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18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글: 박영창목사(박관준 장로의 아들)
1 부 하늘의 비밀
1 님에게 바친 피와 살
나의 아버지(박관준, 1875-1945)는 1875년 4월 13일, 부호가 많기로 이름난 이 고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인 박치환 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형들이 모두 한두 살 때 사망해서 아버지는 자연히 외동아들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그 많은 재산을 독자가 된 아버지가 모두 독차지하게 되었다.
평안북도 박천 돌찬이벌에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30리나 되는 논이 있었고, 서성과 화평과 문자동에는 여러 대에 걸쳐 물려받은 넓은 가대의 논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결혼한 지 5년만인 1894년에 갑오난리라는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만주 대륙에서는 청병들이 이 고요한 한반도로 침입해 들어왔고, 또 섬나라인 일본에서는 왜병들이 이 강산에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는 열강의 전쟁터가 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살벌한 병란 속에서 평안북도 덕천으로 피난길에 오른 어머니는 임신 8개월만에 사산하였고, 황급히 피난을 하느라고 뒤채 창고에 가득히 쌓아 두었던 당시의 화폐인 엽전은 송두리째 도적을 맞았다. 그리고 대대로 내려오던 값진 가재 도구까지 몽땅 잃어버려 남은 재산이라고는 토지밖에 없었다.
이같이 막대한 손재를 입은 젊은 호주는 피난 생활에서 귀향을 한 뒤 처음으로 괴로운 생활 고통과 험악하고 각박한 세상 물정의 쓰라림을 겪어야만 했다. 외동아들인 데다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또 4년 뒤인 스물한 살 때 사랑하는 어머니마저 여읜 아버지는 흘몸으로 외로운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원래 부잣집에서 귀여움만 받고 애지중지 소중하게 자라났지만 퍽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집안의 윗어른이 다 돌아가시고 안 계시자 마음내키는 대로 자유 분방한 생활로 세월 보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평양 다음 간다는 색향인 평북 강계 고을을 찾아가서 돈을 물 쓰듯 하며 명기를 상대로 질탕한 나날을 2년 간이나 보냈다.
잠이 든 어머니는 별안간 잠결에 이 같은 소리를 들었다.
“박관준의 아내야, 나오너라. 오래지 않아서 닭이 울 터이니 네 남편을 구할 약은 네 종아리에 있다.”
높은 고함소리였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아직 창문 밖에는 달빛만이 빛나고 있었다.
“여보, 거기 누구 없소? 목이 타니 빨리 물 좀 주오.”
이것을 기회로 어머니는 재빨리 단지 속 피에 참기름을 조금 섞어 사발에 쏟아서 아버지의 입에 갖다 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 녹용을 졸인 탕약이 좀 남은 게 있으니 어서 마셔요.” 어머니는 그것이 피인 줄 모르도록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마시기를 권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돌아누워서 힘없이 눈을 감은 채 사발을 받아 피를 꿀걱꿀걱 들이마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욱욱 하고 입을 다시더니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여보, 무엇이 걸핏 목에 넘어갔으니 그게 무엇이요?” 그것은 사실 허벅다리의 작은 살점이 목에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태연히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녹용을 졸인 탕약이니까 아마 건더기가 넘어간 게지요. 자, 참기름을 한 번 더 잡수세요.”
“무슨 일이야요? 울긴 왜 우세요?”
“동생은 아직도 시치미를 떼는가? 왜 다리를 잘 못 쓰지?”
“그런 말씀 누구에게도 절대 마세요.”
이 사실이 벌써 시누이에게 알려지게 되어 어머니는 퍽이나 당황했다. 그 뒤 시누이는 오빠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고, 놀란 아버지는 어머니를 불렀다.
“여보, 아니 그게 무슨 짓이요? 약이면 약이나 쓸 것이지 칼로 살을 베다니 그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소? 어디 그 상처를 좀 봅시다.”
“괜찮아요. 그런 걸 봐서 뭘 해요?”
어머니는 아픈 다리를 끌로 부엌으로 피했다.
붉은 선혈을 옆에 놓여 있는 사기 장종지에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것을 치마 속에 감추어 가지고 사랑방으로 건너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계신 외조부님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몇 모금 고르륵 고르륵 하며 피가 인후를 통과하자 까무라쳤던 외조부님은 “휴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이때 방안에 같이 앉아 있었던 동네 노인들은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무슨 약을 떠 넣는 줄로만 알았다가 기절했던 사람이 갑자기 생기를 찾아 숨을 내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환자의 입에서 핏방울이 내어 뿜기고 어머니의 횐 옷자락이 붉게 물들여진 것을 보자 더욱 놀랐다.
“저런! 이댁 규수가 또 단지를 하였나 보군 그래.”
“뭐? 저런 변 보았나. 에그 쯧쯧….”
“참 효녀야 효녀. 이럴 수가 있나.”
노인들은 모두 눈이 둥그래져서 찬탄을 마지않았다. 모처럼 남모르게 결행한 이 일이 그만 동리 노인들에게 알려지자 어머니는 부끄러워서 안방으로 황망히 뛰어들어갔다.
이 소문은 온 시내에 퍼졌고, 관청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경성부 조선 통감부에 보고하여 조선 통감 제33대 데라우찌 통감으로부터 열녀와 효녀의 정문과 상금이 아울러 내려졌다. 열녀와 효녀를 겸해서 정문이 내려진 이는 드문 일이었다.
2 분수령에 선 젊은이
우리나라에 기독교 신교가 들어온 것은 1873년부터 만주에 주재하던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사 로스 목사를 통해서 서상윤 씨가 최초로 세례를 받고 들어온 것이 그 시초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교가 이 땅에 정식으로 전래된 것은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되고 2년 후인 갑신년에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 씨 부처가 최초로 제물포(인천)에 상륙한 것을 시발점으로 삼는다.
“사랑하는 형님, 예수를 우리 구주로 믿고 앞으로 우리같이 천당 갑시다.”
선교사들은 퍽 유창한 한국말로 전도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아서 응수를 아니할 수 없었다.
“글쎄요. 고마운 말씀이오마는 내가 믿는 석가모니는 인도국 정반왕의 태자로서 부귀 영화를 다 버리고 설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성불이 되었소. 천당 말씀이 나왔기에 말하는데, 48종의 소원으로 이루어진 극락 세계가 우리 불교에 있소. 나는 불도의 진리를 통해서 왕생 극락할 수 있는데 하필 서양 종교를 동양인이 믿을 필요가 없지 않겠소. 아예 그런 말은 나에겐 그만두시오.”
“오 형님, 그것은 잘 모르는 말씀이오. 성경에 쓰여 있는 천국은 참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이 성경은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생명 말씀책이오.”
“내가 그 성경을 보나마나, 그 한 권 가지고는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의 유교 서적이나 팔만대장경의 불교 경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니 그런 말 마시오.”
3 새 출발
그것은 당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완전히 승리한 1905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서재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공중에서 높은 음성이 들려왔다.
“절벽 유위면 혈벽입하라!”
소스라쳐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사람의 인기척은 없었다. 놀라움과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면서 그는 ‘이것이 영계의 계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와 붓을 꺼내서 방금 들은 그 명령을 한문자로 즉석에서 옮겨 보았다.
“絶壁 唯危면 血壁立하라!”
그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절벽’은 곧 그의 방탕한 생활이 절벽과 같이 위험한 생활이란 뜻이다. 그러면 이 같은 생활이 위험하니 다른 방향에 옮겨서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혈벽’의 뜻은 곧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드디어 친구 백낙연과 같이 서울에 올라가서 남보다 먼저 삭발을 하고 돌아왔다. 당시는 “몸과 살(피부)과 모발은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 이것을 상하지 않은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라고 하는 공자의 유교사상 때문에 삭발을 하면 어버이의 뜻을 거스르는 불효의 행동이라고 하여 이 나라 백성들은 절대로 삭발을 하지 않는 때였다.
바로 이 무렵 우리나라는 일제가 일방적으로 강행 체결한 을사보호조약으로 반도 강산이 온통 비통 속에 잠겨 있던 때였다(1905년). 그리고 일방적인 처사로 일본과 맺어진 조약의 허위성을 폭로하기 위해서 화란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절, 이준, 이위종을 밀파했던 때였다(1907년).
그 뒤 3년 후인 1910년에는 경술국치 한일합방이 체결되었다. 이때의 중대한 정치적 사건으로는 이등박문이 조선 초대 통감으로 와서 조선을 통치하게 된 것과 광무 황제(고종)가 퇴위한 일, 또 이등박문이 만주 하르빈 역두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살해당한 일, 그리고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된 것이었다.
1912년, 아버지는 격동하는 새 시대에 적응하는 새로운 직업을 가지기 위해 백낙연과 함께 다시 서울로 올라가서 서양 의학을 삼년 간 공부했다. 그 보람이 있어 사이또 조선 총독부로부터 개업의사 면허를 얻었다. 당시 전국 대도시에는 양약 전문 의원(병원)이 설치되었으나 아직 지방의 소도시에는 양약을 취급하는 의원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돌아올 때는 ‘굴뚝 바지’라는 양복과 ‘유성기’라는 축음기까지 사 가지고 와서 온 동리의 화제를 모았다. 이 고을 유사 이래로 처음 축음기 소리를 들은 동리 아낙네와 처녀들은 남자들이 앉아 있는 사랑방 안에는 들어갈 수 없어 모두 부엌에 몰려들었는데, 초만원을 이루어서 부뚜막의 솥을 빠뜨려 놓는 소동까지 벌였다.
그 뒤 아버지는 다각도로 활동을 해서 이곳에 우편소까지 처음으로 설립했다. 그리고 각 부락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며 열심히 전도한 결과 많은 신자들을 얻었다. 그때 산기슭에 있는 서재 건물 한 채를 사재 오백 냥을 들여 사서 이 지방 최초로 교회당을 창설했다. 주일마다 예배를 인도하고 직접 자신이 설교도 했다.
4 사흘만에 살아난 소년
새벽 다섯 시경에 친구 한사람이 숙소에 찾아와서 자기 동생이 촌충이 있으니 약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졸리는 눈을 부비며 왕진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온 면마월기사 25g을 꺼내서 캅셀에 쏟아 넣어 몇 개를 친구에게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귀가한 날 안주 개업처로 급보가 날아왔는데 아버지가 지어준 약을 먹고 아이가 까무러쳐 죽었다는 통지였다.
아버지는 황급히 왕진 가방 안을 검사해 보고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가방 속에는 면마월기사 약병과 모양과 색깔마저 흡사한 극약인 낭탕월기사 25g 약병이 바뀌어 들어 있지 않은가. 이것을 뒤늦게야 발견하게 된 순간, 아버지는 앞이 캄캄해졌다. 너무도 충격적인 놀라움에 안주읍 공의로 있는 친구 홍 의사에게 달려가 모든 전말을 얘기했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수심 어린 얼굴빛으로 힘없이 대답했다.
“형님, 이젠 그 아이의 목숨을 구할 길이 없습니다. 면마월기사로서는 적량이나 낭탕월기사로서는 치사량의 10회분을 한꺼번에 먹인 셈이니, 이젠 ‘성복날에 약공론’ 이란 이것을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형님, 큰일났습니다. 어찌 하겠소? 큰 염려입니다.”
“선생님, 제 동생 완석이가 그 약을 먹고 얼굴이 먹장같이 검어지고 복통을 하다 거꾸러져 죽어서 온 집안이 운명으로 단념하고 3일만에 장례식을 하려고 하던 참인데, 돌연히 숨을 다시 내쉬고 살아나서 온 가족과 동리 사람들이 모두 놀라 기뻐하고 있사오니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정신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이같이 놀라운 일은 선생님께서 저를 평소에 극진히 사랑해 주시던 공덕인가 봅니다.”
아버지는 칠십 리 밖에서 온 편지를 읽고 즉석에서 안주 중앙 교회 최 목사의 허락을 받아 수백 명의 교인들 앞에서 이 놀라운 사실을 간증했다. 그리하여 많은 교우들에게 기쁨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아버지는 이때의 일을 기념하여 자작시를 지어 읊으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만세반석 상제신하니
임위무구 지도력이라
(만세반석의 하나님을 내가 믿으니 위기에 직면해서도 두려움이 없음은 믿음의 힘인가 하노라).
5 무의촌으로
“너무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아 닭 우는 소리만 세면서 누워 있는데 방금 공중에서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라’는 음성이 들려 오지 않겠어요? 그래서 무슨 말씀이 있는가 보려구 그러지요. 참 신기한 일도 다 있어요.”
아버지도 긴장해서 어머니 옆으로 다가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디 무슨 말씀인지 찾아봅시다.”
등잔의 심지를 밝히며 지시한 대목을 찾아 읽었다. 과연 그 말씀은 크나큰 위안의 말씀이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성경 말씀은 예수께서 가룟 유다라는 제자에게 배반당해 로마병정들에게 잡혀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열한 제자들이 불안해서 근심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위안의 말씀으로 주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방이 너무 차서 한잠도 못 잔 사실을 들은 뒤에 이같이 말했다.
이번에 새로 정한 이주처는 평안북도 구성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당시 가장 유명한 금광 지대였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광산가와 덕대들이 전국에서 모인 곳이다. 이곳 구성 조악동에서 아버지는 다시 의원을 개업하고, 담임 목사가 없는 구성 교회를 전담해서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
아버지는 이곳에 오자마자 이 지방에서 제일 유력한 인사에게 전도를 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듣자니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광산왕인 최창학씨의 고문인 조동일 씨가 당지에서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지방 유지들에게 “어떤 점에서 그가 대표적 인물입니까?” 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조 씨를 이렇게 소개하였다.
“첫째, 조 선생은 풍채가 뛰어나지요. 그 위에 법률을 전공한 법률가이고, 신구 학문의 실력이 많은 데다가 웅변가이며 사교가입니다. 게다가 주색잡기에도 명수이고 보니 가위 당대의 호걸 남아지요.”
6 하늘의 정원
이처럼 어머니가 슬픈 감회 속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별안간 방안 가득 안개와 구름이 뽀얗게 한두 자 위로 덮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누워 있는 머리 위에 백옥과 같은 횐 손 한 쌍이 나타나고 이어서 가슴과 발 위에도 각각 손 한 쌍이 나타나 공중에서 손이 움직이며 안수하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처음에 ‘아마도 우리 주인이 친구 의사 두 분을 청해다가 나를 수술하려는 것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횐 구름에 싸여서 얼굴은 분간할 수 없고 횐 손 여섯 개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방안에 내려 덮인 구름과 손을 향해 말을 건넸다.
“여보세요. 나의 상처를 고치려면 어떻게 해야 낫겠어요?”
그랬더니 횐 구름 속에서 명백한 음성으로 “삼십팔도만 주무르면 네 병이 다 나으리라” 하는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들렸다.
7 독수리의 꿈
이때 나는 일제하일망정 교회 청년 운동을 규모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 의원의 약제사인 송명석 씨, 치과 의사 김광욱 씨와 상의하여 기천읍 교회 면려 청년회의 제복을 제정했다. 남자 청년회원 일동은 이 유니폼을 의무적으로 착용하기로 했다. 당시 이같이 유니폼 착용을 실시한 교회 청년회는 우리뿐이었다.
카키색 더블코트에 띠를 띠게 하였고 검은 나비 넥타이를 매고 양복바지 아래에는 반드시 현재 우리나라 해군용과 꼭같은 백색 케이돌을 치게 했다. 그리고 은으로 C. E(Christian Endeavour)의 약자를 크게 배지로 만들어 상의 깃에 달고 왼편 팔뚝에는 붉은 줄을 세 개 둘렀다. 이는 삼위일체인 성삼위 하나님께서 삼천리 금수강산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상징했다. 은 배지 밑에도 붉은 실로 삼선을 수놓았으며 보이스카우트식의 제모를 썼다. 이같이 위세 늠름한 군복 같은 제복을 입고 시내와 농촌 어디나 동원하여 계몽 운동과 개척 전도를 개시했다. 각종 관악기를 사들여서 처음으로 브라스밴드를 만들기도 했고, 코넷, 바리톤, 슬라잇, 클라리넷, 북, 양고 등을 갖추어서 훌륭한 면려 청년회 관악단을 창설하기도 했다.
교회가 없는 농촌에 가서 군대용 신호 나팔을 불면 농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러면 우리 청년회원들은 넓은 뜰에 멍석을 펴놓고 예배를 겸한 강연회를 열었다. 달마다 교회에서 월례회와 헌신 예배를 드리고, 농촌에 가서는 나를 포함해서 두세 명의 임원이 합동 설교를 했다.
8 죽음의 예언
“내가 삼 일 후인 금요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때 교회의 종을 쳐서 시내 모든 교우들에게 나의 임종을 알려주십시오. 또 이튿날인 토요일에는 각 곳에 전부 부고를 내게 하십시오.”
전대미문의 놀라운 예언이었다. 이 말을 하고 나서부터 그는 약을 일체 거절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후 예배당에 업혀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자신에게 다가올 임종의 환상이 나타나는 듯 고요히 음성을 가다듬어 가면서 찬송을 계속 불렀다.
“여러분, 자리를 모두 비키시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나를 천국에 데려가려고 지금 천군 천사들이 나를 향해 내려옵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아무런 근심스런 빛이 없이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 과연 이토록 신기한 일이 현대에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때는 1933년 8월 13일 오후 2시 정각이었다. 그의 얼굴은 광채가 나고 미소까지 띠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앉았던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즉 김응삼 장로, 손정권 장로, 최준태 장로, 강기은 장로, 이호철 집사, 최윤섭 집사, 채기은 씨, 이봉섭 씨, 송명석 씨, 손창현씨, 이희태 씨, 나의 어머니와 예벽해 권사, 윤 권사, 그리고 나와 문밖에 모여든 수많은 교우들은 청천벽력같이 일어난 이 놀라운 사실에 모두 아연 실색할 뿐 입이 막혀 말이 없었다.
이날 장례식에 한 가지 일반인의 시선을 끈 것은, 개천읍의 일본인 경찰서장이 전 경찰서원을 대표하여 흑색 휘장을 붙인 십여 명의 정복 경관을 동원해서 커다란 조위용 꽃다발까지 가지고 장례식에 참석한 일이다. 그들도 이같이 신비스러운 소문을 듣고 일면 놀랍기도 하고 호기심도 나고, 또 군중이 많이 모이니까 보안 책임상 경호를 겸해서 참가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황 목사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관심이 컸던 것이다. 부고도 못 받은 처지에 더구나 교회 목사 장례식에 정복의 경찰대가 일본인 서장 인솔하에 참가했다는 사례는 전국 어느 도시 어느 교회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게다가 덕천이나 안주읍 등지에서까지 안주 노회 소속의 교계 지도자와 명사들이 참석했다.
“오호라, 현세는 여관이요, 인생은 과객이라. 일래일거는 인지상도이매 언제 어느 때나 하나님의 명령이시면 거역하고 안 떠날 인간이 있으리오마는, 우리 겨레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영적 사역자요, 열렬 청년 지도자이신 고 황구학 목사의 흘연한 임종은 그의 예언한 바와 같이 너무도 정확하고 너무도 신비하고 너무도 애통한 최후였도다. 오오 건지산아, 눈이 있으면 이 세기적인 기적의 사실을 바라보고 송림 속의 산새들에게 전해 주고 남천강아, 네가 황해에 흘러 들어가거든 이 초자연의 경이적 사실을 대양의 어족들에게 전하여 다오!”
9 평원리의 상록수
특히 내가 처음 이 동리에 와서 놀란 것은 소년 소녀들이 매일같이 거리와 밭과 들에서 소년 소녀들이 술꾼들이 부르는 노랫가락을 소리 높여 부르는 일이었다. 나는 이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 아팠다. 우리나라의 새싹인 어린이들이 하필 절망적이고 퇴폐적인 노래만을 불러야하는가 하여 마음이 우울했다. 전국 경향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조선일보사 주최의 ‘브나로드 운동’에 호응하여 나는 한글 보급을 촉진시키는 동시에 이 동리 백여 명의 아동들의 입에서 수심가와 어른들의 노랫가락을 일소시킬 것을 결심했다.
우선 하루 저녁, 이 동리의 유지 청년들을 십여 명 초대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말을 역설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간곡히 호소했다.
“훌륭한 선조들이 물려주신 한글의 혜택부터 먼저 입어야 하겠습니다. 찬송가와 성경을 우선 읽을 수 있도록 눈뜬장님인 문맹자에게 글을 가르쳐 주어야 하겠습니다. 빈촌 가정에서 언제 학교에 보내서 학령이 지난 어린이들의 문맹을 일소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으며 불가능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민족의 꽃인 여러분의 고향 동리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야학을 시작합시다!”
처음 이곳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나는 그들로부터 수없는 반대의 비평을 들었다. 이동리에서 교회당 종을 치면 지주 신령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어서 손재를 본다는 것이었다. 또 동리의 아이들이 예수쟁이가 되면 집안과 동리가 망한다는 것이었다. 또 어떤 젊은이들은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교회의 전도사라고, 까불면 그냥 안 둘 테다”라는 등 실로 말이 많았다.
10 폭풍 속의 무궁화
일본 명치 시대의 대원훈이라는 공작 이등박문을 하르빈 역두에서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황해도 해주읍 출신이었기 때문에 일본인 총독들도 이 관서 지방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관심을 쏟았다. 서북인의 성격과 사상을 비로소 깨닫게 된 조선 총독부 경무국은 민완한 일본 경찰과 강력한 고등계 형사들을 이 지방에 역점을 두어 배치했다.
1909년에 이등박문이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 당하고, 그 이듬해인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한일합방 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데라우리 총독은 이등박문이 암살된 뒤라 그 반동으로 헌병 제도를 실시하고, 언론 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빼앗고,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되면 누구나 체포하였다.
백오인 사건의 재판이 경성 법정에서 외국 신문 기자들과 천여 명의 방청객이 보는 앞에서 열렸다. 재판이 진행되자 백오인의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고문에 못 이겨 조서가 허위로 꾸며졌다는 진상을 폭로했다. 일본인 검사와 판사 세 사람은 결국 도망을 치고 장내는 일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1918년, 세계 1차 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렸다.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약소 민족 자결주의 14개조 원칙을 세계에 발표하자 세계 약소 민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일제의 혹독한 압박을 벗어나 조국의 독립을 되찾자는 우리 민족의 독립 투쟁의 열의가 전국을 휩쓸었다.
