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평 선교사 Elizabeth Johanna Shepping

  선지자선교회

77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특별한 장례식(서서평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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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위해 헌신한.. 서서평 선교사 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 ~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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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조선에는 2만명이 넘는 나환자들이 있었다.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을 돌 본 사람들은 평신도 선교사였던 포사잇과 윌슨, 그리고.. ‘쉐핑( Elizabeth Shepping, 한국명: 서서평)’ 선교사였다

 

특히, 서서평 선교사는 나환자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가르쳐 주었으며, 고아 13명을 자신의 딸로 입양하고 문둥이 자녀를 아들(요셉)로 삼아 함께 살기도 했다.

 

구두 한 켤레 없이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기도 했다는 서서평 선교사. 고국인 미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는 불쌍한 나환자들을 위해 모두 사용했던 천사였다. 그녀가 조선에서의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친 날은 1934626일 새벽 4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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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실조로 서서평 선교사(독일계 미국인)가 운명했을 때.. 그녀가 남긴 유산은 반 조각짜리 담요 한 장과 지갑에는 7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시신마저 해부하는데 쓰라고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았던 선교사.

 

*장례식은 광주 최초로 사회장으로 열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슬퍼했다. 운구는 이일학교 제자들이 맡았고, 그 뒤에는 양딸들과 아들, 수백명의 거지, 나병환자들이 따랐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목놓아 우는 그들의 통곡소리에.. 조객들은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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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 선교사가 1922년에 세운 광주 이일성경학교의 1930년 졸업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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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 선교사와 입양 아들 요셉

 

 

서서평 선교사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 54

 

1912~1934 22년간 한국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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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 가기 18년 전, 조선 땅에는 이미 성녀 서서평이 있었다.

 

 

서서평 간략사

 

19346,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다. 그녀가 남긴 건, 담요 반 장, 동전 7, 강냉이가루 2홉뿐이었다. 한 장 남았던 담요는, 반으로 찢어, 다리 밑 거지들과 나눴다. 시신도, 유언에 따라,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되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끌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다...

 

서서평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셰핑 Elizabeth Johanna Shepping 1880~1984은 광주기독병원 간호사였다.

 

1980년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어, 19123, 32세 나이로,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었다.

 

신분은 간호사였지만, 그녀의 사역은 간호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 성경 지식을 토대로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와 한일장신대 전신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 <조선여성절제회>, <여성전도회연합회>, <조선간호부회> 대한간호협회 전신, 등을 창설하여, 우리나라 교육과, 여성운동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겼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라도 일대의 나환자들과 걸인들을 돌보았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집에서 같이 살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살기를 즐겨하던 그녀는, 19346,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다. (54) 자신의 주검마저 병원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1934, 광주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나환자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를 외치며, 애도했다.

 

그녀는 지금 광주 양림동 108번지, 선교사묘원에 편안히 잠들어 있다. 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 가기 18년 전, 조선 땅에는 이미 성녀 서서평이 있었다.

 

한동안 잊혀졌던 그녀의 삶은, 이 땅에 첫발을 내 디딘지(1912) 100년을 맞아, 평전이 출판되면서, 재조명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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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양국주 저,

 

2012.03.17. 광주 기독간호대학 오웬기념각에서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서서평 평전 출판식>이 열렸다.

 

서서평이 활동했던 광주·전남은 193045만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만명, 걸인이 1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서평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를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이 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시대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서서평은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4만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 삶을 일깨웠다.

 

그는 한 나환우가, 역시 나환우였던 아내가 죽자 병든 자신이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버리려던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14명의 아이들을 양아들·양딸로 삼았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그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 버려진 어린이들을 돌보다 사망해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이다.

 

1930년대 미국 장로회는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으로 선정했다.

 

서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있던 좌우명을 보았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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