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문
선지자선교회
"오! 주여!

나로 하여금 당신의 낮아지신 것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은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늘의 보좌 위에서 천군과 천사와 하늘의 모든 영물과 천천만 성도에게서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던 만유의 주재로서 낮고 천한 사람이 되어 티끌 세상에 오셨나이다.

오시되 왕후 장상으로 금전옥루에 오시지 않고, 지극히 미천한 사람으로 말 구유에 오셨나이다.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세리와 창녀의 친구가 되셨고, 어린아이의 동무가 되셨고, 걸인과 문둥이의 벗이 되셨나이다. 마침내 벌거벗은 몸으로 강도의 틈에서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시고 음부에까지 내려가셨나이다.

오!
당신이 이같이 낮아지신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하오리까? 나는 나를 어디까지 낮추어야 당신 앞에서 합당하겠나이까? 당신이 제자의 발을 씻기셨으니 나는 문둥이의 발을 핥게 하여 주옵소서. 당신이 세리의 집에 들어가셨으니 나는 모든 사람의 발 앞에 짓밟히는 먼지와 티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 주여!
나는 아나이다. 당신의 무아의 역경에서 살기까지 겸손한 당신이었던 것을! 그러나 나의 속에는 여전히 나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좌정하실 자리에 이놈이 앉아 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받으실 영광과 찬송을 이놈이 받고자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남이 나를 대접함이 소홀하다 싶을 때에 이놈의 속에서 불평을 발하고 남이 나에게 후욕과 멸시를 가할 때에 이놈의 속에서 노를 발하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못 받으시던 관대와 환영을 받고자 하나이다. 당신은 그 지선 지성으로도 오히려 후욕과 침 뱉음과 뺨침을 받으셨는데 나는 무엇이건대 당신이 못 받으시던 칭찬과 영예를 받았나이까?

오! 주여!
나로 하여금 이 외람 된 오만에서 구원하여 주소서. 성신의 방망이로 '나'라는 놈을 마정방종으로 때려부수어 주시사 당신과 같이 무아의 경지에까지 내 마음을 비워 주옵소서.

오! 주여!
나의 의를 사모하여 마음이 갈급 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안전을 사모하여 마음이 불타지 않습니다. 나의 죄악을 위하여 재에 앉아 가슴을 치는 통회가 심각하지 못합니다. 나의 부족을 생각하고 항상 하고자 하는 정열이 강력하지 못합니다. 이는 분명히 내 마음이 비어있지 못한 증거요, 내 스스로 무던하다는 오만이외다.

주여!
당신의 얼굴 빛 아래 내 심령의 자태를 그대로 드러내시사 나로 하여금 애통하고 회개하게 하옵시며 내 신경을 긴장히하고 당신의 완전을 향하여 달음질하게 하옵소서.

오! 주여!
나는 당신의 겸손을 사모하옵고 당신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멘.


● 강제 해산된 금강산 수양관 집회

조선 교회가 당면한 신사참배라는 과제를 놓고 총회 산하의 목사, 선교사 등 200여명이 금강산 장로교 수양관에서 1935년 5월 1일부터 5일까지 수양회를 가졌다. 이 수양회 기간 중에 마태복음 3:1-13까지를 본문으로 하는 주기철 목사의 설교가 있었다.

제목은 '예언자의 권위'였다.

(1) 엘리야의 권위
오늘의 목사는 곧 선지자요, 예언자입니다. 우리는 여러 예언자들에게서 선지자의 권위를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엘리야에게서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북조 이스라엘 제7대 아합 왕 시대는 남조 여호사밧 때와 함께 부강하던 시대였습니다. 물질적 풍성은 정신적 부패를 가져왔습니다. 아합이 두로 왕의 딸 이세벨을 취하니 당대의 여걸이요, 열렬한 우상숭배자였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바알의 분별이 없어졌고, 도덕적으로 부패했으며 정치적으로 권력 계급이 횡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백성들을 견책하여 특히 왕가를 향하여 사정없이 공격하였습니다. 3년 6개월 간의 대한(大旱)을 선고했고, 갈멜산상에서 불이 내리도록 기도했고, 그리고 또 비가 쏟아지도록 기도했습니다.