3․1 독립 운동은 거족적인 항일 독립 운동의 대사건으로 세계 각국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민족 대표로서 기독교 대표 16명, 천도교 대표 15명, 불교 대표 2명, 총 33인의 명의로 조선 독립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1919년 4월 15일, 일본인 중위의 인솔하에 무장한 군인들이 몰려와 동리의 부녀자들과 청년 신도 29명을 예배당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지르려고 했다. 이때 어떤 부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뛰어나오면서 “나만 죽이고 이 죄 없는 어린애는 살려 주십시오!” 하며 눈물로 애원했다.
그러나 왜병들은 사정없이 어린애 머리를 총칼로 찔러 즉사시키고, 교회당에 불을 질러 29명을 불태워 죽였다. 또 정원에 있던 일부신도(천도교도도 포함)는 총살하였고 나머지 31호 농가와 8면 15개 부락 317호를 몽땅 불태워 소사자 39명을 나게 했다. 이것은 실로 천인공노할 혹독한 학살 사건이었다.
그러기에 이같이 전무후무한 거사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3․1 운동이 폭풍같이 지나간 뒤부터 일제는 더욱 간교한 고등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들은 사이또 총독을 내세워 문화 정책을 표방하고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언론 기관을 허가해 주는 한편 많은 학교를 세우는 등의 완화 정책을 표방하여 민심을 수람시키려고 획책했다.
11 화상 사건
아버지는 잠이 깨어 변소에 갈 양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이때였다. 홀연히 공중에서 광채 나는 불덩어리와 불꽃이 나타나는가하더니 아버지의 저고리 왼팔에서 ‘확!’ 하고 뜨거운 불길이 붙어 활활 타오르고 있지 않는가. 아버지는 깜짝 놀라 이 빈방에서 웬 불꽃인지 경악할 뿐이었다. 순간 아버지는 재빨리 담요를 몸에 둘렀다. 그리고 두려움과 당황한 마음에 사로잡혀 방문을 걷어차고 병원진찰실로 뛰어나가면서 “불이야!” 하고 엉겁결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바로 이때였다. 공중에서 들려오는 강한 음성이 있었다.
“이 다음에 너는 표시하라!”
아버지는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아버지가 장차 수행해야 할 사명을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영음과 명령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더욱 놀라서 이웃 식당으로 뛰어들어가며 황급히 소리쳤다.
“여보시오. 이 불 좀 꺼 주시오!”
“아이구머니, 이게 대체 웬일이세요? 원장님 저고리 빨리 벗으세요!”
청년 서너 명이 달려들어서 웃옷과 내복을 벗기자, 불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일까 벌써 순식간에 왼팔 전체가 화상을 입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청년들은 모두 놀랐다.
장시간의 기도를 드리다가 아버지는 드디어 결심했다.
‘옳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경륜을 성취하실 때에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그것은 신구약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것을 깨달은 이상 이 범죄적인 행사를 나 자신이 직접 분쇄해 버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거인 동시에 악마의 간계를 폭파해 버리는 정의와 진리의 투쟁이다.
아버지는 이같이 결심이 서자 붉은 잉크와 먹을 내놓고 커다란 백색 광목 위에 태극기를 그렸다. 그리고 나서 붉은 십자가를 그리고 “정의선양 진리사수”라는 문구를 썼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지난밤 준비한 깃발을 접어 가지고 조반을 먹기 전에 총총히 경상리 병원을 나와서 신양리 숭실 학교 교정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학생들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하도 이상해서 학교 수위에게 물어 보았다. 수위의 대답인즉, 한 시간 전에 전교생이 다 모여서 평양신궁으로 참배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머리가 아찔해지고 맥이 탁 풀리고 가슴이 떨렸다.
아버지가 품고 있었던 복안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천여 명의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서 신사 참배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반대 강연을 한다.
둘째, 미리 준비했던 표어가 씌어진 깃발을 내두르며 행진의 길을 한사코 막는다.
셋째, 항거 투쟁을 전개하면 반드시 조선인 고등계 형사들이 달려들어 체포를 할 것이다.
넷째, 이때 고함을 지르며 형사들과 정면 충돌을 한다. 그러면 이것을 목격하는 기독교 정신의 민족주의 애국 교육을 다년간 받은 열혈남아들인 숭실 학도들은 신앙심과 애국심이 폭발하여 아버지의 뒤를 따라 항쟁의 자세로 돌변할 것이다. 그러면 그 곳은 수라장이 된다.
다섯째, 엇갈린 쌍방의 충돌로 인해 대량 검거로 확대되면 제2의 광주 학생 사건과 같이 전국적으로 항일 운동이 번져 일제 총독 정치에 어떤 결정적인 타격과 맹성을 초래할 것이다.
당시 평원리 교회에서 시무 중이던 나는 아버지가 화상을 당했다는 급보에 접하고 급히 평양으로 뛰어왔다. 나는 아버지의 심한 화상에 놀라 이튿날 아버지를 기독 병원의 특등실에 입원시켰다. 서울서 출가했던 넷째 누님도 달려왔다. 매일 우리 남매는 지성껏 아버지를 간호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화상은 보통 화상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임상학적으로도 기이한 것이었다. 화상은 본래 쓰리고 아픈 동통이 수반되는 것이 보통인데, 아버지는 왼팔 절반 정도가 불탔는데도 조금도 쓰리거나 아프지 않았다. 이는 기독 병원의 의사들과 간호원 사이에도 화제 거리였다. 담당 주치 의사도 이 점은 참 기이한 현상이라고 매일 약을 갈아붙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 참 이상한데요. 조금도 쓰리거나 아프지 않습니까?”
“네, 아플 리가 있겠습니까? 일반 화상과는 전혀 다른 화상이니까요. 오히려 시원할 정도입니다. 나도 30년 간의 임상경험에서 처음 보고 당하는 신기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이번 일을 생각만 해도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으로 택하신 아들이 잘못하면 채찍을 들어 때리시고 또 사랑으로 싸매 주신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위문 오는 수다한 평양시내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에게 화상을 당한 원인을 간증하고 기뻐 찬송을 불렀다.
2 부 송충이도 애솔은 먹지 않건만
12 십자군 소집 영장
아버지는 매일 새벽과 저녁 두 차례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나는 무려 한 시간에 걸쳐 드린 아버지의 기도의 결론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주여, 저로 하여금 병으로 죽지 않고 순교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소서” 하는 것이다.
1935년 어느 날 밤, 아버지는 한 환상을 보았다. 아버지가 교회당 강도상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횐 옷을 입은 이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피를 흘리겠습니다.”
아버지는 크게 대답하고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니 그 거룩한 이가 어떤 두루마리 종이를 들고 들여다보며 우뚝 서 있었다. 아버지는 송구스런 태도로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는 횐 옷을 입은 거룩한 이 앞으로 나가서 조심스레 그 종이를 넘겨다보았다. 횐 두루마리 위에는 사오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제일 첫 줄에 ‘박관준’이라고 분명히 씌어 있지 않은가. 아버지는 이 명단을 보고 깨어났다. 이것은 비몽사몽간에 본 이상한 환상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배달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읽으니 아니나다를까 교회에 일대 중대 문제가 돌발했다. 그것은 숭실 전문학교와 숭실 중학교, 숭의 여학교 등 평양의 삼숭 자매 학교가 신사 참배 문제로 존폐 기로에 직면했다는 톱기사였다. 교회 학교인 평양 숭실 전문 학교에까지 신사 참배 문제가 확대되었던 것이다. 전번엔 국부적으로 중학생들이 강요에 못 견디어 응한 것 같았으나 이번엔 세 학교가 모두 신사 참배를 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당시 동교의 교장이던 미국인 선교사 조지 매큔박사는 당초부터 강경히 신사 참배를 반대함으로써 평안남도 학무국 당국과 일대 정면 충돌이 일어났다. 그러기에 폐교의 운명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톱기사였다.
1937년은 일제가 전쟁 준비에 가장 광분하던 때였다. 중일전쟁으로 점령 지역이 다달이 확대됨에 따라 대륙 전선에 투입되는 병력과 보급 물자의 수요는 증가 일로에 있었다. 일본과 대륙 전선 사이에서 대동맥의 구실을 하는 조선군 사령부는 경부․경의선을 통해서 전시 수송을 하기에 광분했다. 조선 식민지 통치의 아성인 조선 총독부는 내무국, 학무국, 경무국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의 유화 정책과 국민 정신 총동원 전시 전력 앙양 등에 걸친 황민화 운동으로 우리나라 백성에게 탄압을 하던 시국이었다. 총독부 당국과 전국 경찰 당국자들은 소위 시국 인식을 앙양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명목으로 각종 회합을 개최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강경한 투지를 품고 평안남도 도청을 방문하여 지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일본인 도지사는 지방 순시로 출타 중이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일본인 학무국장을 면회했다. 아버지는 조선인 학무과 직원의 통역으로 그 석상에서 신사 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소리 높여 역설했다. 이같은 강경한 항의를 처음 받은 일본인 학무국장은 대단히 불쾌한 태도로 야유조의 말을 던졌다.
“당신은 지금 마치 바늘로 태산을 움직이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소. 신사 참배는 대일본 제국의 국시의 하나이며, 조선 총독의 시정방침인 것을 당신 한 사람의 반대로 움직여질 것 같소?”
그러나 아버지는 격분한 음성으로 소리를 높여 공박했다.
13 조지 매큔 박사
숭전 교장인 조지 매큔(윤산온) 박사는 평양장로교계를 대표하는 평양 신학교의 박형룡 박사와 평양 창동 교회의 김화식 목사 등 몇몇 유지 목사들을 초청해서 비밀 대책협의도 가졌으나 이렇다 할 해결 방침이 수립되지 않았다.
최근에 신사 참배를 끝까지 불응하는 교장이라 하여 조선 총독부당국으로부터 파면을 당하고 말았다. 부득이 수십 년 간 청춘의 정열을 바쳐 이 민족의 구령 사업과 교육 사업을 위해 헌신하여 오던 숭고한 생애에 종지부를 찍게 되는 슬픈 작별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인물이 좋고 웅변가이며 정치가나 외교관 타입인 매큔 박사는 일찍이 청춘 시절에 영화 배우가 되라는 권고를 받으리만큼 멋진 풍채의 다재다능한 선교사였다. 그는 조선 개척 선교사의 거성인 마포삼열(모페트) 박사와 명콤비를 이루는 권위 있는 선교사였다. 한국장로교의 개척 선교사인 언더우드 박사와 감리교의 개척 선교사 아펜젤러 박사, 마포삼열 박사와 윤산온 박사, 이 네 사람은 한국 선교역사상 그 공로가 가장 뛰어난 선교사들이다.
신사 참배 반대의 뜻을 표명해서 숭전 폐교설까지 떠돌 무렵, 매큔 박사는 조선 총독부 당국과 교섭하기 위해 상경해서 조선호텔에 유숙하고 있었다. 이때 아버지도 우가끼 총독에게 신사 참배 철폐를 건의하기 위해서 상경 중이었다.
아버지는 매큔 박사의 상경 소식을 듣고 그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조선호텔을 방문했다. 윤 박사를 만난 아버지는 신사 참배반대의 강경한 신념과 그날 아침 우가끼 총독을 면회한 자리에서 직접 수교한 경고문의 초고를 보였다. 그리고 과거 자신이 실제로 겪은 신앙 체험담과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열심히 간증했다. 그것은 어떤 목사들에게서도 들어볼 수 없었던 간증과 투쟁담이었다.
윤산온 박사는 고등계 형사들이 배회하는 그 곳에서 재빨리 서류뭉치를 받아 양복저고리 주머니 안에 깊이 넣으면서 또다시 뜨거운 악수를 청했다.
“형님! 고맙소. 나는 미국에 가서도 형님의 훌륭한 신앙과 그 놀라운 투쟁담을 가는 곳마다 증거하겠소. 그럼, 형님 흘로라도 끝까지 우가끼 총독과 싸워 주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놓을 줄 몰랐다. 그리고 갑자기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큰 눈에서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아쉽게도 한 많은 한반도 이 강산을 떠나야만 했다. 윤산온 선교사가 일제 당국으로부터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고 숭실 전문 학교 교장직에서 파면당하고 귀국한 이후, 조선 선교의 은인인 에비슨 박사, 숭실 전문 학교 창설자인 게일 박사, 그리고 헤론 박사, 조선 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대개척자의 한 사람으로서 공적이 많은 대인격자인 마포삼열 선교사도 이 땅에서 45년 간의 선교 생활을 마치고 눈물의 귀국을 하고 말았다. 또 소문에 의하면 허대전, 방위량, 편하설, 곽안련, 킹슬레 선교사 등도 신사 참배를 성서상 위반 행위라고 강경히 반대했다.
그 뒤 윤산온 선교사의 후임 교장이 된 모의리, 라도래 등 두 선교사는 교육을 계속하려면 불가피한 사정이라고 신사 참배를 부득이 묵인하였는데, 이같이 세칭 연파 선교사도 있었다. 특히 모의리 선교사는 우리나라에 서양 음악, 생물학, 영문학을 도입 개척하였고, 3․1 운동에도 가담한 일이 있었으나 조선 교육계에 애착을 가진 나머지 그와 같은 소극적인 방법을 감수해야 했다.
1936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는 신사 참배를 끝까지 반대 불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로 인하여 폐교하기로 결정된 전라남도 광주 중심의 소속 학교들은 학생 처분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 소속의 평양 주재 선교사들은 시기를 놓치고 강경한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벌써 한인 교수들과 목사 수인이 전국적으로 학교 존속을 위한 유지 운동을 전개하여 학교의 인계를 요구하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원치 않으나 부득이 한인 교육자들에게 학교 경영권을 인계하고 그들은 일단 학교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숭실 학교는 숭의 여학교 교장이던 한인 교장을 추대하고 새 출발을 하면서부터 결국 일제의 강요대로 신사 참배를 실시하게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마침내 신사 참배문제는 노회로 비화하게 되었다.
14 송충이도 애솔은 먹지 않건만
그러나 불순 분자 가운데 집요한 일부 회원들은 신사 참배 지지파의 한 사람인 숭실의 후임 한인 교장과 숭의 학교의 교장을 등단시켜 오륙백 명의 학생들을 위해서 학교를 존속시켜 달라는 애원을 했다. 이때 평양 산정현 교회의 주기철 목사(그 뒤 일제 하에서 순교)가 엄숙히 일어서서 이 같은 역사적인 발언을 하였다.
“우리 자녀인 학생들의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심심한 동정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국 수십만 명의 우리 기독교 신도들 영혼의 사활 문제로 눈물과 철야의 기도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게 된 오늘, 우리는 단연코 신사 참배를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추상같은 반대 발언이 모든 뜻 있는 방청석의 신도들과 노회원 목사들과 장로들의 양심을 울렸다. 일제 경찰들이 이러한 분위기를 목격하고 나서부터는 신사 참배 반대자들에 대하여 더욱 날카로운 감시의 눈초리가 뒤따랐다.
아버지는 자신의 신앙심과 정의감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 같은 어려운 시대에 사용하기 위하여 준비하신 것이며, 폭풍우에 흔들리는 조선 기독교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진리의 파수꾼으로 세우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권능의 역사가 아버지의 지난 생애를 통하여 자주 나타났던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누구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최후 헌신의 때가 목전에 다가왔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즉 이 나라 백의 겨레의 민족 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황도주의는 신앙 문제를 떠나서 양심이 있는 애국 지사의 입장으로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악랄한 흉계이므로 결사적 거부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신사 참배 강요는 우리 민족의 사상적, 신앙적 정조를 동시에 유린하려는 일제의 야만적 폭거였기 때문이다. 일본인은 소위 아마데라스 오오미가미(天照大神 실은 女神)가 자기 나라의 국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로서는 솔선하여 참배를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민족이 다른 배달 겨레가 무엇 때문에 그들의 여신에 굴종하고 참배를 하여야 한단 말인가.
그 후 명치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민본주의, 사회주의 등 새로운 정치 사상을 수입하여 한때는 정치 제도, 문물, 풍속, 습관 등이 양풍화되었다. 소위 녹명관 시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 국학자 중심의 국수주의자들 황도주의 사상 운동을 전개하여 지나친 서구적인 풍조를 억제하고 외래 신사상의 침투를 방어할 것을 획책하게 되었다.
1894년, 95년의 청일전쟁과 1904-5년 걸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약삭빠르게 서구의 과학 문명을 수입하면서도 사상에 있어서는 일본 고유의 전통적인 신국 사상인 ‘가미나가라노미찌’로 그들의 건국 이념을 삼았다.
영일동맹 등을 통해서 일본이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자, 국수주의자들은 군부와 야합하여 군국주의를 발전시켜 갔다. 1931년의 만주 사변 발발 이후, 만주를 침략한 일본은 다시 탐욕의 침략성을 버리지 못하고 1937년 7월에 노구교사건을 조작하여 중일전쟁의 침략전을 도발함으로써 더욱더 천황을 신격화하였다. 천황을 ‘아라비도가미’라 하여 살아 있는 신으로서 전 국민으로 하여금 숭배케 함으로써 일제는 현대판 로마 제국을 이루어 놓았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을 체결한 일본 제국은 당시의 파시즘 맹방들의 정치 사조를 흉내내어 전체주의를 표방하였다.
“국가 없이는 국민이 있을 수 없으며, 전 국민은 국가를 위하여 존재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천황 폐하의 것이며, 국민은 성상 폐하의 적자이다.”
어용 학자들은 이러한 관제 학설을 조작하여 일본 제국의 헌법 제1조에 있는 그대로 천황을 신격화시켰다. 소위 “천황은 신성하여 불가침이다”라는 사상을 실천 궁행케 했던 것이다. 일본 학계의 권위자였던 미노베 박사의 천황기관설은 불경죄에 몰리게 되는 실정이었다. 또한 동경 대학의 식민 정책 연구의 권위자인 야나이바라가 교수직에서 추방되는 사태가 생길 정도였다. 일본 국민의 정신을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종교 정책을 수립해야 할 것을 결정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일본 정신인 신도를 토대로 하여 국체의 본의로 삼고 신궁신사를 애국심 발향의 중추 기관으로 이용하기로 국책을 수립했다.
자유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정치인들은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청년 장교들로부터 비밀리에 암살을 당하는 형세였다. 소위 혈맹단 사건, 2․26사건, 5․15 사건, 수년 후 고노에 사단 2대대의 반란 사건 등은 그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해외 망명객들이 벌이는 독립 운동의 동향에 대해서도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각 지방에 산재해 있는 우국지사, 항일투사라면 불원천리하고 방문해서 밤을 새워 가며 나라를 구하는 일과 애국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므로, 특히 중국 방면에서 귀국한 종교가들과 지사들을 통해서 삼민주의 사상에 관한 서적과 손문의 혁명 투쟁기와 3․1 운동 비사 등에 관한 중국판 서적을 구입하여 밤을 새워 탐독했다. 그리고 중국판 신구약 한문 주석과 순한문 신구약 전서, 유교, 불교, 천도교 등의 경전과 기독교 서적, 국한문판의 내과, 외과, 소아과 등에 관한 현대 서양 의학 서적 등을 깊이 연구했다.
그밖에도 아버지는 자기 생애에 체험한 사실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현대에 발견한 신비적 신앙 체험」이라는 수기를 오륙 권이나 집필해 두었으며, 종교 논문, 대외 서간집, 한문 시집 등의 원고를 밤이 깊도록 기술하였다. 때때로 아버지는 1910년, 그러니까 아버지가 36세 되던 때에 한일합방이 되어서 주권을 잃은 조국의 비운 때문에 회한에 잠겨서 한국의 고사를 더듬어 보고 조선 민족의 불우한 현실을 응시하며 깊은 사색에 젖곤 하였다.
영국 격언에 “대국이란 국토가 크거나 인구가 많아서 대국이 아니요, 위대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나라가 대국이다”라고 한 말은 과연 옳은 말이다.
그밖에 모든 정신 문명, 즉 윤리와 도덕 면에서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존칭을 동양 인방에서 받아온 4천여 년의 독립 국가가 아니었던가. 우리 민족이 다시 각성하고 일어나는 날, 동방의 빛이 될 것은 확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같이 영용하였던 우리나라의 망국 직전의 정국은 과연 어떠하였던가. 나라는 최고 통치자인 임금의 밝은 판단을 막아 버리는 철통같은 조직으로 뭉친 간신배들의 발호로 인해 부패 정치가판을 칠 뿐이었다. 관리들의 전횡은 더욱 심하여 관직은 금력으로 매매되었고, 양반과 상민을 철저하게 따지는 계급 제도로 인해 특권층의 독점적인 정치 출세와 이익 독점이 성행하였다. 약한 백성들의 억울한 신원을 해결해 주지는 않고 학정과 뇌물과 가렴주구로 나라는 썩을 대로 썩어 마침내는 종묘 사직을 보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첫 번째 박해는 1800년에서 그 이듬해까지이며, 두 번째 박해는 1838년에서 1840년까지, 세 번째 박해는 1866년에서 이듬해까지였다. 조선 중기의 정조 시대로부터 순조, 헌종, 고종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한 카톨릭교의 박해는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초로 카톨릭이 조선에 도래되어 선교를 하던 중 서교 금교령이 내려져서 신해, 신유, 을해, 기해년에 걸쳐 13인의 외국인 신부와 약 일만 명 내외의 조선인 신도가 순교를 당해 피를 뿌렸으니, 이것이 최초로 삼천리 강산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고귀한 순교자들의 첫 발자취였다.
1866년 9월 3일, 대동강변에 피를 뿌린 영국인 선교사 R. J. 토머스 목사는 신교 최초의 순교자였다. 최초의 조선인 순교자는 한경희 목사로서 그는 만주의 우수리 강변에서 흉악한 만주인 공산 비적들의 칼에 쓰러져 순교하였다.
이 같은 일들을 깊이 생각하던 아버지는 드디어 선열들의 뒤를 따르기로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여, 이 몸으로 죽는 날까지 우상을 섬기는 국가인 일본 제국의 폭정과 맞서 투쟁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피를 뿌려 정의와 진리의 제물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결단코 병으로 자리에 누워 편안히 생을 마치는 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죽는 시간에는 더욱 정신이 분명하여 명백히 나타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15 모란봉 유한
아버지는 중화민국의 국부인 손문이 최초로 혁명가가 된 동기를 잘 알고 있었다.
“대청 제국이 병들어 고름이 생겼는데 어찌 내가 개인의 종처나 다스리고 있으랴?”
이렇게 결심한 손문은 의사라는 직업을 던져 버리고 혁명 운동에 궐기했던 것이다.
