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08 00:15
● 반역의 역사, 저항의 역사 (17)
이인재 전도사가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있을 때 감옥 밖의 상황은 점차 종말(終末)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38년 신사참배 강요를 기점으로 더욱 강화된 일제의 황민화 정책이 창씨개명, 국민정신총동원을 거쳐 국민징용령(1939년), 학도동원령(1943년), 징병령(1944년), 정신대근무령(1944년)에 다다르게 되면서 식민지 수탈과 민족 말살은 그 최고조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 역시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39년 일본 제국의회에서 통과된 종교단체법을 계기로 모든 종교는 종교보국(宗敎報國)이라는 정책에 철저히 순응(順應)해야 하며 이에 반대하는 어떠한 행위 또한 용납되지 않았다. 모든 종교를 종파와 교파별로 단일 조직 하에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는 일본의 종교조직과 통합(統合)을 추구하였다. 정치적 통제가 편리하도록 교파를 통합하여 단일 교회를 만들려는 의도였다. 기독교의 일본화와 교파 합동이 일제의 기독교 정책의 핵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 대부분은 순응의 논리로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종교 정책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시기(時期)의 차이는 있지만 1938년에 이르러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한 기독교 각 교파 교회들은 신사참배를 공식으로 수용하는 결의를 하였다. 특히 장로교의 경우 1938년 9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지도부의 노골적인 친일 행각이 전개되었다. 1939년 9월 신의주 제2교회에서 회집한 장로교 제28회 총회에서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28회 회록, 1939년, 87~94쪽). 이것을 계기로 총회 안에 중앙상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장로교회의 헌법과 교리, 예식 등을 전면 재검토하여 맹목적이었던 구미(歐美)의존주의를 결연히 차버리고 기독교를 우리나라 국체에 맞는 일본적인 종교로 하여 그 내용을 근본적으로 혁신(매일신보, 1940년 4월 11일자 기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와 같은 일들은 결국 한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동시에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등 일본의 국민의례를 교회 의식에 적극 수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교회의 일본화(日本化)는 민족교회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종교 영역에서 이루어진 반민족적(反民族的) 행위였다.
교파 합동은 1938년 6월 일본기독교회(장로교) 의장인 도미타(富田滿)의 방한 때 논의되기 시작했고 1940년 일본 메소디스트교회(감리교) 감독 및 일본 기독교연맹 의장인 아베(阿部義宗) 의 방한을 계기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이루어진 이들 일본 교계 지도자들의 방한은 한국 교회에 교파통합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그 결과 1943년 1월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일본기독교회 대표들로 조선기독교합동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교파를 초월한 단일 혁신 교단 조직을 향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매일신보, 1943년 1월 26일자 기사). 그러나 추진 과정에서 구체적인 혁신안에 대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그리고 두 교회 안의 추진 세력 간의 의견 차이가 노출되어 처음 구상했던 대로 단일 교단을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장로교회는 1943년 5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1943년 8월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으로 각각 체제를 바꾸었다.
...조선에 있는 기독교 신도는 단결협력하여 동포의 정신작흥(精神作興)에 자(資)하고 일층(一層)전도(傳道)에 정진(精進)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보국(報國)의 성(誠)을 다 하기를 기(期)함.(조선기독교연합회 조직선언서 중, 1938년 7월 7일)
이로써 장로교와 감리교 양교파는 조선이라는 이름 대신 일본이름을 앞세워 교단을 개편함으로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일본 교회에 예속(隸屬)되었음을 밝힌 것이다. 같은 시기 성결교나 동아기독교(침례교), 안식교 등은 재림신앙(再臨信仰)을 이유로 강제 해산되는 비운(悲運)을 겪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남아 있는 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일본적 종교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발발(勃發)로 일본이 독일과 연맹을 맺게 되었다. 그렇게 됨으로 독일 나치 정권의 반(反) 유대주의 정책을 일본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성경에서 유대 역사를 담고 있는 구약성경 전체를 폐지했고, 신약에서도 유대적 생체가 짙은 성경(예를 들어 마태복음과 히브리서, 야고보서)은 읽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찬송가에서도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수행중인 전시체제와 천황 유일체제를 부정하는 찬송, 즉 평화나 재림, 만왕의 왕, 그리스도의 군대 등을 담은 찬송은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연성(鍊成)이란 이름으로 목회자들은 신궁(神宮) 건설현장에 동원되기도 하였고, 말 잘하고 똑똑하다는 목사들은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에 초청 강사가 되어 시국강연을 하러 다녀야 했다. 시국강연을 통해서 그들은 같은 말을 되풀이 하여야 했다.
