다 후회될 거 썩은 것만 볼 줄 알지 심령이 어두워 있기 때문에 마귀에게 미혹받아 가지고서 이 생명의 도리를 모르고 엉뚱한 짓을 합니다. 요새 날마다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

그만 쉽게 말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현재 꼬박꼬박 현실에 사십시오. 살면 우리가 하나님과 꼭 같이 됩니다. 하나님과 꼭 같이 돼요.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된 이 같은, 같이 된, 하나님화된 것이 적으면 하나님의 도가 자기에게 더 많이 거슬리고 하나님화 된 것이 많으면은 하나님의 도가 적게 거슬리고 하나님화가 다 됐으면 하나님의 도는 자기에게 자유요 본능이지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하나님의 심판 문제요 영원 멸망과 구원의 문제인데 이 문제를 사람들은 돈만치도 안 여기고 있어. 이 세상 권세만치도 안 여기고 있어. 온 천하 다 팔아도 여게 비할 가치가 못 돼요. 온 천하 다 차지하면 그거, 이것만 차지하면 온 천하 다 차지했는데.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과 모든 게 네것이 됐다, 네것이다.” 어떤 자가? 예수님의 참 제자가. 참 제자가  뭐인데? 하나님과 하나이지.

이것을 자꾸 새겨서,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그가 세상에 좋은 것 다 배설물로 다 여겨 버렸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못박힌 거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했습니다. 그분이 미친 사람입니까? 이것은 귀넘어 듣고 지내 보내 버리고 이 세상에 과학이니 철학이니 문학이니, 그거 다 죽은 것인데, 확실히 죽은 것인데.

거게는 가치로 여기고, 돈의 가치를 두고, 그거 얼마나 천하요. 굶어 죽을라 해도 못 굶어 죽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으로서 너 그저 하나 가지라면 하나 가지는 그건 천하가 다 못 가지게 하지 못해요. 하나 둘 당신의 예정대로 되는 것인데 그거 냅두고 예정대로 되는 것이니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만 구하면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실라 했는데 엉뚱한 짓만 자꾸 하고 있어요.

요걸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오. 잘난 사람이 필요 없어. 하나님 그분을 진실하다, 그분의 말씀은 신실하다, 그대로 하면 이루어진다 믿는 요 사람만 필요해요. 하나님은 용모 잘난 거 필요 있소? 당신이 용모 잘난 거 얼마든지 만들라면 만들 수 있소. 명철한 게 필요한가? 명철한 거 얼마든지 만들라면 만들 수 있소. 물질 뭐? 물질 모든 게 다 당신의 것이오.

뭐 삐뚤어져도 좋고, 잘나도 좋고, 커도 좋고, 작아도 좋고, 못나도 좋고, 어쨌든지 당신을 당신으로 알고 인정하고 당신의 말을 참되다 믿어서 그대로 바라보고 믿고 의지하고 맡겨 놓고 사는 요걸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이 사람을 높이 듭니다.

애굽에서 장자 재앙 날 때에 그뭐 무슨 쉬운 거, 양 한 마리 잡아 가지고 피 열 설주에도 더 칠할 건데. 그거 칠하면 다 장자 재앙 면했는데 그 계약을 안 하고 양 피 외에 장자 재앙을 면하는 권리가 있습니까? 못 면했어.

노아 홍수 때 하나님이 배 모우라 했는데 배 모았으니까 됐지 배 모으는 것 외에 구원 얻는 길이 있었습니까? 없었어. 노아가 그렇게 모든 사람이 조롱했지만 일백이십 년 동안을 외로운 생활, 조롱하는 생활, 천대 생활, 멸시 생명, 수입은 하나도 없는 생활, 그래도 노아는 한번도 슬퍼하지 안했소. 고민 가지지 안했소.

고독을 가지지 안했소.

노아는 항상 기뻤는데 노아는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부귀 영광 가졌는데 노아는 그렇게 가난하고 고독하고 조롱받고 천대받았습니다. 노아는 그 사람들을 볼 때에 어떻게 봤습니까? 부러워했습니까 불쌍하고 가련하게 어겼습니까? ○조사? 자기는 탄식을 하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지금 고생한다’ 탄식을 했겠습니까 그분이 기뻐하고 감사했겠습니까? 어떻게 했어, 노아가? 노아는 미쳤구먼. 세상 부귀 영화 가진 그 사람들을 저는 쫄쫄 곯고 있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저 사람들은 잘사는 사람들 보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니까 노아 미친 사람 아니요? 천하에 행복된 사람을 보고 불쌍하다 하고 저같이 가련한 신세가 없는데 저는 행복되다 하고.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약은 참되기 때문에 노아 홍수로 멸한다는 걸 생각하니까 그 사람들은 전부 멸망 속에 있으니 불쌍하고 가련하고 자기는 그 계약을 믿고 보니 자기같이 행복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계약을 믿지 않는 데에서 우리가 미쳐졌습니다. 정신 이상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것은 부러워하고 행복된 자체는 불행으로 여기는 것이 이것은 우리가 이 소망을 잊어버리고 이 소망의 눈이 가리워진 연고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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