‘오냐, 나도 내 조국과 모교회가 병들고 신음하는 때 병자들의 육신의 병이나 고치고 앉아 있어서 무엇하겠는가. 의사였던 누가도 자기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위해서 자신의 생애를 바치지 않았는가. 그러하였기에 열두 제자 중에서도 의사였던 누가는 사랑의 사도였고 인간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지 않았던가. 육신의 병을 고치는 일이라면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의 부모와 처자와 논밭을 버리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나도 이제부터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베드로처럼 처자와 육신의 사업을 일체 버리고 그리스도와 조국과 정의를 위해서 선한 싸움으로 내가 달려가야 할 길을 가야겠다.’
아버지는 이제 자신이 확신하는 정의와 진리의 신념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길만 남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념은 단순히 자기의 어떤 신앙적 고집이 아닌 것 같았다.
고집이란 항상 개인의 이해에 달린 것이지만, 이 일만큼은 민족과 기독교 전체의 이해와 정의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개인 한 사람의 신념이 아니요, 한 민족의 신념이어야 할 것이었다 또 이것은 나아가서 한 인류의 신념이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탄압과 박해가 와도 반드시 지켜야 할….
16 망국애사
일본의 국체사상인 황도주의와 군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조선의 정세는 날이 갈수록 긴장감이 더해 갔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소화 천황을 아라비도가미(살아 있는 신)로까지 추켜올려 놓고 보니 고대 로마 제국과 희랍 시대의 황제숭배교가 재현된 듯하였다.
일제는 소화 천황이 있는 동경을 향해서 하는 이른바 궁성요배라는 천황 경배 의례를 창안하여 전 일본과 점령 국가의 모든 민족에게 강요했다. 관리는 물론이요, 심지어 학생들과 기독교신도들에게까지 축제일 때마다 신사 참배를 강요했으니 이것은 20세기 문명 시대의 역행인 동시에 자유를 애호하는 세계의 지성인들에게는 하나의 웃음거리이기도 했다.
조국 없는 비애에 젖은 백의 민족은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렀고, 시내 수십 개의 교회당 가운데서도 서문밖 교회에서는 삼천여 명이 회집하는 놀라운 교세를 보였다. 1934년은 선교 오십 주년의 희년을 맞이하는 역사적 기념의 해였다.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 업적은 세계 선교사에 있어서 기록적인 것이었다. 일제 통치하에서 2천 7백여 교회에 46만 신도를 기록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기독교의 발전상은 세계 선교 역사에 있어서 크나큰 자랑거리였다.
기독교인으로서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이승만, 서재필, 안창호,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양주삼, 정인과, 조만식, 신흥우, 백락준, 김환란 등이 있었다. 이들은 우리나라 여명기에 실로 널리 해외에 알려진 선각자들이었다.
더구나 민족의 새싹이며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년 주일 학교 운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여 1920년에는 벌써 1만 4천교였으며, 1922년에는 허대전(J. H. Hold Croft) 목사가 주일 학교 사업부의 총무로 부임하여 조선 주일 학교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교회의 이 같은 장족의 발전을 주시하던 조선 총독부 당국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종이 울리고 그 지방에서 가장 큰 건물은 대부분 교회당이었다. 더구나 경향 각 도시에는 미션계와 기독교주의의 중학교, 전문 학교가 수백 여 개나 설립되었다. 배재(1844년), 이화(1886년), 경신(1887년), 세브란스(1904년), 숭실(1907년), 연희(1915년)를 비롯한 많은 교육 기관이 모두 미션계학교였다. 그리고 전국 교계의 목사 가운데는 미․중․일 각국에서 유학한 인사도 많았고, 그들 대부분이 민족주의와 애국 사상에 투철한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을 통하여 전달되는 설교는 출애굽기나 다니엘서 등에서 볼 수 있는 애국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내용이 많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배달 민족 같았고 애굽 바로의 악정은 일제의 악정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낸 엑소더스의 민족 해방자인 지도자 모세의 사적은 우리 민족에겐 가장 감명 깊은 것이었다. 강단을 통하여 전달되는 설교는 일제의 침략으로 망국민이 된 이 나라의 신도들과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널리 메아리쳐 울렸다.
한편 중국 상해 방면에 망명했던 신도들은 언제나 세기적 해방의 날이 와서 황해를 홍해같이 건너갈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이다. 또 남북 만주에 흩어져 사는 신도들은 언제나 압록강과 두만강을 흥해와 같이 넘어서 해방된 자유 조국에 돌아갈 것인가를 그 얼마나 꿈꾸었던가. 옛날 이스라엘의 구국자 모세의 어머니가 적국 공주의 양자가 된 어린 모세를 양모로 가장하고 다시 데려다가 양육 때, 아기 모세에게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요,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비밀리에 애국 교육을 시킨 것과 같이 당시 우리나라 신도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너는 일본 사람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니까 한글을 배워야 하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어린이들의 애국 혼을 일깨워 주었다. 우리의 부모들은 애국심을 어려서부터 이불 속에서 가르쳐 왔다.
철인 소크라테스와 절세 영웅 나폴레옹이 “인간의 최고 도덕은 애국심이다”라고 한 것은 진리였다. 조국이 망해서 무너지고 황량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슬픈 경고와 탄식을 한 눈물의 애국 선지자 예레미야의 사적은 일제 통치하의 우리 신도들에게 더욱 널리 애독되었다. 그리고 우상에게 절을 하지 않아 왕의 진노를 사서 불 속에 던져진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불 속에 들어가서도 죽지 않고 살아났다는 사적도 많은 감명을 주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 시대에 바벨론 강가의 버드나무에 거문고를 걸어 놓고 조국을 잃어버린 비애를 달래던 장면들도 신사참배 문제가 일어난 이때에 우리 민족에게 더욱 큰 감동과 깊은 각성을 주었다.
성경 말씀 그대로 귀신들려 미쳐 버린 병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면 그 안에 있던 마귀가 벌벌 떨며 소리를 지르고 떠나갔다. 그러면 그 병자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목격하는 이 나라 백성들은 조상 대대로 모시고 제사를 하던 조상의 위패와 감실장과 성주, 제석 부적 등의 귀신 단지를 모두 소탕해 버릴 용기가 생겼다. 우선 미신 지옥에서 해방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병자를 고친다는 무당의 푸닥거리와 죽은 사람에게 드리는 제사 등의 미신 행위가 점점 폐기되고 오직 하나님만을 공경하는 백성이 날로 늘어갔다.
17 울밑에 선 봉선화야
처음으로 이 땅에 기독교 신교가 들어온 것은 조선인 최초의 신자인 서상윤 씨를 통해서였다. 그의 입신은 만주에서 장로회 선교사 매킨타이 목사에게 전도를 받은 데서 시작된다. 그는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이 땅에 복음을 전파했다. 오십 년 동안 1천 5백만 권이라는 방대한 숫자의 한글판 성경이 전조선 동포에게 발매된 사실은 민족 개화 과정에 있어서 놀라운 현상이었다.
1936년, 일제는 노구교사건을 유발시켜 중국을 침략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불렀다. 이때 일본 정부는 황도 정신의 선양과 강화를 위해 신도를 부흥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국민 정신을 통일시키려는 국책적인 각본을 꾸몄다. 신도라는 것은, 일본 황족이 아마데라스 오미가미로부터 만세일계로 내려오는 신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일본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므로 일본 천황은 팔굉일우, 즉 세계를 한집같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천황을 살아 있는 신이라고 불렀다. 세상을 떠난 천황이나 황후들의 혼을 경배하기 위해서 조선 방방곡곡까지 신사를 세웠다. 그리고 개인의 소원과 국가의 무운장구를 자기들 신에게 빌며 경배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역사를 더럽히는 자가 반드시 그 집단 속에서 튀어나오듯이, 마음이 약해서 미혹을 받은 약삭빠른 일부 목사와 소위 교계의 정치성 있는 명사들이 자진하여 시국을 인식하고 나섰다. 그들은 신사 참배는 일본 신민이 된 국민의 의식이요, 결코 종교의식이 아니라는 총독부 당국의 해석을 지지하고 나섰다. 총독 정치의 장단에 춤을 추고 깃발을 들고 나오는 지각없는 친일 분자들이 꼭두각시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선 총독부, 경찰국, 도학무국, 경찰서를 자기 집 사랑방 출입하듯 하며 성스러운 목회에 충실하기보다는 일제의 권력에 아부하고 황도주의에 맹종하는 등의 추파를 보냈다.
그들은 일제의 그늘과 가호 아래서 더욱 나래를 펴고 동경 교계를 위시해서 소위 명치 신궁, 이세 신궁, 부여 신궁 등으로 참배 여행을 다녔다. 경성을 위시해서 지방 교회 유세를 다닌다고 실로 동분서주했다. 여기에 힘을 얻은 일제 경찰은 소위 시국 좌담회를 연달아 개최했다.
신궁 신사는 결코 종교가 아니고 국체의 본의이며, 조상 숭배와 호국의 영령을 숭배하는 조상 전래의 미덕이라는 말로 철저한 위장술을 쓰기도 했다. 이 점은 일찍이 정부의 내무성과 문부성에서 누차 언명한 바와 같은 결론을 반복한 것뿐이었다. 이 견해를 옳게 생각하고 신사 참배를 하는 목사와 장로를 좋은 목사와 좋은 장로라고 돌려보냈다. 이와 반대로 시국 인식을 못하거나 신사참배에 불응하는 목사와 장로는 황실 불경의 비국민이라고 단죄하고 유치장에 모조리 구금해 버리기도 했다. 국권을 빼앗긴 우리 겨레는 이토록 생존권과 인권마저 침해당해야 했다. 그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투옥해 놓고 언필칭 말하기를 “조용히 감방 속에 들어가 반성하며 수양을 하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일본 정신 훈련 공작을 약 반년 동안 계속하니 교역자와 신도들은 폭풍우에 지는 무궁화같이 한잎 두잎 모두 떨어지고 끝까지 나무 원가지에 붙어 있는 꽃송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모두 일제 앞에 굴종하고 말았다.
그러나 불같은 시련 속에서도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여 폐문된 교회가 2백 교회를 넘었으며, 전국에서 투옥된 성도들의 숫자가 연 2천 명이 넘었다는 사실은 실로 놀랍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록이다.
18 변절자들
이때 평북 노회가 개최되어 전 조선 노회 중에서 제일 먼저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는 소식이 신학교 안에 퍼졌다. 동교 제일부 기숙사에 있던 1학년 학생 장홍련은 이 소식을 듣고 격분함을 참지 못해 기숙사 정원에 있는 기념 식수 중 한 그루를 찍어 버렸다. 이 나무는 신사 참배를 결의했다는 평북 노회장이 지난날 신학교 입학시에 기념 식수로 심고 돌비석까지 세운 나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실이 평양 경찰청 고등계 형사들에게 알려지자 이들은 때를 만난 듯이 탄압의 촉수를 뻗쳐 왔다. 이튿날은 주일이었다. 이른 새벽, 평양 경찰서 고등계 형사대가 총동원되어 평양 신학교 기숙사를 급습했다. 그리고 기숙생 전원을 식당에 감금시켜 놓고 각 방을 일제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일기장이나 설교집을 압수하고 그 가운에 신사 참배 반대에 관한 문구를 적어 놓은 십여 명의 학생을 불순 분자란 명목으로 체포하여 연행해갔다.
이제 남은 것은 최후 본영인 총회뿐이었다. 9월에 소집될 총회를 이주일 앞두고 일본인 경찰부장은 미국인 선교사들을 불러서 “이번 총회에서 신사 참배 문제를 가결하도록 하고 제삼국인인 당신네들은 절대로 이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만약 총회에서 비난하거나 반대하는 발언을 하면 천황 모욕죄로 다루겠다”고 협박이 섞인 엄포를 놓았다.
대세는 이미 탄압의 마수 쪽으로 기울어졌고, 끝까지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교역자들은 속속 구속되었다. 그래도 평양시내 40여 교회 가운데서 산성과 같이 굳건히 서 있는 교회가 한 곳 남아 있었다. 그곳은 너무도 유명한 주기철 목사(1900-1944)가 담임하는 산정현 장로교회였다. 이는 주 목사를 비롯해서 방계성 전도사, ‘조선의 간디’라는 절세의 애국자 고당 조만식 장로, 김동원 장로(미군정시 입법의원 부의장), 이춘섭 장로(평양 굴지의 재산가), 오윤선 장로, 유계성 장로 등 조선 교회의 대들보 같은 쟁쟁한 명사들이 있던 계명성과 같은 교회였다.
주 목사는 ‘일사각오’라는 신사 참배 반대 항쟁의 최종적인 설교를 남기고 방 전도사와 같이 투옥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일제의 경찰력이 동원되어 교회당까지 폐쇄되고 말았다. 이 교회와 주기철 목사야말로 전 조선 교회의 면류관이요, 등대요, 생명선이었다. 주 목사의 신앙 훈련을 받은 1천여 명의 남녀 신도들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더욱 뜻을 같이 했다. 비록 교회에는 못 나가게 되었으나 신앙 동지들끼리 가정 기도회를 드리며 최후까지 신앙을 사수할 것을 서로 격려했다.
193명의 총회원 목사들과 장로들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묵묵히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었고, 22명의 미국인 선교사들만 이 비상 사태에 대해 투쟁적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평안남도 경찰부는 13도의 다른 어느 도보다도 더 머리를 짜내어 일찍이 도내 총대를 소집해서 제안, 동의, 재청을 할 노회장을 미리 지령해 두기까지 했다.
신안 사건으로 먼저 신사 참배 문제가 산정되자 총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장로교회도 다른 교파와 같이 신사 참배는 국민 의식이므로 참배를 하여도 가하다고 생각하면 ‘예’라 하시오.”
그러자 총회원들 중에서 이미 그렇게 하기로 정해진 몇 사람의 동의와 재청을 필두로 수십 명 정도가 겨우 힘없이 ‘예’라고 대답했다. 총회장은 가만 묻고 부는 묻지도 않은 채 신사 참배 가결을 선포하고 말았다.
이때 미국인 선교사측에서는 헌트(한부선) 선교사를 위시하여 일제히 20여 명이 “아니로, 불법이오!”라고 말하면서 기립했다. 그 중에서도 방위량(W. N. Blair) 선교사는 경찰의 발언 제지를 당하면서도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과 교회의 헌법에 배반되는 행위를 반대했다’고 회의록에 써넣으시오.”
어떤 선교사는 “나는 하나님에게 상소하오!”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뒤따라서 형사들도 긴장해서 달려들 듯이 일어났고, 시미즈가와 고등계 주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칼자루로 마루를 ‘탕’하고 쳐 울리면서 유창한 조선말로 “앉아라!” 하고 독기를 풍기는 고함을 질렀다. 이때 신사 참배 반대 연설을 하려는 헌트 선교사가 일어서며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규칙이오. 이와 같은 결의는 불법이오!”
그가 반대 연설을 하려고 하자 관경들이 달려들어 제지하였다. 20여 명의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히 “불법이다!”라고 소리 높이 부르짖으며 격분해서 퇴장하고 말았다. 이 같은 비극적이며 불법적인 날치기 결의를 하게 되자 뜻 있는 목사와 전도사와 장로들은 총회의 가결은 폭력 아래서 강행된 부당한 불법 결의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그 후 몇몇 개체 교회들은 상부 결의에 불응하고 지도자에 따라 개별적으로 항거 운동을 전개했다.
이 같은 비참한 결의가 있은 후에 평양신학교는 드디어 자진해서 폐교를 하고 말았다. 그 뒤 통신 교육으로 2학기와 3학기를 마치고, 1939년 4월 초순에 동교 강당에서 제34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종언을 고했다.
총회가 신사 참배를 결의하게 되자 그 뒤부터는 점차로 신앙의 정조와 민족 양심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같은 부작용으로 일제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다. 신사 참배 결의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1. 일본 천황을 ‘살아 있는 신(아라비도가미)’으로 인준한 셈이 되었다.
2. 구약 성경과 계시록은 성경이 아니며, 특히 출애굽기와 계시록은 일본 황도 정신의 위반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소위 친일 집단인 적극 신앙단에서 솔선 제창한 주장).
3. 찬송가 중에서 일본 정신에 위반되는 것은 삭제하게 왕중 왕과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등 허다함).
4. 예배 직전에 동방을 향해서 기립하여 일본 천황에게 경배(황거요배 또는 동방요배)를 했다.
5 일본의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기 위해서 무기로 써 달라고 전국 3천여 교회당의 종을 떼어 일본군에게 헌납하고 전투기까지 헌납하게끔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6. ‘황국 신민 서사’라는 것을 교회 신도들이 식을 거행할 때마다 아래와 같이 복창하게 되었다.
① 우리들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한다.
②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한다.
③ 우리들 황국 신민은 인고 단련, 힘을 길러 황도(일본주의)를 선양한다.
1939년 제28회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의주 제2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일제 총독 정치는 간교한 계략을 써서 총회원들로 하여금 국민 정신 총동원이라는 미명하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게 했다. 그 선언서에는 다음과 같이 잠꼬대 같은 결의가 채택되었다.
동양 평화를 확보하고 팔굉일우(일본 정신으로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는 사상)의 대정신을 세계에 선양하는 것은 황국 부동의 국시라. 우리들은 단결을 굳게 하여 국민 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본과 조선) 일체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국책을 수행함에 협력하고 다시 복음 선전 사업을 통하여 장기 건설의 목적을 관철할 것을 기하노라.
이같이 한국 교회는 일제의 무단 정치와 조선 총독 폭정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풍랑을 만난 삼천만 백의 동포들의 유일한 등대로 최후까지 항로를 비추어 주던 기독교마저 진리의 광명을 잃게 되는 위기가 다가왔다.
1942년에는 일본 기독교단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가 예속되어 일본 교파명으로 전국 교회가 일본 황도주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다음해인 1943년에는 안식교, 성결교, 침례교가 해산 당하고 말았다. 감리교 출신의 어떤 목사는 광주를 중심으로 호남 지구 일대의 교회와 교역자들을 일본 황도주의 산하에 집어넣는 데 혈안이었으며, 양심적인 반일 교역자의 명단을 관헌에게 밀고하여 투옥케 하는 악덕 교역자도 일어났다.
하나님 나라의 운동은 결코 대다수의 군중에 의해서 일어나는 운동이 아니요, 적은 무리, 즉 소수의 엘리트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교회는 최후로 남은 정의의 빛을 기대하고 있었다. 2천 년 간의 기독교 역사는 보잘것없는 소수의 무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모든 시대의 선구자들이 마이너리티로 지칭되는 소수파였으니, 존 낙스가 그러했고 존 웨슬리가 그러했다. 마틴 루터가 “웜스 장안에 기왓장같이 악마가 많을지라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고 말한 대로 단 한 사람의 존재가 인류 사상에 큰 전환점을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일제 전시하에서도 조선 교회의 생명을 사수하려는 정의와 진리의 소수파가 전멸된 것은 아니었다.
19 절망 속의 환상
신사 참배의 부당성을 소리 높여 부르짖으면 반드시 동조해 줄 교역자가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제히 호응해 주었을 것이다. 누구나 양심을 가진 기독교 지도자라면 어찌 신사 참배가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소위 ‘시국 인식파’ 목사나 장로가 일부 있다손 치더라도 감히 이 같은 비장하고 삼엄한 성총회석상에서 쉽사리 변절자의 추태를 부리지는 못할 것이라고 아버지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 곳에 참석하고 있던 일제 경관들도 폐회 후에 개별적으로 반대자들을 검속할지언지정 제삼국인인 미국인 선교사들과 수많은 방청인 앞에서까지 강압적으로 결의를 강행시키거나 총회원 전원을 일시에 검거할 수는 없을 것이라 보았다. 또한 아버지는 총회가 과거 반세기 동안 전통으로 볼 때 진리를 사수하여 온 전통에 빛나는 성회로서 목숨을 잃을지언정 굴욕적인 범죄적 결의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여러 상황으로 볼 때 아버지는 자신의 거사가 효과를 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의 반대 투쟁 계획은 예비 검속으로 인하여 졸지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설마 총회에서 유유낙낙하게 신사 참배가 가하다고 결의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감방 속에서 외부 소식을 들을 수 없는 아버지는 오직 기도와 명상에 잠겨 있었다.
수감된 날 밤, 아버지는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를 하다가 비몽사몽간에 한 환상을 보았다. 어떤 성찬을 담은 밥상이 나타나더니 갑자기 뒤엎어지며 횐밥이 그릇에서 쏟아지고 흙투성이가 되는 광경이었다. 이것을 본 아버지는 총회가 실패할 것을 예감했다. 아버지는 즉석에서 한문시를 지어 읊었다.
聖餐雜糞土 後日食無人
上級亦可撤 前功歸虛地
(성찬이 분토에 섞였으니 후일에 먹을 사람이 없으리
상급을 또한 거두어 가니 전공이 허지로 돌아갔도다)
아버지는 낙망 중에서도 장래 소망과 환상을 품고 감금 생활을 감수했다. 이십 일 뒤 출감되는 날 밤, 아버지는 평양 신학교 이인재 전도사의 숙소를 찾아가서 총회 결과를 자세히 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굴욕적인 신사 참배 결의를 한 사실을 듣자 더욱 통분함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는 신앙 동지인 이 전도사에게 지필을 꺼내라 하여 자신이 최근 결심한 심경을 한시로 써서 내어 주었다.
人生有一死 何否死於死
君獨死於死 千秋死不死
時來死不死 生藥不加死
耶蘇爲我死 我爲耶蘇死
(인생에겐 한 번 죽을 때가 있으니 어찌 죽을 때에 죽지 않으리오.
그대 홀로 죽을 때에 죽었으니 천추에 죽어서도 죽지 않으리라.
죽을 때가 와도 죽지 않으면 살아서 즐거움이 죽음만 같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이번엔 내가 주를 위해 죽으리라.)
20 미나미 조선 총독에게 도전
“이 시대는 구약의 아합 왕과 엘리야가 살던 시대와 같은 시대입니다. 금년엔 흉년이 들 것입니다.”
미나미 총독과 면회한 자리에서 아버지는 첫마디부터 이렇게 예언적인 경고를 던졌다. 그리고 일본 정계에 큰 충격을 주었던 군사반란인 2․26 사건과 과거 남경 함락을 예언해서 모두 적중시킨 바를 상기시켰다. 그러자 미나미 총독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엄한 표정으로 경의를 표했다.
“도오모 아리가또오 고자이마스(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미나미 총독은 신사 참배 철회 요구에 대해서는 마이동풍격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뒤 그는 오직 탄압 일로를 걷고 있는 음험한 폭정자였다.
