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30 18:21
암흑시대의 선지자 박관준 장로
"사람은 한번 죽을 때가 있나니, 어찌 죽을 때 죽지 않으리.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으면, 길이 죽어도 죽지 않으리.
때가 와 죽을 때 죽지 않으면, 살아서 즐김이 죽음만 같지 못하리라.
예수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 위해 죽으리라."
人生有一死何不死於死
君獨死於死千秋死不死
時來死不死生樂不如死
耶蘇爲我死我爲耶蘇死
이 한시(漢詩)는 1938년 장로회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직후 예비 검속에서 풀려난 박관준 장로가 신사참배 거부항쟁의 신앙동지인 이인재 전도사에게 써주었다고 하는 유시(遺詩)다. 박관준 장로는 이때 이미 순교를 결심하고 신사참배 거부항쟁에 투신하고 있었다.
박관준 장로는 1875년 4월 13일 평북영변에서 부농인 박치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에 형들이 있었으나 모두 어려서죽어, 그는 집안의 대를 이을 독자로서 집안 사람들의 사랑을한 몸에 받고 한학을 공부하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16세가 되던 해에 자신보다 2살 위인 이관선이라는 처녀와 결혼하여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양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인생의 허무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여 가산을 탕진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병까지 얻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으나 부인의 헌신적인 간호로 회복되었다.
그래도 그는 생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유불선의 경서와 동학서적 등을 탐독하며 방황을 계속하였다. 한말에 한때 친지의 추천으로 강계 산림별장의 관직을 맡고 서양 선교사로부터 전도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외도에 빠져있던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30세가 되던 1905년 가을 어느 날, 그 날도 유불선 동학서적들을 뒤적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 ""절벽유위 혈벽립"(絶壁唯危 血液立: 절벽은 위태로울 뿐이니 피의 벽에 서라)"는 이상한 영음(靈音)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상하기도 하고 그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나, 그는 이것이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영계의 계시로 해석하여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곧 바로 정봉익, 강응식같은 친구들에게 전도도 하고 성경을 공부하여 1907년 봄 영변감리교회에서 학습을 받고, 그 해 가을 세례 받았다.
그는 신앙을 갖게 되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고, 육신의 병과 영혼을 병을 함께 고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1912년부터 3년 간 서울에 올라와 서양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1915년경 개업의 면허증 얻어내고, 고향인 평북영변에 돌아와 제중의원 개설하였다.
당시에는 의원이 귀하던 때라 의료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이를 통한 전도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그러다 1922년 무렵 약을 잘못 써 한 청년을 죽일 뻔한 일이 있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 할 마음으로 3년 간 무의촌 무료진료를 결심하고 실행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평북 구성읍에 병원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가 자주 병원을 옮긴 것은 그 지역의 연약한 교회를 돕고 새로운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1934년 봄에 다시 개천읍으로 이사하고 이곳에 십자의원을 개설하였다.
그가 경영하는 병원입구에는 항상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구절을 쓴 큰 족자를 걸어두고, 진찰실 벽에도 자신이 쓴 "나는 육신의 병자보다 영혼의 병자취급을 더 갈망한다."라는 족자를 걸어두었다. 그 만큼 그는 환자의 육체적 질병뿐만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에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도하며 진료에 임했던 것이다. 그는 여기서 군우리 개천읍교회 영수로 봉직하다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런데 그 무렵 일제가 기독교계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교계에 큰 문제가 되고있었다. 박관준 장로는 60세가 되던 해인 1935년 봄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환상 가운데 "이제부터 십자가의 정병을 뽑는다.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는 음성을 들었다. 그는 곧 "내가 피를 흘리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신사참배 거부의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일선에 나섰다. 그는 우선 신사문제의 중심지인 평안남도 도청을 찾아가 학무국장에게 신사참배 문제를 재고해 주도록 요청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우가키 총독에게도 1935년 10월 "만약에 총독 각하의 시정이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나선다면 외람 되오나 각하의 나라 대일본 제국은 필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그 후로 미나미 총독이 부임하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이 교회에까지 미치자 그는 1938년 2월 직접 미나미 총독을 찾아가 신사참배강요 정책을 항의하면서 이를 철회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하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행동 때문에 1938년 3월 평양경찰서에 20일간 유치 당해 취조 받고, 광신자로 낙인이 찍혀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나미 총독에게 전후 10여 차례에 걸쳐 항의서와 경고문을 보냈다. 이와 함께 그는 1938년 9월 장로회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 계획도 세웠다. 그래서 그가 외칠 다음과 같은 신사참배 반대 구호까지 만들어 두고 총회 날을 기다렸다.