불이 내리고 비가 쏟아지도록 기도하는 것도 놀랍지만 아합이 나봇의 포도 동산을 빼앗을 때 엘리야는 엄책했습니다.
"네가 남의 생명을 빼앗고 남의 산업을 빼앗았으니 너의 피도 나봇의 피와 같이 될 것이요. 네 집의 남자는 다 이 나봇의 피가 떨어진 자리에서 죽어 멸족되리라." 하고 저주를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예언인가? 과연 3년 만에 아합이 전사했고, 13년 만에 에후의 혁명군이 일어나서 나봇의 피가 떨어진 곳에 왕후 이세벨의 피도 떨어졌고, 아합 왕자 70인이 몰살당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권능, 선지자의 권위는 이러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바알도 없고 만능의 대왕 아합도 없고 하나님이 계실 뿐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엘리야의 신앙, 엘리야의 기도가 있으면 엘리야의 권능, 예언자의 권위가 설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의 권위는 과연 바로 서 있는가? 못 서 있는가?

(主: 여기까지 말할 때 일경은 아합은 천황을 암시하고 바알은 신사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분개하였으나 책잡을 수 없었다.)

(2)예레미야의 권위

예레미야는 유대 말년에 태어나서 약관 때부터 40여 년 간 유대는 망한다고 경고하다가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아나돗이란 제사장 촌에서 태어났으니 제사장의 아들로 당당히 제사장의 예복을 입고 교권자가 될 수 있었으나 예복 대신 베옷 입고 망하는 조국을 위해 일생을 울다가 순교하였습니다. 때는 신앙의 명조 요시야 왕이 40미만의 대정치가로서 므깃도에서 전사하니 온 나라는 눈물 골짜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왕의 세 아들 요호아하스와 여호하김과 시드기야가 다 망국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40여 년을 '나라가 망한다'고 외쳤고 그 다음에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예언한 것은 유대인으로는 참으로 못 할 말이었습니다. 이는 두말 없이 매국노요, 바벨론의 앞잡이가 됨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욕먹고 매맞고 갇힐 뿐 아니라 매일 죽음의 협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선지자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순교하기까지 외쳤습니다. '평안하다' '나라가 잘 되어간다'고 집권 당국과 시대에 아부하는 자는 많지만 바른말하는 자는 많지 못하였으니 예레미야 혼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외쳤던 것입니다. 여기에 예언자의 권위가 섰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사명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70년 후에는 회복된다'고 말한 뒤의 소망을 명백히 말하였습니다. '시대의 죄악을 직시'하고 '멸망의 경고' '장래의 소망'을 분명히 가르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요, 권위입니다.

예레미야는 마침내 민족주의자들에게 잡혀 애굽에 끌려가서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나라도 예레미야의 입장에 서 있지 않은가? 대중과 시대에 아부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외치는가?

(주: 여기가지 이르렀을 때 일경은 비위에 거슬려 하는 것 같았다.)

(3) 세례 요한의 권위

광야의 사람 세례 요한은 예수를 바로 증거 했고 예수의 길을 예비하여 무섭게 외쳤습니다.

1.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독사의 자식들아.
2. 너희는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냐? 악한 열매로 불탈 자들이다.
3. 너희는 곳간에 들어갈 알곡이냐? 지옥 불에 타질 쭉정이냐.

이렇게 외치는 요한은 임금이라 해서 할 말을 못하지는 않았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불의의 혼인을 한 헤롯 왕에게 대하여 '동생의 아내를 빼앗은 것은 모세 율법의 죄이니 못한다. 회개하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요한은 벌써 '일사각오'를 하였습니다.

예언자의 목숨은 음녀의 값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얼마나 악하고 음란한 세상인가? 오늘은 어떻습니까?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을 때 나단은 왕에게 직언하여 다윗은 위기 일발에서 돌이켰습니다. 영국의 죤 낙스는 가톨릭 여왕 메리에게 번번히 직언 할 때 메리는 낙스를 보기만 해도 떨었습니다. 낙스 앞에서 메리는 죽고 신교 여왕 엘리자베스의 황금시대가 되었습니다.