춘원과 아버지는 종교의 귀의 순서에서 볼 때 서로 대조적이었다. 춘원은 기독교를 거쳐 불교 탐구에 이르렀으나, 아버지는 유불선려의 동양 종교로부터 기독교에 전심하여 그의 생애를 바쳤다. 상해 임시 정부로 망명하여 독립신문 주필로 항일 투쟁을 하다가 귀국한 후 직접적 투쟁을 단행하지 못하고 언론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나 독립 운동에 못지 않게 민족 정기를 고취하는 필봉과 민족적 비애를 남모르게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사상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춘원을 아버지는 깊이 동정했다. 춘원은 확실히 심적 고민이 남달리 많았으며, 현실의 모든 것을 운명으로 체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사적 풍모와 단아한 품위가 있는 인상을 퍽 잊지 못해 하였다.
아버지는 이 같은 간악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지난번 총회 개회 전에 벌써 다섯 번이나 최후 경고와 진정문을 미나미 총독에게 전하라고 곤도오 비서관에게 전했다. 원문의 초고는 다음과 같다.
성인이 말하기를 천하 유사시에는 필부의 말이 태산같이 중하고, 국가 유사시에는 일개 초부에까지 정치를 묻는다고 하였습니다. 현세 인국은 만세 전부터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중에서 국정이 행사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신국과 인국의 유사시를 당하여 인민이 되고서 어찌 관계가 없겠으며, 국가 장래에 불상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서야 어찌 수수방관하고 묵묵불언 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중국의 이윤은 걸왕에게 다섯 번이나 나아가 충간하였으며, 백이 숙제는 삼 일 간이나 말머리를 두들기며 간한 것은 모두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충간 한 바였습니다. 국가 장래에 불상사가 있을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으로서는 측량키 어려운 바이며, 참 신이신 오직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로써만 능히 알 것입니다. 사람은 목전의 일만 볼 수 있으나 신은 구원한 일을 통관해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신령과 신비로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교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 시대에 선지자들이 시대를 따라 참 신의 계시를 받고 국가 장래에 관한 중대한 일을 민간에 반포도 하였으며, 혹은 국가에 고지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번 소생이 측량컨대 벌써 6회를 통하여 정부를 내방한바 그 노정리수는 합위 일만여리를 산할 것입니다. 전 우가끼 총독 시대에 2회, 현금 각하 부임 이후에 이번까지 4회로 충고 직간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은 진실로 국가와 인민을 위함입니다. 생은 재천학멸하여 각하를 보필할 만한 정치적 지식은 비록 없을지라도 기독교 신앙 생활 33년 간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을 힘입어 함지사지에서 누차 구출되었습니다.
2월 5일 각하 면회시에 낭독한 것은 일본 제국에 대한 예언을 환상 중에서 발견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같은 사건입니다. 각하 부임 이후는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나타나시어 표시하시고 그밖에 환상으로 명령하시므로 천리 밖에서 일부러 찾아와 역혈히 충고하는 바입니다. 성인의 말씀에도 지자천려에 반드시 일실이 있고 우자천려에 반드시 일득이 있다 하였으니, 원컨대 각하는 묵사만념하여 조선 기독교에 문제 된 신사 참배는 교회 자유에 방임함으로써 정부는 관계하지 마시기를 거듭 역혈히 충간하는 바입니다.
주강생 1938년 5월 27일
위천위인생(爲天爲人生) 박관준
아버지는 반년 전에 미나미 총독에게 보낸 이 충고문을 그들이 듣지 않은 것에 대해서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이 같은 최후 통첩의 충고를 듣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복 대신 저주의 채찍을 면할 길이 없는 가련한 자들로 보였다. 이 경고를 받고도 일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조선 예수교 장로회 성총회에 경찰력을 동원시켜 야수적으로 신앙의 정조를 유린하였다. 아브라함 시대에 계시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졸고 계시거나 돌아가신 것이 아닐진대, 반드시 “너희의 원수를 내가 대신 갚아 주리라” 하신 영원 자존자의 성경 말씀이 적중할 날이 올 것을 아버지는 확신했다.
부산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중심하여 주남선 목사, 최상림 목사, 이인재 전도사, 황철도 전도사, 김현속 장로, 조수옥 씨, 최덕지 씨 등이 단합하여 조직적인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교회당 안에서 동방요배 강요와 가미다나 설치를 강요하였기에 이것에 불응하여 가정 제단 예배 운동을 벌였다. 일본 경찰은 신사 참배 반대로 구속된 한상동 목사에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고 때리는 악형을 가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아무 대항도 하지 않고 천사의 얼굴처럼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은 나를 고문까지 했으니 당신은 앞날 하나님 앞에서 설 때에 답변을 할 생각을 하고 고문을 하시오.”
그 말에 형사도 한 목사에게만은 고문을 계속하지 못했다고 한다.
‘동양의 예루살렘’ 이라는 칭호가 붙은 평양이 신사 참배 반대 투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평양의 대표적 인물이며 한국 민족 사상계와 교계의 대지도자인 고당 조만식 장로와 부와 덕을 겸비한 인격자인 김동원 장로가 봉사하는 산정현 장로교회는 조선 교계에서 대표적으로 살아 남아 있는 전투적 교회였다.
한번은 평양 본서 고등계 형사가 ‘조선의 간디 옹’이라고는 애국지사 조만식 장로의 가정을 찾아가서 울었다.
“선생님은 신사 참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만식 선생은 일언지하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의 묻는 의도를 나는 알기 어렵소. 당신을 나에게 보낸 일본인 상관에게 가서 만약 내가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면 어떻게 대책하여야 할 것인가를 다각도로 충분히 토의하고 와서 나에게 그 같은 문제를 질문하시오.”
이 같은 말을 들은 조선인 고등계 형사가 일본인 상관에게 가서 그대로 보고하니 일본인 경찰 간부들은 민족주의자로서 수천만 조선인이 숭배하는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을 것 같아 그 후로는 평양의 대표적인 두 인물 조만식, 동원 두 장로를 강압하지 못했다.
이는 전시하의 시국에서, 더구나 강점국인 일본 총독에게 보내는 일본 총독에게 보내는 메시지로서는 실로 놀라운 경고문이었다. 또 아래와 같이 추상 같은 경고문들도 있었다.
국가에 현인(즉 선지자를 말함)이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이 국가의 첫째 불상사요, 국가의 실정을 충고하는 것을 용납지 않는 것이 국가의 둘째 불상사이며, 비상 시국에 백성이 정부에 대하여 원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 국가의 셋째 불상사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중에 ‘사람은 사람이 알고 짐승은 짐승을 안다’라는 영음을 들은 것은 사람(정의의 투사)이 사람을 통하여 성사할 것이니 어찌 인간사를 금수 세계(진리를 몰각한 인간)와 상론할 수 있으랴.
3 부 출동 준비
21 현해탄의 파도
22 섬나라 일본 제국
동양제국을 요리하는 일본 제국 의회 중의원을 방청하고 그 광대한 시설과 회의 광경, 질서 정연한 입법 정치의 전통에 큰 자극을 받았다. 여기가 동아의 패권을 휘두르는 제국주의 정책의 총본산인 것을 느끼자 더욱 조국 없는 비애에 가슴이 뭉클했다. 사학의 대표적 전당인 와세다 대학을 비롯한 아오야마 학원과 각 교육 기관, 사회 사업 단체, 특히 고아원과 복지관 등을 순방하고 그들의 사회 사업의 발달에 나는 많은 자극을 받았다.
‘오냐, 너희 일본 군국주의자들아. 언젠가는 지공무사 하신 하나님의 역사적 심판을 받고 우리 민족 앞에 사죄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반드시 너희 군국주의자들의 최후의 날을 생전에 목격할 것이다. 나는 이 하나의 유품을 목격한 이상 결코 동화되거나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나는 수만 명의 참관객들과 함께 일본 명치천황의 뒤를 따라 자살한 노기 대장 부처가 최후로 사용했다는 단도들과 피 묻은 군복과 진열해 놓은 부인의 속옷을 보았다. 그 옆에 있는 노기 대장 부인이 남긴 절필의 유서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
“남편은 임금을 따라가고 아내는 남편의 뒤를 따라가나이다.”
그리고 노기 대장의 면밀한 긴 유서와 그가 마지막까지 차고 있던 회중용 금시계까지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그것을 누구에게 전해 달라는 내용의 유서와 붓으로 소상히 쓴 수십 개조의 유서는 수많은 일본인 참관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수만 명의 동경 참배객들은 앞을 다투어 오사이센바꼬(돈궤) 앞까지 나와서 돈을 던지고 손뼉을 치며 합장 배례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소위 야오로즈노가미의 합사처이며, 소위 역대 장병들의 유골을 봉안했다는 호국신사이며, 국폐대사였다. 그 신궁의 제단에는 천황을 위시해서 정부 각료들이 보낸 커다란 제병들과 제주들이 수백 기나 놓여 있었다. 그 중에서 ‘조선 강원도지사 손OO봉헌’이라는 명패가 붙은 제병을 본 나는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일제에 충성하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리고 소위 일본 호국신에게 바친다는 제물들을 보고 이것이 ‘문명 일본’인가 하고 의심스러웠다. 일본 신사 와서 신사에 대한 것을 널리 고찰해 보고 실제로 신궁, 신사광경을 소상히 돌아본 나는 조선 총독부가 언필칭 발표하던 이른바 “신사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일본 국민이 된 이상 참배는 당연하다”는 선전이 얼마나 기만적인가 하는 것을 더욱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신사는 확실한 종교의 대상물이었다. 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일본의 신궁, 신사는 역대 호국 영령을 합사해서 제사하는 곳이다.
둘째, 제주 제병 이라는 술과 떡을 차려 놓고 이 세상을 사거 한 뭇 영과 혼백에게 제사를 한다.
셋째, 특정한 제관이 특정한 제복을 입고 제관을 쓰고 신홀을 흔들어 신을 부르며 잡귀와 부정을 쫓는다.
넷째, 특정한 제문과 경문을 낭독하여 기원(국조장원. 나라가 길이 복을 받는 것)과 무운장구(무운이 길이 장구할 것)을 하며 또 지방 신사에는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원, 재산을 모으게 해달라는 기원, 결연을 성취시켜 달라는 기원 등, 수십 가지 소원인 형형색색의 기원이 따른다.
다섯째, 신악이라는 신에게 바친다는 음악이 있는데, 이것은 결국 기도에 귀착되는 의식이다.
여섯째, 미소기라는 것이 있어 목욕 재계하여 죄를 떨어 보내는 의식이 있다.
일곱째, 신사 앞에 머리를 숙이고 단정히 서서 박장을 하고 신명에게 경배를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어찌 종교가 아니란 말인가? 이러한 종교 의식과 같은 유형은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재래 묘당, 성황당 신당 등 각양각색의 신당이나 민간의 잡색 토착신앙 의식과 방불한 것이다.
이밖에도 기년제, 월차제, 신이 햇곡식을 먹는다는 간나메사이, 땅의 지신을 안정시킨다는 지진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진정시킨다는 진혼제 등 10여 종의 큰 제사가 있다.
또 신도에는 오부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른바 아마데라스 토오미가미는 천양무궁의 신칙과 삼종의 신기(구슬, 거울, 검)를 신칙받았다고 하며 오주의 명령을 가지고 땅에 강하되었다고 한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예사롭게 흔한 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더니 계속해서 강진으로 돌변하면서 처처에 화재가 일어나서 막대한 피해를 가져왔다. 가옥만도 44만 8천 호가 소실되고, 12만 8천 호가 파괴되었으며, 9만 1천3백 31명이 사망하고, 10만 3천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는 일본 국가의 재산에 유례 없는 엄청난 타격을 준 대사건이었다.
당시 진재가 일어나자 혼란과 파괴로 인해서 소방대의 기능마저 완전히 마비되었다. 이 같은 격동 속에 동경 일간신문 호외에는 “조선 부정 선인이 쳐들어온다”는 기사가 났다. 또 어떤 곳에서는 일본인 악질 정치 브로커가 날조한 소문이 떠돌았다. “조선인들이 수도와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등의 유언비어였다. 이리하여 분노한 일본인 자경단원들은 머리를 동여매고 칼과 망치와 죽창을 들고 다니며 조선인을 발견하는 대로 찔러 죽인 참변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서 우리 동포들이 곳곳에서 근 2천 명이나 대량 학살을 당하였으니 이는 천인공노할 일제의 범죄 행위였다.
지금 만주 대륙을 바라보면 일본은 한국과 합병이래 그 제국주의의 독아를 갈고 만주를 침략해서 소위 오족협화, 선만일여, 낙토건설 이라는 허울좋은 슬로건을 내걸고 침략 정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이랴. 소위 ‘노구교사건’을 구실 삼아 중국을 침략할 기회를 만들고, 드디어 전쟁을 일으켜 화북 화중 전토를 파죽지세로 점령해 가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무창, 한구, 남창을 함락하여 그 축하의 기쁨이 지금 절정에 달하고 있는 때였다. 동경에서 가장 번화한 시가인 긴자는 축하 인파와 봄놀이 인파로 인해 콩나물 시루 속 같았다. 사람들이 서로 안고 뒤치고 물 끓듯 하고 있었다. 이 같은 봄날의 화창한 일기였으나 나의 가슴속은 그저 우울하기만 했다. 나는 그때 왕소군의 옛 시구를 생각했다
영친왕은 열한 살 때에 이등박문에게 볼모로 일본에 끌려 와서 교육을 받고 일본 황족 야마나시 원수의 딸인 요시꼬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육군 대학을 나온 뒤 우리의 적국인 일본에서 육군 중장의 신분으로 현재 오사까 사단장이지 않은가. 과연 그가 다시 겨레 앞에 돌아올 수 있는 왕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한없이 슬픈 조국의 운명과 그의 비운을 새삼스레 깊이 느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국과 함께 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제창은 당시 일본 동경 재류의 한인 유학생들에게 심대한 자극을 주었다. 이것은 큰 가뭄에 단비를 맞는 것과 같은 기쁜 소리였다. 1919년(기미년) 2월 8일, 한국 유학생 6백여 명은 지금이 회관은 아니었으나 동경 조선 YMCA에 모였다고 한다. 그 자리에 최팔용이 등단하여 준비 위원들이 미리 작성했던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했다. 그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한일합병은 한민족의 자유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한민족의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교란케 하는 원인이 되므로 이에 우리는 독립을 선언한다.
2 본단은 일본의 의회와 정부에 한인 민족 대회를 소집하여 대회의 결의로 한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한다.
3. 본단은 만국 평화 회의의 민족 자결주의를 한민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한다.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일본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 대공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 해당 정부로 전달하기를 요구하는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 평화 회의에 파견한다. 위의 위원은 이미 파견된 한민족의 위원과 일치 행동을 취한다.
4. 전항목의 요구가 실패할 때에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사까기 소좌는 계속해서 일본 기독교의 거성이었던 우찌무라 간조 씨의 일화를 말해 주었다. 그가 생존시에 어떤 신사에 들어가서 참배는 고사하고 막대기로 대발을 걷어올리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보았다고 해서 불경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그들의 국조와 국가 유공자들이 묻힌 신사 안에 나가서 참배를 할는지 몰라도 조선 기독교 신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까지 강요한다는 것은 유감된 정책이라고 못마땅해 했다. 나는 사까이 소좌를 보면서 ‘명사십리에도 지팡이 감이 있다더니 일본인 중에도 이 같은 양심적 인물이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23 부산 부두의 눈먼 형사들
1939년 2월 어느 날, 아버지는 안 선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 선생, 우리 오늘 밤차로 동경으로 떠납시다.”
“장로님, 그럼 어제 도항증명서가 나왔군요?”
“도항증명서 같은 것이 없어도 나는 괜찮소.”
“아니, 그것 없이 어쩌시려구요? 도항증 없이는 부산에서 관부 연락선을 탈 수 없는데요.”
“어젯밤 밤새도록 기도하는 중에 ‘내일 떠나라’는 영음을 내 귀로 분명히 들었소. 하나님의 전권대사 일행이 그 따위 것 없이도 기적적으로 현해탄을 건너게 해주시겠기에 내일 떠나라는 명령의 영음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겠소? 확신하고 오늘 밤차로 떠납시다.”
마침 안 선생의 도항증 수속은 별문제 없이 간단히 끝났다. 평양역부두에는 여러 목사들과 신앙 동지들이 십여명이나 나와 있었다. 별로 알리지도 않았으나 여비에 보태 쓰라고 돈을 전해 주기도 했다. 안 선생은 일체의 여비 준비와 옷가지를 준비해 가지고 하루 먼저 상경한 아버지와 서울에서 만나려고 홀로 평양을 떠나야 했다. 최봉석 목사는 안선생에게 플랫폼에서 물었다.
“마지막으로 남겨 주실 말씀이 없소?”
안 선생은 에스더 4장 16절 말씀을 인용했다.
“죽으면 죽으리라.”
안 선생은 이 길이 죽음을 각오한 길이어서, 언제나 왕복 기차표를 사는 습관이 있었으나 이번만은 왕복표가 아닌 2등 편도표를 샀다.
시간이 되자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 선생은 높이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2등차 안은 대부분이 일본인 승객들로 꽉 차 있었다.
드디어 경성에 도착하여 일박을 하고 이튿날 아버지와 안 선생은 나의 자형(신태선 장로)의 환송을 받으며 일본으로 향했다. 연희 전문 학교를 나온 나의 자형은 평남 안주 출신으로 연지동에 본부를 둔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 교계의 동향과 미국 선교사들의 동태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봉사하고 있는 교회는 연동 장로 교회로서, 이 교회 담임 목사는 구한국 시대에 판사를 지냈고, 3․1 운동 당시에는 33인 밖의 48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함태영(해방 후 부통령) 목사였다.
“하나님은 과연 피난처시오, 살아 계신 배경이십니다.”
아버지도 안 선생도 입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며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과연 신앙은 모험이다. 그것은 마치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좇아서 흉용한 바다 위를 걸어가는 베드로의 발걸음과도 같았다. 흉용한 파도에 겁을 먹을 때 베드로는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심치 않고 걸어갈 때는 물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앙이 흔들릴 때는 절망의 파도 속에 빠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생, 마음을 푹 놓으시오. 무인지경 벌판에 무슨 걱정이오?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면서도 아직도 믿지 못하겠소? 신앙엔 의심이 금물이오.”
24 출동 준비
25 무사시노의 3인 결사대
지금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 종교가인 가가와 씨를 방문하려고 가는 길이다. 이윽고 아버지와 나는 무사시노 벌에 아담히 자리잡고 있는 단층 건물인 가가와 씨의 자택에 들어섰다.
가가와 씨의 부인인 하루꼬 여사가 현관에 나와서 우리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응접실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있다며 옆방인 서재로 안내해 주었다. 지난날 나는 여러 번 이곳에 왔었기 때문에 퍽 낯익은 서재였다. 오늘도 전과 변함없이 수천 권의 장서들이 즐비하게 서가에 꽂혀 있었다. 한 가지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은 목재로 만든 함 속에 들어 있는 수십 종류의 광석 표본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것뿐이다. 서가에는 종교 계통의 신학 서적 이외에도 그가 좋아하는 자연 과학과 문학 서적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천문학, 광물학, 심지어 파브르의 곤충기 전집에 이르기까지 특수한 내 외국서적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이렇듯 가가와 씨는 비단 종교가만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 전도자요, 대저술가요, 사회 개혁가요, 신학자요, 목사요, 농촌 운동가요, 국제적 민간 외교가였다. 그는 일본에서보다 미국에서 더 이름이 높았으며, 프린스턴 대학 재학 시절에는 도서관에서 책만 읽었기 때문에 이 대학에서는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책을 독파했다는 열람권의 싸인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가가와, 인도의 간디」라는 미국인의 저서가 나을 정도로 그의 이름은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기생첩의 아들로 태어났으므로 공창 폐지 운동에 열심이었고 화류계 여성들을 가장 동정했다. 그들의 새생활과 갱생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그로서는 또 하나의 사명이기도 했다. 그는 「빈민 심리 연구」라는 저서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그가 젊은 시절에 몸소 고오베 아라가와의 빈민굴에서 생활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그는 「사선을 넘어서」, 「바다범과 같이」, 「태양을 쏘는 자」, 「눈물의 이등분」, 「하나님에 의한 신생」 등 영향력 있는 귀한 저서들을 많이 발표했다. 그의 저서 가운데 세밀하게 묘사되었듯이 그의 뛰어난 신앙적 인생관과 사회봉사, 희생적인 헌신의 정열은 그로 하여금 세계적인 인물이 되게 했다
나는 인사하며 아버지가 가가와 선생을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서로의 인사가 끝나자 아버지는 드디어 평소 뼈에 맺혀 있는 소신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선생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기독교는 신령과 신비와 신조가 있는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본인이 예수를 믿은 지 30여 년 어간에 위험한 지경에서 사선을 넘은 체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허다한 역경과 고투하면서 민족적 시련과 고난의 물결이 닥칠 때마다 복음적 사명에 불타서 기독자로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오늘날까지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우가끼 총독 재임 당시에 발생된 신사 참배 문제는 당초의 약속대로 학생과 관공리들에게만 멈추지 않고 미나미 총독 부임 후에는 전조선 기독교의 교역자와 평신도들에게까지 신사 참배를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신앙 양심상 반대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목사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비국민으로 규정하고 투옥을 하는 박해로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 참, 기막힌 일입니다. 신사 참배는 조선 형제들에게 그토록 강요할 일이 못됩니다. 민족성과 풍속이 다른 백성들에게 그것은 너무 지나친 탄압입니다.”
아버지는 가가와 씨가 신사 참배를 인식시키려고 조선에 파견됐던 도미다 미쯔루 목사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내심 기쁜 마음이 일어났다.
“전생께서는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아버지가 묻자 가가와씨는 이같이 대답했다.
“저는 신사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하나는 국가에 공로가 있는 천황을 기념하는 명치신궁 같은 데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실재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에 미루어 경의를 표할 수 있습니다만 소위 무명 잡신을 위해서 세워진 일반 신사에 대해서는 참배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인으로서 조선 형제들의 감정을 이해하기 어렵듯이 조선 형제들의 생각 역시 일본인들의 신사에 대한 관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가가와 씨는 아버지의 말에 수긍을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잘 알았습니다. 신앙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죄 의식을 가지고 신사 참배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나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힘이 미치는 대로 조선 교회의 형제들을 위해서 협력해 드리겠습니다.”
이 같은 의견이 서로 교류된 후에 계속해서 아버지는 조선 기독교에 신사 참배 문제가 발생된 동기와 현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약 한 시간에 걸쳐서 투옥된 우리나라 교역자들에 관해 알려 주고 미나미 총독의 시정 방침을 비판했으며, 우가끼 총독과 현 미나미 총독에게 경고한 사실들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가가와 씨는 조선 기독교의 이 모든 현실정에 관해서 처음으로 심각하게 느끼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도 일본인 목사로서, 어찌 뼈저린 식민지 조선 기독교도들의 충격적인 심경과 같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확실히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일본 기독교단의 의장인 도미다 미쯔루 목사와는 크나큰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가와 씨는 지난날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아까자까 상까이도오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었다.
