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석 목사님

 choi.jpg 선지자선교회

 

출생일 : 1869. 01. 07

순교일 : 1944. 04. 15

평양신학교 졸업

1907년 벽동교회 조사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

"예수 천당"으로 유명한 일명 최권능목사로 더 알려진 유명한 목사 최봉석은 186917일 평양에서 최준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평양의 강동현 미곡창장으로 재직했고, 그는 16세까지 구학문을 익히다가 185년 평양감영의 통인으로 발탁이 되어 공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공직수행 중 국고손실로 귀양을 가있는 사이에 아내의 산후조리로 의원이었던 삭주교회 배유계 영수를 찾았을 때에 "예수믿고 회개하여 새사람 되어야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의 머리에서 '회개'라는 말이 떠나지 않고 있던 중 재산 한푼 없는 거지 행색으로 잠시 평양 본가로 돌아왔다가 감리교 노불선교사를 만나 회심하고 평양뿐 아니라 상주까지 내려가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처가에서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여보 어찌 천륜을 이렇게 매정하게 끊을 수 있겠오 다시 한번 생각합시다"하는 최봉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두 아들을 하나씩 맡기로 하고 헤어지면서도 그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더욱 예수에 미쳐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었다.

1907년 최봉석의 나이 38세에 벽동교회 조사가 되었다. 최봉석의 목회는 그 성격만큼이나 고집스러웠다. 교인들의 담뱃대를 모아 꺾어버리고, 첩 있는 사람은 원입을 못하게 했고 성수주일 못하면 세례를 불허하고 한달 결석이면 책벌하였고, 수상제물 금지, 불신영혼 엄금, 등 엄격하기만 했다.

신학교를 7년 다녔는데도 유급이 되자 교수들을 찾아가 기도하자고 해놓고 "교수님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졸업장을 주어 목사가 딜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고 아멘 시키고 졸업장을 받았다.

1913년 만주 파송 전도목사로 14년간 만주에서 고독과 배고픔 모진 배척과 싸우며 전도에 전념해 28개 교회를 개척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14년 만에 평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외치는 "예수, 천당"소리는 평양의 새벽을 깨웠고 전도 못하는 교역자들을 '벙어리' '송장'이란 말을 거침없이 했다.

1938년 신사참배결의에 "총회는 사탄의 회로 전락했다"고 반대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3951570세에 6년간의 긴 옥고가 시작되었다.

일경은 그를 세 가지 죄목 1. 항일사상 선동 국체문란 2. 일본천황 무시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자. 3. 선교사를 통한 미국비밀공작원으로 몰려 두 차례에 걸쳐 무려 6년의 옥고를 치루게 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한 듯 40일 금식기도에 도입했다. 의사들의 만류에도 40일 금식을 마치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미 눈동자가 풀어져 있었고, 병원에서 5일간 버티다가 1944415일 오후 1"하늘에서 전보가 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 하신다"며 찬송 289(고생과 수고 다 지나간 후)찬송을 가족들과 함께 부르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했으니 그의 나이 75세였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