윔스 국회의 루터는 스페인 황제의 사절과 로마 법황의 사절과 독일의 제후들은 물론 당시의 대주교, 대학자들이 열석한 자리에 재판을 받으러 나갔습니다. 자기의 신앙을 굽히지 않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네 잘못된 저서를 취소하겠느냐?" 는 심문에 대하여 루터는 "내용은 성경대로 기록하였으니 일언반구도 취소할 수 없다." 고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생사 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요한도 일사 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 루터 역시 일사각오가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그런 일사각오로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 못하는가? 왜, 벙어리 개가되었는가? 오늘의 목사들도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순사 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主: 여기까지 듣고 있던 일경이 격노하여 "중지! 해산!" 하고 소리치며 호루라기를 불어댔다. 주 목사는 설교를 다 끝내지 못한 체 강단에서 끌려 내려졌고 그곳에 모여있던 200여명의 목사와 신도들은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 주기철 목사님의 목회 소신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산정현교회 취임 첫날 '세 가지 신앙'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이 설교에서 자기의 신앙노선을 분명히 밝히며 한국 교회에 다음 세 가지 신앙의 유형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 민족운동, 정치운동을 하기 위해 교회에 들어와 예수를 믿는 사람,

둘째: 인격을 높이며 도덕 생활을 하기 위해 믿는 사람.

셋째: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모시고 감사의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하여 교회에 나오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렇게 분류하며 "첫째와 둘째에 해당되는 신자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으니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없음으로 이제라도 이 자리에서 나가시오" 라고 했다는 것이다.


● 평양신학교 교육방침

요즘의 신학공부는 공부를 중심으로 하고 교회 봉사가 부수적인데 반해 그 무렵의 평양신학교 당국은 교회를 돌보는 여가 중에 신학공부를 하게 했던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한국 교회의 선교 정책의 일환이었고 교장 마포삼열의 교육 방침이기도 했다. 그래서 10년 이상 걸려 신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 순교자 주기철목사님의 설교문

1939년 2월 첫째 주일

나는 지난 7개월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특별히 다섯 가지 종목을 들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간 그 기도의 내용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성도들 앞에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도 모른다고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합니까?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열백번 죽음은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몸이 부셔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의 권세를 죽이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의 권세를 내 발 아래 밟게 하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는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테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리다.

둘째,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죽어 진다면 그래도 이길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 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형벌을 면하고 도리어 상을 준다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은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 십자가! 오직 내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 이름으로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 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 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셋째,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게는 팔십을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의무도 귀중하고 가장, 아비 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지 않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어머님이 나를 낳아 애지중지 키우시고 가르치신 은혜 태산같이 높습니다. 어머님을 봉양하지 못하고 잡혀 다니는 불효자의 신세, 어머님의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어머님이 금지옥엽으로 길러 주신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 맞아 상할 때, 내 어머님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꼬! 춘풍추우 비바람이 옥문에 뿌릴 때, 고요한 달빛이 철창에 새어들 때, 어머님생각 간절하여 눈물 뿌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며 하나님의 계명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하는 어머님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던 주님 심정 어떠 하셨을꼬? 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한 주님께 나도 내 어머님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도 주님의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될 줄 믿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악하고 험한 세상에 양떼를 두고 가는 이 내 마음 차마 못할 일이오나, 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께서 지켜 주실 줄을 믿사옵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우상 때문에 정절을 잃어 버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되는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 피할수가 있사오리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흐르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무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러분,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사이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에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이 설교는 주목사님이 의성 경찰서에서 7개월 간 죽음과도 같은 모진 고문을 당하다 풀려난 1939년 2월 첫째 주일, 임박한 당신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당신의 시무하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이후 다시1938년 10년 형을 선고받은 주기철 목사님은 투옥 6년째인 1944년,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마시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차가운 감방에서 옥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사참배를 인정해 우상숭배를 묵인했던 모든 한국교회와 달리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순교하신 주목사님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정통성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 진리의 파수꾼 주기철 목사
글:노남도 선교사(이스탄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A. 주기철 목사의 성장배경과 하나님 만남

“주기철 목사는(1897.11.25-1944.4.21)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아버지 주 현성과 모친 조재선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민경배, 순교자 주기철 목사 (서울 : 대한 기독교출판사, 1985) p.18.
아버지 주현성 씨는 44세가 되던 해에 주기철을 낳았고 1914년 8월에 입교하여 1915년 6월 세례를 받은 그해 62세에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1919년에 웅천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Ibid., p. 21.