“일본 땅이 당신들 조상의 식민지 같았다는 귀화인들의 사적을 고찰하라. 그 증거로는 오사까나 기타 지방에 조선에서 전래된 문화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더구나 「일본 서기」를 한 번 읽어 보라. 그리고 조선 출신의 제군들은 좀더 현명하여라.”
총독 정치의 부당성을 비판했던 과거의 일화를 통해 보아도 그는 일본의 양심적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평소에 안면이 있는 인사들을 아버지께 추천했다. 후지미쪼 장로교회의 장로이며 동아 전도회 회장인 히비끼신 료오 중장, 조합 교회 장로인 정우회 대의사 마쯔야마쯔네지로오 씨, 감리교 감독 아베 목사, 내가 가끔 출석하는 후지미쪼 교회 미요시 쯔도무 목사, 이노찌노도모사의 사장인 가미무라 구니요시 목사, 신사 참배 반대자인 자전거 제작 회사 사장인 장로, 나의 모교인 일본 신학교 교장인 무라다 시로오 씨, 동 신학교 교수 구와다 히데노부 씨 등을 순차로 방문하기로 했다.
아버지와 나는 무사시노 벌판 숲속에서 간곡히 기도했다. 아버지의 비장한 기도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 몸을 일본까지 보내 주신 이상에는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사오니 앞길을 인도해 주소서.”
이튿날, 아버지와 안 선생과 나는 신쥬꾸 미쯔꼬시 백화점에 들렀다. 때마침 정오의 사이렌 소리가 뚜우 하고 요란히 울렸다.
“어머나! 일본에서도 똑같은 소리군요. 저 소리에 맞춰 조선 방방곡곡에서는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일본 제국의 무운장구를 위해서 묵도를 강요당하는데.”
안 선생이 탄식했다.
“그렇습니까? 참 철저하고 빈틈없는 전시 정책이군요.”
때는 중일전쟁에서 연전연승하는 일본 제국의 국위가 대내외적으로 욱일승천의 기세였다. 군수 경기가 한창인 일본 산업계는 비록 평화 생산이 저하되었다 하더라도 수도 동경의 각 상점과 백화점은 아직도 호화 찬란한 상품으로 진열장이 터질 듯했다.
26 우가끼 대장과의 일차 회견
“이것은 천상천하에 가장 귀한 보배로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말하기를 ‘내가 선한 정치를 하게 된 것은 오직 여기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대로 시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로써 오늘날 대영 제국이 복을 받은 것이다’ 라고 증언한 귀한 성경책입니다. 노장군께서도 여생에 이 말씀을 연구 묵상하며 참회와 은총 속에서 신앙 생활을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더구나 이 안에 내가 별지로 쓴 색인의 일람표가 들어 있는데 이것은 특히 우상 숭배의 부당성을 지적한 요절들로서 신사 참배 문제와 관련된 것이므로 장군께서 특별히 대조해 가면서 애독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곧 횐 종이에 싼 성경을 우가끼 대장에게 전했다. 노장군은 정중히 허리를 굽혀 답례를 하며 두 손으로 성경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저도 독일 주재 일본 대사관의 무관으로 있을 때 독일 사람인 숙소 아주머니가 크리스천이어서 같이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교회에 나간 적도 있습니다. 성경 내용을 좀 알고 있으므로 기독교가 어떻다는 윤곽은 다소 짐작하고 있습니다. 또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훌륭한 책을 이렇게 주셨으니 앞으로 잘 연구해 보겠습니다.”
“무엇이라고요? 선생과 같이 연로하신 분을 투옥한다구요?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조선 총독 재임 당시에는 학생들과 관공리들에게 한해서, 그것도 국가 경축일에만 국민 의례로 신사참배를 하게 했을 뿐이었지요. 지금 미나미꿍이 기독교 목사와 신도들에게까지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또 반대하는 사람을 투옥까지 한다니 정말 미나미꿍은 바까(바보)다!”
그는 노성을 띠고 두 번씩이나 바까(어리석은 자)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는 우리 일행의 실정담을 다 듣고 나서 자기 후임 총독인 미나미 대장에 대해서 퍽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선물로 전한 성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27 하늘의 경고
“어떤 일을 당했기에 이렇게 일찍 찾아왔소?”
“바로 오늘 새벽 4시경의 일입니다. 어젯밤 대학 동창들과 같이 회합이 있어서 별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조금 마시고 밤늦게 돌아 왔지요. 그리고 얼마 동안 자다가 당한 일입니다. 갑자기 무슨 큰 고함 소리가 제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박국을 펼쳐 보아라’ 하는 큰 음성이었습니다. 순간 사방을 살펴보니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기에가 더욱 놀라 엉겁결에 몇 마디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생각해 봤지요. 그 뒤 한참 만에야 ‘이런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떤 영적 체험이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 안 선생이 사 준 성경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상하게도 하박국 2장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생전 처음으로 ‘하박국’이라는 대목이 성경에 있는 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하박국서에 두려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려고 이렇게 뛰어왔습니다.”
“아, 그것 참 놀라운 체험을 얻었구만, 내가 알기로는 성 어거스틴이 어느 날 새벽에 공원을 산책하다가 공중에서 ‘펴서 읽으라’는 영음을 듣고 어머니로부터 받아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성경을 펴서 로마서 13장 11-14절 말씀을 읽고 회개 입신하였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소. 조 군은 참으로 귀하고 놀라운 영적 체험을 얻었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신령과 신비와 신조가 있는 종교라고 볼 수 있소. 그럼 우리 하박국을 한 번 찾아 읽어봅시다.”
하박국은 대략 이러한 뜻을 내포한 선지서였다.
하나님의 뜻에 배반되는 나라는 비록 국력이 흥하고 국위가 사해를 진동하는 것 같으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고 패망하리라는 경륜이 결코 허사가 아니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하박국 1장 5-11절에는 이 같은 구절이 있었다. 마치 현대 일본제국의 횡포를 지적한 것과 다름이 없는 말씀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이웃의 여러 나라들)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자라 이에 바람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득죄하리라.”
이 구절은 어떠한 나라든지 여호와의 참신을 거부하고 우상을 만들어 그것을 숭배하면 죄를 얻고 저주를 받으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같이 패역한 나라는 때가 이르면 망하리라”는 경고였다. 또 2장 4절에는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기독교 교리를 요약해 놓은 최고 정점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한국 기독교를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굳건히 서서 싸우다가 산 제물이 되어 보자’ 하는 용기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에 다짐을 했다.
‘나는 결코 외롭거나 약하지 않다. 나는 지금 같은 일제의 탁류속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는 반석이 되리라.’
그리고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물 고인 얼굴로 좌중을 바라보았다.
“자, 조 군.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조 군이 받은 계시는 실로 일생을 통해서 잊지 말고 기념하시오. 조 군이 이 체험의 가치를 인식하면 할수록 조 군의 생애는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또 복된 생애가 될 것이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보고도 약한 인간이기에 심상한 체험으로 해석하고 잊어버린다면 일생의 큰 손실과 실패가 올 것이오. 꼭 신의 존재를 확신하고 이제부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기로)작정하시오. 오히려 내가 오늘 아침, 큰 교훈의 은혜를 많이 받았소.”
이제 아버지가 동경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갔다. 그 동안 벌써 후지미쪼 장로교회를 필두로 일곱 교회에서 “조선 기독교회의 최근 동향”이란 주제로 상황 보고를 겸한 설교를 했다. 아직도 세 곳이나 일본인 교회의 설교 예약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으며, 이 같은 방법으로 청탁을 받자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각 교회를 순방해야 할 실정이었다. 도쿄에서 제일 대표적인 후지미쪼 장로교회에서는 공교롭게도 위원회 기도회 석상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정식 예배시간이 아닌 불과 30명 내외의 교회 간부 집회였다. 그러나 다른 일본 교회에서는 주일 낮과 밤에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퍽 많은 회중 앞에서 호소할 수 있었다.
어떤 교회든지 조선 교회의 실정을 듣고 난 후에는 모두들 놀랐으며, 기도하는 시간에는 일본인 신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조선 기독교회의 신앙 탄압을 해소시켜 주시고, 조선 총독의 마음을 회개시켜주시며, 반도에서 온 하나님의 복음 사자들에게 더욱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합심해서 기도해 주었다.
4 부 정의가 나를 부를 때
28 정의가 나를 부를 때
어느 날 오전, 우리 일행은 후지미쪼 장로교회의 장로이며, 일본 동아 전도회 회장인 히비끼 중장을 방문했다. 히비끼 중장은 일찍이 러일전쟁에 출정해서 용명을 떨쳐 존경을 받는 분이며, 또한 열렬한 기독교 신앙가였다.
우리 일행이 그를 방문했을 때는 레이난자까 조합 교회의 장로이며, 와까야마 현 출신 대의사로 연 7차 당선자인 정우회외정 부장 마쯔야마 쯔네지로오 대의사를 초청하여 대기시킨 때였다. 우리 일행이 응접실에 들어서니 나와는 구면인 히비끼 중장이 카이젤 형의 횐 수염 밑에 웃음을 띠고 반색하며 맞아 주었다.
“수고스럽게 오셨습니다. 어서 올라오십시오.”
그는 손수 아버지의 손을 잡아 올리며 모자를 받아들고 퍽 반겨주었다. 그리고 응접실에 들어서자 마쯔야마 대의사에게 아버지를 소개했다.
“오이, 마쯔야마꿍. 이분이 바로 박관준 장로일세. 그리고 여기는 자제인 복상과 또 이분은 동행자인 안 양이구.”
“듣건대 조선 교계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러 일본까지 오셨다는 말씀을 벌써 들었으나 원체 정계 일로 바쁜 몸이라 벌써 한 번 자리를 베풀고 경의를 표했어야 할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마쯔야마 대의사는 공손히 아버지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리하여 쌍방은 조선 교계에서 일어난 신사 참배 문제로 화제를 돌렸다.
“선생께서는 조선에서 미나미 총독과 투쟁을 하고 계셨다고 히비끼 중장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저는 장로로서 일본 국회 안에서 지금까지 신앙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다이마(일본 천조 대신 위패를 넣은 목함) 봉안을 반대하고 싸워 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신도가 국교와 같이 된 관계로 나의 투쟁은 일본 정계에서는 여간 힘이 들지 않습니다. 다이마 봉안을 반대하는 팸플릿을 각 정당소속 5백여 명 대의사들에게 배부하여 여론을 환기하고 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마쯔야마 군은 야소 교도니까 무턱대고 다이마 봉안과 그 참배를 반대한다고 야유와 공격을 하지 않겠습니까? 같은 사람이 한 열 명만 국회에 있어도 좀 힘있게 싸우겠는데, 원체 고군분투를 하고 있으니 효과가 나야지요. 참으로 한심한 실정입니다. 그러나 내가 외정 부장이므로 조선 총독의 시책을 검토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선 교회에 일어난 기독교 탄압 정책의 실정을 낱낱이 호소했다. 이러한 방문과 여론 환기의 보고 강연은 실로 일본계의 지도자들과 일본 교회에 새로운 자극과 새로운 소식으로 전달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조선 교회의 위기를 도저히 만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본 제국 의회중의원에서 종교법안이 상정되는 때를 같이하여 새로운 방법의 투쟁을 개시하자고 하였다.
1939년(소화 14년) 3월 24일, 우리 일행은 최후의 비장한 각오를 하였다. 돌아보건대 아버지가 일본을 방문한 지 40일 간 우리 세 사람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지금 최고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일본 제국은 태산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더구나 국체사상에 관한 문제는 좀처럼 이해하거나 완화하여 줄 것 같지 않았다.
일본 기독교계에서 일부 극소수의 크리스천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적극적으로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 호응해 주는 동지들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의외였다. 같은 신관과 성서적 교리와 신조를 가진 크리스천 동지간에도 국가관과 민족성이 다른 데서 오는 신앙양심의 견해 차이가 이토록 현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아버지는 더욱 힘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 남은 최후의 결정적 방법이란 곧 비합법 투쟁인데, 인격의 가치는 자율 행동으로써만 쟁취할 것이오.”
아버지는 다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마침 지금은 제74회 일본 제국 의회(중의원)가 개회 중인데, 이제 폐원식까지는 한 주일밖에 없소. 더구나 바로 내명일에 종교법안이 상정되는 날이라고 하니 우리 세 사람은 중의원 방청석에 입장해서 일본 국가 흥망에 관한 최후 통고의 폭탄 선언서를 던지기로 합시다. 우리 함께 가서 대표로 내가 일대 시위적인 고함을 지르면 전 장내의 시선이 총집중될 것이니 다른 대의사들이 발언권을 얻어 법안 심의를 하기 직전에 우리가 먼저 이 거사를 단행하여야 되겠소. 그리고 히라누마 내각의 전체 각료들과 5백여 명의 각 정당 소속 전국 대의사들의 면전에서 배달민족으로서 미나미 총독의 폭정을 규탄하는 최후의 경고를 할 수밖에 없소. 경고문서는 하층 의석 중앙에다 투하하여 파문을 일으켜 수라장을 만들어야 될 것이오. 속담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과 같소. 우리들에게는 죽음을 무시함으로써 최후의 옥쇠를 각오하고 민족의 제물이 되는 길만이 남아 있소. 군국 일본이 우리의 경고를 듣고 흥하든지 망하든지 그것은 그들의 자유 의사일 것이오. 불행히도 듣지 않고 일본 제국이 패망하는 날에는 조선에 한 선지자가 있어 그의 말을 듣지 않아서 우리 일본 제국이 패망했다고 하는 훗날의 뒷이야기가 남을 것이오.”
아버지는 퍽 만족한 듯 웃으면서 이 일본어 구호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암송했다. 이때 나는 바벨론 왕국 느브갓네살 왕조 때의 담대한 신앙가였던 다니엘과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황제가 세운 우상에게 참배하는 것을 거부하다 반역자로 몰려 풀무불에 던져지는 광경을 연상하고 최후의 결의와 각오를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3년 간이나 나의 귀국을 고대하는 노모님에게 송구스럽고 약혼녀에게는 참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이 북받혔다. 그러나 이 같은 육정에 사로잡힐 수는 없었다. 또 한편 이 같은 사정은 아버지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버지가 나에게 이 같은 제안을 한 이상에는 어떤 희생이 따를지라도 과감히 감행할 것을 결심했다. 이것은 나의 의지를 시험해 보는 하늘이 내려 주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 순간은 ‘정의가 나를 부를 때’라고 확신했다.
아버지는 중대 선언을 하고 안 선생도 찬동해 줄 것을 믿고 의중을 물었다. 그런데 안 선생은 일언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부하면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장로님, 그것은 안됩니다. 우리가 범법자가 되면 그 자리에서 투옥을 당할 텐데 그러면 어떻게 다시 활동을 합니까?”
“안 선생, 우리의 과거 활동은 한계가 있지 않았소. 그 이상 합법적 투쟁이란 있을 수 없소. 우리가 이제부터는 비합법 투쟁을 감행해서라도 투옥이 되어야 우리가 일본에 건너온 진의를 그들이 조사해서 알게 될 것이 아니오, 또 이 같은 악한 시대에는 폭정자와 정면으로 도전하여 결판을 내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태산같이 굳센 일본 제국을 상대로 싸울 수 없소. 이제 안이한 방법으로만 투쟁할 수는 없지 않겠소? 나는 이곳에 올 때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왔소.”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더욱 강력히 말했다. 안 선생은 그래도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아버지의 제안을 굳게 반대했다.
“장로님, 저는 그같이 법규를 어기고 죄수가 되기는 싫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시는 대로 일합시다.”
1939년 3월 24일 아침, 아버지와 나는 식당에도 내려가지 않고 지난밤에 기초한 선언문 원고를 손보았다. 아버지는 붓으로 정서하고 나는 초고를 일일이 교정한 것이다.
“안 선생, 알겠소. 우리 부자는 죽을 각오를 했으니 더 할 말이 없소. 그러니 안선생이나 잘 살으시오!”
“장로님, 죽을 때 저도 같이 죽는 데는 찬성이에요. 저도 예수님을 위해서 때가 오면 죽기를 원했었는데, 또 일본에 올 때에 죽으려고 나선 판에 위법이니 죄수니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지요. 나도 두 눈을 꼭 감고 죽는 자리라도 가겠어요. 하나님의 정의와 진리 앞에는 인간적 판단이 있을 수 없지요. 저도 결심했어요.”
드디어 안선생이 우리와 뜻을 같이할 결심을 하자 아버지는 감격했다.
“안 선생, 고맙소. 우리 세 사람이 함께 끝까지 싸웁시다.”
이리하여 우리 세 사람은 드디어 한뜻으로 합의를 하였다. 우리는 조반을 대충 끝낸 뒤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집을 나설 때 아버지가 안 선생에게 말했다.
“안 선생, 옷을 좀 두텁게 많이 입어 두시오. 오늘부터 옥중 생활이 기다릴 테니 털스웨터 같은 것으로 잘 준비해 두시오.”
한편 나는 정우회 마쯔야마 대의사를 통해서 고야마 중의원 의장의 소개 방청권을 입수하는 데 힘을 썼다. 우리 일행은 거사 전날인 1939년 3월 23일 오전 10시에 의사당에 들어갔다. 그날은 의사당 내부의 방청석 위치와 장내 분위기, 그리고 우리가 앉을 자리의 위치를 면밀하게 살핀 후 방청만 하고 돌아왔다.
이튿날, 이제야말로 일제 흥망 경고의 날인 역사적인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계속해서 고야마 중의원 의장의 추천으로 되어 있는 국회 방청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는 조선인 박춘금 대의사를 통하여 두 번째로 방청권을 입수하는 데 성공했다.
아버지는 작성한 폭탄적 경고 선언문을 대형 특제 봉투에 담아 양복바지 안의 털내의 속에 둥글게 말아서 세워 넣었다.
택시로 국회의사당 현관 앞에 내린 우리는 수많은 일본인 방청객 속에 파묻혀 나를 선두로 아버지, 안 선생 순으로 중의원 본회의장 출입구에 다달았다. 입구 옆 탁자 앞에 앉은 정복의 수위들과 서 있는 경비원들은 입장하는 방청객의 방청권을 받고 국회의사당 안에서 방청객으로서 유의하여야 될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줬다. 우리는 조선 출신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본적, 직업, 성명, 연령 등을 수위들이 다시 물어서 카드에 면밀히 기록하여 넣었다. 그리고 출입구에 들어가기 직전에 일일이 몸수색을 하여 어떤 흉기나 불온 문서 등이 있는지 조사받았다.
때는 1939년 3월 24일 오후 1시 48분이었다.
제국 의사당은 실로 광대하였다. 이는 일본 제국의 국력과 국위를 세계에 과시하려고 18년 간의 세월을 소비하여 건축한 것이었다.
이곳은 일본 제국의 최고 입법부이며, 일본 전국의 선량들이 모이는 대의 정치의 대전당으로서 일본 제국의 위용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화강석으로 지은 오층탑이 솟아오른 백아의 대전당은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철골은 야하다 제철소의 것이었고, 내부는 37 종류의 일본과 조선산 대리석과 산호석 등으로 장식하였다.
의사당 건물의 건평 수는 연평수 1만 5천여 평이며, 건축에 동원된 총인원은 2백 54만여 명이라고 하였다. 실로 웅장한 건물이었고, 지은 지 몇 년밖에 안되어 깨끗하고 화려했다. 수만 광촉의 샹데리아는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며, 하늘빛의 유리 천장은 채광과 전광을 받아 더욱 눈부셨다.
주: 우리의 투쟁 기록은 당시 일본 경시청 경시총감이며, 특별 고등 경찰 부장인 훤장군장 발행의 특내선 소화 14년 4월 4일부 제664호 비밀공문서(현재 우리나라 정부가 보관)에 세밀하게 명기되어 있다.
내무대신 기도, 동경 형사 재판소 검사정, 동부 방위 사령관, 동경 헌병대장, 조선 총독부 경무국, 각 부, 현장관, 조선 각 도지사, 관하 각 경찰서장 앞으로 비밀 공문서라는 날인으로 발송된 공문서이다.
29 난장판이 된 일본 국회의사당
지난날 개별적으로 아버지의 경고문을 받은 바 있는 카이젤 수염에 카키색 군복을 입은 아라끼 문부대신이 위풍 있게 들어와 앉았다. 둥근 얼굴에 역시 중머리의 카키색 군복을 입은 소장파인 이다가끼 육군 대신, 하이칼라 머리의 감색 군복을 입은 요나이 해군 대신, 그밖에 양복을 입은 오륙명의 국무대신들이 뒤이어 들어섰다. 그리고 맨 나중에 검은 프록코트를 입은 후리후리한 키의 히라누마 총리대신이 입장하여 정면 국무대신 좌석에 유유히 앉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에호바 가미사마노 다이시메이다!)” 그 순간 의사당 장내의 수천 시선이 아버지에게 집중되었을 뿐만 아니라 극도로 긴장되고 소란한 분위기 속에서 수위들이 모두 ‘악!’ 소리를 지르며 놀라고 당황하여 성난 호랑이 떼같이 달려들었다.
그때 “일본 제국은 패망의 저주와 번영의 복 중 어느 것을 자취하겠느냐? 둘 중에 하나를 자유 선택하라”는 폭탄적 경고 선언문이 아래층 중앙 의석에 직격탄처럼 투하되었다. 2백여 그램 중량의 대형특제 봉투에 넣은 네 통의 선언문은 억압을 받는 백의 민족으로서 일본 제국의 폭정에 항거하는 정의의 폭탄이었다. 비록 폭발물은 아니어서 인명의 살상은 없었으나 우상제국이며 침략적인 군국주의 일본 정부에 투하한 진리의 폭발물이었다.
경고문서가 들어 있는 대형 봉투 뭉치가 중앙 의석에 떨어지려고 할 때는 벌써 상하층 의사당이 수라장을 이루었다. 비호같이 달려들었던 세 사람의 수위들은 아버지를 현장에서 붙들려고 활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빌라도 총독 앞에 잡혀 온 예수 그리스도의 환영이 떠올랐다. 그리고 황제 칼 5세와 교황 대리 앞에서 심문을 받은 마틴 루터가 “나는 변할 수 없다. 나는 여기 서 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하는 장면이 스크린과 같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 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우리는 지금 대동아의 맹주로 자처하는 일본 제국 국회의사당의 최고 보안 책임자들 앞에서 날카로운 심문을 받게 되었다.