"신사참배는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 정부는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주고, 양심에 없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라. 우리 총회는 하나님의 성회다. 바알 신에게 절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이 총회가 하는 일을 지켜보고 계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일제 경찰이 장로회 총회를 앞두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들을 대거 예비 검속 함으로써 그도 평양 선교리 경찰서에 20일 간 유치 취조를 받게 되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는 예비 검속에서 풀려난 1938년 10월부터 생업인 의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전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에 투신하여 보다 효과적인 투쟁 방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총독부에 아무리 경고하여도 먹혀 들어가지 않자 일본 본토에 건너가 경고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기도 중에 같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 선생을 대동하고 1939년 2월 일본에 건너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 장로의 아들 박영창과 함께 일본 정계요인들을 찾아가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일본의멸망을 경고하였다.
이들의 내방을 받았던 전 조선 총독 우가키는 1939년 2월 28일자 그의 일기에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어제 평양에 사는 예수교 신자 박관준 일족 3명이 내방하여 관헌의 압박 상황을 호소하였다. 사실이라면 이들 신자에게는 불행한 일이요, 또한 성대(聖代)의 불상사이다. 미나미(南次郞)씨가 공을 세우기에 급급하다는 평을 여러 차례 들었다. 그 일단이 드러난 것인가 ?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박관준 장로 일행은 40여일 간의 이러한 유세도 별 효과가 없는 것을 알게되자 보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일본을 경고하고 시위할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때 종교단체의 국가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 단체법이 상정 된 제74회 일본 제국회의가 개회중이라 여기에 들어가 경고문을 투하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경고문을 준비하고 방청권을 얻어 3월 23일 사전답사를 한 다음 24일 일본 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들어가 계획대로 박 장로가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하고 외치며 두루마리로 된 경고문과 건의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하였다. 이들 경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일본 제국의 이 전란 시에 가장 급선무의 국정은 국교를 개정 창정 하는 것이다. 신도(神道)를 기독교로 개종할 것.
2. 명치천황, 대정천황은 하나님께 불경치는 않았으나 소화천황은 여호와 하나님께 불경이다. 신사참배 강요 등 악법 실시의 강요와 양심적인 교역자의 투옥 등을 철폐할 것.
3. 일본제국은 참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율법을 준행 하면 복을 받을 것이요, 도리어 참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알지도 못하는 우상을 숭배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준행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니, 이 두 가지 중에서 한 가지를 자취할 것."
그리고 이어 어느 종교가 참 종교인지 알기 위해 장작더미 위에 신도 불교 등 각종 교 대표자와 기독교 대표로서 박 장로 자신을 올려놓고 불을 질러 시험하자는 제안도 하였다.
이들은 즉시 '제국의사당소요'죄로 체포되어 40여일 간 일본 경시청의 취조를 받고 본국으로 강제송환 되었다. 박장로는 경시청에서 취조를 받을 때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만약 나의 생존 중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자존의 대에 이르기까지라도 목적 관철을 이루기 위하여 이 같은 행동을 계속 감행하겠다"고 호언하였다.
박장로는 본국으로 송환되고 나서도 요시찰 인물이 되어 감시를 받았으나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하다가 구속된 동지들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신의주 경찰서와 평북지사를 찾아가 항의하고 총독에게도 경고문을 보내, 그 해 가을 도당국의 지시에 의해 영변경찰서에 다시 검속 되었다.
그는 얼마후 신의주경찰서로 이감되고 다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독방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극한투쟁을 하는 가운데서 자주 기도 중에 영음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예심법정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일제에게 멸망을 담대히 경고하고 증거 하였다.
그는 해방이 되기 이미 1년 전에 1945년 8월에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주 옥중에서 오랫동안 금식기도를 하였는데 최후의 승리를 내다 본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1945년 초부터 다시 금식기도를 시작하였다.
예정된 금식기도를 마치던 날 그는 빈사상태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평양기독교병원으로 옮겨졌다. 박장로는 그곳에서 가료를 받으며 찾아오는 친지들에게 옥중체험과 성경말씀을 증거 하였다.
그러다가 입원한지 5일 만인 1945년 3월 13일 오전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절로 16절의 말씀과 같이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사수하시다가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하는 유언을 남기고 70세를 일기로 평화롭게 소천하였다.
장례는 이튿날 오정모집사의 집례로 조촐하게 치러져 평양 장로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같이 옥고를 치른 서정환전도사는 박장로에 대하여 해방 후에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있다.
"박장로님이 생각납니다. 그는 에스겔 3장 18절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어요.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요.' 그는 자기를 일본의 파수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일본의 우상숭배를 경책 하고 다니며 여러 번 일본경관에게 잡혀서 매도 맞다가 드디어 내가 있던 신의주형무소로 들어 왔습니다. 그는 열심 있는 신앙가였습니다. 나는 그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일본사람들에게 몹시 매를 맞았는데 좀 더 때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달라고요.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를 원했습니다. 경관들은 어쩔줄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 같은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결국 그들은 그의 소원을 듣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후부터 그들은 다시 그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는 섭섭해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순교적 신앙과 용기는 하나님의 심판과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신사참배 거부항쟁을 하던 동지들에게도 무한한 희망을 주고 격려가 되었으며 불굴의 신앙투쟁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글: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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