주기철의 호는 소양, 아명은 기복이다. 맏형 기원이 1910년경 성서를 탐독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형을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가정은 당시 불신가정이었으나 기독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기철은 1910년 14세 되던 그해 12월 25일에 입교 문답을 마치고 교인이 되었다. 그가 사립 개통소학교를 졸업하자 이듬해 봄에 경상남도 창원에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이 무렵 그는 아명을 버리고 "기독교의 진리에 철저히 따른다."는 의미로 이름을 '기철'로 바꾸었다. “주기철이 입학하던 1913년에 고당 조만식 선생이 오산에 부임하였고 고당이 1915년에 교장직에 있었기 때문에 실상 주기철은 오산 재학 3년동안 고당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Ibid., p.40.
그는 오산 학교시절 남강 이승훈, 유영모, 조만식 등 훌륭한 은사들의 가르침을 받고 1916년 3월에 졸업하였다.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4월 24일에 설립되어 서울 종로 2가 YMCA회관에서 우선 개강하였다. 오산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그는 경제를 부흥시켜 민족을 위해 일해보고자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안질로 인해 1916년 할 수 없이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연희전문학교를 휴학하고 안질 치료를 위하여 부산과 마산까지 병원을 찾아다니며 노력했으나 그의 눈병은 더욱 악화되어 실의에 빠져 있을 때도 있었다. 그의 부모는 이런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는 그에게 새로운 힘을 얻게 하려고 결혼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가을에 믿음의 가정에서 자라 정신 여학교를 졸업한 안갑수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1919년에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했으며, 김해읍 교회를 시무하던 이기선 목사의 격려와 신앙지도를 받으면서 점차 기독교 신앙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기선 목사는 기철에게 영적인 영향을 많이 주었으며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6차례나 구속 당하였고 평양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던 목사로 해방 후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은 근신하라고 주장했던 목사이다. 기철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준 분들은 이기선 목사와 김익두 목사였다.“ Ibid., p.65.

주기철은 1919.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웅천 성내리 만세사건 행동책으로 참가하여 1개월간 경찰서에 구류 당하기도 하였다. 그후 1920년 5월 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친구들과 같이 김 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거듭나야 한다.” "성령을 받으라."는 새벽 설교에 감동받았고 한 번도 거듭난 체험을 하지 못한 자신을 회개하면서'중생하는 체험'을 하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는 성경 말씀을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날에는 더욱 귀하게 다가오면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는 새벽 통성기도 시간에 “주 예수여, 내 마음 속에 오시옵소서.” 하며 사모하고 기도드렸다. 이때 성령을 충만히 받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옛 길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었으며 이때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 그리고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아가기로 일생을 결단하였다. 그는 후일 자기의 성령 받고 소명 받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글로 남겨 놓았다.

“나는 삼일옥중에서 주님의 소명을 받을 때에 우리 민족지도자들에게 받은 편협한 민족주의를 버리고 바울의 민족애를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내 청춘에 생명으로 사수하던 민족 운동을 꺾어버리고 일본 정권하에서라도 내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나의 독립운동을 삼았다. 이는 심야 옥중에 내 주님 앞에 눈물로 맺은 서원이었다. 일찍 성제에게 민족주의를 배울 때에 예수는 민족주의의 전형 같았고,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를 배울 때에 예수는 세계주의 선구자 같더니, 십자가 공덕으로 구원 얻고 보니 예수는 세계주의자도 아니요, 사회주의자도 아니요, 민족주의자도 아니요, 예수는 만민의 완전한 구주이시다.” Ibid., p.65.

그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는 1921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평양신학은 그 당시 잘 정비되어 교수진도 훌륭한 분들이 많았고 학교 건물을 새롭게 세울 수 있도록 미국 시카고의 멕코믹 여사로부터 3만 5천 불이 도착하여 그해 9월에 완공할 만큼 정비된 상태였다. 그는 재학기간동안 경남 양산읍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1925년에 졸업하였다.