30 한국의 다니엘들
아버지가 제74회 일본 제국 의회 중의원에 던진 폭탄적 메시지의 요점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큰 도는 나라의 한계가 없고, 진리는 중외에 능히 가통하므로 오늘날 동아 오억만 생명의 사활 문제가 이번 의회에 달려 있다는 것.
둘째, 하나님의 섭리로는 그 나라의 종교 부흥 여하에 따라 국가의 패망과 번영이 좌우된다는 것.
셋째, 인간의 정부가 소위 ‘종교법안’을 제정하여 종교를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간섭하고 탄압한다면 세계와 인류를 통괄하시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하늘의 재앙을 내리실 것이니 의회 의원 제공이 진리를 깨닫고 못 깨닫는 데 국가의 흥패가 달렸다는 것.
넷째, 일본 제국의 정부와 국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축복을 받아 강성하여져서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강대한 나라 백성을 다 쫓아내고 밟는 곳마다 너희의 소유가 되려니와 돌이켜 마음에 미혹하여 다른 가신과 우상을 섬기면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하심을 받아 반드시 패망하고 만다’는 것(신명:11장 참조).
다섯째, 일본 정부는 신도 등 종교를 폐지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기독교로 국교를 제정하라는 것.
여섯째,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가 참된 종교라고 모두 주장하니,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참 신 여호와 하나님과 가신(바알 신을 구별하기 위하여 도전을 한 것과 같이, 일본 정부 주최로 넓은 광장에 장작 백단씩을 쌓아 놓고 신도, 불교, 기독교의 대표를 그위에 앉힌 후 일시에 불을 질러 그 속에서도 살아 남는 대표가 믿는 종교로써 국교를 창정하자(전문은 자료편 참조).
이 메시지는 약 5천자에 달하는 장편의 선언문이었다.
이것은 곧 정의의 도전이요, 진리의 선전 포고문이었다. 이 같은 도전, 참 신과 거짓 신을 구별해 보자는 신앙전은 구약 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엘리야가 갈멜 산 위에서 바알신의 제사장들과 치른 이후에 처음 제기된 현대판 엘리야의 신앙 도전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몸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우리 민족과 기독교에 내려진 일제의 폭정이 분쇄된다면 자신의 목숨 같은 것은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지난날 성령의 불로 신기한 화상 사건을 체험하여 본 경험이 있었으므로 그 같은 놀라운 제의를 과감히 할 수 있었다. 이같이 담대한 종교적 도전을 제의했던 아버지의 심경과 결의는 인간의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무엇하러 도일했는가?”
“우리는 신인양국의 평화 사절의 사명을 띤 일행이오. 미나미 조선 총독의 탄압 아래 신음하는 조선 기독교회의 신앙 자유와 투옥된 교계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서 일본을 방문했소이다. 또한 일본 제국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또 우상숭배의 하나인 신사 참배를 전 조선 기독교의 신도들과 지도자들에게까지 강요하지 말 것을 경고하려고 왔소. 일본 제국이 우리의 경고를 듣고 축복을 받든지 듣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든지 그것은 일본 정부의 자유요.”
이때 경시청 특고과 형사 세 사람이 나타나서 우리를 국회의사당의 방청석 입구 현관 밖으로 인도했다. 그 곳에는 궁성과 국회의사당에서 제일 가까운 고오지마찌 경찰서의 파견소가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심문을 받은 후에 의사당 부근의 고오지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국회의사당 후원의 출입문을 나선 우리는 형사대의 감시를 받으며 경시청으로 향했다. 나는 지나간 절박했던 순간을 생각하니 실로 꿈만 같았다. 아버지와 나는 목적을 결행하였기에 의기가 양양했다. 아버지는 옆에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영창아, 우리는 뜻했던 투쟁 목표를 관철했다. 우리 조선인으로서 이 이상 투쟁할 길이 없지 않느냐?”
그리고는 얼굴에 미소와 함께 안도의 빛을 띠었다.
31 이역 감방
32 공산주의자 오까 교수
“오까상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조선에는 40여만 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천여 명의 교역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미나미 총독이 부임한 이후 소위 신사 참배 강요 정책이 실시되었지요. 그러나 뜻 있는 목사와 장로들과 신도들이 신궁 신사 참배와 황성요배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자 비국민이라는 낙인을 찍어 투옥하여 버리니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실정이어서 제 아버님께서 우가끼 총독과 미나미 총독에게 십여 차례에 걸쳐 경고를 했지요. 그러나 그들이 마이동풍 격으로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반대 투쟁을 사십 일 간에 걸쳐 전개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효과가 없어서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고자 의사당에 들어가서 마침내 일본 정부에게 경고하는 폭탄적인 경고문서를 중의원에 던져 버렸지요.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끌려 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감탄하는 표정을 금치 못했다.
“과연 전시하에서 장하신 투쟁을 하셨습니다. 일제의 탄압에 투쟁하는 데는 그 같은 비합법 투쟁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요. 저도 십여 년 간 교회 생활을 하던 크리스천이었지요. 그러나 신앙 생활만 해서는 일본 제국을 타도할 수가 없더군요. 생각다 못해서 힘엔 힘으로, 폭력엔 폭력으로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관념적인 신앙 생활을 청산하고 혁명 운동에 직접 참가했지요. 복상 같은 분도 열렬한 그 투지로 보아서 꼭 나와 같이 공산주의 동지가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는 열을 띠며 엉뚱한 공산주의 선전을 빼놓지 않았다. 이때 간수가 테이블 위에서 무슨 공문을 오랫동안 쓰고 앉아 있다가 끝이 난 모양인지 신발 소리를 내며 10여 개 감방을 한 바퀴다.
나는 그가 또 공산당 선전을 하기 전에 선수를 쳐서 이렇게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에 찬성하지 않았다.
“복상, 말씀 마시오. 나도 기독교의 크리스천들과 다 지내 봤습니다. 그들은 가장 공리적이고 독선적인 관념론자들이 아닙니까? 그것은 한갓 특수 계급인 유한층의 악세사리이고 그 이용물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소위 민중 교화라는 값싼 슬로건 밑에서 기만적인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아편이 아니라구요?”
그는 한참 동안 종교 유해론을 폈다. 간수가 우리 방 가까이 오지 않는 틈을 타서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복상도 신앙이니 종교니 하는 것을 하루빨리 벗어버리고 우리 함께 혁명 대열의 선두에 과감히 서서 일본제국주의 강점자들에 대한 폭력 투쟁을 전개합시다. 복상 가족들의 영웅적인 일제 투쟁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싸우는 목표가 우리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복상도 이론과 투지와 정열만은 꼭 우리와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전위적 투사가 될 자격이 충분한 분입니다.”
그는 이렇게 선동적인 억설을 계속 펴는 한편, 은근히 나에 대한 경의와 찬사도 빼놓지 않으면서 동지를 얻기 위한 공작을 빈틈없이 전개하는 태도였다.
그 다음에는 우리 세 사람을 정면, 측면, 후면 등 삼면에 걸쳐 종합적으로 입체 촬영을 했다. 이 같은 지문 채취와 인상 촬영이 끝나자 다른 독방으로 우리 일행을 데리고 가더니 여섯 사람이 둘러앉아 취조(심문)를 하기 시작됐다. 어제 세밀한 신앙 사상에 관한 심문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은 특히 국회의사당에 투하한 고야마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을 일본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먼저 시작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심문은 내일부터 할 테니 오늘은 우선 음식을 많이 들라고 하면서 여러 가지 차입을 들여보내다.
형사 세 사람 중의 두 사람은 조선 경찰계에서 십여 년 이상을 근속한 소위 ‘조선통’들이었다. 그 중에는 강원도 출신의 이민이라는 조선인 형사도 끼여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환담까지 하였다. 그 뒤 오늘은 먼저 국한문으로 된 장편의 경고문을 일본문으로 좀 번역해 보자고 했다. 그들은 직업 의식을 잃고 이구동성으로 탄성을 발했다.
“선생은 어떻게 이같이 훌륭한 문장을 쓰십니까? 참 놀라운 천하명문입니다. 구구절절 웅장하고 막힘이 없는 문장입니다.”
그들은 벌써 우리가 묵었던 나까노 상원장 숙소에서 아버지가 기초한 아라끼 문부대신 이하 각계에 보낸 경고문 등의 초고 일체와 서적과 노트 등을 압수해 놓고 있었다.
형사 한 사람은 그것을 일일이 조사해 보고 한 조목씩 차례대로 열심히 검토해 내려갔다. 약 세 시간에 걸쳐서 경고문 메시지의 번역이 일부 끝나자 우리 일행은 다시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고등계 주임 이하 모든 형사들이 전날과는 달리 퍽 친절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일행이 일본 정계의 일급 거물들과 친분을 맺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보통 죄수가 아닌 귀빈을 대하듯 했다.
오까 교수는 묵묵히 듣고 있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 양극에 서 있습니다. 복상과 나는 서로가 합치될 수 없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서로를 자기 세계로 끌어넣으려고 하지 맙시다. 오직 복상이 나와 통하는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지향하는 사상과 주의에 대한 불퇴전의 자세와 백절불굴의 투지일 뿐입니다.”
이렇게 그는 나를 설득하려던 자신의 지난날의 태도를 버리고 고백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잠기는 것 같았다. 사실 공산주의자들은 경향성이 강해서 자유 민주주의의 세계를 인식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무자비한 폭력 혁명과 반대측의 숙청만이 그들의 사회 정의인 것같이 신봉하고 있으니 물을 보고 기름이 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3 죄수 박람회
큰 국가를 이룬 부강국이라 할지라도 만약 죄악이 창일하여 정신적인 부패가 극심하고 도덕 수준과 정의와 진리에 대한 감도가 낮아질 때 그 국가의 운명은 비참해질 것이다. 그러나 비록 작은 나라일지라도 도덕과 정의가 높으면 훌륭한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영국 속담에 “건전한 국민은 건전한 대의사를 국회에 선출해 보내고 부패한 국민은 색은 인물을 선출하여 국회에 보낸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지금과 같이 조국이 없는 비애를 뼈저리게 느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패 광주 학생 사건이 발생해서 데모에 참가했던 관계로 체포되었을 때와 웅변 대회에 참가해서 우승하고 나서 고등계 형사와 정면 충돌했을 때, 그리고 지난날 아버지가 두 차례나 투옥되었을 때 비로소 조국 없는 설움을 나는 뼈저리게 체험했다. 그때 나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우리 민족에게 노예의 굴레를 여지없이 씌워 버린 것을 더욱 통감했다.
나와 오까 교수 사이에 한 가지 공통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일본제국을 적대시한다는 것이었다. 민족과 사상을 초월해서 오직 ‘일본제국주의 타도’라는 슬로건은 은연중에 공동 목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우리나라 지식층의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와 공동 전선을 펴고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이 같은 사실을 이번에 오까 교수와 같이 생활하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감은 한낱 감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동위원소 같은 사상의 계보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서 물과 기름 같은 관계여서 결코 동화할 수 없다는 것을 이번에 더욱 깨달았다.
일본 제국이 조선을 지배하는 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타도는 제일의 투쟁 목표이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에 해야 할 투쟁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투쟁일 것이 분명했다. 아직 우리 민족이 공산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지 않고 있는 한 현재의 공산주의자인 오까 교수도 항일 전선에 있어서는 하나의 우군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세계관에 도저히 동조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공산주의와 기독교는 서로 용납은커녕 투쟁 대상이라는 것도 각성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내가 성서에서 얻은 기독교 사상으로 철두철미하게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일찍 기독교 사상을 갖지 않았던들, 같은 향리의 현준혁(해방 후 건준 부위원장. 공산주의자), 이동상과 같은 열렬한 좌익계 동경 유학생들이 들끓던 개천읍에 살고 있을 때에 벌써 그들과, 같이 마르크시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한때 일본에서는 대정, 소화시대에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라면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면 바보라고 할 정도로 공산주의 전성 시대가 있었다.
이곳에 수감되어 있는 수십 여 명 중에는 각색 주의자들과 각종 죄수들이 들끓었다. 그것은 마치 죄수 박람회 같았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 조국애에 불타는 민족주의자, 지금 수감되어 있는 중국인 장 씨 같은 계보의 반일 운동자, 공산주의 신봉자인 오까 교수, 도오야마 미쯔루계의 우익 분자인 야마다, 황도주의 우익 분자들을 손꼽을 수 있다. 그 밖의 죄수들은 파렴치범으로서 사기, 절도, 방화, 살인 미수, 강도들이 각각 수감되어서 마치 범죄인의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이같이 혼란한 사상의 도가니와 범죄의 소굴 속에서 나는 더욱 나 자신에 대한 신념의 긍지로 가슴의 맥박이 뛰고 있었다. “사상은 주의요, 주의는 신앙이요, 신앙은 곧 힘이다”라는 중화민국 국부인 손문의 말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웃 방에 수감되어 있는 아버지는 매일 매시간 쉬지 않고 기도를 하였다. 또 재감자들과 재미있게 필담을 하며 웃는 소리가 간간히 우리 감방까지 들려 왔다.
아버지는 비록 일본말을 못했으나 한문에 조예가 깊어서 같은 감방에 있는 공산주의자인 사또오에게 아무 불편 없이 한국의 역사와 기독교의 교리 등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감방 안에서는 모두들 아버지를 한문 박사라 하였고 아버지는 인기가 높았다. 어느 날 사또오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감방 속에서도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계신데, 어찌해서 마음이 평안합니까?”
아버지는 곧 글을 써서 물음에 답해 주었다.
“큰 괴로움이 있은 뒤에 큰 즐거움이 있고 역경이 변해서 순경이 되는 법이오. 우리 기독교 신도는 신앙의 연단으로 이 잘은 고통을 체험해야 더욱 십자가의 정신을 깨닫게 되는 것이오.”
그러자 사또오는 “나루호도, 나루호도!(옳소이다, 옳소이다)” 하며 감탄하였다.
“선생의 그 용기와 기쁨은 어디서 생기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즉각 “예수 그리스도가 내 마음속에 계시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참 잘 알겠습니다. "
그는 감탄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사또오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담력을 떠보려고 짐짓 농담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 뒤부터 사또오는 감동이 되어서 언제나 아버지에게 호감을 가지고 존경하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어느 날, 식사시간에 이런 일도 있었다. 같은 감방의 일본인인 어느 젊은 죄수가 아버지가 한참 감사 기도를 하는 동안에 밥과 국을 모두 훔쳐먹었다. 눈을 뜬 아버지는 앞에 놓아 둔 목함 속에 밥이 없어진 것을 보고도 웃으면서 “요로시이, 요로시이(좋다, 좋다)”만 연발하였다. 노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죄수는 크게 감동했다. 그 다음부터는 식사시간에 아버지가 밥을 안 들고 옆에 있는 수감인에게 내어 주는 것을 보고 사또오가 또 크게 감동을 했다. 그래서 그는 감방에 새로 들어오는 죄수들이 아버지에게 실수를 하면 모질게 기합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공산당원 사또오는 아버지 편에 선 협력자가 되었다.
과거 경장이년(1597년) 도요도미 히데요시 당시에 기독교 박해로 26명의 순교자 성인이 나고, 수천 명의 기리시단 박해로 나가사기 등지에서 순교자가 많이 나온 일본이 아니었던가.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피를 홀린 일본 기독교회가 어찌하여 자기 조국의 흥망 성쇠가 달린 잘못된 범죄적 악정에 대해서 침묵만을 일삼는지 실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정녕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인데 말이다.
“순교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또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순교자들의 피는 그들의 추수를 위한 종자이다”라고 하였으며, 기브리아누스는 말하기를 “순교자들의 피는 항상 교회의 종자들이 되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번 전쟁 중에 신도 사상과 황도주의에 항거하여 싸우다가 피를 흘리는 일본 기독교회의 순교자들이 적어도 수십 명 정도는 나와야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오늘의 일본 기독교의 현실을 보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34 강제 압송
과연 빠른 것은 광음이었다. 감방 생활도 어느덧 한 달이 홀렀다. 지루한 엄동설한도 어느덧 지나고 화창한 봄이 찾아드는 3월말이었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도쿄 일대에는 벚꽃이 만발할 무렵이다. 어느 날 아침, 늙은 간수는 우리 감방을 향해서 큰소리로 외쳤다.
“3번, 7번, 8번 모두 나와!”
생각하면 꿈같은 근 40일 간의 옥중 생활이었다. 아버지로서는 벌써 세 번째 옥중 경험이었다. 그러나 나는 광주 학생 사건 이후 이번이 두 번째의 경험이었으며, 안 선생은 처음 당하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이번 시련을 통해서 더욱 인내력과 투지를 기를 수 있었다. 이제는 몇 년의 징역이라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아니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해도 큰 충격을 받거나 낙담할 우리가 아닐 것 같았다. 그것은 그만큼 현실을 초월한 세계에서 목숨을 내걸고 인내의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특별 훈시를 했다.
“현시국은 전시 체제로서 생을 황국에 향유한 자는 모두 총칼을 들고 대군의 성은에 보답하기 위해서 제일선으로 출정하는 비상 시국이오. 이 같은 중대 시국에 당신네들이 이번에 범한 행동은 심히 못마땅한 일이었소. 당신도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한 청년의 몸으로서 앞으로 황은에 보답할 생각을 가져 주기를 마지막으로 주의 겸 당부하오.”
“축하합니다. 고국에 돌아가시게 되었다지요. 오늘 점심을 저희 세 사람이 복상 가족의 귀국 송별연으로 준비하겠으니 우리들의 작은 정표를 받아 주십시오.”
“아닙니다. 이런 환경에서 송별연이 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먼저 나가게 되니 일편 여러분께는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그 같은 형식은 버리고 마음의 온정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이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 호의를 거절하신다면 너무도 가혹하지 않습니까? 벌써 특고과의 양해를 다 얻어 놓았으니 우리 이웃 방에서 여섯 사람이 오붓하게 오찬이나 듭시다.”
그들은 극구 우리를 자기들이 매일 나와서 글을 쓰고 있는 조용한 이웃 방으로 안내했다.
“오, 적색과 백색의 송별이구만.”
어떤 형사의 비꼬는 말이 들렸다. 정오가 좀 지나자 오야꼬 돔부리(닭고기 달걀 덮밥)와 생과자와 사과가 들어왔다. 오까 교수는 퍽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는 실로 의미심장하고 또 일면 섭섭한 모임입니다. 인간이란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원칙이나, 이번 우리 일행 삼 인이 일 년 이상 수감 생활을 하는 중에, 아니 일생을 통하여 박 선생 가족들같이 인격과 사상과 신념이 강한 분들은 처음 대해 봅니다. 여러분이 비록 저희들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지는 않더라도 여러분이 서 있는 땅과 여러분께서 투쟁하는 목표는 오로지 정의 편에 있다는 점을 확신합니다. 압박의 서러움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헌신 투쟁하는 모습에 저희들도 깊이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이 같은 간소한 송별회일망정 귀국하시는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다시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이어 아버지의 간단한 답사와 함께 우리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의 입회 형사도 없이 약 삼십여 분간의 송별 오찬 모임을 가졌다.
과연 자유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은총 가운데 가장 큰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수님은 사로잡힌 자의 해방이며, 눌린 자에게 자유라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마음속 깊이 주님의 은혜에 감사했다. 그때 호송하던 형사 한사람이 재빠르게 승강대로 뛰어가서 막대기 끝에 붉은 수건을 꽂았다. 그러자 대기했던 요꼬하마 경찰서의 특고과 형사 세 사람이 같이 손을 흔들며 객차 안으로 올라왔다. 동경에서 온 형사 세 사람은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들은 우리 세 사람을 릴레이식으로 또 다른 형사들에게 넘겨주고 총총히 도쿄역으로 돌아갔다. 도쿄에서 요꼬하마, 요꼬하마에서 시즈오까, 나고야, 오사까, 오까야마, 히로시마, 시모노세끼 순으로 특고과 형사 세사람이 각 역마다 빈번하게 계속해서 교대하였다.
생각하면 실로 기이한 행차였다. 아버지와 안 선생이 일본을 향해서 떠날 때에는 도항 증명서가 없어서 도중에 체포될 것을 염려하며 안 선생 혼자 정신적 고통을 당했으나, 이번 귀국하는 길은 떠날 때의 행차와는 달리 큰 파문을 던지고 명랑한 기분조차 느껴지는 행차였다. 더구나 시즈오까서의 형사들은 우리 일행에게 환송시까지 지어 주며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환송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선생이 일본에 올 때에는 산허리에 눈송이가 덮였으나 돌아가는 이 시절엔 산허리의 꽃들이 방긋이 웃고 있어라.”
이는 와까라는 일본 전형적인 시가였다.
아버지의 신앙 체험담을 듣고 대단히 감격하여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일본인 형사도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는 길에 나와 안 선생을 향해서 이 같은 감회를 토로했다.
“영창아, 우리를 지키는 형사들이 세 명씩 따라다니듯이 우리를 보호하여 인도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군 천사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 부 아버지와 아들
35 조국의 비가
“선생님 참 잘 알았습니다. 선생님을 뵈옵고 여러 가지 말씀을 듣고 보니 비로소 인생이 무엇인지, 또 조선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선생님, 저는 머지않아 이 직업을 그만두고 만주로 가려고 합니다. 대륙에 가면 좀더 뜻 있는 일을 할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제는 인생의 재출발을 하여 볼까 합니다. 선생님의 여러 가지 말씀은 평생토록 잘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경상북도 출신으로 한 30여 세밖에 되지 않은 김 씨라는 젊은 형사였다.
“그렇게 하시오. 어떤 사람이 층암절벽에서 떨어지다가 낙락장송 가지에 걸려서 층암 절벽 위로 올라가려고 암만 애를 써 보아도 뜻대로 되지 않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대장부라면 모험적으로 유일한 생명선같이 생각되는 그 소나무 가지를 한 번 뿌리쳐 버리고 층암 절벽 아래로 담대하게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뜻밖에도 그곳에는 기암괴석이 있어 떨어져 죽을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져 주는 구명의 그물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정의를 행하여야 새로운 생과 새 역사가 열리게 된다는 것이 대장부가 처세하는 요체인 것입니다. 눈을 딱 감고 용감하게 단행하면 반드시 오늘날 환경보다는 나을 터이니 변심하지 말고 지금의 올바른 결심대로 꼭 단행하여 보십시오.”
늙은 형사는 시종 주의 깊게 나의 말을 듣더니 감격 어린 어조로 말했다.