영국과 미국이 우리 동양을 착취한 악업(惡業)을 남겼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동양에서 몰아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을 주축으로 해서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일에 온 국민이 총력을 다 하여야 합니다.
목사들은 일제가 시키는대로 나가서 배우처럼 활동을 하여야 했다.
그러니 이제 신사참배는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었다. 교회 예배당 안에는 일장기(日章旗)가 게양되었고 가미다나(信棚))라는 모형 신사가 설치되어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동방요배를 하게 했다. 이는 동쪽에 일본 천황이 있기 때문에 천황을 향하여 경배를 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황국신민 선서를 하게 했다.
우리는 황국 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봉사하자
일본 말로 이러한 맹세를 하게 한 것이다.
구약성경 에스겔 8장 16절,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 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 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양 태양에 경배하더라
하는 말씀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이런 일을 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 한 것인가?
이렇듯 한국교회는 완전히 마귀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두려운 일이 펼쳐진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당시 장로교는 부일협력으로 총회 연맹과 상치위원를 중심으로 전시물자 동원과 인력동원에 대하여 협력하였다. 급기야 1941년 8월 14일, 상치위원회는 전시체제 성명 및 소위 애국기(愛國機, 전투기) 헌납을 결의하고 그 이듬해인 1942년 2월 10일 일본 육해군에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7정분 대금인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하였다.(기독교신문, 1942,4,29 기사). 한편 감리교단에서도 1944년 교회를 통폐합한 돈으로 애국기를 헌납하자는 공문을 교회에 내려보냈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긴 하였으나 교단 연맹이 이에 충실히 협력하였기 때문에 그 피해는 막대하였다.
일제말기, 순응과 타협의 노선을 선택한 교회 지도자들은 반민족적이고 비신앙적인 오류를 범하며 다수의 교인들을 이끌고 있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신앙과 민족에 대한 반역의 역사였다. 한국 교회사에 실로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2. 저항의 역사
그러나 일제말기, 한국 교회사에는 이 같은 반역의 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는 다른 방향에서, 순응(順應)보다는 저항(抵抗)을 선택하면서 신앙과 민족 양심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택하였던 올곧은 신앙인들의 저항의 역사도 있었다. 비록 숫자로 보면 소수(小數)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저항의 역사가 있었기에 부끄러운 역사를 속죄(贖罪)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
1940년 당시 한국 개신교회 34만 교인(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1941년도 말 기독교인 통계 자료) 가운데 신사참배로 조사를 받은 교인이 5천 명(1.5%), 그 중에 순교를 각오하고 옥중 투쟁을 하고 있는 교인들이 2백 명(0.06%)에 이르렀다.(C. A. Clark, Home Letter, Oct.1, 1941.) 당시 한국 기독교 선교의 역사는 짧았다. 교세도 미약한 가운데 외부의 지원도 없었다. 오직 신앙의 힘만으로 순교 투쟁을 결심했던 옥중 성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국 교회는 크나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 밀양의 자랑스런 인물인 이인재 전도사가 있고, 한국 교회의 대표적 수난교회인 밀양마산교회가 있었다. 일제치하에서 가장 신사참배를 반대한 지역이 평안도와 경남인데, 이 두 지역의 고리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인재 전도사이다. 그는 평남과 경남을 오가며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허리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그가 늦게 예수를 믿었고, 늦게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가 평양신학교가 폐교되는 까닭에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의 믿음만은 뜨거웠다. 사랑의 원자탄의 저자이기도 한 안용준씨는 이인재 전도사를 일컬어 신앙의 투사라고 불렀다. 이제 그는 비록 평양형무소에 영어(囹圄)의 몸으로 옥고를 치루고는 있지만 옥 밖의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이 저항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밀양마산교회는 초대장로로 박수민 장로(1930년에 장로 장립)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박 장로는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바쳐 교회를 섬기는 훌륭한 신앙의 인물이었다. 당시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는 터라 밀양마산교회는 많은 핍박(逼迫)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수민 장로를 비롯해서 밀양마산교회 교우들은 일본 순사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같은 마을에 함께 사는 종적인 마을 주민들도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 해서 밀양마산교회 신도들을 향해 침을 뱉는가 하면 갖은 핍박을 가하였다.
하지만 밀양마산교회는 그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한편 박수민 장로는 자신의 자녀들을 신사참배 문제로 학교에 보내지 아니했고 아들 중 박치덕(후에 목사가 되었고, 1990년에는 고신교단 총회장을 역임함)은 일본 해군에 입대했으나 신사불참배로 일본 해군 형무소에 옥고를 치루었으나 2차대전이 끝나고 석방됐었는데, 옥중 생활이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이처럼 저항의 역사 한가운데 밀양마산교회가 서 있었다는 것은 우리 밀양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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