B. 주기철 목사의 목회와 옥중 생활

그가 졸업한 후 한 달이 지나자 "1925년 10월 15일 남산 중턱에 신사참배를 위하여 5년 6개월 동안 156만원(약80만불)이상 들인 조선 신궁이 세워졌다." Ibid., p.74.
신사참배는 일본이 개국 신으로 섬기는 천조대신에게 절하는 것인데 일본은 그가 우주를 통치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를 아마데라스 오미까미라고 하며 그를 비롯하여, 역대 일본 천황과 무사들, 공신들과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군인의 영을 사당에 비치하고 숭배하는 우상숭배이다. 그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그 앞에 절을 하면서 일본은 우리의 민족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화 시키려고 한 것이다.
주 목사는 일본이 천황을 신성화하고 그를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일에 대해 기독교적 신앙으로 무장하고 도전한 목사였다. 일본측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애국적인 경의의 표현일 뿐이라고 하였지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임이 분명하였다. 그가 순교한 것은 신사참배가 우상숭배이며,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십계명의 제 1.2 계명에 어긋난다는 신앙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항일투사나 민족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신앙의 파수꾼이었다.

“주 목사는1925년 12월 30일에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1926년 1월 10일 위임목사가 되었다. 그가 시무하는 동안 경남 노회에 신사참배 거절안을 제출하여 그것이 가결되었다. 그러므로 주 목사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목회시작부터 시작된 그의 신앙이었다.” Ibid., pp.78-90.

6년간 시무하였던 초량교회에서 그는 주일학교와 성경연구반을 조직하여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특히 목회활동 이외에도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그는 1931년 6월 초량교회에 사의를 표명하고 7월에 마산 문창교회에 부임한 후 먼저 주일학교 강당을 신축하고 성경교육을 강화시켰다. 이 교회에서 목회할 때에는 당시 기존 교회를 비방하며 공격하던 신비주의와 무교회주의 운동에 대해서 엄격하게 다스렸다. 그는 1932년에 경남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일하면서 평양신학교의 박 형룡 목사를 초빙하여 교역자 수양회를 개최하면서 무교회주의를 막고자 노력했다. 이러던 중 1933년 5월 34세의 안 갑수 사모가 갑자기 사망하였고 이듬해에는 부친이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주 목사는 점차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어 1935년 5월 금강산에서 장로교 총회 주최의 목사수양회에서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이때 그는 예언자들은 대중과 시대에 아부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죽음을 각오하고 헤롯왕의 불의를 고발했던 세례 요한을 본받아 일본 천황을 신으로 섬기게 하려는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때 참관 경관들에 의해 그의 설교는 중지되었고 모임은 해산되어야만 했다. 이때부터 그는 일제의 주요 사찰대상이 되었다.

1936년 8월 제7대 조선 총독 미나미지로가 부임하면서부터 신사참배는 본격적으로 감행되었고 곳곳에서 반대가 일어났다. 그러자 총독부에서는 신사참배는 단순한 국가의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홍보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평양에서는 교회의 교세가 대단하여 주일날에는 모든 상가들이 문을 닫고 교회 종소리가 동서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때였다.
이러한 평양에 일본 총독부에 의한 우상숭배가 강요되자 예언자적 자세로 주목사는 목회 초기부터 시작했던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계속해 나아갔다. 이렇게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던 1936년 7월 40세의 주 목사가 산정현 교회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C. 주기철 목사의 소명을 향한 생애

주 목사의 엄격한 보수주의적 신앙으로 인해 산정현 교회는 복음적 신앙과 순교적 신앙의 교회로 성장해 갔다. 그는 참된 신앙이란 중생하여 그리스도의 속죄를 중심에 두고, 감사의 생활을 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부임한 산정현 교회는 1937년 3월 7일 교회건축에 들어가 9월 5일에 입당하여 은혜로운 교회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탄은 교활한 손길을 뻗쳐오고 있었다. 당시 평양에는 ’기독교친목회‘ 라는 어용단체가 있어서 주 목사 설교내용과 교인들의 동태가 일일이 경찰에 보고되었다. 성갑식, op.cit., p.953.

1938년 2월 8일 산정현 교회 헌당예배에서 주 목사는 ’일사각오‘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예수를 위하여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부활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였다.
1938년 2월 총독부는 신사참배 강요를 위한 타격 목표를 전국에서 교세가 제일 강하기로 유명한 평북노회에 두고 총공세를 펴왔다. 당시 평북 노회 노회장은 일본 경찰 출신 목사 김 일선이었는데 그는 임시 노회를 소집하여 신사참배를 전격적으로 가결하였다. 한편 6월 30일 평양에 도착한 일본기독교계의 대표인 도미다가 간담회에서 "신사는 국가의례로써 종교가 아니므로 참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이에 주 목사는 차분한 논리로 기독교 신학자들의 저작을 언급하면서 신사참배는 제 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논박했다.