“박 선생의 말을 듣고 내가 지금 느끼는 것은 조선인의 몸으로 어떻게 그렇게 용감한 투쟁을 했는지 놀랍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는 신앙심이 과연 필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됩니다.”
흥아 특급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달렸다. 일본은 동아의 맹주를 자처하며 한반도를 대륙 정책의 병참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수송 정책에 더욱 전력을 기울였다.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흥아 특급은 부산역에서 발차하여 만주국을 경유, 중국 북경역까지 가는 급행 열차였다. 지금 이 국제 특급은 한강철교 위를 통과 중이다. 삼년 만에 그립던 조국의 서울을 보는 나의 마음은 그저 남모르는 희망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침착한 태도로 그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내가 당신네들이 발행하는 도항 증명이나 받아들고 현해탄을 건너 다닐 사람 같소? 또 당신네들이 언제 나에게 도항 증명을 발부하여 준 일이 있었소? 나는 하나님의 허가를 받고 내왕하는 사람이오. 누가 나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 투쟁을 꺾는단 말이오? 나는 이제 사선을 초월한 사람이니 당신네들 마음대로 하시오.”
이때 시미즈가와 고등계 주임은 새삼 놀란 듯 되물었다.
“그럼 도항 증명 없이 일본에 갔단 말이오?”
“그렇소. 무인지경을 지나가듯 하였소.”
“고레와 오도로이따나! (이것 놀랐는데)” 하며 그는 다소 태도가 달라졌다.
36 감시 속의 웨딩 마치
결혼식 날 안주읍 성안에 있는 동교회는 결혼 축하객으로 들끓었다. 교회당 정문에는 ‘신랑 박영창 군, 신부 이정애 양 결혼식장’이라고 쓴 간판이 소나무가지로 틀어 만든 커다란 아취에 장식되어 있었다. 내가 귀국한 지 한 달이 넘어서였다. 생각하면 실로 다사다난했던 결혼식이었다.
신랑인 나는 이날 프록 코트 성장에 실크 해트를 들고 예복용 백색 넥타이를 맸다. 들러리 친구들은 신랑과는 달리 모닝 코트를 똑같이 입었다. 전시하에는 보기 드문 모습으로 성장을 한 신랑과 호화판 들러리들이었다. 우리는 일제의 전시하에서 일부러 서구식을 택해 자유주의 국가의 의식으로 결혼식을 마련했던 것이다. 오늘은 문제의 부자가 주인공으로 대중석에 등장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안주읍 경찰서 고등계 형사들도 결혼식장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같이 경찰들의 감시하에 진행되는 결혼식이란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날 참석한 형사들 중에는 3년 전 내가 웅변대회에 나갔을 때 원고 내용이 불온하다고 압수했다가 나와 싸웠던 이근배라는 강퍅해 보이는 형사의 얼굴까지 보였다. 이날의 주례자는 시인 한흑구 씨의 부친이며, 미국에서 18년 만에 귀국하여 안주읍 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한승곤 목사였다.
37 대륙의 돌파구들
동산현의 서주라는 곳은 한나라와 초나라 이래로 유명한 고도이며, 삼국 시대에 유현덕, 관운장, 장비 즉 유관장 3인이 도원결의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장훈이 음모를 꾸미던 곳이기도 했다. 자고로 서주를 손에 넣고 못 넣고에 승패가 달릴 정도로 이곳은 군사적 요충 지대이며, 중일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서주 대회전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그 곳에 체류하는 동안 나는 대표적인 명소를 모두 둘러보며, 한인 거류민들의 생활 실태와 중국 각 기관을 돌아볼 수 있었다. 기독교 기관으로는 카톨릭 계통의 신신 중학교가 유명했다. 시설로 보나 교사진으로 보나 학생 수에 있어서나 대표적이었다. 또 시내에는 연당 정각 정원 목교로 이름 높은 서주 공원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성 안에서 삼 리 가량 떨어져 있는 성 밖에는 조조가 사찰을 지었다는 운룡산이 유명했다. 산상에는 소동파의 방학정기로 이름이 알려진 방학정이 있고, 뜰에는 음학이라는 옛날에 파 놓은 우물이 있는데 깊기로 유명했다. 주란화각의 절에는 정전 후면 벽이 전부 암석인데, 그 큰 암석에 커다란 반신 불상을 집채만큼이나 크게 조각해 놓은 것도 가관이었다.
그리고 유관장 3인이 형제의 의를 맺었다는 도원의 옛터가 성 안에 있었다. 이 유관장 3인의 ‘도원결의’ 이야기는 내가 본국에서 수없이 들었지만 막상 그 터에 와서 보니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그리고 정거장 북편에는 장량이 삼경 달밤에 옥퉁소를 불어서 팔천 제자들 헤쳐 버리고 때가 불리하다는 탄식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명 자방산으로 불리는 계명산이 있었다. 또 북편에는 토대가 있으니 한신에 패하여 오강에 다다른 항우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지, 내가 싸움을 잘못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자살한, 항우가 훈련을 했다는 희마대가 있었다. 건응의 시의정, 동파의 쾌재정, 낙휘루도 있었다.
38 일본 제국 패망론
“아니다. 너는 아직 젊었으니 중국에 다시 건너가서 때가 오기까지 수양 생활을 하는 것이 상책일 거다. 그러나 내가 조선 기독교회를 사수하지 않고 홀로 외국으로 빠져나가면 어찌 되겠느냐? 그건 절대로 안될 말이다. 그리고 이건 딴 이야기지만, 내가 네게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 동안 너를 퍽 고대했다. 다름이 아니라 듣건대 김선두 목사가 일본 유학생인 김두영 군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서 정계 요인들에게 신사 참배 철폐 교섭을 하고 돌아와서 개성 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신의주의 이기선 목사 이하 십여 명의 신앙 동지들이 며칠 전에 신의주 경찰서에 모두 검속됐다는 급보를 들었다. 우리가 동지들과 형제들의 역경을 보고 어떻게 수수방관할 수 있겠느냐? 우리가 같이 곧 신의주로 가서 도지사에게 경고를 하여 즉시 그들을 출감시키도록 하자.”
나는 쾌히 아버지의 말씀을 좇기로 했다.
천상천하 독일무이 (天上天下 獨一無二)
대성대권 만왕지왕(大聖大權萬王之王)
부활증인(復活證人) 박관준
일본인 지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이 같은 명함을 생전 처음 봅니다” 하면서 얼굴이 좀 붉어지더니 머리를 갸웃거리며 예복을 갖춘 아버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때 아버지는 “그야, 나 같은 사람을 처음 만났으니 그 같은 명함을 처음 볼 것이 아닙니까?” 하고 응수했다.
니시모도지사는 옆에서 통역을 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물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일본 신학교 박영창’ 이라는 명함을 내놓으며 대답했다.
“저는 아들 되는 사람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명백히 지적하겠습니다. 양심의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지금 지사 각하 관내의 옥에 갇혀 있는 기독교 목사와 신도들에게 자유를 허용하여 곧 석방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만약 이같이 죄 없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취급한다면 성인의 말씀에 ‘필부지한(匹夫之恨)이 오월비상(五月飛霜)이요, 일부지한(一婦之恨)이 고한삼년(枯旱三年)(필부 한 사람의 원한이 오월달에 서리를 날리고, 지어미 한 사람의 원한이 3년 간을 가물게 한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임하실 것입니다.”
니시모도 지사는 이 말을 듣고 나더니 처음 듣는 양 머리를 끄덕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때 아버지는 나를 조용히 부른 후에 이같이 타일렀다.
“영창아, 이젠 이론 투쟁은 그만 중지하자. 너는 총독부에 올라가서 이 부당한 처사를 다시 한번 경고하도록 해라. 그리고 너는 빨리 중국으로 탈출해야겠다. 동양 속담에 ‘부자는 한 배를 타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같은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 당해 부자가 같이 죽으면 누가 후사를 이을 것이냐. 내 말 알아듣겠느냐?”
“네, 그 뜻은 알겠습니다만, 그러나 어떻게 제가 아버님이 구속당하시는 것을 보고 홀로 떠날 수 있겠습니까? 동경에서처럼 감금 생활을 해도 아버님과 같이 해야 제 마음이 더 편하겠습니다.”
“아니다. 너는 모르는 소리다. 이번 전쟁은 여러 해 갈 것 같다. 이번 사건은 쉽게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꼭 나의 말을 명심하고 이곳을 빨리 떠나야 한다. 알겠느냐?”
아버지는 나를 재촉했다. 생각하면 실로 기막힌 명령이었다. 아들 된 몸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항일 투쟁을 하다가 철창에 아버지만 남겨 두고 이별하기란 실로 단장의 슬픔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는 이때만큼 독자의 입장을 서러워한 적이 없었다. 나는 성화같은 아버지의 독촉을 받고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곧 영변읍내에 거주하고 있는 아버지의 친구 되는 유지 선배 김형제 씨를 찾아가서 아버지의 사정에 대한 전말을 고한 뒤 감방에서 갈아입을 의복과 사식 차입을 부탁했다. 그리고 즉시 단신으로 서울을 향하여 마음 아픈 발걸음을 옮겼다.
39 아버지와 아들
“오랫동안 못 뵈었습니다. 이번 황공하옵게도 성상 폐하로부터 훈일등의 훈장이 하사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인사차 찾아왔습니다.”
그는 횐 오동나무 뚜껑을 열고 찬란하게 만든 금색 훈장을 다나까씨에게 내보였다. 다나까씨도 부동자세로 일어서더니 같이 인사를 교환하고 훈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그것 참 영광스러운 경사입니다. 충심으로 축하합니다.”
“모두 여러분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 더 잘 부탁합니다.”
예복을 입고 찾아왔던 중년 신사가 돌아가자 다나까 씨는 혼자말로 “정말 훈일등 훈장이 남들보다 빨리 나왔는걸” 하며 자기 자신의 일같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앉아 있던 나는 궁금증이 일어나 그에게 물었다.
“누구나 훈일등 훈장을 받기 란 참 어려울 테지요?”
“아, 어렵구말구요. 한평생을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이바지해도 겨우 받을까 말까 하는 귀한 것이지요.”
“방금 인사 왔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완용 씨의 자제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갑자기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곳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모닝 코트의 중년 신사야말로 삼천만 동포가 이를 갈고 원한의 대상이 되어 있는 만고 역적이며 매국노라고 지탄받는 사람의 후예가 아닌가. 자기 조국을 일제에 팔아먹은 친일파 괴수의 직계 이세. 그러기에 일본 제국의 소화천황으로부터 훈일등 훈장이 수여된 것이 아닌가. 다나까 통역관의 말과 같이 남보다는 수월하게 나왔을 것이었다.
어느 해, 미나미 조선 총독이 일본 제국 의회에 보고 차 도일하여 조선 총독으로서 시정 보고를 하자, 어떤 대의사가 “조선 통치는 원활하게 잘 되어가느냐?”고 질문했다. 이때 미나미 총독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조선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40만 군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야소교(기독교) 교도들입니다.”
그의 대답에서 우리는 미나미 총독이 얼마나 조선 기독교를 중시하고, 또 증오하며 탄압 정치를 강화해 나갔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40 순교자의 거상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노예 생활을 하는 핍박받는 민족에게는 시간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인 것 같았다. “시간은 진리를 발견하고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인간은 흘러가는 시간에 매달려서 진리의 길을 발견해야 한다.
본적지인 영변 경찰서 고등계 주임실에서 아버지와 눈물의 결별을 하고, 아버지가 신의주 도경찰부의 검속 지시로 신의주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가 평양 형무소로 이감된 지도 벌써 6년이 되었다. 그 동안 아버지가 옥중에서 보낸 세월은 참으로 길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나긴 옥중 생활에서도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천국 시간이 지상의 옥중 생활에 반영된 듯이 장기간의 옥고를 오로지 강한 신앙의 의지로 이겨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제 칠순을 몇 달 앞둔 고희의 고령자로서 건강이 심히 걱정되는 나이였다. 이웃 방에 갇혀 있던 주기철 목사, 최봉석 목사, 이현속 장로는 벌써 1년 전에 옥중에서 운명을 했다. 확실히 지금까지의 아버지의 건강과 체력은 자기 자신의 체력이거나 건강력이 아닌 것 같았다. 정녕 그것은 신이 같이 하시는 초인간적인 원기와 건강이었다. 그러나 젊은이라도 견디기 어려운 6년 간의 오랜 옥중 생활에 시달린 아버지의 체중은 이제 줄대로 줄어 있었다.
약 일 년 간은 사식도 들여 주었으나 그 뒤부터는 그것마저 없어졌다. 관식이란 것은 일부는 썩고 뜬 내 나는 콩깻묵까지 주는 형편이었다. 이 같이 영양도 없고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을 주니 일부 죄수들은 음식에 질려서 쓰러져 죽는 경우가 생길 지경이었다. 이런 것을 먹고 몸이 부었다 줄었다 하니 청장년이라도 견딜 수 없는 악형의 생활이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별별 고문을 다 당하여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안광과 정신력은 새벽별과 같이 빛나고 건장했다. 누구라도 그를 칠순으로 볼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도 인간인지라 그렇게 윤기 있던 흑발이 오늘엔 벌써 성성한 백발이 더 많아졌으며, 구레나룻 수염은 최고령자의 인자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배달민족이 처해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무의식 분자가 되어 정의와 진리에 무관심했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도 않을 입장이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는 성경 말씀으로 위로를 받았다. 평범히 살면 이 같은 고난이 따를 리 없었다. 그러나 의로운 생활에는 고통의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는 지금 붉은 벽돌로 높다랗게 쌓아 올린 평양 형무소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지금 그 곳에는 아버지 외에도 이십여 명의 열렬한 교회 지도자들이 푸른 미결수의 죄수복을 입고 수감되어있었다.
일본인 예심 판사가 3년 간은 구류 권한이 있어 예심을 한다고 시일을 끌면서 경찰서에서 1년, 검사국에서 1년, 예심에 3년, 합계 5년을 보냈다. 이 같은 방법은 결국 기독교 지도자들을 옥중에 묶어두자는 악랄한 방침이었다.
최봉석 목사는 기뻐 부르짖기를 “우리 주님은 홍포를 입으셨다는데 우리는 청포를 입게 되었으니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감사의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영양 실조로 눈이 멀고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로 병약한 사람이 생겼다. 그러나 어떤 위협도, 유혹도, 탄압도 그들의 불사조와 같은 신앙심과 사상적 지조를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일본 제국은 대동아의 우방들을 석권하고, 세계 민주 국가들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다. 그리고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여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미국 군함과 태평양의 불침도라고 불리던 사라도가호와 항공모함 렉싱톤 등 전함을 순식간에 격침하고, 레이테만과 아쯔쯔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그처럼 막강한 군국 일본도 이들 옥중성도들의 금강석같이 굳센 신앙 지조만은 분쇄하지 못했다. 이들의 신앙 양심과 민족 정기야말로 암흑 같은 일제하에서 우리 민족사회의 횃불이었다.
옥중지도자들 중에 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 여사는 기도하는 중에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에서 큰 뱀이 기어 나와 조선 교회를 통째로 삼켜 버리려고 입을 벌리며 달려들자 주기철 목사가 큰 검을 빼어서 그 뱀을 세 동강으로 찍어 내던지는 환상이었다. 이 놀라운 환상을 보고 오 여사는 더욱 힘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옥중 성도들에게 퍼졌다. 뿐만 아니라 주남선 목사와 최봉석 목사는 옥중에서도 개인 전도를 해서 예수를 믿게 된 죄수들을 위해 옥중 교회를 세우고 신자가 된 죄수들에게 세례까지 주었다.
“장로님, 이제는 그만큼 여러 해 동안이나 옥중 생활을 하셨는데 재판장에게 잘 말씀하셔서 나오시면 어떨까요?”
“그건 안될 말이지. 일본 제국이 망하든지 내 생명이 다하든지 끝장을 봐야지.”
이때 재판소 넓은 광장에서 일본 군인들이 신호 나팔을 불며 맹렬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아버지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리를 가다듬은 후에 한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힘있게 말했다.
“저것 보게. 일본 군인들도 일국의 황제와 자기 조국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려고 저렇게 힘을 들여 훈련을 받고 싸우다가 죽지 않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병이 되어서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훈련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뜻 깊고 감사한가?”
그토록 쇠약한 분이 어디서 그런 우렁찬 음성이 나오는지 놀랄 정도였다. 아버지는 말을 계속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는 다섯 번이나 욕을 보시고 마지막 운명하실 때까지 욕과 고생을 참지 앓으셨는가? 주님께서도 아무 죄 없이 흘로 우리 인간들의 죄악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가 이 정도의 고생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 고통에 동참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도리어 격려와 훈계의 말을 하였다.
41 1945년 해방 예언
어떤 직원이 간수를 뒤따라오며 무슨 말을 건네자, 간수는 그와 상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라고 한 걸음쯤 아버지보다 뒤처졌다. 이때 안 집사는 재빨리 아버지에게 말을 건넬 기회를 얻었다.
“장로님, 재판 때에 재판장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어요?”
“재판장이 나더러 말하기를 ‘일본이 대동아전에서 이렇게 승리를 하고 있으니 영감님 너무 고집 피우지 말고 신사 참배에 동의하고 이제는 감옥에서 나가시오’ 하기에 ‘미나미 총독도 나에게 머리를 숙이며 충고에 감사한다고 말했는데, 내가 재판장인 당신의 말을 듣겠소? 명년인 1945년 8월에는 당신들이 나를 가두어 둘래야 가두어들 수도 없을 것이오. 그때 일본이 망하든지 조선이 독립되든지 간에 끝장이 날 터이니 나는 그때에 나가겠소’라고 말했지.”
뜻밖에도 이 같은 말을 들은 안 집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것은 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야. 분명히 나는 계시를 받은 그대로를 말했을 따름이니까‥‥.”
달이 가고 해가 거듭될수록 사오십 명의 옥사자와 병자가 생겨서 최고령급에 속하는 한글학자이며 강경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자인 채정민 목사를 위시해서 몇몇 전도사는 병보석으로 눈물을 흘리며 출옥했다.
경남 지방 출신인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최상림 목사는 강한 신앙의 투지력을 소유한 분들로서, 평북 출신의 이기선 목사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좋은 쌍벽을 이루는 동지들이었다. 이상하게도 옥에 갇힌 이들 20여 명 가운데 거의 반수는 평안남북도 출신이고 또 나머지 반수는 경상남북도 출신이었는데, 이는 실로 남북을 대표하는 강경한 지방 성격의 상징인 것 같았다. 이 같은 옥중 성도들에게 처음 일 년 동안은 사식이 허용되었다. 가끔 차입을 들이며 면회를 오는 교우들은 그들의 가족 정도였고, 극히 소수의 신앙 동지들뿐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후에 사식마저 금지했고, 사람들이 먹을 수 없는 상한 음식을 배급하여 병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이같이 혼돈한 조선 교계의 현실을 냉철히 바라보는 신도들은 신사 참배를 장려하는 목사들이 목회 하는 교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리고 양심 있는 신도들은 교회 출석보다 가정 예배를 드리거나 산과 들에 나가서 야외 예배를 많이 드렸다. 가족 단위로 혹은 극소수의 동지 단위로 비밀히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오히려 은혜가 되었다. 그 같은 예배 처소를 지하교회라고 불렀다. 그것은 바로 20세기판 ‘카타콤’ 예배였다.
한편 양심의 가책을 솔직히 고백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목회를 하는 목사들의 교회는 그래도 형식적으로나마 교회를 겨우 유지해 가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때에 전국의 각파 교회가 성결교회를 위시한 몇몇 교회와 같이 폐쇄되거나 또 교회 문을 미리 닫아 버렸다면 더욱 의의가 깊었을 것이다. 전투적 승리의 교회가 실로 아쉬운 암흑 시대였다. 실로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을 슬프게 하고, 뜻 있는 신앙인들의 빈축을 사게 하는 사악한 시대였다.
“모두들 잘 계시우.”
안 집사가 뛰어나가 보니 과연 그들이 그처럼 고대하던 나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기겁하다시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이구, 맞았어요. 맞았어요. 이렇게도 신통하게 기도가 들어맞다니요. 박 장로님 사모님이 지금 오셨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안집사는 무척 반기며 고함을 질렀다. 그녀의 어머니도 놀라며 문을 열어제치고 뛰어나왔다. 어머니는 반가워 손을 잡았다.
“사모님, 마침 잘 오셨어요. 장로님이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와서 상심 중에 방금 기도를 했어요.”
“그럼, 우리 곧 형무소로 갑시다.”
어머니는 아버지 소식을 듣고 얼굴에 불안한 빛을 띠었다.
“참, 하나님께서 도우셨지 뭡니까? 수백 리 밖에 있는 분이 이웃 방에서 나오듯 하니 말이야요.”
“참, 신기해요. 그럼 어머니, 사모님 모시고 우리 형무소로 바로 갑시다. 우리 기도가 전보보다 더 빨랐는데.”
세 사람은 이같이 위급한 때에 신기하게 일이 맞으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하며 신기하다는 말만 연발했다. 평양 형무소에 다다른 일행은 형무소 직원의 안내로 간수가 있는 우중충한 방으로 들어갔다. 간수는 피 묻은 낡은 옷을 한 뭉퉁이 내주었다. 세 사람은 혹시 장로님이 돌아가시지나 않았나 하는 불길한 예감으로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앉아 있는데, 한참 있으니까 직원 두 사람이 하얀 보를 덮은 중환자 같은 사람을 들것에 뉘인 채로 들고 나왔다.
“박 장로의 병세가 위독하니 병원에 입원을 시켜야겠는데, 어느 병원에 입원시키겠소?”
간수가 물었다.
“기독 병원에 입원시켜 주세요!”
안집사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뿐인가? 내가 어제 새벽, 그러니까 감옥에서 위독해지기 전날, ‘관준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오늘이 졸업이다. 내일 나가서 삼 일 간만 성경을 가르치고 나 있는 곳으로 오너라.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다. 내가 금면류관과 금띠 한 개를 네게 더 주리라. 이제부터는 너를 죄인이라 하지 않고 아들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천국은 다 네 것이다’ 하는 계시까지 분명히 받았는데.”
아버지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뜻을 생각해 보니 내가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 헌신한 지 어언간 팔 년이 되었거든. 참 그대로 맞았지 그런데 ‘삼일 선생’이라는 뜻을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야. 감옥에서 나가서 삼 일 간만 성도들에게 신앙 간증을 하라는 뜻인데, 그래도 삼 년은 더 살아야 일본 정부나 총독과 더 싸울 수 있을 텐데, 참 어떻게 될는지.”
안 집사는 아버지의 간증에 감격하고 방금 들은 간증담을 모두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가 종이를 곱게 꼬아서 단단하게 만든 트렁크 손잡이 같은 것을 이상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장로님, 이게 무엇이야요?”
아버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었다.
“그것 말이야? 그것은 내가 8월 달에 출옥할 때 내 짐을 들고 나오려고 한 달 동안 노끈을 꼬아서 트렁크 손잡이를 만들어 미리 준비를 해둔 거지.”
“그러니까 지금 출옥하신 것이 아니어요?”
“아니야, 진짜 출옥은 금년 팔월달이야.”
안 집사는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아버지가 하는 말은 지난번에 예언같이 말한 바를 거듭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 아버지는 “1945년 8월에는 일본이 망하여 우리가 다 출옥을 하게되고 조선이 독립된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안 집사는 마음속으로 금년 8월을 주목하고 있었다.
42 영광의 그날
아버지는 1945년 정월을 맞이하자 금년 8월에는 석방되는 새해를 맞이하였다고 어느 해보다도 기쁨에 넘쳐 있었다. 정월 중순경 어느 깊은 밤, 아버지는 감방 안에서 홀로 기도를 하고 취침 중에 환상을 보았다. 앞에 큰 바위가 나타났는데, 돌연히 양쪽으로 깨지더니 샘(생명수)이 콸콸 솟아나와서 마음껏 마셨다. 또 천사가 나타나더니 ‘만나’ 라는 떡을 큰그릇에 가져오고, 또 때를 따라 다른 천사가 나타나더니 “이것은 생명 과실이다”라고 하면서 주렁주렁 달린 가지를 한아름 꺾어 가지고 와서 마음껏 따먹으라고 하여 마음껏 먹었다. 아버지는 이같이 환상 속에서 영계의 음식물을 먹은 후부터는 이상하게도 시장한 생각이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감방에 넣어 주는 관식을 전폐하고 더욱 금식기도에 전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같이 6년 간 옥중 생활을 치른 아버지는 1945년 8월은 일본이 망하는 해라고 믿고 너무 기뻐서 40여 일 간에 걸쳐 금식을 단행했다. 이로 인하여 건강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다가 의식을 잃고 깊은 혼수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아버지가 혼수 상태에 빠지자 형무소 당국자들도 당황해서 즉시 측근자를 불러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나는 ‘팔 년 성사에 삼 일 선생’이라는 계시와 같이 나의 책임을 다하고 영계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16절의 말씀대로 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때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러다가 점점 음성이 작아지더니 향년 70세를 일기로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 때는 1945년 3월 13일 오전 10시 정각이었다.
아버지의 임종은 이같이 너무도 평화로웠다. 그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영광 어린 영의 승천이며 빛나는 혼의 승화였다. 대리석을 깍은 듯한 얼굴의 광채 나는 모습과 횐 모발과 수염은 장엄하고도 숭고한 순교자로서의 거상이 잠들고 있는 것을 방불케 하였다. “큰그릇은 늦게야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고령의 만년에 결실을 이룬 셈이었다.
“장로님, 박 장로님. 조선 교회를 버리시고 흘로 이같이 떠나시나이까? 저는 하나님과 박 장로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 연약한 종도 와석종신은 결단코 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장로님, 저도 나머지 여생을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싸우다가 마치겠습니다,”
자신의 말대로 해방 후 김화식 목사는 이북 공산당 폭정 아래서 기독교 자유당 사건으로 김관주 목사와 같이 반공 투쟁을 하다가 옥사했다.
장례식은 그 이튿날에 거행되었다. 별세한 지 하루만에 장례를 서둘러서 하게 된 이유는 일제 경찰이 권고하는 화장을 모면하고 토장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일 년 앞서 주기철 목사가 옥사를 당한 때에도 화장을 하라고 경찰서에서 권고한 것을 교우들이 반대해서 간신히 모면했던 경험에 비추어 시행한 것이었다.
장지에는 벌써 토장 준비가 되어 있었다. 송판으로 짠 관 안에는 어머니가 백포를 씌웠고, 김화식 목사가 자택에서 백색 한지를 가져다가 깔았다. 그리고 신앙 동지인 윤원삼 장로는 자기 부인의 꿈속에 아버지가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났다고 하면서 환상을 본 그대로 두루마기를 밤새워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렇게 해서 전시일망정 아버지에게 명주 수의까지 입힐 수 있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이곳에는 신앙의 승리를 하신 순교자 박관준 장로님의 육신의 장막이 고이 안식되어 있습니다. 박 장로님으로 말하면 20세기가 낳은 한국의 엘리야라는 칭호를 듣던 조선 교회의 선지자이자 신앙의 용장이시며, 특히 역대 총독과 일본 제국의 홍망을 경고하신 경고자로서 다니엘과 세례 요한에 비길 만한 위대한 신앙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먼저 가신 순교 성도들의 뒤를 따라 우리들도 이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주 목사님도 일찍이 일사각오를 외치셨다가 순교를 당하셨지만 오늘 또 이같이 위대한 신앙의 승리자이신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조사를 읽던 오정모 집사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자 모든 교우들도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장례식이 끝나자, 전쟁으로 물자가 귀한 시국인데 교우들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시멘트 두 포대를 가는 모래에 반죽해서 첨광과 목관 위에 개어서 덮어씌웠다. 물이 들지 않고 꺼지지 말라는 일념에서 이같이 정성 어린 성분을 했다. 무덤에 잔디를 입히고, 또 상록수인 녹아지나무 네 그루를 무덤 사면에 식목했다. 이것은 후일에 어떤 자가 묘비를 없애도 무덤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고 화강석에 조각한 작은 석비까지 묘전에 세워졌다. ‘박관준 장로지’라는 간단한 비명이었다.
어디선지 봄눈을 녹이는 산새들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름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조선 교회 수십만 성도들의 조가 같았다. 상해 대한민국 임지 정부 교통 위원이었던 윤원삼 장로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여러분, 이제는 성분이 다 되었습니다. 순교자이신 박관준 장노님의 예언이 그대로 맞아서 이제는 유언같이 되었습니다. 만일 금년 팔월에 장로님의 말씀과 같이 조선이 해방되면 이곳에 다같이 모여서 해방 기념 축하 예배를 드립시다.”
이 말을 들은 묘든 신앙 동지들은 눈물 속에서 머리를 끄덕이며 “할렐루야 아멘!” 하고 소리 높이 외쳤다.
“그리고 장로님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이사야 11장 10절에서 16절까지의 말씀을 장로님 무덤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번 봉독합시다.”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그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에브라임의 투기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는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유다를 투기하지 아니하며
유다는 에브라임을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이 서으로 블레셋 사람의
어깨에 날아 앉고
함께 동방 백성을 노략하며
에돔과 모압에 손을 대며
암몬 자손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리라
여호와께서 애굽 해고를 말리우시고
손을 유브라데 하수 위에 흔들어
뜨거운 바람을 일으켜서 그 하수를 쳐서
일곱 갈래로 나눠
신 신고 건너가게 하실 것이라
그의 남아 있는 백성을 위하여
앗수르에서부터
돌아오는 대로가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43 죄 없는 죄인들
일제는 삼천리 한반도 안의 모든 애국자들을 참으로 악랄하게 사냥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사상적인 최후 보루이며, 애국적인 방파제인 기독교 지도자들의 사상을 철저히 점검하기 시작했다. 일제는 조선 교회의 지도자 중에 자유주의 사상과 민족주의 사상을 소유한 사람을 우선 가려내었다. 또 그들의 적성 국가라고 규정을 내린 영미 색채가 짙은 자유주의 사상을 지닌 반일적인 인물과 일본정신인 황도주의 사상에 동화가 되지 않은 소위 항거 분자들을 색출해 내기에 혈안이었다. 또한 일제는 자기들의 특수한 민족 종교인 신도를 이민족인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강요하였다. 그들의 민족적 양심과 신앙 지조로 보아 그 같은 이교를 환영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위협과 탄압으로 신사 참배를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앙 양심을 떼어놓고서라도 민족 양심의 지조가 있는 애국 지사라면 어찌 적국인 일제의 건국주를 상징한 종이로 만든 우상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 천조여대신의 위패 앞에 경배를 할 수 있겠는가. 옛 성인의 말씀에 “대장부가 되려면 위무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가져야 가위 대장부의 자격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난날 아버지와 나와 안이숙 씨 등 3인 일행이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에서 체포되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된 뒤에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던 김두영 씨가 본국의 김선두 목사와 동행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지난번 우리 3인이 접촉 회담했던 히비끼 중장과 마쯔야마 대의사와 세끼야 대신 등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많은 것을 상의했다. 그
리하여 만약 일제가 제27회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강제로 결의시켜서 총회원들이 반대를 하다가 체포되면 검속된 총회원이 20명 정도만 나와도 그 총회의 결의를 불법 결의로 단정하고 체포된 20명은 한 달 안으로 모두 석방시키며, 일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일본 헌법에 위반이라고 들고일어나서 즉시 일본국회에서 미나미 조선 총독을 일본에 소환하여 경위를 질문하기로 크리스천 출신의 일본 정객들과 상약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사실을 총회원들에게 알리고 반대 결의를 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개성역에서 일제 경찰들에게 체포됨으로써 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 계획이 효력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회한도 탄식도 효과가 없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수다한 양심적인 지조파들은 이곳 평양 형무소에서 옥중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교역자들은 강단에서 신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라”는 설교를 수십 번, 수백 번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자기들이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더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할 상황에 이르러서는 한 사람, 두 사람 모두 도피하고 말았다. 시대의 예언자가 되어야 할 선지자들이 벙어리가 되었고. 약삭빠른 출세의 방편으로 성직을 이용한 사이비 지도자들이 속출했다.
한편 내세의 영원한 세계를 부르짖었던 자기들이 실제로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등의 수많은 의문과 자문자답이 당시 교역자들 내심에 일어났다. 이 같은 반성 끝에 양심적인 교역자들은 비록 옥중에는 못 들어갔을망정 외국이나 산중에서 도피 생활을 하거나 스스로 근신하기도 하였다.
또 이남지방에는 부산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최상림 목사 등이 신사 참배 강요에 불굴하고 최후까지 항거 투쟁을 하였다. 또 외국인 선교사 중에 해밀턴 선교사, 구레인 선교사, 권세열 선교사 등은 최후로 남은 10여 명의 신학생들에게 지하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인재 전도사는 경남에서 신의주에 있는 이기선 목사와 연락하여 신앙 투쟁을 전개하면서 우리 3인 일행이 일본 국회에 들어가서 항쟁한 상황을 전국 신앙 동지들에게 전달하여 그들의 신앙 격려에 힘을 쏟았다.
신의주 교계에서는 이기선 목사가 중심이 되어서 활동을 전개했다. 이기선 목사는 성경 주석가로서 주기철 목사 등 많은 교역자를 양성한 분이기도 하다. 그의 가르침을 받고 교회에 헌신하고 있는 목사들로는 김창인, 김정덕, 김진수 목사 등을 꼽을 수 있다.
1939년 농우회 사건으로 우재기 목사가 검거될 때 주기철 목사는 그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으나 일제 경찰은 밉게 보아 오던 주 목사를 동사건에 연좌시켜 불법 체포하는 동시에 송영길 목사, 평양 신현교회 이유택 목사, 또 나의 지난날 소학교 담임선생이었던 박학전 목사를 검거하여 안동, 청송, 군위 등의 경찰서에 유치시키고 심한 고문을 하였다. 그들은 폐인이 될 뻔할 정도로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정일영 목사, 권중하 전도사도 체포되어 의성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고, 권 전도사는 끝내 옥사했다.
이제 여기서 주기철 목사가 최후로 남긴 설교의 일부 요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제목은 “의에 살고 의에 죽자”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행하여야 할 것은 의가 있을 뿐입니다. 신민이 되고서는 충절의 의가 있어야 하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어야 하고, 크리스천이 되고서는 신앙의 정조가 있어야 합니다.
중국의 제갈공명은 무너지는 한나라를 붙잡고 오장원에서 순절을 했습니다. 백이와 숙제 두 사람은 은나라의 신민으로서 주나라에 충성을 할 수 없어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순절했으며, 우리나라의 정몽주는 고려에 충의를 다하기 위해 선죽교에서 피를 뿌렸으니 이것은 우리 선조들이 충의에 순절한 산 표본이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 풀무불에도 뛰어들어갔고,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속에 품고 사자 굴에도 들어갔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백제의 도미 부인은 개루왕의 협박과 부귀의 유혹도 물리치고 두 눈이 뽑힌 남편을 찾아 조각배를 타고 탈출하여 황주 마을에서 한평생 불구가 된 남편을 모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딸들이 정절의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 피눈물의 산 기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의 몸이 되어서 그에 대한 정절을 변할 수 있겠습니까? 주후 2백 년경, 칸타고의 벨베츄어는 이십대의 청춘으로 젖먹이 어린애와 아버지의 우는 소리를 뒤에 두고 형장에 나가서 사나운 소뿔에 찔려서 순절을 했습니다. 천고의 열녀 벨베츄어는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서 승리의 찬송을 부를 것입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의 대의를 깨뜨리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본신사에 절하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라났고, 주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 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을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하게 헛되게 살수 있겠습니까?
아, 내 주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의 내 예루살렘 평양아
영광이 네게서 떠났구나!
모란봉아, 통곡하여라.
대동강아, 천백 세에 홀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죽고 죽어 일백 번 다시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정절 변치 아니하겠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리도 초로인생 살면 며칠이나 더 살 것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살으십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 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살으십시다
이 같은 “의에 살고 의에 죽자”는 희세의 명설교는 온 교회당 안의 신도들을 눈물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주 목사의 눈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 같았고, 음성은 너무 비장해서 예배당이 온통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주 목사는 “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하는 찬송을 소리 높여 불렀다.
찬송을 부른 뒤 주 목사는 큰 목소리로 기도하였다.
“오 주님, 내 영혼을 주님에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 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시옵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아멘.”(이 설교는 당시 산정현 교회 청년회장이었던 유기선 의사가 듣고 전한 것이다.
<부록 세기의 증언자들>
○ 일본 언론인들 회견기
일본은 한국의 은인국
또 어떤 기독교 교단의 일본인 대표자 목사는 “한국은 확실히 이스라엘 북방계 후예라는 심증과 고증이 더욱 내 마음속에 굳어져 갑니다. 앞으로 아시아에서 가장 복 받을 나라는 분명히 한국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했다.
또 와세다 대학 총장 서리였던 아베 씨는 한일 문화 교류 차 갔던 우리 한국 대학생 사절단 일행을 맞아 환영 오찬회 석상에서 이렇게 역설했다.
“한국은 확실히 일본에 대륙 문화를 이식시켜 준 국가로서 문화적으로 우리 일본의 은인 나라입니다.”
또 일본이 낳은 세계적 종교가였던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사과문에서 “일본의 관동지방은 북한의 후손들이며 관서 지방은 남한의 후손들로서, 그들은 수십 퍼센트의 비율을 차지하고 일본서 살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죄를 용서하듯이 일본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말했다.
또 학계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고증했다.
“나라의 문화 무사시노(동경)의 개척, 구주 지방과 근기 지방의 유적으로 보아 한국인들이 일본 문화에 끼친 공헌은 무척 큽니다. 왕인 박사를 위시해서 임진, 정유 양전쟁에서 오륙만 명의 남녀 한국인들이 잡혀 와 모두 귀화하여 일본 문화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한국 귀화인들의 공헌이 무수하게 남아 있습니다.”
또 어느 일본의 정치인은 기탄 없이 말해 보자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우리 일본인들이 한국인들 앞에서 방만하거나 우월감을 가질 하등의 역사적 근거가 없습니다. 오히려 참회하는 자세에서 오직 겸허한 마음으로 한국을 새로운 맹우로 대해야 합니다. 가장 믿음직한 친구로서 동양의 평화와 세계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지난날의 원한을 씻어 버리고 힘찬 새 출발을 해야 하겠습니다.”
또 크리스천인 어떤 일본인 사장은 신앙 동지로서 나에게 간곡히 말했다.
“선생님은 한일 간에 있어서 남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은수를 넘어서 선친께서 군국주의 일본을 각성시키시다 희생되셨으니 그 유지를 선생님께서 완성시켜야 되겠습니다.”
일본에서 이같이 양심 있는 민주 신일본의 새 지도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시대 착오적인 일부 몰이해한 일본 국민도 없지 않으나 참된 이웃으로 형제적인 우의를 다짐하는 신일본의 국민들이 날로 많아진다는 것은 아시아의 평화와 선린 정신에 비추어 새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백범 김구 주석 회견기>
혁명은 상투 잡기
“순교자와 순국자의 피는 해가 가고 달이 갈수록 더욱 광채를 발하는 법이지요.”
그리고 나의 아버지의 사진을 하나 보관해 두어야겠다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을 그 자리에서 내드린 일이 있다. 그 뒤 내가 몇 차례 그를 방문했을 때 백범 선생은 나에게 친히 휘호를 두 장이나 써 주면서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그 중의 첫 장은“ 必愼獨(홀로 있을 때 근신하라)”라는 크고 굵은 문자였다. 그리고 둘째 장은 다음과 같은 뜻깊은 절필의 휘호였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大韓民國 三十年 七月 日
臨時政府主席 辨公室
七十三歲 白凡
書贈
朴永昌 雅士
(눈을 밟으며 벌판을 걸어갈 때에 모름지기 어지럽게 함부로 걸어가지를 말아라. 오늘에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은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 터이니).
나의 이름 아래 아사(雅士:고상하고 깨끗한 선비라는 뜻)라고까지 써 넣어 준 데 대해서는 더욱 황송했다.
백범 김구 주석은 자기가 중국으로 건너가기 전 만주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대륙 망명 중이던 어느 날 고구려 시대의 비석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그 비석에는 당시 고구려의 대지도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지도 내용은 흑룡강 일대와 요동 반도 일대까지 포함되어 그 영토의 광활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백범 선생은 이 비석을 어루만지면서 너무 기뻐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고 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중국 대륙까지 그 영향력을 강력하게 미쳤고 우리나라의 국위가 이같이 대륙에까지 떨쳤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당시 나라 잃은 설움에 젖은 망향의 이역에서 큰 용기와 희망이 솟아나 조국을 하루속히 광복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당시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감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혁명가이며 절세의 애국자인 백범 선생에게 나는 늘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던 한 가지 궁금했던 질문을 직접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가졌었다.
“선생님께서는 혁명이라는 뜻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또 어떻게 해석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이 뜻밖의 질문에 백범 선생은 눈을 감고 빙그레 웃으며 명상에 잠겼다가 한참만에 눈을 다시 뜨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
“혁명이라는 것은 내 상투가 먼저 상대방에게 잡히느냐, 아니면 상대방의 상투를 내가 먼저 잡느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오.”
과연 혁명이란 주도권을 누가 먼저 잡느냐 하는 목숨을 건 것이기에 참으로 이 대답은 명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왜 백범 선생은 그 뒤 자기의 상투를 먼저 잡혔는지 지금 생각해도 궁금한 숙제이다. 그것은 확실히 광복된 조국이기에 또 애국적인 동지애와 신의가 앞섰기에 상대방의 상투를 먼저 잡지 않기로 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지금도 그 희대의 명언을 홀로 풀이해 보면서, 그는 광복 귀국한 뒤에 국토 양단의 비극을 목도하고 선통일 후정권이라는 대아가 앞서서 드디어 소아를 희생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 박관준 장로 순교 50주년 기념 행사>
취지문(김준곤 목사)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라는 말과 같이 한국 교회 오늘의 성장에는 고귀한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고 박관준 장로님은 의사였는데, 일제가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어느 날 밤, 꿈을 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에 비상 사태가 발생해서 비상 소집령을 내렸다 하시면서 이름들을 호명하시는데, “주기철, 손양원, 박관준” 하고 부르시길래 박 장로님이 “예” 하고 벌떡 일어나 보니 꿈이었다고 합니다.
박 장로님은 이미 목숨 걸고 일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심 한터라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여사를 대동하고 도일하여 당시 동경 유학 중이던 그의 이대 독자 박영창 목사님과 함께 기적적으로 국회 방청권을 입수, 1939년 3월 24일 오후 1시48분 히라누마 총리가 출석하고 고야마 국회의장이 개회를 선언하는 순간 이층 방청석에서 큰소리로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일본말로)이다”라고 소리치면서 항의서를 하층 장내에 투척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회의장에 있던 의원 500여 명과 방청객 1,000여 명이 놀라서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합니다.
<결의안(존 페라로 의장, 캘리포니아시 의회)>
박관준 장로는 1875년 4월 13일 한국의 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불교의 전통을 가진 가문에서 자라나서 청년 시절에 한학을 공부하였고, 한편 의학 부문에 열정을 지니고 인간 생명의 치유와 인류 구원에 헌신하려는 의도에서 의사가 되었다.
30세가 되던 해 박 장로는 회심을 체험하였는데, 이는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과 흡사하였다. 세상에 나가 민족을 구원하고 기독교에 헌신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의한 것이다.
식민 지배의 절정기에 도달한 일본 정부는 온 한국민을 그들의 신사에 참배하게 하고, 불응하면 가혹한 형벌과 야만적 박해와 사형을 부과했다. 그러나 일부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했고, 박 장로 역시 일왕을 존경하지 않는 듯한 행동을 보이는 등 불의에 대하여 항거를 계속했다.
그 일환으로 박 장로는 안이숙 씨와 일본에 잠입하였고, 동경 신학교 학생이던 외아들 박영창씨와 합세하여 일본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뜻으로 일본 제국 의회 석상에 항의문을 던지기로 계획하였다. 1939년 3월 24일, 제74회 일본 제국 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박 장로는 의회장 방청석 발코니에서 폭탄적 경고와 항의담은 큰 봉투를 일본제국 의회 고야마 의장을 향해 던졌다. 세 사람은 현장에서 즉각 체포되고 얼마 후 풀려났으나 박 장로와 안이숙 씨는 일제에 항거를 계속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이후 장로는 종신 선고를 받고 6년 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3월 13일에 평양 형무소에서 70세의 나이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말과 한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순교하였다.
|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
| 5 | 박관준 장로의 '여호와의 사명이다' | 선지자 | 2015.12.30 |
| 4 | 암흑시대의 선지자 박관준 장로 | 선지자 | 2015.12.30 |
| 3 |
일본 국회의사당에 신사참배 반대성명서 투척
| 선지자 | 2015.12.30 |
| 2 |
순교자 박관준 장로님
| 선지자 | 2015.12.30 |
| » | 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대기- 박영창 목사 | 선지자 | 2015.12.30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