한국교회를 덮쳐오는 어두움은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1938년 6월 시국이 어지러운 가운데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매우 암담했다. 전국 24개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노회가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일본은 총회를 앞두고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목사들은 예비 검속을 시켜 총대가 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물론 주 목사도 1938년 8월 의성경찰서로 압송하여 7개월간 가두어두었다.
또한 1938년 9월 제27회 조선장로회 총회가 열릴 때는 미리 총회 장소를 점검하고 총대원들 사이사이에 일본 경찰들을 앉혀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였다. 결국 1938년 9월 10일 10시 30분 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결의하게 되었다.
주 목사는 마지막 양심의 보루로 남았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가결하자 일사각오의 결심을 하였다.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듯한 종말의식이 주 목사의 생각을 압도해 가고 있었다. 그는 사태의 진전이 여러모로 심상치 않게 느껴지자, 이제 비로소 주의 제단에 몸을 바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욕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했느냐 물으시면 내 무슨 말로 대답하오리까. 주님 나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일제는 주 목사를 의성경찰서에 7개월간 가두어 두었다가 혐의가 없다고 1939년 2월 4일 석방하였다. 그는 2월 5일 주일 설교를 하면서 ‘5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결단의 설교를 하였다. 일제는 주목사가 총회결의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목사파면의 위협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 목사는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켜나갔다. 결국 일본은 1939년 9월 주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으로부터 해임시키고자 제3차 검속을 하였고 당시 평북 노회장 김 일선은 1939년 12월 19일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주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하였다.
일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1940년 3월 24일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거대한 상징으로 여겨지던 산정현교회를 폐쇄할 것을 노회 임원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행동하지 않고 노회 임원들을 시켜 교회 문에 못을 박게 하고 교인들을 시켜 주 목사 가정을 산정현 교회의 목사관 사택에서 추방하게 하였다. 일제는 1940년 4월 주 목사를 가석방시켜 목사관에서 붸겨나 이사한 육로리 셋집으로 돌아와 부인과 자녀들을 보게 하며 그를 변심시키려 하였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주님을 향한 각오를 더욱 굳게 할 뿐이었다. 주 목사의 아내 오정모 사모 또한 “여보, 승리해야 하오. 당신이 신사에 절을 하면 내 남편이 이니요.”하면서 오히려 그에게 새 힘을 주었다. 이에 주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 대신에 내 불쌍한 어머니를 잘 모셔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가면 내 조선교회 위해 기도하리다.”그해 7월 그는 다섯 번째 검속되어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이란 죄목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후 평양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고문과 형편없는 음식,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달려드는 모기와 빈대들로 시달리다가 육신의 한계가 찾아왔다.

형무소에서 2년 8개월 동안 몸의 아픔과 고난으로 회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이들은 1944년 4월 13일 그를 병감으로 옮겼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 사모와 마지막 면회한 다음날인 21일 밤, 병감으로 옮긴지 8일 만에 주 목사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한편 그와 함께 투옥되었던 안이숙 여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서전을 통해 주 목사의 죽음은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일제 측의 독살이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의 장례식은 4월25일 평양 고등보통학교 정문 앞 길가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평양 돌박산의 기독교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렇듯 일본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속속들이 잡아들이고 모진 매와 고난을 가하면서 우리나라를 일본화 하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믿음의 선배들인 최봉석, 최상림, 이현속, 박관준 등은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진리에 서서 고난당하다가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 당하였고 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이광록, 안이숙, 손명복, 조수옥, 최덕지 , 손양원 등은 해방이 된 다음 8월 17일에 출옥하였다.

주 목사와 순교자들은 자신의 신앙이 결국 죽음을 초래할 줄 알았지만 이를 참고 영광스럽게 받아들인 신앙인들이었다. 진리의 좁고 험한 길을 오직 믿음의 결단으로 걸어갔던 순결한 주님의 종들이었다. 한국교회가 오늘 이처럼 부흥하고 발전한 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듯 생명을 걸고 순교한 그 믿음의 토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우리 한국교회가 성장하려면 오늘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누가 이런 토양이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